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가짜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일성 가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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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김성주설(金日成 金成柱說) 또는 가짜 김일성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조선) 김일성 주석의 본명은 김성주(金成柱[1][2])이며 실제 독립운동가 김일성과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주장, 즉 마적단 두목이었다가 소련군의 장교가 된 김성주가 김일성의 공헌을 가로채 김일성 행세를 했을 뿐 북조선의 우두머리는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김일성은 소련군에 가담했으며 북조선의 김일성은 가짜 독립운동가라는 미 군정의 극비문서가 존재하여 한 때 큰 파장을 주었지만, 훗날 해당 문서의 초기 내용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수정되었기 때문에 확실한 근거로 작용하지는 못했다.[3] 때문에 해당 학설은 정론인 아닌 설에 머물게 된 것이다.[4]
목차 [숨기기]
1개요
1.1김일성 김성주설과 남북 관계
1.2김성주의 개명(改名)
1.3김일성 장군의 설화이용설
2북한 김일성은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훔친 가짜
2.1김일성 가짜설이 나오게 된 정확한 배경
2.2북한 김일성은 전설의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여 그 명성을 훔쳤다.
2.3김일성을 수령으로 만든 소련 군정 당사자들의 가짜 증언
2.4북한 김일성이 실제 썼던 이름은?
2.5전설의 김일성 장군은 누구인가?
2.6김일성 진짜설이 득세하게 된 배경
3북한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의 전공을 훔친 가짜
3.1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전사
3.2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 주역이 아니라는 증언들
3.3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 주역이 맞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
3.4동북항일연군 1로군의 전기 및 후기 편제 지휘관들
3.5김일성 회고록 속의 가짜 증거
4제2방면군장 김일성에 대한 논란
5중국 조선족들의 북한 김일성이 진짜라는 주장에 대해
6참고 자료
7각주
8외부 링크
개요[편집]
백마를 타고 만주 벌판을 주름잡으며 일본군을 무찌르던 김경천(김일성)이라는 전설적 명장이 있었는데, 북조선의 김일성은 전설적 명장 김경천 장군의 업적과 이름을 가로채 마치 진짜 김일성 장군인 양 행세하였다는 설로 출발한다.
김일성 김성주설과 남북 관계[편집]
김일성 김성주설은 오랫동안 대한민국(남한)에서 반공교육을 통해서 거의 확실한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여러 정황과 증거로 봤을 때 김성주와 김일성은 동일인물로 추정된다. 하지만 냉전시대 남북간의 체제 경쟁에서 김일성의 항일 무장 투쟁 경력을 부담스러워한 우익세력이 김일성의 경력을 깎아내리려고 유포시켰다는 주장이 있었고 이는 1998년 남한 최초로 이루어진 여·야 정권교체 후부터 더욱 활발히 이루어졌다. 해방 정국 당시의 역사 기록을 보면, 남한 정부 수립 이전에도 이미 다수가 가짜 김일성설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쉽게 증명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북조선의 김성주가 김일성이란 이름으로 활동하였다는 점은 남북 학자들은 다수라도,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 수립 이후 만주 지역 조사와 타도제국주의동맹에서 활동했던 김일성의 동료들의 증언 등, 여러가지 평가를 미루어 볼 때, 김일성이 가짜 독립운동가라는 주장은 사실상 근거가 없는, 낭설이라고 평가하는 의견도 있다.[5]
김성주의 개명(改名)[편집]
김성주가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 때가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김일성(김성주)의 회고록으로 알려진 《시대와 더불어》 2권 106쪽부터 자세히 나타나 있다.
1930년 초 김성주가 활동하던 지역에서 김혁이란 사람이 노래를 지어 보급하곤 했는데, 그 노래 가운데 하나가 “조선의 별”이란 곡이었다. 여기서 조선의 별이란 다름 아닌 자신들을 지칭하는 뜻이기에 엄하게 꾸짖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혁을 비롯한 동지들은 자신을 조선의 별이란 의미에서 김성주를 “한별이”라고 불렀고, 나중에 “一星”으로 바뀌고, 다시 “日成”으로 고쳐 부르자고 주변 공산주의자들이 결의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공식 출판물에 김일성으로 소개된 첫 기록은 1931년 봄 고유수에서 군벌에게 체포되어 20일가량 옥살이를 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여기에서 김성주가 김일성으로 불리게 된 내력은 김성주의 결정이 아니라, 그의 뜻과 무관하게, 주위에서 부르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일성 장군의 설화이용설[편집]
일제시대 한반도 북부지역에서는 "김일성 장군님께서 나타나 일본놈들을 무찔러주고 해방을 맞이하게 해 줄 것이다."라는 민간설화가 떠돌았다고 전해진다. 당시 그냥 마적단 두목에 불과했던 김성주는 이를 이용하여 자신이 스스로 '김일성'이라 칭하고 자신의 부하들과 자신이 마적으로 활동하던 지역의 주민들, 공산당원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지시했다. 후일 그는 '김일성'이라는 그 이름을 갖고 소련적군에 입대하여 일본군과 싸우게 된다고 한다.
북한 김일성은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훔친 가짜[편집]
김일성 가짜설이 나오게 된 정확한 배경[편집]
북한 김일성의 진위에 대해 논하려면 우선 가짜설의 정의부터 명확히 해야만 시비를 정확히 가릴 수 있다. 그가 항일투쟁을 한 것은 사실이니 가짜가 아니라거나, 일제시대에 김일성 이름을 쓴 적이 있으니 가짜가 아니라는 주장은 문제를 교묘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그가 가짜라는 주장이 처음 나온 것은 1945년 10월 14일 평양의 대중앞에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나섰을 때이다. 청중들 태반은 김일성보다 연상이었을텐데 어디서 무얼 하던 누구인지 모르는 33세의 젊은 사람이 자신들이 어릴 때부터 익히 명성을 들어왔던 김일성 장군이라고 하니 나이가 맞지 않는 것이 자명하므로 가짜라 한 것이다.[6] 청중들은 그가 무슨 항일투쟁을 했는지, 이름은 무얼 썼는지 알지 못했으므로 이런 것들은 문제가 아니고, 그가 청중들이 일찍부터 이름을 들어 알고 있던 그 김일성 장군이 맞느냐가 문제의 본질이다.
김일성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1937년의 보천보 사건 때부터라고 주장하면서 북한 김일성이 그 사건의 당사자가 맞으므로 진짜가 맞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상당수 있다. 그러나 해방 당시 보천보 사건 자체나, 그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이 1937년 11월 전사했다고 다수 언론에 보도된 것을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7] 1935년 2월에 일어난 이홍광(李紅光, 1910∼1935)의 동흥습격사건은 보천보 사건보다 일본측 피해도 더 컸고, 파장도 컸지만 오늘날 이 사건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고, 이홍광이 국내에서 항일 영웅으로 부각된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천보 사건과 그 주역 김일성에 대해서도 실제로는 마찬가지 였다. 북한 김일성이 집권 후 자신의 항일공적으로 보천보 사건을 대대적으로 부풀려 선전한 때문에 그 사건이 유명해졌을 뿐이다.
반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의 이름은 1919년 3.1운동 무렵에도 퍼져 있었다는 증언이 있고, 적어도 1920년대 초에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8] 평양의 집회에 모였던 사람들이 눈앞의 김성주가 보천보 사건의 주역 김일성이 아니라고 가짜라 한 것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익히 이름을 들어왔던 반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으로 보기에는 나이가 맞지 않았기 때문에 가짜라고 한 것이다. 나아가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전사했으므로 북한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의 실제 당사자도 아니면서 남의 공적을 자신이 한 일로 조작까지하였다.
북한 김일성은 전설의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여 그 명성을 훔쳤다.[편집]
북한 김일성이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훔친 가짜라는 것은 근래에 발굴된 해방 직후부터 평양에 김일성이 등장하기 전 2개월간 김일성 이름이 나오는 기록들에서 밝혀진다. 해방 이튿날인 8월 16일부터 서울과 전국 도처에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이 수립되며, 대통령 이승만, 총리대신 김구, 육군대신 김일성(金日成), 외무대신 여운형, 기타 미정" 등의 내용이 든 출처불명의 벽보와 비라가 나돌았다.[9] [10] [11] [12]
9월 6일 발표된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 전국인민위원(全國人民委員) 55명 명단에도 이승만, 김구와 함께 김일성도 들어 있다.[13] 또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0월호에 발표된 대통령과 각료 적임자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군무부장 적임자로 김일성이 최다득표(309표 32%)를 하기도 했다.[14]
북한 김일성이 아직 소련군 88여단에 있거나, 평양에 왔더라도 아직 남한에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은 때에 이승만, 김구와 나란히 거명되던 이 김일성은 당시 소련군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 대위였던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15] 풍문으로 떠돌던 전설적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인 것을 그 시기의 기록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정관해(鄭觀海)의 관란재일기(觀瀾齋日記) 1945년 8월 17일자에는 동진공화국 외무대신이 김일성이라는 소문을 기록하였고, 8월 26일자에는 "김일성군은 말타고 하루 500리를 달릴 수 있으며, 그 정예하기가 비할데 없다고 한다.[金日成軍, 一日能驅五百里, 其精銳無比云]"라 했다.[10]
해방당시 국민들이 귀국을 기다리던 유명한 전설적 김일성 장군에 대해 보도한 민중일보 1945년 10월 14일자 1면 기사. 이날은 평양에 온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대중 앞에 처음 나선 날이지만 서울의 신문은 전혀 다른 김일성 장군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이날 평양 집회에 모인 사람들이 기대했던 김일성 장군도 이 기사와 별반 다르지 않았으므로 김성주는 데뷔 첫날부터 가짜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또 민중일보 1945년 10월 14일자는 해외의 독립운동 지사를 소개하는 연재기사에 이승만, 김구에 이어 5번째로 김일성을 소개하면서, 을지문덕, 이순신에 비견되는 유명한 장군이며, 일본군 장교 교육과정(일본 육사)을 이수했으나 독립운동에 나섰고, 그 부하가 압록강 일대를 순시하던 조선 총독을 저격한 일도 있다고 하였다.[16]
명사(名士)의 편영(片影) (其五) : 김일성씨(金日成氏)
金일성氏는 유명(有名)한 장군(將軍)이다. 그 웅용(雄勇)한 기상(氣像)은 을지문덕(乙支文德) 추억(追憶)하게 되고 그 지모(知謀)의 종횡(縱橫)은 이충무공(李忠武公)을 연상(聯想)하게 된다.
김장군(金將軍)은 청년(靑年)에 급(笈)을 부(負)하고 병학(兵學)을 수(修)하였다. 그러나 그는 제국주의시대(帝國主義時代)의 장교(將校)되기는 실허하였다. 그는 편신(片身)으로 비주(飛走)하야 두만강(豆滿江)을 건너갔다. 당시(當時)는 한국(韓國)이 일본(日本)에게 합병(合倂)되야 일본인(日本人)의 학염(虐焰)은 三千里 江山을 덮었고 일본군(日本軍)의 견봉(堅鋒)은 두만강북(豆滿江北)까지 진출(進出)하야 당시(當時) 북만(北滿)에 있는 조선(朝鮮)의 독립당(獨立黨)을 초멸(剿滅)하야 그 참혹잔인(慘酷殘忍)이 극(極)하였더니라. 이때이었다. 金일성 장군(將軍)은 의용병(義勇兵)을 모집(募集)하야 일본(日本)과 항전(抗戰)하였다. 그의 과소(寡少)한 병중(兵衆)으로도 일본병(日本兵)의 가슴을 서늘케한 일이 자조 있었다.
당시(當時) 조선(朝鮮) 와있던 일본인(日本人) 총독 모(總督 某)는 조선(朝鮮)의 국경(國境)을 순시(巡視)키 위(爲)하야 혜산진(惠山鎭) 방면(方面)을 향(向)하였다. 일본인(日本人) 총독(總督)이 압록강(鴨綠江) 상류(上流) 남안(南岸)으로 내려갈 때에 압록강(鴨綠江) 북편(北便)에서 날아오는 탄환(彈丸)은 총독 모(總督 某)의 심담(心膽)을 놀래기 극(極)하였다. 총독 모(總督 某)는 황겁(惶怯)하야 여행(旅行)을 중지(中止)하고 도라왔다. 그런데 그 탄환(彈丸)은 金일성 장군(將軍) 휘하(麾下) 용사(勇士)의 탄환(彈丸)이라 한다.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이러나고 세계전쟁(世界戰爭)이 열리매 김장군(金將軍)은 소련대군(蘇聯大軍)과 일치행동(一致行動)하야 다수(多數)한 조선병사(朝鮮兵士)를 거느리고 용감(勇敢)히 전투(戰鬪)하였다. 그는 맛침내 승리(勝利)의 월계관(月桂冠)을 취(取)하고 지금 소련(蘇聯) 연해주(沿海州) 방면(方面)에 있어 조만(早晩)에 귀국(歸國)한다는 말이 전(傳)해 온다.
《민중일보(民衆日報) 1945.10.14 [16]》
이 날은 공교롭게도 평양에 온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이라 자칭하며 대중 앞에 처음 나선 날이지만, 서울의 신문은 전혀 다른 김일성 장군에 대한 기사를 싣고 있다.
실제로 압록강 일대를 순시하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17]을 저격한 사건이 1924년 5월 19일에 있었는데, 나중에 다른 사람이 한 일로 밝혀지지만[18], 항간에는 김일성 장군이 한 일로 소문이 나돌았다.[19] 당시는 1921년의 갑산군 함정포(含井浦) 사건[20] 등 국경 근처에서 일어나는 어지간한 사건은 으례 김일성 장군의 소행으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19] 이 기사는 김일성 장군의 이름은 1937년 보천보 사건 때부터가 아니라 1920년대 초에도 이미 유명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평양에 온 33세의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을 자칭했을 때 사람들이 나이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알아보고 가짜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유명한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평양의 대중들 앞에 나타나기 전에는 국내에서 소련군에 그런 인물이 있는 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누구도 어디서 뭘 하던 사람인지 모르는 낯선 사람에 불과했다.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임시정부 선전부 비서 안우생(1907~1991)도 1945년 12월 5일의 기자회견에서 김일성씨는 상당한 고령이며, 평양에 와 있는 33세의 청년 김일성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고 하였다.[21]
잡지 선구의 여론조사는 1945.10.10 ~ 11.09 기간에 이루어진 것으로 북한 김일성에 대한 당시 지지도라면서 흔히 인용된다. 하지만 조사 기간 중인 10월 14일 평양의 대중 앞에 처음 나선 북한 김일성에 대해 남한에는 아무 것도 알려지기 전이므로 동진공화국 육군대신 김일성이나 10월 14일자 민중일보 기사에 난 것처럼 전설의 김일성 장군에 대한 지지도로 보아야 한다. 당시 평양에서는 김일성에 비해 조만식에 대한 지지도가 압도적이었으므로, 서울에서 김일성의 지지도가 조만식보다 높게 나온 것은 북한 김일성에 대한 지지도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김일성을 수령으로 만든 소련 군정 당사자들의 가짜 증언[편집]
해방 후 공개적으로 귀국하여 곧바로 활동을 시작한 이승만, 김구와 달리 김성주는 9월 19일 비밀리에 원산항으로 입북하여 평양으로 왔고, 연해주 사령부의 스티코프(Terentii Shtykov, 1907-1964) 중장은 평양의 레베데프 (Nikolai Lebedev, 1901~1992) 소장에게 김일성을 당분간 인민들에게 노출시키지 말고 물밑에서 은밀히 정치훈련을 시키라고 지시했다.[22] 김일성은 김영환(金英煥)이란 가명으로[23] 한 달 가까이 잠행하며 민심을 살피다 10월 14일에야 공개석상에 등장했다. 이런 일은 김일성 본인이나 소련군정이 그가 국내에서 무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증거이며, 무명인사가 대중앞에 지도자로 나서기 위해서는 치밀한 사전 준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김일성. 뒤의 소련군 장성들 중 맨 오른 쪽이 레베데프 소장이다. 그는 당시 무명의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우기 위해 민족 영웅으로 조작하는 과정에서 조선인민들이 전설적 항일 영웅 김일성 장군의 귀환을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가짜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게 했다고 1991년에 증언했다.[22]
당시 소련군정은 조선인들이 유명한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의 귀국을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사실상 무명인사였던 김성주를 북한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그를 항일영웅으로 부각시키는 방편으로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사칭하는 방안을 생각해 내었고, 소련군정을 총지휘하던 스티코프도 이 아이디어를 극구 칭찬했다고 소련군정 정치 사령관이었던 레베데프 소장이 후일 증언했다.[22] [6] 당시 일에 대한 레베데프 소장의 증언은 아래와 같다.
"김일성이 나의 방문을 나서는 순간 극동사령부의 스티코프 중장(후에 대장)으로부터 암호 전문이 날아왔다. 김일성을 당분간 인민들에게 노출시키지 말고 물밑에서 은밀히 정치훈련을 시키라는 내용이었다. 나의 감은 적중했다. 김일성을 ‘민족의 영웅’으로 만드는 작전에 들어갔다. 특수선동부장 코비첸코에게 김일성의 군복을 사복으로 갈아입히고 가슴에 달고 다니는 적기 훈장도 떼어 내라고 지시했다. 일부 북조선 인민들의 반소감정을 부추기지 않기 위해서 였다. 박정애와 김용범은 두 벌의 신사복을 구해 오는 등 붉은 군대 사령부 사업에 적극 협력했다.
사령부 첩보국과 특수선동부는 김일성의 출생지에서부터 가족사항, 학력, 성분, 중국공산당 입당과 활동사항, 빨치산 운동 등 그에 대한 일체의 신상조사를 끝냈다. 우리는 그의 본명이 김성주였고, 만주지방에서 항일 빨치산 운동을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대규모로 혁혁한 공을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진짜 항일 빨치산 운동에 공을 세운 또 다른 ‘김일성 장군’이 있다는 ‘풍문’이 조선 인민들에게 널리 퍼진 가운데 조선 인민들은 해방된 조국에 그 장군이 개선하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두뇌 회전이 빠른 정치사령부의 젊은 장교들은 바로 여기서 ‘미래의 수령’ 만들기 작전을 찾아야 한다고 지도부에 건의했다. 이 아이디어는 핵심지도부를 놀라게 했다. 훗날 북조선 민주기지 건설의 총 지휘자 스티코프 장군도 이 아이디어는 ‘조선의 민주기지 깃발’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우리 붉은 군대는 김일성을 조선인민들 속에서 ‘전설의 영웅’으로 불리던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시켜 북조선의 ‘위대한 수령’의 계단에 오르게 했다.그를 수령으로 올려 놓기까지 붉은 군대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고 이를 잘 알고 있는 김일성도 소련군이 평양에서 철수할 때까지 소련과 소련공산당, 그리고 소련군에 대해 최대의 존경과 감사함을 갖고 행동했다."[22]
이 사안에 대해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만드는 정치공작을 평양 현지에서 직접 진두 지휘한 레베데프 소장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으므로, 북한 김일성이 전설의 김일성 장군을 사칭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며 이에 대해 더 이상 논란할 여지는 없다.
소련군정 당시 KGB 장교로 김일성 지도자 만들기 공작에 간여했던 레오니트 바신(Leonid Vassin, 1915~?)도 후일 유사한 내용의 증언을 했다.[24][25]
김(일성)의 이름이 전설적인 공을 세운 연상(年上)의 게릴라와 연관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가 완전한 사기라고 의심했으므로, 다음 단계는 김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우리는 조선의 지도자로 일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그를 영웅의 지위로 끌어 올렸다."고 Vassin은 말한다. " 우리는 그가 진짜이며, 백두산의 호랑이인 것을 증명해야 했다. 우리는 만경대 마을에서 그의 친척들을 찾아내야 했고, 또 남한에 퍼져있는 그가 진짜 김일성이 아니라는 소문도 불신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우리는 그가 모국을 해방시킨 맹활약한 전사인 것을 증명해야 했다."[25]
[Jasper Becker, "Rogue Regime : Kim Jong Il and the Looming Threat of North Korea"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p.51.]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백마를 타고 다녔다는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모델인 김경천(金擎天, 1888~1942) 장군. 『고헌실기약초(固軒實記畧抄)』에 김경천은 김일성(金日成)씨의 초명(初名)이라 하였고, 그가 김일성의 이름으로 지은 시가 나온다.[26]
북한 김일성이 실제 썼던 이름은?[편집]
북한 김일성은 만주 빨치산 시절 1938년 이후와 소련군에서 한자로 金日成이란 이름을 쓴 것이 확인되나,[27] [28] [29] 러시아어로는 김일성 아닌 중국발음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또는 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으로 적었다.[15] 해방 전 88여단 시절 김일성 대대의 통역관이었고, 6.25 때 인민군 작전국장을 지낸 유성철(兪成哲, 1917-1995)은 보천보 사건을 일으킨 김일성(金日成)이 1937년 말 전사하자 그후부터 김성주가 김일성 이름으로 활동하며 공을 가로챘다고 하였다.[30][31]
해방후 원산항으로 입북할 당시에는 자신을 본명 김성주로 소개했고[32], 또 평양에 온 초기에는 김영환(金英煥)이란 가명으로 행세했으므로[23], 국내 사정을 파악한 뒤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이용하기 위해 본명 대신 김일성 이름을 쓰기로 한 것을 알 수 있다.
해방 직후 평양에서도 동진공화국 소문과 함께 김일성 장군이 곧 귀국한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한다.[33] 평양으로 온 김성주가 김영환(金英煥)이란 가명을 쓰며[23]잠행할 때 이런 것을 놓쳤을 리 없다. 또 만주와 소련에서 오래 생활한 그는 돌아올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 없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았을 것이다. 만주에는 그런 사람이 없고, 연해주에도 김광서(金光瑞, 1888-1942, 金擎天) 장군이나 홍범도 장군 외에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소련의 탄압을 받아 1937년 무렵 처형되거나 중앙아시아로 끌려가고 없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았으니 자신이 그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라고 자칭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소련군 문서에는 1945년 10월 2일부터 그의 이름을 이전의 진지첸에서 김일성(Ким Ир Сен, Kim Ir-sen)으로 바꾸어 적기 시작했다.[34]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많은 월남민들이 증언한대로 북한 김일성은 누구인지 불분명한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훔친 가짜인 것이 재확인된다.
전설의 김일성 장군은 누구인가?[편집]
진짜 김일성 장군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풍문의 내용이 구구하여 실존인물 한 사람으로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일본 육사를 졸업했다거나, 백마를 타고 다녔다는 설이 많은 것으로 보아[8][10][16]일본 육사 기병과를 졸업한 김광서(金光瑞, 1888-1942, 金擎天) 장군이 전설의 원형일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1946년경 편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헌실기약초(固軒實記畧抄)』 에도 김경천(金擎天)은 김일성(金日成)의 초명(初名)이라 하였고, 그가 김일성의 이름으로 지은 박상진(朴尙鎭, 1884~1921) 의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가 나온다.[26] 1945년 12월에 간행된 김종범(金鍾範), 김동운(金東雲) 공저, 『해방전후(解放前後)의 조선진상(朝鮮眞相)』에도 북한 김일성은 김광서(金光瑞, 金擎天) 장군의 명의를 도용 중이라 한다고 했다.[35]
김광서의 일본육사 3년 후배인 김준원(金埈元, 1888~1969)은 1918~1922년간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シベリア出兵) 때 일본군 중위로 시베리아에 파견되었는데, 당시 김광서가 김일성 장군으로 알려져 있었다는 증언을 남겼다.[36]
윤치영(尹致暎, 1898~1996)도 북한 김일성은 가짜이고, 진짜 김일성은 일본 육사 나온 김광서(金光瑞, 1888-1942)라고 하였다.[37] 김광서는 일본 육사 선배로 친하게 지내던 그의 형 윤치성(尹致晟, 1875~1936)을 자주 찾아왔기 때문에 윤치영도 어릴 때 그를 자주 보았다. 윤치성은 김광서가 독립운동하러 조선을 탈출할 때 재정 지원도 하였다고 한다. 김광서의 부친 김정우(金鼎禹, 1857~1908)는 육군 공병 참령(工兵 參領)으로, 윤치영의 백부인 군부대신(軍部大臣) 윤웅렬(尹雄烈, 1840~1911)의 부관(副官)을 지냈으므로 집안끼리도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윤치영의 증언은 믿을만한 것이다.
북한 김일성이 만주 시절 말타고 활동한 적이 없는데도, 그의 기마상을 그린 그림이나 동상이 많은 것도 백마탄 김일성 장군으로 통하던 김광서 장군의 이미지를 도용한 것으로 보인다.[38][39][40]
일제시대 김일성 장군 전설의 시발점은 함경남도 단천(端川) 출신의 의병장 김일성(金一成, 본명 金昌希, 건국훈장 애국장 서훈) 장군으로 보기도 한다.[41][42]
김일성 진짜설이 득세하게 된 배경[편집]
월남민들의 증언으로 남한에 널리 인식되어 있던 김일성이 가짜라는 설을 뒤집고 진짜가 맞다는 주장이 득세하게 되는 계기를 만든 사람은 서대숙(徐大肅)이다. 그는 해방 당시 국내에서 김일성이란 이름이 유명했다는 것은 인정하나, 그런 유명한 인물은 실존하지 않고, 북한 김일성이 만주서 실제로 김일성이란 이름으로 항일 투쟁을 한 사람이 맞으므로 가짜가 될 수 없다고 했다.[43]
서대숙: 김일성이란 이름은 유명했다. 김일성이 공식석상에 나타난 모습을 보고 모두 “가짜다” 라고 했다. 가짜가 될 수 없는 것이 우리나라의 유명한 그 김일성. 전설에 나오는 그런 김일성은 없다. 우리가 독립운동에 대해서 많이 연구를 했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이란 전설적인 사람은 없다.[43]
해방 당시 김일성 전설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그 내용도 말하는 사람에 따라 편차가 심하여 실존 인물 한 사람으로 보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김일성 장군의 실체가 불분명하다는 바로 그 점을 북한 김일성이 악용한 것이다. 그의 실체가 분명했다면 다른 사람이 그 사람 행세를 할 수 없다. 김일성은 바로 그 실체가 불분명한 이름의 실제 주인공인 것처럼 행동한 것이다. 북한 김일성은 해방 당시 국내에서 완전 무명인사였으므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치명적인 이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유명한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였다. 자신의 항일투쟁 성과로 얻은 명성이 아닌 국내에 널리 퍼져 있던 실체가 불분명한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훔쳤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어릴 때 고국을 떠나 만주서 빨치산 투쟁한다며 산야를 숨어 다니다, 해방직전 5년간 소련 극동의 시골마을에 숨어 있던 소련군 진지첸 대위의 존재를 국내 사람들은 알래야 알 수도 없었다. 보천보 사건 때문에 만주 빨치산 김일성의 이름이 국내에 유명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북한 김일성이 최고 권력을 잡고 자신의 항일 업적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이전에는 보천보 사건은 전혀 유명한 사건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는 그 사건의 주역도 아니고 전사한 사람과 같은 이름을 써서 남의 전공을 훔쳤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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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숙은 북한 김일성이 진짜가 맞고, 보천보 사건의 주역이 맞다고 하여 국내의 김일성 연구가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의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수준에서 길을 잃고 오히려 퇴보하게 만든 주역이다. 그 이후로 어릴 때부터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를 듣고 자라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던 월남민 1세대 대다수가 세상을 떠나면서 국내의 김일성 연구는 그가 진짜가 맞다고 하는 사이비 학자들의 경연장이 되었다.
이들은 가짜 김일성 소문이 북한에서 그를 직접 본 월남민들에 의해 퍼졌다는 사실은 감추고, 남한 정부가 조작해서 퍼뜨렸다고 하면서 친일파가 득세한 남한이 김일성이 항일영웅인 것을 부담스러워 가짜로 만든 것처럼 진실을 호도하고 있다. 해방 당시 소련군이 데려온 북한 김일성의 전력은 아무 것도 알려진 게 없었고, 북한의 선전은 예나 지금이나 믿을 수가 없었다. 그와 같이 만주에서 활동한 빨치산들은 남한으로 온 사람이 아무도 없고, 적성국가였던 소련과 중공 등으로부터는 아무 정보도 얻을 수 없어 미군정이나 남한 정부도 그가 해방 전 어디서 뭐 하던 자인지에 대해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한동안은 6.25 전쟁복구와 기아 문제 해결에 진력하느라 김일성 연구 같은데에는 신경쓸 겨를도 없었다. 제대로된 연구는 1970년대부터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많은 자료가 발굴되고 상당한 연구가 진행된 지금에도 그의 행적의 전모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베일에 가려진 부분이 많은데 과거 한국 정부가 무슨 수로 진실을 제대로 알 수 있었겠는가? 김일성이 해방 직전 5년간 아무런 항일투쟁도 하지 않고 극동의 소련군에 복무했다는 사실도 공산권이 붕괴한 1990년 이후에야 제대로 밝혀졌지만 북한은 해방 당시부터 지금까지도 이를 감추고 있다. 그가 무슨 항일 공적이 있는지를 미군정이나 한국 정부가 알 수 없었다면 남북한의 일반 국민들은 더 모를 수 밖에 없었다. 북한 김일성은 국내 누구도 어디서 무얼하던 사람인지 몰랐던 항일 영웅이라는 말은 넌센스이다.
대다수 과거 자료들이 전산화되어 인터넷 검색이 가능해진 근래에 발굴된 수많은 새로운 자료들과 공산권 붕괴 이후 나온 여러 증언들은 북한 김일성이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훔친 가짜일 뿐만 아니라, 전사한 보천보 김일성의 전과도 훔쳤다는 것을 명백히 입증하고 있고, 이명영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김일성은 비록 만주서 항일투쟁을 했다고 하지만 내세울만한 성과는 없다[31]. 소련으로 넘어간 후인 1942년에 그가 직접 지은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第一路軍略史)』를 보면 그들의 항일투쟁이란 것도 중국 공산당원으로서 만주 실지 회복을 위해 한 것으로 중국공산당사의 일부일 뿐이고, 조선독립과는 무관하다고 자인하고 있다. 뿐더러 그의 투쟁이 최종적으로 패배로 귀결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44] 그가 전설의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여 그 명성을 훔쳤고, 다른 김일성의 보천보 전과를 훔친 것이 명백히 밝혀진 것으로 해서 그의 항일투쟁이란 것은 더 이상 거론할 것도 없다. 해방 당시 국내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지지세력도 전무했던 인사가 소련군 등에 업혀 들어와 그들의 무력과 정치공작의 도움으로 억지로 지도자 자리를 차지하여 인민들의 주권을 강탈해간 것이 정확히 그가 한 일이다. 6.25 남침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동족을 살상하고,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여 절대권력을 확보한 후 전무후무한 세습 전제 왕조를 만든 것이 그의 업적이라면 업적이다.
북한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의 전공을 훔친 가짜[편집]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전사[편집]
북한 김일성은 해방 후 평양에 와서도 전설의 김일성 장군을 사칭한 가짜였지만, 만주 빨치산 시절에도 전사한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의 전공을 훔친 가짜였다.
동아일보는 1937년 6월 5일자로 호외를 간행하여 보천보 사건을 보도하였지만[45], 같은 해 11월 18일에는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이 피살되었다는 보도도 했다. 김일성은 당시 36세로 함남출신이며,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온 인텔리로 1937년 11월 13일 전사하였다.[7] 북한 김일성은 그 후 같은 이름을 쓰며 그 공을 가로챈 가짜이다.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이 1937년 11월 13일 사살되었다는 1937년 11월 18일자 조선일보 기사.
보천보 사건을 일으킨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만주국군 제7단과의 전투에서 사살되었다는 것은 엄청나게 많은 당시 기록과[46][47][48] 신문 기사로[7] 확인할 수 있고, 신원도 당시 나이 36세 가량이며, 함경남도 태생으로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왔다고 하는 등 북한 김일성과 전혀 다르다.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사건 이전에도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는데, 1936년 11월 27일자 매일신보는 김일성의 나이가 37~8세 가량이며, 함경남도 혜산진 출신으로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톡)에서 공산당의 지령을 받아 만주로 왔다고 했고[49], 만주국군 기관지 월간 『철심(鐵心)』 1937년 5월호에는 김일성이 30세 가량의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이라 하였다.[50]
보천보 사건 당시 북한 김일성의 나이는 25세에 불과한데, 10년 이상의 나이차는 외모로도 확연히 구분되므로 나이가 잘못 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또 경성일보는 6사장 김일성이 녹림(綠林) 유일의 인텔리라고 하였는데, 구체적 학력을 모르더라도 지식 정도는 평소 언행에서 드러나므로 중학 중퇴 학력의 북한 김일성을 두고 이런 말을 할 수는 없고,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온 6사장 김일성에게나 어울리는 말이다.
6사장 김일성의 신원(身元)과 전사에 관한 당시 기록들은 상당히 많으며, 이런 기록들로 부터 6사장 김일성은 전사했을 뿐만 아니라, 신원도 북한 김일성과 전혀 다른 인물인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의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에 나오는 혜산사건 (惠山事件)수사 책임자나, 6사장 김일성을 사살한 당사자의 후일 증언도 위의 기록들이 명백한 사실임을 뒷받침한다. 당시 함남도경의 경부(警部)로 혜산사건 수사 책임자였던 이치하라 간이치(市原感一, 1896~?)는 1971년 2월의 증언에서 여자 대원으로 잡혔던 박록금(朴祿金, 1915-1940)이 김일성(金日成)의 나이가 36세, 본명은 김성주(金成柱),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왔고 만주사변 후에 소련에서 만주로 온 사람이란 것을 처음으로 진술했고, 이어서 권영벽(權永壁, 1909∼1945) 등 다른 사람들도 이를 확인해주었다고 하였다.[51] 이치하라 간이치(市原感一) 경부는 혜산사건 수사의 공로로 총독부 경무국장의 표창을 받은 것이 당시 신문에서 확인되므로 그의 증언은 틀림없다고 볼 수 있다.[52] 당시 함남도경이 작성한 수사기록인 신문조서(訊問調書)는 함흥법원에 남아 있었는데, 해방후 북한 소유가 되었다. 이것은 북한 김일성이 6사장 김일성이 맞는지 여부를 가릴 수 있는 결정적 자료이나 공개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가 6사장이 아니기 때문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또 만주군 장교로 6사장 김일성 사살 작전에 직접 참가했던 야기 하루오(八木春雄, 1910-2002)는[53] 1973년 여름의 증언에서 당시 일만군(日滿軍) 부대가 무송현(撫松縣) 양목정자(楊木頂子)에서 김일성 부대와 교전을 벌여 그를 사살하고, 시신의 목을 베어와 마을 사람들에게 신원을 확인한 결과 김일성이 틀림없었다고 증언하였다.[54][47] 김일성은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벌인 일도 있었기 때문에 얼굴이 잘 알려져 있었다고 하였는데, 당시 신문기사에도 김일성이 많은 마을 사람들과 접촉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되므로 그의 신원은 정확히 확인된 것으로 판단된다.[55] 별다른 경력도 없는 중학 중퇴의 북한 김일성은 당시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할만한 능력도 없었을 것이다.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 주역이 아니라는 증언들[편집]
북한 김일성이 6사장 김일성이 전사한 후부터 같은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는 소련군 88여단 출신자들의 후일 증언도 다수 있다. 당시는 김성주가 최고 권력자가 되기 전이므로 빨치산 동료들이 그의 신상에 관해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있을 때라 그들은 비교적 사실에 가까운 말들을 들었을 것이다.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이 1937년 11월 13일 사살되었다는 1937년 11월 18일자 경성일보 기사. 전사한 김일성은 함남 출신, 36세로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왔다고 하여 신원도 북한 김일성과 전혀 다르다. 같은 날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 등 주요 신문들이 모두 6사장 김일성의 전사를 보도했다.
88여단 시절 김일성 대대의 통역관이었 소련의 고려인 출신 유성철(兪成哲, 1917-1995)은 6.25 때 인민군 작전국장을 지냈는데, 보천보 사건의 김일성은 전사하고, 그후부터 김성주가 김일성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하였다.[30][31]
소련의 고려인으로 88여단 1대대장 김일성 아래 부대대장이었던 박성훈은 북한으로 오지 않고 소련군에 남았는데, 진지첸(북한 김일성)은 1939년 가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만주 빨치산 영웅 김일성의 이름을 자기 것으로 했다고 증언하였다. (1937년 가을에 전사한 보천보 김일성을 말하는 것이다.) 소련의 고려인으로 해방 후 북한에서 내무성 부상까지 지내다 1959년 소련으로 망명한 강상호(姜尙昊, 1910~2000)도 같은 증언을 하였다.[56]
평양 소련군정 당시 중좌로 김일성의 정치 상담역을 했던 그리고리 메클레르(Grigory Mekler, 1909~2006)는 1944년 88여단을 방문하여 여러 조선인들을 만났는데. 김일성의 이름은 전사한 존경받던 전임 게릴라 지도자의 이름에서 빌려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57]
만선일보 1940년 4월 18일자는 북한 김일성이 만주사변(1931년) 때 죽은 유명한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이름을 습명(襲名)하였다고 하였다.[27] 1931년에는 빨치산의 활동도 없었고, 유명한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도 보이지 않으므로 1937년에 전사한 보천보 김일성의 이름을 습명한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김성주를 죽은 유명한 비수 김일성으로 잘못 아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였다. 이 기사가 보도된 때 김일성은 아직 만주에 있었고, 이 해 10월 23일에 소련으로 도망갔다.
또한 6사장 김일성이 전사했다거나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관련자들의 증언도 다수 있다.
박갑동(朴甲東, 1919~ )은 혜산사건으로 투옥되었다 해방 직후 풀려난 박달(朴達, 1910~1960)과 박금철(朴金喆, 1912~1967 ?)에게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의 사진을 찍어다 보여 주었더니 보천보 사건의 김일성이 아니라 했다고 증언하였다.[58]
해방 직후 여운형의 비서였던 이기건(李奇建, 1919년 ~ ?)은 김일성에게 여운형의 밀서를 전하러 평양으로 가던 길에 우연히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으로 가던 박금철과 동행하게 되어 박금철이 김일성을 처음 만나는 장면을 목도하는데, 서로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아서 둘 중 한 사람은 가짜로 보였다고 하였다.[59]
이진구(李鎭九, 1898~?) 목사(牧師)는 1941년 7월 함흥형무소에서 혜산사건으로 수감된 박달(朴達, 1910~1960)과 같은 감방에 있었는데, 그때 박달이 자기 나이는 31세, 김일성의 나이는 10년 위인 41세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김일성은 1901년생 쯤으로 전사 당시 신문에 보도된 나이와 거의 같다.[60]
해방 직후 만주 통화성(通化省) 일대의 한인(韓人) 사이에서 전사한 김일성(金日成)의 추도비(追悼碑)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고 당시 모금에 참여했던 이창훈(李昌勳)이 증언하였다. 보천보 김일성이 통화성 무송현(撫松縣) 양목정자(楊木頂子)에서 전사했다.[61]
6사장 보천보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는 또다른 증거로는 1932년 7월 중순의 일본 영사관 경찰 기록(日本領事館警察記錄)에 연길현 의란구구 유격대(延吉縣 依蘭溝區 遊擊隊)의 대원으로 30세인 왕청(汪淸)현의 김일선(金一善)이 나오고, 노두구 구유격대(老頭溝 區遊擊隊) 대원으로 왕덕태(王德泰,1907~1936)가 나온다.[62] 이 유격대들이 통합해서 연길현 유격대로 되었다가 항일연군 2군으로 발전하는데, 왕덕태는 2군 군장이 된다. 2군 3사장(후에 6사장으로 개칭) 김일성도 김일선(金一善)이란 이름을 쓰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63] 이 사람은 의란구 구유격대 김일선이 분명하며, 나이가 1932년에 30세이면 1937년에 35세가 되므로 당시 언론에 보도된 보천보 김일성의 나이와 거의 같고,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인 것이 분명하다.
일만군(日滿軍)의 집중 토벌로 항일연군 1로군 초기 편제의 주요 지휘관들은 총사령겸 1군 군장 양정우만 살아남고, 부사령겸 2군 군장 왕덕태 및 휘하 6개사의 사장들은 모두 전사하거나 일본에 투항해 버렸으므로, 수많은 전사 기록이 있는 6사장 김일성만 혼자 살아남았을 가능성은 없다.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 주역이 맞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편집]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이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다는 매일신보의 11월 18일자 기사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북한 김일성은 전사한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을 사칭하여 그의 전과를 훔친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6사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이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래와 같은 기록을 근거로 내세운다.
1939년 9월 1일자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의 함경남도 국경지대 사상정화공작 개황(咸鏡南道國境地帶思想淨化工作槪況)에는 6사장 김일성의 신원에 대해 나오는데,[64] 이는 북한 김일성의 신원과 동일하다.
[6사장] 김일성(金日成)의 신원(身元)에 대하여는 여러 설(說)이 있으나 본명(本名) 김성주(金成柱), 당 29세(當 29歲),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平安南道 大同郡 古坪面 南里) 출신(出身)으로 어릴 때 실부모(實父母)를 따라 간도(間島) 방면으로 이주하여 그 지방에서 성인(成人)이 되어 무장단(武裝團)에 투신(投身)한 한인(韓人)이라는 것이 가장 확실하며, 그의 실모(實母)는 생존해 있는 모양이다.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 (1939.09.01) pp.8~9.≫[64]
昭和19年(1944년) 11월 18일 일본제국의회(귀족원)에서의 질의응답을 기록한 문건 "朝鮮人ノ現在ノ動向ニ就テ"에 김일성(金日成)의 본명은 金成桂(주:金成柱의 誤記인듯), 나이 33세,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출생이며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6사장으로 1937년 혜산사건 당시 조선으로 침입했다고 하였다.[65]
1941년 8월 28일자 함흥지법의 혜산사건 판결서 (惠山事件 判決書)에 6사장의 이름이 김성주(金成柱)로 나오는데[66], 이는 북한 김일성의 본명이다.
그러나 전사한 6사장 김일성의 본명이 김성주(金成柱)라는 것이 위 이치하라 간이치(市原感一, 1896~?)의 증언에도 나온다.[51] 이명영은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에서 북한 김일성의 본명은 원래 김성주(金聖柱)였으나 본명도 보천보 김일성을 따라 김성주(金成柱)로 조작했다고 주장한다. 북한 김일성의 본명이 金成柱/金聖柱 어느 쪽인지도 논란이 되나[67] 일제시대 기록들에는 두 가지가 다 나오므로 판별하기가 쉽지 않다. 북한 김일성의 초등학교 학적부가 중국 장백현에 남아 있다고 하니 거기서 확인이 가능할 수 있으나 공개가 금지 되어 있다.[68] 이름이 같은 동명이인도 흔히 있으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두 사람이 본명이 같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그것이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결정적 증거가 되기는 어렵다. 본명이 같거나 유사한 것이 김일성 이름도 따라서 쓰는 빌미가 되었을 수도 있다.
김일성(金日成)의 4촌형(從兄) 김성보(金成甫)를 검거했다는 특고월보(特高月報) 1940년 4월호 기사가 있는데[69], 북한 김일성에게는 4촌형이 없으므로, 본명이 김성주(金成柱)인 6사장 김일성의 4촌형으로 추정된다. 북한 김일성의 형제와 4촌은 항렬이 柱자 이나, 6사장 김일성의 경우는 항렬이 成으로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집안 사람이라는 증거이다.
또 1937년 11월 6사장 김일성의 전사를 보도한 이후 국내 신문에는 1938년 1년간은 김일성에 대한 보도가 거의 없다가 1939년부터 1940년 여름까지 다시 김일성의 활동에 대한 보도가 나온다. 다시 나타난 김일성이 바로 전사한 6사장 김일성의 이름을 사칭한 북한 김일성으로 판단된다.[27][28] 당시 항일연군 1로군은 수많은 병력과 지휘관을 잃고 편제를 개편하였는데, 북한 김일성은 제2방면군장이 되었다.[29] 따라서 다시 나타난 김일성 즉 북한 김일성을 전사한 6사장 김일성과 동일인으로 착각하여 위와 같은 기록들이 나왔을 것이다. 만선일보 1940년 4월 18일자 기사에도 김성주가 김일성(金日成) 이름을 습명(襲名)하여, 그를 죽은 유명한 비수 김일성으로 잘못 아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였는데[27], 위의 기록들도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1939년 당시 일제 경찰측은 북한 김일성의 지인들을 동원하여 귀순 공작을 벌이고 있을 때이므로 그의 신원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27][28] 1939년 9월 사상휘보의 기록은 6사장 김일성에 대한 수사나 재판 기록도 아니고, 필자도 미상인 단순한 보고서에 불과하다. 6사장 김일성의 신원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고 밝히고 있으니, 그중에는 1939년 당시 활동하고 있던 북한 김일성을 전사한 6사장 김일성과 동일인으로 오인한 설이 있는 것도 자연스럽고, 바로 이런 것을 채택한 경우이다. 당시는 교통 통신 사정이 열악하여 총독부 검사국과 혜산사건을 수사한 함흥 경찰, 6사장 김일성을 사살한 만주군 보병7단 간에 원활한 정보 공유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6사장 김일성이 전사한 후 상당히 시간이 흐른 시점에서 이미 죽은 사람의 신원을 새로 면밀히 조사했을 리도 없으니, 위와 같은 기록들은 당시 활동하고 있던 북한 김일성을 죽은 6사장 김일성과 동일인으로 착각한 것에 불과하며,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없다.
이 외에 아래와 같은 사유들도 북한 김일성이 6사장이 맞다는 증거라고 한다.
1로군 부사령 위증민(魏拯民, 1909~1941)이 1940년 4월에 쓴 보고서에 전사한 간부들 명단이 나오지만 6사장 김일성이 전사했다는 말은 없으므로[70] 그는 죽지 않았다.
이 보고서에 전사한 사람들을 모두 기록하고 있지는 않으므로 기록할 당시 기억나지 않아 누락되었을 수도 있다. 또한 당시는 북한 김일성이 6사장이었던 것처럼 행동할 때이므로, 진짜 6사장의 죽음을 밝히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죽은 사람의 이름을 이어받아 쓰는 것은 적에게 혼란을 주기 위한 것이니 내부에서도 굳이 그것을 밝혀 기록할 이유도 없다.
북한 김일성이 1942년에 지은 "항일연군 제1로군 약사(抗聯 第一路軍 略史)"에 그가 6사장이었다고 나온다.[44]
김일성 본인이 작성한 이 기록에는 6사장 이름이 "xxx"로 나오는데, 金日成 이름은 모두 이런 식으로 표기되어 있으니 자신이 6사장이라고 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보천보 사건에 대한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으므로, 자신이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이라고 한 것으로 보기 어렵고, 전사한 6사장이 쓴 이름도 같은 金日成이니 누구를 지칭하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이상조 (李相朝, 1916~1996) 전 소련주재 북한대사는 1989년 내한 당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을 지휘한 당사자가 맞다고 증언하였다.[71]
허진(許眞, 1928~1997)도 저서 「김일성정전(金日成正傳)」에서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을 주도한 것이 맞다고 말한다.[72]
위 두사람은 88여단 출신자들과는 달리 해방 후에 김일성이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된 이후에 처음 알게된 사람들이다. 유성철의 증언에 의하면 김일성은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으로 입항할 때 빨치산 동료들에게 자신의 전력에 대한 함구령을 내렸다고 하였다.[30] 이들은 아무도 공개적으로 김일성의 전력을 함부로 거론할 수 없게된 후 정확한 정보를 접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金英柱, 1920~ )의 친구인 이용상은 김영주가 자기 형이 보천보 사건의 주역이 맞다고 했으므로 자신은 그 말을 믿는다고 했다[73].
그러나 김영주도 형이 자신이 보천보 사건을 주도했다고 했다면 그대로 믿었을 것이므로 이런 증언이 중요한 사안에 대한 판단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 김영주가 했다는 이와 상반되는 증언도 있다.[74]
위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에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며, 북한 김일성은 6사장 김일성을 사칭하여 보천보 전공을 가로챈 것이 확실하다. 이에 반하는 증거로 보이는 기록이나 증언들도 근거가 미약하여 이러한 결론을 뒤집을 수는 없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의 전기 및 후기 편제 지휘관들[편집]
동북항일연군 1로군의 전기 및 후기 편제의 지휘관들의 운명을 비교해보면 그 조직에 속해 있었던 김일성(金日成)이란 이름의 인물들의 실체가 보다 분명히 보인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 전기 편제의 지휘관들 (1936년 7월 ~ 1938년 6월)
총사령부(總司令部) 군장(軍長) 사장(師長)
총사령 양정우(楊靖宇, 1905~1940)
부사령 왕덕태(王德泰, 1907~1936) 1군 군장 양정우 1사장 정빈(程斌, 1911~1951)
1938년 6월말 투항
2사장 조국안(曹國安, 1900~1937)
1937년 가을 전사
3사장 왕인재(王仁齋, 1906~1937)
1937년 가을 전사
2군 군장 왕덕태
1936년 10월 말 전사 4사장 안봉학(安鳳學, 1909~1937)
1936.09.30 투항
5사장 사충항(史忠恒, 1906~1936)
1936년 10월 전사
6사장 김일성(金日成, 1901~1937)
1937.11.13 전사
2군의 4, 5, 6사(師)는 원래 1, 2, 3사(師)였으나 1군과 함께 1로군으로 편성되면서 개칭한 것이다. 일본 관동군(関東軍)은 1936년 4월부터 1939년 3월까지 3년간 '만주국 치안숙정 3개년 계획(満洲国治安粛正三箇年計画)'을 수립하고 이에 따른 항일연군에 대한 집중적인 토벌로[75] 위 표에서와 같이 1로군 전기 편제의 지휘관들은 총사령 양정우만 살아 남고, 부사령 왕덕태와 휘하 6개사의 사장들은 모두 전사하거나 투항해버렸다. 6사장 김일성만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가 전사하자 김성주가 전사한 김일성의 이름을 쓰며 자신이 6사장이었던 것처럼 행세하여 보천보 전공을 가로챈 것이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 후기 편제의 지휘관들 (1938년 7월 ~ 1941년 3월)
총사령부(總司令部) 방면군장(方面軍長)
총사령 양정우(楊靖宇, 1905~1940)
1940.02.23 전사
부사령 위증민(魏拯民, 1909~1941)
1941.03.08 전사 제1방면군장 조아범(曹亞範, 1911~1940)
1940.04.08 내분으로 피살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 1912~1994.07.08)
1940.10.23 소련으로 월경 도주[76][77]
제3방면군장 진한장(陳翰章, 1913~1940)
1940.12.08 전사
경위려(警衛旅) 여장(旅長) 박득범(朴得範, 1908~?)
1940.09.30 투항[78]
일제의 집중적 토벌로 대다수 지휘관과 수많은 병력을 잃은 1로군은 1938년 7월에 위 표와 같이 편제를 축소 개편한다. 이 후기 편제의 지휘관들도 일만군경이 합동작전으로 1939년 10월부터 1941년 3월까지 벌인 동남3성 (東南3省 = 吉林 通化 間島) 치안숙정공작 (治安肅正工作)으로[79] 간신히 살아남았던 총사령 양정우까지 모두 전사하거나 투항하고, 제2방면군장이었던 북한 김일성만 결사 항전 중인 상관과 동료, 부하들을 버리고 몰래 소련으로 도주하여 살아남았다.
김일성 회고록 속의 가짜 증거[편집]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의 내용 중에도 그가 보천보 사건 당사자 6사장 김일성(金日成)이 아니라는 증거가 다수 있다. 당사자라면 모를 수 없는 일을 엉터리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성주(북한 김일성)가 죽은 유명한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이름을 물려받아 써서(襲名), 유명한 비수와 같은 사람으로 잘못 아는 사람이 많다는 1940년 4월 18일자 만선일보 기사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은 37~8세 가량으로 함남 혜산진 출신이라는 1936년 11월 27일자 매일신보 기사. 북한 김일성은 당시 24세로 평남 대동군 출신이므로 전혀 다른 사람이다.
예를 들면 보천보 사건 직후인 1937년 6월 30일에 벌어진 소위 간삼봉 (間三峰) 전투에 관한 것이다.[80] 일본측 기록이나 김일성 회고록이나 모두 이 전투는 항일연군 1군 2사(師), 2군 4사와 김일성이 지휘하는 2군 6사가 일본군과 벌인 것이라고 한 것은 동일하다. 그러나 회고록에는 당시 전투에 참여한 1군 2사장(師長) 조국안(曹國安, 1900~1937)이 그 전해인 1936년 11월 말에 죽었다고 하면서, 1937년 3월에 조아범(曹亞範, 1911~1940)이 후임 사장이 되었다고 했고,[81] 일본군 측 지휘관은 김석원(金錫源,1893~1978) 소좌라고 하였는데,[80] 이는 사실과 동떨어진 것이다. 북한 김일성이 당시 같이 전투를 벌인 동료 지휘관도, 맞서 싸운 상대도 누구인지 모른다면 그는 실제 전투를 수행한 6사장 김일성이 아닌 가짜일 수 밖에 없다. 2사장 조국안이 1936년에 죽고, 조아범이 그 후임 사장이 되었다는 것은 중국측의 2차 문헌들에 보이는 것으로 고증이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김일성 회고록은 당사자가 아니라서 자신의 기억에 없는 사안에 대해 중국측의 잘못된 고증을 무심코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일본측 기록에는 당시 전투 쌍방의 지휘관들이 자세히 나오는데, 항일연군측 지휘관은 김일성, 조국안, 최현이고, 일본군측 지휘관은 함흥 74연대에서 파견된 김소좌(김인욱) 외에 혜산진 수비대장 쿠리타 대위(栗田 大尉)이다.[82]
보천보 사건을 전후하여 당시 국내 신문들은 1937년 봄부터 가을까지 김일성, 조국안, 최현 부대의 활동을 상당히 자주 보도하고 있다.[83][84] 1937년 11월 18일자 신문들은 일제히 6사장 김일성의 전사를 보도했고,[7] 1938년 2월에는 최현도 전사했다고 보도했으나,[85] 조국안의 전사에 대한 보도는 없다. 다만 이후 조국안의 활동에 대한 보도도 끊어졌다. 조국안이 1937년 가을 무렵 전사했다는 것은 일본측 기록에 나온다.[86] 또한 위증민(魏拯民, 1909~1941.03.08)이 1940년 4월 작성한 보고서에 의하면 조국안은 1937년에 죽고, 그의 후임사장은 조아범이 아니라 양준형(楊俊衡, 1910-1938)인데, 그도 1938년 전사했다고 하였다.[70]
주보중(周保中, 1902-1964)의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 1936년 4월 3일자에 김일성이 2군 2사장(나중에 2군 6사장으로 개칭)이 되었고, 조아범은 2사(6사)의 정치위원이라고 나온다.[87] 이로보아 조아범은 2군 소속으로 6사장 김일성보다 서열이 아래이다. 그가 소속 군을 옮겨 1군의 2사장이 되었을 가능성도 적고, 뒷받침하는 당시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항일연군 1로군은 사장급 지휘관들이 모두 전사하거나 투항하여 1938년 7월 편제를 개편하여 제 1, 2, 3의 3개 방면군을 두기로 결정한다. 7월에 조아범이 제1방면군장이 되고, 11월에 김일성이 제2방면군장, 이듬해 진한장이 제3방면군장이 된다. 이로 보아 조아범은 북한 김일성보다는 서열이 분명히 높다. 조아범보다 서열이 높은 6사장 김일성이 제2방면군장 김일성과 동일인물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전사한 것이 맞다.
또한 간삼봉 전투에서 참가했던 일본군 지휘관은 당시 서울 용산연대(20사단 78연대) 소속이었던 김석원(金錫源,1893~1978)이 아니라, 그와 일본 육사 동기로 함흥연대(19사단 74연대) 소속이었던 김인욱(金仁旭, 1892- ?) 소좌였다.[88] 이는 당시 신문 기사에서도 확인이 되며,[89]여러 사람들의 연구에 의해서도 잘 밝혀져 있다.[90] 심지어는 해방 직후 북한에서 간행된 한재덕(韓載德)의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에도 김인욱 소좌라고 나와 있다. [91] 극작가 오영진(吳泳鎭, 1916-1974)은 처남의 장인이 김인욱이라 당시 일에 대해서 김인욱 본인의 말을 정확히 전해 들었던 사람이다. 해방 직후 평양에 있을 때 김일성과 몇 차례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일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 김일성이 김인욱 아닌 김석원이 당사자인 것처럼 말하는 것을 듣고, 그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되었다고 한다.[92] 오영진에 의하면 당시 6사장 김일성은 김인욱을 직접 만나 담판을 벌인 적도 있기 때문에 김석원으로 이름을 잘못 알 수가 없다고 했다. 김인욱은 평안남도 용강군(平安南道 龍岡郡) 출신으로 해방 전 예편하고, 고향에서 살다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끌려간 후 소식을 모른다고 한다. 김석원은 해방 전에는 북한 김일성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고, 6.25 때 남침한 그의 군대와 맞서 전투를 벌인게 전부이다. 그럼에도 북한이 김석원이 간삼봉 전투 당사자라며 온갖 모욕적 언사를 동원해 비방하는 것은 김일성이 가짜라고 실토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회고록에는 혜산 사건에 대해 언급하면서, 마동희 (馬東熙, 1912∼1938)가 검거되어 고문을 당하다 죽자 그 부친 마호룡이 아들의 시신을 인수해 운반하는 이야기가 나온다.[93] 그러나 혜산 사건으로 3년 징역을 받은 사람 중에 마호룡(馬虎龍, 1910~?), 마청룡(馬靑龍, 1910~?)이 있고,[94] 나이도 마동희와 거의 비슷하여 그의 부친이 될 수 없다. 동명이인이 되기에는 마씨나, 호룡이라는 이름이 너무 드물어 가능성도 지극히 희박하다. 당시 징역형을 받은 사람 중에는 마해원(馬海元)도 있는데, 드문 성인 마씨들이 상당수 있는 것으로 보아 같은 집안의 동년배 사람들로 보이며, 부자 관계는 아니다.
김일성 회고록의 이러한 뻔뻔한 거짓 기록들은 그가 가짜라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김일성 회고록 등에서는 6사장 김일성을 자신이라고 속이고 있으므로 6사장 김일성의 활동 기간인 1936~1937년 중 북한 김일성의 실제 행적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만주 안도현의 치안대장으로 있던 이도선(李道善)이란 한인 간부가 북한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金英柱, 1920~ )를 체포한 적이 있는데, 김영주는 김일성(金日成) 부대에 있는 큰 형 김성주(金聖柱)를 따라 소년 대원으로 있다고 말했다는 증언이 있으므로, 그가 6사장 김일성 부대에 대원으로 있었을 가능성이 상당하다.[74]
제2방면군장 김일성에 대한 논란[편집]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처 김혜순이 체포되어 전향했다는 1940년 7월 5일자 조선일보 기사.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증거라는 주장과, 김혜순은 북한 김일성의 김정숙 이전의 전처라는 설이 있으나 명확히 가려지지 않고 있다. 김혜순은 나가시마(長島玉次郞) 공작대에 의해 체포되었는데, 귀순 후 한 때 자신을 체포한 나가시마의 집에서 같이 살며, 나가시마의 처와도 친해졌다고 한다.[95][96]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의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은 북한 김일성 연구에 한 획을 그은 중요한 저서이다. 이 책에서 그는 월남민들로부터 들은 다양한 전설의 김일성 장군에 대한 증언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김일성 장군 전설의 시발점으로 함남 단천 출신의 의병장 김일성(金一成, 본명 金昌希, 건국훈장 애국장 서훈) 장군을 들었고[41][42],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백마를 타고 다녔다는 전설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은 김광서(金光瑞, 1888~1942) 장군이라고 하였다. 또한 일제시대 만주에서 빨치산에 투신하기 전 유년기 및 청소년 시절의 김성주를 알던 사람들을 만나 당시의 그의 행적에 관한 증언들을 채록하였는데, 이것은 빨치산 투신 이전의 북한 김일성에 관한 가장 믿을만한 기록이다. 나아가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이 전사했다는 것도 해방 후 처음으로 밝혔다.
나가시마(長島玉次郞) 공작대가 입수한 위 사진 속의 안경 낀 인물이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다. 북한 김일성과 전혀 다른 인물로 보이지만 북한도 이 사진을 변조하여 김일성이라고 하면서 내놓고 있다.[95][97]
이때문에 1980년대 이후 김일성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일단의 신진학자들로부터 박정희 정권의 사주를 받아 김일성을 가짜로 만든 어용학자로 몰려 집중적으로 매도 당했다. 해방 직후부터 월남민들을 통해 널리 알려졌던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설을 부인하고 진짜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명영의 연구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도 일방적으로 매도만 했지 제대로 학문적으로 반박은 하지 못했다. 많은 자료들이 전산화된 후 새로 발굴된 모든 기록들과 공산권 붕괴후 나온 기록과 증언들까지 모아서 비교 검토해보면 이명영의 주장이 대부분 옳다는 것이 다시 확인된다.
다만 같은 책에서 이명영은 제2방면 군장 김일성도 북한 김일성이 아닌 제3의 인물이라고 주장하였는데[95], 이점은 상당한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이명영이 제시한 근거는 노조에 쇼도쿠(野副昌德) 소장이 이끈 노조에(野副) 토벌대 산하 나가시마(長島玉次郞) 공작대가 토벌 작전 중 노획한 사진 속의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안경을 낀 심한 고도 근시로 북한 김일성으로 보기 어렵고[97], 1940년 7월 5일자 조선일보에 보도된 체포된 김일성의 처 김혜순(金惠順)에 대한 기사에 나오는 김일성도 북한 김일성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96] 등이다. 이런 문제점들은 지금도 논란이 무성하고 명쾌히 해명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새로 발굴된 많은 문서들에 나오는 1939~1940년간 활동한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맞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40년 4월의 만선일보 기사와[27] 김일성 귀순 공작을 벌였던 김창영의 1949년 반민특위 증언에[28] 나오는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고, 그의 지위도 사장(師長)급 정도로 나온다. 일본의 아시아역사자료센터에는 많은 노조에(野副) 토벌대 문서가 올라있는데,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신원을 명확히 적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항일연군 1로군 조직표들 중 김일성의 나이가 1939년 표에는 28세[98], 1940년 표에는 29세[29] 라고 적힌 것이 있는데, 이는 북한 김일성의 나이와 거의 같고, 당시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나이가 30대 중반이라는 이명영의 주장과는 다르다. 또 조직표에 나오는 제2방면군장 김일성 주변 인물들도 다수가 북한 김일성의 측근들이다.[99]
일본군 측의 기록에 의하면 1940년말 소련으로 도주하여 토벌에 살아남은 1로군 최고위 생존자는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다.[99] 이명영은 김일성 열전(1974년)에서 이 김일성이 소련의 오케얀스카야 야영학교 교장을 지내다 1944~45년께 죽었다고 하였다.[95] 그러나 그가 1974년에는 접할 수 없었던 공산권 붕괴후 공개된 만주 빨치산들을 수용한 소련군 88여단 관련 기록과 증언에는 그런 인물은 흔적도 보이지 않고, 소련으로 도주한 1로군 인물들 중 최고위 생존자는 북한 김일성이다. 그 덕택에 그는 1로군을 을 대표하는 인물로 인정받아 88여단에서 대위 계급으로 제1영(營)의 영장(營長)이 되었고, 1로군 출신으로 북한 김일성보다 상급자는 없다.[100] 1로군 최고위 생존자가 일본측 기록과 소련, 중국의 기록에 모두 이름이 같은 김일성으로 나오므로 이는 동일인물이 분명하며 바로 북한 김일성이 되어야 한다. 제2방면 군장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 기록에서 실체가 확인되지 않는 이명영이 말한 그런 인물이 되기는 어렵다.
일본군 토벌대가 작성한 최종 토벌성과(討伐成果) 기록에 포함된 1로군 조직표는 최고위 인물들인 1로군 비서처장(祕書處長) 전광(全光, 吳成崙), 경위려장(警衛旅長) 박득범(朴得範), 제2방면군 참모 임수산(林守山) 등이 귀순 또는 투항한 후에 작성된 것이므로 상당히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99]. 여기에는 북한 김일성의 수하인 오백룡(吳白龍), 박덕산(朴德山, 金一), 강위룡(姜胃龍) 등도 나오므로 북한 김일성도 어딘가에 이름이 반드시 나와야 한다. 만일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면 그는 1로군 조직표에 이름도 못 올릴 정도로 존재감이 없는 인물이었어야 하는데, 소련으로 넘어가서 갑자기 1로군을 대표하는 인사가 되어 88여단 제1영 영장(營長)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북한 김일성이 입소 직후인 1941년 1월 ~ 3월 간에 열린 항일연군 병력의 소련군 수용 문제를 다루는 제2차 하바로프스크 회의에 1로군 대표로 참석했다는 사실도[101] 그가 입소한 1로군 인물들 중 최고위급이었다는 증거이므로, 그가 제2방면군장이 맞다는 것은 별로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만주서 소련으로 월경한 1로군 인원 통계표에도 1940년 10월 23일에 입소한 북한 김일성 한 사람만 나온다.[76][77] 만일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과 다른 사람이라면 월경한 1로군 중 최상급자인 그의 이름이 누락될 수 없다는 점도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증거이다.
사상휘보 1939년 9월호와 같은 기록은[64] 당시 북한 김일성이 전사한 6사장 김일성과 동일 인물로 오인될 정도로 항일연군 내에서 제2방면 군장과 같은 상당한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명영이 최초에 제시한 의문점들이 해명되어야 할 필요는 여전히 남아있지만, 제2방면군장은 북한 김일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제2방면군장도 처음에는 김혜순의 남편인 고도 근시의 다른 김일성이 맡았다가 그가 어느 시점에서 전사한 후 북한 김일성이 이어받았다고 보면 문제점이 해소될 수는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그러한 김일성이 전사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으므로 단지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다.
일본군의 토벌에 맞서 결사항전하는 상관과 동료 및 부하들을 버리고 몰래 소련으로 도주하여 살아남은 비겁한 도망자 북한 김일성이 상관과 동료들이 모두 전사한 덕에 소련군 88여단에서 1로군을 대표하게 된 것이 그의 출세의 바탕이 되었다. 지휘관이 전투지구를 무단 이탈하여 도주한 것은 사형을 면할 수 없는 중죄이지만 김일성을 처벌할 권한을 가진 직속 상관들이 모두 전사하여 그는 처벌도 모면하였다. 만주에서 2로군 총사령이었던 주보중(周保中)은 김일성의 직속 상관이 아닌 관계로 처벌 권한이 없어 1941년 3월 12일자로 1로군 총사령 대행 위증민(魏拯民)에게 김일성을 적절히 처벌할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발송하였으나[102][77][103], 위증민은 며칠 전인 3월 8일에 사망하였으므로 실효성이 없었다. 이런 일들도 북한 김일성이 당시 무명의 하급 전사가 아니라 상당한 위치에 있는 지휘관 즉 제2방면 군장이 맞다는 방증이다.
중국 조선족들의 북한 김일성이 진짜라는 주장에 대해[편집]
오늘날 중국의 조선족들은 선대가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참여하여 항일투쟁한 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그들 중 일부가 해방 후 북한 집권 세력이 된 것에 대해서도 상당히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러한 연유에서 인지 북한 김일성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104] 그러나 국내에서 김일성 가짜설이 대두된 것은 해방후 평양에 김일성 장군이라 자칭하는 사람이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의 일이므로 만주의 조선족들이 그 자세한 상황을 알기 어렵다. 그들의 선대 중에는 북한 김일성의 만주 빨치산 동료도 있고 하니, 그가 해방 후 국내에서 김일성이라 자칭한 것에 아무 문제도 못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국내 사람들은 항일연군의 김일성은 누군지 알지 못했으므로 그가 평양에 나타나서 유명한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니 가짜라 한 것이다.
조선족들은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이 틀림없다고도 한다. 그들은 북한 김일성과 같이 항일연군에 참여한 사람들의 말이라면서 인용하거나, 중국측 자료들을 주로 인용한다. 자신들 주장과 상반되는 일본측 자료는 거짓 정보에 속아서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항일연군은 부대가 만주 지역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었고, 일본군에 쫓겨 근거지도 자주 이동해야 하는데다 상호 연락이 쉽지도 않은 시절이었기 때문에, 전체 상황을 대강이나마 파악하는 사람도 최고위급 지휘관들 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대부분 전사했다. 특히 김일성이 속했던 1로군의 지휘관과 주요 참모들은 김일성만 제외하고 거의 모두 전사하거나 일본에 투항해버렸으므로, 1로군의 역사에 대해 전모를 정확히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은 살아 남지 못했다.
항일연군 사람들은 간부급 이상을 빼고는 무학자들이 대부분이어서 당시 사정을 문서로 기록할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토벌에 쫓겨 다니느라 작성된 문서들도 보존하기가 어려웠다. 주요 기밀을 문서로 작성했다가 일본군에 넘어가면 부대 전체가 몰살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기밀 사항을 문서로 작성하는 것도 되도록이면 피했다. 후대에 채록한 항일연군 인사들의 증언은 당대 기록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당시로부터 30~40년 이내라면 그런대로 믿을만하겠으나, 50~60년 후의 증언이라면 당사자의 증언이라도 인간의 기억력의 한계 때문에 정확하다고 믿기 어렵다. 주변 인물들에게 전해진 증언은 신뢰도가 더욱 낮아질 수 밖에 없다.
일본군이 노획하여 『사상휘보(思想彙報)』제25호(1940년 12월)에 실린 1로군(第一路軍) 부사령(副司令) 위증민(魏拯民, 1909~1941.03.08)이 1940년 4월 작성한 보고서에는 1로군 총사령(總司令) 양정우(楊靖宇, 1905~1940.02.23)가 생사불명이라고 하여[70] 그가 2월 23일에 전사한지 한참이 지나서도 부사령이 총사령의 전사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총사령 양정우가 전사했으면 부사령 위증민은 자신이 1로군을 총지휘해야 하는 상황인데도 이런 막중한 사실조차 파악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1로군 최고위 지휘관조차 당시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으니 그보다 훨씬 아래 하급자들의 후일 증언이 반드시 정확하다고 믿기는 어렵다.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第1路軍) 부사령(副司令) 위증민(魏拯民)이 1940년 4월 코민테른 주재(駐在) 중공대표단(中共代表團)에 보낸 ‘상황보고(狀況報吿)’
3. 간부문제(幹部問題)
과거 사장(師長) 이상의 희생자(1936년 이후)로서는 총사령(總司令) 양정우(楊靖宇) 동지의 생사불명(生死不明) 외에 王德泰(1路軍副司令官 겸 2 軍長 및 中共黨滿洲省委員), 李學中(2軍 정치부 주임 兼 中共黨滿洲省委員), 宋鐵岩(1軍정치부주임). 李東光(中共黨滿洲省委 조직부장), 孫英浩(中共黨滿洲省委 청년부장), 李仁光(1軍 1師長), 韓豪(1軍 1師長), 李參謀長(1軍 1師長), 曹國安(1軍 2師長), 楊俊衡(1軍 2師長), 王仁(1軍 3師長), 固政治委員(1軍 3師), 周樹東(2軍 4師長), 侯國忠(2軍 5師副師長) 등이며 그밖에 團部 및 連部의 幹部 희생자가 다수에 달하고 있다.[70] 《思想彙報 第25號(1940년 12월) p.65 번역문 - 滿洲 抗日聯軍 硏究(金昌順)》
소련으로 피난한 항일연군의 최고 지휘자가 된 주보중(周保中)은 또한 1로군 총사령대행 위증민이 1941년 3월 8일에 전사하고, 또다른 1로군 최고위 간부 전광(全光) 즉 오성륜(吳成崙)은 같은 해 1월 30일에 일본군에 투항한 사실을 그해 9월말까지도 모르고 있다.[105] 또한 자신이 아끼던 간부 진한장(陈翰章)이 1940년 12월 8일에 전사한 것도 모르고 그에게 1941년 3월 12일에 편지를 발신하고 있기도 하다.[106]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는 비교적 믿을만한 문헌으로 여겨지지만 맨 뒤의 "후기(后记)"에 책이 공개출판되는 것을 감안하여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기술적 처리를 했다고 자인하고 있다.[107] 중국측이 지극히 신중을 기하여야 할 사안은 북한 김일성이 관련된 기록 밖에 없다.
만주 항일연군의 소련 피난 당시 소련측 대표로 이들의 수용문제를 다루었던 소련측 인물로 왕신림(王新林)이란 암호명을 쓰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누구인지를 두고 1944년 소련군 정찰활동의 공을 인정받아 왕신림(王新林)이 준 표창을 받았던 여영준(呂英俊)은 왕신림이 주보중(周保中)의 다른 이름이라고 증언했다.[77] 왕신림이란 암호명을 쓰던 사람은 두 사람이 있었는데, 전임자는 누군지 잘 확인되지 않지만 1941년초에 부임해온 새로운 왕신림은 극동군 정찰국장 나움 소르킨 (Naum Semyonovich Sorkin, 1899-1980) 소장이라는 것이 밝혀져 있다. 이 사람이 88여단의 창설부터 운영 및 폐쇄까지 직접 관장한 당사자이므로, 여영준의 주장은 사실과 동떨어진 엉뚱한 것이다.
또한 항일연군 여자 대원들의 김정일 출생지에 대한 후일 증언도 서로 엇갈리고, 사실에 어긋나는 경우도 있어 그의 출생지를 확정하는데에 별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이런 사례만 보아도 항일연군 출신자들의 후일 증언은 그대로 믿기는 어렵고, 다른 문헌들과 비교해서 교차 검증이 필요하다.
반면에 일본측은 수많은 투항자나 체포한 사람들을 조사하여 기록을 작성하고 이를 부서간에 공유하고 보존하는 것이 가능했으므로, 항일연군측 보다는 훨씬 더 정확한 기록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본도 항일연군 토벌을 위해서는 정확한 정보가 필수이므로 고의로 왜곡해서 기록했을 리는 없다. 실제로 중국측 자료와 일본측 자료를 비교해보면 원본 그대로가 아닌 후대에 편집한 것이 많은 중국 자료에 의심스러운 정황이 더 많이 보이고, 고증이 부실한 것도 상당히 자주 보인다. 반면에, 일본측 자료는 당시 기록 원본이 그대로 남아 있어 후대의 인위적 첨삭에 대한 의심은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에 더 믿을만하다. 정확한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양측 자료를 상호 비교해서 검토하고, 상충하는 기록에 대해서는 어느 일방을 매도만 할 것이 아니라, 어느 쪽이 더 합당한지에 대해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참고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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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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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총독(齋藤總督) 저격범(狙擊犯) 참의부원(參議府員) 이병준(李秉俊) 피착(被捉)1926.12.28 동아일보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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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甲山含井駐在所(갑산함정주재소)에 爆發彈(폭발탄)을投擲(투척) 독립단이십명이폭탄을던지고영림창출장소와면소까지방화 駐在所下人一名慘死(주재소하인일명참사) 동아일보 1921-09-27 03면
甲山敵駐在所 襲擊 詳報 독립신문 1921-11-19
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p.27~29 : 1921년 당시 갑산군 동인면장이었던 김상형(金相瀅, 1889~?)은 그 사건이 김일성 장군이 한 일이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증언했다. - ↑ 안우생 기자회견 보도 동아일보 1945.12.06 일자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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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나 다 한재덕(韓載德), 金日成將軍 凱旋記 : 빗나는 革命家의 집 p.84 - 『문화전선(文化戰線)』, 창간호, 북조선예술총연맹(北朝鮮藝術總聯盟) 1946.7.25 ; 이듬해 간행된 한재덕의 저서 『金日成 將軍 凱旋記』 (平壤, 民主朝鮮出版社, 1947.11.20)의 같은 글에는 김영환이란 가명을 썼다는 말이 삭제됨.
한재덕(韓載德), 김일성(金日成)을 고발(告発)한다 (27) 1962.06.01 동아일보 2면 [1959년 한국으로 귀순 후 쓴 글]
황장엽, 북한의 진실과 허위 (시대정신, 2006.04.15) p.134. - ↑ 레오니드 바신, "「날조된英雄」金日成", 신동아(新東亞) 1992년 11월호, pp.486-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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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나 박맹진(朴孟鎭) 편, 『고헌실기약초(固軒實記畧抄)』 p.3 金擎天氏(日成氏의 初名) ; p.14 金日成이 지은 만시(輓詩)
- ↑ 가나 다 라 마 바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二) / 비명(匪名)『김일성(金日成)』을 습명(襲名) 만선일보(滿鮮日報) 1940/04/18, 6면.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一) 중학시대(中學時代)부터 적화(赤化) 滿鮮日報 1940/04/16, 6면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三) 일단(一旦)은 귀순(歸順)을 결심(決心) 滿鮮日報 1940/04/21, 6면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四) 양정우(楊靖宇)의 포위협위(包圍脅威)로 귀순공작(歸順工作)은 수포화(水泡化) 滿鮮日報 1940/04/23, 6면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五) 하로 속(速)히 마음을 돌려 귀순(歸順)하기만 고대(苦待)! 滿鮮日報 1940/04/24, 6면 - ↑ 가나 다 라 김창영(金昌永)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자료 (반민특위 조사 기록) 1949년 4~5월 / 김창영(金昌永, 1890-1967)
- ↑ 가나 다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Ref.B02032043000、満州国政況関係雑纂/治安情況関係/匪賊動静並討伐状況関係 第四巻(A-6-2-0-2_8_1_004)(外務省外交史料館)」昭和15年9月26日から昭和15年11月12日 (1940.09.26~1940.11.12) p.14부터 1940년 10월 23일자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조직표가 나온다. 제2방면군장 김일성, 나이 29세.
- ↑ 가나 다 金日成이 보천보전투 전공 가로채 / 前북한군 작전국장 회고록서 폭로 연합뉴스 1991.06.11 ;
"金日成(김일성)이 抗日戰功(항일전공) 가로챘다"前(전)북한군 작전국장 蘇(소)서 폭로 경향신문 1991.06.12. 4면 ; - ↑ 가나 다 유성철(兪成哲, 1917-1995) 회고록 피바다의 비화 p.9 : .. 이 조우전에서 김일성은 영웅답게 전사하였고, 10여명의 전사들도 잃었다....그리고 또 성주는 유격활동은 하였으나 큰 공을 세운 일은 없었다. 김일성의 전사후 성주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의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Biographies of Soviet Korean Leaders - 숙청된 고려인 가족 80인의 육필수기 미의회도서관)
- ↑ "나도 북침인 줄 알고 6·25 참전했어" 2009년 6월 20일 조선일보
- ↑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 (고당전·평양지간행회(古堂傳·平壤誌刊行會), 평남민보사(平南民報社), 서울, 1966) pp.170~171.
- ↑ 소(蘇), 6.25 남침(南侵) 비밀 문건(文件) 공개 동아일보 1992.06.17 일자 2면
金日成-한국전 관련 舊蘇비밀문건 요지 연합뉴스 1992-06-16 18:15 - ↑ 김종범(金鍾範), 김동운(金東雲) 공저, 『해방전후(解放前後)의 조선진상(朝鮮眞相)』, (서울, 朝鮮政經硏究社, 1945. 12. 25); 복간본 『해방전후의 조선진상』 : 제2집 독립운동과 정당 급(及) 인물 (서울, 돌베개, 1983) p.190.
- ↑ 김광서가 즉 김일성 장군이다. 중앙일보 1975.06.20 종합 6면
- ↑ 윤치영 (尹致暎) : 나의 이력서 (55) 북괴의 김일성은 가짜...진짜 김일성은 일육사 나와 (한국일보 1981年 9月 25日字 6면) 한국언론진흥재단
《동산회고록(東山回顧錄) : 윤치영(尹致映)의 20세기(世紀)》 (삼성출판사, 1991년 3월) - ↑ 北, 김정일 동상 공개…기마 형상 연합뉴스 2012/02/14
北 김일성ㆍ김정일 기마상 참배하는 평양시민들 연합뉴스 2013-04-14 - ↑ Equestrian statues in North Korea (북한의 기마상들) Wikimedia Commons
- ↑ (만물상) 북한의 '백마 신화' 조선일보 2012.04.16
- ↑ 가나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년) p.40~ : 第一章 第二節 端川출신 義兵將「金一成」장군
김일성(金一成, 1888~1926) 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 김일성(金一成) 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 ↑ 가나 金日成의 正體에 對한 考證 : 以北의 金日成은 金日成將軍이 아니다 / 劉錫仁 新思潮. 제2권 제7호 통권18호 (1963년 9월) pp.165-169
단천군지(端川郡誌) (단천군지증보편찬위원회, 1971) pp.152~162 : 단천 출신 김일성설(金一成說) - ↑ 가나 (김씨 일가의 거짓과 진실) 가짜 김일성 자유아시아 방송 RFA 2010-09-28
- ↑ 가나 金日成, 抗联第一路军略史 (抗聯第一路軍略史), 东北抗日联军 史料(下), 东北抗日联军 史料 编写组, 中国共産党史 资料出版社, 1987, pp.665~679
자료발굴 1942년에 김일성이 육필로 쓴 항일연군 제1로군 약사 (번역) 역사비평 1992년 여름호(통권 19호), 1992.5, pp.403-414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7) 東北항일聯군 활동기 金日成 자필 보고서 중앙일보 1995.02.20 종합 8면 - ↑ 함남(咸南) 보천보(普天堡)를 습격 동아일보 1937.06.05 호외(號外)
- ↑ 「金日成匪 討伐詳報」 만주국군(満州国軍) 기관지(機関誌) 월간(月刊) 『철심(鐵心)』 1937년 11월 15일號 (滿洲國 治安部 參謀司 調査課編) pp.70~75.
- ↑ 가나 鮮外情報 - 共匪 金日成 射殺의 件 治安狀況(昭和 12年) 第38報 (1937년 11월19일).
- ↑ 東亜局第二課関係/第七章 支那及満州ニ於ケル共産運動 : 昭和 12年(1937년) 12月 1日 p.49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2130117600、執務報告 昭和十二年度東亜局第二課及第三課(東亜-3)(外務省外交史料館)」;
支那及滿洲ニ於ケル共産運動, 外務省 東亞局 第二科, 昭和 13年 (1938년) 6월 - ↑ 『하모니카』演奏하며 男女混合舞踊會 一派의 큰 襲擊만 前後十二回 共匪金日成派 內幕 매일신보 1936-11-27 / 3면 6단 : 1936년 당시 활동하던 빨치산 김일성은 나이가 37~8세 가량으로 카이제르 수염을 길렀고, 함남 혜산진 출신이라 함.
- ↑ 東邊道討匪行 / 從軍記者團 만주국군(満州国軍) 기관지(機関誌) 월간(月刊)『철심(鐵心)』1937년 5월호 (満州国治安部,治安部参謀司第二課 編) pp.98~114 : 제6사장 김일성은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으로 30세 미만의 청년이란 풍문이었다하며 동변도에서는 제일 큰 세력이라고도 적혀 있다.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의 16장 5절 "소탕하에서의 일행천리"에도 이 기사를 인용하며 김일성이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왔다고 한 것을 비방하고 있다.
- ↑ 가나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新文化社, 1974) pp.276~282.
- ↑ 警察功勞記章과 感狀下付에 對하여-三橋警務局長 談 每日申報 1940-02-11/ 02면 / 08단
- ↑ 八木春雄氏死去 旧満州国軍元高級参謀 Shikoku News 2002/07/14
- ↑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新文化社, 1974) pp.287~289.
- ↑ 金日成 援助혐의로 400 여명을 검거 長白縣이래 21개 촌락에서 공산군 외곽단체 박멸 조선일보 1937년 04월 28일자 2면 ;
金日成一派가 拉去한 人質七十名 放免 / 격렬한 설교 끄테 전부 석방해 無事히 原住地 歸還 每日申報 1937년 06월 28일 02면 06단 - ↑ 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 (동아일보사, 1993) 권1 p.165.
- ↑ Soviets Groomed Kim Il-Sung for Leadership Vladivostok News, January 10, 2003 : The Soviet officer [Grigory Mekler] found out that Kim, who then commanded a Korean battalion, had borrowed his name from the previous commander. Kim's predecessor, highly respected by Korean guerrillas, was killed in action.
- ↑ 박갑동, 통곡의 언덕에서 (서당, 1991년) : 137~138쪽
- ↑ 南北(남북)의 對話(대화) (47) 괴뢰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6) 동아일보 1972.01.27. 4면 ;
조규하(曺圭河), 이경문(李庚文), 강성재(姜聲才), "남북의 대화" (한얼문고 1972, 고려원 1987)
이명영, 진위 김일성 열전 (38) 6사장 김일성의 죽음 [중앙일보] 1974.07.08 종합 3면 - ↑ 이명영(李命英, 1928-2000.06.20), 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p. 282-283.
- ↑ 이명영(李命英, 1928-2000.06.20), 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p. 291-292.
- ↑ 許東粲, 金日成 評傳 (續) (北韓硏究所, 1988년) pp.60~62.
강덕상(姜徳相) 편, 『현대사 자료(現代史資料) 30』(동경 みすず書房, 1976) p.164. - ↑ 일반적 치안 정황(一般的治安情況) - 1936년 12월12일: 재간도 총영사관 경찰부 한국독립운동사 자료시스템 (M/F 자료번호 : 1-006466-001-0400) : 同軍 第三師長 金日成(金一善) 部隊 約百五十名
管內鮮人ノ匪害及保護ニ關スル狀況其他送付ノ件 / 소화 11년(1936) 12월 12일 한국독립운동사 자료시스템 (M/F 자료번호 : 1-006466-001-0399) : 위 자료의 표지 부분 - ↑ 가나 다 咸鏡南道國境地帶思想淨化工作槪況 (제목 검색)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朝鮮總督府 高等法院 檢事局 思想部, 1939.09.01) pp.8~9.
- ↑ 標題:6.朝鮮人ノ現在ノ動向ニ就テ p.4.「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2031286000、本邦内政関係雑纂/植民地関係 第二巻(A-5-0-0-1_1_002)(外務省外交史料館)」
- ↑ (단독)조작된 신화 보천보 전투 아시아 투데이 2015-03-16
「惠山事件 判決書」(金正柱 編,≪朝鮮統治史料≫6, 東京:韓國史料硏究所, 1970), 543∼841쪽. - ↑ 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 94 : 창덕학교(彰德學校) 급우(級友)였던 조의준(趙義俊)과 조사준(趙士俊)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본명이 金聖柱라고 증언(證言)했다고 함. 재건파공산당(再建派共産黨)에서 박헌영(朴憲永)과 함께 일했던 [김철수 (1893년)|김철수(金綴洙)]도 평양(平壤)의 김성주(金聖柱)의 푸락치가 들어와 김성주(金聖柱)의 사진과 경력을 소개하는 책자를 당내(黨內)에 돌렸는데 그 속에 평양(平壤)에 와 있는 김일성의 본명(本名)은 「金聖柱」라 했다 한다.
- ↑ 長白縣 檔案館 所藏 韓國史 關聯 檔案資料 槪況 대외 열람이 불가능한 자료이기는 하지만 金日成이 어린 시절 장백에서 학교를 다닐 때 학사기록부가 남아 있다.
- ↑ 「특고월보(特高月報)」 1940년 4월호, 일본 내무성 경보국 특별고등경찰(日本 内務省 警保局 特別高等警察)
- ↑ 가나 다 라 在滿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の現況に關する文獻 『思想彙報』第25號 朝鮮總督府 高等法院 檢事局 思想部 (1940.12.01) p.4 (65) 하단 좌: (3) 간부문제 - 총사령 양정우 생사불명
思想彙報 第25號(1940년 12월) p.65 일부 번역문 - 滿洲 抗日聯軍 硏究(金昌順) - ↑ "北韓(북한)은 金日成(김일성)의 개인兵營(병영) 경향신문 1989년 09월 12일 3면
- ↑ 임은(林隱, 허진의 필명), 「김일성정전(金日成正傳)」 (옥촌문화사, 1989년) p.53. [허진은 의병장 왕산 허위(許蔿, 1854-1908)의 손자로 본명은 허웅배(許雄培)이며, 소련 망명 후 개명했다.]
- ↑ 이용상, 나의 친구 김영주(20) | 진짜 김일성 시비 중앙일보, 1991.04.17 종합 9면
- ↑ 가나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新文化社, 1974) pp. 293-294
- ↑ 満洲国治安粛正計画大綱案 昭和11.4~14.3 (1936.4~1939.3) C14030524200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第一、東亜局第二課関係/第六章 満州国治安状況 (1936/12/01)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2130132300、執務報告 昭和十一年度東亜局第二課及第三課(東亜-21)(外務省外交史料館)」 - ↑ 가나 동북항련 제1로군 월경인원 통계표(东北抗联 第一路军 越境人员 统计表), 《동북지구혁명역사문건회집(东北地区革命历史文件汇集) 1942年 - 1945年7月》 甲65卷, p.117 ;
- ↑ 가나 다 라 (다시쓰는한국현대사) 38.만주서 소련으로 金日成의 越境 중앙일보 1995.08.01 / 종합 10면
- ↑ 항일군 3인 왜 일왕에 충성맹세 했나 오마이뉴스 2007.09.13
- ↑ 吉林、間島、通化 三省治安粛正の大要 昭和14年10月~16年3月 (1939.10~1941.3)C13071217500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吉林、間島、通化 三省治安粛正の大要 昭和14年10月~16年3月 (1939.10~1941.3)C13071218500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 ↑ 가나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 제17장 "5. 간삼봉전투"
- ↑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5권 제14장 "4. 남만의 전우들과 함께"
- ↑ 국경지방에서의 치안 상황 : 제73회 제국의회 설명자료 1937 (소화12년), 조선총독부 기록물
- ↑ 金日成一派二百名(김일성일파이백명) 國境線進出企圖(국경선진출기도) / 曹國安派 合流, 對岸을 嚴重 警戒中 1937.06.30 동아일보 2면
合流匪六百追擊戰 雙方의 死傷多數 토벌대아즉도 긴장리에 대긔 新乫坡對岸의 討匪 每日申報 1937-07-02 | 03면 01단
交戰三時間(교전삼시간)만에 雙方死傷六十七(쌍방사상육십칠) 1937.07.02 동아일보 2면
匪賊 金日成一派는 食糧難으로 大困境 附近部落에서 食糧掠奪中 越境할 憂慮도 不無 매일신보(每日申報) 1937년 07월 12일 02면 04단 : 보천보 사건은 김일성, 조국안(曹國安), 최현 연합 비단이 일으켰다고 함. - ↑ 김일성, 조국안(曹國安) 연합 부대의 활동에 대한 보도는 1937년 가을까지 이어지고 있다.
金日成一派가 村落을 또 襲擊 매일신보 937-07-20 03면 08단
匪賊約三百名과 森林警察隊衝突 雙方의 被害가 不少 매일신보 1937-08-28 04면 02단
김일성등(金日成等) 연합공비(聯合共匪) 함남(咸南) 침습(侵襲)을 기도(企圖) 동아일보 1937.09.06 2면 - ↑ 共匪 崔賢一黨 潰滅, 對岸治安 明朗化 매일신보(每日申報) 1938/02/23, 2면
撫松縣(무송현)에 반거 共匪(공비)두목 崔賢 사망설 만주국군의 일파 궤멸 조선일보 1938.02.23 석간 2 면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新文化社, 1974) p.292 - ↑ 東亜局第二課関係/第七章 支那及満州ニ於ケル共産運動 昭和 12年 (1937년) 12月 1日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2130117600、執務報告 昭和十二年度東亜局第二課及第三課(東亜-3)(外務省外交史料館)」p.48 : 제3사장 왕인재(王仁齊) 사살(射殺), 제2사장(第二師長) 조국안(曹國安)ノ 진몰(陣沒, 전사)
- ↑ 주보중(周保中, 1902-1964),《東北抗日遊擊日記》人民出版社(1991年) p.16
- ↑ 김인욱(金仁旭, 1892- ?) 한국사 데이타 베이스
- ↑ 王公族附武官 李王垠 附屬步兵 少佐 金仁旭 補 步兵第七十四聯隊附 (咸興) 동아일보 1935-08-02 조간 1면 13단
金仁旭少佐 驍勇은 聯隊의 誇이다 : 新乫坡對岸의 討匪壯烈戰과 咸興聯隊當局者談 매일신보(每日申報) 1937년 07월 03일 면수:06 단수:15
今日 卒業한 日本士官學校 第27期 매일신보(每日申報) 1915.6.18 - ↑ 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p.261~264
- ↑ 한재덕(韓載德),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平壤, 民主朝鮮出版社, 1947.11.20) p.240 (부록 p.40)에 혜산사건 판결서 (惠山事件 判決書)를 번역 소개하면서 6사장 김일성 부대가 함흥 74연대 육군 소좌(少佐) 김인욱(金仁旭) 부대와 교전한 것으로 밝힘.
- ↑ 오영진(吳泳鎭, 1916-1974), 『蘇軍政下의 北韓 - 하나의 證言 -』, 서울, 중앙문화사(中央文化社), 1952. 06. 10. (서울, 국토통일원, 1983, 재발간) 재간본 pp.90~91, pp.98~100
- ↑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 제18장 "6. 《혜산사건》을 겪으면서"
- ↑ 東アジア問題研究会編著、「アルバム・謎の金日成 - 写真で捉えたその正体 (1977年)」 株式会社成甲書房 / 이명영, 수수께끼의 김일성 : 혜산사건 재판 당시 피고인들의 사진과 형량이 나온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MBC 특별기획.제48회,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 근거자료집 문화방송 시사제작국, 2002 p.154 이후
- ↑ 가나 다 라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 pp.319~320
(진위 김일성 열전 43) 2대 김일성의 정체(상)|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중앙일보 1974.07.23 종합 3면
(진위 김일성 열전 44) 2대 김일성의 정체(하)|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중앙일보 1974.07.25 종합 3면
(진위 김일성 열전 45) 입소 이후의 2대 김일성 중앙일보 1974.07.29 종합 3면
"'안경 낀 김일성'…보천보 업적 가로채려 사진 조작" 연합뉴스 2015/10/15 - ↑ 가나 金日成의 愛妻가 귀순 선무공작 제1선에 - 소설같은 전향의 경위 조선일보 1940년 07월 05일 석간 2면
- ↑ 가나 満洲に関する用兵的観察 第12巻・第4篇/第9章 匪賊及住民(3) pp.1~2의 사진 맨 뒷줄 중앙의 모자 쓰고 안경낀 인물.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Ref.C13010013700、満洲に関する用兵的観察 第12巻 昭和27年(1952년)11月(防衛省防衛研究所)」
金日成夫妻东北抗日照 사진 앞줄 중앙의 같은 인물. - ↑ 笠間史料 昭和14年度第一次警備行軍部隊行動詳報 / 3 行軍地方一般の状況 1939년 p.3 東北抗日聯合郡第一路第二方面軍編成表 指揮金日成(二八).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3021441100、笠間史料 昭和14年度第一次警備行軍部隊行動詳報(防衛省防衛研究所)」
- ↑ 가나 다 吉林、間島、通化三省治安粛正の大要 昭和14年10月~16年3月 / 第5 討伐成果「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3071220200、吉林、間島、通化三省治安粛正の大要 昭和14年10月~16年3月(防衛省防衛研究所)」 : 1로군 조직표에 나오는 X 표시가 된 이름은 사살되거나 투항한 사람을 뜻한다.
- ↑ 주보중(周保中),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 (人民出版社, 1991年) p.658 : (1942년 7월 16일) 제1로군 인원을 기간으로 하여 교도 제1영을 편성하고, 영장은 김일성, 정치위원은 안길로 한다. [以第一路軍人員爲基干, 編成敎導第一營 營長金日成 政治委員安吉] / p.661 : (1942년 7월 22일) 김일성의 계급은 대위 [金日成, 王效明, 許亨植, 柴世榮 軍稱號大尉 分任各敎導營營長]
서재진,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신화화 연구 (통일연구원 연구총서 2006-11 / 2006-12-26) p.89 - ↑ 沈志华, 试论八十八旅与中苏朝三 角关系 - 抗日战争 期间 国际反法西斯联盟 一瞥 近代史硏究 2015年 第4期 p.9
- ↑ 《周保中 抗日救国文集》 周保中、金策关于来 X城商讨东北党和游击运动等问题给魏拯民的信(1941 年 3月 12 日)
《东北地区 革命历史文件 汇集》 甲 61, pp.103~110 - ↑ 서재진,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신화화 연구 (통일연구원 연구총서 2006-11 / 2006-12-26) p.90
- ↑ 재외동포의 역사적 경험과 생활-김우종 구술 (2014.06.25 ~ 2014.07.01) 녹취록 p.67 '김일성 가짜설' 반박 기사 집필 ;
재미 조선족 작가 유순호,“중국서 김일성 항일투쟁 동지 가족 100명 인터뷰” 한겨레 2017-01-11 : 유 작가는 남한 내 일부에서 주장하는 가짜 김일성론도 철저하게 부정한다. - ↑ 주보중(周保中),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 (1991年, 人民出版社) p.620 1941년 九月十四日 일기
- ↑ 주보중(周保中),《周保中抗日救国文集》, "周保中、金策关于第一路军部队改编为第一支队的等问题给陈翰章等人的信 (1941年 3 月 12 日)"
- ↑ 주보중(周保中),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 (1991年, 人民出版社) p.843 후기(后记) "考虑日记是 公开出版、故某些内容 进行了审愼的技术处理。"
외부 링크[편집]
- 이주천, '해방전 김일성의 행적'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제5주제 (선택 97년 10월호)
- '김일성 가짜설' 누가 퍼뜨렸나 -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한겨레21, 2001년10월24일 제3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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