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송시열은 골수 성리학탈레반답게 상업을 천시하고 화폐 사용에 반대했지.
타브가치
2015. 1. 24.
전략]숙종 9년(1683) 송시열이 상경하여 입궐하게 되자, 세간에는 "송시열이 입조하면 임금께 전화(錢貨;금속화폐)를 혁파하고 돼지의 도살을 금
지하도록 청할 것이다" 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에 그는 입궐한 다음 아래와 같이 자신의 생각이 그와 정반대임을 설명했다.
"대저 화폐의 사용은 남곡여포(男穀女布)의 용도를 넉넉히 하니 공사(公私) 간에 이익되는 바가 큽니다. 때문에 신은 항상 그것을 혁파할까 두려
워했습니다. 화폐를 혁파하고자 하는 생각에서 이같은 말을 만들어 시장의 민들(市民)로 하여금 갑자기 그 이익을 잃게 한다면, 백성을 굶주리게
하는 폐해로 이보다 심한 것이 더 어디 있겠습니까? 또 근래 경외(京外)에서 모두 돼지 사육을 업으로 삼는다고 하니, 신은 이로 인해 소를 죽이는
폐단이 점차 줄어들 것이라 하여 기뻐했습니다. 이제 오히려 신이 돼지 사육의 금지를 청하는 상소를 올린다 하여 평안도와 황해도의 중간상인들
이 중간에 낭패하여 본리(本利)를 잃고 그 지역 백성들도 피해를 보았다 하니 이를 어찌합니까?"35)
이는 곧 자신은 항간의 소문처럼 상업을 억제하고자 하는 억말론자(抑末論者)가 아니라는 해명이다.옮긴이 주) 실제로 송시열은 상업의 발달을
전제로 하여 화폐 유통을 한층 활성화시키기 위해 세금을 돈으로 납부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신의 생각으로는 동전(銅錢)으로 세금을 납부하게(代錢) 하면 공사 양 쪽이 모두 편안해지지 않을까 합니다. 혹자는 놋쇠나 구리는 토산이 아니
므로 끝없이 만들어 낼 수 없다고 말하지만, 신이 상고해보건대 옛날에는 (동전 이외에도) 철전(鐵錢)이 있어 가까이로는 송나라와 고려에서 통용
된 바가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말하자면 지금 변통(變通)을 하더라도 조금도 걸릴 것이 없는데 유사(有司)의 신료들이 이와 같이 어렵다 하니
신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36)
송시열의 이러한 대전납(代錢納) 실시 주장은 본래 부세의 포납화(布納化) 과정에서 실무를 맡고 있던 이서층(吏胥層)들이 포의 품질을 조작, 납
세자 일반을 수탈하는 양상을 막고자 하는 취지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자연히 대전납이 원활히 실시되기 위해서는 응당 농민들의 화폐 취득, 즉
그들이 생산한 농산물이 상품으로서 시장에서 거래되는 양상이 전제되어야 했고, 더 나아가서는 농산물의 상품화를 가능케 할 유통경제의 발달
또한 전제되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송시열의 대전납 구상은, 그가 농민들이 상업활동을 통해 화폐를 획득할 수 있는 장시(場市)가 농촌사회 곳곳
에 존재하던 현실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후략](pp.157~158)
35):『宋子大全』卷17,「引咎仍乞致仕箚」.
옮긴이 주): 그리고 오늘날에도 이러한 "항간의 소문"은, 1683년 무렵보다 더 심각했으면 심각했지 덜하지는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36):『宋子大全』卷16,「疏箚 二疏」.
- 백승철,「17세기 서인 노론의 상업관과 상업정책론」(『역사와 현실』33,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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