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평양부 ‘개발’과 조선인 엘리트의 ‘지역정치’
시리우스sk 2023.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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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평양부 ‘개발’과 조선인 엘리트의 ‘지역정치’
주동빈
한국사학과 한국근현대사 전공
서론
제1장 소외기(1914~1918) : 평양 개발의 ‘이중구조’와 조선인 소외
제1절 일본인 중심의 행정구역 및 권리 재편 시도
제2절 토목비 지출의 ‘이중구조’
제3절 재원 부족과 ‘大平壤’론에 함축된 부 세입 확대책
제2장 형성기(1919~1928) : ‘국책’ 개발 실패와 조선인의 주도권 장악
제1절 ‘국책’ 기반 ‘東平壤’ 개발론과 조선인 지역 여론 환기
제2절 ‘식민지 조선 단위’의 이해관계 조정 실패와 동평양 개발론 무산
제3절 電氣府營 후 조선인의 府 ‘豫算政治’ 주도와 북부 개발 결정
제3장 대립기(1929~1937) : 개발의 제한적 수혜와 조선인 정치세력 약화
제1절 조선인 대상 시가계획의 배경과 조선인 정치세력 약화
제2절 부 계획으로서 북부 조선인 ‘중소공장지구’ 조성
제3절 조선총독부의 대안 제시 차단과 부영전기 유지 실패
제4장 종속기(1938~1945) : 軍需工業化와 ‘자치’ 권한 축소
제1절 ‘국책’ 편중 개발과 ‘자치’ 기구의 종속
제2절 동평양 중심 개발과 서부 ‘제2중소공업지대’ 계획의 형해화
제3절 配電회사 경영 개입 차단과 재원ㆍ요금 혜택 약화
결론
<논문요약>
본 연구는 식민지기 개발정책 개입을 통한 조선인 엘리트 주도 ‘지역정치’의 최대치에 주목했다. ‘지역정치’란 지역개발 또는 집합재배분을 둘러싼 권력 획득 및 조정과정을 가리킨다. 동시대 일본 지방자치는 신흥 지역상공업자들의 시 의회 장악, 고유사무로서 토목비 지출 증대, 시 세입 중 가장 고수익인 시영전기 운영이라는 3요소를 통해 확대되었다. 한국근대사 연구에서 평양 조선인 지역엘리트는 개신교를 일찍 받아들인 선구적 시민이자 식민지 지배기구와 거리를 둔 민족주의자로 인식되었다. 반면 ‘지역정치’를 보면, 일제하 평양부는 오히려 로컬 스케일에서 조선인 지역엘리트가 여론을 결집하고 개발거점을 확보하여 부 예산정치를 주도한 곳이었다.
1914년 「부제」 시행으로 평양부는 종래 행정구역의 0.5%로 대폭 축소되었고 일본인 인구가 20%인 ‘식민지 도시’로 바뀌었다. 1차세계대전 이후 호황기에 ‘국책’ 주도 개발의 실패에 따라, 점차 조선인 지역엘리트가 평양의 여론을 주도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1922년 워싱턴회의 이후 동우회의 구시가(‘조선인 시가’) 상공업자 중심 후보단일화를 통해 평양부협의회는 조선인 동수 혹은 과반수가 되었다. 또한 증가한 조선인 공장주와 전등 사용자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1927년 식민지 조선에서 유일하게 전기부영화(府營化) 운동이 성공했다. 그해 조선인 의원들은 동력, 전등 요금의 일괄 20% 인하에 성공했던 것이다.
1929~1937년 평양 조선인 지역엘리트는 제한적인 경제적 수혜는 얻었지만 세력이 약화되었다. 1929년 평양부는 조선 최대의 인구밀집도를 보였다. 부 계획으로 북부에 시가지를 조성했으며, 남부 신시가의 재조일본인들은 반발했다. 반면 동우회는 식민지 지방제도 변경, 노동쟁의 강화, 조선인 상공업자의 지지세 약화로 주도권을 상실했다. 한편 부영전기는 1930년대 초 조선총독부 전력정책변화로 다시 사영화(私營化)될 위기에 처했다. 결국 1936년 이후 조선인 상공업자들의 요금 인하를 위한 사영화 지지와 평양부협의 회의 수적 열세로 1938년 부영전기는 동양척식㈜계 회사로 합병되었다.
전시체제기 평양부 개발은 군수공업화와 조선인 주도 ‘자치’기구의 종속화로 요약할 수 있다. 동양척식㈜계의 주도로 중화학공업화 중심 ‘평남 광역 개발’과 동평양 중심 ‘횡단형 개발’이 시행되었다. 평양상공회의소와 평양부협의회의 조선인 상공업자들은 제한선거권에도 유권자 숫자의 우위를 차지했지만, 제도 변화와 동양척식㈜ 계열의 영향력 확대로 지역 ‘자치’기구는 그들에게 종속되었다.
요컨대 식민지기 평양은 3·1운동 이후 조선인 지역엘리트들이 지방의회를 통해 식민지 개발을 주도하려고 했던 부였다. 그들은 조선유일의 조선인 교외 개발(‘서평양’, 실제로는 평양 북부)과 부영전기 운영이란 계급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조선인 주도 도시 ‘지역정치’는 지역엘리트 과두제였고 3가지 딜레마를 가졌다. 개발에 개입하기 위해서 정통성이 결여된 식민지 지배기구와 끊임없이 접촉해야 했으며, 조선인의 권리 강화는 여러 방법으로 제약받았다. 또한 잔존하는 혈연·지연이란 사회관계망 속에서 지역엘리트 여론을 규합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조선인 지역엘리트와 노동자·빈민 간의 계급갈등 속에서 ‘민족적 이익’이란 구호를 견지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전시체제기 말기 평양 조선인 지역엘리트들은 식민지 지배기구로부터 ‘양자 취급’을 받는다고 절규했다. 또한 분단화 과정은 북한에서는 조선총독부에 협력하는 친일파, 남한에서는 개항 이후 개인 사업과 계몽운동에만 몰두한 시민으로 평양 지역엘리트의 상을 고착화했다. 이 과정에서 일제하 평양부(협의)회가 가진 정치성은 오늘날까지 망각되었다
<저자 인터뷰>
1. 해당 전공을 선택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초등학교 시절 교양도서를 읽다가 역사에 처음 흥미를 느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진로를 다시 고민하다가 한국 근현대사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과 선배이시기도 한 고등학교 한국사 선생님의 강의 덕분이었습니다. 식민지 경험과 분단모순 강조는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 전 돌아가신 강만길 선생님의 사론(史論)이 담겨 있는 수업이었습니다.
박사논문은 일제시대 지역정치사가 되었지만, 지도교수인 정태헌 선생님의 사회경제사 연구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대학원 한국 근현대사 전공은 개항기(1876~1910), 일제시대(1910~1945), 현대사(1945~)의 3개 팀입니다. 선생님의 학부 강의를 들으면서 일제시대 연구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일제시대가 근대사로 분류되지만, 여러 의미에서 당대사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2. 논문 주제를 선정하시게 된 이유와, 논문을 통해 독자들에게 꼭 전달하고자 했던 내용 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박사논문에서는 식민지기 조선인 자본가의 도시이자 조선 제2도시로 불리던 평양부 개발과 지역정치를 다루었습니다. 석사논문은 서울의 도시인프라로 본 생활사를 썼습니다. 이후 현재까지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 ‘식민지 개발’팀에서 공부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박사과정을 하면서 원래 관심이 있던 조선인 자본가와 한국 민족주의의 원풍경에 천착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2도시의 조선인 지역엘리트 정치를 개발과의 관계 속에서 풀어내고자 한 것입니다.
논문을 쓸 때, 일종의 사고실험을 설정했습니다.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인 주도 하의상달(下意上達)형 개발과 지역엘리트 변동 가능성의 조건을 도시 지방의회를 통해 확인하고, (수양)
동우회를 포함한 서북파들의 지역사회 여론 조성과의 관계를 살폈습니다. 일본 ‘국책’ 주도 개발이 난관에 부딪치는 가운데, 조선인 상공업자 및 전문직들은 지역의 직능별·구역별 이익결사체에 기반을 두고 도시 지방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며 조선 유일의 부영전기와 조선인 시가 인근 시가계획을 확보했습니다. 전시체제기 이전까지 조선인들의 도시재정 예산정치가 진행된 조건이었던 것입니다.
한국사의 지배엘리트 연구가 중앙(서울) 중심인 경우가 많지만, 한국 근현대 우익의 한 계보를 이룬 서북파의 지역 명망 형성 과정으로 독해할 수 있겠습니다
3.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었다면 어떤 것들인가요?
첫째, 선행연구가 많지 않았습니다. 선행연구는 극복의 대상이면서도 길잡이입니다. 제 글은 도시 지방의회(부(협의)회), 전력산업, 시가(지)계획의 3요소가 맞물려 있습니다. 물론 개별 주제에 대한 훌륭한 연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 소재에 대한 선행연구는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의식과 방법론을 통해 돌파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둘째, 자료 찾기의 어려움이었습니다. 분단체제로 인해 북한 지역 자료는 무척 찾기 어렵습니다. 다행히 BK21+ 고려대 한국사학미래 인재양성사업단 중장기연수 덕분에 기존에 활용 되지 못한 일본 자료를 접했고, 국가기록원 자료를 더해 논문을 쓸 수 있었습니다
셋째, 가사와 육아였습니다. 가장 큰 부담이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아내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이들에게는 면목이 없습니다.
논문 작성과 가사·육아 가운데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4. 논문 쓰기를 앞둔 후배들에게 조언 한마디를 부탁드립니다.
사람마다 공부법이 있으므로 후술할 내용은 조언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저 참조만 해주십시오. 박사학위논문은 커다란 배와 같아서 문제를 알아도 단시일 내 방향타를 돌리기가 어렵습니다. 그 전제하에 말씀드리겠습니다.
- 첫째, 가장 중요한 이야기이지만, 지도교수 선생님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어야 합니다.
- 둘째, 목차와 내용, 연구주제와 문제의식을 털어놓고 상의할 수 있는 동료 혹은 연구모임이 필요합니다. 방향 전환이 어려운 만큼 자신의 글에 대한 선제적 문제 인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디테일하게 자주 상의하면 가장 좋습니다.
- 셋째, 다른 분야의 쉬운 책을 가끔 펼쳐보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만의 세계에서 잠시 빠져나오는 것이 오히려 글에 도움이 됩니다.
- 넷째, 최대한 다른 글을 쓰지 않고 일을 줄이는 것이 좋습니다.
- 다섯째, ‘멘탈’과 체력 관리가 중요합니다. 컨디션이 불량하면 시간을 많이 들여도 생산력은 자연스레 떨어집니다. 루틴을 만들어서 바빠도 잘 쉬거나 진짜 좋아하는 것을 하는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운동은 필수이며, 만나면 마음이 편해지는 친지를 만나야 합니다.
■ 인터뷰·정리 : 천관우 기자 kw10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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