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김정은 이모 고영숙, '김정일 망명' 기획했었다 - 더 자유일보
김정은 이모 고영숙, '김정일 망명' 기획했었다
최영재 기자
승인 2018.04.30
2008년 10월 11일 북한이 공개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북한 인민군 제821부대 산하 여성포중대를 시찰하는 사진. 연합뉴스 자료사진
[내용 요약]
-김정은 이모 고영숙 1998년 미국 망명, 외삼촌 2000년대 후반 고동훈도 유럽 망명
-김정은 북한표준으로 보면 불순분자 집안 태생
-김정일, 황장엽 망명과 황해제철소(98년 8월) 사건 등으로 실각 위기 몰려
-1999년 봄 워싱턴DC서 김정은 이모부, CIA주선으로 안기부 직원 만나 김정일 망명 제안
-CIA의 망명 제안, 김대중 정부 안기부 실행 안해
-실각 위기 김정일,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대북송금으로 기사회생
미국으로 망명해서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김정은의 이모 고영숙과 이모부 이강이 1차 남북정상회담 1년 전인 1999년 봄 김정일을 제 3국으로 망명시키려 시도했음이 드러났다. 김정일은 당시 황장엽 망명과 황해제철소 사건 등 식량위기와 내부 소요로 실각위기에 놓여 있었다. 당시는 김정일의 해외 망명설이 꾸준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픽=더스틴 최 기자
그러나 미국 CIA와 고영숙 부부의 이 같은 망명 제안을 당시 김대중 정부 안기부는 실행하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는 오히려 1년 뒤 김정일과 정상회담을 하고 대북송금을 하면서 해외 망명위기에 빠진 김정일을 기사회생시켰다.
김정일 망명 비화를 전한 미국 정보 당국 관계자에 따르면 망명 공작을 벌인 고영숙 부부는 남북정상회담에 나온 북한의 김정은이 스위스에서 유학할 때 이를 뒷바라지 한 인물이다. 북한 김정은의 생모 이름은 그동안 고영희로 잘못 알려졌으나 사실은 고용희 (1953∼2004)가 정확하다. 북한에서는 김정은이 백두혈통이라고 떠벌리지만 김정은의 외조부 고경택과 생모 고용희는 재일 교포였고 북송선을 타고 북한에 들어간 사람들이다.
일본 마이니치신문 2016년 6월 10일자에 실린 김정일 고영희 부부. 김정일의 세번째 부인으로 김정은을 낳은 고영희는 암으로 투병하다가 2004년 사망했다.
◇김정은, 백두혈통 아닌 불순분자 집안 태생
그리고 사실 김정은은 북한 표준으로 따지면 불순분자 집안의 자식이다. 김정은의 이모 고영숙(1958년 생)과 이모부 이 강(가명 박남철)은 북한이 싫어서 1998년 5월에 미국으로 망명했다. 외삼촌 고동훈(가명 박칠성, 1951년 생)은 동생이자 김정은의 생모인 고용희가 2004년 사망한 뒤 불안한 생활을 하다가 유럽 어느 나라로 (국가명 미확인) 가족을 대동하고 망명했다.
그는 박칠성이란 이름으로 스위스 베른 주재 북한 대사관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기도 했다. 김정은의 이모 고영숙과 이모부 이 강은 공식적으로는 김정일의 서기실(비서실) 소속이었다. 고영숙 부부는 1983년부터 1998년까지 15년 동안 스위스에서 근무했고 김정은의 스위스 베른 유학 시절에(1996-2001) 그를 뒷바라지했다.
2016년 워싱턴포스트와 인터뷰한 김정은의 이모 고영숙과 남편 리강 씨가 타임스퀘어 광장을 바라보고 있다. 워싱턴포스트 갈무리
1999년 봄에 한국의 국가안전기획부(2000년에 국가정보원으로 바뀜) 요원들이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 CIA 주선으로 김정은의 이모부인 이 강을 면담했다. 그 때 이 강은 한국 안기부 요원에게 “ 한국정부가 원한다면 북한의 독재자 김정일을 공작차원에서 해외망명을 유도하고 그를 북한으로부터 격리시킨 다음에 남북 통일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 원하면 자기가 적극 협력 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당시 김대중 정부는 이같은 망명공작을 실행하지 않았다.
김정은 이모인 고영숙 부부가 김정일 망명을 제안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김정일은 1997년 황장엽 망명과 식량난으로 인한 1998년 8월 황해제철소 사건 등으로 실각위기에 빠져있었다. 외신 등에 해외 망명설이 솔솔 흘러나오는 상황이었다.2015년 11월 초, 고영숙 씨의 남편 리강 씨(오른쪽)는 강용석 변호사(왼쪽) 사무실을 직접 찾았다. 일부 탈북자들이 방송에서 '리 씨 부부가 북한에서 수백만 달러를 가지고 도주해 얼굴을 성형 했다'는 등 자신들을 비방하고 있다고 법의 처벌을 의뢰했다.
먼저 황장엽 망명사건. 미국 정보 당국 관계자에 따르면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으로 노동당 내부에서 심각한 동요가 있었다고 한다.
◇황해제철소 민간인 학살사건
다음은 식량난이 한창이던 1998년 8월 황해북도 송림시에서 일어난 황해제철소(사건 당시 송림제철소)에서 인민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사건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을 목격한 탈북자 이춘구씨의 수기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김정은이 스위스 유학 중에 다니던 베른 인근의 사립학교.
식량난 당시 배급이 끊어져서 아사자가 속출하자 먹고 살 방법을 모색하던 중에 송림제철소의 지배인, 책임비서, 후방담당 부지배인, 업무담당 부지배인을 비롯한 회사 간부들이 제철소에서 생산되는 압연 철판을 중국에 팔아서 옥수수로 바꾸려고 했다.
실제로 제철소 후방 부지배인, 판매과장을 비롯한 간부 8명이 제철소 전용 어선으로 남포항에 나가 있는 배를 이용해서 압연 철판을 싣고 중국에 가서 옥수수로 바꾸었다. 옥수수를 싣고 온 배가 남포항 부두에 정박하는 순간에 평양 보위사령부 검열대가 나타나서 배에 타고 있던 일행을 전원 체포하여 포승줄로 묶어서 어디론가 끌고 갔다.
이들은 고문을 당한 후유증 때문에 걷지도 못하는 상태로 평양 보위사령부 검열대에 의해 송림시 공설운동장의 공개처형장으로 이송되었다. 명목은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를 위반하고 국가물자를 외국에 팔아먹는 국가반역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제가 먹자고 한 일도 아닌데 총살까지 시키는 건 너무합니다.”라는 주민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공개처형은 진행되었다. 당시 평양 봉화진료소에서 김일성의 담당 간호사였던 여자가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총살하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제철소 간부들이 위대한 장군님께 생산을 많이 하여 기쁨을 드리자는 일념으로 강냉이를 바꾸려 했는데, 방법이 틀렸으면 처벌을 주어야지 총살까지 하는 건 너무합니다. 총살당한 간부들이 노동자들을 먹여 일을 시켜보자고 했지, 제가 먹자고 한 일도 아닌데 이렇게 사형까지 하는 건 너무 무지막지 합…” 라고 말을 하자, 평양 보위사령부 검열대들은 그 여자도 현장에서 처형했다.
첫번째 공개 총살 다음날, 송림시 제철소의 노동자들은 “더 이상 간부들을 숙청하지 말라. 우리를 먹여 살리고 제철소를 위한 간부들의 행동은 잘못이 아니다”는 구호를 외치며 공장 구내 길에서 몇 천 명이 모여 앉아 밤을 세워가면서 농성을 하였다.
◇인민군, 탱크로 황해제철소 시위대 깔아뭉개
그 다음날 새벽 4시쯤 열댓 대 정도 되는 탱크와 트럭에 탄 수백 명의 인민군이 시위대를 진압하기 시작했다. 해산하라는 군대의 명령에도 시위대가 앉아서 버티자, 인민군은 총을 쏘고 탱크로 깔아뭉겠다.
제철소에서 학살이 있은 다음날, 사회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시위 주모자를 심판한다는 포고문이 사회안전부(현 인민보안성) 명의로 나붙었다. 이틀 후 송림시의 공설운동장에서는 폭동 주모자라고 하는 3명의 노동자들과 함께 또 한 명의 중학교 선생과 어린 처녀를 총살했다. 중학교 선생과 처녀의 죄명은 한 재일교포의 집에 들어가 녹음기를 훔쳤다는 것이다.
김정은이 스위스 베른에서 살았던 아파트형 주택. 이 집에서 그의 이모 고영숙이 정철, 정은, 여정 삼남매의 어머니 역할을 했다.
죄과라는 것을 읽고 총살에 처한다는 판결과 함께 두 명의 보위사령부 검열대들이 처녀에게 다가가서 턱을 주먹으로 올려 쳐 턱뼈가 빠지게 한 뒤, 손바닥 안에 쥔 자그마한 용수철을 그 처녀의 입에 넣었다. 순간 그 처녀의 입에 들어간 자그마한 동그란 용수철이 쫙 퍼지더니 그의 입이 고통스럽게 불어나 처녀는 몸부림쳤다. 이어 말뚝에 묶여서 총살당하는 것으로 송림제철소 학살 사건은 마무리 된다.
김정은의 스위스 유학 시절.
◇원산서 일어난 6군단 쿠데타 사건
황해 제철소 사건 이외에도 90년대 후반 북한 내부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1997년 11월에는 노동당 대외조사부 권희경 부장(전 주러 북한대사)이 러시아 KGB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처형된다. 또 같은 해에 노동당 농업담당 당비서 서관희가 식량난 책임을 물어 처형된다.
쿠데타 모의도 있었다. 1997년 청진의 제 6군단 장교와 보위부 직원들이 같이 김정일 축출 쿠데타를 기도하다 적발되어 집단 처형당하기도 했다. 극도에 불안에 빠진 김정일은 당시 서 사회안전부(현재는 인민보안성) 요원 2000명을 동원해 ‘사상검열 심화조’를 만들고 전국의 당·정·군 요원과 민간인 30,000명을 조사하고 이 가운데 6000명을 체포해서 숙청했다.
김정일 망명 공작은 이런 북한 내부 혼란 속에서 나왔다. 김대중 정부가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하지 않고 김정일 망명 공작을 실행했다면 남북한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런 역사의 가정은 위기에 빠진 김정은 정권과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있는 문재인 정부와도 연결된다.
그림을 그리는 김정은을 엄마 고영희가 지도하고 있다.sopulgo@jayoo.co.kr
[내용 요약]
-김정은 이모 고영숙 1998년 미국 망명, 외삼촌 2000년대 후반 고동훈도 유럽 망명
-김정은 북한표준으로 보면 불순분자 집안 태생
-김정일, 황장엽 망명과 황해제철소(98년 8월) 사건 등으로 실각 위기 몰려
-1999년 봄 워싱턴DC서 김정은 이모부, CIA주선으로 안기부 직원 만나 김정일 망명 제안
-CIA의 망명 제안, 김대중 정부 안기부 실행 안해
-실각 위기 김정일,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대북송금으로 기사회생
미국으로 망명해서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김정은의 이모 고영숙과 이모부 이강이 1차 남북정상회담 1년 전인 1999년 봄 김정일을 제 3국으로 망명시키려 시도했음이 드러났다. 김정일은 당시 황장엽 망명과 황해제철소 사건 등 식량위기와 내부 소요로 실각위기에 놓여 있었다. 당시는 김정일의 해외 망명설이 꾸준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픽=더스틴 최 기자
그러나 미국 CIA와 고영숙 부부의 이 같은 망명 제안을 당시 김대중 정부 안기부는 실행하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는 오히려 1년 뒤 김정일과 정상회담을 하고 대북송금을 하면서 해외 망명위기에 빠진 김정일을 기사회생시켰다.
김정일 망명 비화를 전한 미국 정보 당국 관계자에 따르면 망명 공작을 벌인 고영숙 부부는 남북정상회담에 나온 북한의 김정은이 스위스에서 유학할 때 이를 뒷바라지 한 인물이다. 북한 김정은의 생모 이름은 그동안 고영희로 잘못 알려졌으나 사실은 고용희 (1953∼2004)가 정확하다. 북한에서는 김정은이 백두혈통이라고 떠벌리지만 김정은의 외조부 고경택과 생모 고용희는 재일 교포였고 북송선을 타고 북한에 들어간 사람들이다.
일본 마이니치신문 2016년 6월 10일자에 실린 김정일 고영희 부부. 김정일의 세번째 부인으로 김정은을 낳은 고영희는 암으로 투병하다가 2004년 사망했다.
◇김정은, 백두혈통 아닌 불순분자 집안 태생
그리고 사실 김정은은 북한 표준으로 따지면 불순분자 집안의 자식이다. 김정은의 이모 고영숙(1958년 생)과 이모부 이 강(가명 박남철)은 북한이 싫어서 1998년 5월에 미국으로 망명했다. 외삼촌 고동훈(가명 박칠성, 1951년 생)은 동생이자 김정은의 생모인 고용희가 2004년 사망한 뒤 불안한 생활을 하다가 유럽 어느 나라로 (국가명 미확인) 가족을 대동하고 망명했다.
그는 박칠성이란 이름으로 스위스 베른 주재 북한 대사관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기도 했다. 김정은의 이모 고영숙과 이모부 이 강은 공식적으로는 김정일의 서기실(비서실) 소속이었다. 고영숙 부부는 1983년부터 1998년까지 15년 동안 스위스에서 근무했고 김정은의 스위스 베른 유학 시절에(1996-2001) 그를 뒷바라지했다.
2016년 워싱턴포스트와 인터뷰한 김정은의 이모 고영숙과 남편 리강 씨가 타임스퀘어 광장을 바라보고 있다. 워싱턴포스트 갈무리
1999년 봄에 한국의 국가안전기획부(2000년에 국가정보원으로 바뀜) 요원들이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 CIA 주선으로 김정은의 이모부인 이 강을 면담했다. 그 때 이 강은 한국 안기부 요원에게 “ 한국정부가 원한다면 북한의 독재자 김정일을 공작차원에서 해외망명을 유도하고 그를 북한으로부터 격리시킨 다음에 남북 통일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 원하면 자기가 적극 협력 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당시 김대중 정부는 이같은 망명공작을 실행하지 않았다.
김정은 이모인 고영숙 부부가 김정일 망명을 제안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김정일은 1997년 황장엽 망명과 식량난으로 인한 1998년 8월 황해제철소 사건 등으로 실각위기에 빠져있었다. 외신 등에 해외 망명설이 솔솔 흘러나오는 상황이었다.2015년 11월 초, 고영숙 씨의 남편 리강 씨(오른쪽)는 강용석 변호사(왼쪽) 사무실을 직접 찾았다. 일부 탈북자들이 방송에서 '리 씨 부부가 북한에서 수백만 달러를 가지고 도주해 얼굴을 성형 했다'는 등 자신들을 비방하고 있다고 법의 처벌을 의뢰했다.
먼저 황장엽 망명사건. 미국 정보 당국 관계자에 따르면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으로 노동당 내부에서 심각한 동요가 있었다고 한다.
◇황해제철소 민간인 학살사건
다음은 식량난이 한창이던 1998년 8월 황해북도 송림시에서 일어난 황해제철소(사건 당시 송림제철소)에서 인민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사건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을 목격한 탈북자 이춘구씨의 수기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김정은이 스위스 유학 중에 다니던 베른 인근의 사립학교.
식량난 당시 배급이 끊어져서 아사자가 속출하자 먹고 살 방법을 모색하던 중에 송림제철소의 지배인, 책임비서, 후방담당 부지배인, 업무담당 부지배인을 비롯한 회사 간부들이 제철소에서 생산되는 압연 철판을 중국에 팔아서 옥수수로 바꾸려고 했다.
실제로 제철소 후방 부지배인, 판매과장을 비롯한 간부 8명이 제철소 전용 어선으로 남포항에 나가 있는 배를 이용해서 압연 철판을 싣고 중국에 가서 옥수수로 바꾸었다. 옥수수를 싣고 온 배가 남포항 부두에 정박하는 순간에 평양 보위사령부 검열대가 나타나서 배에 타고 있던 일행을 전원 체포하여 포승줄로 묶어서 어디론가 끌고 갔다.
이들은 고문을 당한 후유증 때문에 걷지도 못하는 상태로 평양 보위사령부 검열대에 의해 송림시 공설운동장의 공개처형장으로 이송되었다. 명목은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를 위반하고 국가물자를 외국에 팔아먹는 국가반역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제가 먹자고 한 일도 아닌데 총살까지 시키는 건 너무합니다.”라는 주민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공개처형은 진행되었다. 당시 평양 봉화진료소에서 김일성의 담당 간호사였던 여자가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총살하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제철소 간부들이 위대한 장군님께 생산을 많이 하여 기쁨을 드리자는 일념으로 강냉이를 바꾸려 했는데, 방법이 틀렸으면 처벌을 주어야지 총살까지 하는 건 너무합니다. 총살당한 간부들이 노동자들을 먹여 일을 시켜보자고 했지, 제가 먹자고 한 일도 아닌데 이렇게 사형까지 하는 건 너무 무지막지 합…” 라고 말을 하자, 평양 보위사령부 검열대들은 그 여자도 현장에서 처형했다.
첫번째 공개 총살 다음날, 송림시 제철소의 노동자들은 “더 이상 간부들을 숙청하지 말라. 우리를 먹여 살리고 제철소를 위한 간부들의 행동은 잘못이 아니다”는 구호를 외치며 공장 구내 길에서 몇 천 명이 모여 앉아 밤을 세워가면서 농성을 하였다.
◇인민군, 탱크로 황해제철소 시위대 깔아뭉개
그 다음날 새벽 4시쯤 열댓 대 정도 되는 탱크와 트럭에 탄 수백 명의 인민군이 시위대를 진압하기 시작했다. 해산하라는 군대의 명령에도 시위대가 앉아서 버티자, 인민군은 총을 쏘고 탱크로 깔아뭉겠다.
제철소에서 학살이 있은 다음날, 사회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시위 주모자를 심판한다는 포고문이 사회안전부(현 인민보안성) 명의로 나붙었다. 이틀 후 송림시의 공설운동장에서는 폭동 주모자라고 하는 3명의 노동자들과 함께 또 한 명의 중학교 선생과 어린 처녀를 총살했다. 중학교 선생과 처녀의 죄명은 한 재일교포의 집에 들어가 녹음기를 훔쳤다는 것이다.
김정은이 스위스 베른에서 살았던 아파트형 주택. 이 집에서 그의 이모 고영숙이 정철, 정은, 여정 삼남매의 어머니 역할을 했다.
죄과라는 것을 읽고 총살에 처한다는 판결과 함께 두 명의 보위사령부 검열대들이 처녀에게 다가가서 턱을 주먹으로 올려 쳐 턱뼈가 빠지게 한 뒤, 손바닥 안에 쥔 자그마한 용수철을 그 처녀의 입에 넣었다. 순간 그 처녀의 입에 들어간 자그마한 동그란 용수철이 쫙 퍼지더니 그의 입이 고통스럽게 불어나 처녀는 몸부림쳤다. 이어 말뚝에 묶여서 총살당하는 것으로 송림제철소 학살 사건은 마무리 된다.
김정은의 스위스 유학 시절.
◇원산서 일어난 6군단 쿠데타 사건
황해 제철소 사건 이외에도 90년대 후반 북한 내부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1997년 11월에는 노동당 대외조사부 권희경 부장(전 주러 북한대사)이 러시아 KGB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처형된다. 또 같은 해에 노동당 농업담당 당비서 서관희가 식량난 책임을 물어 처형된다.
쿠데타 모의도 있었다. 1997년 청진의 제 6군단 장교와 보위부 직원들이 같이 김정일 축출 쿠데타를 기도하다 적발되어 집단 처형당하기도 했다. 극도에 불안에 빠진 김정일은 당시 서 사회안전부(현재는 인민보안성) 요원 2000명을 동원해 ‘사상검열 심화조’를 만들고 전국의 당·정·군 요원과 민간인 30,000명을 조사하고 이 가운데 6000명을 체포해서 숙청했다.
김정일 망명 공작은 이런 북한 내부 혼란 속에서 나왔다. 김대중 정부가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하지 않고 김정일 망명 공작을 실행했다면 남북한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런 역사의 가정은 위기에 빠진 김정은 정권과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있는 문재인 정부와도 연결된다.
그림을 그리는 김정은을 엄마 고영희가 지도하고 있다.sopulg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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