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日成のパルチザン神話は検証が必要だが、70年・80年も昔のことを言っても始まらない。
現在、朝鮮半島で戦争をすれば、両者が生存をかけて核兵器を使うだろう。そういうわけにはいかないのだから、話し合いで危機を回避するしかないのは、自明だ。
現在、朝鮮半島で戦争をすれば、両者が生存をかけて核兵器を使うだろう。そういうわけにはいかないのだから、話し合いで危機を回避するしかないのは、自明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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抗日パルチザン - Wikipedia
抗日パルチザン(こうにちパルチザン)とは、かつて日本の支配地域(植民地や準植民地、占領地等)で行われた主に共産党系の非正規軍の闘争、パルチザン活動、中国の東北地方における朝鮮独立運動を指す。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の建国神話における名目上の正当性の根拠とされた。
シベリアの抗日パルチザン
シベリアの抗日パルチザン[編集]
シベリア出兵においてブラゴヴェシチェンスクに入城する日本軍を描いた作品。『救露討獨遠征軍画報』より
尼港事件でパルチザンの攻撃を受け焼け落ちたニコラエフスク日本領事館
ロシア革命によって混乱に陥ったシベリアへ、連合国の一員として日本軍が出兵中、赤軍に協力して、多数のパルチザン部隊が結成された。(詳しくは、シベリア出兵を参照)
ドミートリイ・ショスタコーヴィチの交響詩『十月革命』には、『パルチザンの歌』(または『谷を渡り丘を越え』)が取り入れられている。この歌は、日本では『野を越え山を越えて』という題名で知られるが、赤軍パルチザンが、最後に残った沿海州の白軍を打ち砕き、ついに太平洋にまで達した戦いを歌ったものだ。1922年の末、白軍の崩壊を見届けた日本軍がウラジオストクから撤退することによって、ロシア内戦は終結したのである。
もともとロシアにおける「パルチザン」という言葉は、本隊に対する別働隊(遊撃隊)を意味する軍事用語だったが、十月革命の主体となったボリシェヴィキが、支持派の非正規軍を好んでパルチザンと称したため、この当時から日本でも、共産主義と結びつけて使われることが多くなった。
沿海州を中心に、シベリアには多くの高麗人が住んでいて、ロシア国籍を持つものも多かった。彼らの中には、徴兵で独ソ戦を戦った後に帰還し、パルチザン部隊を立ち上げる者もいた。
また、義兵闘争のころから沿海州に逃れ、独立運動をくりひろげてきた朝鮮人亡命者も多く、その一人である李東輝が上海臨時政府の国務総理になり、レーニンから資金援助を得たこともあって、高麗人パルチザンは抗日独立の旗をかかげていた。中でも朴イリア(エルリアとも)率いるサハリン部隊は、1920年(大正9年)、尼港事件の襲撃に加わって有名になった。中国政府の調べでは尼港事件における赤軍パルチザン4,300人のうち、朝鮮人が1,000人を占めていた[1]。
もっともこの尼港事件により、日本における当時のパルチザンの一般的なイメージは、匪賊と変わらないとする方向へ傾いた[2]。
この時期、ロシア領で生まれた高麗人だけではなく、独立武装闘争を志して新たに参入する朝鮮人も多く、その中では現役の日本陸軍騎兵中尉でありながら脱走し、1920年代の前半、主にスーチャンのパルチザン部隊を率いて白軍と戦った金擎天が名高い。彼は直接日本軍と戦ったわけではなかったが、状況からして、赤軍に協力することが独立闘争だと認識されていた。尼港(ニコライエフスク)での日本人を含む民間人大量虐殺に見るように、暴虐な一旗組も多かった中で、擎天の率いるパルチザン部隊は際だって規律正しく、この時期、駐留日本軍との表だった軋轢は避けたかった赤軍指導者の賞賛をも受けていた。独立運動の闘士として、朝鮮半島内でも大きく報道され、インタビュー記事も載った。
満州の抗日パルチザン[編集]
中国共産党に吸収されたパルチザン[編集]
1922年(大正11年)の末、日本軍の撤退を受けたシベリアは、ソビエト共産党によって掌握され、日本との関係修復のために、独立をめざす朝鮮人パルチザンは武装解除された。それにともない、多くの朝鮮人が満州に移動して独立運動の継続を試みたが、シベリアでのロシア革命にともなった経験もあり、共産主義者となった者も多数いた。彼らは、1923年(大正12年)以降、延吉県、磐石県を中心に結集し、共産主義青年組織を立ち上げた。一方、朝鮮半島内でも朝鮮共産党が結成されていたが、第1次朝鮮共産党事件により満州へ亡命するものもあり、取り締まりのゆるやかな満州での活動が活発化した。
しかし、朝鮮の共産党は内紛が激しく、満州では民族派(右派)独立軍とも競合し、暗殺をまじえた激しい内部抗争のために、抗日活動はさほど盛り上がらなかった。
1930年(昭和5年)、コミンテルンの意向があり、満州の朝鮮共産党は、中国共産党に吸収されることとなる。中国共産党満州省委は、この方針に基づき「赤い五月」行動を指令した。朝鮮族の多い間島では、どれほど熱心にこの指令を実行するかで、朝鮮人の中国共産党入党の可否を決める、というような方針があり、間島五・三〇事件(間島暴動)が発生する。最初に行動を起こした部隊を率いていた人物の一人は、金一星(キム・イルソン)という龍井の大成中学生だった。この暴動は断続的に翌年の春まで続くが、襲撃されたのは電気会社や鉄橋などの日本の施設と、富裕な朝鮮人・中国人で、100人を超える犠牲者もすべて朝鮮人・中国人だった。
1932年(昭和7年)、関東軍の支配下で満州国が成立すると、満州全土で、反満抗日を旗印にかかげる武装団体が立ち上がった。東北軍閥、馬賊、宗教系武装団、朝鮮人民族主義者の独立武装団、そして、朝鮮人を含む中国共産党パルチザンである。共産党系のパルチザンは当初ごく少数だったが、満州国側の巧みな宣撫、掃討、帰順工作、政策(集団部落の創設)により、他の武装団体が衰弱、消滅していった中で、その残党を吸収しつつ一番長く満州に残ったが、それによって、日本側からは共匪と呼ばれる匪賊の一種にもなった。
1932年(昭和7年)の春、中国共産党磐石県委員会が朝鮮人20人あまりで軍事部を作ったのが、満州で最初のパルチザンだった。同年のうちに、この部隊は230人あまりに膨らんだ。とはいえ、当初は勢力拡大に専心し、またそれにともなう内紛もあって、目立った戦闘は行っていなかった。翌1932年には、中央の司令で、満州各地に人民革命軍を創設する運びとなり、磐石県パルチザンが核となって、馬賊を抱き込むなどで人数を増やし、通化県へと地域も拡大していき、数百から千人内外の東北人民革命軍第一軍が成立した。
さらに1934年(昭和9年)から1935年(昭和10年)ころには、満州東部に第二軍、第五軍が設立され、北部には第三、四、六〜十一軍が編成された。
間島においては、1930年(昭和5年)の暴動に引き続き、朝鮮人共産主義者がごく狭い地域でソビエト政府を標榜して、「土地私有廃止、共同労働、共同生活」を唱えて騒動をまき起こしたりもしていたのである。このように、1932年(昭和7年)の初めころからパルチザンの小部隊が散在し、中国共産党による組織化は遅れたが、パルチザンの核はすでにできていた。共産主義者の詩人・槇村浩が、高知市にいながら日本共産党の機関紙・無産者新聞の記事を見て、想像によって『間島パルチザンの歌』[3]を作り、「プロレタリア文学」に発表したのが1932年(昭和7年)の春である。
東北人民革命軍は、二度ほど朝鮮半島内に侵攻しているが、もっとも世間を騒がせたのが東興事件である。1935年(昭和10年)2月、第一軍の第一独立師200人ほどが、朝鮮人の隊長・李紅光に率いられ、西間島を南下し、氷結した鴨緑江を渡って、平安北道厚昌郡東興邑を襲撃した。民間人を殺害し、金品を略奪して、朝鮮人資産家の家に放火し、16人を拉致して引き上げたが、隊長の李紅光は若い女性であるという噂が流れ、話題になった。
東北人民革命軍は、資金が欠乏していたためか、東興事件のように、略奪・拉致を常としていて、『間島パルチザンの歌』のイメージからはほど遠かった。また内紛も多く、「民生団事件」では、400名あまりの朝鮮人隊員が粛清されたといわれる。民生団とは、1932年(昭和7年)に朝鮮総督府が間島に発足させた民族主義反共朝鮮人組織だったが、うまく機能せず、同年の内に解体していた。したがって、事件がはじまった時点では存在していなかったのだが、人民革命軍は、結局は中国共産党の組織であり、数が多いにもかかわらず、朝鮮人隊員は排斥、疎外される傾向にあったのである。 1935年(昭和10年)に東北人民革命軍第一軍師長兼参謀長の李紅光は戦死するが李紅光支隊は通化事件などで活躍する。
間島の金日成[編集]
北朝鮮大成山革命烈士陵にある抗日パルチザン群像
1935年(昭和10年)、中国共産党中央は、コミンテルンの人民戦線統一戦略に基づき、東北人民革命軍を、あらゆる反日抗満武装団との合作をめざし再編する方針を打ち出した。したがって、共産主義には属さない武装団体も、抗日の一点で一致すれば、共闘し、吸収することをめざすこととなった。
詳細は「東北抗日聯軍」を参照
さらには、民生団事件による消耗もあって、東北人民革命軍は、1936年(昭和11年)の春ころより、東北抗日聯軍に再編された。ここから、金日成のパルチザン(のちの朝鮮労働党満州派、別名「国外パルチザン派」)活動が本格的に始まったとされる。
なお、東北抗日聯軍は民生団事件の反省から、中国共産党への朝鮮人支持基盤をつなぎとめる方策として、在満韓人祖国光復会 を組織する方針をたてた。それに基づき、金日成部隊は咸鏡南道甲山郡を中心に活動していた共産主義グループ(のちの朝鮮労働党甲山派、別名「国内パルチザン派」)と連絡をとり、共闘関係を築いた。甲山グループは、右派(反共・民族主義系)・左派・武闘派・穏健派問わず、朝鮮独立を謳っていた政治団体の多くが朝鮮半島の外で活動する中で、唯一、朝鮮に留まり活動していた事で、独立を羨望する朝鮮人の中でも一目おかれていたともいわれる。
東北抗日聯軍のパルチザン活動の中で、もっとも注目を集めたとされるのが、1937年(昭和12年)の普天堡の戦いだが、甲山グループの手引きで成功したこの襲撃は、略奪、拉致、放火を伴い、東北人民革命軍のころと変わっていない。徐大粛著『金日成 思想と政治体制』によれば、「金日成部隊の兵力補充は、中国人苦力および朝鮮人農民を徴用し、村や町を襲撃するたびに人質にとった若者に訓練を施しては兵士に仕立てた。また食料の調達でもっとも一般的なのは、人質をとって富裕な朝鮮人に金を強要する方法だった。求めに応じない場合には、人質の耳を切り落とすと脅し、それでも応じない場合には首をはねるといって人々を恐怖に陥れた」ということである。
確かに金日成のパルチザン活動は、朝鮮半島で大きく報道されたが、「おおむねその蛮行、略奪を非難する内容で、襲われる満州の朝鮮人農民の苦しみに同情を寄せたものが多かった」[4]状態で、決して英雄扱いではなかった。それには、シベリアの金擎天のころとは事情がちがい、朝鮮総督府の報道検閲が厳しくなっていたこともあった。
戦闘、補給困難、脱走、帰順などで、東北抗日聯軍は消耗していき、金日成を含んだ残党はソ連領に逃げ込んだ。彼らは第88独立狙撃旅団 (ソ連軍)に編入されたが、対日戦に参加することはなく、北朝鮮を解放したのはソ連だった。
北朝鮮の満州派パルチザン[編集]
平壌の祖国解放戦争勝利記念館に掲げられた金日成将軍の絵
金日成を中心とする満州派パルチザンは、ソ連軍が占領した朝鮮半島北部へ入り、北朝鮮建国の中核となった(詳しくは、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の歴史を参照)。
解放後の1945年(昭和20年)10月14日に、北朝鮮に進軍したソ連軍は、金日成を国の指導者(革命家)として平壌市民に紹介したが、「1920年代に活躍した闘士ならとっくに銀髪であるはずなのに」といぶかる者が多かったという[5]。
もともと日本統治時代の朝鮮には、独立武装闘争をくりひろげる「キム・イルソン将軍伝説」があり、「日本陸軍士官学校を出ている」「義兵闘争のころから1920年代まで活躍した」「縮地の法を使い、白馬に乗って野山を駆けた」「白頭山を根城にして日本軍と戦った」「ロシア・満州 満州・朝鮮半島の国境付近で抗日闘争をしていた」などといわれていた[6][7]。この伝説にあやかり、金成柱は1930年(昭和5年)以降のある時点から、金日成という仮名を使っていた[8]。
「金日成偽者説」を否定した和田春樹も、「『満州事変』の開始とともに、武装闘争をめざした彼は、そのために本名の金成柱を隠し、間島地方に流れる伝説上の英雄の名、金日成を名乗るにいたったものと考えられる」[9]と述べている。
시베리아의 항일 빨치산 편집
시베리아 출병에서 블라 고베 셴 스크에 입성하는 일본군을 그린 작품.
"救露 討獨 원정군 화보"보다 尼港 사건에서 빨치산의 공격을 받아 불타했다 니코라에후스쿠 일본 영사관 러시아 혁명에 의해 혼란에 빠진 시베리아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일본군이 출병 중 적군에 협력 하여 다수의 빨치산 부대가 결성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시베리아 출병 참조) 드미트리 쇼스타코 비치의 교향시 "10 월 혁명"은 '빨치산의 노래 "(또는"계곡을 건너 언덕을 넘어 ")이 도입되고있다. 이 노래는 일본에서는 "들판을 넘어 산을 넘어 '라는 제목으로 알려진이 적군 빨치산이 마지막 남은 연해주 백군을 부수고 마침내 태평양까지 도달 싸움을 부른 것이다 .
1922 년 말, 백군의 붕괴를 지켜본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철수하여 러시아 내전이 종결 된 것이다. 원래 러시아의 '빨치산'라는 말은 본대에 대한 별동대 (유격대)을 의미하는 군사 용어 였지만, 10 월 혁명의 주체가 된 볼셰비키가지지 파의 비 정규군을 즐겨 빨치산라고 칭했다 때문에 이 당시부터 일본에서도 공산주의와 결합하여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연해주를 중심으로 시베리아에 많은 고려인이 거주하고 러시아 국적을 가진 사람도 많았다. 그들 가운데는 징병으로 독소전을 앓은 후 귀환 빨치산 부대를 시작할 사람도 있었다. 또한 의병 투쟁 시절부터 연해주 벗어나 독립 운동을 벌려 온 조선인 망명자도 많아, 그 하나 인 이동휘가 상해 임시 정부의 국무 총리가 레닌의 자금 원조를 얻은 것도 있고, 고려인 빨치산은 항일 독립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
특히 박 이리아 (에루리아 모두)가 이끄는 사할린 부대는 1920 년 (1920 년), 니콜라 옙 스크 사건의 습격에 참여해 유명세를 탔다. 중국 정부의 조사에서는 니콜라 옙 스크 사건의 적군 빨치산 4,300 명 중 조선인이 1,000 명을 차지하고 있었다 [1]. 무엇보다이 尼港 사건으로 인해 일본의 당시 빨치산의 일반적인 이미지는 비적과 다르지 않다고하는 방향으로 기울어 진 [2]. 이시기 러시아 령에서 태어난 고려인뿐만 아니라 독립 무장 투쟁을 지향하고 새롭게 진입하는 조선인도 많고, 그 중에서는 현역의 일본 육군 기병대 중위이면서 탈주 1920 년대 전반, 주로 스챤 빨치산 부대를 이끌고 흰색 군과 싸운 돈 擎天이 유명하다. 그는 직접 일본군과 싸운 것은 아니었지만 상황에서하고 적군에 협력 할 독립 투쟁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尼港 (니콜라 예프 스크)에서 일본인을 포함한 민간인 대량 학살에서 보듯 폭력적인 一旗 세트도 많았다에서 擎天 이끄는 빨치산 부대는 눈에 띄게 훈련 제대로이시기 주둔 일본 군과 표였다 갈등은 피하고 싶었다 적군 지도자의 칭찬도 받았다. 독립 운동의 투사로 한반도에서도 크게 보도 된 인터뷰 기사도 실렸다.
만주의 항일 빨치산 [편집] 중국 공산당에 흡수 된 빨치산 [편집]
1922 년 (다이쇼 11 년) 끝에 일본군의 철수를받은 시베리아는 소련 공산당에 의해 장악되어 일본과의 관계 복원을위한 에 독립을 지향하는 조선인 빨치산은 무장 해제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조선인이 만주로 이동하여 독립 운동의 계속을 시도했지만 시베리아에서 러시아 혁명에 동반 한 경험도있어, 공산주의자가 된 사람도 다수 있었다. 그들은 1923 년 (다이쇼 12 년) 이후 연길 현 반석 현을 중심으로 결집하고 공산주의 청년 조직을 설립했다. 한편, 한반도에서 조선 공산당이 결성되어 있었지만, 제 1 차 조선 공산당 사건으로 만주로 망명하는 것도 단속의 완만 한 만주에서의 활동이 활발했다. 그러나 조선 공산당은 내분이 심하고 만주에서 민족 주의자 (우파) 독립군과도 경쟁하고 암살을 섞은 치열한 내부 경쟁을 위해 항일 활동은 그다지 분위기가 살지 않았다.
1930 년 (1930 년), 코민테른의 의향이 만주의 조선 공산당은 중국 공산당에 흡수되게된다. 중국 공산당 만주 성위원회는이 방침에 따라 "붉은 오월"행동을 지령했다. 조선족이 많은 간도는 얼마나 열심히이 명령을 실행하거나에서 조선인의 중국 공산당 입당 여부를 결정한다는 같은 정책이 간도 5 · 30 사건 (간도 폭동)이 발생한다. 먼저 행동을 일으킨 부대를 이끌었던 인물 중 하나는 돈 一星 (김일성)는 용정의 대성 중학교이었다. 이 폭동은 간헐적으로 이듬해 봄까지 계속되지만, 습격당한 것은 전기 회사와 철교 등 일본의 시설과 부유 한 조선인 · 중국인 100 명 이상의 피해자도 모두 조선인 중국 사람이었다.
1932 년 (1932 년) 관동군의 지배 하에서 만주국이 성립하면 만주 전역에서 反満 항일을 기치로 내거는 무장 단체들이 나섰다. 동북 군벌, 마적, 종교계 무장 단, 조선인 민족 주의자 독립 무장 단체, 그리고 조선인을 포함한 중국 공산당 빨치산이다. 공산당 계의 빨치산은 당초 극소수 였지만, 만주국 측의 교묘 한 선무 소탕 귀순 공작 정책 (집단 부락의 설립)에 의해 다른 무장 단체가 쇠약, 소멸 해 갔다 가운데, 그 잔당을 흡수하면서 가장 오래 만주에 남아 있지만 그로 인해 일본 측에서는 공비라는 비적의 일종이기도했다. 1932 년 (1932 년) 봄 중공 반석 현위원회가 조선인 20여 명으로 군사 부를 만든 것이 만주에서 처음 빨치산이었다. 같은 해 중,이 부대는 230여 명 늘었다. 하지만 당초 세력 확대에 전념하고 또한 그에 따른 내분도 있고 눈에 띄는 전투는 실시하지 않았다. 이듬해 1932 년에는 중앙 사령부에서 만주 각지에 인민 혁명군을 창설하는 단계가 반석 현 빨치산이 핵이되어 마적을 포섭 등으로 인원을 늘려 통화 현으로 지역도 확대 정기적 수백에서 수천 명 내외의 동북 인민 혁명군 제 한 군이 성립되었다. 또한 1934 년 (1934 년)부터 1935 년 (쇼와 10 년) 무렵에는 만주 동부 두 번째 군 다섯째 군이 설립 된 북부에는 제 서너 여섯 ~ 수십 군이 편성되어 했다. 간도에서 1930 년 (1930 년)의 폭동에 이어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매우 좁은 지역에서 소비에트 정부를 표방하고 '토지 사유 폐지, 공동 노동, 공동 생활'을 주창하고 소동을 뿌려 일으키기도했던 것이다. 따라서, 1932 년 (1932 년) 초 무렵부터 빨치산 소부대가 산재 해 중국 공산당에 의한 조직은 늦었지만 빨치산의 핵은 이미 수 있었다. 공산주의자의 시인 槇村 히로시가 고치시에 있으면서 일본 공산당 기관지 무산자 신문 기사를보고, 상상에 "간도 빨치산의 노래"[3]을 만들고 "프롤레타리아 문학 '에 발표 한 1932 년 (1932 년) 봄이다. 동북 인민 혁명군은 두번 정도 한반도에 침략하고 있지만, 가장 세상을 떠들썩하게했던 것이 동흥 사건이다. 1935 년 (쇼와 10 년) 2 월 첫째 군 제 1 독립 사 200 여명이 조선인의 대장 李紅光에 이끌려, 서간도를 남하하고 동결 한 압록강을 건너 평안 북도厚昌 군 동흥 읍을 습격했다. 민간인을 살해하고 금품을 약탈하여 조선인 자산가의 집에 방화하고 16 명을 납치 해 인상했지만, 대장 리 紅光 젊은 여성이라는 소문이 화제가되었다. 동북 인민 혁명군은 자금이 부족했던 탓인지 동흥 사건처럼 약탈 납치를 항상하고 있고, 「간도 빨치산의 노래 '의 이미지에서 멀리이었다. 또한 내분도 많아 "민생단 사건 '에서는 400 여명의 조선인 대원이 숙청 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민생 단은 1932 년 (1932 년)에 조선 총독부가 간도에 발족시킨 민족주의 반공 조선인 조직 이었지만, 잘 작동하지 않고, 동년 안에 해체했다. 따라서 사건이 시작된 시점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지만, 인민 혁명군은 결국 중국 공산당의 조직이며, 많은 수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대원은 배척 소외되는 경향이 있었다 것이다. 1935 년 (쇼와 10 년)에 동북 인민 혁명군 제 한 군사 위원장 겸 총참모장 리 紅光는 전사하지만 李紅 광 지대는 통화 사건 등에서 활약한다. 간도의 김일성 편집 북한 대성 산 혁명 열사 릉에있는 항일 빨치산 군상 1935 년 (쇼와 10 년) 중국 공산당 중앙은 코민테른의 인민 전선 통일 전략에 따라 동북 인민 혁명군을 모든 반일抗満 무장 단체와의 합작을 목표로 재편 할 방침을 세웠다. 따라서 공산주의에 속하지 않는 무장 단체들도 항일의 한 점에서 일치하면 공투하고 흡수하는 것을 목표로하게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동북 항일 련 군"을 참조 또한, 민생단 사건으로 인한 소모도 있고, 동북 인민 혁명군은 1936 년 (쇼와 11 년) 봄 무렵부터 동북 항일 련 군으로 재편되었다. 여기에서 김일성의 빨치산 (훗날 조선 로동당 만주 파 일명 "국외 빨치산 파 ')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한다. 또한 동북 항일 련 군은 민생 단 사건의 반성에서 중국 공산당에 조선인지지 기반을 붙들어 매는 방책으로서 在満韓 인 조국 광복회를 조직 할 방침을 세웠다. 이에 따라 김일성 부대는 함경남도 갑산 군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공산주의 그룹 (훗날 조선 로동당 갑산파 일명 "국내 빨치산 파 ')와 연락을 취하고 공투 관계를 구축했다. 갑산 그룹은 우파 (반공 · 민족주의 계) · 좌파 무투 파 · 온건파 불문하고 조선 독립을 강조하고 정치 단체의 대부분이 한반도 밖에서 활동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조선에 남아 활동 하고 있던 것으로, 독립을 부러워하는 조선인 중에서도 눈에 놓여 있었다고 전해진다. 동북 항일 련 군의 빨치산 활동에서 가장 주목을 모았다되는 것이 1937 년 (쇼와 12 년)의 보천보 습격이지만, 갑산 그룹의 시작에 성공한이 습격 약탈, 납치, 방화 을 따라 동북 인민 혁명군 시절과 변함이 없다.徐大 粛著 "김일성 사상과 정치 체제 '에 따르면"김일성 부대의 병력 보충은 중국인 고생 힘과 조선인 농민을 징발 마을과 마을을 습격 할 때마다 인질로 잡은 청소년 훈련을 실시하고 군인에 지은 또한 식량 조달에서 가장 일반적인 것은 인질을 잡고 부유 한 조선인에게 돈을 강요하는 방법이었다.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인질의 귀를 잘라 낸다 위협 그래도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목을 벨 그렇다고 사람들을 위협했다 "는 것이다. 물론 김일성의 빨치산 활동은 한반도에서 크게 보도되었지만, "대체로 그 만행 약탈을 비난하는 내용의 습격 당한다 만주의 조선인 농민의 고통에 동정을 보냈다 것이 많았다" [4] 상태에서 결코 영웅 취급이 아니었다. 그것에는 시베리아 금 擎天 시절과는 사정이 다릅니다 조선 총독부의 언론 검열이 엄격 해지고 있던 적도 있었다. 전투 보급 어려운 탈주 귀순 등으로 동북 항일 련 군은 소모하고 있고, 김일성을 포함한 잔당은 소련 영토로 도망 쳤다. 그들은 제 88 독립 저격 여단 (소련군)에 편입 되었으나, 대일 전에 참가하는 것은 아니라 북한을 해방 한 것은 소련이었다. 북한의 만주 파 빨치산 편집 평양 조국 해방 전쟁 승리 기념관에 걸린 김일성 장군의 그림 김일성을 중심으로 만주 파 빨치산은 소련군이 점령 한 한반도 북부에 들어가 북한 건국의 핵심이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역사 참조). 해방 후 1945 년 (쇼와 20 년) 10 월 14 일에 북한에 진군 한 소련군은 김일성을 국가의 지도자 (혁명가)로 평양 시민들에게 소개했는데, "1920 년대에 활약 한 투사라면 벌써 은발이다 텐데 "라고 いぶかる 사람이 많았다 고한다 [5]. 원래 일제 시대의 조선은 독립 무장 투쟁을 벌려 "김일성 장군 전설」이 있고, 「일본 육군 사관학교를 나와있는" "의병 투쟁 시절부터 1920 년대까지 활약했다"며 "축 공원 법을 사용하여 백마를 타고 야산을 뛰어했다 "며"백두산을 근거지로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러시아 만주 만주 · 한반도의 국경 부근에서 항일 투쟁을했다 "등이라고했다 [6] [7]. 이 전설 닮고, 金成柱은 1930 년 (1930 년) 이후의 어느 시점에서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8]. "김일성 가짜 설 '을 부인했다 와다 하루키도"'만주 사변 '의 시작과 함께 무장 투쟁을 목표로 한 그는이를 위해 본명 김성주을 숨기고 간도 지방에 흐르는 전설상의 영웅의 이름 김일성을 자칭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9]라고 말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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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역사] “김일성 가짜설”이라는 신화
https://www.facebook.com/sejin.pak8/posts/10155767174337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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