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04

알라딘: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l 이영훈 교수의 환상의 나라 1

이영훈(저자) | 백년동안 | 2018-03-05





반양장본 | 244쪽 | 140*210mm | 389g | ISBN : 9791186061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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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교수의 역사 바로 보기 '환상의 나라' 시리즈 1권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1부 '한국사 제1의 위인', 2부 '세종과 노비제', 3부 '세종과 기생제', 4부 '세종과 사대주의', 5부 '대한민국은 자유인의 공화국이다'로 구성되었다.





머리말 - 004

1. 한국사 제1의 위인 - 015

2. 세종과 노비제
15~17세기 인구의 30~40%는 노비 · 024
양반의 노비 규모 · 026
입역立役과 납공納貢 · 028
노비는 주인의 재물 · 033
노비는 함부로 죽여도 죄가 되지 않았다 · 036
노비 증식의 경로는 양천교혼良賤交婚 · 039
노비제는 기자箕子의 법 · 042
고려와 조선의 사회구성 · 045
고려 노비의 처지는 그리
열악하지 않았다 · 046
태종의 노비제 봉쇄정책 · 050
세종, 노비의 권리를 박탈하다 · 053
주자의 아름다운 말씀 · 057
병길丙吉은 시신에 대해 묻지 않았다 · 061
세종, 양천금혼의 빗장을 풀다 · 062
충노忠奴 미담 · 065
추노推奴 활극 · 069
성군이라면 영조 · 073
죽은 종을 위로하다 · 076
『흥부전』의 세상 · 079

3. 세종과 기생제
김치 종 · 084
낙동강 푸른 물에 · 087
슬픈 향복香卜 · 089
직비直婢 · 093
풍류비風流婢 · 096
기생의 기원 · 097
고려 기생의 신분 · 101
비천卑賤 관념의 심화 · 104
세종, 기생의 딸을 기생으로 삼다 · 107
기녀를 두어 사졸士卒을 접대하라 · 110
위안의 실태 · 114
대를 이어 위안하다 · 117
천산賤産과 천고賤姑 · 119
기생 머리 올리기 · 121
음녀淫女 속공屬公 · 124
19세기의 기생제 · 127
춘향의 꿈 · 132

4. 세종과 사대주의
대몽골 울루스 · 140
이씨 왕가의 내력 · 142
최초의 세계지도 · 145
기자箕子의 나라 · 147
세종, 하늘에 대한 제사를 폐하다 · 151
지성사대至誠事大 · 156
사라진 부월斧鉞 · 160
역월제易月制의 폐지 · 163
도덕국가로의 순화 · 169
백성에게 바른 한자음을
가르치다 · 171
학계라 해도 집단연고의 무리 · 175
최만리崔萬理의 반대 · 178
소중화의 주체성 · 180

5. 대한민국은 자유인의 공화국이다
요약 · 184
몇 가지 추가 · 187
현대 한국사학의 문제점 · 190
자유에 대한 상념 · 194
그대는 자유인인가 · 199
현대판 『소학小學』 · 201
문명사의 대전환 · 203
환상의 성립 ·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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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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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1985). 지곡서당芝谷書堂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1977~1982). 한신대학 경제학과 교수, 성균관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를 거쳐 2002년 이후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로 재직하다가 2017년에 정년을 하였다. 경제사학회, 한국고문서학회, 한국제도경제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2018년 현재는 이승만학당의 교장을 맡고있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후기사회경제사朝鮮後期社會經濟史』(한길사, 1988),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공저, 서...




이영훈의 한 마디
나는 한국의 근대문명은 일제가 이 땅을 지배한 기간에 제도화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로 사람들은 나를 친일파 또는 식민지근대화론이라고 손가락질하였다. 대학을 찾아와 나를 파면하라고 데모한 사람들, 연구실에 들어와 나를 훈계한 대학원생, 연구실 문에 계란을 던지고 도망친 학부생, 나를 공격한 여러 차례의 대자보,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모를 겪었다. 그 모든 매도에도 불구하는 나는 내가 딛고 있는 실증의 토대가 허물어지는 아픔을 느낀 적이 없다. 나는 한국 근대문명의 역사적 경로를 달리 설명함에 성공한 어느 연구자도 알지 못한다.



▶ 「환상의 나라」시리즈를 시작하면서
“환상의 나라, 그 나라는 대한민국이다. 아주 좋다, 멋지다, fantastic하다, 그런 뜻의 환상이 아니다. 허상이다, 착각이다, illusory하다, 그런 뜻의 환상이다.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는데, 따져보니 근거가 없다, 사실이 아니다, 심지어 거짓말로 판명된다, 그런 것이 내가 말하는 환상이다.
환상은 인간들을 큰 신뢰와 협동으로 이끌 수 없다. 환상이 빚은 역사와 현실의 간격은 정신과 육체의 분열을 야기한다. 환상은 그 자체로 반과학이다. 환상은 직시되어야 하며, 적절한 대안과 더불어 극복되어야 한다. 신생 대한민국의 지식인이 감당할 시대적 과제였다. 지난 70년의 건국사를 돌아볼 때 대학을 비롯한 지식사회가 그에 제대로 부응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지식사회는 환상을 조장하는 역할에 골몰하였다. 그 결과 오늘날 이 나라는 갖가지 환상의 굴레에 심하게 옥죄인 가운데 숨쉬기도 어려운 지경이 되고 말았다. 안으로는 한 국민이라 하기 힘들 정도로 이념의 대립이 심한 가운데 밖으로는 우방과 공연한 마찰을 일삼고 있다.
2016년 5월부터 3개월간 어느 인터넷 매체에서 ‘환상의 나라’라는 제목의 강의를 한 것은 그 같은 위기감에서였다. 모두 12개 주제였다. 시청자들의 반응이 컸던 순서로 몇 개를 나열하면,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나라는 누가 팔았는가’ ‘우리 민족, 그 불길함’ ‘위안소의 여인들’ ‘환상의 통일론’ 등이다. 지금의 이 책은 제1강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의 강의노트를 학술서로 평가받을 수 있는 분량과 형식으로 확장한 것이다. 나머지 강의에 대해서도 하나씩 같은 식으로 단행본을 출간할 계획이다.”

▶ 세종과 노비제
17세기 중엽 조선왕조의 인구는 대략 1,200만을 헤아렸다. 그중의 30~40%, 그러니까 360~480만의 인구가 노비 신분이었다. 노비가 그렇게나 많았던가,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어김없는 사실이다. 1606년에 만들어진 경상도 산음현과 단성현의 호적이 전하고 있다. 현재 전하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랜 호적이다. 산음현 호적에서는 인구의 42%가 노비 신분이다. 단성현 호적에서는 64%이다. 1609년에 만들어진 울산부 호적이 있다. 거기서 노비의 인구 비중은 47%이다. 이상이 17세기 초라면, 17세기 말에는 1690년에 만들어진 대구부 호적이 있다. 거기서는 인구의 43%가 노비이다. 이처럼 17세기 경상도의 경우, 호적에 등록된 인구의 42~64%가 노비였다.
경상도 외의 호적으로서는 1663년에 만들어진 한성부 호적을 들 수 있다. 오늘날의 서울 아현동, 가좌동, 합정동 일대의 호적이다. 호적에 등록된 인구는 총 2,374명인데, 그 가운데 1,729명, 곧 73%가 노비이다.
당시 한성부의 인구는 대략 20만이었다. 그중의 절반은 4대문 안의 성내에서, 나머지 절반은 4대문 밖의 성저城底에서 살았다. 위 호적은 17세기 중엽 성저 인구의 근 4분의 3이 노비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성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잘 알다시피 한성부, 곧 서울은 왕실을 비롯하여 귀족적 양반가문이 모여 사는 곳이다.
17세기 서울은 한 마디로 노비들이 바글바글하는 도시였다. 15, 16세기로 올라가면 전하는 호적이 없기 때문에 노비의 인구 비중을 정확히 알기 힘들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17세기보다 많았음은 거의 확실하다.『왕조실록』에 나오는 여러 정보를 종합적으로 검토해보면 15세기 말 총인구 900만 가운데 적어도 40%는 노비였다.
15~16세기 서울에 거주한 양반관료는 아무리 미관말직이라도 100명의 노비는 소유하였다. 관직이 높아지면 그 수가 더욱 많아져 수백 명쯤은 보통이었다. 현재 전하는 분재기分財記 가운데 노비를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은 정3품 관직의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한 이맹현李孟賢이란 사람인데, 총 758명에 달하였다. 그보다 품계가 높은 판서나 정승 급의 고관대작이면 1천 명을 넘기기 어렵지 않았다. 왕족으로 올라가면 아마도 수천 명이었을 것이다. 알려진 최대 규모는 세종의 제5왕자인 광평대군廣平大君과 제8왕자인 영응대군永膺大君이다. 『왕조실록』은 이 두 왕자의 노비가 각각 1만 명을 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고려왕조의 멸망과 조선왕조의 성립은 공동체사회에서 신분제사회로의 이행을 의미하였다. 조선왕조를 연 정치세력은 고려왕조의 전통을 이어 처음에는 노비인구의 확산을 억제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1401년 태종은 노비와 양인과의 결혼을 전면 금지하는 영을 내렸다. 노비는 노奴와 비婢의 결혼만으로 단순 재생될 뿐이라는 노비제 봉쇄정책을 폈다.
1418년 8월 세종의 시대가 열렸다. 1420년 9월 예조판서 허조許稠는 노비가 주인을 고소할 경우 이를 수리하지 말고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허조는 중국 당의 태종이 노가 주인을 고소할 경우 설령 그 내용이 반역에 관한 것이라도 이를 수리하지 않고 노를 참해버린 고사를 그 근거로 제시하였다. 이 같은 허조의 주장에 세종은 동의하였다.
조선의 양반관료들은 노비의 주인 고소가 인륜의 명분에서 정당할 수도 있음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왕조실록』을 보면 노비의 고소를 일체 교형으로 다스리자는 신하들의 주장에 세종은 역시 순순히 동의하였다.
조선 노비제의 확립에 있어서 1422년의 노비고소금지법奴婢告訴禁止法 제정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노예의 진정한 요건은 법 능력의 상실에 있다. 이를 가리켜 올란도 패터슨은 ‘사회적 죽음Social Death’이라 하였다. 노예는 살아 있지만 실은 죽은 자와 마찬가지이다. 타인의 불법 행위에 대해 맞설 권리가 없고 자신을 보호해줄 공동체를 상실한 상태가 노예의 본질이다.
조선왕조에 들어 노비 인구가 크게 팽창하게 된 데에는 세종의 역할이 컸다. 세종은 노비가 주인을 고소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박탈하였다. 이후 노비는 주인의 완전한 사유재산으로 변하였다. 노비를 함부로 죽여도 큰 죄가 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그에 따라 노비 가격이 고려시대에 비해 5배나 뛰었다. 태종은 노비와 양인의 결혼을 금지하는 한편, 비가 양인 남자와 결혼하여 낳은 자식을 양인 신분으로 삼았다. 세종은 노비와 양인의 결혼을 방임했으며, 노비와 양인 남자의 소생을 노비 신분으로 돌렸다. 세종은 노비를 정상의 인류로 간주하지 않았다. 세종은 자주 남편을 바꾼다는 편견에서 비의 정조를 인정하지 않았다. 세종이 비의 소생을 모두 노비로 잡은 것에는 이 같은 노비관이 작용하였다. 이후 노비 인구가 부쩍 증가하는 가운데 한국사에서 노비제의 전성기가 열렸다.

▶ 세종과 기생제
1419년 세종 1년에 평안감사가 기생제와 관련하여 두 가지를 건의하였다. 하나는 기생으로 인해 관리들의 풍기가 문란하니 관리의 기생 간음을 금하자는 것이다. 그는 한 기생을 여러 관리가 돌아가며 간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평안감사의 건의는 여러 신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종에 의해 채택되었다.
다른 하나의 건의는 기생이 모자라니 확충하자는 것이다. 그에 대해 세종이 어떠한 결정을 내렸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이후 역사는 그 같은 방향으로 흘렀다. 우선 각종 비로부터 기생을 보충하거나 그렇게 하자고 했으니 기생은 사실상 비와 동일한 신분으로 간주되었다. 이후 『경국대전』은 교방의 기생은 정원이 230명이며 각 군현의 관비를 3년간 뽑아올려 충당한다고 규정하였다.
흔히들 기생을 춤추고 노래하고 성 접대를 하는 직업인으로 알지만 그렇지 않다. 조선의 기생은 그러한 역을 국가로부터 강요받은 관비에 다름 아니었다. 또한 원 기생의 딸을 기생으로 삼자고 했으니 기생은 그 신분을 세습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실제 세종 10년이면 고급 관료의 기첩이라도 그 자녀가 천역을 면치 못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1431년 1월이면 조선 기생제의 성립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조치가 내려졌다. 세종은 각 고을의 창기가 낳은 자식은 공사公私의 비가 남편을 자주 갈아치우는 예에 준하여 천인으로 삼자는 형조의 건의를 수락하였다. 여기서 기생의 딸을 기생으로, 기생의 아들을 관노로 삼는 신분세습의 율이 공식적으로 결정되었다. 뒤이어 1431년 11월 세종은 관비가 양인 남자와 낳은 자식도 부계를 인정할 수 없으므로 기생의 예에 준하여 모두 천인으로 돌리자는 건의에 찬성하였다.
1432년 3월 조선 노비제의 기틀을 놓은 종모법從母法의 성립은 1년 2개월 전 기생을 대상으로 한 종모법의 성립을 그 출발로 하였다. 따지고 보면 조선 기생제야말로 조선 노비제의 중핵을 이루었다.
조선시대에 걸쳐 중앙정부와 지방관아에는 춤추고 노래하고 성적 위안을 제공하는 기생 신분의 여인들이 있었다. 기생의 신분은 딸에게 세습되었다. 특정 여인에게 성 접대의 역을 강요하고 세습시킨 다른 나라의 예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기생제는 세계사에서 한국사가 지닌 개성적 특질을 상징하고 있다. 그 기생제를 사실상 창출한 군왕이 다름아닌 세종이었다. 기생의 딸은 기생이라는 법은 세종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후 기생은 관비의 신분으로 떨어졌다. 이전 고려시대만 해도 기생은 관비가 아니었다. 나아가 세종은 국경지대의 고을에 군사를 접대할 기생을 설치하였다. 이후 전국의 각 군현에 수십 명씩의 기생이 배치되었다. 세종이 창출한 기생제는 20세기 군 위안부 제도의 역사적 원류를 이루었다.

▶ 세종과 사대주의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천제天祭는 천자의 고유한 예로서 제후는 이를 행할 수 없다는 주장이 신하들로부터 제기되었다. 태조와 태종은 그에 구애되지 않고 천제를 거행하였다. 1419년 세종 1년에 가뭄이 심하였다. 변계량이 원구단에서 천제를 거행할 것을 청하였다. 세종은 “참람한 예는 행함이 불가하다.”고 답하였다. 천제를 지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계량이 수천 년 동안 행해온 예를 폐함은 부당하며, 더구나 조선은 강토가 수천 리로써 중국 내의 백리 제후와 비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에 대해 세종은 “어찌 강토가 수천 리라 하여 천자의 예를 분수없이 행하리오.” 하면서 다시 거절하였다. 이에 변계량은 심한 가뭄을 맞아 제후가 하늘에 제사를 드림이 무슨 잘못인가라는 예의 임시변통론을 내세웠다. 이에 세종은 그 주장을 받아들여 천제를 거행하였다. 막 등극한 22세의 청년 세종은 나이 50세의 중신 변계량을 이길 수 없었다.
세종은 참을성 있게 그의 시대를 기다렸다. 그렇게 성격이 온유하고, 중신을 예우하고, 서둘지 않음이 세종의 훌륭한 인품이다. 그가 치세 당대에 신하들로부터 성군으로 칭송을 받은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천제는 제후가 행할 수 없는 참람한 예라는 세종의 소신은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실행을 보았다. 다음 해 1439년에 큰 가뭄이 들었다. 친히 원구단에 나가 천제를 거행하라는 상소가 있었지만 세종은 거절하였다. 전통적으로 동아시아 왕조국가에 있어서 천제는 종묘와 함께 왕조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최고 수준의 의례였다. 천제는 하늘과의 관계에서, 종묘는 조상신과의 관계에서 국왕의 절대적 권위를 대변하였다. 1443년 천제가 최종 폐지됨으로써 조선왕조의 국가체제는 제후국의 그것으로 충실히 정비되었다.
만국공법 이전의 전근대 세계에서 작고 약한 나라가 크고 강한 나라에 굴종하는 것은 종묘와 사직을 보전하고 백성을 평안케 하는 고육지책이다. 사대는 하는 자나 받는 자나 모두에게 정략적 관계이다. 하는 자는 속마음을 숨기고 받는 자는 상대를 의심한다. 조선 태종조까지의 사대가 그러하였다. 양국 간에는 군사적 긴장이 잠재하였다. 오고가는 사신은 상대국의 정치를 염탐하였다. 세종조에 들어오면 분위기가 바뀐다. 『세종실록』을 읽으면 그 점을 확실히 느낀다. 한마디로 세종은 지성으로 사대하였다.
고려왕조는 군사국가였다. 그 점에서 도덕국가인 조선왕조와 달랐다. 고려는 3만여 명의 중앙군을 보유하였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토지를 지급받고 그로부터 세를 걷어 살았다. 직접 농사를 짓지 않으니 직업 군인으로서 전투력이 강하였다. 군사국가로서 고려는 전쟁에 장수를 파견하는 출정의出征儀라는 군례를 행하였다. 출정이 결정되면 우선 사직단에 제사를 지내고 종묘에 이를 고한다. 이어서 대궐의 뜰에서 출정군의 원수에게 왕이 부월斧?을 내리는 의식을 거행한다. 이 같은 출정의는 천자의 예에 속한다. 부월은 천자의 권위를 상징하였다. 부월을 받은 장수는 대궐문을 나서는 그 순간부터 출정에 관한 모든 일을 처리할 권한을 갖는다. 군령을 어긴 휘하 장수와 사졸을 재량으로 처결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제후국도 출정의를 행했는데, 부월을 내리는 의식은 없었다. 제후에게는 내릴 만한 부월이 없었다. 부월이 없으니 출정군의 대장이 휘하 장수와 사졸을 처결하는 권한에도 제약이 있었다.
1419년 세종 1년에 이종무李從茂가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가 되어 대마도를 정벌하려 갈 때 세종은 한성부 두모포 백사장에서 이종무와 여러 장수를 전송하였을 뿐이다. 공식적인 군례는 없었다. 1433년 여진이 평안도 국경을 침범하여 최윤덕崔潤德이 도절제사都節制使가 되어 출정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세종의 명에 따라 편찬된 오례五禮의 군례에서 출정의는 포함되지 않았다. 세종은 천자의 출정의는 고사하고, 제후의 출정의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 군대가 전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군사에 대한 세종의 자애는 엉뚱하게 조선왕조의 군대를 허물고 있었는지 모른다.

▶ 나가면서
조선왕조시대의 양반 신하 들이 세종을 성군으로 칭송한 사실은 엄연한 객관적 사실이다. 치세 30년간 이룩한 업적은 조선왕조 500여년의 기틀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까지 그를 성군으로 받들어야 하는가?
노비제와 기생제, 그리고 사대주의 국가체제를 정비한 사실은 깡그리 생략하고, 21세기의 리더쉽을 세종에게서 찾으려는 환상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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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어본 팩트위주의 역사책
이찬비 ㅣ 2018-03-27 l 공감(5) ㅣ 댓글(0)



이영훈 교수의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비판하는자들이 10년간 공격한걸로 알고있다. 읽어보기 전까진 알수 없는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누군가의 의도‘아래 읽어오고 공부해왔다. 그러나 정확한건 알고 가야한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한 성군은 맞지만 성역화되어왔다는 사실도 알아야한다.
son2611 ㅣ 2018-03-25 l 공감(5) ㅣ 댓글(0)



좌파문화권력과 맞서는 우파 출판사라는 '백년동안'에서 이영훈의 새 책을 냈다.

http://m.huffingtonpost.kr/gangsoo-jun/story_b_8402758.html
sunhis ㅣ 2018-03-23 l 공감(4) ㅣ 댓글(1)



세종은 양반들의 성군이었다. 많은 백성들이 노예로 편입되었다. 한글은 결과적으로 훌륭한 업적이 되었지만, 중화사상의 전파를 위한 도구였음이 너무 명백하다. 훈민정음 서문에서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라고 한 것을 우리는 왜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까..이영훈 교수의 담대한 도전을 응원한다
바를정별규 ㅣ 2018-03-21 l 공감(4) ㅣ 댓글(0)



노예제, 기생제, 중국에 대한 사대질서 관련 시중의 많은 책들이 단편적인 사례소개 중심인 반면 이 책의 저자는 역사적, 제도적, 총체적으로 관련분야를 분석한다. 자료전개와 논리의 진행이 군더더기 없고 명쾌하므로 단숨에 읽는 맛이 있다. 5장은 많은 부분을 생각케한다. 역사서를 넘은 명저다.
김현규 ㅣ 2018-03-18 l 공감(4) ㅣ 댓글(0)








총 : 9편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로사 ㅣ 2018-04-24 ㅣ 공감(0) ㅣ 댓글 (0)




<한주한책서평단 오디오클립 로사입니다.>



'세종대왕'이라면 대한민국의 위인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성군이다.
각종 드라마와 소설을 통해서도 '세종대왕'은 업적을 떠나 백성을 사랑하는 어진 모습의 완벽한 인간형으로 표현되어 왔다. 나 역시 그런 시각에 이견이 전혀 없었고, 의구심은 커녕 별다른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 책은 '세종대왕'에 대한 책이라기보다는 '노비와 기생의 역사'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제목을 보고는 위인전처럼 세종대왕의 일대기를 다루는 와중에 다만 공보다는 과실에 더 비중을 두는 책일 것이라 짐작했는데, 막상 책을 펴보니 시작부터 '노비제'에 대한 내용을 본격적으로 다룬다. 짧은 1장에서 겨우 몇 페이지를 할애해 세종대왕이 우리 국민에게 어떤 의미이고 위치인지를 살짝 언급할 뿐, 이후 본격적인 내용은 모두 세계사 속 조선의 '노예 제도'로 흐르고 있다.

읽다보면 놀라게 된다. 내가 알던 세종의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정책과 당시 상황에 갖고 있던 고정관념이 산산조각나는 기분이 든다. 또한 세종과 별개로 우리 역사 속 노비들의 삶을 설명한 부분은 정말로 기가막히다. 영조가 노비의 인권을 개선하기 전까지 노비들은 양반이 마음대로 죽여도 별반 죄라고 보지 않을 정도의 위치였다고 한다. "우리 집에 온지 4년이나 되고 또 원래 죽을 죄도 아니었는데 의외로 죽고 말아 마음이 매우 편치 않음이 마치 똥을 사민 것 같아 밤새도록 잠을 못 이루었다."는 서울 양반 오희문의 일기. 발바닥 70대를 치는 벌에 부리던 노가 죽자, 살인과 다름없는 일을 저지른 그는 고작 마음이 편치않은 정도의 가책을 느낀다.

고려 노비의 처지는 그리 열악하지 않았으며 신분 세습의 굴레에도 불구하고 쉽게 해방될 수 있는 존재였다고 한다. 조선에 들어와 고려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태종과 세종을 거치며 노비의 권리는 박탈당한다. 저자는 세종이 일반 백성의 권리를 민주적으로 신장했다는 통설적 이해는 크게 잘못된 것이라 말한다. 1422년의 세종이 만든 노비고소금지법으로 조선의 노예들은 '사회적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이 법이 제정된 이후 노비 살해는 빈번해졌고 세종 자신도 한탄할 정도였다고 한다. 노비를 함부로 죽이는 일을 금하는 법을 제정하려고 하였으나 당대의 명신들이 정치에는 명분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고 세종은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2장에서 자세하게 다뤄지는 세종과 노비제는 충격적인 내용들로 가득한데, 3장의 세종과 기생제, 4장의 세종과 사대주의 역시 다르지 않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을 제목만 보고 읽었다. - 지은이나 출판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읽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읽다보니 좀 이상해서 지은이를 한번 보게 되었다. 이영훈. 저자 약력을 읽어보니 식민사관으로 유명한 서울대 이영훈 교수가 맞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 분이 아마도 백분토론에서 위안부 공창론을 주장란 인물일거다.)
이 책을 읽다보면 내용이나 저자의 사관과 무관하게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 쓴 책과는 차원이 다르게 빈틈이 많아서 묘하게 설득력이 없다는 느낌이 든다. 역사 전공자가 아닌 저자가 자기 입맛에 맞게 자료를 추려서 쓴 개인적인 글 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 정치적인 이유나 사관은 제쳐두고 글 자체가...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읽다가도 '조선은 쓰레기다!'를 설득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저자에 대해 한번쯤 찾아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자유주의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선봉에 서는 모순을 가진 저자가 쓴 글이기에, 소재에 흥미를 갖고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읽다보면 묘하게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편견과 고정관념 없이 책을 읽던 나도 글의 교묘한 뉘앙스에 여러 번 숨을 고르고 책을 읽었다.


성군 이데올로기? kindly ㅣ 2018-04-17 ㅣ 공감(0) ㅣ 댓글 (0)
오디오클립 한 주 한 책 서평단 kindly입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군으로 알고 있는 세종에 대해 강력한 태클을 건다.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라고 질문한다. 생각을 더듬어 보니 세종이 세금을 많이 낮추었고 그래서 이전에 50% 정도된 납세율이 90%이상으로 향상되었다고 기억된다.
저자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경제학과 교수로 퇴임한 이영훈교수다. 저자는 우리나라의 근대화가 일본에 의해 이루어 졌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이다. 책의 말미에는 자유를 말하면서 학교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에게 자유인으로 윤리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자유없이 일본에 의한 근대화가 성립될 수 있는 건지, 자유와 근대화가 상반되게 사용될 수 있는지도 의문스럽다.

이 책은 세종시대에 노비제, 기생제, 사대주의가 우리나라의 문화로 정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선 노비제를 살펴보면, 1422년 이후 조선의 노비는 주인의 어떠한 불법 행위나 악행에 대해 저항할 법 능력을 상실하였다고 한다. 이는 '사회적 죽음'이고 노비는 살아 있지만 실은 죽은자와 마찬가지였다고 말한다.
다음으로 기생제를 보면, 1431년 1월에 기생의 딸을 기생으로, 기생의 아들을 관노로 삼는 신분세습이 공식화되었다고 한다.
세번째는 사대주의이다. 사대주의의 예는 천제를 거부한 것과 한글의 발명이다. 1419년 세종1년에가뭄이 심하여 변계량이 원구단에 천제를 거행할 것을 청하였으나 천자의 예를 분수도 없이 행할 수 없다고 하여 천제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창의적인 문자인 한글이 몽골의 파스타문자와 음성구조가 완벽하게 일치하며,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시대의 북경어의 한자발음을 말한다고 한다. 한자를 사용하는 지배신분의 사람들이 동시대 중국의 기준에서 정확한 중국어를 구사하고 훌륭한 외교문서를 작성할 수 있도록 개발된 발음기호였다고 한다. 이는 2015년 정광교수의 [한글의 발명]에 근거를 들고 있다.

저자의 세종에 대한 시각은 새롭다. 획일화된 학교교육에 의해 하나의 관점만 주입되어진 점은 공감한다. 그러나 현대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지위조차 위태로웠던 왕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불가피성을 인정해줘야 하지 않을까. 또 당시의 사회체제에서 신분제의 부당함을 인식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글 또한 자형만큼은 창조적이고 직접 소리나는 대로 표기하는 변음토착에 성공한 것을 장광교수도 인정하고 있고, '만약에 한글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언어를 사용하고 있을까'라고 상상해 본다면 세종을 성군이라고 칭해도 되지 않을까.

마이너리티 리포트 같은 책 꼴롬이 ㅣ 2018-04-15 ㅣ 공감(0) ㅣ 댓글 (0)


오디오클립 한주한책 서평단 꼴롬이 입니다.


우리가 세종대왕에 대하여 가장먼저 생각되는 단어가 훈민정음 창제와 애민정신이다.
성군이라는 단어의 정의가 명확치 않긴 하지만 통념적으로 배워왔단 세종대왕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와는 사뭇다른 설정이 시선을 끄는 책이다.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1장. 한국사 제1의 위인
2장. 세종과 노비제
3장. 세종과 기생제
4장. 세종과 사대주의
5장. 대한민국은 자유인의 공화국이다.



저자가 세종이 성군이라는 의견에 회의를 갖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 이다.
하나는 조선의 노비제와 기생제가 만들어 졌다는 사실이고,
마지막은 사대주의 국가체계가 정비된 시기라는 사실때문이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동안 많은 사진과 자료와 구체적인 기록을 바탕으로하여
신뢰성을 높이고자하는 저자의 의도가 엿보인다. 그 만큼 주류사학자의 의견과
사뭇다르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아까도 이야기 하였지만 세종이 성군이 아니라는 두가지 이유를 대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저자 스스로가 책에 '15~16세기 조선의 군왕들은 양반관료의 강고한
노비 지배체제에 간섭할 능력이 없었다.'(본문 44쪽)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러저러한 정황을 보아도 저자가 가지는 비주류적인 측면에서의 새로운 관점은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적잖은 신선함을 주는것도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세종의 사대주의
정책은 우리들이 잘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고 이부분에 대하여서는 다시한번 역사적 평가를
내려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마지막 5장에서는 기존의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요약하여 현재의 대한민국이 가지는 헌법적
가치, 즉 주권과 권력, 평등과 자유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는 상당부분 공감이 간다.
특히, 자유인으로써의 상념과 독립에 대한 생각은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함께 고민해
봐야할 논제라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보면 비주류적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본듯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책 말미에
자유와 자유인, 그리고 대한민국의 독립에 대한 부분은 상당히 공감되는 이야기였다.
다양한 관점을 통하여 역사를 다시한번 되짚어보는 좋은 계기로 삼을만한 책이라고 생각된다.

세종은 칼을 차지 않았다 licgos ㅣ 2018-04-13 ㅣ 공감(1) ㅣ 댓글 (0)


오디오클립 한주 한책 서평단 고전세입니다.




세종대왕.

만 원권 지폐, 세종대왕함, 세종특별자치시, 세종로와 세종대왕 동상, 세종문화회관 등 그의 이름을 빼고는 대한민국을 이야기할 수 없다. 지금 구글에서 '세종'이란 키워드로 검색을 하니 35,400,000개의 문서가 검색된다. 조선의 제4대 왕인 세종은 명실공히 한국사 제1의 위인이다.

그런데 세종은 정말 이토록 대한민국 국민에게 칭송받을 인물인가? 책의 제목대로 그는 과연 성군인가? 저자인 이영훈 교수는 이에 대해 역사적인 실증 자료를 가지고 따져보자고 한다. 그는 조선 후기 사회 경제사와 노비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이 연구를 통한 세종에 대한 이영훈 교수의 주장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세종은 역사상 유례를 살펴보기 힘든 노비제를 공고히 했다. “15~17세기에 걸쳐 전체 인구의 적어도 3분의 1은 노비였다. 이전의 고려 시대만 해도 노비의 인구 비중은 10분의 1 미만이었다. 조선왕조에 들어 노비 인구가 크게 팽창하게 된 데에는 세종의 역할이 컸다. 세종은 노비가 주인을 고소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박탈하였다. 이후 노비는 주인의 완전한 사유재산으로 변하였다. 노비를 함부로 죽여도 큰 죄가 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그에 따라 노비 가격이 고려 시대의 비해 5배나 뛰었다. 아버지 태종은 노비와 양인의 결혼을 금지하는 한편, 비가 양인 남자와 결혼하여 낳은 자식을 양인 신분으로 삼았다. 아들 세종은 노비와 양인의 결혼을 방임했으며, 비와 양인 남자의 소생을 노비 신분으로 돌렸다. 세종은 노비를 정상의 인류로 간주하지 않았다. 세종은 자주 남편을 바꾼다는 편견에서 비의 정조를 인정하지 않았다. 세종이 비의 소생을 모두 노비로 잡은 것에는 이 같은 노비관이 작용하였다. 이후 노비 인구가 부쩍 증가하는 가운데 한국사에서 노비제의 전성기가 열렸다.”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둘째, 세종은 기생제를 폐지하기는커녕 공고히 했다. 저자는 “조선시대에 걸쳐 중앙정부와 지방 관아에는 춤추고 노래하고 성적 위안을 제공하는 기생 신분의 여인들이 있었다. 기생의 신분은 딸에게 세습되었다. 특정 여인에게 성 접대의 역을 강요하고 세습시킨 다른 나라의 예가 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만큼 기생제는 세계사에서 한국사가 지닌 개성적 특징을 상징하고 있다. 그 기생제를 사실상 창출한 국왕이 다름 아닌 세종이었다. 기생의 딸은 기생이라는 법은 세종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후 기생은 관비의 신분으로 떨어졌다. 이전 고려 시대만 해도 기생은 관비가 아니었다. 나아가 세종은 국경지대의 고을에 군사를 접대할 기생을 설치하였다. 이후 전국 각 군현에 수십 명씩의 기생이 배치되었다. 세종이 창출한 기생제는 20세기 군 위안부 제도의 역사적 원류를 이루었다.”라고 말한다.

셋째, 세종은 중국 명 나라에 대해 그야말로 지극정성으로 사대하였다. 저자는 “하늘에 대한 제사, 곧 천제는 역대 왕조가 천 년에 걸쳐 행한 최고 수준의 국가의례였다. 세종은 그 천제를 폐지하였다. 천제는 천자의 예로서 제후가 거행할 수 없다는 명분에서였다. 세종은 독립국의 군국 의지를 상징하는 출정의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세종은 명의 황제를 섬김에 있어서 성과 예를 다하였다. 세종은 부왕의 죽음을 맞이하여 역대 군왕이 행한 25일상을 폐지하고 3년 상을 지냄으로써 왕례를 가례화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선의 국가체제는 천자→제후→대부→사→서→천의 위계로 짜인 예의 국제질서로 재편성되었다. 고려왕조가 외적의 침입을 자력으로 방어한 군사국가였음에 비해, 조선왕조는 예의 국제질서에 부동의 안정성을 구가한 도덕국가였다.”라고 말한다.

더불어 대한민국 국민들이 세종을 세종대왕으로 칭송하는 이유는 한문을 모르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훈민정음' 즉 오늘날의 '한글'을 창제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저자는 자신의 전문분야는 아니지만 정광 교수의 <한글의 발명>이라는 책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종이 독자의 문자를 개발하게 된 계기는 동시대 조선의 한자 발음과 중국의 그것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동시대 조선의 한자 발음은 이 땅에 한자와 그 발음이 유입된 이래 오랜 세월을 거쳐 10세기경에 정착한 것으로서 대략 수당시대의 중국어와 일치하였다. 그런데 원명 시대에 걸쳐 중국어의 중심이 북경어로 바뀌었다. 그에 따라 양국 간 문자와 언어의 소통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에 세종은 동시대 북경어 중심의 한자 발음을 정확히 표기할 목적에서 발음기호를 창제하였다. 그것이 훈민정음이었다. 글자의 뜻 그래도 백성에게 가르칠 바른 음을 표기한 기호였다. 바른 음 그것은 동시대 북경어의 한자 발음을 말하였다. 통설대로 훈민정음은 하층 서민이 쉽고 편리하게 쓸 수 있도록 개발한 문자가 아니었다. 한자를 사용하는 지배 신분의 사람들이 동시대 중국의 기준에서 정확한 중국어를 구사하고 훌륭한 외교문서를 작성하고 아름다운 시문을 지을 수 있도록 개발된 발음기호였다.” 즉 세종은 한문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이 아니라 중국과의 의사소통을 제대로 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중국에 대한 지극한 사대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저자는 세종에 대해 이렇게 무작정 비판만 하지는 않는다. 세종은 이미 당대의 양반들로부터 조선의 요순 임금과 같다는 최대의 칭송을 받았다는 점을 누구보다도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저자는 "조선의 국가체제는 <경국대전>의 편찬에 이르러 중국의 황제를 정점으로 하여 조선의 서민에게까지 이르는 차등적 신분과 예의 질서를 구조화하였다. 그 과정에서 독립군을 상징하는 군국의 의지는 출정의가 군례에서 배제됨에서 보듯이 현저하게 쇠퇴하였다. 이 나라는 점점 예의 질서로 부지되는 도덕국가로 순화되어갔다. 그럼에도 국가의 지배력은 강고하였다. 예의 질서가 천자를 정점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15~16세기의 천하는 명 제국을 중심으로 태평성대를 구가하였다. 그런 가운데 조선왕조가 구축한 예의 국제질서로서 국가체제는 부동의 안전성을 구가하였다. 나는 이 같은 조선왕조의 국가체제가 당대의 세계관, 정치철학, 국제 환경과의 관련에서 구현하는 합리성을 높이 평가한다. 세종은 그러한 국가체제를 구축함에 큰 공적을 남겼다. 앞서 강조한 대로 세종은 역사가 그에게 요구하는 책무를 훌륭하게 감당하였다. 그 이유로 그는 치제 당대에 이미 성군으로 칭송을 받았다. 나는 그 점을 어느 역사가보다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평가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즉 저자는 세종의 업적에 대해 인정할 것은 인정하되, 잘못은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고 말한다. 성리학에 입각한 중국에 대한 철저한 사대주의가 조선왕조 오백 년이라는 번영을 가져왔지만, 반대로 서양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데는 인색했다. 반면 일본은 미국 페리 제독에 의해 개항 후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화했다. 그 결과는 임진왜란을 시작으로 결국 36년 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세종의 지성 어린 사대가 이런 결과를 초래한 밑바탕이 되었다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우리나라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 되어 간신히 독립했지만, 이후 북한은 소련에 의해 남한은 미국에 의해 분리되고 동족 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까지 치르게 된다. 이후 대한민국은 미국이라는 강대국을 의지해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뤄내고, 눈부신 경제성장을 발판으로 선진국의 문턱에 와 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여기까지는 왔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지금까지는 선진국들의 선례를 따라 그 길을 차곡차곡 걸어갔지만, 지금부터는 자신만의 길을 찾아야 한다. 즉 지금까지는 '따라 하기'가 통했지만, 이제부터는 직접 길을 만들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이 시점에서 갈팡질팡하며 혼돈의 길을 걷고 있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심지어 건국 세력이 한데 뒤엉켜 아직도 구 시대의 감각으로 서로 자기가 옳다고 우격다짐하고 있는 꼴이다.

각성해야 한다. 각자의 세력이 자신을 뒤엎고, 각 개인이 자기를 죽이는 자기 살해를 통해 새로운 철학과 이념을 제시하고 국론이 통일되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발전은 여기까지가 될 것이다. 중요하고도 어려운 시기임에는 분명하다.





세종대왕이 성군이 아니라면 하지영 ㅣ 2018-04-06 ㅣ 공감(0) ㅣ 댓글 (0)


한주한책서평단

제목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이영훈 지음

백년동안



보통 서평을 접하면 저자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하진않지만 본서의 저자의 어느정도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해보게한다. 며칠전 4.3제주사건에 대한 재조명이 미디어에서 일어났다.70년동안 금기시되었던 제주에서 7년간 일어난 4.3사태말이다.본인도 기회가 되어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정보란 주어지지않으면 얻기어려운것인것처럼 시대가 시대인만큼 이제는 말하여지는 것들이 종종 일어난다.

저자는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를 마지막까지 정년퇴임하고 이승만학당의 교장을 하고 있다.정규재tv에서도 강의를 하고 있단다. 이른바 보수내지 수구세력을 고집하고 있는 굳은 결의의 사람인듯하다. 그런한 이가 세종대왕에 대해서 우리가 잘 알지못하는 면을 기술해준다니 흥미진진했다. 이데올로기나 색깔론을 떠나 기존의 생각을 갖고 있는 객체에 대한 새로운 조명은 결과를 떠나 매우 신선한것아닌가. 그 시도가 왜곡되고 음모론적이라 하여도 사실에 입각한 연구는 그 노력은 가상하게 여겨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종대왕에 대한 우리 대한민국 국민의 인기는 절정이다. 본서는 여기에 대한 세종대왕의 새로운 접근연구중 하나이다.사실 한글의 독창성에 대한 의문이나 폄하된 의견도 일각에서 들어본적있다. 한글 사용을 널리 전파사용하게 한것도 일본의 음모적 정치행위라는 것이다. 사실확인은 못하였지만 아무튼 왜 이런 생각까지 할까라는 흥미로움으로 읽기시작했다.



크게보자면 한국의 못된제도나 뿌리깊이 있는 폐습의 정착을 세종대왕의 시기와 맞물리게 지적했다. 노비제와 기생제도,그리고 사대주의이다.

먼저 노비제이다. 노비가 인구의 30-40%나 차지했었다.양반은 입역과 납공을 통해 대를 이어 군림해왔다. 애완동물보다 못한 대우를 받고 양천교혼을 통해 노비의 수를 증식시켜온 것이다.중국 은나라의 기자가 야만의 땅인 조선에 문명을 전수한 것으로 세종이 정착시킨것이고 주장한다.고려시대에도 노비제는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조선의 노비제를 보다 철옹성화되었다한다.후의 영조가 노비의 인권을 보호하고 노비에서 일부 해방되는 것을 정책하였다고 하며 세종대왕의 노비제도를 조명했다.

두 번째로 기생제도이다.노비제에 기초한 기생제도는 여자를 노비화시켜 남자들의 욕망을 충만시키는 제도이다. 이순신장군의 기생제도활용용례는 가히 놀랄만한 저자의 위험하고도 치졸한 졸필아닌가싶다. 누구나 시대의 큰흐름을 거슬를수는 없다. 자신의 생각이 현시대에 비추어 현격히 정의롭고 뛰어나기도 확률적으로 어렵지만 개인적인 힘은 시대흐름의 유속을 거스르기가 어려운 것이다.그러나 나의 생각또한 현시대로부터 영향받은 것으로 나아닌 것은 틀리고 나의 생각만 맞다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다수의 의견이 중요한 것이다.일부세력의 이익만을 위해 국민이 휘둘리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지만 정보를 차단하고 무력으로 탄압하지만 않는다면 안분지족하는 대다수의 사람이 있다면 그 역사적 평가는 후대에 맡기어 시간을 두고 평가 받아야 하는 것이라 본인은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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