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07

노론 음모론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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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 음모론

최근 수정 시각: 
1. 개요2. 노론 음모론의 내용3. 음모론에 대한 논박
3.1. 모호한 음모론 주체3.2. 노론은 영남 기반?3.3. 사도세자 모살?3.4. 노론 친일설3.5. 노론사관 = 식민사관?
4. 노론 음모론의 세력과 현재
4.1. 조선후기 정치사의 흐름에 대한 인식의 부족4.2. 서인 전체의 악역화4.3. 북인 미화4.4. 남인에 대한 지나친 미화
5. 바로 보는 조선 붕당정치의 역사6. 각 붕당의 입장과 왕권과의 관계7. 노론 음모론을 바탕으로 한 창작물
7.1. 영화/드라마7.2. 만화/소설
8. 같이보기

1. 개요[편집]

조선 후기 붕당인 노론이 조선 후기를 지배했고[1], 심지어 지금도 어찌어찌 계보가 이어져 한국 기득권층을 이루고 있다는 일종의 음모론. 비꼬는 의미에서 노론 메이슨이라고도 부른다.

노론 음모론자들은 유사역사학을 신봉하기 때문에 주류 역사학이 노론의 주도로 형성되고 조작되었다 하여 '노론 사관'이라고 명명한다. 음모론자들이 기존 역사학계의 사관을 폄칭하여 부르는 말이므로, 노론 음모론을 일컬어 '노론 사관'이라고 부르면 혼란이 올 수 있다. 정치 집단이자 유학의 학파였던 노론들이 독자적인 사관을 형성했다는 의견은 학계에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노론 음모론의 문제는 노론 세력이 조선 후기에 군림함은 물론이요, 일제 시대에서도 친일파로 활약했고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까지 살아남아 영남 지역을 기반으로 한 보수세력으로 그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 같은 음모론을 앞장서서 대중화하고 퍼뜨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덕일.

위에 나왔듯 역사적 배경이 전혀 없는 사관은 아니다. 실제로 노론이 정치적 우세를 점하고 소론과 남인을 조정에서 배제하자, 소론/남인 학자들 사이에서 비슷한 인식이 조선 말기에 퍼졌던 듯하다. 가령 고종 시절 사람인 이건창(李建昌)은 조선 붕당 정치사서 당의통략(黨議通略)을 집필하며, 서인 공신 세력이 "국혼을 다른 세력에게 잃지 말고 재야의 지도자인 산림을 높여 쓰자."고 맹약했고,(일명 물실국혼(勿失國婚), 숭용산림(崇用山林)) "그 이후로도 기반을 잃지 않고 집권할 수 있었다."고 서술한 바 있다.[2] 정조 독살설도 남인 일가의 민담이나 여유당전서 등에도 나오며, 이를 근거로 남인 잔당이 반역을 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썰'들이 (마치 오컬트에 나오는 프리메이슨이나 장미십자회처럼) 권력을 장악한 비밀 결사체라고 노론을 몰아붙이는 음모론으로 바뀐 것은 이덕일을 비롯한 현대 유사역사학이 그 기원이다.

'노론사관'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이덕일이 쓴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2009)』이다. # 이주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도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2011)』이라는 책에서 노론 음모론을 주장했다.# 이덕일이 쓴 세월호 참사 뿌리는 노론의 당리당략이라는 글도 있으니 참조 바람.

2. 노론 음모론의 내용[편집]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 세력이 회니시비(懷尼是非)를 계기로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되었는데, 그 중 노론이 경종 시기 잠깐을 제외하면, 조선 말기까지 조선을 장악하였으며 국가 발전에 심각한 폐해를 끼쳤다는 주장이다.

노론 음모론에 따르면, 노론은 우선 사도세자를 악의적으로 모함하여 영조가 임오화변으로 사도세자를 죽이게 만들도록 이끌었다. 임오화변을 계기로 노론은 시파와 벽파로 분리되었는데, 벽파가 개혁군주 정조를 독살하고 정권을 잡았다. 즉, 정조 독살설을 주장하는 것. 이후 노론 벽파는 지속적으로 권력을 잡고[3][4] 세도정치를 펼치며 조선을 썩게 하다가, 일제강점기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했다고 주장한다. 노론 음모론자들은 환빠처럼 근현대사에서도 노론 세력의 음모가 계속되었다고 주장한다. 아니 그냥 노론 음모론자들 중에 환빠를 겸하는 사람이 절대 다수다.[5]

노론 음모론자들은 대한민국이 독립하자 노론 세력이 영남 지방을 기반으로 하는 보수우파 세력이 되어 지속적으로 진보를 방해해 왔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이른바 '영남 노론'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즉 영남의 보수 우파 문중들이 자기네 정당성을 드러내기 위해 역사를 왜곡했다고 노론 음모론은 설명한다. 노론 음모론자들은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노론 사관의 대표적인 역사왜곡 사례로 지목한다. <선조수정실록>의 십만 양병설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했다기보다는, 서인들이 양병설 등 이이의 개혁/경장 주장들을 언급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다가 착오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에 대해선 해당 항목을 참고.

노론 음모론자들은 기존 사학계와 적대적인 환빠와 결합하여 주류 사학 = 노론사관 = 식민사관이라고 도식화하고, 대한민국 우파를 조선시대 노론과 친일파에 연결시킨다.[6] 때로는 여기에서 더 발전해 정파적인 주장으로 결론 짓는다. 즉 '영남 노론'이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는 경상도에 기반을 둔 지역감정을 조장하여 기득권을 누리고 정권을 세워, 권력을 유지하며 다른 지방과 진보 세력을 탄압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이 '노론 사관'이란 게 역사학계 내부의 사관이 아니라 정치 영역에서 정파적인 이유로 생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학문 영역에서 노론 사관이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대중적 이미지가 좋은 군주 정조를 자신들에 대입하고, 반대세력은 악의 세력으로 대입해서 노골적으로 정치적 편향을 보이기에 좌파 진영 지지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음모론이고, 그걸 마치 진실인 것처럼 주장하기에 현재도 진실이라고 믿는 지지자들로 인해 많은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 [7] [8][9]

3. 음모론에 대한 논박[편집]

노론 음모론의 허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 문단에서는 노론 음모론의 주요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3.1. 모호한 음모론 주체[편집]

이들이 만악의 근원으로 꼽는 것은 '서인-노론-벽파'이다.

우선 위 주장에선 시파와 벽파, 노론과 소론, 서인과 동인-남인, 더 나아가 붕당 전체의 문제점들을 일부러 애매하게 하나로 표현하고 있다. 시파의 책임을 벽파에게 전가하고, 서인 전체의 문제점을 노론에게만 전가하고, 붕당 정치 전체의 문제점을 서인에게만 전가한 것. 순조 대부터 정권을 장악한 안동 김씨 및 풍양 조씨 등의 세도정치 가문들은 모두 노론 시파에 속하며, 오히려 노론 벽파는 정조가 사망한 직후 잠시 정권을 잡았다가 시파의 역공에 거의 숙청당했다. 게다가 붕당정치가 끝나고 세도정치가 들어서게 된 책임은 오히려 환국을 수 차례 일으켜서 당쟁의 균형을 무너뜨린 숙종, 그리고 탕평책을 빌미로 왕권 강화에 지나치게 힘써서 신권의 견제 기능을 무너뜨린 영조와 정조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정조와 대립했다는 이유만으로 세도정치의 책임을 노론 벽파에게 전가하고 있다.

게다가 엄밀히 말하면 벽파는 反 정조 세력이라 부르기도 뭣하다. 정조의 대리청정과 즉위를 지원 사격한 김종수, 김귀주 등이 벽파였고 뒤의 행보를 보면 오히려 정조는 벽파를 보호했다. 벽파 수장 김종수를 일컬어 정조는 "내가 그의 목숨을 몇 번이나 살려준지 모르겠다."라고 할 정도로 그의 뒤를 봐주었다. 그래서 김종수는 정조 즉위 후의 최측근 그룹이라 할 수 있는 동덕회 4인방 중 1명으로 꼽히는데, 나머지 3명이 정민시, 서명선, 그리고 홍국영이라는 점을 보면 김종수가 차지하는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심환지만 해도 정조 어찰첩 등에 의해 反정조라는 공식은 거의 깨졌다.[10]

3.2. 노론은 영남 기반?[편집]

'영남 노론'이란 주장의 경우 멀리갈 것 없이 국사 교과서만 들여다 봐도 박살난다. 경상도는 유구한 역사 이래로 동인-남인의 텃밭이었다. 그 영향으로 현재도 영남 지역 대학의 동양철학이나 한문학 전공 교수들이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퇴계의 학문을 연구하는 학회들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봐도 이사 명단에 영남 지역 대학 교수들이 수두룩하다. 물론 영남의 유림이 회재와 퇴계를 추앙하는 건 말할 것도 없다.[11]

굳이 지역적으로 당파를 구분하자면 노론은 소론과 함께 조상이 되는 서인 세력이 경기-충청도 기반으로 한 기호 사림이거나 서울, 인천 기반인 경화사족이고[12][13] 영남은 남인북인과 가까웠다.[14] 당장 남인에서 추앙받은 이언적과 이황과 김성일과 류성룡이 어디 출신인지 생각해보자. 경상도 지방에도 노론 집안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나 정말로 손에 꼽힐 정도로 드물다. 효종 때는 경상도 서인 유생들이 율곡을 옹호하는 글을 올렸다가 남인 유생들의 공격으로[15] 고향에서 쫓겨나는 일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경상도를 기반으로 한 영남 사림들은 선조와 광해군 시절에는 정권을 장악할 정도로 엄청난 위세를 자랑했지만, 광해군의 대옥사와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을 겪으면서 영남 사림들은 정2품 이상 벼슬을 한 사람이 기호 사림이나 경화사족들에 비해 굉장히 열세였다. 여기에 경종 이후 이인좌의 난 등으로 인해 경상도는 반역향이라 하여 벼슬길이 제한되었다. 물론 영조 때 노론 세력들이 경상도 지역에 김상헌의 사당을 세우려고 한 건 사실이지만, 이것은 그냥 영남을 반역향에서 풀리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남 선비들의 강한 반발로 좌절되었다.[16]

현대 서울 사대문안, 충청, TK, 호남, 강릉 지역에서 양반 문화가 잘 남아 있는 이유로 조선 후기에 중앙 진출의 길이 완전히 막힌 지역의 양반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해석까지 나올 정도이다. 참고로 안동 김씨 가문은 어디까지나 본관이 경상도 안동일 뿐이지 실제 정치적 기반으로서의 경상도와는 관련이 없는 가문이다.[17] 그리고 위에서 잠시 언급한 영호남 지역감정 문제의 경우에도 말이 안 되는 게, 조선시대의 호남 지역의 사대부들은 영남과 마찬가지로 동인/남인에 가까웠다. 단지 정여립의 난 때 서인인 정철[18]의 주도로 호남 유림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해서 그 세력을 잃은 것이며, 시기적으로 좀 차이가 날 뿐이지 영남 유림과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

오히려 호남은 기축옥사 이후로 서인의 세가 강해졌고 이후에도 서인과 남인의 세가 비등비등하게 유지되다가 인조반정 이후로는 호남 지역에서 서인 경합우세, 남인 경합열세 기조가 이어지고 갑인예송 이후로는 서인 경합열세, 남인 경합우세 기조가 이어지면서 경합 지역으로 남아 있다가 경신환국 이후로는 서인의 세가 강력해졌고 기사환국 이후로는 다시 남인의 세가 강력해졌다가 갑술환국 이후로는 노론과 소론 등 서인계 정당들의 세가 강력해졌다. 특히 광산김씨의 영향으로 호남은 오히려 노론의 강한 텃밭이 되었다.[19]

노론은 '보수'가 아니고, 남인은 '진보'가 아니다. 노론의 수장인 송시열은 양반도 군역포를 내야한다는 호포법에 찬성했으며, 여성이 학문에 힘쓰는 것을 장려했다. 당시 진보적인 사상가로 평가받는 실학자들 중에서도 박지원이나 홍대용 같은 노론집안 출신 인사가 많았다. 심지어 김정희는 정순왕후를 배출한 대표적인 벽파가문인 경주 김씨 출신이다. 반면 남인인 허목은 호포법에 반대했으며, 송시열이 주장한 경제정책에도 왕안석의 신법에 비유하면서까지 극렬하게 반대했다. 즉 지금의 기준으로 혹은 학문적인 차이로 노론과 남인을 보수와 진보로 명확하게 나눌 수 없단 얘기다.

오히려 남인의 사상이 현대 기준으로는 보수적인 경우도 있다. 예컨대 아무 사전 지식 없이 주요 사안과 경세론에 대해서 노론과 남인의 관점을 현대인에게 보여주고 누구의 의견에 더 동의하냐고 물어본다면 대부분의 현대인은 노론의 관점에 더 동의하는 편이다. 다산 정약용의 경우에도 출신 가문은 남인이지만 성균관 유생 시절 "율곡과 퇴계 중에 누가 더 훌륭하냐?"는 정조의 하문에 율곡이 낫다고 답했으리만큼 당색에 얽매이지 않고 노론 계통 사상으로부터도 큰 영향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영남 유림들은 상당히 남인에 가까웠지만 초반부에는 기호 지방인 서울, 경기도, 인천이나 충청도의 서인 세력들에게 온건하게 대해줬다. 고려시대 때는 서인계 기반의 수도권, 충청도와 남인계 기반인 영남이 사이가 좋았는데 수도권 기반을 많이 가지고 있던 태조 왕건이 신라계 세력들에게 많이 잘해줬기 때문이다.[20] 본격적으로 대립이 시작된 건 조선시대인데, 조선 초중기에는 영남이 사림파의 주춧돌 노릇을 하면서 훈구파와 대립을 했다. 그러나 이 때는 철천지 원수지간처럼 싸우기보다는 사화에 저항한다는 성격이 짙었었다. 다만 선조 때부터 숙종 초까지는 나름 사이가 좋았는데 남인이 서인에 온건적이었기 때문이다. 예송 논쟁으로 사이가 틀어지긴 했어도 경신환국 이전까지는 심하게 싸우지는 않았고, 정책경쟁 수준이었다. 그러나 경신환국 이후 남인계 기반의 지역과 서인계 기반의 지역은 서로 철천지 원수처럼 싸우기 시작했고 이인좌의 난 이후로는 더 심각해졌다.

노론 음모론의 다른 부분은 과거사를 왜곡하는 수준이지만, 영남 노론 떡밥은 아예 역사 자체를 왜곡한다는 점에서 상황이 심각하다. 조선시대에 동인-남인의 텃밭이었던 영향으로 현재도 영남 유림들이 퇴계 이황을 찬양하고 영남 지역 대학 교수들이 주축이 돼서 퇴계 이황의 사상을 연구하는 단체들을 조직해 놨다. 영남 노론 떡밥은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현재의 이런 사실 관계까지도 왜곡한다는 점에서 무식의 차원이 다르며 또한 매우 악의적이기까지 하며, 그리고 현대의 지역감정과 정치성향은 조선시대의 붕당정치와 아무 상관이 없다.[21]

3.3. 사도세자 모살?[편집]

노론 음모론 중에서도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것으로 사도세자가 노론의 음모로 모함을 받아 살해당했다는 이야기. 영조를 노론에 휘둘리는 멍청한 국왕으로 설정하고 사도세자가 마치 반노론 세력에 힘을 실어주는 개혁 군주의 자질을 보여주자 이에 반감을 품은 노론의 음모에 휘말려서 뒤주에 갇혀 살해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한 논박은 사도세자 및 임오화변 문서를 참조할 것. 또한 음모론에서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혜경궁 홍씨가 악의적으로 남편을 모함하고 결국 임오화변까지 일으키게 했으며, 그녀가 쓴 한중록은 그녀와 친정인 홍봉한 집안의 행적을 극도로 미화한 기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한 논박 역시 혜경궁 홍씨 문서를 참조할 것.

여기서 노론에 대한 변호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신하들은 사도세자를 옹호하고 '조금만 더 노력하면 부왕께서도 마음이 변할 것'이라며 달래주고, 영조에게 "세자 저하에게 더 부드럽게 대하십시오"라며 충고하였다. 이는 당파를 초월한 움직임이었으며 노론 역시 사도세자를 강하게 옹호했다. 일부 대간들이 '세자께서 공부에 게을리한다'라고 영조에게 간언하고 상을 받자 신하들은 이를 칭찬하거나 부러워하기는커녕 '저놈이 죽으려고 환장했구나'라고 할 정도였다.
게다가 노론을 비롯한 신하들은 세자를 거짓으로 모함하기는커녕 오히려 사도세자가 실제로 저지른 비행(사치와 과소비, 살인, 무단 여행 등)들조차 영조가 알지 못하도록 숨기고 무마하려 했다. 이후 영조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지금 관직에 잇는 자들은 모두 죄인이다. 어떻게 조정에 있는 사람들 중 한 명도 이런 걸 나에게 알리지 않았느냐?"라며 분노했을 정도.

즉 노론이 고의로 사도세자를 적대시하고 모함했다는 증거는 사실상 없다.

3.4. 노론 친일설[편집]

노론의 다수가 개화 이후 친일파로 변해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주장. 대표적으로 여흥 민씨가 꼽힌다. 정치적으로 노소분규가 일었을 때 노론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했던 민진후·민진원 형제가 바로 여흥 민씨이다. 또 민진원의 아버지는 민유중이며 민유중의 스승은 송시열이라는 논리. 그러나 이는 당시 조정에서 실권을 잡고 있던 관료들의 출신과 위정척사 운동을 주도한 계층만 봐도 올바른 분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장 위정척사파의 거두인 최익현을 비롯한 노론들 다수가 위정척사운동에 관여되어 있었으며 친일파들은 주로 고종황제가 직접 키운 여흥 민씨 세도가문이나 개화파[22] 등 기존 주류 노론과는 다른 이질적인 세력도 많이 있었다. 애초에 정치적으로 여흥 민씨의 세력이 강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당파의 '의리'라는 측면에서 여흥 민씨는 절대 주류가 되지 못했다.[23][24] 주류 성리학자를 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누누이 서술되어 있지만 정치 영역으로 가면 이미 '성리학적 당색'이라는 것이 무의미하다. 이는 단지 노론 후손이니 노론이라 해버리는 것과 같으나 붕당 자체가 학문적인 의미가 뿌리를 두고 있기에 이 시기엔 노론이네 뭐네가 무의미했다.

3.5. 노론사관 = 식민사관?[편집]

이덕일이나 이주한과 같은 음모론자들은 앞 문단에서 서술한 노론 친일설의 연장선으로 노론사관이 식민사관과 일맥상통하며 현재 주류 사학계를 관통하는 두 가지 사관이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도무지 쉴드칠려고 해도 어떻게 쉴드가 안 되는 막무가내 억지 주장이다.

우선 식민사관에서는 조선 후기를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았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로 서인이 집권하여 명분만 앞세우다가 참담한 전쟁들을 겪었고, 이후에도 백성의 생활은 생각도 하지 않고 오직 당쟁에만 몰입하여 나라가 망했다는 게 식민사학자들의 주요 논지였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이 당쟁의 주체가 누구였던가? 바로 노론이다. 노론은 1차 예송 논쟁 이후로 남인이 완전히 몰락하는 갑술환국까지 남인들과 치열하게 싸웠고 남인이 갑술환국으로 완전히 몰락한 이후에는 한때 같은 집안이었던 소론과 치열하게 싸웠다. 정조가 남인을 일부 등용하면서 자신의 측근 세력으로 키우려고 하자 정조 사후 노론 벽파는 남인을 완전히 숙청해 버렸다.

즉 노론은 당쟁의 주체로서 식민사관의 가장 주된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이다. 조선 후기의 붕당과 개혁 성과를 재평가하게 된 것은 이런 식민사관의 당파성론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이다. 그런데 어떻게 노론사관이 식민사관과 일맥상통하겠는가? 오히려 이 노론 음모론이야말로 식민사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에서도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의 대치성이 또 한 번 드러난다. 광해군은 조선 후기 내내 성리학자들[25]에게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받아 왔다. 그런데 그 부정적인 평가를 일거에 뒤바꾼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유사역사학자들도 식민사학자라고 비난하는 이나바 이와키치다.[26] 이후 이런 광해군 재평가는 정설이 되어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고 교과서에도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이 긍정적으로 서술되게 되었다.[27]

4. 노론 음모론의 세력과 현재[편집]

불행히도 현재 노론 음모론은 주로 대중적인 서점들의 판촉을 기반으로 한국 대중들에게 널리 전파되고 있는 실정이며 이덕일 소장의 주 레퍼토리인 조선왕 독살설을 차용한 방송 매체들과 영화들이 우후죽순 제작되면서 이러한 상황에 기름을 붓고 있다. 전술했듯 허점이 많은 이론이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지만 현대 주류 학계를 각종 부패와 음모의 온상으로 묘사하는 걸 절대 빼먹지 않는 노론 음모론의 특성상 학계 차원의 반박만으로는 상황을 진정시키는 데에 무리가 있다. 오히려 조선사 및 근대사를 노론 음모론 계열의 서적으로 처음 입문한 이들에 한해서는 학계 차원의 반박이 주류 학계에 대한 더 큰 불신, 그리고 그에 따라 결국 더 심한 역효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대중들에게 널리 퍼진 잘못된 노론사관의 적절한 예시글. 그것도 네이버캐스트에서 영조에 대해 처음으로 기술한 글이 이렇다. 일단 사도세자 노론 흑막설을 대놓고 쓴 글쓴이의 글 내용 뿐만 아니라 밑에 댓글들 또한 노론사관 운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창작물 적인 관점에서는, 창작가들은 "부패한 기득권 세력"과 "청렴한 개혁 세력"이라는 클리셰를 매우 선호하고, 여기에 음모론 요소를 끼워넣기도 좋다보니 노론 사관이 선호받는다고 볼 수 있다. 이 클리셰는 현실 세계의 정치 부패에 대한 경계감과 카타르시스 때문에 늘 선호받는 소재이긴 하다. 사실, 보통 해외 배경 작품에서는 귀족이 이런 역할을 맡는다. (대표적으로 은하영웅전설처럼) 그런데 조선에서는 이런 역할을 해줄 귀족이 없다.(…) 그렇다고 양반을 모두 부패 귀족과 같은 것으로 만들기에는 실제 현실과의 차이가 너무 크다. 그렇다보니 "서인-노론-벽파"가 이 똥물을 덮어쓰는 역할을 맡는 것. 문제는 자신들은 자뭇 그럴듯한 "궁중-조정 정치물"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이런 종류의 소재를 쓴 작품은 워낙 흔하다보니 결국 클리셰 투성이 작품이 되버린다. 창작물적 관점에서 문제점은, 이 노론사관에 기초한 음모론적 궁중 조정 정치 묘사 방식이 결국 전제군주제에서 ""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고찰이라는 중요한 주제를 방폐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결국 "노론사관"론은 어떻게 보면 사실상의 무제한적 권력을 휘두르는 "왕"에 대한 비판을 "간신"에 대한 비판으로 전환하여 왕에게 무한한 실드를 부여하는, 전근대적인 간신론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특정 당파가 음모를 꾸며서 이 모든 게 잘못됐어요!"라는 이론은 결국 "임금님은 착하신데 그 주변의 간신배 놈이!"라는 구시대적 사상과 굉장히 비슷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간신론은 결국 왕을 실드침으로써, "리더쉽에 대한 올바른 고찰"도 방해하게 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결국 노론사관 음모론이 적용된 사극에서 왕의 역할은 "음모론 세력에 휘둘리거나," "음모론 세력과 싸우거나" 둘 중 하나가 되버리며, 음모론 주체라는 사실상의 마왕이 존재하니 왕의 역할이 현실의 "리더"에 보다는 거의 "선택받은 용사"에 가깝게 되버린다. 결국 자신들은 현실적이고 그럴듯한 정치 사극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과는 동떨어진 비현실적인 판타지물이 되버리는 셈이다. 이는 실제 역사를 이해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숙종의 경우 오히려 당파가 임금 손아귀에 놀아난 꼴인데, 드라마에서는 오히려 숙종이 당파의 피해자처럼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잘못된 역사인식은 현대 우리 사회에 큰 악영향을 끼친다는 점이다. 노론 음모론은 광해군의 몰락과 정조의 죽음을 마치 개혁의 실패로 여기면서 서인-노론-친일파-산업화 및 군사독재세력 - 보수세력으로 엮어가며 현 보수를 대한민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적폐로 몰아가는 정치세력과 그 지지자들에게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다. (이들이 괜히 광해군과 정조를 개혁의 아이콘으로 띄우는 게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역사인식에 투철한 나머지 자신들은 수백년 동안 이 땅에 뿌리내린 적폐세력과 맞서 싸우는 정의의 사도 정도로 생각하여 자신들의 잘못된 행동마저 합리화하면서 우리 사회의 갈등을 양산하고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4.1. 조선후기 정치사의 흐름에 대한 인식의 부족[편집]

조선후기 정치사에서 붕당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연과 학연을 근거로 하는 붕당과는 별개로 18세기 부터는 정치적 상황에 따른 결정이 붕당보다 우선시되는 경우가 많다. 당장 영조 때만 해도 탕평책에 대한 입장으로 탕평파라는 새로운 정파가 나타났으며, 같은 당 내에서도 준론과 완론으로 나뉘어 심지어 노론 완론은 소론 완론과 더 친밀 했고 노론 준론과는 앙숙이 되었다. 정조 때는 노론과 소론보다 시파와 벽파가 더 중요하였다. 즉 영정조 때만 되어도 노론과 소론, 남인과 북인이라는 당색보다 경종 당시 대리청정 논란에 대한 입장, 임오화변에 대한 입장, 탕평책에 대한 입장 등 개인의 정치적 입장이 더욱 중요해진 것이다. 실제로 같은 가문의 형, 동생이 노론과 남인으로 나뉘는 경우도 있었고,[28] 소론이 노론으로 당색을 바꾸는 경우도 있었으며,[29] 송시열이나 윤휴, 윤증, 박세채같이 당색이 달라도 일가끼리 서로 혼인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외에도 마찬가지로 조선 초기에도 훈구파와 사림파가 서로 대립했지만 그들 가운데도 가족 관계를 맺은 일이 많으며 고려 때도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가 대립했지만 그들 또한 가족관계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 문벌귀족 가문과 신진세력 가문이 혼인을 한 경우가 많았을 정도다.
간단히 말하자면 18세기 이후로 노론이니 소론이니 남인이니 하는 당색은 각 가문의 전통 정도로만 남아 있었고, 그보다는 국왕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취하느냐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 각 당색이 마치 고정되어 절대 불변하는 것인양 노론 음모론을 들이대는 것은 조선후기 정치사에 대한 인식의 부족을 보여준다. 그리고 당내 온건파로 활동한 사람들도 상대당의 친인척과 사돈 혈육의 정이 있어서 상대당을 가혹하게 대하지 못했다. 그리고 죽을 위기에 빠지면 형을 강등해 달라고 청원하였다. 그리고 정조 시기에서 심환지가 강경하고 비타협적인 반면, 노론이었던 김종수와 소론이었던 서명선은 채제공을 배타하는 면모는 같았지만 서로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노론 시파인 정민시와 남인 시파인 채제공 또한 당파는 달랐지만 정책의 궤를 같이 하고 있어 노론 벽파가 집권시 둘다 세트로 관직이 추탈되었다.

그리고 한 당파가 다른 당파를 찍어내리면 당파내에서 분열이 일어난다. 최후의 주도권을 잡은 노론도 벽파와 시파로 분열했고 서인과 남인은 초반에 사이가 좋았다가 숙종 이후 철천지 원수가 되버리고 서인에 분열된 노론과 소론도 서로 죽일놈이 된 것은 경종 이후였다. 그리고 설사 소론과 남인이 공동의 적인 노론을 정치적 약점을 이용해 박멸시켰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권력을 잡기 위해서 서로 철천지 원수가 되어버릴 게 뻔하다. 이런 식으로 당파 내에서 분열과 대립이 일어나는 것은 정치 자체에서 매우 흔하게 벌어지는 보편적인 사례이다.

4.2. 서인 전체의 악역화[편집]

노론이 악당이 되어가면서 원류인 서인들과 노론과 뿌리만 같았던 소론까지 싸잡아서 욕을 먹고 있다. 실질적 원류인 율곡 이이가 욕을 먹고 있는 것은 물론 심의겸계로 분류되는 윤두수 형제는 이순신 모함의 주역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죄목으로 비난받고 있으며 정철은 정여립의 난에서 선조의 손아귀에 놀아난 것 때문에 숙일 줄 모른다는 당대의 평가와는 달리 선조에게 아첨하는 간신처럼 묘사되고 있고 [30] 나무위키에서도 이런 주장이 반영되어 지나치게 부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 정작 나라를 망친 주범인 안동 김씨는 노론 벽파와 적대하던 노론 시파였고물론 둘 다 노론이지만.. 순조의 묵인과 암묵적 동조 하에 벽파를 제거하고 세도를 누린 것임에도 정작 욕은 벽파와 정순왕후 김씨가 받고 있다. 심지어 안동 김씨도 노론 벽파라는 왜곡질까지 나올 지경. 오히려 세도정치를 비롯한 조선 후기의 개판 오분전 막장상황은 순조의 잘못이 더 크다.

또한 소현세자가 의문사를 한 것을 두고 소현세자 독살설을 주장하면서 여기에 서인 세력이 가담, 동조했다는 주장도 있다. 독살설의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이 부분은 서인에겐 정말 억울한 부분이다. 아래에 언급하겠지만 용의자로 서인인 김자점 세력이 언급되긴 하지만 김자점은 어디까지나 인조의 충실한 부하였을 뿐 서인의 영수이거나 서인을 대표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당시 김자점은 청서파는 물론, 공서파에서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31][32] 오히려 당시 서인의 주류인 청서파는 소현세자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그와 민회빈 강씨를 복권시키려 애썼다. 예송논쟁 때 서인이 그토록 강경하게 나온 이유도 소현세자의 정통성을 강하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4.3. 북인 미화[편집]

광해군 재평가와 맞물린 경향이 크다. 물론 광해군은 세자 시절에 엄청난 공을 세웠고 누구보다도 백성들의 지지도 받았으며 총명했었다. 즉위 이후 초반기에는 어느정도 선정을 펼쳤었다. 그러나 후반기로 가면서 봉산옥사, 계축옥사, 신경희의 옥, 해주옥사, 폐모살제, 허균의 옥 등 여러 옥사를 일으켜서 여러 현신들이나 명신들[33]을 죽이거나 유배를 보내고, 게다가 광해군의 측근들은 부패의 끝판왕이었는데, 방납비리 등을 많이 저질렀다. 광해군은 세자 시절과 즉위 초반기에는 그래도 나름 선정을 펼쳤었던 것은 맞지만, 계축옥사 이후에는 조정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더 나아가서 대북 일당독재를 만들었다. 게다가 광해군은 자기를 지지해 주던 백성들을 배신하는 행위도 저질렀는데 바로 무리한 궁궐 중축이었다.[34] 백성들을 궁궐 중축에 무리하게 동원하고 경운궁, 창덕궁, 창경궁 등으로 모자라서 마구 궁궐을 지어댔고, 거기서 모자라서 궁궐 건축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조도사들을 동원한 건 물론, 조도사들의 수탈을 지원했다. 그리고 미신과 풍수에 빠지기도 했다.

명청교체기의 외교에서 광해군이 인조보다 뛰어났다는 전제 자체가 기성 연구자들의 만주어 학습에 대한 무관심으로 청쪽 기록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방대한 분량의 승정원 일기를 손쉽게 검색할 수 있게된 것이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역사의 연속성을 감안하지 않고 왕의 증언조차 비틀어 놓은 실록의 부분적인 기록만 참고한 단편적인 시선에 불과하다. 이이첨 등의 북인은 대명사대에서 크게 다를 바 없어서 광해군의 외교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항복의 제자인 정충신이나 같은 서인이던 장만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들의 경우에는 반정을 주도한 공서파가 오히려 주화파로써 광해군의 중립외교 같은 것을 주장했고, 척화를 주장한 서인들은 반정공신들을 비판하고 반정공신들의 전횡을 비판한 재야 서인들이었는데, 즉 청서파가 척화파의 다수였다.

이렇게 지나치게 정적들을 제거하는 등 너무 설쳐댄 탓에 북인들은 인조반정으로 대거 숙청당하여 멸망하고 그 일부는 남인들에게 흡수당하는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되었다.

4.4. 남인에 대한 지나친 미화[편집]

노론-서인 세력과 대립관계였던 남인 세력을 과도하게 미화하는 움직임도 있다. 주된 근거가 정조를 근대 개혁 군주로 설정하고, 남인이 이 정조의 정치적 파트너였으며 정조가 독살당하고 남인이 축출당하면서 조선이 막장 테크로 흘렀다는 것. 조선 후기 실학자 중 일부(ex:정약용)가 남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남인 전체가 실학을 위해 노력한 집단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부류가 이문열과 이인화다.[35] 이인화는 아래에 언급될 <영원한 제국>이란 작품을 집필했다. 사실 이런 얘기가 나오는 게, 운 좋게도(?) 조선이 막장이 될 무렵 남인 또한 제대로 몰락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침 대중들에게 존경받는 정약용이 남인이고 '겉보기에는' 이 노론 벽파 세력에게 고난을 당하면서도 끝끝내 목민심서 등의 저서를 남기는 업적을 세웠으니 남인 세력을 미화하기엔 더더욱 좋은 핑계거리가 되었다.

그런데 노론 음모론자들의 망상과는 달리, 정작 그 노론의 핵심인물들인 심환지나 정순왕후 김씨 등은 정약용 일가에게 매우 우호적이었고 정조에게 그의 재능을 추천하기까지 했다. 신유박해에 연루되어서 정약용이 처벌을 받을 때에도 최대한 그를 비호해주었다. 정약용이 귀양을 간 것은 노론 때문이 아니다. 단지 그냥 서용보와의 개인적인 악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남인과 정약용이 딱히 진보적인 입장도 아니었다. 조선 후기 300년간 조정에서 시행, 제기된 제도 개혁론은 모두 근본이 서인 율곡 이이에게 있으며[36] 다수의 소작농을 거느리고 농장을 경영했던 서인 쪽이 중소지주들이 대부분인 남인보다 신분제 완화와 노비 수 감소 정책에 훨씬 적극적이었다. 노비종모법을 거론했던 송시열은 수구꼴통이고 일천즉천을 주장한 정약용은 진보의 상징인가? 그뿐 아니라 서인 세력은 소현세자 가족과 인조에 의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민회빈 강씨 일가에 호의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민회빈 강씨의 신원도 주청했다. 심지어 원손을 그대로 세손으로 책봉할 것을 주청하고, 민회빈 강씨의 사사에 반대한 것도 대부분 서인 대신들이었다. 민회빈 강씨의 사사를 주청한 사람이 김자점이고, 그 사람이 서인이기는 하지만 김자점은 서인 세력에서도 대부분 싫어했던 자이다. 당시 서인의 비주류(비당권파)였던 청서파에서는 당연히 김자점을 싫어하는 자들이 많았고, 그뿐 아니라 서인의 주류(당권파)였던 공서파에서도 김자점을 싫어하는 자들이 엄청 많았다. 그리고 오히려 남인 세력은 일부를 빼고는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민회빈 강씨 일가의 신원에 소극적이었다.[37] 예송 논쟁 때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 세력이 1년/9개월을 주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서인 세력이 생각하기에 일단 소현세자의 가족이 존재하는 이상,도저히 명분상 효종의 정통성이 완벽하다고 주장할 수 없었던 것. 그리고 또한 서얼허통에 앞장서고 서얼금고법 폐지에 앞장선 사람들도 송시열, 김수항 등의 서인들이었다. 또한 노론의 핵심 중진인 서포 김만중은 사상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비슷한 이유로 흔히 조선 후기의 개혁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실학의 주요 인사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서인-노론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중상학파-북학파는 서인-노론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대표적인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은 노론 중에서도 명문가로 꼽히는 반남 박씨 집안이며, 홍대용 역시 노론 학파에서 사사한 인물이었다.[38]

물론 남인들도 집권 시절에 상평통보, 호포제, 대동법, 만과 실시, 독륜거 제작, 승병 조직, 과거제 폐지 등의 제도개혁을 실시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이미 호포제와 대동법은 서인들도 많이 추진하거나 찬성했다. 또한 남인인 윤휴가 내놓은 제도개혁 중에 독륜거 제작, 과거제 폐지 등은 현실성이 없어서 같은 남인에게도 까였고 윤휴가 사치를 금한답시고 관을 열어놓은 행위는 적을 양산하는데 기여했다. 그리고 윤휴 자신은 대동법을 반대했다. 또한 같은 청남인 허목도 호포제를 반대했다. 그리고 윤휴가 한 개혁안들은 남인들이 내놓은 게 아니라 윤휴 단독으로 내놓은 것이다. 또한 그 개혁안들도 주로 남인이 1차로 집권하던 때만 나오던 것이지, 남인이 2차로 집권할 시에는 오로지 개혁은 소홀히 하고 변화를 이끌지 못했으며 오로지 민암과 외척인 장희재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왕의 예스맨 노릇만 하고 낙하산 인사와 코드 인사를 계속 일삼다가 몰락을 자초했다.

즉 결론을 내리면 남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개혁적인 성향도 아니었으며, 서인-노론이라고 해서 무조건 수구꼴통이라고 볼 수도 없다는 얘기이다.

5. 바로 보는 조선 붕당정치의 역사[편집]

사실 당의통략의 이야기는 그 맹약이 정말로 의도적이었냐는 점을 제외한다면 충분히 일리 있는 이야기다. 근본적으로 동-서 갈등은 정치의 오랜 현실이었던 훈신, 척신에 대한 친화도에서 시작됐다. 간단히 설명하면 애초에 승부가 난 게임이었다. 서인은 근본이 친외척 세력인 기호사림+경화사족이고, 동인은 근본이 반외척 세력인 영남사림이었다. 동인은 외척 전반과 그와 연대한 사림 전체를 척결대상으로 규정하며, 이른바 "4대 사화"와 연산군과 중종 시절에 벌어진 옥사를 훈구파와 사림파의 오랜 대결로서 규정했다.

그러나 4대 사화나 연산군, 중종 시절에 벌어진 옥사의 실상은 성종 이후 대두한 영남(경상도)을 중심으로 한 영남 사림과 그 세력에 비판적인 기호 사림과 이들과 연대한 훈신, 척신간의 대립이다. 그러다보니 사림의 사관에서는 남곤이나 심정김안로 같은 사림 출신 권신들도 죄다 훈구파나 외척으로 부정되었던 것이다.[39] 그러나 따지고 보면 조선 명종조에도 일부 사림은 윤원형에게 줄을 선 원죄가 있으며 그렇다고 인종을 지지한 사림들이라고 윤임과 손을 안 잡은 것이 아니다. 명종조를 거치면서, 다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당시 4대 사화와 거듭된 옥사로 인해 관학파의 기질에 가까웠던 훈구파는 제거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미 사림 출신 신하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선조 시절에 사림이 완전히 정권을 장악하고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이후에 김효원은 윤원형의 집을 기웃거렸을 만큼 배경이 부족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런 신규 가문이니 만큼 건천동에서 살았고, 그래서 동인이 되었다. 반면 심의겸은 잘나가는 정동 사람이다. 그러니 서인이 되었다. 당장 정철만 보아도 금수저다. 율곡 이이는 특별한 정파에 소속되지 못한 상황에서 이러한 정치적 현실을 옹호하다보니 어느순간 서인의 거두가 되었던 반면, 동인들은 이를 강경하게 반대하고 나선 순수 경상좌우도의 퇴계학파 사림집단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선조 시절에 동인이 훨씬 우세한 상황인데도,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은 서인으로 분류되었다.

남인은 한양에서 그야말로 "남산골 샌님"의 땅인 목멱산에 자리잡았다. 북인은 청계천 이북 거주자인데, 별다른 공통적 특성이 적은 서경덕조식 학파인 비이황학파 연합 정도로 취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중 남명학파의 강경파는 대북이 되었고, 외척(=인목왕후)와 연대한 온건파는 소북이 되었으며 류희분 등도 실제로 외척이었다. 이후에 영남 사림을 기반으로 한 북인과 남인은 서로에게 정쟁을 다퉜고 여기에 광해군 시절에 이어진 대옥사와 인조반정이괄의 난을 겪으면서 소북과 대북을 비롯한 북인은 조정에서 사라졌고, 남인은 영남 지역보다 기호(경기도+충청도) 지방에서 집중함에 따라 동인이 기반으로 했던 영남 사림들은 쇠퇴하고 말았다.

인조반정 이후에 기호 사림을 기반으로 한 서인은 다시 공신들의 공서파와 산림의 청서파로 갈렸다. 공서파들은 효종의 책봉을 적극 지지했으나, 명분상에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고 결국 다수 숙청되었다. 산림의 현실적 힘을 인정한 효종은 다시 청풍 김씨 가의 김육을 사돈 삼으면서 명성왕후를 책봉했고, 과연 명성왕후와 김우명, 김석주 등은 현종숙종조에 서인 산림과 종친, 남인 사이의 적극적인 균형추 역할을 했다. 두 차례의 예송논쟁과 갑인환국은 서인 외척, 그리고 그와 손을 잡은 남인의 승리를 알리는 첫 신호탄이었다. 그렇게 김석주가 적극 나선 경신환국으로 남인들이 대거 쫓겨나면서, 서인은 다시 친 외척파인 노론과 반 외척파인 소론으로 갈렸다. 이 과정에서 박세채는 일관적인 반 외척행보에 나서면서 처음에는 소론이었다가 뒤에는 노론이 되었다.

한편 1701년에 사사된 장희빈이 남인 출신이였기 때문에 세자(경종)의 외척이 남인이라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노론은 반 외척파(반 경종파)가 되고, 소론은 친 외척파(친 경종파)가 되었다. 또한 소론이 반 외척파였던 시절에도 어느정도 소론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외척 조사석 및 오두인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 숙종이 세자를 폐위하려고 하는 구상을 노론은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소론은 세자를 호위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노론이 연잉군(영조)을 지지하며 소론과 노론의 각각 급진파(준론)와, 온건파(완론)의 대립까지 엮이게 되었다.

이후에 준노가 신임옥사로, 준소가 이인좌의 난과 나주 괘서 사건으로 제거되고, 완론 중심의 탕평책을 내세운 영조의 결론은 당파성을 강하게 띤 기호 사림보다 한양을 기반으로 한 경화사족과 외척을 중심으로 조정을 이끄는 것이었다. 한편 10살로 요절한 효장세자의 세자빈은 소론 조씨 출신이었다.[40] 또 사도세자의 세자빈은 노론에서 상대적으로 한미한 홍봉한의 딸 혜경궁 홍씨였다. 정순왕후 김씨의 경주 김씨 역시 주요 외척이 되었다. 그래서 영조 말기에는 드디어 조정이 외척간의 전쟁터가 되어버린 것이다. 노론 벽파가 되는 청명당은 정조 치세 내내 외척들을 쳐내는데 바빴다. 처음엔 김귀주와 손잡고 홍인한 - 정후겸을 내몰고, 다시 김귀주를 버리고 홍국영과 손잡고, 다시 홍국영을 버리고 시파에 적대의식을 보였다.

그러나 청명당(벽파)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는 당파였다. 자신들 역시 경주 김씨라는 외척 세력과 손을 잡은 상태였을 뿐더러, 정조의 동의에 의해서만 존속할 수 있었다. 이점은 남인도 마찬가지여서, 벽파와 남인은 "주상전하는 참 훌륭하신데 왜 저놈들은 안 쫓아내실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조는 이들을 두고 계속 시파를 견제했으며, 정순왕후 수렴통치기간에는 이들이 주류가 되었으나 김조순을 몰아낼 수도 없었다. 결국 정순왕후가 죽고 벽파는 이른바 팔자흉언사건으로 반정조, 반사도세자로 찍히며 하릴없이 숙청되어버린다. 그리고 벌어진 것은 19세기 조선의 외척 천하, 즉 세도정치였다. 세도정치는 안동 김씨(+ 풍양 조씨) - 전주 이씨 선파(흥선대원군 대) - 여흥 민씨(고종 친정 이후) 등으로 이어지면서 조선을 결국 멸망에 빠뜨리고 말았다.

6. 각 붕당의 입장과 왕권과의 관계[편집]

또한 서인-노론과 남인 세력은 사상적 배경에서부터 왕권과의 관계가 달랐다. 서인-노론은 이이의 이기일원론을 기반으로 '왕과 신하가 같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사상이 강했던 반면, 남인은 이황의 이기이원론을 기반으로 '왕이 주도하고 신하는 보좌하는 나라'라는 사상이 강했다. 이 부분이 정면으로 충돌한 사건이 바로 예송논쟁이다.
그런데 조선은 건국부터 사대부들이 주도한 '군신공치'의 개념이 대단히 강했고, 이는 서인-노론 세력이 현실적인 권력 기반 뿐만 아니라 명분 면에서도 우위를 차지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래서 남인은 어떻게든 왕권과 접근해야 했고, 왕 입장에서도 왕권이 주도하는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선 남인 세력과 손을 잡고 서인-노론 세력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이 부분이 위에서 언급한 간신론, 군약신강 등의 낡은 인식과 결합하게 된 것이다. 양반-사대부 중심의 체제를 주장하는 서인-노론 세력은 마치 유럽의 반동 귀족 세력처럼 국정을 농단하고 개혁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덧칠하고, 남인은 왕권을 수호하고 개혁을 주창하는 신진 세력인 것처럼 포장이 된 것.

허나, 그 남인이 숙종 시기에 벌어진 수차례의 환국으로 인해 점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된 후로는, 조선 특유의 절대왕권을 지향하는 정치 풍토와 더불어, 숙종과 영조정조라는 이미 왕권이 막강했던 조선의 역사에서도 특히나 돋보이는 수준으로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왕들이 등장하면서, 노론 역시도 군신공치 개념을 통한 왕권 견제를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41]. 결국 노론이건 소론이건, 남인이건 간에 왕권을 견제할 방도가 없어지니 그저 왕의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예스맨 신세가 되어버렸는데, 이런 상황이 나중가면 이런 절대왕권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는 몇몇 정치 명문가들이 득세하면서 그 악명높은 세도정치로 이어진 것이다.

7. 노론 음모론을 바탕으로 한 창작물[편집]

7.1. 영화/드라마[편집]

  • 영원한 제국
    • 원작 소설인 이인화의 소설 및 이를 바탕으로 한 동명의 영화. 원작의 저자 스스로가 밝혔듯이 전적으로 작가 본인의 가문적 배경[42]에 기반한 "영남 남인 사관"을 표방하고 있는 책이지만, 의외로 심환지와 벽파들의 판단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연암 박지원에 대한 긍정적 평가, 무엇보다도 정조 독살 묘사 자체를 여유당전서의 독살설로 퉁치고 있는 등으로 최소한의 금도는 지킨 소설이다. 다른 가문에서 소송이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도 감안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주요 인물의 이름은 마지막 글자가 바뀌어 있거나, 한자가 뒤바뀌어 있다. 하지만 소론의 최후 영수였던 연안 이씨 영의정 이시수가 노론 벽파의 영수로 표현이 되는 등 오류가 있었다.[43]
      주인공 영남 남인 출신의 규장각 대교 이인몽(夢)은 작가 이인화(본명 류철균)의 페르소나임을 스스로 밝히는 것이다. 소설에서 밝히기를, 이인몽의 자리에 있던 실제 인물은 익헌 이문원(翼憲 李文源 1740∼1794)[45] 대감의 아들로 세도정치기에 순탄하게 좌의정을 지낸 금석 이존수(1772 ~ 1829)였다.
      이 책에선 적어도 "영남 노론"은 주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어찌되었든 대중적으로 노론 음모론을 알린 대표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미학 평론가 진중권에게 제대로 까였다.[46]
      영화판도 있는데 정조 역은 안성기,주인공 이인몽 역은 조재현,정약용 역에 김명곤, 인몽의 처 상아 역은 김혜수, 최종 보스 심환지 역에 최종원이 나온다. 이 영화는 한술 더 떠 무슨 노론이 내관과 궁녀를 포섭해 궁궐을 장악하고 일거수 일투족 왕을 감시하며 사람 하나 죽이는 것도 무슨 파리 목숨 빼았듯이 쉽게 죽인다. 요새 사극 뺨치게 정조 독살을 암시하는 듯한 역사 왜곡은 덤. 이전 서술에는 영화가 좋은 평을 못받고 망했다고 되어 있었으나 사실이 아니며, 당시 기준으로 꽤 흥행했고 1995년 상이란 상은 다 휩쓸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영원한 제국 항목 참조. 그나마 심환지가 소설에 비하면 의식 자체는 진짜배기 보수주의자로 나오고, 남인들도 알고 보면 노론을 쫒아내고 자기들이 득세하려 임금을 지지하는 뉘앙스를 주는 연출이 있다. 영화판 감독 박종원은 훗날 소설 원행을 베이스로 삼아 또(...)노론의 정조 암살을 다룬 <정조 암살 미스터리 8일>을 감독한다.
    • 드라마상에서 등장하는 왕이 정조라고 구체적으로 명시되진 않지만 사실상 정조라고 봐야되는 드라마이다. 노론이 정조의 개혁을 훼방놓는 악의축 세력이며 독살설을 적극적으로 가져와서 정순왕후의 주도하에 정조가 독살로 죽는 결말을 맞이한다.
    • 정순왕후가 정조와 대립각을 보이는 것을 넘어 노론의 수장으로 노론에 속하는 대신들을 대동하여 정조에 대한 반란까지 획책하는 등 노론이 악의 축으로 나오나 혜경궁 홍씨는 악녀가 아닌 자애로운 어머니로 나오거나 노론이지만 악당은 아닌 보수 정치인 장태우가 나오고,[47] 정조 독살설도 반영하지 않고 오히려 정순왕후도 정조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그나마 다른 사극보단 나은 편이다.
    • 사도세자의 살인행각까지 전부 노론의 끄나풀을 제거한 것으로 미화한 사도세자 미화의 끝판왕.
    • 원작인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은 노론 음모론 소설이 아니나, 드라마로 각색되면서 역시 노론이 악당이 되었다. 그래도 주인공이 노론 영수 아들이다 보니 주인공 아버지는 악당이 아닌 보수 정치인 정도로 묘사되는 편이라 다른 드라마나 영화보다는 좀 나은 편이지만, 다른 노론 대신이[48] 악당 노릇을 하는 건 마찬가지.
    • 이 드라마는 한 때 악녀로 평가받던 장희빈을 재평가하려는 의도는 어느정도 좋았지만 실제로는 숙종 때 낙향해서 조용하게 살다 죽은 노론 세력의 민유중 등이 아주 악하게 묘사되는 걸로 모자라서 역모까지 획책하려고 하는 걸로 나타나는 등, 역사 왜곡이 아주 심했다. 굳이 악역을 만들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면 민유중이나 김만기를 악역으로 묘사하기보다는 숙종 때 공작정치의 달인인 김석주나 김익훈을 등장시켜서 악역으로 삼아도 충분했을 것 같은데......
    • 이 분야의 끝판왕. 노론이 무슨 프리메이슨같은 비밀결사 비스무리하게 나오며, 경종 독살과 맹의를 무기삼아 영조를 휘어잡는다. 심지어 노론대신들은 아예 영조를 왕 취급도 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김창완이 분한 김택이란 인물은 극중에서 영조에게 너, 야 거릴 정도로 무례하게 나오며 드라마 내에 나오는 대부분의 살인사건의 배후도 죄다 노론.
    • 애초에 악역들이 노론 세력이며 도입부에 노론 대신들이 옹기종기 모여 세손의 이름을 산이라 멋대로 부르며 글러먹었다, 못 쓰겠다며 뒷담화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도세자의 평안도행을 소현세자가 모아두었던 보물을 찾기 위한 것으로 표현하고, 마지막에 나오는 사도세자의 편지에 "아비도 ...한 세상을 꿈꾸었으나 사방에서 아비를 모함하는 ..가 끊이지 않는구나."라는 표현이 나온다. 물론 이 영화에서 적이 노론인 건 저언혀 중요하지 않다.애초에 즈기자고 보는 팬터지인데 뭐...
    • 작가가 김이영이란 것만 봐도 역사는 날로 먹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아예 노론 음모론이 지나쳐서 노론의 힘으로 왕위에 오른 영조가 노론에 맞서서 왕이 된다고 한다...
    • 작중 세계관에서 한 역사학자가 "양진만 대통령(김갑수 역)은 노론 이후 처음 정권교체를 했다."라고 말했다고 언급된다.

7.2. 만화/소설[편집]

8. 같이보기[편집]

[1] 사실 매체에서 묘사되는 노론 음모론은 주로 여기까지긴 하다. 뒤쪽은 사실 언급하기도 뭐한 주장인지라..[2] 다만 국혼은 서인에게 흡수당하기 이전의 훈구파도 많이 치르던 것인데, 위 모토들 알고 보면 훈구파에 온건한 태도를 보였던 서인 세력이 훈구파의 국혼 정책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3] 틀린 말이다. 노론 벽파는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죽은 뒤 김달순이 조득영에 의해 탄핵된 뒤 사사되고 김관주가 절도 안치 이송 중에 죽어 세력이 완전히 와해되었고, 이후 김조순, 김이교와 같은 안동 김씨들과 같은 시파 안동 김씨들이 정권을 잡고 세도정치를 시작했다.[4] 조선시대의 당파 주류는 사림 집권 이전에는 관학파, 훈구파가 집권을 해 오다가 사림 집권 이후 붕당이 형성된 이후로는 서인(기축옥사), 동인, 서인(임진왜란), 북인(선조 말-광해군), 서인(인조-현종), 남인(갑인예송), 서인(경신환국), 남인(기사환국), 서인(갑술환국), 노론-소론, 노론(병신처분), 소론(삼수의 역), 노론(4대신 신원), 남인-노론 벽파(정조), 노론 벽파(정순왕후 수렴청정), 노론 시파(순조 친정)로 이어지며 그 뒤는 쭉 노론 시파인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이다.[5] 당장 노론 음모론의 최강자가 누군지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애초에 노론 음모론 같은 사이비에 혹할 정도의 지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면 각종 유사역사학, 유사과학, 음모론에도 같이 혹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6] 사실 노론이랑 상관은 없어도 친일파는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친일 부역자 > 미군정시기 관직유지 > 이승만의 친일 청산 실패 등등[7]  이철희 시사인 인터뷰  이해찬 시사인 인터뷰[8]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도 미약하게나마 노론음모론을 믿었을 가능성이 크다. 노무현이 애독했던 책 목록 중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이덕일 저)가 있는데, 대표적인 노론음모론 서적이기 때문이다.[9] 굳이 좌파가 아니여도 우파에서도 꽤 인기있는 음모론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90년대 거품이였지만 일시적으로 정조 재조명 붐을 일으켰던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 류의 소설만 봐도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권위주의적 개혁군주 정조(박정희), 그를 지지하는 왕권 중심주의자 남인(작가 본인과 박정희를 추종하는 무리), 그런 그를 헐뜯고 방해하는 신권 중심주의 노론(좌파 진영)식으로 전형적인 이분법적 사고로 서술해냈다.[10] 근본적으로 시파와 벽파를 나누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사도세자와 관련된 것이지 정조 본인이 아니다. 즉, 시파-정조 지지파, 벽파-정조 반대파가 아닌 것이다. 어느 쪽인가 하면 시파는 사도세자를 죽이지 말았어야 했다, 고 벽파는 정조가 있으니 사도세자는 필요없다, 는 쪽에 가깝다.[11] 이황, 조식 생전에 경상좌도엔 이황, 우도엔 조식이란 말이 떠돌았던 걸 생각하면 더 깊이 들어갈 필요도 없다.[12] 서인에게 흡수되기 이전의 훈구파의 기반도 마찬가지로 서울, 인천, 경기도, 충청도 지역이었다. 계유정난을 일으킨 한명회도 본적을 충청도에 두고 있을 정도였다.[13] 그 외에 강원도는 그 당시에 서인과 남인의 세가 비등비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서인 집권기에는 서인이 우세했고, 남인 집권기에는 남인이 우세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이루어질 때는 노론과 소론의 세가 비등비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14] 영남은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 심하던 시절에는 사림파의 본거지이자 텃밭 노릇을 톡톡히 했다. 당시 영남 출신 훈구파는 홍귀달밖에 없었다. 다만 훈구파로 흡수당하기 전의 관학파 시절에는 영남 지역에서 관학파의 세가 어느정도 있었지만 단종 때 관학파에서 핵심 축을 이루던 김종서, 황보인 세력이 계유정난으로 몰살되고 관학파의 젊은 축이자 절의파에 속하는 집현전의 젊은 학사들인 사육신 세력도 단종복위운동 때 몰살된데다가 생육신도 벼슬을 하지 않으면서 남은 관학파는 훈구파로 흡수되었고, 이후부터 영남은 사학파의 후신이자 절의파, 청담파를 합친 사림파를 지지하는 성향이 더욱 강해졌다.[15] 말 그대로 집으로 쳐들어와서 집을 부수고 고향에서 추방했다.[16] 영남은 남인의 텃밭이었는데 이인좌의 난 이후에 반역향에 속한 탓도 있지만 중종~광해군 시기만 해도 사림파와 북인, 남인의 본거지였던데다 은거한 학자들이 영남에 모여들었기 때문에 성리학이 당시에 발달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4대 사화와 연산군, 중종 시절에 이어진 옥사로 훈구파가 쇠퇴해버리자 세력을 모은 영남 사림들은 이 기회를 노려서 집권을 했다. 그러나 광해군~인조 시절에 이어진 정치 혼란으로 인해 중앙 정치에서 훈구파의 잔여세력을 흡수한 기호 사림에게 완전히 밀렸고 이후에는 사실상 소외된 경향이 강했다.[17] 조선 후기 세도정치로 유명한 안동 김씨 문정공파는 따로 장동(서울의 장동, 지금의 효자동 일대) 김씨로 분류하기도 한다.[18] 서울에서 태어나긴 했으나 을사사화로 집안이 박살난 이후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전라도 창평으로 내려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즉 호남 동인들을 박살낸 그도 사실상 호남 출신이다.[19] 호남은 사림파 집권 이전에도 훈구파와 사림파의 경합 기조가 이어졌다.[20] 다만 태조 왕건의 경우, 근기계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 기반도 상당했지만 태조 왕건의 진짜 기반을 본다면 그의 기반은 수도권보다는 고구려계와 패서지방 호족들 쪽 기반이 많았다. 다만 패서지방 호족들은 광종 때 숙청을 당했다. 그리고 조선시대 당시에는 고려에서 출세가도를 달렸던 신라계 역시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이뤄질 때 분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지방 신라계와 남인을 중심으로 한 영남지방 신라계로 분열되었던 듯 하다.[21] 대한민국 정치판에서 영남 전체와 호남의 지역감정이 강하게 작용함은 전두환에 의한 5.18 민주화운동 무력 진압, 87년 대선, 3당 합당 이후의 일이다. 영호남의 지역감정은 단순히 정치 논리에 의해 '선거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선 대한민국/지역감정 문서의 영남 vs 호남 부분을 참조할 것.[22] 사실 김옥균홍영식 등 1세대 개화파들은 실제 노론 명문가 자제들이 많았다. 하지만 단순히 친일 성향의 개화파가 아니라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개념으로 들어가면 이 또한 벗어난다.[23] 그리고 숙종-경종-영조 때만 해도 여흥 민씨 가문은 문제가 별로 없었다.[24] 그리고 여흥 민씨 사람들이라고 해도 모두 친일을 한 건 아니다.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도 충분히 있다.[25] 당연히 이 성리학자들은 대부분 노론 일색이었다. 동인 세력은 완전히 몰락하였고 소론 역시 소수파였기 때문.[26] 참고로 그는 열렬한 청나라 숭배론자로, 명나라에게 적대적이고 청나라에게 우호적인 여러 연구를 하기도 했다. 심지어 일본 제국이 청나라의 부흥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27] 광해군이 대외 정책을 잘한 것은 맞으나 개혁군주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로는 암군 그 자체였다. 해당 문서 참조.[28] 나주 나씨의 경우나 경종 시기 사촌이였으나 소론 조태구-노론 조태채 집안같은 경우가 있다.[29] 반남 박씨, 경북 일대 유림들의 경우[30] 정철은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에서의 과도한 선조 예찬으로 인해 아첨꾼 이미지가 매우 강하지만, 실제론 선조 즉위 기간 내내 자기가 옳다고 여길 땐 선조의 뜻에 어긋나도 절대 굽히지 않고 간언을 질러대는 성격이었다. 괜히 유배를 몇번씩 갔겠는가... 그러니까 쉽게 예를 들면 자기 주장 꺾지 않고 고집 부리다가 선조가 화내니까 "왜 그래 우리 친했잖아~"하는 것이다.[31] 김자점은 인조 말기에 자신을 나름 밀어주었던 김류마저도 강빈 사사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배신했다.[32] 공서파였던 최명길도 소현세자에게 호의적이었고 회은군을 추대하려다가 역모죄로 처형당한 심기원도 소현세자를 지지했었다.[33] 여기에는 광해군을 지지한 사람들도 많았다. 이원익, 이덕형, 이항복, 심희수, 이호민은 광해군을 지지했다. 정경세 역시 광해군을 지지했다. 게다가 선조의 고명을 받은 유교 7신 중에도 광해군의 즉위를 지지한 사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유영경, 한응인을 뺀 사람들은 다 광해군을 지지했다. 서성, 신흠, 허성, 한준겸, 박동량은 모두 광해군의 즉위를 지지해 줬다. 게다가 한응인도 나중에는 광해군 지지로 돌아섰다. 그런데 광해군은 자신을 도와준 이들도 배신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곽재우와 기자헌도 토사구팽을 했다.[34] 사실 임진왜란때 궁궐들 대부분이 불에 타서 소실되었기 때문에 전후 복구를 위해서는 필요한 절차였지만, 너무 지나치게 작업을 하려고 시도한게 오히려 문제였다.[35] 이문열은 재령이씨, 이인화(류철균)는 전주류씨, 모두 영남 양반 집안, 즉 남인의 후손이다[36] 대공수미법, 군포 개혁 등을 주장했고, 이는 후대에 대동법/균역법/호포법과 같은 제도로 실현된다.[37] 이는 귀인 조씨의 아들인 숭선군과 손자인 동평군이 서인 세력에게 탄핵을 받은 이유도 한 몫을 했는데, 강빈옥사를 일으키는 데 일조한 귀인 조씨의 아들인 숭선군과 손자인 동평군은 남인을 편들었다.[38] 박지원과 홍대용이야말로 정말 노론 중에서도 엘리트 집안 출신이다.[39] 물론 일부는 어느정도 옳긴 하다. 그러나 남곤의 경우엔 남곤 자신이 억울하다고 할만한 일이 있다.[40] 세자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던 효순왕후는 세자의 사후 현빈으로 봉해졌다가 영조 27년 1751년 11월 14일 경복궁 자경전(慈慶殿)에서 소생없이 37세의 나이로 승하하였으며, 이듬해인 1752년 1월 22일 효장세자의 묘 왼쪽에 안장되었다.[41]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임오화변이다. 노론 음모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노론 측은 되려 사도세자를 감싸는 입장이었는데, 조정 내 절대다수의 여론도 무시하고 영조가 독단적으로 세자를 죽여버린 사건이다. 노론이 내세우는 군신공치가 조선 특유의 정치풍토 하에서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보여주는 예시다.[42] 이인화의 본명은 류철균으로, 남인 집안인 전주 류씨 출신이다.[43] 연안 이씨하면 노론의 명문가라고 생각하는 일이 많지만 그래도 다른 노론 명문가와 비해 붕당이 비교적 다양했는데 예를 들어 인조반정의 주인공 이귀는 서인의 영수였으나 반대로 이조판서 근곡 이관징은 남인으로서 숙종의 신임을 받았고, 노론의 영수였던 영의정 이천보, 좌의정 이후와는 다르게 좌의정을 지낸 이복원[44], 이성원은 소론의 영수였다. 하지만 연안 이씨=노론 이라는 인식 때문인지 소론이었던 이들 대부분은 창작물에서 소론이 아닌 노론으로 표현되고 있다. 심지어 좌의정 이성원의 경우에는 나무위키에서 조차 노론의 인물로 소개되어 있었다.[44] 이시수의 아버지[45] 노론의 영수였던 영의정 이천보의 양자이다. 이천보는 아들이 없어 같은 집안이었던 이공보의 막내인 이문원을 양자로 데려온 것이다.[46] 진중권의 정치 평론 데뷔작인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가 바로 이인화가 진중권의 악마주의론을 악마적 초인 옹호 담론으로 이용하면서 진중권이 분노해 시작한 책이다. 진중권은 이인화의 주장대로라면 오히려 영남 남인 세력이 '영남 기반의 독재 정권 세력'의 기반이 된다는, 결과적으로 영남 남인을 스스로 모욕하는 자폭 행위나 다름없다며 비판했다. "우리 조상님은 당파 싸움을 해도 임금님 편 드는 당파 싸움을 했다..." 정도라고.[47] 모티브는 김종수[48] 이 역할을 이산에선 장태우를 연기한 이재용이 맡았다.[49] 위에 있는 성균관 스캔들의 김태희 작가.===세월호참사뿌리는노론의당리당략정조,탕평책 대신 노론해체했어야 이완용이 마지막당수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39494
언제부터인가 정조는 우리 사회에서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도 정조가 잠자던 존현각에 자객이 올라왔던 정조 1년(1777년) 7월28일의 사건이 배경인 <역린>이 상영되고 있다. 그간 조선 임금에 대한 인기투표에서 세종이 압도적1위였다면어느순간부터정조가등장해경쟁하는형국이된것이다.그러나두임금의일생을비교해보면너무다르다.세종이시종일관부친덕분에순탄한임금노릇을한반면,정조는부친때문에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태종은 삼남인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은 물론 공신 집단을 과감하게 숙청함으로써 감히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이 없는 깨끗한 조정을 물려주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그 자신이 되레 노론벽파에 살해당하면서아들까지도절체절명의위기에빠뜨렸다.영화와 책으로 조성된 정조 신드롬필자는 정조 신드롬의 근본 배경을 이런 권력 구조가 낳은 정조의 운명적 비극에 그 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14년 동안 대리청정하던 아버지가 할아버지 영조와 노론벽파의 결탁으로 한여름 뒤주 속에 갇혀 여드레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살해당하는 것을 목도해야 했다. 부친이 뒤주 속에서 신음하는 동안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친정에 가 있었는데, 외가 친척 중에 아무도 부친을 구하려고 시도하지 않는 냉혹한 현실을목도했다.구원은커녕외할아버지홍봉한과작은외할아버지홍인한이 부친 제거에 앞장섰고 여기에 혜경궁 홍씨까지 가세한 것이 현실이었다.게다가노론벽파는‘죄인의아들은왕이될수없다(罪人之子不爲君王)’는 이른바 ‘8자 흉언(凶言)’을 유포하며 세손 제거를 당론으로결정했다.열한살어린세손의처지를묘사할때고립무원(孤立無援)이 란 사자성어처럼 적당한 말도 없을 것이다. 다행히 사도세자 제거 작전에 가담했던 혜경궁 홍씨가 아들도 제거해야 한다는 노론 당론에 반기를 들고 영조도 손자 제거 요청을 거부하면서 세손이 숨 쉴 수 있는 최소한의‘에어포켓’이만들어졌다.세손은 노론 영수인 외조부 홍봉한의 신임을 받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고 세손이 즉위해도 제 뜻대로 조종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홍봉한이 영조에게 세손의 교육을 담당하겠다고 자청했을 때 세손은겨우살해의위협에서벗어날수있었다.세손은홍봉한이<정사휘감(正史彙鑑)>을 교재로 가르칠 때 무조건 머리를 조아리며 생존을 도모했다. 아마도 정조가 즉위 후 적당(賊黨)과도 손잡고 탕평책을 추진한 배경에는이때생존을위해외조부홍봉한과대타협을이뤄낸과거가한몫했을것이다.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소장() |  승인2014.05.2817:03세월호참사뿌리는노론의당리당략정조,탕평책대신노론해체했어야이완용이마지막당수
전주경기전정조대왕어진ⓒ연합뉴스세월호사건으로드러난한국사회민낯의근원은인조반정으로거슬러올라간다.ⓒ해양경찰청제공

그런데 정조가 지금 계속 부각되는 배경에는 정조란 인물이 현재진행형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 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나라 국(國)자가 들어가는 학문을 업으로 삼는 학자 중에서 정조의 부상이 불편한 사람들이 꽤 많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그 배경과 현황에 대해서는 이주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이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과 <한국사가죽어야나라가산다>에서자세하게밝혔을뿐만아니라필자도<사도세자가꿈꾼나라>(사도세자의고백개정판)에서언급한 적이 있으므로 생략하겠다. 다만 이 책들은 정조가 사후 200여 년이 지날 때까지도 철저하게 외면당해왔던 구조적배경을 조망했다는 점만 언급하겠다. 바로 이 대목. ‘정조는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 인물이라는 점이 정조 신드롬의근본적원인이아닐까’라고필자는생각한다.일례로 정조 독살설을 보자. 몇 년 전 정조 어찰(임금이 쓴 편지)이 처음으로 공개돼 큰 관심을 끈 적이 있다. 그런데 정조어찰을 최초로 공개한 학자들은 이 어찰이 정조 독살설을 부인하는 사료인 것처럼 호도했다. 그만큼 정조 독살설을 뼈아프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은 왜 200여 년 전의 정조 독살설을 뼈아프게 생각할까. 정조 독살설의 요체는 사도세자를 살해한 노론벽파가 정조도 독살했으리라는 것이다. 이들은 노론벽파의 시각으로 그 시대를 바라보고 현 시대를 바라보기때문에 정조 독살설이 뼈아픈 것이다. 한마디로 노론 당파 학자다. 그런데 이런 학자가 그동안 한국 사회의 역사 서술권과역사 해석권을 독점하고 있었다는 현실을 놓치면 안 된다. 중·고교 국사교과서가 노론에게 사형당한 소론 출신의 실학파유수원을 노론이라고 조작하고, 중상주의 실학이 마치 노론에서 나온 것처럼 호도한 배경이 여기에 있다. 정조 어찰을 공개하던 학자가 노론벽파 영수 심환지를 정조의 최측근인 것처럼 호도하고, 정조가 노론벽파를 깊게 신임했다고 호도한것도마찬가지다. 5공때민정당정권으로부터사형선고를받았던김대중이민정당을깊게신임했다고주장하는격이다.정조와 심환지가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으니 정조는 독살당했을 리 없다고 전혀 앞뒤 맥락이 맞지 않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도 마찬가지다. 필자가 한 방송에서 부친 문제(文帝)를 독살한 수나라 양제, 시저 암살에 가담했던 로마의 브루투스,그리고대통령박정희를암살했던중앙정보부장김재규의관계를예로들어반박하자정조어찰을독살설부인의도구로삼으려던노론후예학자의기세가수그러진것은이들이어떤근거도갖고있지못함을말해주는것에다름아니다.정조는 과거가 아닌 현재진행형 인물최근 <대비, 왕 위의 여자>(김수지 지음, 인문서원)라는 흥미로운 책이출간됐다. 국왕 뒤에서 발을 치고 수렴청정했던 네 대비의 정치적 일생을 추적한 책이다.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정조 사후 지금까지 숱하게 논란이 되고 있는 정조 독살설에 대한 현대 의학적 근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노론 후예 학자들은 “정조 독살설은 시골에서나 떠돌던 야담”이라고 주장했고, 이 땅의 주류 신문이 이를 대서특필했지만 정조 사인에 가장 먼저 의문을 제기한 사람들은 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 삼사(三司)에 포진한 젊은 엘리트 관료들이었다. 그 요체는 심환지의 친척인어의 심인이 연훈방으로 정조를 독살한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연훈방이란 수은을 태워 그 연기를 쬐는 치료법인데, 삼사의 젊은 관료들은 사실상 어의 심인이 심환지의 지시를 받아 연훈방을 시행한 것 아니냐고공격한 것이었다. 물의가 워낙 거세지자 정조 사망과 동시에 권력을 장악한 정순왕후 김씨와 심환지도 심인에 대한 비호 자세를 거두고 사형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몇 년 전 TV 다큐멘터리에서 이 문제를 다룰때한한의사가나와서‘연훈방은문제가없다’고주장하는것을봤다.필자도 한의학 서적을 대강은 볼 수 있지만 ‘연훈방은 문제가 없다’는 한의사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대비,왕 위의 여자>의 저자 김수지는 2010년 아산병원에서 수은으로 쓴 부적을 화장실에서 태우다가 연기에 중독돼 사망했던 한 남성의 사례를찾아냈다. 이 남성의 치료를 담당했던 의료진이 수은 중독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 이 사례를 논문으로 발표했던 것이다.이남성이쐰수은연기는정조에게시행했던연훈방의몇십분의1밖에되지않는것이었다.그래서저자김수지는만약 연훈방이 위험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한의사나 학자는 자신이 있다면 정조와 똑같은 연훈방을 받아보라고 말한다.‘설’은 설로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이처럼 연구가 진척될수록, 그리고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이 더해질수록 사실로 드러나는경우가많다.특히그‘설’이거대한권력집단의음모에관한것이라면대부분진실로드러난다.“정조는 노론에 의해 독살당했다”필자는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정조의 탕평책에 대한 기존의 관점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정조는 초인적 의지로 부친을 죽이고 자신까지 죽이려던 노론벽파에 탕평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러나 노론벽파는 정조사망 직후 정조의 모든 개혁 정치를 폐기하고 다시는 돌아와서는 안 되는 과거로 사회를 되돌렸다. 노론 일당 독재는 노론 내에서도 10여 개벌열(閥閱)이 권력을 독차지하는 세도정치로 더욱 퇴화했던 것이다. 그런데 인조반정 이후 300여 년간 집권했던 서인→노론→노론벽파→세도정치세력은일제에나라를팔아먹는지경에이르렀다.‘추미애 불륜설’ 유튜브 방송한 신동욱뚱뚱해서 병원 찾는 환자 3만 명 시대이재명 돌아온다 ‘사면초가’ 비명계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소장펼치기마지막 노론 당수가 이완용이고,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와 막대한 은사금을 받은 매국적(賣國賊)대다수가 노론이었다. 그래서 정조가 탕평이 아니라 나라의 운명을 걸고 노론벽파 해체에 나섰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이드는것이다.지난 10년 이상 한국 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노론사관·식민사관의 문제점을 꾸준하게 지적해온 필자는 세월호 사건으로 드러나는 한국 사회의 민낯이 낯설지 않다. 선장과 선원이 공모해서 승객을 버리고 사복을 입고 배에서 빠져나가는 장면이나 진입 명령을 받은 해경이 진입하지 않은 장면의 근본을 찾아보면 광복 직후 친일 세력이 다시 득세한 반역사적·반문명적현실이있다.그리고그친일세력의뿌리는이미망한명나라를명분으로인조반정을일으킨세력에닿아있고,사도세자를 죽이고 정조를 독살한 세력에 닿아 있다. 외국 침략자에게 붙어서 제 민족의 피를 빨던 매국적이 매국 행위에 대한 처벌을받기는커녕광복된대한민국의공직자로부활했을때이들에게국가란무엇이었겠는가.그야말로사적·집단적·당파적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사적·집단적·당파적 이익 추구가 ‘관(官)피아’를 비롯한 한국 사회의 온갖학벌·지역카르텔로나타났고,그적폐가채피지도못한꽃봉오리수백송이의희생으로한국사회를덮친것이다.인간 정조의 위대성은 부친을 죽이고, 자신도 죽이려는 세력과도 화해의 정치, 용서의 정치를 펼친 데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에서 때로 단호한 단절이 필요하고 그런 사회가 궁극적으로는 진보했다는 점도 역사적사실이다. 더구나 부친을 죽인 것까지 용서를 받은 가해자가 반성은커녕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다가 역습을 가한 것이 현실이 된 ‘독살’에 이르면 더욱 그렇다. 정조는 그가 살았던 시대뿐만 아니라 현재 한국 사회에도 이런 복잡한 현재진행형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에 정조 신드롬은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미완의 과제이기에 계속 재조명되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필자의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가 <이산이 꿈꾼 세계(정조의 정치와 철학: イサンの夢見た世界(正祖の政治と哲學)>라는 제목으로 일본에서도 출간됐는데, 정조에 대해서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일본인은 어떻게 볼지 궁금하다. 정조 신드롬이 어디까지 갈지 필자 역시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데 사도세자 사건과 맞물릴 경우 그 폭발력은 더욱 커질 것으로예상할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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