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
이덕일 李德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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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보 | |
출생 | 1961년 10월 7일 (61세) 대한민국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읍 |
국적 | 대한민국 |
언어 | 한국어 |
직업 | 작가, 역사학자, 저술가 |
학력 | 숭실대학교 대학원 인문과학 박사 |
활동기간 | 1997년 ~ |
장르 | 역사학 저술 |
이덕일(李德一, 1961년 10월 7일 ~ )은 대한민국의 작가, 언론인이다. 1961년에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읍(現 충청남도 아산시)에서 태어났으며, 30여 권의 역사비평서를 집필한 역사 작가이다. 아호는 천고(遷固)이다.
주요 이력[편집]
대표적 이력[편집]
- 신한대학교 지식복지대학원 신한류학과 교수
- 순천향대학교 미래융합대학원 글로벌한류학과 교수
경력[편집]
숭실대학교 사학과를 나온 그는 동 대학원에서 사회주의계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연구 논문인 '동북항일연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단법인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를 직접 설립하고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월간(月刊)중앙 WIN 기자, 월간(月刊)중앙 WIN 기획위원 등으로 활동하였고, 조선일보,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등의 객원필진으로 칼럼을 기고하였다. 1997년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를 시작으로, 정조가 독살되었다는 주장을 폈던 《누가 조선왕을 죽였는가》를 저술하였다. 저서로는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사도세자의 고백》, 《조선 왕 독살사건》, 《여인열전》 등이 있다.
학력[편집]
비판[편집]
- 대중에 영향력이 있는 역사 저술자이지만 스스로는 재야사학자라 자처하고 있을 만큼 정설과 거리가 먼 소수설을 주장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 21세기 현대의 지배세력이 노론의 후예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20세기와 21세기 현재의 모든 정치·사회적 난맥상을 노론 세력의 권력 독점이 원인이라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1]
- 특히 노론사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역사학계를 노론의 후예이자 식민사학자라고 싸잡아 비난하고 있다.[2]
2014년에는 《우리 안의 식민사관》이라는 저서를 통해 김현구 교수가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추종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여 명예훼손으로 소송당하였다.
하지만 2017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았다.[3]
당초 2016년 내려진 1심 판결에서는 허위 사실 전제로 김현구 교수를 식민사학자라고 규정하여 명예를 훼손한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1심 재판부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역사학자인 피고인의 영향력을 볼 때 명예훼손 정도도 매우 크다”고 판시하였으며, 특히“자신을 식민사학 카르텔의 피해자로 포장하고 이 사건의 논점을 역사 논쟁으로 흐리려 하는 등 범행 후 정황도 좋지 않다”고 하여 가해자인 이덕일이 피해자인 것처럼 구는 것을 꼬집었다.[4]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김 교수가 상당 부분 쓰에마쓰 야스카즈의 견해를 따른 것으로 보이고 ▲사법적 판단보다는 학문적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취지로 이덕일 박사에 대해 무죄를 선고 하였다. 2017년 5월 11일 내려진 대법원 최종심에서도 "이 소장의 주장이나 의견에 대해 합리성이나 서술방식의 공정성 등과 관련해 비판의 여지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비판은 가급적 학문적 논쟁과 사상의 자유경쟁 영역에서 다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2심(항소심)의 판단을 유지했다.[3]
저서 및 역서[편집]
저서[편집]
- 《이덕일의 여인열전》. 김영사. 2003. ISBN 9788934912507.
- 《이덕일의 세상을 바꾼 여인들》. 옥당. 2009. ISBN 978-89-961525-2-1.
-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
-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 《우리역사의 수수께끼 1,2,3권》, ISBN-10: 8934916540, ISBN-13: 9788934916543
-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 《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
-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2권》
- 《조선 왕 독살사건》
- 《사도세자의 고백》
- 《누가 조선왕을 죽였는가》
- 《조선 최대 갑부 역관》
- 《한국사로 읽는 성공한 개혁 실패한 개혁 (김춘추에서 노무현까지)》
- 《조선 선비 살해사건 1,2권》
-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Wisdomhouse, 2006년. ISBN: 8995884908
- 《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
-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
- 《살아있는 한국사 1,2,3권》
- 《오국사기 1,2,3권》
- 《침묵과 왜곡 속에 숨겨진 이야기》
- 《성학십도·동국십팔선정》
-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2009-09》
-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1,2권》
- 《정약용 선생님 다산 천자문 1,2,3권》
- 《근대를 말하다》. Wisdomhouse[5][6], 2012년. ISBN 978-8-9931-1942-8
- 《윤휴와 침묵의 제국》 다산초당, 2011, ISBN 978-8-9637-0571-2
- 《우리 안의 식민사관》, 2014
- 《조선 왕을 말하다 1,2권》 역사의 아침, 2010년, ISBN 978-8-9931-1915-2
- 《이덕일의 고금통의 1,2》, 2014
역서[편집]
- 《당의통략:모략과 음모의 당쟁사》(이건창, 黨議通略) 이덕일, 이준영 국역, 자유문고, ISBN 8-9703-0040-6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 ↑ 세월호 참사 뿌리는 노론의 당리당략, 시사저널 2014년 5월 29일
- ↑ 이덕일 저,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
- ↑ 이동:가 나 방현덕 (2017년 5월 11일). “역사학자 이덕일, 김현구 교수 명예훼손 혐의 무죄 확정”. 《연합뉴스》. 2017년 6월 12일에 확인함.
- ↑ 역사학자 이덕일, 김현구 교수 명예훼손 혐의 유죄 연합뉴스 2016년 2월 5일
- ↑ 《근대를 말하다》의 소개(도서목차 등) Archived 2013년 1월 9일 - 웨이백 머신
- ↑ 《근대를 말하다》중에서 김택영, 황현 및 이건창 등이 소개된 부분[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이덕일
이덕일 李德一 | |
출생 | |
국적 | |
학력 | |
직업 | 사학자, 작가 |
소속 | 한가람문화연구소 |
링크 |
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3. 역사적·정치적 성향[편집]
정조 독살설과 관련하여 그의 소설을 바탕으로 정조가 독살되었다고 주장하는 주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저서로는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사도세자의 고백, 조선왕 독살사건, 여인열전, 누가 조선왕을 죽였는가' 등이 있다. 독살설 관련은 조선왕 독살설 문서로.
노론 음모론의 신봉자기도 하다.
정치적 성향은 분명하지 않다. 친민주당계 뉴스채널인 팩트TV에 길거리 특강을 가기도 했지만, 반대로 국가보안법을 운운하기도 했다. 확실한 건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다는 것인데, 그가 2021년 유튜브 채널에 게재한 한국 양당 정치와 친일 문제 관련한 강연을 보더라도 한국은 한민당 후예격인 민주당이나 자유당 후예격인 국민의힘이나 친일파 후신이라고 디스하며 이게 정권 교체해도 바뀌는 것은 없는(?) 한국 정치의 근본 문제라고 주장했다.[6] 문재인 정부에서 한국독립사 재간행 사업을 강제 중단시켰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며, 1945~48년 해방 공간 사이 보수, 진보 세력을 계승하는 정치 세력이 나타나야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4. 인식과 평가[편집]
즉 프로 농구 선수가 축구에서만큼은 조기 축구회 회원보다 축구를 잘한다는 보장이 없는데, 이 부분은 한국사 필드에서도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덕일 교수는 자신의 박사 학위를 받은 전공자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만용을 부리며 자신의 전공 지식과는 사실상 다른 분야에서 계속 잘못된 고집을 부리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큰 틀에선 역사학으로 묶일 수 있을지 몰라도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해독할 수 있어야 하는 언어나 문체, 표기법부터가 제각각이다.
물론 역사학이란 박사 전공 시대나 지역에 머물라는 법은 없다. 역사는 관점을 지니는 한 시대의 앞과 뒤로 연결지어 논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학 연구에서는 고대사, 중세사, 근대사, 근현대사에 이르는 각각의 분야는 같은 역사 연구라 해도 기본적인 연구의 접근 방법부터 필요한 언어 능력까지 완전히 천차만별이다.
한편 이것은 강단의 근대사학이 만들어 놓은 구분법이므로 이를 거부하고자 한다면 말릴 수 없다는 시각도 있긴 하다. 아날학파나 심리역사학, 주제 중심의 역사학 등이 이런 근대구분법을 거부하는 편이다.
화려한 수식은 없어도 다른 역사서와는 달리 비교적 무난히 잘 읽히는 글을 쓴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한 표지나 제목도 한 몫한다.
4.1. 이덕일의 '고대사/조선사'에 대한 전문성?[편집]
이덕일의 저서 中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 |
이덕일과 그 세력들의 역사 왜곡 사례는 이덕일/비판 문서로.
이덕일이 고대사에 대한 이론들을 보면 단국대 교수인 윤내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한다. 윤내현의 이론은 고대 예맥족과 삼한의 영토를 넓게 보고 고조선 지역에 설치한 한군현은 요서 지방에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윤내현의 이론은 예맥족이나 삼한의 영역을 과대 포장하면서 정작 한군현에 대해서는 무지함에 가까우며, 평양에 발굴되는 낙랑군 유물들을 철저히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덕일은 윤내현의 이론이 참신하다 여겨,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어서 이덕일이 내놓는 고대사에 대한 이론은 대부분 윤내현의 영향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덕일이 다른 영역에 극단적으로 무지하다는 걸 보여주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임오화변이다. 이덕일은 사도세자의 죽음이 정신병처럼 됐다는 걸 근거로 노론사관을 주장한다. 그러나 사도세자 당쟁희생설은 이덕일이 그에 대한 책을 쓰기 전부터 사학계에선 정설이었다. 다시 말해 주류사관이었다. 오히려 정병설 교수가 비주류설이다. 그런데 이덕일은 완전 다르게 알고 있는 것이다. 이덕일은 심지어 이은순 교수의 논문조차 몰랐다.
이덕일이 제시했다는 프레임은 1968년 발표된 이은순 현 한국외대 명예교수의 논문 <한중록에 나타난 사도세자의 사인>에서 처음 제기됐다. 이은순은 《사도세자의 고백》이 출간되기 30년 전에 <한중록에 나타난 사도세자의 사인>이라는 논문에서 그런 가설을 발표했다. 그것을 발전시켜 1981년에는 《한국학보》에 <현륭원지 행장과 한중록의 비교 연구>라는 논문을 실었고 1988년 출간된 자신의 저서 《조선후기당쟁사연구》에 수록했다.
- 이은순, <한중록에 나타난 사도세자의 사인>, 1968(이화사학연구) 이화사학연구소
- 이은순, <현륭원지 행장과 한중록의 비교연구>, 1981, 일지사, 이은순
- 이은순, <사도세자의 정치적 생애와 시벽의 분립>, 《조선 후기 당쟁사 연구》, 1988
책을 내기 몇십 년 전부터 이미 이은순 교수가 제기해서 "주류사학"이 된 것이 바로 사도세자 당쟁희생설이다! 그런데 이덕일은 이런 "주류사학" 프레임을 자기 것인 것처럼 착각한 것이다. 일부에선 착각이 아니라는 주장도 한다. 다시 말해 알면서 일부러 그랬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건 아직 증거가 없으니 섣불리 말하는 건 곤란하다.
이덕일은 심지어 사도세자 당쟁희생설을 "주류사학"으로 만든 이은순 교수의 논문조차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덕일이 근현대사 영역 빼고는 기본 수준조차 안 된다는 근거다. 학자로서 기본 중 기본인 선행연구 확인조차 제대로 안 했다는 것.
그 외로도 여기서 대표적인 업적(?)을 몇 가지만 쓰자면...
- "태묘"(즉 종묘)를 "태조의 묘"로 착각해서 완전 딴 내용을 주장했다. 광복 이후 초기라면 모를까 지금 기준에서 제대로 배웠으면 저런 걸 착각할 수는 없다. 학부생조차 아는 내용을 이덕일이 저렇게 적었단 건 악의적 왜곡 이라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 자기 전공 시대 범위 안에 들어가는 근대
한글한국어에 대한 언어학도 제대로 모른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덕일/비판 문서에서 두음 법칙 관련 내용에 나온다.
다시 말해 근현대사 이 외에 대한 이덕일의 주장은 박사 학위 수준의 전문성이 없으며, 철학과 박사 학위자인 5.18 민주화운동/왜곡의 대표 유사역사학자인 김대령과 수준이 크게 다를 게 없다.
4.2. 초기엔 의도는 좋았다?[편집]
기본적으로 세조에 대한 이덕일의 시각은 이러하다. 정통성이 결여된 자가 왕위 찬탈[12] → 이에 반발하는 세력의 반란 → 반란을 진압하면서 또 공신책봉이란 상황이 반복되었다. 이렇게 쏟아져 나온 공신세력을 적절한 숙청 없이 무작정 친위세력을 키워주면서 자신의 생전에는 왕권이 강화되기는 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는 살아있던 공신들이 원로로서 국정을 장악하여 군약신강의 환경이 조성될 토양을 마련했다는 것으로 정리된다.[13]
이덕일의 세조 증오는 이덕일 자신이 그토록 주장하는 '사악하고 강력한 신권에 맞선[14] 왕들의 외로운 싸움'이 시작된 토양이라고 주장할 건덕지가 있고 그간의 미화에 대한 반대급부가 결합된 것으로 보인다. 이덕일이 드라마 <왕과 비> 방영 당시 세조 미화를 비판하며 쓴 글을 보면 이게 이덕일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개념글이다.
또한, 그의 서적들은 그 이전까지만 해도 역적으로 평가받았던 정도전의 재평가를 하는 데에 공헌하기도 했다. 극렬 정도전 빠이자 이방원 까인 그는 드라마 정도전의 자문을 맡기도 했으며 집중 강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세조와 정도전 등의 시각 변화에 있어서 이덕일이 독보적이었다거나 엄청난 공헌을 했다고 볼 필요까지는 없다. 비슷한 시기에 나왔던 임용한 선생의 <조선국왕 이야기>에도 잘 나오듯, 세조의 찬탈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그 군사정권 시기의 미화에 대한 반동으로 90년대 많은 소장파 역사학자들이 이미 제기하고 있던 것이었고, 정도전에 대한 재평가도 비슷한 시기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어찌되었건, 쉽게 말해서 자신의 전문분야인 근현대사에는 꽤 정확한 사관을 가지고 있었고[15] 조선 초기에 대한 사관도 세종대왕과 관련한 것만 빼고는 상당히 정확한 편이다.
4.3. 역사 왜곡 및 비판[편집]
"역사학에서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있어요. 뭐냐면 진실은 뭐냐 이거죠. 한사군이 실제로 어디에 있었느냐, 이걸 먼저 파헤쳐야 되는 거죠. 그렇다면 파헤치고 파헤쳐 봐도 한사군은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라는 결론이 나오면 어떡합니까? 초등학교 때. 그거 가르치지 말아야죠. 초등학교 때 배울 게 얼마나 많아요? 이순신 장군 배워야 되고, 을지문덕 배워야 되고, 단군 배워야 되고. 배울 게 그렇게 많은데, 우리 역사를 식민지로 시작했다 이것부터 가르쳐야 되겠어요?"
이덕일, "딴지라디오 벙커1 특강", 2014.10.28, 28:10~28:52[16]
"이덕일로 대표되는 사이비 역사학, 이종찬으로 대표되는 극우정치세력이 국회에 그만큼 큰 영향을 미치리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한국) 정부는 동아시아를 공부하는 서양학자들에게 아주 나쁜 인식을 주고 있다. 북한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터무니 없는 일을 하고 있다. 좋은 학자들이 설자리를 잃고 강요당하고 있다.”
하버드 대학 한국 고대사 연구실장 마크 바잉턴(Mark E. Byington) 교수#
누구나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 관점과 취향이 있다. 하지만 나와 똑같은 문구멍으로 보지 않는다고 타인을 공격하거나 남의 시각을 날조해 공격하는 폭력은 광적인 파시즘에 지나지 않는다. 폐쇄적 도그마에 빠지면 이성과 감성이 마비되어 자신도 모르게 통제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주한,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 2011, 53쪽.
...매국사학자들처럼 『환단고기』를 보는 자는 다 죽여야 한다고 거품을 물 책은 아니다. 『환단고기』에 대한 내 생각은 추후 자세히 밝힐 것이지만 한두 가지만 미리 말하겠다. 매국사학자들은 『환단고기』가 지 에미를 잡아먹었는지, 지 애비를 잡아먹었는지 모르겠지만 극도로 저주한다. 박노자도 「한겨레 21」과 인터뷰에서 『환단고기』에 대한 저주를 늘어놓았다. 나는 어떤 책이든 자유롭게 보고, 자유롭게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이덕일 페이스북
4.4. 대중적인 평가[편집]
심지어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를 까기 위해 정순왕후가 세도 정치를 시작한 안동 김씨라고 하는 일까지 있다. 그렇지만 안동 김씨는 노론 시파이며, 정순왕후의 집안 경주 김씨는 안동 김씨에게 숙청당했다. 여기에다 안동의 김씨 가문 등이 경북 안동에서 한양 조정을 원격조정한 게 세도정치인 줄 아는 일반인의 오해와 겹쳐 역사가 엉망이 되기도 한다. 아직도 한국의 청소년들은 꼭 그의 저서가 집에 한두 권은 있으며(부모나 학교, 신문의 추천으로) <조선왕 독살사건> 같은 책은 거의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노론 음모론은 정치적 편향성까지 보이기에 진보지지 성향 정치인, 지지자들에게 널리 사랑받는 대표 음모론 중에 하나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역사학을 전공했으니만큼 대중에게 어필하는 능력이 크지만, 그 주장의 신빙성이 의심되는 사학자 겸 표퓰리즘에 영합하는 환빠 상업 작가. 이덕일이 역사학 학위를 받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근현대사 연구 영역이었으며, 조선시대사 전공도, 삼국시대 전공도 아니다. 심지어 이덕일은 고대사의 기본적인 사료해석에서 오독을 저지른 적도 수두룩하다. 사학과가 아닌 국문학과 교수에게 처발린 경우까지 있을 정도다.
그가 책에 쓰는 내용은 자신의 편집이 들어간 주장일 뿐, 학계에서 공인된 설은 아니다. 그것을 유의해야 한다.
2012년 10월 26일 제55회 전국역사학대회에서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사연구회, 역사학회 등 대다수 학회들의 회장, 총무이사 등이 참석한 자리에서 주최 측의 입장으로 축사를 하던 KAIST 부총장이 유수의 역사학자들 앞에서 자신이 요즘 역사책을 읽고 있다는 발언을 하였다. 여기까지는 역사와 거리가 먼 KAIST 부총장의 덕담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름 아닌 이덕일의 책이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해당 부총장은 그 책을 읽고 '우리 역사 왜곡이 이렇게 심한지 처음 알았다'고 발언하였다.
어떻게 보면 일본의 시오노 나나미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시오노 나나미조차 자신의 상상을 말할 때는 "...가 아닐까."라는 식으로 개인적인 견해라는 점은 분명히 한다. 단지 그런 게 지나치게 자주 나온다는 점이 문제일 뿐[17], 이덕일처럼 그런 상상을 아예 진실이라고 단정짓고 다른 역사학자들의 연구결과를 부정, 매도하는 행각까지 벌인 적은 없다. 또한 후술되겠지만 적어도 시오노 나나미 본인은 스스로 아마추어라고 정의하며 역사학자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시오노 나나미는 역사관이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고증이 이상하다고 까일지언정, 현 사관을 '기독교 사관', '크리스찬들의 음모' 같은 식으로 매도한 적은 없으며 특정 사학자를 저격해 모함하지도 않았다.
이덕일이 정말로 기형적인 존재라고 평가받는 부분은, 그가 비록 근대사 전공이긴 하지만 어쨌든 사학과를 졸업하고 사학으로 박사 학위까지 받은 주류 학자 출신이라는 데에 있다. 즉 이덕일식 해석과 주장은 어쩌면 책을 팔아먹기 위한 고도의 전술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역사학을 공부한 적도 없고 1차 사료에 접근할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 실수로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변명의 여지라도 있지만, 이덕일은 그런 것도 없다. 시오노 나나미보다 이덕일이 더 악질일 수도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오노 나나미도 문제가 많은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저 역사에 관심이 좀 있는 일반인 수준에 그칠 뿐이기에 최소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댄다고 일축이라도 할 수 있지만, 이덕일은 공식적인 학자라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 일개 소설가(시오노)의 주장과 역사학자(이덕일)의 주장은 대중적 신빙성에서 영향력이 다르다.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의 저자인 임승수는 페이스북에서 묘한 말로 사도세자 관련한 이덕일에 대한 비판 경향이 지나치다며 이덕일을 옹호하기도 했다. "물론 이덕일 저자가 학문적으로 부족한 부분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덕일 저자를 너무 과도하게 깐다는 느낌이 든다. 전체적으로 진보적 지향의 좋은 책을 쓰는 분이라고 생각하는데..." (#) 그 밖에도 김상태의 책을 추천하는 등 묘한 말들을 댓글에 썼다.
이덕일의 지지자들은 이덕일에 대한 정당한 비판마저 인신공격으로 몰아가는 등 이덕일을 필사적으로 지지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들의 그런 행동에 대해 이덕일을 옹호하자는 건 아니라고 하기도 하지만, 그 말을 거꾸로 보면 그들이 이덕일의 말을 맹목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이덕일을 감싸주는 것을 이덕일을 억지로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로 이덕일이 옳은 말만 하니까 그런 것으로 여기는 거라고 볼 수 있다.
5. 다른 학자들과의 논쟁[편집]
2009년 한겨레에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라는 제목 아래 역사학계를 조선사편수회의 후예로 몰아 싸잡아 비난하는 글들을 연재하였다.
그러나 그가 쓴 내용에 남들을 납득시키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 누리꾼들의 댓글에서 엄청나게 까이고 말았다. 논거로 드는 문헌 중 하나가 재야사학자의 탈을 쓴 문정창의 <고조선사연구>.
연재가 끝난 뒤에 이덕일의 조선시대사 논지를 완전히 부정하는 오항녕 고려대 강사(현 전주대 교수)가 반론글을 한겨레에 싣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오항녕과 이덕일의 논쟁(?)이 신문상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이 논쟁에서 오항녕으로부터 "그는 오류나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말 자신의 논거가 무너진 것을 모르나 봅니다"라는 굴욕적인 비판까지 받았다. 사실 이 논쟁은 한겨레 측에서 제대로 불이 붙기 전에 적당히 끝내버린 것이라고 한다. 신문에 실린 반론 글
오항녕 교수는 이후 이 논쟁을 2010년 출간한 조선의 힘에 수록하며 다시 한 번 이덕일을 깠다. 조선의 힘 판매량을 보면 이덕일에게는 굴욕. 여러모로 2010년인 이덕일에게 팔자가 사나웠는지 자신이 추천평까지 써 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정확히는 경종·영조실록, 정조실록) 사도세자와 정조 사망원인에 관해서 이덕일의 주장을 대놓고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다.(이름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 영향때문인지 작 최후반부인 고종실록, 망국편에서 이덕일의 추천사가 빠졌다.
그리고 2011년 1월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에서 정병설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가 한중록을 바탕으로 한 '정병설, 권력과 인간'을 연재하던 도중 이덕일의 저작 사도세자의 고백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이덕일은 즉각 한겨레를 통해 이를 비판했으나 정병설 역시 반박하였다. 참고로 정병설 교수는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 비판을 역사비평에 올려버렸고 이덕일의 유사역사학을 떡실신보냈다. 자세한 건 정병설 문서로.
5.1. 법정 다툼[편집]
6. 칼럼[편집]
- 이덕일 사랑(舍廊) (2005~2009, 조선일보)
- 이덕일의 시대에 도전한 사람들 (2006~2008, 한겨레)
- 이덕일의 事思史(사사사): 조선 왕을 말하다 (2008~2010, 중앙SUNDAY)
-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2009, 한겨레)
- 이덕일의 고금통의 (2011~2012, 중앙일보)
- 이덕일의 事思史(사사사): 근대를 말하다 (2011~2013, 중앙SUNDAY)
- 이덕일의 칼날 위의 역사 (2014~2015 , 한겨레)
- 이덕일의 천고사설 (2014~2015, 한국일보)
- 이덕일의 역사의 창 (2017, 서울신문)
-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2018~ 서울신문)
7. 저서[편집]
- 침묵과 왜곡 속에 숨겨진 이야기 (1996, 글동네)
- 성학십도·동국십팔선정(이상진, 송기섭과 공저) (1996, 자유문고)
-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1997, 석필)
- 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 (1997, 석필)
- 사도세자의 고백 (1998, 푸른역사/2004/2007, 휴머니스트)
- 누가 왕을 죽였는가(조선왕 독살사건) (1998, 푸른역사/2005/2009, 다산초당)
-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이희근과 공저) (1999(1~2권)/2004(3권), 김영사)[18]
- 운부 (2000, 중앙M&B(현 알에이치코리아))
-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끼 (2000, 대산출판사)
-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2000, 김영사)
-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아나키스트가 된 명문가 이회영과 젊은 그들) (2001, 웅진닷컴/2009, 역사의아침)
- 오국사기 (2002, 김영사)
- 역사에게 길을 묻다 (2002, 이학사)
- 한권으로 읽는 한국사 (2002, 휴머니스트)
- 이덕일의 여인열전 (2003, 김영사)
- 살아있는 한국사 (2003, 휴머니스트)
- 이덕일 선생님과 함께 우리 역사의 벌판으로 달려보자 (2003, 두산동아)
-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004, 김영사/2012, 다산초당)
- 교양 한국사 (2005, 휴머니스트)
- 장군과 제왕 (2005, 웅진지식하우스)
- 조선 최대 갑부 역관 (2006, 김영사)
- 조선 선비 살해사건 (2006, 다산초당)
-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김병기와 공저) (2006, 역사의아침)
- 다산 천자문 (2006(1권)/2008(2~3권), 웅진주니어)
- 이덕일의 영웅천하 그 위대한 전쟁 (2007, 김영사)
- 이덕일의 역사사랑 (2007, 랜덤하우스코리아)
- 유성룡: 설득과 통합의 리더 (2007, 역사의아침)
- 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김병기 공저) (2007, 역사의아침)
-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2008, 고즈윈)
-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이덕일의 시대에 도전한 그들 (2008, 한겨레출판)
- 조선의 승려는 북벌을 꿈꿨다 (2008, 랜덤하우스코리아)
- 이덕일의 세상을 바꾼 여인들 (2009, 옥당)
-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2009, 역사의아침)
-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 (2010, 옥당)
- 조선 왕을 말하다 (2010, 역사의아침)
- 윤휴와 침묵의 제국 (2011, 다산초당)
-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2011, 역사의아침)
- 내 인생의 논어 그 사람 공자 (2012, 옥당)
- 난세의 혁신리더 유성룡 (2012, 역사의아침)
- 이덕일 역사평설 근대를 말하다 (2012, 역사의아침)
- 산성으로 보는 5000년 한국사(김병기와 공저) (2012, 예스위캔)
- 지금 여기의 아나키스트(김성국, 강동권 등과 공저) (2013, 이학사)
- 이덕일 역사평설 왕과 나: 왕을 만든 사람들, 그들을 읽는 열한 가지 코드 (2013, 역사의아침)
- 잊혀진 근대, 다시 읽는 해방전(前)사 (2013, 역사의아침)
- 정도전과 그의 시대 (2014, 옥당)
- 부자의 길, 이성계와 이방원 (2014, 옥당)
- 이덕일의 고금통의 (2014, 김영사)
- 우리 안의 식민사관 (2014, 만권당)
- 당의통략(이건창 저, 이준영과 공동 번역) (2015, 자유문고)
-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2015, 만권당)
- 칼날 위의 역사 (2016, 인문서원)
- 조선이 버린 천재들 (2016, 옥당)
- 이덕일의 당당 한국사 (2017, 아라미)
- 조선 선비 당쟁사 (2018, 인문서원)
- 이덕일의 한국 통사 (2019, 다산초당)
- 사기,2천년의 비밀(2022,만권당)
8. 그 외[편집]
- 초기 작품인 <당쟁으로 보는 조선사>(개정증보판이 바로 <조선 선비 살해사건>)에 실린 프로필 사진을 보면 많이 마른 편인데, 나이가 들면서 살이 찐 것으로 보인다.
- 책도 성실하게 쓰는 타입은 아닌듯하다. 예를 들어서 <조선왕 독살사건>의 정조 파트 대부분, 특히 마지막 몇 문단은 <사도세자의 고백>을 그대로 복붙했다("정조가 죽자 삼각산도 울었다."라든지, "상복 입은 벼" 이야기가 그대로 진행된다).
-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이라는 책에서 갑주 그림으로 유명한 네티즌의 그림을 표지에 무단 도용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해당 네티즌은 출판사에 정식으로 항의를 해 100여만 원 정도의 합의금을 받았다.
- '근대를 말하다'의 2권이라 할 수 있는 '잊혀진 근대, 다시 읽는 해방전사'에서 이덕일은 난징 대학살 사건의 주범이 마쓰이 이와네라고 썼지만, 사실은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가 진범이다. 아마 실수로 범한 오류였을 것이다.
- 이덕일이 말하는걸 보면 고고학도 크게 신뢰하지 않는듯 한데, 오늘날 고대사 파트의 고고학은 식민사학자들이 자기들 논거를 강화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식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정부가 이런데 헛돈 쓴다고 세금 아깝다고 디스하기도 했다.
9.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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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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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학자로서의 소양 결여[편집]
1.1. 사료 독해의 기초 결여[편집]
1.1.1. 묘예(苗裔)를 묘족의 후예로 오독[편집]
『사기』 흉노열전은 "흉노의 선조인 하후씨는 묘족(苗族)의 후예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흉노 역시 치우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짐작케 한다.
일단 사기에서 이 부분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匈奴, 其先祖夏后氏之苗裔也, 曰淳維。
흉노, 그 선조는 하후씨의 묘예(苗裔)인데 순유라고 했다.
묘예2(苗裔) (발음: 묘ː예), (명사) 먼 후대의 자손. 비슷한 말: 묘맥(苗脈), 묘윤(苗胤)
더군다나 이덕일의 해석에서는 문장구조도 문제다. 묘예가 나오는 대목의 문장구조는 'A之B也'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어조사 之가 앞 체언을 관형어로 만들어 'A의 B이다'라고 해석된다는 것은 한문 문법에서도 기초 중의 기초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흉노의 선조=하후씨의 묘예"로 해석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덕일은 이런 기초적인 문법을 몰라서 "흉노의 선조=하후씨=묘예"라는 오역을 저질렀다.
설상가상으로 그 어떤 사기 번역본도 이덕일과 같은 오역을 하지는 않았다.
사마천, 박일봉 역, 『사기(열전Ⅱ)』, 1994, 180쪽, "흉노(匈奴)의 선조는 하후(夏后:禹)씨의 후예로, 순유(淳維)라고 했다."; 사마천, 정범진 외 역, 『사기 6 - 열전 중』, 1995, 795쪽, "흉노의 선조는 하후씨의 후예로 순유라고 불렀다."; 사마천, 김원중 역, 『사기열전 · 하』, 2002, 253쪽, "흉노의 선조는 하후씨의 후예로 순유라고 불렀다."; 사마천, 노만수 역, 『사기영선』, 2012, 449쪽, "흉노는 그 선조가 하후씨의 후예로 순유라고 불렀다."
이쯤되면 도대체 이덕일은 어떤 사마천이 쓴 사기를 참조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하후(夏后)는 순임금이 천자가 된 후의 국호이기도 한데, ‘맹자(孟子)’는 순임금을 동이족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들을 종합해, ‘사기’의 ‘묘예(苗裔)’라는 말을 단순히 후손으로 해석하지 않고, ‘묘족의 후예’라고 해석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각각의 진술도 하나같이 말이 안 된다. 하후씨는 순임금이 아니라 우임금을 가리키는 말이고, 동이족이란 개념은 허구라는 것이 확실하며, 그마저도 묘족은 남만에 속하지 동이에 속하는 족속이 아니다. 또한 순임금과 우임금이 묘족의 일원이라고 했지만, 묘족은 사사건건 반란을 일으켰다.
"묘민(苗民)이 한 달 동안 명령을 거역하자, 우(禹)가 정벌하러 나섰는데 익(益)이 덕을 펴라고 권하니, 회군하였다. 이에 순임금이 크게 덕을 베풀며 방패와 깃, 일산 등을 가지고 추는 무무(武舞)를 추게 하였더니, 70일 만에 유묘(有苗)가 항복하였다."
결국 이덕일의 부연설명은 단순 오역이었던 자신의 실수를 더욱 완벽한 오류로 만들어준 셈이다.
이쯤에서 이덕일이 왜 이렇게까지 무리수를 두는지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여러 정황상 이덕일과 마찬가지로 한문을 못 읽는 환빠였던 이중재의 사상을 표절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중재의 환타스틱한 사료 오독에 관해서는 다음 링크를 참조. ①
1.1.2. 영주(營州)를 수성현으로 오독[편집]
그럼 현재 갈석산이 있는 창려현이 과연 과거의 수성현인지 살펴보자. …… 먼저 『수서』「지리지」 '상곡군'조를 보자.수성현 : 옛날에는 무수(武遂)라고 불렀는데, 후위(後衛)에서 남영주(南營州)로 삼았다. 영주(營州)는 5군 11현을 비준했는데 용성 · 광흥 · 정황현은 창려군(昌黎郡)에 속한다. 석성 · 광도현은 건덕군에 속한다. 양평 · 신창현은 요동군에 속한다. 영락(永樂)현은 낙랑군에 속한다. 부평 · 대방(帶方) · 영안(永安)현은 영구(營丘)군에 속한다.수성현은 후위 시절 남영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11개 현이 있었다. 그 이름은 용성 · 광흥 · 정황 · 석성 · 광도 · 양평 · 신창 · 부평 · 대방 · 영안 현이다. …… 수성현에 속했던 11개 현이 5군으로 나뉜 것으로 봐서 수성은 상당히 넓은 지역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수성현을 포함했던 상곡군은 더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이덕일,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2009, 92~93쪽
사실 위에서 녹색으로 쓰인 부분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遂成, 舊曰武遂。後魏置南營州, 准營州置五郡十一縣。
수성, 예전에는 무수라 했다. 후위(後魏)가 남영주를 두었는데[置], 영주를 본따[准] 5군 11현을 두었다.
후위1(後衛)(명사)1. 뒤쪽의 호위나 방위. 2. <군사> (같은 말) 후위대(주력 부대의 뒤쪽을 엄호하는 부대). 3. <운동> 축구ㆍ배구 따위에서, 주로 수비(守備)를 맡는 경기자.
둘째로 '수성현에 남영주를 두었다'는 말을 '수성현을 남영주로 삼았다'고 오역한 것이다. 얼핏 보기에 비슷한 말처럼 보이지만, 후자의 표현은 수성현을 남영주와 동일한 실체로 보이게 하는 착각을 일으킨다. 하지만 수성현은 남영주에 소속된 일개 현으로서, 남영주의 장관이 머무르는 치소가 있는 데 지나지 않았다. 즉 이는 수원시에 경기도청을 두었다는 말이나 온천동에 아산시청을 두었다는 말과 같은 표현인 것이다.
하지만 이 작은 오역이 가져온 나비효과는 굉장한 수준이어서, 수성현은 졸지에 11개나 되는 현을 거느린, 이덕일의 말에 따르자면 "상당히 넓은 지역"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수성현을 포함한 상곡군은 당연히 더 넓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이 기가 막힐 뿐이다. 이 오독을 대한민국에 적용해보면 다음과 같이 성립된다.
전주부는 조선시대 전라도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55개 군현이 있었다. 그 이름은 광주 · 나주 · 능주 · 제주 · 남원 · 담양 · 무주 · 순천 등이다. 전주부에 속했던 55개 현이 5부로 나뉜 것으로 봐서 전주는 상당히 넓은 지역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전주시를 포함했던 전라북도는 더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부평구는 조선시대 부평도호부로 불리웠는데, 7개 군현이 있었다. 그 이름은 강화 · 인천 · 해풍 · 김포 · 양천 · 교동 · 통진이다. 부평구에 속했던 7개 군현이 오늘날에는 3개 시로 나뉜 것으로 봐서 부평은 상당히 넓은 지역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부평을 포함하는 인천광역시는 더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이러한 이덕일의 논리에 놀아난다면 제주도는 대한민국 전라북도 전주시에 있고, 강화도는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부평구에 있다는 말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덕일은 준(准)이란 한자를 '비준하다'란 뜻으로 해석해서 남영주를 영주의 다른 이름으로 보고, 그 밑에 5군 11현이 있는 것으로 오역했다. 또 문제는 그 아래에 있는 수서 지리지 유성현조에 거짓말처럼 다시 한번 영주가 다시 한번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영주의 행정구역은 남영주의 행정구역과 겹치기도 하고, 또 겹치지 않기도 한다. 남영주와 영주는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그 해답은 위서 지리지의 남영주 조에서 찾을 수 있다.
南營州: 孝昌中營州陷, 永熙二年置。寄治英雄城。
남영주: 효창 중에 영주가 함락되자, 영희 2년에 두었다. 영웅성을 빌려 다스렸다.
즉 남영주는 530년 이전의 영주에 소속되어 있었던 지방 조직을 본따서(准) 자신들의 휘하 조직을 구성한 것이었지만, 이러한 전후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이덕일의 눈에는 이 한자가 그저 승인했다(准)는 뜻으로밖에 해석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이덕일의 논리에서 '영주'와 '남영주'는 완전히 동일한 실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더 나아가 이덕일은 이를 통해 군현의 소재지가 이동하던 당시의 지방 상황을 부정하고, 마치 수성현이 고조선 멸망 이후 700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독자들을 현혹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다시 "낙랑군은 중국에 있었고, 이를 부정하는 너희는 매국노"라는 비국민 논리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그의 오독이 가지는 중요성은 결코 작지 않다고 할 수 있다.
1.1.3. 이문정(李文靖)을 율곡 이이로 오독[편집]
십만양병설은 애초 연월 미상이었으나 김장생의 제자 송시열이 율곡연보에서 '선조 16년(1583) 4월', 즉 임란 발생 10년 전의 일이라고 정확히 특정했다. 후대에 갈수록 날짜가 더 정확해지는 이상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송시열은 이 글에서 실제로 임란이 일어나자 "유성룡이 '이문성(李文成: 이이)은 진실로 성인이다(眞聖人也)'라고 탄식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이가 '문성'이란 시호를 받은 인조 2년(1624)은 유성룡이 사망(1607)한 지 이미 17년 후였다. 사후 17년 후에 생겼던 문성이란 시호를 유성룡이 사용했다는 기록 자체가 조작이라는 증거이다.
壬辰之亂, 西厓常語朝堂曰, "當時無事, 吾亦以爲擾民, 今而思之, 李文靖眞聖人也。"
임진난에 서애가 항상 조당에 말하길 '당시는 무사하기에 나도 백성을 소요시키는 일이라고 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문정은 참으로 성인이었다'라고 하였다.
逮壬辰之後, 西厓於朝堂, 語諸宰曰, "當時吾亦慮其騷擾而非之, 到今見之, 李文靖眞聖人也。"
임진난 이후에 서애가 조당에서 재상들에게 말하길 '당시에는 나도 그 소란을 걱정하여 반대했는데, 지금 와서 돌아보니 이문정은 참으로 성인이었다'라고 하였다.
문제의 '이문정'은 위에 인용된 백사집의 주석에 따르면 중국 북송 때의 재상인 이항(李沆)을 가리킨다. 송나라의 재상이 된 이항은 왕단(王旦)에게 국방이 무사하면 씀씀이가 사치스럽게 된다고 경계했는데, 과연 이항의 사후 송진종이 사치스럽게 되자 왕단이 탄식하며 '이문정은 참으로 성인이었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즉 당시 류성룡이 "이문정은 참으로 성인이었다"라고 한 말은 이이를 직접적으로 성인이라 칭송한 말이 아니라, 이이가 보인 거안사위(居安思危)의 자세를 중국의 이항에 빗댄 말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기록은 잘못된 글자가 하나 들어간 것이지, 내용이 완전히 창작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심지어 이 오자는 율곡연보의 원작자인 송시열 자신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순조 14년(1814)에 간행된 <율곡전서>에는 '이문정'이 아니라 '이문성'으로 나와 있습니다. …… 그러나 영조 25년(1749)에 간행된 <율곡전서>에는 '이문정(李文靖)'으로 되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순조 14년판 <율곡전서>의 교정자가 이이의 시호가 '문성'이라는 건 알고, <율곡연보>에서 말한 '이문정'에 대한 고사는 몰랐던 까닭에 '문정'이 틀린 줄 알고는 '문성'으로 덜컥 고쳤던 겁니다.
오항녕 박사는 ‘율곡 이이가 말한 적이 없는 십만양병설은 제자들이 창작했다’는 필자의 주장을 반박했다. 이런 반론을 제기하려면 이이가 생전에 이를 주장했다는 1차 사료적 근거를 제시하면 간단한데 서지학자처럼 문정(文靖)이니 문성(文成)이니 하는 판본의 문제를 장황하게 서술해 논점을 흐렸다.
그는 오류나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소장은 '이이의 십만양병론에 대한 1차 사료적 근거를 제시하면 간단'하다고 했는데, 저는 이미 서인과 남인이 함께 편찬한 <선조수정실록>, 이정구의 시장(諡狀), 이항복의 신도비문 등 '1차 사료적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는 이 소장은 십만양병설을 부정할 '1차 사료적 근거'를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1.1.4. 태묘(太廟)를 건원릉으로 오독[편집]
혜경궁은 『한중록』에 세자가 스물두 살이 되도록 영조가 능행할 때 한번도 수가隨駕(어가를 따라가는 것)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 하지만 이 또한 부자 간의 갈등을 표현하기 위해 혜경궁이 의도적으로 꾸민 거짓말에 불과하다. 세자는 그전에 이미 여러 차례 영조를 수가해 능행에 다녀왔다. 혜경궁이 처음이라고 주장했던 해보다 4년 앞선 영조 28년(1752) 2월 영조가 태묘太廟(태조의 묘, 곧 건원릉)와 영희전에 나아갈 때, 그리고 그 다음 해인 영조 29년(1753) 7월 태묘에 거둥할 때도 수가했으며 또한 같은 해 12월 태실太室에 나아갈 때와 다음 해 첫날 태묘에 나아갈 때도 따라갔다.이덕일, 『사도세자의 고백』, 2007, 181쪽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왕 본인을 가리키는 말이지 '왕의 무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영묘(英廟)는 영조라는 사람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지 영조의 무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만약 영묘가 무덤을 지칭하는 경우로 쓰였다면, 이는 영조의 능이 아닌 세종의 영릉(英陵)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마저도 영릉이 아닌, 세종을 가리켜 이야기할 때 쓰는 표현이다. 만약 태묘(太廟)를 가리켜 태조나 태종을 가리켰다고 주장했다면 그나마 이해를 좀 해 줄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태조의 무덤"을 가리켰다고 한다면 정확히 틀리다. 물론 조선왕조실록에서 태묘라는 단어만큼은 태조나 태종을 지칭하는 것으로 쓰인 적이 없으며, 고려사 등 다른 사료에는 "태묘에 부묘했다."는 등, 태묘는 종묘를 지칭한 기록으로 수도 없이 쓰였다.
참 어이없는 오독이다. 태묘는 무덤이 아니다. …… 이덕일은 태묘와 태실이 종묘라는 기본적인 역사용어조차 모르고 『한중록』을 비판했다. 그는 태묘를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태조의 무덤 곧 건원릉으로 보았고, 사도세자가 거기까지 수가했다고 했다. 사도세자가 사는 동궁은 창덕궁에 있었고, 종묘는 창덕궁과 한 담장 안에 있었다. 지금이야 궁궐이 훼손되어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대로가 있지만, 원래는 한 울타리 안이었다. 그러니 태묘에 간 것은 능행수가와 같은 큰 외출이 아니었다.정병설, 「길 잃은 역사대중화」, 2011, 339쪽
태묘2(太廟)(명사)1. <역사> 종묘의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역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던 사당으로, 초에는 목조, 익조, 탁조, 환조 등 태조의 사대조 신위를 모셨으나 그 후에는 당시 재위하던 왕의 사대조와 조선 시대 역대 왕 가운데 공덕이 있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19칸으로, 단일 건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다. 2. <역사> 임금의 삼년상(三年喪)을 마친 뒤에 그 신주(神主)를 종묘(宗廟)에 모시던 일. 비슷한 말: 종묘(宗廟), 태실(太室)
이덕일이 이와 같은 오역을 저지른 것은 조선시대의 문화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이 부족한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덕일의 전공이 근대사이므로 이러한 오역은 충분히 저지를 수 있지만, 문제는 이덕일이 이처럼 잘못된 사료 해석에 기반한 잘못된 고정관념으로 기성 역사학자들을 물어뜯고 있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이덕일은 데뷔 초 사도세자를 집중적으로 논의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유명세를 얻었기에 대중들이 그를 사도세자 문제의 전문가로 인식하고 있는데, 능묘제도는 사도세자 사후의 추숭 문제와 관련해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데 그런 이덕일이 바로 이러한 능묘제도에 대해서 기초적인 사실을 무시했다는 것은 전공을 떠나 그가 기본적인 공부조차 안 하거나, 선동을 위해 고의적으로 사료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이덕일 본인은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의 서문에서 이미 『이덕일의 여인열전』(2003)에서 태묘의 뜻을 바로 풀어 썼다며, 사소한 실수.하나로 작가를 매장하지 말라고 반박했다. 그런데 실제 정병설 교수가 지적한 그 부분은 그저 실수한 단어 하나를 걸고 넘어진 것이 아니라, 혜경궁 홍씨가 사건을 조작했다는 내용의 근거를 반박한 것이다. 이 문제는 결코 사소하다고 할 수도 없고, 실수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이 따지자면 이덕일은 그 자신이야말로 '태묘'라는 단어 하나를 고의적으로 조작해 혜경궁 홍씨에게 거짓말쟁이란 누명을 씌운 셈이다.
1.2. 기본적 사실검증 결여[편집]
1.2.1. 전한이 동한이다?[편집]
중국에서는 전한을 주로 동한이라고 표기하는데……이덕일,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2015, 48쪽
1.2.2. 조비는 좀비였는가?[편집]
동천왕이 재위 16년(서기 242) 서안평을 습격하자 조조의 아들 조비는 2년 후에 장수 관구검을 보내 반격하기도 했다.
2. 지식인으로서의 태도 결여[편집]
2.1. 단기간의 비전공 분야 저술 양산[편집]
나는 이 글에서 '역사서' 한 권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 쓴 『사도세자의 고백』이다. 이 책은 '이덕일'의 이름 석 자를 세상에 널리 알린 저작으로, 역사대중화를 선도했다고 평가받았다. 또 이 책은 역사적 사실들을 엮어 소설적 문체로 서술했다고 하여,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합친 말인 팩션(faction)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팩션이라고 해서 이 책이 '역사서'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저자나 독자 모두 '역사'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아쉽게도 『사도세자의 고백』은 사실에 기초한 역사서라고 할 수 없다. 허구의 수준은 거의 소설에 가까우며, 그 소설적 논리는 소설이 되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정병설, 「길 잃은 역사대중화」, 2011, 330쪽
이덕일씨가 쓴 책은 무려 100권이 넘는다. 물론 인간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계발서를 200권 넘게 낸 작가도 있으니까. 문제는 역사책의 경우 교양서라고 하더라도 1년에 한 권 내기도 사실상 어렵다는 점이다. 어떤 학자들은 평생에 걸쳐 연구서 1-2권을 내거나 저서가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덕일씨는 근대사로 학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대사에 관한 책도 많이 발간했다. 자기의 전공시대 혹은 전공주제를 전부 섭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덕일씨는 천재인가? 1년에 5권씩 꼬박 20년을 써야 100권을 저술할 수 있다. 그것도 한국사 전시대와 모든 주제를 종횡무진하면서..
이덕일씨가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소화를 하고 배설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먹는 것에 비해 과하게 쏟아내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제대로 소화되지 않은 배설물은 냄새가 진동하기 마련이다.
2.2. 무분별한 언어 폭력의 행사[편집]
2.2.1. 김현구[편집]
2.2.2. 정병설[편집]
상식이 통하는 사회 같았으면 정병설 같은 반(反)인문적 존재는 이미 학계에서 도태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는 대한민국이다. 3백 년 전 노론사관과 1백 년 전 식민사관이 하나뿐인 정설인 나라다. 그래서 정병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객관화하지 못하고 횡설수설하는 것 같지만 그 논지는 정확하게 '사도세자는 죽어 마땅하다'는 3백 년 전 노론 당론을 되풀이하는 것이다.이덕일,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2011 서문
2.3. 네오 파시즘과 유사 매카시즘[편집]
2.3.1. "자국에 불리한 사실은 가르치지 말자"[편집]
파헤치고 파헤쳐 봐도 한사군은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라는 결론이 나오면 어떡합니까? 초등학교 때. 그거 가르치지 말아야죠. 초등학교 때 배울 게 얼마나 많아요? 이순신 장군 배워야 되고, 을지문덕 배워야 되고, 단군 배워야 되고. 배울 게 그렇게 많은데, 우리 역사를 식민지로 시작했다 이것부터 가르쳐야 되겠어요?
2.3.2.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은 주류사학자"[편집]
이 소장을 만나러 오기 전 인터넷에 관련 글을 검색했다. 그에게 우호적인 글보다는 비판하는 글이 많았다. 이 소장이 자신의 책 '우리 안의 식민사관'(만권당)에서 김현구 교수를 실명 비판한 것을 놓고 적잖은 네티즌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김현구 교수는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해온 사람인데, 이덕일 소장이 왜 김현구 교수를 비판하고 나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이 소장에게 물었다. 이덕일 소장은 "그게 다 우리 사회에 식민사관이 퍼질 대로 퍼져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답했다. "역사 카페에서 그렇게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은 일반 대중이 아니라, 다 그쪽 사람"이라는 주장이다. 이 소장이 말하는 '그쪽'이란 주류사학계를 말한다. 그는 주류사학계를 '식민사학계'라고 표현했다.
더욱 직접적인 예시로는 김상태가 있다. 이 역시 서울대 계열의 학맥을 폐쇄적 식민사학으로 강도 높게 비난하면서, 유사역사학자나 다를 바가 없는 윤내현 교수의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을 추종하는 등 주장만으로 따지자면 이덕일에 가까운 사람이다. 하지만 정작 상술한 초록불 등 인터넷 상에서 이루어진 이덕일 비판에 대해서는 적극 동조하면서 오히려 "이덕일은 정말로 죽었다"고 자신의 책에서 명시적으로 못을 박아버리고 있다.
이외에도 "역사 카페에서 그렇게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은 일반 대중이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국내 유수의 역사 커뮤니티 가운데 회원에게 '주류사학계'라 일컬어질 만한 특정 집단에 몸담고 있음을 인증하도록 요구하는 곳은 적어도 2016년 초를 기준으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노골적으로 환빠짓을 하면 까이고 쫓겨나기는 한다.
2.3.3. "평양의 낙랑 유물은 북한의 조작"[편집]
이 북한 학계는 평양 일대를 낙랑군이 아니라고 줄기차게 주장했어요. 남한 학계에서는 안 믿었습니다. 안 믿다가, 낙랑목간 하나 나오니깐 이것은 사실이다라고 막 하고 있는데, 북한에서 낙랑목간을 느닷없이 왜 공개했겠느냐. 하나는 주체사관이고 또 하나는, 또 하나는 뭐냐하면 남한으로, 북한으로서는 남한의 식민사학이 계속 유지되는게 좋은 거예요, 제가 생각할 때는. 그러면 자기 절대 품목 하나가 없어지는 겁니다. 만약 대한민국이 저희 같은 역사학으로 바뀌게 되면은 북한이 남한에서 우위로 주장할 수 있는 절대 품목 하나가 없어지는 거예요.
초원4년 락랑군 현별 호구수에 관한 목간이 락랑구역의 한 귀틀무덤에서 나오게 된 것은 락랑군의 아전이었던 피장자가 무슨 죄를 저질렀거나 인민들이 반봉건투쟁으로 하여 제 고장에 배겨있을 수가 없게 되여 락랑국으로 도망왔다가 자기 소지품과 함께 묻힌 것으로 인정된다. 그와 같은 망명객은 그 외에도 더러 있었다. …… 통계표에 보이는 7개 현(후의 대방군지역)의 호구수는 료동반도 남단의 력사지리적 및 경제지리적 환경조건과 대비고찰해보면 잘 대응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손영종, 「락랑군 남부지역(후의 대방군지역)의 위치」, 2006, 31~33쪽
이에 따라서 그것이 남한 학계를 낙랑군 재평양설로 유도하기 위함이라는 주장도 상당히 희석된다. 물론 남한 학계를 간접적으로 유도하기 위해 '역정보'를 흘린 것일 가능성도 어디까지나 배제할 수는 없지만, 문제는 그와 같은 음모론을 뒷받침할 만한 최소한의 정황적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2.3.4. "간도 영유권 부정은 국가보안법 위반"[편집]
동북아역사재단의 역사인식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간도 문제'다.백두산정계비의 토문강을 중국측에서는 두만강으로, 조선측에서는 송화강의 지류로 인식하였다고 서술하고 있음(78쪽). 그러나 백두산정계비 건립 당시 청측과 조선측 모두 토문강과 두만강이 같은 강이라고 인식하였으며, 토문강과 두만강이 다른 강이라는 인식은 18세기 후반에 제기됨, 따라서 백두산정계비의 토문강이 송화강이라는 인식에 근거하여 한·중 영토 문제를 제기하는 자료집의 간도 문제 서술은 전반적으로 수정될 필요가 있음.동북아역사재단에서 주장하는 것은 동북과정을 수행하는 중국의 관변학자들의 주장보다 더 친중국적이고 더 반대한민국적이다. …… 대한민국이 정상적인 국가라면 동북아역사재단의 사무총장 및 이 분석서를 만든 담당자는 당장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사 대상에 올랐을 것이다. 역사 침략은 반드시 영토 침략으로 이어진다. 역사 주권을 팔아 먹는 것은 영토 주권을 팔아먹는 행위와 같다.이덕일, 『우리 안의 식민사관』, 2014, 153~154쪽
그런데 국가보안법 자체에 대해서도 비판이 있기는 하다. 4.3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독립영화 레드헌트는 국가보안법에 의거 '이적 표현물'로 판단되었고, 1997년에 이 작품을 상영한 인권영화제의 주최자인 인권운동사랑방 대표 서준식이 구속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원세훈 국정원장 시절인 2009년에 최고의 간첩전문가도 탄압을 받은 일이 있다. 윤모 단장은 지난 2009년 5월 때 감찰실 직원과 점심을 먹다가 "제주 4.3 진압은 정부쪽에서 심하게 한 측면이 있다"는 말을 했다. 감찰실은 윤 단장의 발언을 '좌파적 발언'이라고 몰았고, 윤 단장을 대기발령시켰다.# 2014년에 4.3희생자 추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자 어느 반공 단체가 반발하며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까지 언급했다.# 또한 제주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은 박원순 변호사였는데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좌익폭도들을 감싸고 이승만 대통령을 학살자로 만드는 등 왜곡했다며 박원순 시장의 사임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덕일의 말은 그와 무관하게 그야말로 국가보안법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되는 대로 주워섬기며 전문가 행세를 한 것이다.
1991년 일부개정되어 지금까지 유지되는 국가보안법의 제1장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제1조(목적 등)
① 이 법은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활동을 규제함으로써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함을 목적으로 한다.
② 이 법을 해석적용함에 있어서는 제1항의 목적달성을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도에 그쳐야 하며, 이를 확대해석하거나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부당하게 제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된다.
제2조(정의)
① 이 법에서 "반국가단체"라 함은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내외의 결사 또는 집단으로서 지휘통솔체제를 갖춘 단체를 말한다.
게다가 국가보안법은 1991년에 개정되면서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을 침해하여 적용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명시하였다. 즉 헌법 제21조와 제22조에 명시된 언론과 학문적 자유의 기본권이 국가보안법보다 상위에 있다. 다만 재미있는 사실은 정작 이덕일은 김현구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법정에 서면서 그것은 자신의 '의견 표명'이므로 언론 자유의 권리로 위법성이 조각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이덕일은 동북아역사재단이 영토 주권을 팔아먹으므로 국가보안법 위반이라 주장했지만, 국가보안법이 규정하고 있는 적용 대상으로서 반국가단체는 곧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집단이다. 그래서 동북아역사재단과 같은 집단이 국가보안법에 회부되려면 직접적으로 국가 전복을 기도하였는지를 기준으로 따져야지, 국익에 해로운 언동을 하였는가를 기준으로 따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기준에 의한다면 정작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을 대상은 바로 이덕일이다. 아래에서 이덕일은 '한국판 뮌헨 폭동 내지 2.26 사건'을 벌여서 정부를 엎어버리자는 선전선동을 하였다!
대한민국 공무원들이 이 문제를 방치한다면 우리 국민들의 '제2의 3.1 운동'에 나서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해야한다.이덕일, 『우리 안의 식민사관』, 2014, 169쪽
그리고 이러한 망발에 넘어간 누군가가 간도 회복을 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고 헌법소원을 청구했고, 그에 따라 헌법재판소의 판례가 등장했다. (사건: 간도 영유권 회복에 관한 시정조치 부작위 위헌확인, 사건번호: 2009헌마516)
우리 헌법에 피청구인 또는 대한민국 정부가 현재 중국의 영토인 간도 지역을 회복하여야 할 작위의무가 특별히 규정되어 있다거나 헌법 해석상 그러한 작위의무가 도출된다고 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중국에 대해 간도협약이 무효임을 주장하여야 하는 어떠한 법적인 의무가 있다고도 볼 수 없다.
따라서, 설령 피청구인이 중국에 대해 간도협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등 간도 지역을 우리의 영토로 회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위를 하지 않고 있다고 하더라도, 청구인은 피청구인에 대해 그와 같은 적극적인 공권력 행사를 청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볼 수 없으므로, 이 사건 심판청구는 헌법소원이 허용될 수 없는 공권력의 불행사를 대상으로 한 것이어서 부적법하다.
그러므로, 이 사건 심판청구를 각하하기로 하여, 관여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과 같이 결정한다.
2.3.5. "누가 한국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편집]
동북아역사재단의 '왜놈 주구'식 주장은 계속되어 '압록강-두만강' 북쪽을 조선의 국경으로 표기한 서양 고지도도 다수 존재함'이라고 말하는 인간들이 대한민국 국고로 호의호식하며 지낸다. 동북아역사재단의 반국가적 행태는 계속된다. …… 이런 문건을 작성해서 교육부를 통해 압박한 인간들을 과연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가?이덕일, 『우리 안의 식민사관』, 2014, 157~159쪽
동북아역사재단은 무식하게도 "간도를 한국 영토로 삼은 사실이 없다"고 주장 …… 이들은 일왕의 살아있는 신민이자 중국의 흑인(호적이 되어 있지 않은 중국인이다)이다.이덕일, 『우리 안의 식민사관』, 2014, 157~159쪽
애당초 이덕일이 어떤 기준을 담보하고 있기에 자기 마음대로 누가 '비국민'이며 누가 그렇지 않은지 나눌 수 있다는 말인가? 설령 이덕일이 그러한 기준을 담보하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과 다른 말을 하면 그것만으로 '비국민'이라 몰아서 추방하겠다는 주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지극히 유치한 수준의 언동에 지나지 않는다.
임금님이 좋다고 하면 양구거도 좋다고 하고, 임금님이 싫다고 하면 양구거도 싫다고 합니다. 물에 물만 탄다면 누가 맛 좋다고 할 것이며, 악기의 소리가 하나뿐이면 누가 듣기 좋다고 하겠습니까? 맞장구치는 것(同)이 옳지 않은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춘추좌씨전』 소공 20년조
3. 고대사 관련 문제점[편집]
3.1. 환단고기 진서론[편집]
3.1.1. 치우가 나오니 위서가 아니야[편집]
치우는 환단고기나 규원사화 같은 우리나라의 역사서에도 나오지만. 이 두 책은 사학계에서 위서로 몰리는 책이다. 그러나 치우가 환단고기나 규원사화 뿐만 아니라 기원전 1세기 때 전한의 역사가인 사마천이 쓴 사기나 후한시대 반고가 쓴 한서에도 등장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마천이나 반고는 뛰어난 역사가의 대명사기 때문에 그들이 쓴 책의 내용을 무작정 허위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이덕일,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2006, 215쪽
환단고기가 근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치우는 환단고기나 규원사화가 창작해낸 인물이 아니라 중국 고대 사서인 사기와 한서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이다.이덕일,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2006, 231쪽.
굳이 논리학을 인용할 필요도 없이, 한 집합의 성분 가운데 얼마간이 참이라고 해서 그 이외의 모든 성분들이 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각각의 사실로부터 보편적 원칙을 도출하는 이러한 귀납논증은 오직 반례가 없다는 전제하에 그 가설이 아직 거짓이 아니라는 것만을 인정받을 수 있을 뿐이다.
"귀납논리학은 현재의 관찰된 사실로부터 어떤 보편적인 명제를 끌어내는 추리에 관한 연구를 한다. 이 보편적인 명제는 현재 아직 관찰되지 않은 경우도 포함하고, 아직 발생하지 않은 미래의 경우도 포함한다. 이것은 과거와 현재에 특정한 수의 황새가 빨간 다리를 가지고 있다는 관찰을 근거로 ‘모든 황새는 빨간 다리를 하고 있다’라는 보편적 명제를 주장하는 경우이다. 이때의 추리의 정당화에 대해 D.흄이 의문을 제기하였고, J.S.밀, 러셀, J.케인스, R.카르나프가 확률이론(確率理論)을 통하여 여러 가지 설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C.S.퍼스, J.듀이, 그리고 K.R.포퍼는 이러한 귀납논리학의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였다. 그것은 황새의 보편적 명제에 대하여 아직 반례(反例)가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이다. 퍼스는 그 보편명제가 참이므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하지 않고 아직 거짓이 아니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 보편명제는 ‘법칙’이라기보다 ‘가설(假說)’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므로 퍼스의 귀납성은 빨간 다리의 황새들을 열거하는 데서 찾지 않고 황새의 보편적 명제에 대한 있을 만한 반례의 경우들을 찾아보면서 아직 반례를 얻지 못하는 데서 설명될 수 있다."
하지만 주지하듯이, 환단고기에는 이미 거짓으로 증명되는 반례들이 수두룩하다고 하지만 역사적으로 봤을 때에도 사실적인 부분들이 있는데도 여전히 부정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것이 현실이다.
다만 이덕일의 말을 다소 유화적으로 해석하자면 '환단고기에만 등장하는 다른 내용들에도 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도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제기가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도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 환단고기에 치우에 관한 내용이 들어가게 되었는지를 그것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덕일 자신이 인정하듯 치우가 등장하는 사기와 한서부터가 과거부터 뛰어난 역사책으로 손꼽히던 것들이고, 조선시대 경연이나 선비들의 저술에서 정말 엄청나게 많이 인용되는 게 사기와 한서의 구절이다.
주작이 담덕을 도왔다. 담덕은 실존 인물이다.
연개소문은 승천했다. 연개소문은 실존 인물이다.
천추태후는 여전사였다. 천추태후는 실존 인물이다.
충혜왕은 성군이었다. 충혜왕은 실존 인물이다.
세종은 밀본과 싸웠다. 세종은 실존 인물이다.
김승유는 세조의 사위였다. 김승유는 실존 인물이다.
류성룡은 몽진을 반대했다. 류성룡은 실존 인물이다.
고구려는 안택선을 탔다. 고구려는 실존 국가다.
조선은 하이힐을 발명했다. 조선은 실존 국가다.
사마천 자신부터가 오제본기의 후기에서 "많은 이들이 황제를 말했지만, 그 글은 쓸만하지 못하다"고 해서 황제의 실존 여부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판이기 때문이다. 고고학적으로도 당장 요순시대 이래의 하나라만 해도 실재를 입증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전까지 올라가면 중국에서도 실제 역사였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3.1.2. 환단고기 진서론자 인증[편집]
환단고기 완역을 축하합니다. 환단고기 완역은 현재 주류사학계를 장악하고 있는 식민사학 타파에 결정적 역할을 할 것으로 믿습니다.
단군은 천자나 황제처럼 통치자를 뜻하는 용어이고, 왕검은 초대 단군의 이름이 된다. 『삼국유사』는 단군조선의 시조 단군 왕검만을 밝히고 있는데, 아직 진위 논쟁은 있지만 『환단고기(桓檀古記: '한단고기'로도 읽음)』■ 같은 책들은 시조 단군 왕검 외에 2세 단군 부루(扶婁) 등 47임금의 계보를 밝혀 놓기도 했다.■ 『환단고기』는 대종교의 계연수(桂宴壽)가 1911년 『삼성기』·『단군세기』·『북부여기』·『태백일사』라는 네 종류의 책을 묶어 편찬한 책인데 아직껏 위서 논쟁이 치열하다. 위 책들에 기록된 단군의 세계는 아래와 같다.이덕일, 『교양 한국사 1』, 2005, 52~53쪽
2016년에 이덕일은 심지어 '세계환단학회지'라는 학술지
3.2.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편집]
3.3. 삼국사기 초기기록 수정론 식민사관설[편집]
3.4. 왜인 한반도 남부 지배설[편집]
- 숙신, 동예, 동부여를 헷갈렸다.
- 동예를 410년에 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마저도 동예와 동부여를 헷갈린 것인지 동예의 복속 연대를 410년이라고 표시했다. 그래놓고 그 위에 동부여도 410년에 복속되었다고 표시했다. - 동예가 옥저 자리에 있다.
애당초 '백신'을 동예로 본 것이 그들의 복속을 신라로 가는 루트를 확보한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인데, 동예가 저기 있으면 '백신'이 동예인 이유가 없다.
- 거란, 비려를 헷갈렸다.
- 거란과 비려가 나란히 나와 있다.
광개토왕릉비문 영락 5년조의 정벌 대상은 비려(碑麗)인데, 대개 삼국사기 광개토왕 원년의 거란과 동일시된다. 그런데 이덕일은 그냥 둘 다 했다. - 거란을 395년에 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마저도 거란과 비려를 헷갈린 것인지 거란의 정벌 연대를 395년이라고 표시했다. 그래놓고 그 위에 비려도 395년에 복속되었다고 표시했다. - 비려가 북부여 자리에 있다.
애당초 '비려'를 거란과 분리시켜 보는 것이 그것을 숙신 서북의 비리국(裨離國)으로 보기 때문인데, 비려가 저기 있으면 '비려'가 비리인 이유가 없다.
- 신라와 울릉도의 표기가 누락되었다.
독도는 고사하고 울릉도도 없고, 울릉도는 고사하고 신라도 없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3.5. 신라의 만주 지배설[편집]
3.6. 『전라도 천년사』에 대한 공격[편집]
3.7. 가야 고분군 세계유산 등재 훼방[편집]
4. 조선사 관련 문제점[편집]
4.1. 조선왕 독살설[편집]
4.2. 과도한 인물 재평가[편집]
4.2.1. 연산군 옹호[편집]
4.2.2. 원균옹호론[편집]
애당초 원균옹호론은 80년대의 일시적인 트렌드였기에 얼마간 참작의 여지가 있고 이후 거듭 논파되면서 지금은 그 입지가 많이 줄었지만, 문제는 이덕일이 아직까지도 종종 원균의 무능함을 물타기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칠천량해전 때 토벌 불가를 외치는 원균을 윽박질러 전투에 나서게 한 원수가 바로 권율이라는 사실이다. 선조 32년(1599) 7월 19일 이조에서 도원수 권율의 추증을 건의하자 사관은 권율을 격렬하게 비판한다.정유년 주사의 전투[칠천량해전]에서 아무리 조정의 명령이 있었다고는 하나, 진실로 시기를 살피고 힘을 헤아려 왜적과 대결하기 어려운 상황을 즉시 보고했어야 했다. …… 권율은 이런 계책은 염두에 두지 않고 멋대로 경거망동하면서 통제사 원균을 형장하면서 급하게 독전하였다. 그리하여 6년 동안 어렵게 모은 주사를 하나도 남김 없이 없앴으며, 그 많은 산책 역시 한 곳도 보존하지 못함으로써 적군으로 하여금 무인지경에 들어가듯 호남·호서를 침입하게 만들었다.이덕일·이희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 1999, 199~200쪽
요시라를 통해 이순신을 무력화시킨 고니시는 같은 전술을 원균에게도 사용했다. 원균 역시 "고니시와 요시라가 거짓으로 통화(通和)하는 것이므로 그 실상을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반대했지만, 선조와 원수 권율의 압박에 못 이겨 출전할 수밖에 없었다. 선조 30년(1597년) 7월 15일 원균은 조선 수군 전부를 이끌고 절영도 전투에 나섰다가 대패하고 말았다. 그는 거제도 칠천량에 상륙했다가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시마쓰 요시히로에 의해 전사했고, 전라좌수사 이억기도 전사하고 말았다.
"왜적의 말은 교활하여 믿기가 어렵고 청정이 이미 대마도에 나와 있으니, 비록 계책을 행하려 해도 미치지 못할까 싶습니다. 신들이 뒷탈이 있을까 염려되고 또 기회가 이미 늦었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원수로 하여금 적의 정세와 시기가 어떠한가를 보아 편의에 따라 수응(酬應)하여 그 일을 성취시키게 하고 불가하거든 그만두게 하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때문에 "수군을 이끌고 무력시위만 해도 가토가 겁먹고 못 넘어올 것"이라 주장하면서 요시라가 던진 떡밥을 되살리고, 선조가 생떼를 부리며 이순신을 파직하도록 부추긴 게 바로 원균이다. 작전개념을 제시하고 여론도 뒤집었는데 원균의 책임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수백 명의 수군으로 영등포 앞으로 나가 몰래 가덕도 뒤에 주둔하면서 경선(輕船)을 가려 뽑아 삼삼오오 짝지어 절영도 밖에서 무위를 떨치고, 100~200씩 대해에서 위세를 떨치면, 청정은 평소 수전이 불리한 것에 겁을 먹고 있었으니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것이라 생각됩니다. 원하건대 조정에서 수군으로써 바다 밖에서 맞아 공격해 적으로 하여금 상륙하지 못하게 한다면 반드시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장계를 올릴 당시 원균은 전라좌병사로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중장급(종2품) 육군 군단장이 대장급(정2품) 해군참모총장의 작전계획에 참견을 놓은 셈이니, 하극상인 것은 차치하더라도 명백히 지휘계통을 무시한 발언이다. 그것도 당사자에게 직접 제언한 것도 아니고 대통령에게 직통 라인으로 징징거렸다는 점에서 그 발언이 다분히 정치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이순신을 몰아내기 위한 정치적 발언을 했ㅇ.니 원균의 책임이 아닐 수는 없다.
원균은 통제사로 부임하던 날 나의 중부(안중홍)를 찾아뵙고 "내가 이 직함을 영화롭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순신에 대한 치욕을 씻게 된 것이 통쾌합니다"고 하였다.
결정적으로 권율이 원균에게 곤장을 친 것은 그의 무능함을 문책한 것이다. 칠천량 해전 이전에 이미 부산포에서 성과 없이 판옥선만 30여 척을 까먹고 돌아오는 사실상의 패전을 겪었다. 당연히 '''원균의 재출전을 강요한 것이 아니었다.:: 의외로 당시 조선 조정의 작전계획은 함대를 나누어 파상적으로 해상을 교란하라는 것이었지, 죄다 이끌고 가서 한큐에 건곤일척을 벌이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비록 우리나라 수군이 오랫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낱낱이 소탕해 막지는 못하더라도 현재의 선박을 합쳐 몇 개 부대로 나누되 배설은 경상우도의 배로 한 부대를 만들고, 이억기는 전라우도의 배로 한 부대를 만들고, 최호는 충청도의 배로 한 부대를 만들고, 원균은 그가 거느린 선박으로 한 부대를 만들어서 한산도를 굳게 지켜 근본을 삼고 부대별로 교대로 해상에 나가 서로 관측하게 해야 합니다."
도원수 권율이 장계하길…… "이런 식으로 계속 번갈아 교대하며 뒤에 오는 자가 나아가고 앞에 간 자가 돌아오면, 그곳의 적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바다를 건너지 못할 것이고 혹시 돛을 달더라도 파두(波頭)에 부서질 것이니, 이곳에 있는 적들의 형세가 고단해지고 양식이 떨어져 진퇴가 궁색해질 것입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적병이 비록 해안에 나누어 점거하고 있으나 군량을 조달하고 병사를 보충하는 길은 바다에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주사(舟師)를 적이 무서워하니 부대를 나누어 번갈아 나가 바다에 왕래하면서 적의 보급로를 끊는다면 이는 곧 적의 허점을 공격하는 것임과 동시에 요해처를 장악하는 것이니 현재의 계책으로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곤장을 맞고 분을 이기지 못한 원균이 독단적으로 전군을 이끌고 출정해서는 술만 퍼마시다 튀었던 것이다. 상부의 작전계획을 사사로이 변경하고 달아난 것은 분명 원균의 책임이다.
임란 초기에 왜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던 경상좌우수영이 거의 궤멸되자 원균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원병을 요청해 이순신과 함께 옥포·당포 등지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만 해도 원균과 이순신은 서로 의기가 투합하는 명콤비였다. 『선조실록』 25년 6월 21일자는 원균과 이순신이 한산도와 당포에서 승전한 일에 대해서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대체로 이순신을 주역으로 기술하였지만 원균에 대해서도 공동작전의 한 축으로 적어놓았지 폄하하지는 않았다.이덕일·이희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999, 201쪽
임란 발발 당시 조선 수군은 경상좌수사 박홍,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 등이 이끌고 있었다. 이 중 최초의 왜군의 상륙 지역이었던 경상좌·우수사 소속의 전선은 왜군의 집중 공격으로 거의 궤멸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원균의 지원 요청으로 출전해 옥포와 당포 등지에서 승전을 거둠으로써……이덕일, 『살아있는 한국사 3』, 2003, 85쪽
4.2.3. 윤휴 옹호[편집]
4.3. 조선까[편집]
4.3.1. 임란 때 왜군 절반이 조선 백성[편집]
선조는 왜 조선을 버리고 도주하려 했을까. 물론 용렬한 국왕인 탓도 있지만 개인적인 성향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 5월 4일 선조는 개성에서 다시 평양으로 도주하려고 하면서 윤두수에게 이렇게 물었다. "적병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가? 절반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는데 사실인가?" 선조가 조선을 버리고 도주하려 했던 근본 원인이 여기에 있었다. 조선 백성들이 대거 일본군에 가담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숫자도 선조가 듣기에는 일본군의 절반이나 된다고 할 정도로 많았다.
그런데 저 대화는 그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한 번 제기된 뜬소문에 대한 내용일 뿐이다. 선조가 한 질문에 윤두수는 '그 말의 사실 여부는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고, 대화는 바로 다음 주제로 넘어가버린다. 그 외 순왜의 객관적인 규모를 알아보려는 다른 연구조차 없다. 이덕일처럼 당시의 뜬소문을 사실의 근거로 받아들인다면, 임진왜란은 조선이 명을 침공하기 위해 일본과 연합한 것이 되고, 풍신수길은 1596년 4월에 이미 죽은 것이 된다.
"수길(秀吉)이 죽었다는 말이 사실인가?"
현대사에서도 이리역 폭발사고는 북한이 이리에 폭격을 한 것이 되고, 9.11 때에는 이스라엘이 핵을 맞은 게 된다. 정보전달 및 수집이 매우 빨라진 현대 사회에서도 큰 사건이 터지면 사건정리 전에는 온갖 가짜뉴스와 루머가 나도는 것이 실상인데, 이덕일은 통신이 지극히 빈약했던 전근대 시대에 있었던 뜬소문을 마치 사실인 것 처럼 근거로 삼은 것이다.
4.4. 노론 음모론[편집]
4.4.1. 임오화변과 정후겸과 이완용[편집]
거대 수구집권세력의 개혁세력 제거작전의 희생양이 사도세자였다. …… 대한제국을 팔아 넘긴 마지막 노론 당수 이완용이 고종에게 사도세자 살해에 가담한 정후겸의 신원을 여러 차례 요청한 데서도 이 사건의 본질은 명확하다.
정후겸은 이덕일의 주장과 다르게 노론이 아니라 소론이다. 정조 실록의 기록을 보면 소론쪽 인물인 구윤옥과 서명선등이 정조에게 정후겸과 친하게 지냈다며 사죄하는 상소를 올린 기록이 존재한다. 게다가 정후겸은 1749년에 태어났으므로 임오화변 당시 그의 나이는 14세이다. 이덕일은 1학년 중학생이 사도세자 살해에 가담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게다가 임오화변 당시 정후겸은 인천에서 가난한 생선장수의 아들로 살고 있었다. 그가 화완옹주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정계에 입문하게 된 것은 임오화변이 일어나고도 다시 2년이 지난 1764년의 일이다. 참고로 화완옹주의 죽은 남편 정치달과 정후겸은 무려 11촌 관계.
정후겸이 훗날 정조에게 숙청당하긴 했지만, 이는 정조가 세손 시절 대리청정을 할 때 화완옹주의 총애를 바탕으로 안하무인으로 굴었던 게 원인이었다. 즉 정후겸은 그저 임오화변에 조력한 홍봉한과 함께 정조 본인을 압박한 것이었지, 사도세자의 죽음 자체에는 아무런 책임이 없었다. 이러한 점은 이덕일이 제시하는 정조실록의 다음 기록으로도 방증된다.
지난번 헌장(憲長)이 차자를 올려 정후겸의 죄상을 극력 논하였는데, 이는 진실로 바로 지금 그만둘 수 없는 정론(正論)입니다마는, 죄가 이보다도 크고 악이 이보다도 극도하여 전하께서 반드시 보복해야 할 원수이면서 온 나라가 반드시 주토(誅討)해야 할 역적이 있습니다. 오직 홍봉한은 천만 가지 죄악을 다 갖추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크고 가장 극악한 것을 말한다면 곧 임오년에 범한 죄인데, 전 참판 김귀주의 상소에서 말한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정조 즉위 직후 홍봉한 탄핵 상소가 쏟아졌다. 동부승지 정이환은, 세자 살해에 가담한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보다도 홍봉한이 반드시 죽여야 할 더 큰 역적이라고 지목했다. 정이환은 "홍봉한의 천만 가지 죄악 중에서 가장 크고 극악한 죄가 바로 임오년에 범한 죄"라면서, 일물(一物), 즉 뒤주를 홍봉한이 올렸다고 폭로했다
참고로 이 상소를 쓴 정이환은 이덕일이 사도세자를 죽인 주범으로 미워해 마지않는 김귀주의 측근으로 노론벽파이며 이들은 정적인 홍봉한을 공격하기 위해 뒤주썰을 들고 나왔는데 이는 정조나 영조, 그리고 소론계에서도 부정하고 있다. 정이환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홍봉한을 공격하다가 김귀주의 사인을 써서 뭐하겠냐는 정조의 말과 함께 파직당한다.
게다가 이완용이 신원을 요청한 건 정후겸만이 아니다. 대북 정인홍, 탁남 민암, 청남 윤휴, 소론 이광좌, 노론 김하재까지 그야말로 위 아 더 월드며 이징옥의 난을 일으킨 이징옥, 이인좌의 난에서 추대된 소현세자의 증손 밀풍군, 이재선 역모사건을 주동한 안기영도 있으며 심지어 그 유명한 윤원형도 보인다.
무엇보다도 윤휴가 올라가 있다는 게 좀 큰데, 이덕일이 누구나 알아주는 윤휴 추종자이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이덕일의 평가는 진정한 북벌 주창자, 수구 기득권 세력에 맞선 개혁가라는 것인데(이덕일, 『조선 왕을 말하다』, 역사의아침, 2010, 97~110쪽.) 이완용의 요청으로 신원되었으니 정후겸이 매국적 인물이라면 마찬가지로 윤휴도 매국적 인물이라는 논리가 되어버린다.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법부대신 조중응이 융희 원년 11월 18일에 받은 조칙에 따라 이름이 죄적(罪籍)에 올라 있는 자들의 죄명을 벗겨주고 다시 작위와 시호를 회복시킬 것에 대한 안건을 내각 관제 제7조 제7항에 의하여 논의를 거쳐 상주하였다. 제칙을 내리길 "재가한다"고 하였다. 한효순(韓孝純), 정인홍(鄭仁弘), 목내선(睦來善), 이현일(李玄逸), 이광좌(李光佐), 조태구(趙泰耉), 조태억(趙泰億), 최석항(崔錫恒), 유봉휘(柳鳳輝), 김일경(金一鏡), 김도응(金道應), 김중기(金重器), 정후겸(鄭厚謙), 김하재(金夏材), 안기영(安驥泳), 권정호(權鼎鎬), 조중호(趙中鎬), 이연응(李然應), 이종해(李鍾海), 이병치(李炳埴), 이종학(李鍾學), 이두영(李斗榮), 강달선(姜達善), 이철구(李哲九), 정건섭(丁建燮), 채동술(蔡東述), 갑오년에 신원되었으나 아직 관작을 회복하지 못한 김익순(金益淳), 이병훈(李炳勛), 홍재학(洪在鶴), 백낙관(白樂寬), 이희화(李喜和)이다.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법부대신 조중응이 11월 18일의 조칙을 받들고 죄적에 이름이 올라 있는 사람들의 죄를 벗겨주는 안건에 대하여, 논의를 거친 후 개록(開錄)하여 민암(閔黯), 신치운(申致雲), 김홍진(金鴻鎭), 김건순(金建淳), 이주회(李周會), 서종하(徐宗廈), 이명의(李明誼), 윤취상(尹就商), 권익관(權益寬), 이하징(李夏徵), 박찬신(朴纘新), 이명조(李明祚), 김형집(金亨集), 이의징(李義徵), 이징옥(李澄玉), 권호선(權浩善), 원용성(元用星), 이진유(李眞儒), 윤성시(尹聖時), 이사상(李師尙), 이명언(李明彦), 윤상백(尹尙白), 유수원(柳壽垣), 이거원(李巨源), 권형진(權瀅鎭), 윤휴(尹鑴), 한세량(韓世良), 조택현(趙宅顯), 장호익(張浩翼), 허욱(許煜), 정해(鄭楷), 박필몽(朴弼夢), 윤연(尹?), 김중희(金重熙), 윤지(尹志), 심악(沈?), 조동정(趙東鼎), 오성모(吳聖模), 윤원형(尹元衡) 이상 모두 39명이다. 상주하니 윤허하였다.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아뢰었다.
"삼가 지난해 11월 18일의 조칙을 받들고 죄적에 이름이 올라 있는 사람들의 죄명을 탕척(蕩滌)하는 사안에 대해 여러 번 주하(奏下)를 거쳤습니다. 그 중에서 관작이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응당 벼슬을 회복시켜 주는 은전을 베풀어야 하는데, 사안이 오래되다 보니 한꺼번에 모조리 조사할 수 없습니다. 우선 고 좌의정 한효순 외 77인의 관작을 회복시킬 데 대해서만 상의를 거친 뒤에 개록하여 좌의정 서흥부원군 한효순(韓孝純), 영의정 정인홍(鄭仁弘), 좌의정 목내선(睦來善), 이조판서 문경공 이현일(李玄逸), 영의정 문충공 이광좌(李光佐), 영의정 문정공 조태구(趙泰耉), 좌의정 문충공 조태억(趙泰億), 좌의정 충간공 최석항(崔錫恒), 좌의정 충정공 유봉휘(柳鳳輝), 대사헌 김일경(金一鏡), 병조참판 김중기(金重器), 회인현감 김도응(金道應), 예조참판 정후겸(鄭厚謙), 이조참판 김하재(金夏材), 좌승지 안기영(安驥泳), 우부승지 권정호(權鼎鎬), 부호군 조중호(趙中鎬), 선천부사 김익순(金益淳), 홍문관시독 이희화(李喜和), 우의정 민암(閔黯), 형조 판서 이의징(李義徵), 대사헌 한세량(韓世良), 승지 신치운(申致雲), 절도사 이징옥(李澄玉), 사옹원판관 원용성(元用星), 감역 허욱(許煜), 군부협판 이주회(李周會), 이조참판 이진유(李眞儒), 승지 정해(鄭楷), 예조참의 서종하(徐宗廈), 이조참의 윤성시(尹聖時), 대사헌 박필몽(朴弼夢), 대사간 이명의(李明誼), 형조판서 이사상(李師尙), 이조참의 윤연(尹?), 훈련대장 윤취상(尹就商), 부제학 이명언(李明彦), 보덕 김중희(金重熙), 함경감사 권익관(權益寬), 교리 윤상백(尹尙白), 지평 윤지(尹志), 목사 이하징(李夏徵), 동부승지 유수원(柳壽垣), 대사헌 심악(沈?), 판윤 박찬신(朴讚新), 포도대장 조동정(趙東鼎), 교리 이거원(李巨源), 정언 이명조(李明祚), 경무사 권형진(權瀅鎭), 이조판서 윤휴(尹鑴), 영의정 윤원형(尹元衡), 지평 이동양(李東讓), 정언 이범제(李範濟), 현감 이공윤(李公胤), 승지 이중술(李重述), 진사 이하택(李夏宅), 승지 이보욱(李普昱), 승지 김호(金浩), 현감 박필현(朴弼顯), 병사 박태신(朴泰新), 감역 정권(鄭權), 부수 조현빈(趙顯彬), 부사 심유현(沈維賢), 감사 권첨(權詹), 이조참판 이사로(李師魯), 밀풍군 이원(李垣), 승지 이재화(李在華), 정언 이우화(李宇和), 주서 권숭(權崇), 이조참판 김정관(金正觀), 동부승지 김정리(金正履), 감사 정사효(鄭思孝), 정언 권집(權䌖), 부사 김주태(金柱泰), 통제사 김윤(金潤), 좌부승지 채동술(蔡東述), 좌의정 박홍구(朴弘耉), 승지 박홍도(朴弘道)이다. 상주(上奏)합니다."
윤허하였다.
4.4.2. 혜경궁 홍씨를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악처"로 몰기 위한 왜곡[편집]
이런경우 세자가 의지할 곳은 처가 홍봉한 가 밖에 없었다. 하지만 홍봉한은 물론 홍씨도 소론으로 기울어진 세자 편은 아니었다. 오흥부원군 김한구와 그의 딸 정순왕후 김씨에 대한 한중록의 기록을 보자.
"오흥부원군이 갑자기 국구가 되어 모든 게 서먹서먹한데 부친이 편안함과 근심을 함께할 마음으로 지도해 범사에 탈이나지 않게 해주어 처음엔 그도 감격스레 여겼다. 나도 대비전을 우러러보아 내가 먼저 궁중에 들어왔고 내 나이 많은 걸 생각 않고 일심으로 공경하니 대비전도 나를 극진히 대접하므로 백년을 양가가 서로 사랑할까 하였다. 그러나 형세가 커지고 알고 지냄이 오래되자 먼저 된사람을 꺼리고 지도하는 뜻을 버리게 되었다."
김한구와 정순왕후는 세자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이 세력과 백년을 양가가 서로 사랑할까 한 것이 홍봉한 가의 방침이었다. 즉 홍봉한과 혜경궁 홍씨는 세자를 버리고 정순왕후가와 결탁한 것이다. 형세가 커지고, 지도하는 뜻을 버리게 되었다는 말은 순조가 즉위한 후 대비로서 수렴청정하던 정순왕후가 홍봉한 가를 공격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도세자의 고백
사도세자의 고백에는 마치 김귀주와 홍봉한이 잘 지내다가 정순왕후 수렴청정기에 느닷없이 자신의 가문을 공격한듯이 묘사하고 있지만 한중록을 보면 세자 생전부터 사이가 안좋았음을 충분히 묘사하고 있고 실록에서도 두 가문이 극렬하게 사이가 안좋았던 건 영조 대부터 분명히 드러나 있다.
한중록에 김귀주가 밀봉 봉서를 영조에게 올려 홍봉한과 정휘량이 사도세자의 평양행을 말리지도 않고 영조에게 알리지 않는다고 비판했고 이는 실록에서도 정조가 김귀주의 밀봉서를 언급한 것을 볼 때 사실이며, 홍봉한이 영조 때 은언군과 은신군을 보살핀 혐의로 역모 혐의를 받은 건 김귀주의 사주였음이 정조실록의 정조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김귀주의 남몰래 배포(排布)한 정상을 중외(中外)의 사람이 어떻게 알겠는가? 대저 김귀주가 처음에 정후겸(鄭厚謙)과 더불어 주무(綢繆)하고 배포(排布)해서 사생 동고(死生同苦)의 친구로 맺어 힘을 합해서 봉조하(홍봉한)를 공격하였다.
신묘년 2월 5일에 어가(御駕)가 구저(舊邸)로 나아가니, 김한기(귀주의 삼촌으로 당시 김귀주는 상중이라 직접 참여하기가 어려웠음) 와 정후겸이 내가 수가(隨駕)하지 않는 것을 보고 밤을 틈타 사사로이 뵙고 천청(天聽)을 현혹시켰고, 이에 궁성(宮城)을 호위하는 일이 있었는데, 내가 행여나 성덕(聖德)에 결함이 있을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대비전에 나아가 재삼(再三) 우러러 아뢰어 겨우 마음을 돌리게 되었고, 무릇 환궁[回鑾]하는 날에 미쳐서는 선대왕께서 소자에게 하교하기를, ‘양편의 척리(戚里)가 서로 공격하니 국가의 근심이 적지 않다.’고 하시므로 내가 마땅히 이 무리에게 기만을 당하지 않는 방도를 생각하게 되었다.아! 신묘년 봄에 봉조하를 죽이지 못하게 되니, 그 해 가을에 이르러 안팎으로 선동하여 그 분운(紛紜)함을 견딜 수 없었고 또 망극하여 차마 들을 수 없는 말로써 공동(恐動)하였다.
혜경궁은 한중록에 세자가 스물두 살이 되도록 영조가 능행할 때 한 번도 수가 하지 못했다고 기록하였다. 봄 가을마다 기다렸으나 세자를 미워한 영조가 한 번도 데리고 가지 않아 이 또한 세자가 울화병에 걸린 이유의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혜경궁은 세자가 영조 32년에 처음 능행에 따라갔으며 이때 명릉에 수가하게 된 것이 기뻐 세자가 목욕재계하며 정성을 다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 또한 부자간의 갈등을 표현하기 위해 혜경궁이 의도적으로 꾸민 거짓말에 불과하다. 세자는 그전에 이미 여러 차례 영조를 수가해 능행에 다녀왔다. 혜경궁이 처음이라고 주장했던 해보다 4년 전인 영조 28년 2월 영조가 태묘(태조의 묘, 곧 건원릉)와 영희전에 나갈 때, 그리고 그다음 해인 영조 29년 7월 태묘에 거동할 때도 수가했으며 또한 같은해 12월 태실에 나갈 때와 다음해 첫날 태묘에 나 갈때도 따라갔다
-사도세자의 고백
태묘는 이성계의 능이 아니라 종묘를 말하는데 태조의 능으로 오독하며 혜경궁을 거짓말쟁이로 몰아가고 있다.
설사 이덕일이 태묘를 이성계의 능으로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실록에 분명히 세자의 능행이 영조 32년 명릉행이 최초였음이 적혀 있다.
다음은 사도세자가 따라간 명릉 원행이 있은지 7일 후의 실록기사인데 세자가 처음으로 경기지역에 출행한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8월 7일(계묘)
설서 이휘중(李徽中)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번에 저하께서 원릉(園陵)의 어가를 수행하신 것은 진실로 정례(情禮)를 한번 펴는 데서 나온 것이나, 이는 곧 저하께서 처음으로 기전(畿甸-경기)에 출행(出行)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소론 영의정 이천보가 영조에게 말했다.
"신 등이 밤낮으로 바라는 바는 성궁을 보호하는 것뿐입니다. 동궁의 자질은 천고에 빼어나므로 전하께서 진실로 관대하게 포용하신다면 덕성을 이룰 것이며 털끝만한 잘못도 없을 것입니다.
이천보가 밤낮 바라는 바는 성궁을 보호하는 것뿐"이라고 말한 까닭은 세자를 견제하는 영조의 속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의 고백
영조와 세자 사이를 중재하려던 이천보의 말은 거꾸로 둘 사이에 긴장감을 조성했다. -사도세자의 고백
지금 대신들 중에 자신을 도와줄 인물은 한 명도 없었다. 소론 영의정 이천보가 세자를 지지하다 쫓겨난 후 유척기, 김상로, 신만 모두가 노론이었다. -사도세자의 고백
노론 이천보를 소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이덕일의 다른 책 《조선 왕을 말하다》에서는 이천보를 노론으로 적시한 후 그를 신랄하게 깐다. 즉 분명 《사도세자의 고백》때만 해도 <억울한 세자를 옹호해주는 소론 대신>으로 나오던 이천보가 다른 책에서는 <다른 당파를 배제한 독재정치를 시도하는 노론 대신>으로 둔갑한 상황인 것. 그때그때 자신의 주장에 맞춰 특정개인의 당파를 설정하고 논리를 전개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연하지만 모든 학문에서 이런식의 끼워맞추기식 주장은 금기시된다.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세자의 온궁행이 이루어진 배경에 대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정신병자인 세자가 칼로 화완옹주를 위협해 영조를 조르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조 실록의 기록이 보여주고 있듯이 세자의 온양행은 약원제조와 의관들의 진단에 따른 처방이다 - 사도세자의 고백
한중록에 적혀있는 건 사도세자가 화완옹주에게 자신의 다리에 종기가 있으니 이를 빌미로 온천행이 이루어지게 주선하라고 위협했다는 말이지 무턱대고 화완옹주를 위협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실록에도 영조가 세자의 온천행을 불가하다고 했다가 하루만에 이를 번복했다.
혜경궁은 이때도 세자의 정신병이 심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 세자의 병은 정신병이 아니라 습장, 곧 종기였다 - 사도세자의 고백
당시 세자를 둘러싼 궁중의 정치 상황은 여자 사냥에나 신경 쓸만큼 한가롭지는 않았다. 세자는 자신을 향해 조여오는 음모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세자를 지지해주던 소론 대신들이 잇달아 사망하고 그 자리를 노론이 메우는 상황은 세자에게 본능적인 공포로 다가왔다.
37년 1월 5일 이 책에서 소론으로 주장하는(실제는 노론인) 영의정 이천보가 사망했다. 그리고 2월 15일 홍봉한과 친구였던 우의정 민백상이 사망했다. 3월 4일엔 좌의정 이후가 사망했는데 이후도 노론이다.
이 셋이 거의 동시에 사망해서 사도세자의 평양 서행의 책임을 지고 음독자살 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는데 사도세자의 평양 서행은 이후 4월의 일이니 와전된 소문이다. 그런데 소론계 대신들이 잇달아 사망하고 노론이 메우는 상황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세자는 관서지방으로 미행을 가기 전에 중요한 인물 한 사람을 만난 것이 분명하다. 그사람은 바로 우의정을 역임한 소론 영수 조재호였다. 위기를 느낀 세자가 도움을 요청한 인물이 자신의 처남인 홍낙임이 아니라 형수의 오빠인 조재호라는 점에서 세자의 비극은 극대화된다. 세자의 미행 때 그를 만나 도움을 요청했고 조재호는 이를 선뜻 수락했다. -사도세자의 고백
세자가 믿고 간 정휘량은 시세에 민감한 인물이었다. 그는 나주 벽서 사건 당시 다른 소론들이 침묵을 지키며 불안해 할 때 이창수와 함께 앞장서서 조태구와 유봉휘의 가족까지 연좌하고 재산을 몰수하자고 주장하기도 했었다. 또한 소론 온건파이자 탕평파인 최석항과 이광좌의 관작을 추탈하자고 주장한 것도 바로 그였다. 영조는 그때 노론이 아닌 소론이 최석항과 이광좌의 관직을 추탈하자고 주장하자 곧 허락했었다. 그럼에도 세자는 정휘량이 소론인데다 매제의 숙부이므로 그를 찾아가 장래를 논의했을 것이다.
을해옥사 당시 정휘량뿐 아니라 온건 소론 쪽에선 대부분 앞장서 탄핵했었다.
정휘량과 같이 같은 소론을 탄핵한 인물 중 하나인 조재홍은 바로 조재호의 동생이다. 정휘량만 시세에 민감한 게 아닌 옥사가 온 건 소론들에게까지 확대될까봐 앞장서 탄핵해 충성심을 보여준 거다.
그러나 세자가 믿었던 정휘량은 세자를 버리고 시세를 따랐다. 정휘량은 세자가 관서에서 한 말과 행위를 홍봉한에게 그대로 전했다. 이런 정보 제공에 대한 대가인지는 몰라도 정휘량은 영조 37년 8월 좌의정으로 승진한 홍봉한의 전 관직인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혜경궁도 한중록에 홍봉한이 정휘량에게 정보원을 보내 세자의 관서행을 알고있었다고 적고 있다.
- 사도세자의 고백
당시 김귀주는 정휘량과 홍봉한이 세자의 평양행을 말리지도 않고, 영조에게 알리지도 않는다는 밀봉 상소를 영조에게 올려 비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세자의 평양행은 다섯 달이나 영조가 모르고 있었고 영조가 알게 되자 정휘량은 정승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정조 16년 실록을 보면 정조도 그때 정휘량이 사도세자 보호를 위해 큰일을 했다고 평가했다.
"휘량은 신사년 가을에 공로를 세운 곳이 있으니, 역적 나경언(羅景彦)이 급서(急書)를 올리던 때를 당하여 조정 신하 중 한 사람도 곤장 한 대 치자고 청하는 자가 없었으나 이 사람이 유독 면대를 요구하여 국문할 것을 청하였고 이 밖에도 또한 주선한 것이 많았다. 정휘량은 역적 나경언(羅景彦)을 국문하자고 청한 차자에서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바를 말하였으니, 또한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사년 가을(영조 37년)에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일이 장차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관서(關西)로 행차할 때에는 백성들의 마음이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통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며, 혹시 나를 모를 것이라고 여겼었다.”
이는 세자가 관서행을 반성하는 말인데 워낙 떠들썩하게 행차해 백성들도 알아볼 정도였는데 비밀이나 되는듯이 정휘량과 홍봉한이 비밀을 주고받고 이를 빌미로 정휘량에게 정승직을 줄 필요도 없다.
부친이 초조 황망하여 넌지시 감사에게 알아와서 소식을 들으시고, 항상 대궐에 오시다가 혹 집에 돌아오셔도 마루에 앉아 밤을 새워 사시니 당신의 심사가 어떠하리오.
홍봉한은 정휘량을 통해 세자의 관서행을 알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혜경궁의 다음 말은 중요하다.
(세자에게) 간하고자 않으신 건 아니로되 전혀 병환 대문이시니 일심으로 세손이나 보전하려는 고심이더라.
홍봉한이 세자의 관서행을 듣고 사위인 세자를 버리게 되었음을 실토하는 말이다.
여기서도 이상한 해석을 하고 있는데 홍봉한은 세자의 비행을 말리지 않고 이를 영조에게 알리지도 않았다고 노론벽파계에서 비판받았는데 세자의 비행은 정신병 때문이라 세자에게 아무리 간쟁해봤자 힘들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간하고자 앞에 "설사 간하여도 들으실리 없고 연좌는 내 몸 보전치 못할 것이오. 자녀들까지 어찌 될지 모르니" 라는 어구를 빼먹었다.
또한 바로 다음 한중록에선 이런 구절이 나온다.
"허나 모르는 이는 보도를 잘못한다고 책망하니 누구에게 이런 고충을 말하리오. 그때 윤재겸의 상서가 있었는데 간하는 것이 신분에 당연하나 소조께서 하실 지경이 못 되시고, 대조께서 하시면 무슨 변이 날지 알리요. 간할 터가 없이 되어 있었다."
윤재겸의 상서에도 홍봉한이 세자의 비행을 은폐한다는 비판이 있었는데 병 때문에 세자에게 간쟁해서 말려봤자 먹히지도 않고, 영조에게 알리자니 자신의 딸이나 손자까지 연좌될 일이라 함부로 영조에게 알리지 못했다는 변명이다.
훗날 노론쪽에서 천리 길을 달리는 몸으로 진현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상서를 올릴 정도로 세자의 신속한 대응은 노론을 경악시켰으며
천리길을 달리는 몸으로 진현하지 않았다고 상서를 올린 사람은 서명응으로 소론계 인물이다.
사도세자에게 온정적인 인물은 노론도 소론으로 둔갑시키고, 세자를 비판한 사람은 소론도 노론으로 둔갑시킨다.
4.4.3. 영화 사도에 대해 "사도세자를 마구 죽이는 살인마로 둔갑"시켰다고 비난[편집]
4.4.4. 세월호 참사 노론기원설[편집]
4.5. 간도, 을사조약 이전 조선 영토설[편집]
간도는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조약 이전까지는 한국인들의 땅이었다.-우리 안의 식민사관, 2014, 165쪽
이뿐만 아니라 대한제국 시절 간도에서 세금을 걷었으니 조선 영토라는 주장도 하였다.
이건 분명한 역사왜곡이다. 숙종시기 청나라의 요구로 조선, 청나라간 국경선을 정할 때 이미 양측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여기고 있었다. 논란이 되는 백두산 정계비의 "토문강"은 그저 두만강의 근원으로 엉뚱한 강을 짚어서 기록한 것이다. 초반에는 조선에선 토문강이 경계라는 주장하였으나 토문강은 송화강의 지류였기에 잘못된 주장이 돼서 이후 논란은 두만강의 어느 지류를 경계로 삼느냐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말이 많은 간도 협약에서 다룬 사항도 경계를 명확히 하자는 것이었지 간도의 영유권에 대한 것이 아니다. 북간도와 서간도 모두 발해 멸망 이후로는 우리 민족의 영토였던 적도 없고, 실효지배한 적도 없다. 청나라가 약해진 뒤로 조선에서 간도로 넘어간 조선인에 대한 관리를 시도했으나, 그들은 이미 청나라 관리들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을사조약 전까진 간도는 조선 땅이었다"는 주장은 분명한 역사왜곡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따로 있는데 이걸 근거로 유사 파시즘을 전파하는 것이다. 아래 유사 파시즘 부분 참고.
4.6. 고려, 조선 만주 지배설[편집]
5. 국어국문학 관련 문제[편집]
5.1. "두음법칙과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식민국어학"왜곡[편집]
5.2. 한국에선 이인직을 선각자로 가르친다?[편집]
그동안 식민사관 논쟁은 자신들과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방관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식민국어학을 그대로 유지시켜온 국어학계에도 이제 역사의 돋보기를 들이대야 한다. 한국 국어학계의 식민지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이인직이다. 필자도 중 고교 시절 이인직을 신소설 "혈의 루"를 쓴 선각자로 배웠다. - 이덕일, 우리 안의 식민사관, 37쪽
주장이야 개인의 자유다. 문제는 이번에도 인용왜곡을 벌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두산백과를 인용한다.
이 소설 이전에도 유명무명의 신소설이 있었으나 문학적인 수준이나 가치로 보아 근대소설의 효시로서의 신소설은 이것이 최초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상편은 《만세보》 연재로 끝나고 하편에 해당하는 《모란봉(牡丹峰)》은 1913년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연재되다가 미완성으로 끝났다. 1894년 청일전쟁이 평양 일대를 휩쓸었을 때 일곱살 난 여주인공 옥련(玉蓮)은 피난길에서 부모를 잃고 부상을 당하나 일본군에 의해 구출되어 이노우에[井上] 군의관의 도움으로 일본에 건너가 소학교를 다니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혈의 누 [血─淚] (두산백과)
이 작품은 청일전쟁 때 평양 모란봉의 참상을 시발점으로 하여, 그 뒤 10년간의 긴 세월이 지나는 동안 한국·일본 및 미국을 무대로 옥련 일가의 기구한 운명의 전변(轉變)에 얽힌 개화기의 시대상을 그린 것으로, 자주독립·신교육사상·자유결혼관 등이 그 주제로 다루어져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혈의누 [血─淚]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는 일본 극우파의 시각이지 한국인의 시각은 아니다. - 이덕일, 같은 책, 39쪽
그럼에도 해방 이후 대한민국 국사 및 국어 교과서는 이인직을 여전히 선각자로, "혈의 루"를 '자주 독립, 신교육 사상'이 담긴 신소설의 효시로 가르치고 있다. 이런 사건을 접할 때마다 놓쳐선 안 되는 것이 있다. 누가 이런 교과서를 만들었을까, 하는 점이다. 이인직이 친일 매국노인줄 몰라서 이런 내용을 실었을까? - 이덕일, 같은 책, 44쪽
그런데 실제로는 이렇게 쓰여 있다.
문명사회에 대한 동경과 자유결혼을 주제로 하여 새 시대의 모랄을 제시하려 한 작자의 의도가 엿보이나 작품 전반적으로 친일적 사상과 의식이 흐르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혈의 누 [血─淚] (두산백과)
경술국치 이전에는 이완용(李完用)의 비서로서 그의 정치적 노선에 동조하여 일본 관원 고마쓰(小松綠)와 내통, 일본 강점에 협력하였다. 국치 이후에는 경학원사성(經學院司成)을 지냈다. 주요 작품으로는 <혈(血)의 누(淚)>(1906)를 비롯하여 <귀(鬼)의 성(聲)>·<치악산 雉岳山>(1908) 상편과 <은세계>·<모란봉 牡丹峰>(1913)·<빈선랑(貧鮮郎)의 일미인(日美人)>(1912) 등이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이인직 [李人稙]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물론, 계몽주의 사상을 기저에 깔고 있으면서 제국주의적 국가관을 암암리에 담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는 많지만, 문장에서 입말체와 묘사체 시도의 효시를 보이며, 객관묘사와 심리묘사의 뛰어난 기량 등, 신소설 최고의 작가로 평가된다.[네이버 지식백과] 이인직 [李人稙]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선각자로 가르치긴 커녕 분명 친일파라는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이덕일이 어떤 교육을 받았는진 모르지만 정작 이덕일이 인용한 두산백과나 민족문화백과대사전의 서술과는 경우가 다르다. 해방 이후 처음엔 이인직을 선각자로 해석했다가 학계에서 연구를 하면서 그의 친일 행적 등이 드러나고 이 때문에 평가가 바뀌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이덕일의 주장처럼 아직도 이인직을 선각자로만 바라본다는 것은 허수아비 치기식 주장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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