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06

주제로 본 한국사 | 우리역사넷 잡록(雜錄)⋅필기(筆記)류 자료를 통해 본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1. 양반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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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과 대한제국의 개혁과 좌절
잡록(雜錄)⋅필기(筆記)류 자료를 통해 본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2. 중인의 삶
3. 평민의 삶
4. 천민들의 삶
5. 특수층의 삶



형정풍속도(刑政風俗圖)를 통해 본 조선의 형정(刑政)
한반도 신탁 통치안



1. 양반의 삶


1) 관료가 되는 길


1) 관료가 되는 길



양반(兩班)이 언제부터 하나의 특권층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양반은 처음에는 법제적인 신분이 아니었지만 점차 신분처럼 변해 갔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신분이었던 것은 아니다. 양인(良人)이라면 누구든 양반이 될 수 있는 길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양반이 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과거(科擧)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과거는 또한 양반층이 자신들의 신분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었다. 안정복(安鼎福)의 부친 안극(安極)은 후손들에게 남긴 유서(遺書)에서 가문이 계속해서 과거를 통해 가문의 명성을 유지해 왔는데 자신은 과거에 합격하지 못해 선대를 드러내지 못했다며 자책하였다. 양반이 되기 위해, 양반으로 남기 위해 많은 이들이 과거에 매달렸다. 성대중(成大中, 1732~1809)은 과거의 속성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사료 1-1-01〕

이익이 많은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그로 인한 해로움을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는 양반만큼 이점을 누리는 것이 없다. 그래서 양반이 될 수만 있다면 패가망신도 각오하였으므로 과거로 인해 패가망신한 자가 많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패가망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더욱 과거에 매진하였으니 큰 이익이 있기 때문이었다.

성대중(成大中, 1732~1809), 『청성잡기(靑城雜記)』 권4, 「성언(醒言)」

특권층인 양반이 되기 위해 과거에 모든 것을 거는 풍조를 비판하고 있다. 풍수가로 잘 알려져 있던 남사고(南師古, 1509~1571)는 퇴계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당시 유현들에게 추앙을 받았던 인물이다. 남사고 같은 인물은 과거에는 관심이 없었을 것처럼 생각되지만 의외로 그도 늘그막에 이르기까지 과거를 포기하지 못해 계속 응시하였다고 한다.

조선 시대 과표(科表) 모음집
안정복이 과거 시험 답안의 하나인 과표를 모아 만든 책으로 당대인들의 과거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소장 : 국립중앙도서관)자료 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전시(http://www.nl.go.kr/exhibition/) > 종료된 전시보기 > 실학자의 서재, 순암 안정복의 책바구니 > II. 순암 안정복의 독서 바구니 > 과거 준비의 흔적과 선집 (▼ 과표 科表, 안정복 초 / 필사본 / 1책 : 23.1 x 14.2 cm / 청구기호 : 古朝26-10)

양반 가운데는 과거를 요식 행위처럼 삼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다음 자료는 허구적인 내용일 가능성이 크지만 과거와 관련된 당시의 풍조를 보여 준다.


〔사료 1-1-02〕

한 시골 선비가 식년을 당하여 과거 길을 걱정하자 그의 노비가 말했다. “생원님,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생원이 말하기를 “가난한 양반이 또 과거볼 때가 되었으니 어찌 걱정이 안 되겠느냐?”하였다. 노비가 말하기를 “과거 때마다 생원님이 행차를 하면 노마(奴馬)의 비용이 적지 않은데 구차한 살림에 마련하기 어려울 것이니 금년 과장에는 소인이 대신 가겠습니다. 그러면 이름 적는 시험지와 노잣돈만 필요할 뿐 그 외 다른 경비는 크게 줄 것입니다.”하였다. 선비가 “네가 어찌 양반의 일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꾸짖자 노비가 말하기를 “다리 밑에 시험지 버리는 일을 어찌 모르겠습니까?”하였다.

장한종(張漢宗, 1768~1815), 『어수신화(禦睡新話)』

실력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과거에 응시하는 양반층에 대한 풍자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에도 들어 있다. 매번 향시에는 합격을 하는데 회시에 합격하지 못하는 시골 양반이 또 회시를 보러 가려고 하자 노비가 자신이 대신 가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실력이 있든 없든 조선 시대 남성들에게 과거 응시는 일상이었다.

과거는 소과(小科)라 부르는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기만 해도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지만 과거의 꽃은 역시 문과(대과) 급제였다. 같은 문과 급제라도 소과를 거쳐 문과에 합격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였다. 과거에 따라 소과(小科) 없이 바로 대과(大科)만 치르는 시험도 있었기 때문에 소과(小科)에 합격하지 않고도 문과에 급제할 수는 있었다. 물론 소과를 거치지 않고 바로 문과에 합격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는 다음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료 1-1-03〕

세상에서 유학(幼學)으로 문과 급제한 이를 비렴(飛簾)이라 하는데, 그 뜻은 자세하지 않다. 혹자는 말하기를 ‘생원이나 진사를 거치지 않고 급제한 이를 세상에서 희귀하게 여겨 급제자를 발표한 뒤 유가(遊街)할 때 사람들이 발을 걷고 구경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심수경(沈守慶, 1516~1599), 『견한잡록(遣閑雜錄)』

하지만 소과(小科)를 거치지 않고 문과에 급제한 이들은 소과와 대과를 모두 합격한 이들에게 약간 무시를 받았다. 심재(沈 , 1722~1784)의 『송천필담(松泉筆談)』에는 그를 보여 주는 일화 한 편이 들어 있다.


〔사료 1-1-04〕

상국 유척기(兪拓基)와 상서 조관빈(趙觀彬)은 둘 다 신미년(1691)에 태어났고 갑오년(1714) 증광시에 동방(同榜)으로 급제하였다. 방이 내걸리던 날 함께 궐문을 나서는데 유 공이 마침 조 공의 앞자리에 있자 조 공이 그를 부르며 말하기를 “유 모(某)는 사대부로 과거에 오르면서 어찌 홍패 하나를 가지고 앞에서 가는가? 내가 두 개의 백패와 하나의 홍패를 천(川) 자로 나란히 세우고 있는 것을 보게나.”라고 하자 유 공이 자못 머쓱해졌다.

심재(沈 , 1722~1784), 『송천필담(松泉筆談)』

조관빈이 진사시와 생원시에 모두 합격하고 문과까지 급제하였음을 내세우자 유척기는 기가 한풀 꺾였던 것이다. 소과와 대과에 모두 합격했다고 해서 승진에 더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조관빈과 유척기의 경우만 보더라도 조관빈은 대제학과 판서에 그쳤던 반면 유척기는 영의정에 올랐다. 과거는 관료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지만 학문적 능력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했던 것이다. 김상복(金相福, 1714~1782)은 소과에 급제하지 못하고 곧장 대과에 급제하여 지위가 영의정에 이르렀지만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면 늘 소과에 급제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사림으로 유명한 김안국(金安國, 1478~1543)도 진사시에 장원을 하였지만 생원시와 진사시 모두 장원이 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러한 분위기를 생각하면 이이(李珥, 1536~1584)가 생원시와 진사시를 비롯한 각종 시험에 응시하여 여러 차례 합격하여 ‘구도장원(九度壯元)’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김홍도, 「모당평생도」 중 응방식(應榜式)
김홍도가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 1549~1615)의 일생을 그린 그림 가운데 하나로 과거에 급제하여 삼일유가(三日遊街)하는 장면이다.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자료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 주제별 문화원형 > 회화 > 풍속화 콘텐츠 > 모당평생도 응방식

이이처럼 여러 차례 과거에 장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실제 과거에 급제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조선 시대의 1년 평균 문과 급제자 수는 3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응시하는 사람은 많은 데 반해 합격자 수는 적었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하였다. 그래서 벌어지는 과장(科場) 풍경 가운데 하나가 시권(試券), 곧 답지를 먼저 내려는 다툼이었다. 답안지가 너무 많아 일일이 채점하기 어려워 먼저 낸 사람들 위주로 점수를 매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심노숭(沈魯崇, 1762~1837)은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세태가 각박해져 답지를 먼저 내기 위한 다툼이 심해졌다며 자신의 경험담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사료 1-1-05〕

지난 갑인년(1794) 춘도기(春到記) 대궐 시험장에서 두 사람이 내 옆에 같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갑은 문장이 제법 좋았고 을은 그렇지 못하였는데 을이 주위에서 노복처럼 시중을 들고 있었다. 갑이 답안을 다 쓰고 일어나 제출하려고 하자 을이 “자네 시권은 내가 제출할 테니 자네는 나를 위해 내 시권을 마저 써서 제출해 주게나.”라고 하였다. 시권을 제출하면 바로 나가는 것이 규칙이었기 때문이다. 갑은 을의 말을 무시하고 자리를 둘둘 말아 훌훌 털고 나가버렸다. 을은 겸연쩍어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앉아 있었다. 마침 나는 시권을 거의 다 썼기에 “급한 불을 끄는 데 친소(親疏)를 따질 것 있나요? 내 시권을 제출하시오. 내가 그대를 위해 힘을 써보겠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을은 크게 기뻐하면서 시권을 가지고 나갔다.

심노숭(沈魯崇, 1762~1837), 『자저실기(自著實紀)』

심노숭은 두 사람이 모두 소론 명문가의 자제로 아주 가까운 인척 사이인데도 그러하였다며 인심이 각박해지는 현실을 탄식하였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심노숭이 과거 부정에 해당하는 행위를 인정 차원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식인들이 과거 부정에 얼마나 무감각하였는지 잘 보여 준다.

김홍도, 「공원춘효도(貢院春曉圖)」
과거 시험장의 풍경을 묘사한 그림으로 윗부분에는 강세황(姜世晃)이 쓴 제발(題跋)이 있다.
(소장 : 미국 개인 소장가)자료 출처 ▶ 〈서울신문〉, 2007년 4월 12일, 26면 > 문화 > 김홍도 ‘과거시험장’ 첫 공개

과장에서의 부정행위는 조선 전기에도 많이 일어났다. 명종(明宗, 재위 1545~1567) 때 외척 권신 이량(李樑)의 아들인 이정빈(李廷賓)은 표절로 장원을 하고도 요직을 차지하자 공론이 일어나 삭직을 당하였고, 여계선(呂繼先)이라는 이는 차천로(車天輅)의 글을 표절하여 장원했다가 탄로나 국문을 당하고 과거 합격이 취소되기도 하였다. 과거 부정은 후대로 갈수록 심해져 돈을 받고 답안을 대신 지어 주는 일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경상남도 합천군의 유광억(柳光億) 같은 이는 과시(科詩)를 잘하기로 영남에서 소문이 났는데 서울에까지 이름이 알려져 큰돈을 받고 대리 시험을 치러 여러 사람들을 합격시켰다고 한다.

과거가 엄격하게 관리되지 못하자 함량 미달인 자들이 과거에 급제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 심재는 대제학이나 정승⋅판서의 반열에 오른 이들을 보면 문장 실력이 소과에 합격하지 못한 이름 없는 선비 정도이면서도 거듭 벼슬에 오르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하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부정한 방법을 쓰지 않고 낙방한 것이 칭송 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척화파 대신 김상헌(金尙憲)의 손자 김수증(金壽增)이 그러한 경우였다.


〔사료 1-1-06〕

근래 경외 유생들이 대소 과장(科場)에서 대개 구차한 일을 면치 못하여 간혹 의심스럽다는 시비를 많이 듣게 된다. 그러나 김수증만은 상국(相國) 청음의 손자이며 영의정 김수흥과 김수항 두 사람의 형인데 그 글을 읽은 것이나 착실한 공부가 범상한 선비에 비교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과거를 보러 가서는 시험관의 취하고 버리는 데만 맡기고 한 번도 시속(時俗)의 구구한 짓을 아니 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붉은 종이 위에 이름 쓰는 것을 얻지 못하였다. 하지만 분수를 편안하게 여기고 한가하게 살면서 오직 문집과 사기를 읽으며 글쓰기와 그림 그리는 것으로 혼자 세월을 보내니 세상 사람들이 그의 인격이 청백하고 지조가 높은 것을 탄복하였다.

정재륜(鄭載崙, 1648~1723),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

과거가 관료 선발 장치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가운데 한편으로는 음서(蔭敍)가 성행하였다. 고려에 비해 조선에서는 음서제의 비중이 크게 약화된 것이 사실이다. 고려 시대의 경우 5품 이상 관리의 친속(親屬) 1인에 한해 과거를 보지 않고 음서를 통해 관리가 될 수 있었던 데 반해 조선 시대에는 공신 및 2품 이상의 친속을 대상으로 하였다. 대상도 축소되었지만 음서 자체에 대한 인식에도 차이가 있었다. 즉 고려 시대의 음서는 대단히 권위 있는 제도였지만 조선 시대에는 과거가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 때문에 조선 시대에는 음서제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자료에 나타나는 상황은 그러한 추측과는 다르다.


〔사료 1-1-07〕

당하관이 맡은 관직으로 정부(政府)⋅양사(兩司)1)⋅사관(四館)2) 및 이조⋅병조⋅예조 등 3조와 태상(太常)3) 외에는 모두 문음(門蔭) 출신을 임명한다. 지방관에 이르러서는 문관으로 군수 자리를 얻은 사람은 겨우 스물에 하나 정도이니 선왕 때와는 크게 다르다. 이른바 문인이라는 것은 이름난 인사의 아버지나 형이 아니면 반드시 자식이나 아우이다. 그러니 혹 나이가 이미 늙었거나 혹 아직 젖 냄새 나는 아이이다. 그런데도 함부로 고을 다스리는 일을 탐내 문득 돈을 움켜잡으려 손을 제멋대로 놀려서 백성들의 고혈이 이미 말랐는데도 오히려 더 빼앗아 원망이 떼 지어 일어나도 돌아보지 않는다.

고상안(高尙顔, 1553~1623), 『효빈잡기(效嚬雜記)』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 대 당시의 상황을 지적한 것인데 『효빈잡기』의 저자 고상안은 내직과 외직을 막론하고 문음 출신들이 판을 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고상안은 선조(宣祖, 재위 1567~1608) 때는 그렇지 않았지만 광해군 대에 들어 과거제가 크게 문란해지고 문음이 성행하였다고 지적하면서 능력 없는 문음 출신들의 탐학 때문에 백성들이 큰 해를 당하고 있다고 탄식하였다.

조선 후기에도 음서제는 문벌을 재생산하는 장치로 여전히 기능하고 있었다. 때문에 1788년(정조 12) 장령 오익환(吳益煥, 1754~1797)은 권세가의 자제들은 문음으로 벼슬에 올라 시간이 지나면 승진하여 지방관으로 나가는 데 반해 과거에 급제한 이들은 집안이 좋거나 연줄이 있지 않으면 관직에 기용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1) 사헌부와 사간원
2) 성균관⋅교서관⋅승문원⋅예문관
3) 고려 후기와 조선시대에 국가적인 제사 및 시호 제정 관련 업무를 관장하던 봉상시(奉常寺)의 다른 이름

2) 관료 생활의 이모저모


2) 관료 생활의 이모저모



과거에 합격하면 관료 생활이 시작된다.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문과 출신과 무과 출신 사이에는 처우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다. 문(文)에 비해 무(武)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인식이 팽배한데다가 무과의 경우 조선 후기로 가면서 수천 명 내지 만 명 이상을 선발하는 만과(萬科)가 시행되면서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기 때문이다. 다음 자료는 문관과 무관의 지위 차이를 잘 보여 준다.


〔사료 1-2-01〕

“청원부원군 김시묵(金時黙, 1722~1772)이 병조판서가 되어 병마절도사 장지풍(張志豊, 1732~1770)을 불러 금군장으로 발탁했는데 찾아가 인사하는 것이 매우 늦었다. 김 공이 그 사실을 보고하자 임금은 병조에서 알아서 다스리라고 명령하였다. 김 공이 병조에 앉아 곤장을 잡고서 “곤장을 스스로 자초했으니 부끄럽지 않은가?”라고 하자, 장지풍이 머리를 쳐들고서 “무관의 볼기짝은 개 볼기짝과 다를 게 있나요?”라고 하였다. 김시묵도 무관의 아들임을 지적한 것이다.

심노숭(沈魯崇, 1762~1837), 『자저실기(自著實紀)』

병조판서는 정2품, 병마절도사는 종2품이다. 품계상으로 보면 김시묵이 상관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인사가 늦었다는 이유로 병마절도사의 곤장을 친다는 것은 과도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장지풍의 집안은 장지풍은 물론 그의 조부와 부친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던 이름 있는 무반 가문이었다. 장지풍의 이야기처럼 김시묵의 부친 김성응(金聖應)은 무과 출신이었다. 그런데도 김시묵은 문과 출신이었기 때문에 장지풍에게 위세를 부렸던 것이다. ‘무반의 볼기짝은 개 볼기짝’라는 장지풍의 자조 섞인 탄식이 조선 시대 무관의 처지를 잘 보여 준다.

관원들은 관료 생활을 시작하면서 당혹스러운 의식에 접하게 된다. 신참례(新參禮)가 그것인데 신참례는 새로 벼슬길에 오른 신참들을 골탕 먹이는 관례를 말한다. 이이(李珥, 1536~1584)는 신참례의 연원에 대해 “고려 말에 권세가의 젖비린내 나는 자제들이 죄다 과거에 급제했을 때 이들을 분홍방(粉紅榜)1)이라고 지목하고 분격하여 침욕(侵辱)하기 시작하였다.”고 말하였다. 고려 후기 권문세족의 자제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관직을 차지하자 장난거리를 만들어 그 오만방자한 기세를 꺾고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신참례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연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신참례가 생겨난 이유가 납득이 가지만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신참례는 없어지지 않고 악습으로 남았다. 신참례가 얼마나 심했는가는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들어 있는 다음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료 1-2-02〕

감찰이라는 것은 옛날의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의 직책인데, 그중에서 직급이 높은 자가 방주(房主)가 된다. 상⋅하 관원이 함께 내방(內房)에 들어가 정좌하며 그 외방(外房)은 배직한 순위에 따라 자리를 정하는데 그중에 수석에 있는 사람을 비방주(枇房主)라 하고, 새로 들어온 관원을 신귀(新鬼)라 하여 여러 가지로 욕보인다. 방 가운데서 서까래만한 긴 나무를 신귀로 하여금 들게 하는데, 이것을 경홀(擎笏)이라 하며 들지 못하면 신귀는 선생 앞에 무릎을 내놓으며 선생이 주먹으로 이를 때리고, 윗사람으로부터 아랫사람으로 내려간다. 또 신귀로 하여금 물고기 잡는 놀이를 하게 하는데, 신귀가 연못에 들어가 사모(紗帽)로 물을 퍼내서 의복이 모두 더러워진다. 또 거미 잡는 놀이를 하게 하는데, 신귀로 하여금 손으로 부엌 벽을 문지르게 하여 두 손이 옻칠을 하듯 검어지면 또 손을 씻게 하는데, 그 물이 아주 더러워져도 신귀에게 마시게 하니 토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또 신귀로 하여금 두꺼운 백지로 자서함(刺書緘)2)을 만들어 날마다 선생 집에 던져 넣게 하고, 또 선생이 수시로 신귀의 집에 몰려가면 신귀는 사모를 거꾸로 쓰고 나와 맞이하는데, 당중(堂中)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선생에게 모두 여자 한 사람씩을 안겨 주는데, 이를 안침(安枕)이라 하며, 술이 거나하면 「상대별곡(霜臺別曲)」3)을 노래한다. (중략) 이런 풍습의 유래는 이미 오래되었는데, 성종이 이를 싫어하여 신래(新來)를 괴롭히는 모든 일을 엄하게 금하니, 그 풍습이 조금 없어졌으나 아직도 구습 그대로 폐하지 않은 것이 많다.

성현(成俔, 1439~1504), 『용재총화(慵齋叢話)』

사헌부에서 행해지던 신참례 광경에 대한 설명이다. 이러한 신참례의 폐단을 막기 위해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신래를 침학하는 자는 장(杖) 60에 처한다’는 규정을 넣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신참례 의식은 없어지지 않았다. 과거에 9번이나 장원 급제하여 ‘구도장원공’으로 불렸던 이이도 신참례를 피하지 못했다. 이이는 문과에 급제한 후 외교에 관한 문서를 관장하던 승문원에 소속되었는데 선배들에게 불공했다는 이유로 파직된 적이 있었다. 이이와 쌍벽을 이루던 대학자 이황(李滉, 1501~1570)은 이 소식을 듣고 “신래를 희롱함이 잘못된 시속이나, 이미 알고 그 길로 들어갔으니 홀로 모면할 일은 아니다.”라면서 이미 풍속으로 굳어진 신참례는 피할 도리가 없다는 뜻을 나타냈다. 그러나 이이는 악습이라고 생각했던 신참례의 혁파를 건의하였고 선조(宣祖, 재위 1567~1608)도 폐단을 인정하여 금지하라는 명을 내렸다. 실록에는 선조의 명이 있은 후 신참례가 조금 줄어들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신참례 풍습은 19세기 전후의 사정을 기록한 심노숭의 『자저실기』에도 보인다.


〔사료 1-2-03〕

나라의 풍속에 문과에 급제하는 것을 대과라 하고 생원 시험과 진사 시험을 소과(小科)라고 한다. 사관의 선배들이 새로 급제한 신례들을 마전교(馬前橋)4)로 불러 오라 가라하며 장난거리로 삼는다. 이름을 거꾸로 부르게 하여 ‘도함(倒啣)’이라 하고, 더러운 도랑으로 걸어 들어가게 하고 ‘게잡이[捉蟹]’이라 하며, 땅바닥에 누워 구르게 하고 ‘멍석말이[捲席]’라 하고, 하늘로 펄쩍펄쩍 뛰게 하고 ‘별따리[摘星]’라고 하였다. 박수치면서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웃기도 하고, 땅바닥에서 한 치 떨어지게 고개를 숙이게 하며, 얼굴에 먹물을 칠하기도 하고, 담을 타넘거나 춤을 추거나 한 발을 들고 껑충껑충 뛰면서 가기도 한다. 우스꽝스럽고 괴이한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하였다.

심노숭(沈魯崇, 1762~1837), 『자저실기(自著實紀)』

김준근, 「기산풍속도」 신참례 장면
과거 급제자의 얼굴에 먹물을 묻히려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소장 : 독일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

중앙 관료로 활동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지방관 생활은 더욱 어려웠다. 그래서 홍길주(洪吉周, 1786~1841)는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것이 지방관 노릇이라고 지적한다. 지방관 생활의 어려움이 어떤 것인지 그의 설명을 들어보기로 하자.


〔사료 1-2-04〕

세간의 온갖 일은 모두 할 만하나 지방관 노릇만은 하기 어렵다. 근래 삼정(三政)이 모두 피폐해져서 백성의 운명이 몹시 위태롭다. 너그럽게 하면 공사에 해가 되고 박절하게 하면 백성들을 병들게 한다. 게다가 안으로는 주사(籌司)5)와 탁지(度支)6) 등 여러 상급 관서가 있고 밖으로는 관찰사와 절도사 등의 여러 상급 영(營)7)이 있다. 지방관이 된 자는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간사하고 교활한 아전들이 백방으로 속이니 현명한 사람이라도 두루 살피기 어렵고, 거짓 장부와 잘못된 법규가 여러 해 동안 답습되어 정성이 있는 자라도 관행을 벗어나기 어렵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죄가 저절로 쌓여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는 처벌이 반드시 따른다. 면한 자들도 요행일 뿐 참으로 죄가 없는 것이 아니다.

홍길주(洪吉周, 1786~1841), 『수여연필(睡餘演筆)』

중앙관이나 지방관 모두 어려움은 있지만 그래도 관료 생활을 한다는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조선 시대에는 과거에 급제하고도 제대로 관직 생활을 못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문과의 경우 1차 시험인 생원시와 진사시에 각각 100명, 3년에 1번 실시되는 정기 시험인 식년시에서 문과 33인이 선발되므로 30년이면 2,330명의 생원, 진사, 문과 합격자가 배출된다. 그런데 식년시 외에 알성시, 춘당대시, 절일제, 황감제 등의 특별 과거가 수시로 설행되었고 따로 별시, 정시, 중시 등의 임시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합격자 수는 훨씬 많았다. 그에 반해 과거 합격자들이 진출할 수 있는 실제 관직 수는 5백여 자리에 불과하였다. 인사 적체는 불을 보듯 뻔하였다. 자연히 생원, 진사의 경우는 세력가들과 친해야 벼슬자리라도 하나 얻을 수 있었으며 문과에 급제해도 뒤를 봐주는 사람이 없으면 한 번 체직(遞職)된 뒤에는 다시 진출하지 못하였다.

1796년(정조 20) 동짓달에 심노숭은 한양에서 파주로 가다가 어떤 사람이 밭두둑에 쓰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하인에게 가서 보라고 하니 죽은 사람 같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가 직접 가서 살펴보니 약하게나마 숨이 붙어 있었다. 심노숭은 하인에게 들쳐 업게 하여 객점으로 데려가 방에 눕혀 놓고 물을 데워 먹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 사람이 깨어났다. 물어보니 정주 사람으로 문과에 급제한 한형일(韓珩一)이라는 이였는데 그가 쓰러져 있던 이유는 이러하였다.


〔사료 1-2-05〕

몇 년 동안 한양에서 버텼으나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을 지경에 이르러 개성에 있는 정주 상인을 찾아가 돈을 꾸려고 하였다. 그러나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틀이나 굶어 길바닥에 주저앉았는데 자신도 쓰러져 누운 줄 몰랐다고 하였다.

심노숭(沈魯崇, 1762~1837), 『자저실기(自著實紀)』

『문과방목(文科榜目)』을 살펴보면 한형일은 평안도 영변 출신으로 1771년(영조 47)에 문과에 합격한 것으로 나타난다. 성적은 합격자 74명 가운데 60등이었다. 좋은 성적은 아니지만 엄연한 문과 합격자였다. 그렇지만 실록에 그의 이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과거 성적이 나빴기 때문인지 아니면 평안도 출신이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제대로 된 관직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한양에서 어렵게 버티다가 굶어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던 것이다. 심노숭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진 한형일은 그 후 훈련원 보직에 임시 자리를 만들어 오래도록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을 채워 넣으라는 명이 내려지면서 관직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 뒤에 고향으로 돌아가서 다시는 서울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한형일의 서울 관료 생활은 혹독함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김홍도, 「모당평생도」중 좌의정시
모당 홍이상이 좌의정에 올랐을 때의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자료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 주제별 문화원형 > 회화 > 풍속화 콘텐츠 > 모당평생도 좌의정시

1) 나이 어린 권문자제가 과거에 급제한 일을 놀림조로 이르던 말
2) 명함
3) 사헌부의 생활을 읊은 권근의 경기체가
4) 청계천 다리
5) 비변사
6) 호조
7) 감영(監營)⋅병영(兵營)⋅수영(水營)

3) 풍수지리에 심취한 양반들

3) 풍수지리에 심취한 양반들



조선 후기 자료 가운데 가장 흔히 보이는 것은 풍수지리에 관한 것이다. 풍수에 따라 이장하거나 묘 자리를 쓰는 것인데 이는 전 사회 계층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지만 이러한 풍조를 주도한 부류는 양반들이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 양반들 사이에 풍수지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임진왜란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풍수지리는 통일신라, 고려 시기에도 유행하였지만 고려 중기 이후 유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유자 관료층을 중심으로 도참(圖讖) 내지 지리비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주자(朱子)의 경우 같은 기(氣)는 서로 감응한다는 ‘동기감응론’을 근거로 조상의 묘가 후손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하여 음택 풍수(陰宅風水)를 인정한 바 있지만 조선에서는 음택 풍수의 영향력은 서서히 약화되어 가는 추세였다.

풍수학이 근거가 없는 것으로 지적되면서 도참적 성격이 강한 고려의 지리서들이 상당 부분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그런 가운데 조선적인 풍수관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음택 풍수는 근거가 약한 것으로 비판되고 성곽과 궁궐을 짓는 양기 풍수(陽氣風水)만이 인정받았는데 양기 풍수도 주술적인 성향은 배제되고 성리학적 자연관이 바탕을 이루었다. 길흉은 풍수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덕(德)에 좌우된다는 인식이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계기로 신비적 요소가 강한 음택 풍수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지고 있었다. 고상안(高尙顔, 1553~1623)은 그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료 1-3-01〕

재조(再造) 후에 사대부들이 술사(術士)를 숭배하고 믿었다. 그래서 비록 멀고 오래된 조상의 무덤일지라도 다시 길지(吉地)를 택해서 이장하여 편안하게 두었으며, 부모의 묘에 이르러서는 비록 길지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만약 다른 산이 좀 더 좋다고 하면 이장을 꺼리지 않아 두세 번도 마다하지 않았다. 오성(鰲城, 이항복)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자손이 잔열(殘劣)하면 매장하기가 실로 어려우며, 자손이 부지런하고 성실하면 안장하기가 또한 어렵다.”고 하였다. 풍자하는 뜻이 대개 상상이 된다.

고상안(高尙顔, 1553~1623), 『효빈잡기(效嚬雜記)』

재조, 즉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이장이 크게 성행하였다는 것이다. 고상안의 지적대로 임진란 후 풍수설에 따라 양반들이 묘지를 정하거나 이장한 기록은 셀 수 없이 많다. 임진란 이후 음택 풍수가 유행한 데는 선조와 광해군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미증유의 전란을 겪은 선조는 임진왜란이 도성 풍수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한양을 재건하면서 풍수지리설을 적용하려고 하였다. 선조는 풍수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한창 진행 중이던 경복궁 공사를 중지시킬 만큼 풍수에 관심이 많았다. 광해군의 경우는 선조의 영향도 있었지만 정통성의 약점에서 오는 불안감을 풍수를 통해 해소하고자 하여 풍수에 맞추어 인경궁과 경덕궁을 창건하기도 하였다. 선조와 광해군이 활용했던 풍수는 신비적⋅주술적 성격이 강한 것이었고 그러한 성격의 풍수설이 사대부들 사이에도 퍼지게 되었다.

심재(沈 , 1722~1784)가 쓴 『송천필담(松泉筆談)』에는 10대조의 묘 자리를 정하게 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그의 10대조는 심순문(沈順門)인데 연산군 때 화를 입어 세상을 떠났다. 심순문의 아들 충혜공 심연원(沈連源)의 4형제가 관을 받들고 강화도를 향해 가다가 김포 땅을 지나가는데 수레의 끌채 가운데가 끓어져 운구를 멈추었다고 한다. 다음 자료는 그 다음 이야기이다.


〔사료 1-3-02〕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고하였다. “조금 전 스님 두 분이 지나가면서 서로 하는 말이 ‘길지가 여기인데 어찌하여 꼭 멀리 가서 구하려는가?’라고 했습니다.” 충혜공이 뒤따라가 애걸하자 노승이 처음에는 심하게 거절하며 뿌리쳤다. 사미승이 곁에서 극력 권하자 연민의 마음이 생긴 노승이 돌아와 마을 뒤 한 곳을 가리키면서 서둘러 장례지내라고 하고는 경계하여 말했다. “내가 출발해서 보강(寶江)을 건너 십 리쯤 갔을 것을 헤아려 무덤을 파시오.” 한 길쯤 땅을 파자 갑자기 커다란 벌이 돌 틈에서 나와 노승을 따라 날아가서 뒤통수를 쏘자 노승이 바로 죽었다고 한다. 묘혈을 정할 때 노승이 말하였다. “이곳은 크게 될 땅으로 당대에 아마 과거 급제가 일곱 번이 나올 것이고, 대대로 정승을 낼 것입니다.” 훗날 충혜공의 4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또 중시(重試)에 급제한 것이 세 번이니, 과거 급제한 것이 모두 일곱 번이었다.

심재(沈 , 1722~1784), 『송천필담(松泉筆談)』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중요한 것은 심재의 집안에서는 사실처럼 믿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심재의 집안에서는 통진에 계속해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처럼 신비적이고 주술적인 성격의 풍수설이 유행한 것은 합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사는 것이 쉽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연줄 없이 자신의 실력으로만 과거에 급제하여 입신양명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관직에 진출하더라도 능력만으로 정상적인 승진이 어려웠으므로 무엇인가 다른 것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풍수는 비합리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조상을 좋은 땅에 편하게 모신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교적인 효 의식과 부합하는 측면도 존재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양반들 사이에 풍수설은 크게 유행하였고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점차 확산되었다. 풍수가 유행하면서 명당자리를 잘 가리는 것으로 유명한 이들도 등장하였다.


〔사료 1-3-03〕

근래 정하규(鄭夏圭)라는 사람이 점을 잘 쳐서 이름을 얻었는데 특히 명당자리를 가리는 점을 더 잘 쳤다. 점괘를 뽑은 뒤 그 산의 형국이나 안대(案對)를 논하면 마치 현장을 보고 있는 듯하였다. 그 때문에 그가 길흉을 판단하면 믿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신돈복(辛敦復, 1692~1779), 『학산한언(鶴山閑言)』

사대부들 사이에 이장이 유행하자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은 예장(禮葬)1)으로 치르는 장사라도 무덤을 옮겨서 하면 예장을 허락하지 말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풍수설을 비판하는 논의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수설은 더욱 확산되어 가는 상황이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풍수설이 온통 풍속을 이루었다고 풍수설의 유행상을 언급한 바 있다. 풍수설이 유행하자 정약용이 「풍수론(風水論)」을 지어 당시 만연해 있던 음택 풍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밖에 여러 실학자들도 풍수의 신비주의적 요소를 문제 삼는 등 풍수에 대한 비판이 다시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으로 풍수설이 확산되어 가는 추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4) 양반의 여러 모습

4) 양반의 여러 모습



조선 후기에는 사회⋅경제적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한 변화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돈에 대한 관심의 증가라고 할 수 있다. 본래 조선 지식인들은 ‘청빈(淸貧)’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면서 화폐가 일상생활에 깊숙이 침투하였다. 그 결과 이제 경제에 초연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성대중(成大中)은 자신의 아버지대만 해도 사대부들이 재물에 대해 이처럼 초연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며 당시의 실상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사료 1-4-01〕

지금은 친구들끼리 선물할 때 돈이 없으면 야박하다고 여긴다. 또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감히 돈을 손에 대지 못했으니, 어른들이 금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귀천을 막론하고 아이들에게 돈을 채워 주기를 마치 주옥이나 장난감같이 하니, 풍속이 천박하게 변함이 마침내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

성대중(成大中, 1732~1809), 『청성잡기(靑城雜記)』

친구들에게 돈을 선물하는 사대부의 모습은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아이들에게도 돈을 주는 것 역시 낯설게 느껴지는 풍경이다. 하지만 이것은 당시의 현실이었다.

경제적 변화가 발생하면서 양반층도 분화되었다. 대대로 벼슬을 하면서 많은 재산을 축적한 부류도 있는 반면 정권에서 소외되어 서서히 몰락해 가는 이들도 있었다. 경제적으로 넉넉할 경우에는 그나마 지방 사회에서 행세할 수 있었지만 가난한 양반은 이름만 양반일 뿐이었다. 경제적으로 평민들보다 못한 부류도 적지 않았다. 생업에 종사했던 양반들의 이야기는 쉽게 찾아진다.


〔사료 1-4-02〕

① 선비 이식(李栻, 1659~1729)은 집이 가난하였다. 어려서 과천의 청계산 밑에서 살며 밤에는 책을 읽고 낮에는 땔감을 모아 도성으로 들어왔다. 근력이 남들보다 좋아 등에 진 나뭇짐이 곱절이었고, 한 입으로 값을 다르게 부르지 않아 사람들도 값을 깎지 않았다.

심노숭(沈魯崇, 1762~1837), 『자저실기(自著實紀)』

② 판서 서유대(徐有大, 1732~1802)는 젊어서 고아로 곤궁하였다. 충청도 덕산에 살았는데 가난해서 끼니를 해결할 수 없자 손수 남초 밭을 일구어 재산을 모은 후 무과에 급제하였다.

심노숭(沈魯崇, 1762~1837), 『자저실기(自著實紀)』

이식은 개국공신 이곤(李坤, 1462~1524)의 7세손이었지만 집이 가난하여 땔나무를 하며 학문을 닦다가 천거를 받아 수령 자리에 올랐고, 서유대는 명문 달성 서씨의 후손이었으나 남초 밭을 일구어 공부를 해서 후일 무과에 급제하여 무인의 길을 걸었다.

반면 양반 체면 때문에 생업에 나서지 못하는 부류도 있었다. 양반들은 대개 생업에 종사하지 않는 것을 불문율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판서를 지낸 엄숙(嚴肅, 1716~1786)은 자신의 세 가지 불행 가운데 하나로 ‘양반이 되어서 평민과 천민처럼 마음껏 생계를 꾸리지 못하는 것’을 들기도 하였다. 장한종(張漢宗, 1768~1815)이 쓴 『어수신화(禦睡新話)』에는 「홍생아사(洪生餓死)」라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소의문 밖에 두 딸과 함께 살던 홀아비 홍 생원이 훈조막(熏造幕)1)의 역부들에게 밥을 빌어먹다가 역부들에게 핀잔을 들은 후 더 이상 구걸하지 않고 모두 굶어 죽었다는 내용이다. 줄거리가 워낙 극단적이어서 실제 있었던 일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지만 사실이든 허구이든 어쨌든 당시 양반의 모습을 보여 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양반들은 생업에 종사하는 것을 꺼렸지만 가난한 양반들은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했다. 양반들 가운데 소작인으로 살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영남 지방의 지주들 사이에는 노비, 친구, 양반에게는 소작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양반이 소작을 주지 말아야 할 대상에 포함된 것이 흥미롭다. 그 이유는 양반들의 비상식적인 태도 때문이었는데 그에 대해 성대중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료 1-4-03〕

지금은 양반이 온 나라에 깔려 있으니 음직도 조상의 공업도 다 끝나고 토지도 노비도 없으며 문도 무도 익히지 않아 모습과 언동이 평민만도 못한 주제에 그래도 조상의 훌륭한 유업을 들먹이며 남에게 사역당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한갓 남의 땅을 움켜쥐고서 이름만 소작인일 뿐 자기는 쟁기질도 호미질도 제대로 하지 않고 평민들을 부리려 하니 평민들이 그 말을 듣겠는가. 이 때문에 농사일에 번번이 때를 놓쳐 땅 주인만 피해를 입게 되며, 땅 주인이 조금이라도 책망하면 마구 욕을 해대고 그나마 소출도 다 주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하니 땅 주인이 땅을 빼앗지 않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으면 팔아야 하는데 팔려고 하면 틀림없이 빼앗기게 된다. 이래서 서로 땅을 주지 말라고 경계하는 것이니, 흑립(黑笠)을 쓴 양반들이 어찌 더 빈궁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성대중(成大中, 1732~1809), 『청성잡기(靑城雜記)』

가난해서 남의 땅을 소작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양반들이 특권 의식을 버리지 못해 제멋대로 평민을 부려먹거나 지주들에게 욕을 해대는 등 갖은 행패를 일삼는다는 것이다. 영남 지방의 경우 다른 지역보다 양반의 권위가 강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벌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양반들의 행태가 이러했기 때문에 지주들은 양반에게 소작을 주지 않으려 했고 그로 인해 양반들은 소작지도 얻지 못해 더욱 곤궁해질 수밖에 없었다.

김득신, 풍속화
지주로 보이는 이가 농민들이 타작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소장 : 간송미술관)자료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 미술작품 > 작가별 작품 > 동양작가 > 조선시대 작가 > 김득신 > 추수타작 [秋收打作] - 김득신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라 양반들의 의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오랫동안 사대부들이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던 것은 검소, 염치와 같은 덕목들이었다. 하지만 사대부들은 검소의 미덕을 잃고 경쟁하듯 사치를 부렸다. 사치풍조에 관한 자료는 사실 조선 시대 전 시기에 걸쳐 발견되지만 후기로 갈수록 그 양이 늘어난다. 다음은 조선 후기 사대부들의 사치 풍조와 관련된 두 자료이다.


〔사료 1-4-04〕

① 근래에 사대부가에서는 술이 집에서 담근 것이 아니거나, 과일이 먼 지방에서 온 진귀한 것이 아니거나, 음식이 여러 품목이 아니거나, 그릇이 온 상에 가득 차지 않으면 감히 모임을 만들지도 않으며, 반드시 여러 날을 마련한 뒤에야 초청하는 편지를 보낸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다투어 비난하며 인색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치한 풍속을 따르지 않는 자가 드물다.

심재(沈 , 1722~1784), 『송천필담(松泉筆談)』

② 연회를 벌이거나 유람할 때 명승지를 찾아가며 가져가는 도시락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조정에서 근무하면 식사를 집에서 가져오는데, 아침 점심으로 보내오는 음식은 한 그릇에 100여 전의 값을 들여 대여섯 그릇을 만든다. 그 진기한 요리와 귀한 반찬은 남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든다. 하인들까지 배불리 먹고도 남아 추울 때에는 얼고 더울 때에는 부패한다.

심노숭(沈魯崇, 1762~1837), 『자저실기(自著實紀)』

사대부들 사이에 검소한 것이 오히려 인색한 것으로 취급되어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었으며, 관료 사회에서도 사치를 즐기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심노숭은 백성들이 곤궁하고 재물이 고갈된 것은 사대부들의 사치풍조 때문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검소함이 더 이상 미덕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러한 상황은 사대부 사회에 균열이 생기고 있던 한 단면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사대부들 가운데는 염치를 상실하고 양반 신분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괴롭히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염치를 상실한 행위의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는 평민들의 집을 제멋대로 빼앗는 일이다.


〔사료 1-4-05〕

예전에는 사대부들이 괜찮은 여염집을 보고서 요양을 한다거나 혹은 집을 빌려 혼사를 치른다는 등의 명목으로 곧바로 가솔(家率)들을 이끌고 안채로 들이닥치면 여인네들이 마치 난리라도 만난 것처럼 도망치고, 새로 들어온 사람은 마치 원래 자기 집처럼 태연히 거처하였다. 그 집에 비축해 둔 곡식과 가마솥 등을 그대로 쓰면서 혹은 해가 바뀌도록 나가지 않는데, 집주인은 밖에서 노숙하면서도 괴롭다는 말 한마디 못하였다. 이렇게 집을 뺏긴 여염집들은 살아갈 길이 막막하니, 조석으로 끼니를 때울 뿐 아무것도 비축할 것이 없었다.

성대중(成大中, 1732~1809), 『청성잡기(靑城雜記)』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지만 민가를 빼앗는 일은 실제 있었다. 영조(英祖, 재위 1724~1776)는 잠저에 있을 때부터 이러한 폐단에 대해 잘 알고 있어 즉위하자마자 남의 집을 빼앗아 들어간 사람은 3년 동안 유배를 보내도록 명령을 내리면서 비로소 사라졌다.

이처럼 사회⋅경제적 변화에 양반 사회도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지만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바로 당파 간의 갈등이었다. 중앙 정계에서의 각 당파들이 얼마나 치열한 다툼을 벌였는가는 잘 알려져 있지만 지방 사회의 상황을 보여 주는 자료는 많지 않다. 이옥(李鈺, 1760~1812)의 『봉성문여(鳳城文餘)』에 들어 있는 다음 자료는 단편적이지만 지방 당인들 간의 갈등 양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사료 1-4-06〕

삼가(三嘉)2)의 선비들이 향교의 교문을 신축하면서 향음주례를 행하여 낙성식을 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현감이 향대부로서 주인(主人)의 일을 맡았으나 고을에 빈(賓)으로 모실 만한 사람이 없었다. 고을 향교에는 또한 붕당이 있어 서인과 남인으로 나뉘어 있었다. 나이로 치면 남인의 선비가 마땅히 빈이 되어야 하는데, 주인이 무리들에게 이끌려서 서인의 선비를 끌어다가 빈으로 앉히니 남인의 선비들이 원망하여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옥(李鈺, 1760~1812), 『봉성문여(鳳城文餘)』 「향음주례(鄕飮酒禮)」

이옥은 정조(正祖, 재위 1776~1800)의 문체반정(文體反正)에 연루되어 기구한 삶을 살았던 지식인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성균관 유생으로 있던 1795년(정조 19) 정조로부터 소품문을 썼다는 이유로 충군(充軍)3)의 처벌을 받은 이후 우여곡절을 겪다가 1799년 삼가현에 내려가 생활하게 되었는데 위의 글은 그곳에서 견문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삼가 지방은 본래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영향을 크게 받은 곳이라 북인의 근거지라 할 수 있는데 광해군 때 북인 정권이 몰락하고 나서는 서인과 남인이 섞여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조선 후기 양반들은 지배층으로서의 건전성을 점점 상실해 가고 있었다.

1) 관청에 공납하는 메주를 만들던 곳
2) 합천
3) 군에 소속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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