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02

04 [통일신문] 北 중립주의 지향에 대한 평가와 전망 上下 - 강종일 한반도 중립화연구소장

[통일신문] <특별기고> 北 중립주의 지향에 대한 평가와 전망 上 - 강종일 한반도 중립화연구소장

<특별기고> 北 중립주의 지향에 대한 평가와 전망 上 - 강종일 한반도 중립화연구소장
통일신문
기사입력 2004-04-19
북한의 정치 지도자들은 중립통일 문제에 상당한 관심을 가져 왔으며, 남한에 중립통일을 공식으로 제안하였다.
김일성은 생존시 3회에 걸쳐 한반도의 중립통일방안을 구체적으로 제기 하였다. 김정일도 최근 한반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반도가 스위스식 무장중립국이 되어야 한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립화에 대한 북한의 관심

북한의 사회과학원 학자들도 한반도 중립통일문제를 심도 있게 연구하고 있으며 1910년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한·일합병 조약의 무효화 원인을 고종(高宗)의 영세중립정책에서 찾고 있다.
특히 김정일의 아들 3명은 영세중립의 모범국가인 스위스의 국제학교에 유학하였다.
김일성의 한반도 중립통일 제안으로부터 김정일의 스위스식 무장중립 사상과 사회과학원의 한·일합병 조약에 대한 고종의 영세중립정책 연구에 이르기까지 북한의 중립정책 지향의 전개과정이 북한의 의도된 중립통일을 지향한 정치적 행보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김정일이 스위스식 무장중립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김일성의 중립주의를 계승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김일성은 남한에 중립통일 주장을 공개적으로 제의한데 반해, 김정일은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스위스식 무장중립 주장을 발표하지는 않고 있다.
우리는 북한의 중립정책에 대한 김정일의 관심과, 북한 학자들의 영세중립 연구 등에 대한 북한의 의도와 목적은 무엇이며, 앞으로 북한이 과거 김일성이 제의한 것과 같은 중립통일을 한국에 또 다시 제의할 가능성 등에 관한 연구와 대응이 필요하다.
범위는 김일성이 1980년 10월 10일 통일정책으로 중립통일을 남한에 공식적으로 제의한 시기부터 2001년 김정일의 한반도 문제에 대한 스위스식 무장중립에 대한 시각까지 북한의 중립을 지향한 전개과정을 분석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서 언급된 중립주의에 관련된 개념은 주로 전시에 적용되는 단순중립에서 냉전시대 제3세계 블록을 형성한 비동맹중립과 영세중립의 의미도 포함한다.
중립주의는 중립을 지향하고 있는 국가가 군사적으로 어떤 블록에도 가입하지 않고 자국의 안보를 위한 안전보장 장치로 선택하는 국가의 외교정책이다.
이는 냉전시대의 산물로서 세계 제2차 대전 후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반대한 신생독립국가들이 표방한 민족주의의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중립주의나 비동맹은 약소국이 자의적으로 자국의 영토와 주권을 보호할 목적으로 강대국들간의 갈등과 헤게모니 대립에서 벗어나 국가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국제정치의 양식이다.
중립화와 유사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영세중립은 영세중립을 지향한 국가의 정치적 독립과 영토의 통합을 주변국가와 국제적 협정을 통하여 영구적으로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를 말한다.
영세중립은 중립을 지향하는 국가와 이를 보장하는 국가들간의 집단적 안보관계가 유지된다.

김일성의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안

김일성은 1980년 10월 10일 조선 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안’을 발표하면서 남북은 “자주·평화통일·민족 대 단결”의 3대원칙에서 중립통일을 하자고 남한에 제안하였다. 김일성이 한반도의 통일방법으로서 “중립통일” 방안을 공식적으로 제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남북통일을 위해 남북대표와 적당한 수의 해외동포가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권을 통하여 불신과 대립을 지양하고 단합과 평화적 방법으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을 창설하자고 제안하였다.
김일성은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이 지켜야 할 조건으로 남북이 어떠한 정치 군사적 동맹이나 블록에도 가담하지 말고 중립국가를 지향하여야 하며,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를 가지고 있는 남북은 두 지역을 하나의 연방국가로 통일하는데 있어서 중립국가의 과정은 필연적이며 합리적 방법임을 강조하였다.
김일성이 제안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의 통일목표를 “중립통일”로 하자는 저의와 배경은 무엇일까. 중립통일 제의에 대한 북한의 확실한 의도는 알 수 없으나, 당시의 남북한의 정치환경과 국제관계를 중심으로 몇 가지 추론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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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北 중립주의 지향에 대한 평가와 전망 下 - 강종일 한반도중립화연구소장
통일신문
기사입력 2004-05-03
김정일은 현재 3명의 아들을 두고 있다. 그들은 1남 김정남(34세), 2남 김정철(23세), 3남 김정운(21세) 등이다. 이들은 모두 어린 시절 스위스에 유학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김정남은 1980년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국제학교에서 입학하여 불어와 영어를 공부한 후 1989년 귀국하였다. 김정철과 김정운은 1991년부터 스위스 베른에 위치한 국제학교에서 불어와 영어를 공부한 후 귀국하였다.
김정일은 왜 아들 모두를 스위스에 유학시켰으며, 스위스의 영세중립 정책과 북한의 중립노선과 어떠한 정치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몇 가지 요인은 추정할 수 있다.
첫째, 외국어를 공부할 수 있는 스위스 교육기관이다. 스위스는 외국인이 영어와 불어를 공부하는데 선호되는 국가로, 다민족 다언어 국가로 불어가 공식어로 사용되며 많은 국제기구가 스위스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어학을 가르치는 국제학교가 많다는 것이다.
둘째, 스위스에 체류하는 외국인에 대한 스위스 보안기관의 경호와 금융기관의 비밀유지에 대한 특별한 배려이다. 김정일은 현재 스위스 은행의 비밀구좌에 약 수십 억불의 현금을 예치해 두고 있으며, 김정일의 아들들은 이 예치금 중에서 경비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스위스의 보안기관은 고액예금자에 대한 비밀유지와 그 가족을 우선적으로 보호하는 것을 중요시하고 있다. 스위스의 그러한 특혜조치로 인하여 김정일은 그의 아들들의 교육을 스위스에서 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셋째, 김정일의 가족들이 유럽을 여행하는데 스위스가 중심지가 된 것이다. 김정일은 1980년 김정남의 유학을 위해 제네바 교외에 있는 레만 호숫가에 위치한 단독 주택을 구입하였으며, 김정철과 김정운 형제를 위해 베른에 위치한 빌라를 구입하였다.
끝으로, 김정일은 후계자의 교육과 북한 내 보안문제와 외국에 대한 견문을 고려하여 해외교육을 선호한 것이다. 현재 김정일의 후계로 유력한 아들은 3남인 김정운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정일의 아들 모두가 영세중립국가인 스위스에서 공부한 것과 북한의 중립정책 지향이 어떠한 상호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보다 많은 연구가 따라야 할 것이나, 현재로서는 김정일이 아들들의 해외견문 확대와 어학공부에 목적을 둔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3명중 누가 김정일의 후계자가 되든 그는 어린 시절을 스위스에서 공부하였기 때문에 스위스에 대한 특별한 생각과 배려를 가질 것으로 간주된다. 북한이 장차 중립정책을 계속 추구할 경우 스위스의 중립모델이 영향을 줄 것으로 전망된다.
김일성은 1980년부터 남한에 대해 중립통일을 정식 제의하였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중립통일인지 또는 영세중립통일인지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김일성은 왜 중립연방제통일을 주장하였는지에 대한 이유는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당시 전개된 남북문제를 중심으로 한 몇 가지 요인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첫째, 한국의 국내 소요사태를 들 수 있다. 박정희가 1979년 10월 김재규에 의해 피살됨에 따라, 전두환과 그를 추종하는 신 군부가 정권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정승화를 체포하는 12. 12 내란음모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진압과정에서 군부의 잔인한 작전으로 국민과 신 군부간에 대립이 고조되고 있었다. 김일성은 남한 내의 혼란스러운 사태를 북한에 유리하게 이용하기 위하여 중립통일을 제의한 것으로 분석된다.
둘째, 남북의 경제적 격차를 들 수 있다. 북한의 경제사정은 1970년대 중반까지 남한보다 우위를 유지함으로써 김일성은 대남 적화통일을 생각하였으나, 1970년대 후반부터 남한의 경제가 북한을 월등하게 추월함으로써 종전까지의 대남 적화통일 정책보다는 북한에 대한 남한의 흡수통일을 방지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중립통일을 제안한 것으로 평가된다.
셋째, 주한미군의 철수를 목적한 것이다. 남북이 중립연방제가 될 경우 남북한 군대의 자동적 감축과 주한미군의 철수가 가능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할 경우 북한은 대남 적화통일을 보다 용이하게 실천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정책적 배려로 볼 수 있다.
끝으로, 남한 내 중립화 통일세력을 북한의 우군으로 활용하기 위한 시도이다. 제2공화국 장면정권 치하에서 한국의 학생들은 통일문제를 북한학생들과 직접협상을 하였고, 혁신 정당들은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을 주장하였다. 대표적 단체는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과 ‘중립화조국통일운동총연맹(중통연)’이었다.
특히 이들은 미국의 맨스필드(Mike Mansfield) 상원의원이 1960년 10월 한반도의 오스트리아식 중립화통일의 필요성에 대한 발언에 자극 받아 활발한 중립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한 국내 정치적 여건으로 인하여 당시 한국 국민의 32.1 퍼센트가 한반도의 중립화통일을 찬성하였다.? 김일성은 남한의 이러한 반정부세력을 중립통일에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김정일의 한반도 문제에 대한 스위스식 무장중립론에 대한 진의와 동기는 명백하게 알 수 없으나, 그가 주장하는 한반도의 무장중립의 5가지의 당위성은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북한이 한?일합병 조약의 무효화를 입증하는데 고종의 영세중립정책을 원용한 것은 향후 한반도의 중립화통일이나, 무장중립정책에 대비한 상당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김정일은 그의 후계가 될 아들들에게 어린 시절을 스위스에서 공부시키고 그들의 견문을 중시한 것은 그의 스위스식 무장중립론과 스위스의 영세중립정책 간에 직접적 관련성이 없는 것으로 분석되나, 앞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있는 북한의 한반도 중립정책에 긍정적 평가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남북관계가 현재보다 활성화되거나 호전될 경우, 북한은 확고한 체제보장과 주한미군의 철수를 위하여 남한에 중립통일정책을 또 다시 제의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으므로, 한국정부와 관계기관은 북한의 중립통일정책에 대한 연구를 하여야 할 것이며, 대응 차원에서 정책적 배려가 있어야 할 것으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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