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07
한국신학/종교학 -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형성과 한국선교 동기 / 정병준 교수
한국신학/종교학 -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형성과 한국선교 동기 / 정병준 교수
허호익*.218.50.98http://theologia.kr/27699
*논문 전체는 파일 참조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형성과 한국선교 동기
정병준 (교회사, 호남신학대학겸임교수)
1. 머리말
한국교회사 연구에서 초기 선교사 중심주의 사관에서 벗어나 한국적 역사관을 수립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민족주의 사관, 민중사적 사관, 그리고 토착교회 사관 등, 다양한 학문적 접근이 시도되어 왔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 교회사 연구는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과 그들의 활동에 대한 보다 철저한 연구가 필요하다. 그 이유는 첫째, 아직도 한국사 초기 교회사 안에서 드러나지 않은 많은 이야기들이 선교사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초기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분석과 해석이 설득력을 지니게 되려면 실증적 검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셋째, 선교사들에 대한 연구는 크게 불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선교사들에 대한 연구는 어느 정도 진행되어 왔으나, 캐나다 선교부와 호주장로교 선교부에 대한 연구는 큰 발전이 없었다. 이것은 결국, 한국교회사 연구가 지역적으로 불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호주장로교선교부의 한국선교사역이 교회사연구에서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선교에 대한 연구의 대부분은 미국 선교사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미국선교사들은 다른 선교사들보다 일찍 한국에 왔고, 그 인적 물적 자원도 압도적으로 우세했고, 선교영역도 광범위했다. 게다가 한국 교회사를 연구한 학자들의 많은 수가 미국에서 훈련을 받았고 그들의 역사관과 사용한 역사자료들도 미국 중심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둘째, 서울 중심적인 역사이해가 경상남도에 기반을 두고 있는 호주장로교선교부 연구를 방해했다. 1950-1980년대에 이르는 동안 한국의 역사, 교육, 문화발전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위주의 정치권력 아래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회적 경험은 향토사 연구의 발전을 저하시켰다. 셋째, 한국교회와 호주교회 사이에 에큐메니칼 관계의 미성숙이 두 교회 사이의 학문적 교류에 어려움을 가져왔다.
지금까지 호주장로교선교부 사역과 관련된 연구는 다음과 같다: 한센병자선교회(The Mission to Lepers)의 직원이었던 멕커쳐(E. MacKerchar)가 편집한 「매켄지 목사 자서전(Rev. James Noble Mackenzie: An Autobiography」(1949), 한국선교사와 빅토리아장로교 해외선교위원회 총무를 지낸 에스몬드 뉴(Rev. Esmond New)가 쓴 간단한 전기 「한국의 의사: 찰스 매클라렌의 이야기(A Doctor in Korea: The Story of Charles McLaren, M.D.)」(1958), 역시 한국선교사 출신인 커(Miss Edith Kerr)와 앤더슨 목사(Rev. George Anderson)가 편집한 「호주장로교선교부와 한국선교, 1889-1941(TheAustralian Presbyterian Mission in Korea, 1889-1941)」(1970), 한국의 의료선교사였던 헬렌 매켄지(Dr. Helen Mackenzie)가 쓴 그녀의 부친의 전기 「선교의 사람, 제임스 노블 매켄지의 전기(Man of Mission, A Biography of James Noble Mackenzie)」(1955), 한국선교사 출신이며 훗날 디커니스 훈련학교의 교장을 지낸 캐서린 리치(Deaconess Dr. Catherine Ritchie)가 쓴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요…, 멜버른서 훈련받은 장로교 디커니스들의 이야기(Not to be Ministered Unto …, The Story of Presbyterian deaconesses trained in Melbourne)」(1998). 지금까지 호주 장로교선교부에 관한 학문적인 연구는 이상규 교수가 1997년도 호주신학대학에(Australian College of Theology) 신학박사 학위 논문으로 제출했던 “호주 장로교의 한국선교사역 연구, 1889-1941”(A Study of the Australian Presbyterian Mission Work in Korea, 1889-1941)이 있다. 훗날 이상규는 그의 논문을 발전시켜 한국어로 출판했다.1)
커와 앤더슨은 그들의 경험에 입각해서 선교활동을 개괄적으로 정리하고 소개했지만, 그 활동에 대한 분석과 신학적 평가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리치의 책은 디커니스 선교사들의 훈련 프로그램을 살피는데 아주 유익하지만, 한국선교를 직접 다루지 않았다. 매켄지 목사의 두 개의 전기는 매켄지 선교사 가족들의 편지와 일기 등의 소중한 자료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들은 한센병자 선교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의사 매클라렌의 전기는 너무 짧아서 그의 사상과 활동을 설명하는데 불충분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학문적 평가와 비평은 오직 이상규의 논문에서만 발견된다.
이상규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호주 장로교선교부의 선교활동에 대해 학문적인 연구의 장을 열었다는 점에서 큰 공헌을 남겼다. 그의 연구의 목적은 호주 장로교선교부가 경상남도 지역에서 교회와 사회의 발전에 기여한 공헌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이 연구는 비록 제도적인 측면에 편중된 느낌이 강하지만, 경남지역의 다섯 개 선교지부들―부산, 진주, 마산, 거창, 통영―안에서 이루어진 선교활동을 전도ㆍ교육ㆍ의료라는 전통적인 범주에 따라 끈기 있게 추적했다. 그의 연구의 핵심요소들 중에 하나는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항한 호주 장로교선교부의 공식입장을 소개한 것이다. 또한 이 연구는 일차자료와 이차자료를 발굴해 냄을 통해서 앞으로 이어질 이 분야의 연구발전에 길을 열어주었다.
이 글은 필자의 학위 논문의 첫 장을 발췌한 것으로,2)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가 탄생으로부터 한국선교를 수행하게 되는 동기를 설명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쓰여 진다. 이 주제는 이미 이상규 교수가 다루었던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앞의 연구에서 다루지 않은 새로운 연구결과를 소개하려는 것이고, 두 번째로 호주선교사들의 신학사상의 특징을 밝히려는 의도 안에서 관점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제 2장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복음주의 운동과 교회분열을 살피고, 호주 빅토리아 주 안에서 장로교회가 하나로 연합하는 에큐메니칼 관점을 부각시킨다. 그 이유는 이 연합과정이 빅토리아 장로교회가 신학적으로 복음주의적이면서 에큐메니칼적인 특징을 갖게 되는 첫 번째 단계이기 때문이다. 제 3장은 빅토리아 장로교회가 출발과 동시에 시작한 해외선교를 간단하게 언급함으로 그들의 복음주의적 특징을 보여준다. 제 4장은 빅토리아 장로교회가 한국선교에 관심을 돌리게 되는 계기를 제공한 최초의 한국선교사 헨리 데이비스 목사(Rev. Henry Davies)의 선교 동기를 밝힌다. 데이비스가 자신이 속했던 성공회를 떠나 장로교회 선교사로 이적하게 되는 배경에 대한 연구는 새로운 부분이다. 제 5장 역시 새로운 연구로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선교 지도자들이 어떤 선교적 동기를 가지고 한국선교를 지원했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러한 한국선교의 배경연구는 호주 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적 특성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으로 중요한 한 영역이 될 것이다.
2.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형성
성공회 복음주의자인 리처드 존슨(Richard Johnson)은 클래팜 분파(the Clapham Sect)로 알려진 초기 영국의 복음주의자들,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3)와 그의 동료들의 선교적 노력에 의해, 최초의 죄수 수송선의 목사(chaplain)로 선발되어 1788년 보터니 베이(Botany Bay)에 도착했다. 그들의 선교 동기는 국내외에서 “전도”와 “사회개혁”이었다.4) 이렇게, 초기 호주기독교는 브리튼으로부터 이민과 그를 통해 이식된 복음주의 기독교로부터 출발했다.
“복음주의”(Evangelicalism)는 1730년대 이후 브리튼과 그 식민지들 안에서 부흥운동과 각성운동을 통해 성장한 “지속적인 신념과 태도”를 동반하는 “개신교 대중운동”이다.5) 이것은 서로 다른 신학전통과 방향성을 포용할 수 있는 대단히 복잡한 종교현상이다. 예를 들면, 복음주의는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안주의, 국가교회와 자발주의 교회들, 공화주의자들과 왕정주의자들, 지성주의자들과 반지성주의자들, 그리고 성직 계서제도(階序制度)와 개인주의를 포괄하고 있다.6)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는 공통의 신념과 태도를 가지고 있다. 데이비드 베빙톤(D. W. Bebbington)은 그 공통성을 ⑴ “회심주의”(conversionism)-삶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믿음, ⑵ “활동주의”(activism)-노력으로 복음을 표현, ⑶ “성경주의” (biblicism)-성경에 대한 특별한 존중, ⑷ “십자가 중심주의”(crucicentrism)-그리스도의 대속(代贖) 희생에 대한 강조,7) 네 가지로 설명한다. 호주의 역사학자 스튜어트 피긴은 “복음주의”의 일반적 특징들을 “말씀”(Word), “성령”(Spirit), “세상”(World)의 세 가지의 요소의 결합관계로 제시한다. 피긴과 베빙턴의 복음주의 이해를 거칠게 비교해 보면, “말씀” 요소는 “성경주의”ㆍ“십자가 중심주의”와 관련되고, “성령” 요소는 “회심주의”와 “세상” 요소는 “활동주의”와 관련된다. 피긴은 호주 복음주의 역사를 분석한 후, 건강한 복음주의를 유지하는 길은 “복음주의적 통전성을 이루는 세 가지 요소들 중의 어느 한 가지 만을 강조하지 않는 것”이라고 결론을 맺었다.8)
“복음주의”는 영어권 국가들 사이에서, 서신교환, 인적교환, 대중시장과 종교적인 출판문화의 발전을 통해, 국제적인 연락망을 형성했다. 복음주의자들은, 문화형성세력으로서, 새로운 양식의 종교사상과 경험을 제공했다. 그들은 국민의 도덕적 복지(well-being)를 이룩하는 것을 자신들의 신앙적 의무로 확신하면서, 정치영역에서 그리고 공공가치를 형성하는데 건설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특히, 그들은 노예제도 폐지운동과 참정권 개혁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신앙인의 최고의 봉사는 해외선교라고 믿으면서 수많은 선교회를 조직하고 지원하는데 열심을 다했다.
초기 호주 기독교는 또한 이민을 통해 형성되었다. 장로교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가톨릭은 아일랜드, 성공회와 감리교는 영국과 웨일즈에서 이식되었다. 다양한 교파의 이민은 민족적 인종적 다양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하나의 민족국가를 형성해 가는 호주사회 안에서 큰 걸림돌이 되었다. 특별히 장로교회는 스코틀랜드 안에서 분열된 형태로 호주 식민지들 안에 이식되었다. 따라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분열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은 필수적이다.
‘명예혁명’이 성공한 이후, 1690년 6월 9일 스코틀랜드 의회는 장로교주의(Presbyterianism)를 스코틀랜드 교회의 유일한 정치제도로 재확립했다. 1707년 1월 16일 영국과 스코틀랜드가 병합할 때 기초가 된 ‘연합법’(the Union Act)은 스코틀랜드 왕국 안에서 장로교주의가 교회정치의 유일한 형태가 되는 것을 보장하고 있었다.9) 그러나 1710년 선거에서 주도권을 잡은 왕당파 토리당(the Tories)은 비국교도(Dissenters)들을 탄압했고, 스코틀랜드의 감독주의자들을 장로교 치리로부터 독립시키는 ‘관용법’(the Toleration Act)을 통과시켰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의회가 ‘교구목사선택권’(Patronage)을 회복시킨 것이었다. 이것은 목사가 빈 교구에 새로운 목사를 임명하는 권한을 부유한 토지소유자들인 평신도 유지들(patrons)에게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볼 때, ‘연합법’에서 이미 보장되어 있던 장로교 정치를 심각하게 위반한 것이었다. 이것은 곧 지속적인 교회분열의 핵심원인이 되었다.
‘교구목사선택권’에 반대하면서 1733년과 1761년 국가교회로부터 두 번의 분열이 일어났고 분리교회(the Secession Church)와 구원노회(the Presbytery of Relief)가 생겼다.10) 분리교회는 1747년에 ‘시민파’(Burgher)와 ‘반시민파’(Anti-burgher)로 분열되었는데, 시민파는 시민에게 요구되는 맹세의 합법성을 승인했지만, 반시민파는 맹세를 인정하면 국가의 교회 간섭을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했다. 그 후에 시민파와 반시민파는 각각 1799년과 1806년에 ‘새빛파’(New Licht)와 ‘구빛파’(Auld Licht)로 분열되었다. 이번의 분열은 신학적인 것이었다. 새빛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안에서 교회업무에 대한 국가공무원의 책임을 삭제할 것을 주장했고, 반면, 구빛파는 그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변경 없이 수용하는 보수적 입장이었다. 시민파출신의 구빛파는 1837년 스코틀랜드 국가교회에 재합류했다. 두 개의 새빛파 그룹들은 1820년에 ‘연합분리교회’(the United Secession Church)를 이루었다. 연합분리교회와 구원 시노드(the Relief Synod)는 1847년에 연합장로교회(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를 세웠다. 연합장로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국가의 교회지원을 반대하는 자발주의 원칙에 철저한 것이다.
18세기 말, 스코틀랜드 국가교회 안에서 정치적으로 보수적이며 ‘교구목사추천권’을 옹호하는 온건파들(the Moderates)과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정치적 대립이 심각했다. 1834년 복음주의자들이 다수를 이룬 스코틀랜드 장로교총회는 두 개의 교회법, ‘거부권행사법’(Veto Act)과 ‘채플법’(Chapel Act)을 통과시켰다. ‘거부권행사법’은 ‘교구목사선택권’의 남용을 제한하려는 법안이었다. ‘채플법’에 대해서는 간단한 설명이 필요하다. 19세기 초, 스코틀랜드 국가교회 내부의 복음주의자들은, 산업혁명 이후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영적으로 보살피기 위해, 토마스 찰머스(Dr. Thomas Chalmers)의 지도아래 건축이 편리한 채플을 공급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채플법은 채플에 속한 목사와 장로에게 노회원 자격을 부여했다. 이를 계기로 복음주의자들은 교회 안에서 보다 더 큰 정치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교회의 온건파들과 정부의 영향력 아래, 스코틀랜드 대법원(the Court of Session)은 1838년과 1842년에 각각 ‘거부권행사법’과 ‘채플법’을 모두 불법으로 규정했다. 복음주의자들은 이에 반발해서 1843년 5월 총회에서 스코틀랜드 국가교회로부터 탈퇴하여 스코틀랜드 자유교회(Free Church of Scotland)를 형성했다. 국가교회 구성원의 삼분의 일과 451명의 목사들이 자유교회에 가입했다.11)
1844년, 스코틀랜드 국가교회를 계승한 호주 시노드(the Synod of Australia)12)는 국가교회와 자유교회 사이에 중립을 선언했고,13) 국가의 교회간섭을 반대했다. 그러나 소수의 자유교회의 지지자들은 제임스 폽스(James Forbes, 1823-52)의 지도로 1846년 호주 자유교회 시노드를 결성했다. 1850년 램지(A. M. Ramsay)의 지도 아래 빅토리아 연합장로교회 시노드가 구성되었다. 이렇게 빅토리아 주 안에는 분열된 장로교회가 정착되었다.
1851년 7월 1일 빅토리아 주는 뉴사우스웨일스로부터 분립해서 새로운 주가 되었다. 그로부터 6주 후, 빅토리아 주에서 금광이 발견되었고,14) 멜버른은 급성장했다. 1890년까지 멜버른은 호주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산업, 교육, 무역,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골드러시(gold-rush)는 빅토리아 주에 부(富)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또한 급속한 인구증가, 교육문제, 도덕적 타락, 전통가치체계의 파괴와 같은 많은 사회문제를 가져왔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해, 빅토리아의 장로교회들은 스코틀랜드 모교회들에게 긴급하게 목사를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교회분열 이후, 국가교회는 사람이 부족했고 자유교회는 돈이 없었다. 목사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빅토리아 장로교회는 연합장로교회와 아일랜드 장로교회로부터 목사를 충원했고, 비 장로교목사를 포함해서 영국과 웨일즈에서도 목사를 받아드렸다.
그 당시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약화는 모교회로부터의 증원의 어려움과 불필요한 분열 때문이었다.15) 실재로 ‘교구목사 선택권’과 ‘거부권행사법’은 스코틀랜드의 문제였지 호주의 문제가 아니었다. 호주 안에서 장로교회의 분열은 자신들의 상황을 무시한 모교회에 대한 충성심의 표현에 불과했다. 장로교회들의 분열된 모습은 복음증거에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그 사회 안에서 자신들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호주 식민지 안에서 장로교 연합은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분열 상태를 견딜 수 없었던 평신도들에 의해서 촉진되었다. 빅토리아 주에서 장로교 연합이 최초로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큰 스코틀랜드 출신 평신도들이 교회일치를 강력하게 지원했기 때문이다.16)
1852년 빅토리아 연합장로교회는 빅토리아 자유교회에 교회연합의 의사를 전달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교회의 일부 목사들이 주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협상에서 물러섰다.17) 1854년 4월, 빅토리아 시노드는 자유교회를 접촉했다. 양 교회는 연합을 준비하면서 연합장로교회와 접촉을 시도했다. 자유교회의 존 테이트(John Tait)가 작성한 ‘연합의 기초’(the Basis of Union)가 빅토리아 시노드에 의해 수용되었다.
그러나 연합장로교회는 영적인 문제에 대한 국가공직자의 권한을 언급하는 항목에 수정안을 요청했다. 그러나 자유교회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 후 장로교 연합은 오랫동안 연기 되었다. 1859년 4월 7일 새로운 연합의 기초에 근거해서 세 교회는 연합하여 빅토리아 장로교회를 탄생시켰다. 자유교회의 잔존파들은 1867년 두 명의 반대자만을 남기고 연합에 참여했다. 1870년 정부보조금의 폐지이후, 연합장로교회의 잔존파들은 공식적으로 1875년에 합류했다.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연합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연합(1929) 보다 훨씬 일찍 이루어진 것이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호주의 정치와 사업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말콤 프랜티스(Malcolm Prentis)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⑴ 상식철학(Common sense philosophy)에 기초를 둔 스코틀랜드 교육은 그들을 “자금을 다루는 일에 융통성 있고 실천적인 사람으로, 그리고 논리적인 연설자”로 만들어 주었다. ⑵ 그들의 민족 정체성과 문화는 신중하고 완고하게 원리를 추구하도록 했고 개인주의를 발달시켰다. ⑶ 웨스트민스터 의회에서 정치적 소수자로서의 겪은 스코틀랜드인들의 경험은 그들이 정치적 권한에 민감하도록 만들었다. ⑷ 장로교 정치는 “그 교인들 속에 민주주적 성향”을 산출했다. 1788-1900년 사이 호주의 백만장자들의 대다수가 스코틀랜드인들이거나 그들의 후손이었다.18)
특히, 빅토리아 장로교회는 “빅토리아 주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하고, 목소리가 크고, 영향력이 큰 교회였다.”19) “주요 장로교회들은 대목장 주인, 은행가, 전문인들―그들 중의 일부는 유력한 정치 지도자들―이 출석했고 그들의 후원으로 건축되었다.”20) 빅토리아 장로교회는 목사를 청빙하고 자신들의 목사들을 훈련하는 일에 있어 호주 안에서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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