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6-11

알라딘: 현대인의탄생 - 해방 한국전쟁기 한국인의 질병과 위생 의료



알라딘: 현대인의탄생 - 해방 한국전쟁기 한국인의 질병과 위생 의료
[eBook] 현대인의탄생 - 해방 한국전쟁기 한국인의 질병과 위생 의료

전우용(저자) | 이순(웅진) | 2011-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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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근현대사를 관통해온 한국인의 삶과 몸, 질병에 대한 역사·인류학적 보고서. 해방과 미군정기, 대한민국 정부 수립,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과 종전에 이르기까지 8년 동안 격동의 근현대사를 살면서 한국인의 몸과 질병에 대하여 살펴본다. 이 책은 신체 위생과 질병, 의료의 관점에서 들여다본 한국인, 그리고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이야기다.






1부 | 해방과 혼돈의 시대 1945.8~1950.6
1 미생물도 해방을 맞다
2 삶도 죽음도 너무 가벼운 시대
3 환자들, 병원에 가다
4 의사의 자격

2부| 전쟁과 상처의 시대 1950.6~1953.7
5 전쟁, 질병과 고통의 전시장
6 병원도 무기가 되는 전쟁의 역설
7 죽음 곁에서 사는 사람들
8 한국인, 의학의 눈으로 제 몸을 보다



생활사적 측면에서만 보자면, 해방은 한국인의 몸과 의식을 갑작스럽게 혼돈 속으로 던져 놓은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혼돈이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것'들의 활동 무대를 넓혀주었다. 조선총독부의 보건 행정 체계는 일시에 무너졌고, 그 틈에 세균과 바이러스가 굶주린 채 우왕좌왕하는 군중들 사이에서 제 세상을 만난 듯 활개 치기 시작했다.
행정적 관접에서 보자면, 질병과 범죄에 대처하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같다. 사회와 개인의 안녕에 위해를 끼치는 요소들은 범죄자든 세균이든 모두 불순, 불량, 불온, 부정한 것으로 파악된다. 치안과 위생 행정의 근본목적은 이들 요소를 적발, 차단, 격리, 제거하는 것이다. 서양 근대의학은 '병자'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몸에 침투하는 '병원체'에 관심을 집중하지만, 식민지 치안 행정은 '범죄자'로서의 인간을 '병원체'처럼 취급한 점이 다를 뿐이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될 때까지 한 달여를 양측 군대는 무더위 속에서 강변 고지들을 빼앗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수시로 장맛비가 내렸고 낮 기온은 섭씨 30도를 훌쩍 넘었다. 총탄이나 수류탄 파편에 스친 상처는 금세 곪았고, 제 때에 처리하지 못한 시체는 곳곳에서 악취를 풍겼다. 더구나 낙동강변의 야산에는 나무가 없었다. 한국군이나 미군이나 북한군이나 병력 절대다수가 전투 경험이 없는 젊은 병사들이었다. 몸을 숨길 곳이 없는 고지에서 서로 빤히 내려다보고 올려다보며 총을 쏘는 일은 아주 공포스러웠다. 미군은 초기 전투에 참가한 병사의 대략 3분의 1이 정신과적 문제를 겪었다고 기록했다.
미군과 유엔군 병원들의 모델로 조직을 혁신했다. 한국에서 병원 현대화의 첫 발을 내디딘 것은 군 병원들이었던 것이다. 군 병원은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고 부상병이 크게 줄어든 1951년 중반부터는 민간인 환자를 함께 돌보았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현대적 종합병원을 체험한 상태였다.

의료 문제에 관한 한 아직 중세의 무지와 완전히 결별하지 못했던 한국인 대다수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불과 3년 만에 서양의 의학지식을 빠르게 흡수했다. 삶과 죽임이 교차하는 전쟁터에서 체득한 절박한 지식이다. 약에 대한 맹신, 항생제 남용 등 현대 한국인의 의약품에 대한 태도도 대부분 이때 형성되었다. 한국인들은 그 이전까지, 자발적으로든 강제로든 그토록 다양하고 많은 약을 몸 안에 들인 적이 결코 없었다.
인류 전쟁의 양상을 살펴보면 1,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그 모습이 근본적으로 바뀜을 알 수 있다. 전쟁은 언제나 정치가들이 일으켰지만, 19세기까지의 전쟁은 군인들만 하는 짓이었다. 전장이 아닌 지역에서는 불안감은 있었으나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1차 대전 때 처음 모습을 드러낸 입체전은 전방과 후방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했다. 곡사포는 전선을 가로질러 상대방의 후방을 공격했고, 비행기는 넓은 지역에 흩어진 상대편 병사들을 하늘에서 관찰하게 했다. 무전기와 전보는 전쟁 상황을 국내 전역의 일반국민들에게도 실시간으로 전달했다. 전쟁으로 인한 인적, 물적 피해와 심리적 긴장감에서, 전방과 후방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가 사라졌다. 입체전은 총력전으로 이어졌다. 총력전 체제하의 국가는 국민의 몸뿐 아니라 정신까지도 동원했다.
전쟁은 한국인 모두에게 국민이 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거에 깨우쳐주었다. 전시 국가는 국민을 자신의 목적에 동원했을 뿐 아니라, 국민의 생각마저도 감시했다. 국민의 몸과 생각은 개인의 것인 동시에 국가의 것이기도 했다. 비애국적 국민 뿐 아니라 병약한 국민도 국가에 해로운 존재였다. 국가는 건강한 국민을 만들기 위해 의학의 시선으로 국민을 살폈고, 국가의 관점을 내면화한 국민들 역시 의학의 시선으로 자기 몸을 살피는 방법을 배웠다. 더불어 전쟁 중 미국이 가르친 현대 의학도 현대 한국인을 만드는 핵심지식이 되었다.






저자 : 전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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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 이십 년 동안 서울의 역사를 공부했으며 많은 이들이 서울을 알고 사랑하고 서울에서 행복하기를 바라는 사람.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상임연구위원, 서울대학교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를 지냈고,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이자 서울시 문화재위원이다. 저서로 《서울은 깊다》 《현대인의 탄생》 《한국 회사의 탄생》 《오늘 역사가 말하다》 등이 있다.






격동의 근현대사를 관통해온 한국인의 삶과 몸, 질병에 대한 역사·인류학적 보고서

1. 한국사 전대미문의 혼란기 1945-1953. 한국인의 몸은 무엇을 겪었을까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는 순간부터 1953년 7월 한국전쟁 종전까지 8년간은 한국 근현대사상 전대미문의 혼란기였다. 40여 년간 지속된 일제의 통제와 강압이 끝남과 동시에 식민지 사회를 지탱해온 질서도 함께 무너졌다. 아무런 준비 없이 무방비 상태에서 해방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의 치안과 행정체계는 일시에 무력해졌고, 수많은 정당이 만들어졌으며 저마다 새 나라의 운명을 책임지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당장 그들은 어떤 질서도 스스로 만들어낼 능력이 없었다. 조선총독부의 권력은 한국인을 거치지 않고 바로 미군에게 옮겨갔고, 그해 말 신탁통치 문제가 불거진 뒤로는 이념대립의 골이 깊어졌다.

한편, 해방과 동시에 거대한 인구이동의 파도가 한반도를 덮쳤다. 해방 무렵 해외 거주 한국인은 300만 명이 넘었다. 만주와 일본, 중국 남동부 해안지대와 내륙지대까지 많은 한국인이 나가있었고,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에는 남양이라 불린 동남아시아와 필리핀 일대에도 군인이나 징용노무자로 끌려가 있었다. 해방 후 1년 동안 이들 중 230만 명 이상이 고국으로 돌아왔다. 또 정치적인 이유로 50만 명 이상의 북한주민이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한편, 대한민국 수립을 전후해서는 좌익폭동과 빨치산 활동에 대응한 군경의 진압작전이 또 다른 ‘전재민’들을 양산했다. 1950년 초까지 제주도와 여수 순천 일대를 중심으로 80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일자리를 위해 이곳저곳 배회하며 방랑하는 사람들, 먹을 것을 구걸하는 사람들, 거의 매일 같이 열린 대규모 정치집회에 모여드는 사람들, 갑자기 폭증한 도시인구 수용을 위해 급조한 임시수용소에 몰려드는 사람들, 그마저 얻지 못해 아무 곳에나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사람들. 서울은 부유하는 인간 군상의 도시였다. 위생이나 보건문제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굶주린 채 우왕좌왕하는 군중들 사이에서 세균과 바이러스가 제 세상을 만난 듯 활개 치기 시작했다. 페스트와 콜레라, 두창, 디프테리아, 장티푸스 등 각종 전염병이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창궐했다. 1948년에 태어난 44만 명의 아기 중 돌을 넘기지 못하고 죽은 수는 무려 18만 명, 40퍼센트에 달했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핵무기를 제외한 당대 최신의 살상무기가 총동원된 새로운 전쟁이었다. 전쟁 중 미 극동공군은 폭탄 46만 톤, 네이팜탄 3만 2,357톤, 로켓탄 31만 3,600발, 연막 로켓탄 5만 5,797발, 기관총 1억 6,685만 3,100발을 쏟아 부었다. 북한의 전쟁을 도운 중국과 소련이 어느 정도의 화력을 쏟아 부었는지는 공식 기록이 없으니 확인할 길이 없다. 이 전쟁으로 한반도 전역은 갈기갈기 찢겼고, 그 안에 사는 생명체들이 무수히 살상되었다. 한국인들이 상상도 하지 못한 새로운 차원의 고통과 상처, 질병의 세계가 열렸다.

해방과 미군정기, 대한민국 정부 수립,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과 종전에 이르기까지 8년 동안 격동의 근현대사를 살면서 한국인의 몸 또한 물리적으로 엄청난 체험을 했다. 온갖 질병과 세균, 총탄과 포탄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었고, 거대한 고통과 두려움을 고스란히 몸으로 겪어낸 시간이었다. 이 책은 신체 위생과 질병, 의료의 관점에서 들여다본 한국인, 그리고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이야기다.

2. 질병을 범죄처럼 다루던 시대
1946년 2월 말, 경상도 선산에서는 두창과 티푸스, 장티푸스, 디프테리아, 성홍열이 동시에 발생하여 많은 환자와 사망자가 속출했다. 한 지역에서 여러 종의 치명적인 전염병이 동시에 경합하는 일은 흔치 않지만, 해방 후 한국에서는 이런 일이 오히려 일반적이었다. 같은 해 3월에 한반도에서는 한 번도 발병한 기록이 없는 페스트가 춘천에 침투하여 사망자를 냈고, 5월 부산에서 발생한 콜레라는 불과 두 달 만에 전국에서 6천 명 이상의 환자와 3,300여 명의 사망자를 내기에 이르렀다. 11월에는 서울에서 두창이 유행했는데, 치사율이 40퍼센트에 달했다. 1949년 벽두에는 유행성 독감이 번져 열흘 만에 서울에서만 565명이 목숨을 잃었다.

성병과 결핵, 마약중독은 해방 후 한국의 ‘3대 망국병’으로 꼽혔다. 1948년 남한의 결핵 인구는 불과 3년 전인 1945년 해방 당시보다 무려 두 배로 불어났다. 열악한 영양 상태와 위생환경, 대규모 정치모임과 집회가 결핵 확산의 주범이었다. 1948년 부산 시내에서 성병치료를 받는 환자는 4만여 명이었는데, 이는 당시 부산 인구의 10퍼센트에 육박하는 숫자였다. 광범위한 궁핍과 남성 실업인구의 폭증이 성매매 여성을 늘렸다. 해방 직후 일본인들이 서울 답십리 전매국 공장과 진해 해군기지에 보관되어 있던 생아편 11톤과 모르핀 10톤을 싼값에 시중에 풀어버리자 마약 중독자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만주에서 귀환한 사람들 중에는 여행경비 마련을 위해 아편을 가지고 들어오는 사람도 많았다. 마약 확산을 막기 위해 군정청은 마약취체령을 공포하고 단속에 나섰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편 당시 소록도에는 세계 최대의 나환자 시설인 소록도 갱생원이 있었는데, 해방 후 일본인 직원들이 철수를 하면서 수백 명의 환자를 학살 또는 인근 바다에 유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와중에 5천여 명의 나환자들이 수용소를 탈출, 내륙 각지에 숨어들면서 나병에 대한 공포감과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이렇듯 당시의 많은 질병과 병리적 현상들은 해방 직후의 사회 혼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32~41쪽)

행정적 관점에서 보자면 질병과 범죄에 대처하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같다. 사회의 안정에 위해를 끼치는 범죄자와 개인의 건강에 해악을 끼치는 세균은 모두 불순, 불량, 불온, 부정한 것으로 파악된다. 치안과 위생행정의 근본목적은 이들 요소를 적발, 차단, 격리, 제거하는 것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 경찰은 범죄와 질병에 관한 행정 사무를 같이 담당했다. 하지만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경찰은 보건행정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보건위생 전담부서인 보건후생부가 생겼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는 병원 설립과 운영, 의학교육 전반에 관한 통제권을 장악하고 한국인들에게 서양 근대 의학의 혜택을 주지 않았다. ‘근대성’을 한국인들의 손이 잘 닿지 않는 곳에 놓아두고 끊임없이 유혹하는 미끼로 삼는 편이 식민통치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1885년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이 출현한 뒤 60년이 지나도록, 한국인 환자의 대다수는 민간요법에 의존하거나 무당을 찾았다. 미군정 보건담당자들은 새로운 의료체계를 수립하기 위해 미국식 의학교육과 재교육을 통해 의료인 양성을 서둘렀다. 개업의사 전성시대가 열렸고, 미군용 의약품과 유엔 구제부흥사업국의 원조 의약품을 사용하고 효험을 확인한 사람들은 곧 서양 약품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되었다. 페니실린, 설파다이아진은 당대의 ‘만병통치약’이 되었고, 가짜 약이 판을 치기 시작했다.

3. 질병과 고통의 전시장, 한국전쟁
1949년이 저물어갈 무렵, “내년은 38선이 이사 가는 해”라는 말이 떠돌았다. 서기 1950년은 단기 4283년으로, 뒤집어 읽으면 3824가 되는 데서 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말장난만은 아니었다.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해 있었다. 1948년 대한민국의 단독정부 수립 결정 이후 좌익의 격렬한 반대운동이 이어졌고, 4월 제주 폭동, 10월 여수 순천 반란사건,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활동 등으로 대한민국은 내란상태에 가까웠다. 전시 의료를 강화하기 위해 정부는 1949년과 1950년 초에 전국의 모든 병원장을 소집하여 단기훈련을 받게 하고 예비역 군의관으로 편입시켰다.(191쪽)

그러나 막상 전쟁이 터졌을 때, 의사들은 자신들이 쓸데없는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앞에 전개된 ‘전쟁 상황’은 너무도 압도적이었고, 상상도 하지 못한 상태의 환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전쟁 발발 1년 사이에 전선은 38선에서 낙동강으로, 서울로, 압록강으로, 다시 38선으로 이동했다. 한반도를 남북방향으로 톱질하듯 오르내린 ‘톱질전쟁’ 기간이었다. 그 사이 전선의 기온은 영상 30도에서 영하 30도 사이를 오르내렸다. 한여름 무더위와 장맛비, 세균과 돌림병도 힘들었지만, 한겨울의 추위와 동상도 공포스러웠다. 군대에서 탄환이나 파편에 위한 복합골절, 동상은 생각할 여지 없는 ‘절단수술’ 대상이었다. 에테르 같은 아주 기초적인 마취약조차 없어 정신이 멀쩡한 환자를 묶어놓고 톱으로 다리를 절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수술장 양동이에는 동상환자들에게서 잘라낸 손가락 발가락이 금세 수북하게 쌓였다.(244~248쪽)

전쟁 중 거의 모든 한국인은 군인이나 피란민, 포로 중 어느 한 집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1951년 8월 보건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국민의 99퍼센트가 영양부족 상태였다.(217쪽) 광범위한 영양실조와 기생충 감염은 빈혈, 설사, 피부염 등을 국민병으로 만들었고, 천연두, 티푸스, 콜레라, 말라리아, 결핵, B형 일본뇌염은 일종의 풍토병이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의 한 간호장교는 “복부 총상을 당한 한국군을 수술할 때에는 위속에서 수십, 수백 마리의 징그러운 기생충을 꺼내야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207쪽) 민간인이 처한 환경은 군인보다 더 열악했다. 한 미국 군의관은 한국을 “책에서만 보던 질병의 왕국”이라고 표현했다.(206쪽) 1940년경 40만 명이던 결핵환자는 해방 이후 5년간의 혼란 속에서 120만 명으로 늘었고, 전쟁 1년여 만인 1951년 10월에는 280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부상과 곪아터진 상처는 종종 파상풍과 패혈증으로 ?어졌고, 두창, 폐렴, 수막염, 간염 등도 아주 흔한 질병이었다. 전염병을 막기 위해 후방의 군인과 피란민들은 수시로 예방접종을 받았다. 그러나 주사기가 부족했다. 수십 명에게 하나의 주사기를 사용하는 것은 일반적이었다. 이후 수십 년간 한국인을 괴롭힌 간염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중의 빈번한 예방주사 때문이었다.

미군 전투기는 종종 피란민을 북한군으로 착각하여 네이팜탄을 투하했는데, 아주 잔인하고 무차별적인 무기였다. 네이팜탄 피해자는 얼굴과 손목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얼굴에 달라붙은 불붙은 파편은 그것을 필사적으로 떼어내려는 손가락을 따라 손목에까지 옮겨갔다. 피해자들은 눈, 코, 귀, 입이 손상되고 호흡기마저 상했다.

공식통계에 의하면 한국전쟁 중 200만 명 이상이 죽거나 다쳤고, 폭격으로 700만 명 이상이 살 곳을 잃었다. 전쟁에서 발생한 많은 고통과 죽음에는 이유가 없다. 억울함을 호소할 곳도 없다. 그저 영문도 모른 채 아프고 죽어갈 뿐이었다. 삶도 죽음도 너무 가벼운 시대. 아픈 시대의 아픈 사람들이 바로 60여 년전 한국인들의 초상이다.

4. 한국인, 청결과 위생 담론을 내면화하다
전쟁의 역사를 살펴보면 20세기 중반까지 전시 의료의 역할은 사람을 살리는 ‘의술 발전’보다는 ‘환자 관리’에 더 치중되어 있었다. 군 병원이 의술과 체계 양면에서 괄목할 만한 진보를 이룬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다. 난제로 남아 있던 외과 부문의 여러 문제들이 해결되었고, 항생제는 2차적 감염으로 인한 사망률을 크게 낮췄다.

38선을 중심으로 전선이 남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1년간의 톱질전쟁이 지나고 비교적 안정적인 대치상태가 장기화되면서 미군 의무부대는 환자 후송체계와 수단, 병원 체계와 조직 등에 관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어 실행에 옮겼다. 앰뷸런스와 헬리콥터 후송, 이동외과병원(MASH)의 일반화는 시공간상의 많은 문제를 해결해주었고, 본국의 첨단 의료진과 의료시설이 지속적으로 지원되면서 한국전쟁의 전시 의료 수준도 높아졌다. 국군 병원은 전쟁 중 미군과 유엔군 병원들의 모델로 조직을 혁신했다. 한국에서 병원 현대화의 첫발을 내디딘 것은 군 병원들이었던 것이다. 군 병원은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고 부상병이 크게 줄어든 1951년 중반부터는 민간인 환자를 함께 돌보았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현대적 종합병원을 체험한 상태였다.(224~227쪽)

의료 문제에 관한 한 아직 중세의 무지와 완전히 결별하지 못했던 한국인 대다수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불과 3년 만에 서양의 의학지식을 빠르게 흡수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쟁터에서 체득한 절박한 지식이다. 약에 대한 맹신, 항생제 남용 등 현대 한국인의 의약품에 대한 태도도 대부분 이때 형성되었다. 한국인들은 그 이전까지, 자발적으로든 강제로든 그토록 다양하고 많은 약을 몸 안에 들인 적이 결코 없었다.

인류 전쟁의 양상을 살펴보면 1,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그 모습이 근본적으로 바뀜을 알 수 있다. 전쟁은 언제나 정치가들이 일으켰지만, 19세기까지의 전쟁은 군인들만 하는 짓이었다. 전장이 아닌 지역에서는 불안감은 있었으나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1차 대전 때 처음 모습을 드러낸 입체전은 전방과 후방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했다. 곡사포는 전선을 가로질러 상대방의 후방을 공격했고, 비행기는 넓은 지역에 흩어진 상대편 병사들을 하늘에서 관찰하게 했다. 무전기와 전보는 전쟁 상황을 국내 전역의 일반국민들에게도 실시간으로 전달했다. 전쟁으로 인한 인적, 물적 피해와 심리적 긴장감에서, 전방과 후방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가 사라졌다. 입체전은 총력전으로 이어졌다. 총력전 체제하의 국가는 국민의 몸뿐 아니라 정신까지도 동원했다.

전쟁은 한국인 모두에게 국민이 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거에 깨우쳐주었다. 전시 국가는 국민을 자신의 목적에 동원했을 뿐 아니라, 국민의 생각마저도 감시했다. 국민의 몸과 생각은 개인의 것인 동시에 국가의 것이기도 했다. 비애국적 국민뿐 아니라 병약한 국민도 국가에 해로운 존재였다. 국가는 건강한 국민을 만들기 위해 의학의 시선으로 국민을 살폈고, 국가의 관점을 내면화한 국민들 역시 의학의 시선으로 자기 몸을 살피는 방법을 배웠다. 더불어 전쟁 중 미국이 가르친 현대 의학도 현대 한국인을 만드는 핵심지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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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노고에 박수를~
누렁이 ㅣ 2014-08-05 l 공감(0) ㅣ 댓글(0)



균형잡힌 시각으로 그 당시의 한국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madwife ㅣ 2011-11-07 l 공감(1) ㅣ 댓글(0)








총 : 3편




현대인의 탄생 리뷰~ 좋은날 ㅣ 2014-12-22 ㅣ 공감(2) ㅣ 댓글 (0)
제목만 봐서는 어떤 책인지 감이 잘 오지 않는다. 이 책의 부제는 해방-한국전쟁기 한국인의 질병과 위생, 의료 라고 적혀있다. 책이 서술하고 있는 시간대는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해방을 맞이하는 혼란기이다. 이때 한국인들에게 주어졌던 삶의 환경과 의료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현대의학 자체보다는 한국인이 현대의학을 수용한 방식과 과정이었다고 머리말에 적고 있다. 그래서 현대인은 의학의 시선으로 자기 몸과 생활습관, 주변 환경을 살피고 교정하는데 익숙한 사람들이므로 해방이후 한국전쟁기까지의 보건의료사는 현대 한국인의 탄생이라 할 만하다고 적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확실히 그 당시의 보건의료사와 관련된 내용을 접할 수 있었다. 국가행정력이 전무한 상태의 해방기에 도시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전재민과 이재민이 몰려 들어오고 집과 음식은 없는데 사람들만 많아지니 위생상태의 의식주 문제는 엄청난 사회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전염병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질병은 범죄처럼 다루어지기도 해서 환자를 격리 차단하기 급급했다고 한다. 그런 해방기부터 한국전쟁까지의 시기의 질병과 위생상태, 의료체계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사회의 안정에 위해를 끼치는 범좌자와 개인의 건강에 해악을 끼치는 세균은 모두 불순, 불량, 불온, 부정한 것으로 파악된다. 치안과 위생 행정의 근본목적은 이들 요소를 적발, 차단, 격리, 제거하는 것이다. 다만 서양 근대의학이 병자로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몸에 침투하는 병원체에 관심을 집중한 반면 식민지 치안 행적은 식민통치의 기반을 동요시킬 우려가 있는 사람들을 병원체 처럼 취급했다.” 위에 인용된 단락이 저자가 이 책을 바라보는 관점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국가권력이 경찰과 군인을 통해서 시민들을 관리한 것 처럼 현대의학도 질병을 그런 식으로 다루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것을 비슷하게 등치시켜서 그 당시 사회상을 보게끔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사료들이 저자의 의도대로 편집되기는 했지만 몇 가지 의문점이 들었다. 현대의학을 수용하는 방식과 과정을 다루고 있다고 했지만 지금의 서양의학은 해방이후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 19세기 중후반부터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정도는 당연히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이 책에서도 조선후기의 역사도 서술 되어 있다. 하지만 저자가 말한 전제라는 부분에 있어 현대의학을 수용한 방식과 과정이라고 하기에는 시기가 맞지 않는다. 저자는 해방이후 한국전쟁기까지의 사료를 중심으로 이 책을 썼기 때문이다. 현대의학의 수용과정이라는 관점이라면 책을 쓰는 전체 테마가 달라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해방과 한국전쟁에 시기를 국한한다면 ‘해방이후 어지러웠던 위생과 보건의료환경에서 현대의학이 한국사람들에게 어떤 선입관을 남겼는가?’ 한국인이 약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또는 ‘해방이후 보건의료사’ 이런 주제가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 책이 조선인이 미군정과 국가통제를 통해서 현대적 한국 시민으로 만들어져 갔던 것을 마찬가지로 현대의학도 시민들을 의학의 시선으로 몸을 그렇케 생각하게끔 만들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쓰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 스스로도 깔끔하지 않은 거친 스케치였다고 표현한 것 처럼 개인적으로는 그런 부분이 아쉽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다루어진 사료의 팩트만을 생각해본다면 접할 수 없었던 해방이후의 보건의료사를 볼 수 있었던 것 같다.해방공간의 무정부상태, 행정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도시를 밀려드는 전재민과 이재민은 어떤 최악의 상황을 연출할 수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재앙처럼 다가오는지..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고충을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었다. 일부의 내용은 소설 한강에서도 묘사되었던 기억이 있다.

당시에 유행했던 전염병들 말라리아, 페스트, 콜레라 티푸스, 두창, 장티부스, 드프테리아, 재귀열, 유행성 뇌염, 유행성 독감, 폐렴, 성홍열등이 인구이동이 잦은 도시지역을 강타했던 내용을 접할 수 있었다.

1949년 3대 망국병으로 나병, 폐결핵, 성병을 지목하고 실태를 발표했다. + 기생충감염 그리고 해방이후에는 나병 대신에 마약중독이 3대 망국병이였다고 한다.

대학자치에 대해서 미군정의 통제권이 들어가면서 이사회가 만들어지는 과정도 자세하게 서술되어있다. 아마도 이 책 챕터중에서 가장 길고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평균적으로 챕터가 10페이지정도로 편집되어 있는데 이 부분은 무려 30페이지에 걸쳐 설명하고 있다.

MASH 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이동외과병원을 말한다. 한국전쟁 당시에 응급수술을 제때 잘하기 위해서 미군이 군부대 단위에 설치운영했던 것을 한다. 무조건 자르고 볼 수 밖에 없는 현실? 절단의 천재들 외과의사들에 대한 안타까운 이야기들도 있다.



전쟁, 홍수, 지진등 자연재앙은 삽시간에 그 주변의 위생상태를 악화시킨다. 지금도 세계적인 구호단체들의 신속한 도움없이는 전염병이 생겨나고 많은 사람들이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해서 죽어간다. 1950년이라는 시간대로 거슬러 올라가 정부가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 그리고 50만명씩이나 몰려드는 서울과 기타도시들은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상황을 의료환경이라는 시각으로 볼 수 있어서 그 시간대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한국전쟁상황은 이전에 폭격이라는 책을 통해서 그 피해상황을 많이 접할 수 있었는데 이책에서는 UN으로 참전했던 나라들이 어떻케 다른 방식으로 구호를 하고 환자치료를 해줬는지에 대한 내용들이 있어서 새롭게 다가왔다. 그리고 해방이후의 보건의료사에 한의학의 역할에 대해 충분히 다루지 않았던 점은 아쉬움으로 생각되었다. 그나마도 조금 언급하고 넘어가는 수준이다. 균형잡힌 시각을 통해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게 독자에게 신뢰를 받는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애초에 전공자가 아니다 하더라도 결국 자신의 편견을 고스란히 책에 남긴 셈이다.




내 몸과 네 몸의 역사 kikaider ㅣ 2013-10-17 ㅣ 공감(1) ㅣ 댓글 (0)








전 우용의『현대인의 탄생』은 부제인 '해방~한국전쟁기 한국인의 질병과 위생, 의료'로 짐작할 수 있듯, 미시사의 관점으로 해방기부터 6.25 전후의 한국 현대사의 일부를 의학적 시각으로 풀어 가고 있는 독특한 역사서다. 현대의 한국인들이 건강한 육체와 건전한 정신을 내면화하기까지, 해방 전후와 한국 전쟁기는 말 그대로 혁명을 강요했다. 그 과정에서 전통의학과 서양의학은 충돌과 타협을 거쳐 각자의 영역을 확보해 나갔고, 한국인들도 그 질서 속에 강제로 편입되어 '국민'으로서의 identity를 형성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결국 오늘의 나는 숱한 죽음과 질병의 위협을 물리치고 어떻게든 살아남아 생명을 보존하고자 발버둥 치셨던 고난의 한국인 부모님께서 나누어주신 소중한 목숨이라는 것!

해방, 한국 전쟁을 겪으며 변해 온 한국의 보건의료 lonefox ㅣ 2011-11-08 ㅣ 공감(0) ㅣ 댓글 (0)





해방 이후 75만 여명의 일본인이 조선을 빠져나가고 정치, 경제 등 사회 전 분야가 대거 열리면서, 새로운 삶과 꿈에 부풀어 유랑하는 군중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추위, 굶주림, 비위생적인 생활환경 속에서 미생물의 번식도 활발해졌고, 두창, 티푸스, 콜레라 등은 물론, 결핵, 성병, 마약중독, 기생충 감염, 나병, 정신질환이 창궐했으며, 이념 대립, 사회 인프라 부족으로 각종 사고와 테러도 끊이지 않았다.


미군정기, 행정의 토대가 취약한 상황에서 치안과 위생 행정이 적발, 차단, 격리, 제거의 유사한 목표 아래 취급되었고, 초기에는 경찰이 위생 방역 등을 담당했으며, DDT세례가 수시로 이루어졌다. 미군은 자국 군인의 안전 보호를 위해 모든 사회 문제를 보건 문제로 취급한 데 비하여, 한국인들은 먹고 사는 것이 먼저였으므로, 보건위생을 부차적인 사안으로 취급했다.



해방 이후 좌익, 우익 모두 보건의료 체제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한 상황에서 한국인 보건의료정책의 책임자였던 이용설은 제도나 시설보다는 인력에, 환자보다는 의사에, 의료 수요보다는 의료 공급에 관심을 쏟았다. 서양식 의료를 제공한 병원은 일본 제국 의료와 결합한 병원, 미국 선교회에 의해 설립된 병원, 조선과 대한 제국 정부가 설립한 국립 병원들이 있었는데, 미군정기, 미군은 의사가 부족한 상황이므로 병원을 늘릴 필요가 없다고 보고, 의사의 자질 향상을 우선 과제로 꼽았다.



그러나 의사들은, 점차 하는 일은 많으나 박봉인 관공립병원보다는, 의료 수요 증가에 따라 진료소를 차리는 것을 선호했고, 개업의사 전성시대를 열었다. 국공립병원의 공공성이 열악해지면서, 힘 있는 부서들이 운수병원, 국민보건병원, 경찰 병원 등 독자적으로 병원을 개설했다. 공공의료 와해에 대한 여론의 분노를 무마시킬 대안으로 보건소가 제시되어, 미군정이 주요도시 6곳에 국립 보건소를 설치했으나, 이 역시 미흡했으며, 보건소법이 제정되었으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사문화되었다.



농어촌에서는 한지의사들이 비싼 치료비를 받고 효과가 의심스러운 방법으로 치료를 시행했으며, 미군정이 주요 병원에 의약품을 원조했으나 통제가격으로 자유판매 한다는 원칙 하에서 오히려 약값이 치솟고, 가짜약이 판을 쳤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이 문명의 시혜자임을 강조하기 위해 양의들에게 희소가치를 부여했고, 전통 의사들은 의생으로 이름을 붙이고 식민지 보건의료 행정의 말단에 배치했다.



의사의 자격은 일본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한 사람, 외국의사로 총독부의 인정을 받은 사람, 관 지정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사람, 개인 병원에서 조수로 일하다 어깨 너머로 배워 의사가 된 사람 등이 뒤섞여 의사 자격이 달라 서로 차별 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터, 이에 미군정은 의학교육을 미국식 기준으로 표준화하려 했다. 특히 전문학교와 대학을 통합하려는 시도 속에서 의학교육의 연한을 통일하겠다는 구상이 국립 서울대학교 설치안으로 확정되면서, 논리적, 이념적, 물리적 충돌이 사회 전반을 휩쓸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 유일의 의사 단체였던 조선의사회는 해방 이후 좌우익의 대립이 있었으나, 이념적 통합을 이룬 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대한의학협회로 이름을 바꾸고, 분과 학회 구성에 주력했다.



한편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추위, 굶주림, 헐벗음이 시작됐고, 전염병이 더 창궐했으며, 나병, 결핵, 성병 등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미군은 전쟁 중에 헬리콥터 후송과 이동외과병원을 운영하였고 후방에서는 대규모의 종합병원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국군은 여건은 갖추어지지 않았지만, 미국의 모델을 따랐다.



1951년 이후 군 병원은 종합병원의 역할을 담당했으며,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병종별, 상태별 환자분리, 해당 전문의 배치, 협진, 치료 및 회복까지 책임지는 현대적 종합병원을 체험하게 됐다. 초기에는 절단 수술로 일관했던 한국의 의료 기술도 전쟁 중 많은 환자를 감당하면서, 휴전 무렵에는 상당한 수준의 의료 기술을 갖게 됐다. 전쟁을 치르면서 의료 수요가 급증하자 돌팔이 의사도 횡횡했다. 한편 1951년 국민의료법이 국회에 전격 상정되면서, 한의와 양의에게 같은 자격을 주는 것이 결정됐다.



한국인은 해방, 전시 동원 체제를 경험하면서, 청결과 위생의 담론을 내면화했다. 신체와 정신이 모두 군과 국가의 전력을 구성하는 상황에서, 감염자가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감시를 시도했으며, 국가의 통제와 훈육에 순응하고, 국가가 요구할 때는 언제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데 익숙해졌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개발된 항생제들은 한국이라는 초대형 소비시장을 만났고, 일본은 의약품, 의료기기 제조·생산의 전초 기지가 됐다. 의약품은 부피가 작고 값이 비쌌기 때문에 현금처럼 유통되었고, 뇌물로도 사용됐다. 다치면, 일단 페니실린부터 맞은 군인들의 경험이 민간으로 전파되었고, 의사들도 완벽한 치료보다는 빠른 치료에 치중했으며, 항생제로 빠른 효험을 본 환자들은 약에 대한 자신들만의 “상식”을 만들어냈다. 즉 민간요법으로 약초를 쓰던 방식으로 의약품을 쓰기 시작하면서, 약은 한국인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아하는 품목이 되었다.



역사적 대혼란을 겪으면서, 한국인의 몸과 질병에 대한 담론은 철저하게 대상화된 측면이 있으며, 공공의료가 취약할 수 밖에 없었던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급격하게 시장 위주의 공급 구조가 구축되었고, 약에 의존하고, 약을 선호하는 문화가 자리 잡게 된 것임을 확인하게 됐다. 왜 보건의료의 공공성을 논의할 때, 한국의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맥락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지, 이 책을 통해서 다시 상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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