东学党起义[编辑]
东学党起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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参战方 | ||||||||
朝鲜 大清 | 东学农民军 | 日本 | ||||||
指挥官与领导者 | ||||||||
朝鮮高宗 李容泰 洪啓薰 李学承 具相祖 成夏泳 张容镇 李基东 李圭泰 光緒帝 李鴻章 叶志超 衞汝貴 马玉昆 | 全琫準 崔時亨 孫秉熙 金開南 孙华仲 李邦彦 崔景善 金德明 | 明治天皇 山縣有朋 伊東祐亨 乃木希典 | ||||||
兵力 | ||||||||
3,000人至50,000人朝鮮軍 | 15,000人至300,000人南接叛軍 10,000人至300,000人北接叛軍 | 500人至3,000人 | ||||||
伤亡与损失 | ||||||||
6,000人陣亡 | 數萬人陣亡 | 200人陣亡 |
东学党起义,朝鲜称甲午农民战争(朝鲜语:갑오 농민 전쟁/甲午農民戰爭 Gabo Nongmin Jeonjaeng),韩国称东学农民革命(韩语: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东学革命(韩语:동학 혁명/東學革命 Donghak Hyeongmyeong)或东学农民运动(韩语:동학 농민 운동/東學農民運動 Donghak Nongmin Undong),是19世纪下半叶在朝鲜发生的一次反对两班贵族和日本等外国势力的農民武装起义运动,是中日甲午战争的導火線。
东学党起义分为两个部分,是朝鲜半岛历史上的一次以惩治贪官污吏,斥倭斥洋为目的的农民起义。第一次起义主要是反封建统治的斗争。1894年1月10日,东学南接派代表人物全琫准在全罗道古阜率领当地农民起义。起义军攻克古阜后,大败朝鲜朝廷派来镇压的官兵,起义队伍不断扩大,很快控制朝鲜南方三道,并最终攻下全罗道首府全州。此后,农民起义在朝鲜全国范围内形成规模。朝鲜封建统治者一方面向清政府请求援兵,一方面与农民起义军议和。双方最终签署《全州和约》,停火撤军,并设立执纲所改革弊政。
第二次起义主要是反侵略的斗争。清朝援兵到达朝鲜后,蓄谋已久的日本借机以保护使馆和侨民安全为由向朝鲜增兵,最终导致中日甲午战争的爆发。为抵御日本侵略,全琫准带领农民军北上再次起义。由于武器装备落后,缺乏正规军事训练,农民起义军在忠清道公州的战役中失利,此后一蹶不振。全琫准后因叛徒出卖被捕,后被日本人和亲日政府处死。
퉁학당 봉기[ 편집 ]
퉁학당 봉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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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정당 | ||||||||
한국 청나라 | 동학농민군 | 일본 | ||||||
지휘관과 지도자 | ||||||||
조선 고종 이용태이용태 이학 승 구상조 성하영 진 이기동 ( 이규태 광서제 이홍장 예지 차오 웨이 루귀 마유쿤 | 천준 , 최시형 , 선병희, 김개남 , 순화중, 이방 연, 최경산, 김 데명 | 메이지 텐후산현 이토 아리토모 노기 노기 노조미 | ||||||
군대 | ||||||||
북한군 3,000~50,000명 | 남쪽에서 15,000~300,000명이 반군과 맞서고 있습니다. 북쪽에서 10,000~300,000명이 반군과 맞서고 있습니다. | 500~3,000명 | ||||||
사상자와 손실 | ||||||||
6,000명 사망 | 수만명이 사망 | 200명 사망 |
북한에서는 동학당의 봉기를 중일전쟁 ( 한국어: 갑오농민전쟁 / 가보 농민전쟁 ) 이라고 불렀고 , 남한 에서는 이를 동학농민혁명 ( 한국어: 동학농민혁명 / 동학농민혁명)이라고 불렀다 . ), 동학혁명 ( 한국어: 동학혁명 / 동학 형명 ) 또는 동학농민운동 ( 한국어: 동학농민 운동 / 동학농민 운동 )은 19세기 후반 북한에서 일어난 반대운동이었다 . 두 귀족 집단과 일본 등 외세에 의한 농민 봉기는 중일전쟁 의 도화선 이었다 .
동학당봉기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는 한반도 역사상 부패한 관료들을 징벌하고 일본인과 외국인을 배척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농민봉기였다. 첫 번째 봉기는 주로 봉건 통치에 반대하는 투쟁이었습니다. 1894년 1월 10일, 동학 남계파 의 대표인 권준준 이 전라도 에서 농민봉기를 주도했다 . 반란군은 구푸를 함락시킨 후 이를 진압하기 위해 조선 조정에서 파견한 장병들을 물리쳤고, 반란군은 계속 세력을 키워 곧 한국 남부 3도를 장악하고 마침내 전라도의 수도인 전주를 함락 시켰다 . 이후 농민봉기는 북한 전역으로 확산됐다. 한국의 봉건 지배자들은 청 정부에 지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농민 봉기군과 평화 협상을 벌였습니다. 양측은 마침내 '취안저우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총격을 중단하고 군대를 철수했으며, 나쁜 정책을 개혁하기 위해 사무국을 설립했습니다.
두 번째 봉기는 주로 침략에 대한 투쟁이었습니다. 청나라 지원군이 북한에 상륙한 후, 오랫동안 계획했던 일본은 대사관과 재외국민의 안전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북한에 추가 병력 파병을 기회로 잡았고, 이는 결국 중화인민공화국의 발발로 이어졌다. 일본 청일 전쟁 .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해 관준은 농민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다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농민반군은 무기와 장비의 낙후 와 정식 군사훈련 부족으로 인해 충청도 공주 전투에서 패 하고 이후 쇠퇴해 왔다. Quan Quan은 나중에 반역자로 체포되어 나중에 일본과 친일 정부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배경 [ 편집 ]
북한이 개항 이후 외부세계와 폐쇄되어 있던 북한은 일본과 유럽, 미국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청나라는 북한에 대한 종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북한의 내정과 외교에 자주 간섭했고, 북한의 런오 반란 과 가신정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 여러 나라, 특히 일본의 강대국들은 북한에서 막대한 부를 찾아 경제적 이익을 추구했습니다. 대내외적 어려움 속에서도 조선의 퇴폐적인 봉건 지배계급은 여전히 과도한 세금과 부과금을 부과하여 인민들을 곤경에 빠뜨리고 농민봉기를 잇달아 안겨주었습니다. [1] : 479-483 [2] : 373-408
동시에 천주교 로 대표되는 서양문화(' 서학 ')가 한국 전통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1860년 경주 출신인 최지유는 수년간 도교를 수행하며 깨달음을 얻으며 서양학에 맞서기 위해 ' 동학 '을 창설했다 . 최지유는 “유교는 명도에 얽매여 신비에 이르지 못하고, 불교는 침묵에 들어와 비교할 수 없고, 도교는 길고 자연스러우며 평화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진다.... 서구종교는 나라를 멸망시키고 민족을 멸망시키는 사교이다." 그는 “신이 갑자기 그의 초가집에 찾아와 그에게 불로장생의 비약과 주문을 주시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설교하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라고 명령하셨다”고 주장했다. [3] [4]
반외종교, 반침략사상을 내세운 동학은 만인은 평등하다는 사상을 주창하고 신도가 많아지며 세력이 계속 커져 한국 봉건 지배자들의 우려를 샀다. 동학도 신을 믿었기 때문에 조선 조정에서는 동학과 천주교 모두 이단으로 간주하여 탄압하였다. 최지유는 1864년 4월 15일 좌파 사상 으로 국민을 혼란시킨 죄로 경상도 관찰사 서헌순 에 의해 처형 되었다 . 동학의 제2대 지도자 최시형은 선조들의 원한을 풀고 동하오를 부흥시키기 위해 여러 차례 청원과 반란을 일으켰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고충고발운동과 함께 '일본인 징벌 , 외국인 추방'이라는 기치 아래 동학당이 결성되기 시작했다 . 1893년 동학이 해산된 이후에도 조선 조정의 동학신자들에 대한 탄압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결국 동학당봉기가 발발하게 되었다 .
이후 [ 편집 ]
첫 번째 봉기 : 반봉건 투쟁
구푸 농민 봉기 [ 편집 ]
1892년, 부패한 관료 조병갑이 전라북도의 쌀 유통 중심지 인 구푸 의 주지사로 취임했습니다 . 자오빙가는 농민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는 동시에 시장에서 저렴한 가격에 구입한 질 낮은 쌀을 국고에 넘겨 막대한 이익을 얻었습니다. 1893년 12월, 불만을 품은 고푸(Gufu)의 농민 40여 명이 야멘(Yamen)족으로 가서 논쟁을 벌였으나 조병가(趙熙峯)는 그들을 폭도라고 생각하여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했습니다. 이듬해 1월, 동학당 구푸 지도자 전건준( Quan Jianzhun)의 아버지인 권창혁(Quan Changhyuk )은 60명이 넘는 농부들을 이끌고 현정부에 가서 자오병가(Zhao Bingjia)에게 자신의 나쁜 정책을 바꾸라고 요구했다가 다시 투옥되었습니다. 취안장혁(Quan Zhanghyuk) 노인은 감옥에서 구타를 당해 사망했습니다. [5] : 10-11 [2] : 408-409 [4]
1894년 1월 10일(음력 2월 15일), 전준준은 고푸현과 태안현의 농민 수천 명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낫 , 삽 , 나무 막대기 로 무장한 농민들은 재빨리 구푸현 관청을 점령하고 무기 창고를 점거했습니다. 자오빙자(Zhao Bingjia)는 겁에 질려 달아났다.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은 토지 증서를 불태우고 시체를 팔고 무고한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고 창고를 열어 곡물을 비축했으며 근처의 퉁학당과 접촉해 지도권을 장악하고 '국가와 인민을 돕기' 위해 함께 노력했다. 전라도감찰국은 더욱 사악한 장흥현 사신 이용태 에게 800명의 장교와 병사들을 이끌고 구푸로 가서 반란을 진압하도록 지시했다. 3월 29일, 전권은 반군을 이끌고 태인현을 정복하고 군사의 요충지인 백산을 재빨리 함락시켰다. 반란 농민들은 백산을 기지로 삼고 기존 인력과 탈북 인력을 재편성해 13,000명의 반란군을 구성했다. 개편된 반군은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고, 충효하고, 천하를 도우며 백성을 평안하게 하고,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고, 성도를 밝히고, 군대를 몰아낸다”는 행동계획을 제시했다. 베이징, 모든 강자를 쓸어버리자.” 슬로건은 “강자를 파괴하라”이다. [5] : 12-14 [1] : 485-487 [2] : 410
봉기는 충격에 빠뜨렸고, 조선 법원은 양호 모집사 홍계훈 을 파견하여 미국의무기를 1000여 명을 에서 북한까지바다로 군산포, 고푸로 진압하러 갔다. . 동시에 조선 조정은전라도정찰사 김문현을 파견해 대대군과 지원상인 등으로 구성된 천여 명이 십자군을 지휘하게 했다. 현 전투 에서 김문현을 격파했다원정대는 거의 전멸당했습니다. 진문쉬안은 남은 병사 몇 명을 이끌고 패배하여전주. 4월 7일 홍치순은 전주에 도착하여 김문현의 참패 소식을 듣고 반란군의 기세를 두려워하여 성안에 모여 조정에 지원군을 요청하자 많은 병사들이 도망쳤다. [5] : 15-17 [1] : 485-487 [2] : 411-412
일 반군은 흥덕군과 고창을 점령 하고 모장 을 점령 모창에서 반군은 포고문을 발표했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반군에 합류했고 "팀의 길이는 3마일"이었습니다. 4월 18일 취안저우 (泉州) 에 웅크려 있던 홍기순은 황실의 지원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성을 떠나 남쪽으로 가서 관준을 추격했고, 4월 21일 영광 까지 추격했다 . 4월 23일, 전권은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돌아가 홍치순을 격파하고 수많은 첨단 무기와 탄약, 대포 3개를 탈취했습니다. 반란군은 승리를 틈타 추격하여 영광, 선평 , 무안을 차례로 정복 하고 곧 남삼도를 장악하였다. [5] : 17-20 [1] : 487-488 [2] : 412
전주평화조약 [ 편집 ]
홍계훈을 격파한 군대를 이끌고 전라도 수도인 전주에 도착 4 월 28 도착했다. 홍치순(Hong Qixun)이 바짝 뒤따랐다. Quan Junzhun은 Hong Qixun이 Quanzhou에 도착하기 직전에 공격을 시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정오가 되자 반군은 성문에서부터 맹렬한 공격을 가했고, 성안의 주민들도 잇따라 대응했다. 취안저우(泉州)의 재판관 민용생(河永聖)은 겁에 질려 도망쳤고, 성을 지키던 병사들은 사방으로 도망쳤다. 취안저우시는 취안준준(Quan Zhunzhun)의 반란군에 의해 빠르게 함락되었고, "국가를 지지하고 인민에게 평화를 가져다준다"와 "폭력을 근절하고 인민에게 평화를 가져다준다"라는 깃발이 도시 꼭대기에 휘날렸습니다. 홍치순은 수도군 1,500명을 취안저우(泉州)로 이끌고 취안저우(泉州) 남쪽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만산(萬山)에서 반군을 포격했다. 그러나 반란군은 성을 방어하고 용감하게 저항했고, 홍치순은 취안저우성을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5] : 20~22 [1] : 488 [2] : 412~414
전라도의 도읍인 전주는 조선의 조상인 이성계 ( 전주 이씨 가문 ) 의 본가 이다. 반란군의 전주 함락은 한국 전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충청도 , 경상도, 경기 , 강원도 , 황해도 , 남부 지방 등지 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나 초원불이 일어날 가능성이 생겼다. 전준은 원래 충청도 봉기 당시 농민들과 연합하여 북진하여 서울을 직접 점령하였다 . 그러나 북으로 가려는 계획은 동학의 제2대 도사인 최시형(崔秀興)과 다른 지도자들의 확고한 반대에 부딪혔다. 나라의 역적과 종파의 역적.. 힘을 모아 쳐부수어야 합니다." 겁에 질린 한국의 봉건 지배자들은 반란군이 북으로 이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 청 정부에 지원군을 호소했습니다. 한편 , 그들은 홍치순과 신임 전라도감찰 진화진에게 반군과 평화협상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반군과 장교·군인 간의 전투는 분명 고대 도시 전주의 폐허에 막대한 피해를 입힐 것이며, 외세가 혼란을 틈타 북한을 침공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들은 양측이 주 전체를 대피시키고 반군의 요구에 동의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반란자들의 사상자가 심하고 농사철이 바쁜 시기였기 때문에 많은 농민 반란군들이 싸우기를 꺼려했고, 관준은 마침내 조정과 화해하기로 합의했다. 양측은 6월 10일 '취안저우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전투를 중단하고 군대를 철수했다. '평화 조약'에 따라 황실은 반군의 요구 사항 12가지에 동의했습니다. [5] : 25-28 [1] : 488-489 [2] : 414-416
- 정부와 신자들 사이의 오랜 원한을 없애고 공동 거버넌스를 달성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십시오.
- 부패한 공직자들의 범죄를 조사하여 엄중히 처벌하라
- 포악한 부자들을 엄중하게 처벌하라
- 나쁜 학자들을 엄중히 처벌하라
- 노예 문서 굽기
- 7종 불가촉천민 처우 개선하고 백인들에게 평양모자 쓰라고 강요하지 말라
- 젊은 과부들의 재혼을 허용하다
- 모든 과도한 세금 및 잡세를 폐지합니다.
- 클랜을 돌파하고 관리를 임명하세요
- 일본과 연루된 사람들을 엄중히 처벌하라
- 과거의 모든 공공 및 민간 부채를 폐지합니다.
- 땅을 공평하게 나누다
아울러 양측은 협약 이행을 위한 사무국을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전주평화협정이 체결된 후 반란군은 전주 에서 철수하여 순창과 남원 지역으로 퇴각하였다. Quan Zhunzhun과 같은 농민 봉기 지도자들의 사업은 행정 기관 설립으로 전환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무국은 집행부와 서기, 도감, 집사, 기타 평의회 구성원으로 구성됩니다. 모든 직급의 공무원은 나쁜 통치를 개혁하기 위해 행정부를 지원해야 합니다. 전라도 53개 군에 단속사무소가 설치되어 있다. 수도 전주에도 광역시청이 설치됐다. 그러나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의 요구는 간부들의 방해로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 [5] : 28-29 [1] : 489 [2] : 418-420
제2차 인티파다: 침략에 맞서는 투쟁 [ 편집 ]
청일전쟁 발발 [ 편집 ]
1894년 6월 8일부터 10일까지 북한의 요청으로 청나라 정부 가 파견한 지원군이 서울 남쪽 아산 에 주둔했다 . 이때 북한 정부는 농민 반군과 화해했다. 일본군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청군은 서울에 입항하지 않았고, 군함도 인천항 에 입항하지 않았다 . 일본 은 북한이 청나라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대사관과 재외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북한에 추가 병력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6월 13일 북한 정부는 위안스카이 에게 서한을 보내 일본군의 침략을 피하기 위해 청군 철수를 요청했다. 청 정부는 북한의 철군 요구에 즉각 동의하고 일본에 양측이 동시에 철군하자고 제안했다. 일본은 “일중이 공동으로 북한 내정을 개혁하자”고 제안했지만 청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5] : 30 [1] : 490 [2] : 420-421
이후 일본은 북한에 '내정 개혁'이나 무력 사용을 요구하는 등 일방적으로 북한을 압박해 왔다. 7월 20일 일본은 북한에 청나라 정부와 체결한 모든 조약을 3일 이내에 파기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3일의 시한이 다가온 7월 23일 이른 아침, 일본군은 조선궁을 함락시키고 민비파를 무너뜨린 뒤 고종 황제 에게 국권을 흥선 대원군에게 이양 하고 김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을 세웠다. 홍지 . 일본은 즉각 진훙지 정부를 선동해 청 정부와의 모든 조약을 파기하고 청군을 추방하도록 일본에 맡겼다. [5] : 31 [1] : 490~491 [2] : 421
정박한 청 군함을 포격했는데, ' 도요 해전' 으로 알려져 있다 . 1894~1894년 청일전쟁 당시 청군은 전쟁에서 꾸준히 후퇴했다 . 9월 초 일본군은 청군을 한국에서 몰아냈고, 전장은 한반도 에서 중국 으로 옮겨갔다 . [5] : 31 [1] : 491 [2] : 422
공주 결전 [ 편집 ]
청군이 한반도에서 추방된 후 진홍지의 친일정부와 일본군은 농민반군에게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 전준준은 산리 읍 각지 에서 동학제 지도자들과 제2차 봉기를 논의했다 . 그러나 충청도 최시형 으로 대표되는 북부동맹세력은 여전히 북측 으로 향하는 전라도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홍지의 친일정부와 일본군이 동학신자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자 결국 북방파도 남동맹파에 합류하여 왜적과 맞서 싸우기 위해 북진하게 된다. 10월 15일, 관준은 충청남도 의 곡물 유통 중심지인 논산을 점령하기 위해 각지에서 모인 반란군을 이끌었다 . 다음날 반군은 포고문을 발표하고 일본의 침략과 친일파 의 반역 행위를 맹렬히 규탄하고 국민들에게 반군에 동참하여 '군대를 북경으로 몰아넣어 강자들을 섬멸하고, 거룩한 도를 밝히고 세상과 백성을 도우라." [5] : 32-34 [1] : 491-492 [2] : 422-423
10월 23일 반란군은 경천에 도착해 충청도 공주 에 접근했다 . 25일 반군은 삼방으로 공격을 가했으나 공성포가 부족해 오랫동안 도시를 점령하지 못했다. 큰 피해를 입은 반란군은 논산 으로 후퇴했다 . 11월 8일, 반군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또 다른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무기와 장비가 낙후되고 정규 군사훈련이 부족하여 반란군은 또다시 패하고 논산으로 퇴각하였다. 일본군은 이들의 승리를 틈타 논산까지 추격했다. 반란군과 일본군이 11일간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논산은 함락됐다. [5] : 34-36 [1] : 491-492 [2] : 423-424
종료 [ 편집 ]
논산이 함락된 후에도 전변준 의 반군은 계속 남쪽으로 퇴각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일본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으나 전세를 구하지 못했다. 전라도 순창 현 에서는 콴펑(Quan Peng) 준장이 이끄는 군대가 몇 개의 소그룹으로 나뉘어 탈출을 희망하며 탈출했다. 이후 전라도 , 충청도 , 경상도 등은 모두 일본군과 친일정부의 지배를 받았다. 봉기에 가담한 농민들은 가족을 포함해 당국에 의해 유혈 보복을 당했고, 약 30만~40만 명이 학살당했다. 당국은 관준을 체포하는 대가로 은화 1000냥의 현상금을 제시했습니다. Quan Zhun은 원래 춘창현에 있는 Jin Jingtian의 집으로 피난하고 싶었습니다. 뜻밖에도 금경천은 이미 반역하여 관준을 법정에 넘겨주고 나중에 서울 로 압송되었다 . 1895년 4월 23일(음력 3월 29일), 전준준은 일본 당국과 한국의 친일 정부에 의해 처형되었다. [5] : 36-39
기념하다 [ 편집 ]
기념관 [ 편집 ]
- 전라북도 정읍시 에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있다 . [6]
-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은 전라북도 고창군 과 충청북도 보은군 에 조성되어 있다. [7]
- 1981년 11월 28일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에 위치한 전준준고택터가 사적 제 293 호로 지정되었다. [7]
- 황도현전투를 은 대한민국 전라남도 영광군 황도현 에 건립되었습니다 . [7]
- 전라북도 전주 한옥 마을
- 전라북도 전주시 도자공원에는 동학 농민군 전주진입 기념비가 있다 . [7]
- 충청남도 공주시 에 박정희 전 대통령 이 쓴 동학혁명군 추모탑이 있다 . [7]
-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에 동학혁명 백산비전이 건립됐다 . [7]
- 전라북도 부안군에 자우동호혁명기념탑이 있다. [8] : 171
스탬프 [ 편집 ]
- 1964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중일농민전쟁 발발 70돐을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하였다. [9]
- 1994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중일농민전쟁 발발 100돐을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하였다. [9]
영화 및 TV 작품 [ 편집 ]
참고문헌 [ 편집 ]
- ^ 1.00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 1.09 1.10 1.11 편집장 Zhu Tingguang, "주요 외국 역사 사건 모음 * 현대편 * 3권", 베이징: 중국 사회 과학 출판사, 2017년 3월 ISBN 978-7 -5161-9653-3 .
- ^ 2.00 2.01 2.02 2.03 2.04 2.05 2.06 2.07 2.08 2.09 2.10 2.11 2.12 박진석, 강맹산, 박문일, 김광수, 가오경수, 『한국의 간략한 역사』, 연길: 연변 대학교 출판물 1997. ISBN 7-563 4-0990-4 .
- ^ 3.0 3.1 3.2 소영, 북한 동학당의 반외국종교 이유에 대한 예비연구, 『한국학시리즈』, 1999.
- ^ 4.0 4.1 4.2 4.3 기치장, 북한의 동학도와 동학당봉기, 『역사교육』, 1989년 3호.
- ^ 5.00 5.01 5.02 5.03 5.04 5.05 5.06 5.07 5.08 5.09 5.10 5.11 5.12 Chen Xiansi, Yang Zhaoquan. "한국 현대 농민 혁명의 지도자 Quan Yingzhun", 베이징: 상업 출판사, 1985.
- ↑ 동학농민혁명기념관 .한국관광공사. [ 2020-04-11 ] .(원본 내용은 2021-08-04에 보관됨 ).
- ^ 7.0 7.1 7.2 7.3 7.4 7.5 한국의 동학 농민 혁명 기념 사업 ( PDF ) .
- ↑ 양율레이 외 편집, "한국의 역사와 문화", 광저우: 쑨원대학교 출판부, 2011년 6월, ISBN 978-7-306-03899-9 .
- ^ 9.0 9.1 장아(張薩) 북한이 '중일농민전쟁' 기념우표 발행, '상하이 우취'.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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