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20
장수좋은마을 | 분노와 증오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세상의 정의를 실현해 간다(극기복례) - Daum 카페
장수좋은마을 | 분노와 증오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세상의 정의를 실현해 간다(극기복례) - Daum 카페
분노와 증오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세상의 정의를 실현해 간다(극기복례)| 고전의 향기
이남곡|조회 291|추천 0|2011.09.12. 16:44
공자의 대표적 사상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아마 초등학생도 인(仁)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인(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공자 스스로도 인(仁)을 정의하듯이 이야기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과의 문답을 통해 다양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제자 안회와의 문답이 논어 12편에 나오는데 가장 대표적인 설명의 하나가 아닌가 한다.
여기서 공자는 ‘극기복례가 곧 인(克己復禮爲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말은 많이 귀에 익은 말이다. 그러나 그런 만큼 그 참뜻을 이해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요즘 ‘극기훈련’을 많이들 한다고 하는데, 잘 참지 못하는 요즘 세대에게는 ‘참는 훈련’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절대빈곤이나 독재가 지배하던 시절에는 싫어도 참아내야 할 일이 많았지만 경제가 성장하고 민주화가 진척되다 보니 높아진 자유도(自由度)에 반비례해서 참아내는 힘이 너무 없다.
연세 많으신 분들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자식들에게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참아내라’는 충고를 많이 하시는데 젊은이들의 참는 힘이 적은 것도 있지만 그 분들의 관념 속에는 ‘참는다’는 것이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싫다고 생각하는 것도 ‘참고 이겨내는 것’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극기’(克己)를 그저 ‘참고 이겨내는 것’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공자가 말하는 진정한 극기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극기는 절사(絶四)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무의(毋意), 무필(毋必), 무고(毋固), 무아(毋我)의 네 가지 끊음을 통해 극기란 결국 ‘무아집’으로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참아야만 하는’ 부자유의 세계가 아니라 ‘참을 것이 없는’ 자유의 세계인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극기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복례(復禮)도 극기와 따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된다. 복례를 ‘사람 사이에 지켜야할 바람직한 행위규범에 따라야 한다’라는 식으로 생각하기 쉽다. 물론 ‘하고 싶지 않아도 참고 다른 사람을 생각해서 행동거지를 예에 맞게 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부자유가 있을 수 있다. 즐겁지 않은 것이다.
공자가 여러 곳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예를 즐긴다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가 즐거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딱딱한 규범의 세계가 아니라 ‘아집’을 넘어설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사이좋음’인 것이다. 즉, 극기복례는 ‘아집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과 사이좋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지향하는 본연의 모습인 것이다!
아집을 넘어선다는 것은 사람이나 일에 대해서 참는 것(忍)으로부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임(恕)으로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분노와 증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높아진 자유도에 비추어 볼 때 공자의 ‘극기복례’는 최고의 목표로 삼을만한 것이다.
일일극기복례(一日克己復禮) 천하귀인언(天下歸仁焉)이라는 말은 깊은 감동을 준다.
분노와 미움에 휘둘리지 않는 평정한 마음으로(克己) 세상의 부조리와 부정의를 바로잡아 건강하고 정상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復禮). 하루라도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증오와 분노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천하가 인(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세상이 진보하는 길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 시대의 진정한 혁명가인 것이다.
극기(克己) 즉 아집을 넘어서는 인격의 성숙과 복례(復禮) 즉 정상적이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일이 하나인 것이다.
인(仁)은 자기로부터 말미암은 것(爲仁由己)이지 다른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인을 원하기만 하면 그 인이 이르러 온다(我欲仁 斯仁至矣)’라는 말과 통하는 것이다. 가장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삶이다. 실제로 해보면 바로 증명되는 삶이다.
좌측 깜박이를 넣고 있는 차를 위해 잠시 차를 세우는 것만으로도 그 근방에 인(仁)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남을 배려하고 남에게 양보하는 따뜻한 말이나 행위 하나가 사회적 공기를 바꿔놓는 것이다.
예가 아니면 보지말고(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非禮勿聽),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動)는 말도 잘못 읽으면 비례(非禮)에 대해서 오불관하는 식의 소극적 은둔적 사고방식으로 읽기 쉽지만,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자기로부터 비례(非禮)를 범하지 않는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실천과제인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근본적으로 사회의 부조리나 부정을 시정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먼저 자기로부터 ‘인’을 실현하여 천하의 ‘인’을 실현해가는 것이다. 자기변혁과 세계변혁이 하나로 되는 것이다.
외부 세계를 변화시키는 능력에 비해 자신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많이 뒤떨어지는 것이 가장 큰 테마로 되고 있는 지금, 진정으로 세상의 진보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극기복례(克己復禮)의 현대적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댓글 5
0
카카오스토리트위터페이스북
스크랩0카페블로그메일인쇄|신고
不筆(태원) 11.09.12. 17:36
현세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제일 필요한 덕목이라 생각됩니다.
신고
이치형 11.09.12. 18:10
내 자신의 내면세계에 내재되어 있는 것들의 극기가 최대의 숙제인 것 같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신고
봄맞이 11.09.13. 09:54
멈춰 서서 지금 제 자리를 봅니다. 흐트러진 맘을 조금이나마 정리하고 갑니다. 건강하십시요.
신고
이노 11.09.13. 22:45
사회 변혁과 개인의 성찰 중에서 후자에 중점을 두시는 선생님의 의견을 존중하지만, 최소한의 생존적 여건마저도 박탈당한 채 거리를 떠도는 고난한 민중들의 삶에서 보자면 관념적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 중에 어는 것이 선결적 과제이냐에 대한 질문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르겠고 또한 저 개인적으로도 후자의 선행이 맞을 듯싶으나 사회 전체적으로 조망해보자면 사회 변혁의 선제적 실행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추석 명절 잘 쇠십시요.
신고
매봉 11.09.28. 17:11
사회변혁을 주도해야할 집단이 무아의 경지까지 도달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 방법도 평화적이고 폭력을 배제한 간디나 톨스토이식의 방법이 아니고는 개혁을 성공할 수 있을까요.우선은 나부터 변해야하고 즐겁지만 치열한 실행이 따라야겠죠.그냥 쓰고싶어 한 줄 쓰네요.다들 평화와 건강과 웃음이 가득한 좋은마을이 되길 염원합니다.
Subscribe to:
Post Comments (Atom)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