2017-11-03
북한 김일성은 조선 독립운동을 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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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일성은 조선 독립운동을 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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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이 조선독립에는 뜻이 없고, 중국이나 소련에서 살고싶어했다는 증언들
[김일성의 정체 (3)] 우리말보다 중국어가 더 익숙한 이방인
전설적 항일 영웅 김일성(金日成) 장군의 이야기는 북한 김일성(김성주, 1912~1994)이 코흘리개 시절부터 떠돌았다. 1919년 3.1운동 직전 2월에 김성주의 외조부 강돈욱이 어린 외손자 김성주를 옆에 앉혀두고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는 사람도 있고, 1923~1925년간 김성주가 잠간 만주에서 돌아와 외조부가 가르치던 창덕학교를 다니던 시절 급우가 김성주와 함께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들었다는 증언도 있다.
이것이 해방 후 소련군 앞잡이가 되어 평양에 온 듣보잡 김성주가 유명한 김일성 장군을 사칭할 때 사람들은 단박에 가짜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이다. 그가 가짜 김일성이라는 소문은 남한에까지 널리 퍼져 한동안 그렇게 알려져 있었는데, 월남민 1세대들이 세상을 떠나거나 은퇴할 무렵인 1980년대 말쯤부터 소위 소장학자들이 가짜를 진짜로 둔갑시키는데 오랫동안 공을 들인 결과 지금은 남한에서조차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는 세상이 되었다.
진짜 김일성 장군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한다든가, 도술을 부린다든가 하는 믿기 힘든 소문도 있었지만, 일본 육사를 나왔다거나 백마를 타고 다닌다든가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일본 육사 나오고 백마탄 김일성 장군 전설의 주인공이 바로 김광서 (金光瑞, 1888 ~ 1942) 장군이다. 그의 어릴 때 본명은 김현충(金顯忠)이나 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 김광서(金光瑞), 김경천(金擎天) 등 여러 이름을 썼으며, 김일성(金日成)이란 이름도 썼다.
그저께 일본 육사 23기 졸업생 명부에서 기병과(騎兵科) 졸업생으로 조선인 김현충(金顯忠)이 나오는 것이 확인되었다는 산케이 신문 및 국내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초대 김일성’ 김현충의 일본 육사 기록 발견 - “初代”金日成は旧陸軍士官学校出身
그가 백마탄 김일성 장군이 맞다는 중요한 증거가 새로 나온 셈이다.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교수가 1974년에 김광서 장군이 일본 육사출신으로 백마를 탄 전설의 김일성 장군이라는 주장을 처음 내놓은 후 근거가 있다 없다 논란이 많았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는 증거가 속속 나오고 있는 것이다.
金擎天氏(日成氏의 初名) : 『고헌실기약초(固軒實記畧抄)』
전설의 김일성 장군이 김경천 장군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근거자료이다. 김광서 장군이 김일성이란 이름으로 지은 시까지 나와 있다.
김경천(金擎天, 1888 ~ 1942) 장군이 진짜 김일성이라는 증언과 기록 : 본명 김광서 (金光瑞)
해방 당시 평양에 온 소련군 대위(Kapitan, 꺼삐딴) 김성주는 내세울만한 학력도 경력도 아무 것이 없는 듣보잡 무명인사에 불과하여 지도자로 나서기가 어려웠다. 궁리 끝에 이름은 유명하나 국내에 돌아오지 않고 있는 김일성 장군을 사칭하는 방안을 찾은 것이다. 그가 만주 빨치산 시절 한자로 金日成이란 이름도 썼던 것은 사실이나 어릴 때부터 중국에 살아 조선말은 잘 못하고 중국어에 능했던 김성주는 이 이름을 우리말 발음 김일성 아닌 중국어 발음 진지첸으로 읽었다. 1940년 10월 소련으로 도주하여 소련군에 있을 때도 이름은 김일성 아닌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또는 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으로 적었다. 소련군 문서에는 김성주의 이름이 1945년 10월 1일까지는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으로 나오고, 10월 2일부터 김일성(Ким Ир Сен, Kim Ir-sen)으로 바꾸어 적기 시작했다. 이 날이 그가 공식적으로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한 날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 꺼삐딴 진(킴)의 일생은 전광용 소설에 나오는 꺼삐딴 리의 삶보다 몇 백만배 더 증폭된 것으로 훨씬 더 드라마틱하다.]
해방전 1933년께부터 중국공산당 휘하 빨치산 조직에 투신한 것으로 보이는 김성주는 어릴때부터 만주에 살아 조선말도 잘 하지 못했고, 중국어가 모국어였다. 조선말도 잘 못하고, 조선 역사에 대해 아무 것도 배운 적도 없는 그런 인간이 무슨 조선독립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있어 조선독립운동을 했겠는가? 만주의 시류에 휩쓸려 젊은 혈기에 무장 투쟁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도 항일투쟁인지 마적질인지 분간하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보급이 없는 부대는 민간에 대한 약탈로 생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상식이고, 지금 북한 인민군의 처지도 비슷하다. 그러다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1940년 10월 소련으로 도주하여 해방될 때까지 소련군에서 소련의 개로 사육되었을 뿐이다. 그가 했다는 투쟁은 중국을 위한 것이거나 소련에 봉사하는 것일 뿐이다. 그 자가 조선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가졌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고,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조차 희미했다는 증거만 많다. 소련에서 그의 유일한 희망은 조선독립이 아니라 소련군 상관에 잘 보여 소련군에서 출세하는 것이었다. 당시 상황도 그러하고, 또한 이를 뒷받침하는 증언도 있다.
그는 소련군에서 동료 빨치산들의 동태를 감시하여 소련군 상관에 보고하는 KGB 프락치가 되어 상관의 신임을 얻은 덕택에 그들의 추천으로 운좋게 스탈린에 의해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만주의 조선족이나 소련의 고려인이 되었을 사람이다.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북한 김일성은 해방 당시 조선말도 더듬거리며 잘 못했다는 증언.
[김일성의 정체 (3)] 우리말보다 중국어가 더 익숙한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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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호, 김일성 평전 (상) (지원출판사 2017.01.25) p.224
해방되면 안도현장이 꿈이던 김일성 자유아시아 방송 (RFA) 2017-04-14
항일연군시절 김일성의 수하였던 여영준(呂英俊)은 당시 김일성이 해방이 되면 중국 공산당이 안도현장(安圖縣長) 정도를 시켜주길 원했다고 증언하였다. 이런 말은 결국 당시 김일성은 혈통만 조선인일 뿐 사실상 중국에 동화된 공산당원으로 일본이 패망해도 만주에서 행세하기를 원한 중국인이었고, 그의 항일투쟁이란 것도 중국을 위한 것이었을 뿐 조선독립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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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시절 김성주의 부하였던 이을설(李乙雪, 1921- 2015.11.07)은 그 덕에 북한에서 엄청난 권세를 누리다 작년에 사망하였는데, 1994년 김일성이 죽고 난 후부터 그가 하고 다닌 말 중에는 김성주가 해방전 소련군에 있을 때는 소련에 살기를 원하고 조선으로 돌아올 마음은 전혀 없었다는 것도 있다.
해방 직전 김일성은 소련에서 살고 싶어했다는 김씨 일가의 호위총사 리을설의 증언
더욱 놀라운 것은 해방 후 김일성이 조국으로 돌아오려는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는 리을설의 이야기였습니다.
김일성은 낙후한 북한에 돌아오기보다 그나마 자본주의를 거친 소련에 남아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중국 연안파들을 견제하고 북한을 세력권 안에 넣으려는 소련군의 요구로 조국이 해방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귀국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리을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해방 후 김일성이 소련에 남아 있었다면 지금 우리 조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많이 상상해 보았습니다. 김일성이 귀국하지 않고 소련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조국이 분단되는 현실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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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문제 전문가인 소련군 예비역 대령 Gavril Ivanovich Korotkov (1925~ ) 박사는 김일성과 관련한 소련 문서들을 많이 찾아본 사람인데, 그도 김일성이 해방 직전 소련군에 남아 출세하기를 원한 것으로 말한다. 운좋게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지 않았더라면.
金日成-한국전 관련 舊蘇비밀문건 요지 - Gavril Korotkov
스탈린과 김일성
가브릴 코로트코프 저 |어건주 역 |동아일보사 |1993
Colonel Gavril Ivanovich Korotkov
[권1 p.175~176]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소련군들은 1945년 9월 동유럽과 극동의 넓은 지역을 실제로 관할했다. 진지첸이 자신의 생애 중 15년을 투자했던 ‘빨치산 전(戰)’은 지금 상태에서는 스탈린에게도 모택동에게도 필요치 않았다. 소련 극동전선으로 된 제88국제여단은 그 기본적 기능을 잃어버렸다. 막 군사적기 훈장을 받은 육군대위 앞에 기다리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붉은 군대의 집단 동원 해제가 시작되면서 매우 많은 장교들이 군사업무를 계속하느냐 ‘시민으로’ 돌아가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육군대위 진치첸은 실망했다. 제88여단은 재편성돼야 했다. 그는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승진을 생각할 수 없었지만 자신의 채소밭에서 야채가꾸기를 계속하거나 보잘것없는 공무원이 되고싶지 않았다. 물론 당의 직원으로 출세할 수 있었으나 그는 이것이 ‘상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다시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9월 어느 날 “의논할 일이 있으니 하바로프스크로 곧 올 것”이라는 내용의 명령을 받았다. 진치첸은 그 곳으로 떠나서 며칠 수에 김일성이 되어 돌아왔다. 기적같은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왜?’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대답을 얻지 못했다. 대답은 스탈린만이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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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주는 만주 빨치산 시절 한때 한자로 金日成이라 적은 이름을 쓰기는 했지만, 그가 국내에 널리 이름이 알려질만한 일을 한 것은 전혀 없다. 그 자는 해방 당시 어디서 뭐 하던 자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던 무명인사에 지나지 않았으며, 전설적 항일 영웅 김일성(金日成) 장군이 될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심지어 보천보 사건도 자기가 일으킨 것이라 주장하지만, 그 사건의 주인공 김일성(金日成)은 1937년 11월 13일 사살되었다.
보천보 김일성 사살 기사 (매일신보, 경성일보, 동아일보 1937년 11월 18일)
스탈린의 김일성 발탁 내막과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을 사칭한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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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김일성은 소련의 개 노릇을 한 덕에 이렇다할 공적도 없이 소련군 무력과 정치공작의 전폭적 지원으로 북한 지도자 자리까지 꿰어찼지만, 진짜 김일성 장군은 소련의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스탈린의 연해주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가족들이 중앙아시아로 끌려갔으며, 본인도 소련의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윤선자, 1920년대 초반 김경천의 항일무장투쟁 :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52집 2016
윤선자, 1920년대 초반 김경천의 항일무장투쟁 / 초록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므로 러시아의 현실을 무시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동안 함께 하였던 러시아 적군의 한국독립군 해산 명령은 그에게 절망이었다. 그것은 망국민으로서 너무나도 아픈 현실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계속하여 독립운동의 길과 방법을 모색하였는데, 소련 당국은 그러한 그의 행동을 간첩혐의로 간주하여 수감하였고, 그는 감옥 안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는 가족과 출세를 뒤로 하고 조국 독립의 험난한 길은 선택하였다. 독립운동을 위한 그의 선택과 발걸음은 가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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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과 빨치산들의 항일 투쟁의 진실은?
金日成 중국에서 약탈, 도둑질 일삼아 : 러시아의 정치 주간지 '노보에.브레미야'(新時代)
빨치산의 아편 재배와 거래
빨치산들이 여느 마적단보다 나은 점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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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함께한 김광서(김일성) 장군 사진.
일찌기 알려진대로 그가 일본 육사 기병과 출신이라는 일본 육사 졸업생 명부가 발견되었다.
백마탄 김일성(김광서) 장군 이미지를 도용하여 세운 평양의 김성주(가짜 김일성) 부자 기마상
北 김일성ㆍ김정일 기마상 참배하는 평양시민들 연합뉴스 2013.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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