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평중 교수 "박정희는 '피라미 친일파'였을 뿐" - 세상을 보는 다른 눈 "뷰스앤뉴스"
윤평중 교수 "박정희는 '피라미 친일파'였을 뿐"
"박정희, 작은 친일로 시작해 거대한 극일의 지평 열어"
2009-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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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포함된 것을 놓고 친일 논쟁이 가열되고 있는 가운데, 윤평중 한신대 교수가 "박정희는 작은 친일로 시작했지만 우리 민족에게 거대한 극일(克日)의 지평을 활짝 열면서 생을 마감했다"며 논쟁에 가세했다.
<동아일보> 객원논설위원인 윤평중 교수는 이날자 <동아일보>에 쓴 글을 통해 "박 전 대통령은 과연 친일파인가, 아닌가"라고 물은 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가 친일파였다고 본다"고 단언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청년 박정희는 일제가 설립한 대구사범학교를 1937년에 졸업한 뒤 일제의 국록을 먹는 문경공립보통소학교 교사로 1940년까지 봉직했다"며 "교사로 있으면서 군인의 꿈을 키우던 23세의 박정희는 나이 때문에 군관모집에 탈락하자 재차 응모해 '한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라는 혈서를 제출해 일제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 신경군사학교에 들어간다. 1942년 군사학교 졸업과 함께 박정희는 일본육사 3학년에 편입해 1944년 육사를 마치고 다카키 마사오 소좌로 만주군에 배치된다. 광복이 벼락처럼 닥쳤을 때 박정희는 28세였다"며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적을 열거했다.
윤 교수는 그러나 이어 화살을 민족문제연구소로 돌려 "이런 명백한 사실(史實)에 근거해 친일인명사전에 박정희를 올린 민족문제연구소의 행보가 왜 정치적인가"라고 반문한 뒤, "한마디로 박정희가 일제 35년 동안의 대일부역행위를 대표하는 4천389명의 한 사람이 되기에는 너무나도 미미한 ‘피라미 친일파’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그렇다면 왜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파의 기준을 초급장교로 애써 낮추면서까지 그를 인명사전에 넣었을까"라고 물은 뒤, "답은 자명하다. 한국 보수세력의 거대한 성채인 박정희를 흠집 내자는 것이다. 대다수 시민에게 신화로 남은 ‘박정희 현상’을 한국인의 역린(逆鱗)인 민족정서를 동원해 해체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결론적으로 "민족문제연구소가 대변하는 도식적 역사관으로는 ‘친일파 박정희’의 개발독재가 한국적 산업혁명을 낳고 그것이 한국적 민주혁명으로 이어지면서 우리 민족의 자존감을 대폭발시킨 현상을 이해할 길이 없다. 선악을 칼같이 나누는 도덕원리주의로 재단하기에는 역사의 결은 너무나 깊고도 넓다"며 "결국 박정희는 작은 친일로 시작했지만 우리 민족에게 거대한 극일(克日)의 지평을 활짝 열면서 생을 마감한 것"이라는 주장으로 글을 끝맺었다.
한편 이날 새벽 진행된 MBC <100분토론>에서도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각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는 등, <친일인명사전> 발행을 계기로 진보-보수진영간 친일논쟁은 나날이 열기를 더하는 양상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포함된 것을 놓고 친일 논쟁이 가열되고 있는 가운데, 윤평중 한신대 교수가 "박정희는 작은 친일로 시작했지만 우리 민족에게 거대한 극일(克日)의 지평을 활짝 열면서 생을 마감했다"며 논쟁에 가세했다.
<동아일보> 객원논설위원인 윤평중 교수는 이날자 <동아일보>에 쓴 글을 통해 "박 전 대통령은 과연 친일파인가, 아닌가"라고 물은 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가 친일파였다고 본다"고 단언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청년 박정희는 일제가 설립한 대구사범학교를 1937년에 졸업한 뒤 일제의 국록을 먹는 문경공립보통소학교 교사로 1940년까지 봉직했다"며 "교사로 있으면서 군인의 꿈을 키우던 23세의 박정희는 나이 때문에 군관모집에 탈락하자 재차 응모해 '한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라는 혈서를 제출해 일제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 신경군사학교에 들어간다. 1942년 군사학교 졸업과 함께 박정희는 일본육사 3학년에 편입해 1944년 육사를 마치고 다카키 마사오 소좌로 만주군에 배치된다. 광복이 벼락처럼 닥쳤을 때 박정희는 28세였다"며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적을 열거했다.
윤 교수는 그러나 이어 화살을 민족문제연구소로 돌려 "이런 명백한 사실(史實)에 근거해 친일인명사전에 박정희를 올린 민족문제연구소의 행보가 왜 정치적인가"라고 반문한 뒤, "한마디로 박정희가 일제 35년 동안의 대일부역행위를 대표하는 4천389명의 한 사람이 되기에는 너무나도 미미한 ‘피라미 친일파’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그렇다면 왜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파의 기준을 초급장교로 애써 낮추면서까지 그를 인명사전에 넣었을까"라고 물은 뒤, "답은 자명하다. 한국 보수세력의 거대한 성채인 박정희를 흠집 내자는 것이다. 대다수 시민에게 신화로 남은 ‘박정희 현상’을 한국인의 역린(逆鱗)인 민족정서를 동원해 해체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결론적으로 "민족문제연구소가 대변하는 도식적 역사관으로는 ‘친일파 박정희’의 개발독재가 한국적 산업혁명을 낳고 그것이 한국적 민주혁명으로 이어지면서 우리 민족의 자존감을 대폭발시킨 현상을 이해할 길이 없다. 선악을 칼같이 나누는 도덕원리주의로 재단하기에는 역사의 결은 너무나 깊고도 넓다"며 "결국 박정희는 작은 친일로 시작했지만 우리 민족에게 거대한 극일(克日)의 지평을 활짝 열면서 생을 마감한 것"이라는 주장으로 글을 끝맺었다.
한편 이날 새벽 진행된 MBC <100분토론>에서도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각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는 등, <친일인명사전> 발행을 계기로 진보-보수진영간 친일논쟁은 나날이 열기를 더하는 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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