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05

17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 네이버 블로그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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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 2017. 8. 18. 2:53 URL 복사  이웃추가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 출판 뿌리와이파리 발매 2015.06.16. 0.

책을 읽은 이유

이 ‘문제 많은’ 책을 출간된 해인 2013년에 샀다. 덕분에 내 책은 34곳이 빈칸으로 처리된 책이 아니라 원본이다. (2015년에 ‘도서출판 등 금지’ 가처분신청 ‘일부 인용’ 결정에 따라 34곳을 빈칸으로 처리하 고, 저자의 새 서문과 2015년 5월 5일 공표된 세계 일본연구자들의 ‘일본의 역사가들을 지지하는 성명’ 등을 부록으로 실은 제2판(34곳 삭제판)이 출간되었다.)



책을 사 두고 읽지 않다가 이제야 꺼내 읽은 이유는 다음 웹툰 “곱게 자란 자식” 때문이다. 곱게 자란 자식 평범한 시골 소녀 이야기. .소녀만 평범한 그런 잔… webtoon.daum.net “곱게 자란 자식”의 배경은 일제강점기 말이다. 1938년부터 (아마도) 1945년(지금 연재분에는 1944년 쯤이 나온다.)까지가 배경이다. 주인공 소녀는 가난한 평민이며 일제 치하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민중 들의 이야기가 웹툰의 내용이다. 그러니 ‘일본군 위안부’가 등장할 수밖에 없는데 하필이면 너무 잔혹하 게 그려 놓아 나는 극도로 심란해졌다. 과연,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 ‘사실’일 수 있을까. 이 의문에 사로잡혀 마침 떠오른 책이 『제국의 위안부』였 다. (온라인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검색해서 읽은 이야기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1. 이 책의 의도

『제국의 위안부』에 관해선 이미 부정적인 평가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책을 읽지 않고서는 평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주장은 ‘단어’로 떠도는 것이 아니라 ‘문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이 책은 연구서다. 사료들을 조사하고, 그런 자료를 근거로 삼아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책이다. 그 렇다면 근거가 적절한지부터 따져야 한다. 몇 년 전 일본사를 공부한 적이 있다. 공부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일본 제국주의 시절 탄압의 대상은 ‘한 국인’뿐이 아니라는 점이다. 제국주의를 반대하던 자국민들, 즉 일본인들 역시 한국인들이 받았던 수위 의 고초를 겪었다. (박정희 정권 때, 독재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탄압받은 것과 같은 이치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고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상처겠지만 상처를 ‘극복’하고 싶다면 ‘현실을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도 여기에 있다. “‘조선인 위안부’는 분명, 식민지가 된 나라의 백성으로서 일본의 국민동원과 모집을 구조적으로 거부 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일본의 노예였다. 조선인으로서의 국가 주권을 가졌다면 누릴 수 있었을 정신적 인 ‘자유’와 ‘권리’를 빼앗겼다는 점에서 분명 ‘노예’였다.”(117쪽)      “위안부의 이용을 ‘상식’이자 ‘합법’으로 여기는 사고에는 그 상황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는 감각이 존재 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여성을 압도적인 다수의 남성들이 윤간했다는 사실, 한 사람의 인간을 ‘인간’이 라기보다는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처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일본인이기 이전에 인간 으로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아닐까. 조선인 위안부들이 ‘존엄성’을 회복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바 로 이 때문이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인간이 아닌 ‘물건’으로 취급되었던 과거의 어느 한때를 수치스러 워하는 것이다. 그 수치를 만든 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는데도, 수치스러운 공간을 벗어난 뒤로도 수십 년 동안 그 수치는 온전히 그녀들의 몫이었다.”(157쪽) 저자는 (이 책에 대해 ‘단어’로 떠다니는 언론 보도와 달리) 식민치하의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인간의 존 엄성이 박탈된, 상식 밖의 일로 규정하고 있다. “말하자면 ‘위안부 문제’는 국가의 문제일 뿐 아니라 더 본질적으로 자본의 문제다. 제국 국가가 ‘교 역’을 빌미로 타국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하고 상품을 팔아 경제적 이득을 취했던 것처럼, 업자와 포주들 은 여성을 ‘상품’화해서 소비자에게 팔았다. 그런 의미에서도 ‘위안부 시스템’에서 실제로 가장 많은 이 독서와 글쓰기, 정샘국어논술 이 블로그에서 검색 1/5/2020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 네이버 블로그 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reamerfs&logNo=221076448625&parentCategoryNo=&categoryNo=100&viewDate=&isShowPopularPost… 3/6 득을 취한 것으로 보이는 ‘업자’의 존재를 보지 않고는 ‘위안부 문제’의 본질이 보이지 않는다.”(279쪽)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에 의해 지탱되어온 근대 국민국가 체제는, 국가세력을 확장하거나 유지하기 위 해 군대를 조직했고 고향을 떠나 ‘나라를 위해’ 일하는 그들을 ‘위안’할 여성들의 조직을 유지해왔 다.”(287쪽)      “위안부 문제는 국가가 자국의 세력(경제력)을 확장하기 위해 동원한 가난한 여성들의 문제다. 그녀들 은 ‘이동’에 의해 경제력을 갖춘 주체로 재주체화했다. 실질적으로 보수를 받지 못하거나 열악한 보수 밖에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아 보이지만, 자본주의적 경제가 “개인을 공동체의 구속에서 해방시키고, 제 국-코스모폴리스의 인민으로 삼”(가라타니 고진, 207쪽)는 과정에서 생긴 존재이기도 했다.”(306쪽) 다만, 이러한 문제를 일으킨 주범은 ‘일본’이라는 국가를 넘어 ‘제국주의’와 ‘자본’이라 주장한다. 이 주장 에는 충분히 동의한다.

2. 몇몇 주장의 문제점 그러나 이 책의 몇몇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부분들은 주제를 흐리게 하고, ‘한국인’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만드는 동시에 작가의 의도를 오해하게 만든다. 우선, ‘일본’보다는 (‘위안부’를 관리하는) ‘업자’를 더 문제시 삼는다거나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 가 기본적으로는 동지적인 관계였”(67쪽)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한국인 안에 있는 “업자”를 찾아내서 응징하는 것은 중요하다. 한국사의 가슴 아픈 부분은 일제 치하만이 아니다. 친일파 척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여전히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문제들에도 있기에 앞으 로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다. (저자는 ‘업자’들이 반드시 ‘친일파’라기보다는 ‘자본’에 충실한 사람들이 었다고 지적한다. 이 주장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일제의 협력자라는 의미로 확대해서 보면 친일파라고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제국주의’를 지향하고 그 논리에 충실했던 일본 역시 ‘책임’은 져야 한다. 아무리 제국이 앞선다고 해도 저자의 주장처럼 ‘간접적 책임’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일본이 ‘악’한 나라가 아닐 수는 있어도, 제국주 의 앞에 일본이 붙는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일본군이 ‘조선인 위안부’들에게 “동지적 관계”를 기대했다고 해도 실현될 수 없는 바람이기에 “동지적 관계였다”는 서술은 맞지 않다. 저자의 주장처럼 1944년에 모집된 ‘정신대’와 ‘위안부’는 다르고 초기의 ‘위안부’는 ‘모집’ 형태였다고 하더라도, 과거 위안부였던 할머니들의 증언대로 본인이 어떤 일을 하게 되 는지를 알고 갔던 경우는 드물다. ‘가난’한 여성이었기에 ‘돈’을 벌기 위해 따라갔다고 해도 어떤 일을 하 는지 알려주지 않았기에 사기나 다름없다. 그런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성적 행위가 과연 ‘동지’적일 수 있겠는가. ‘위안부’의 역할이 성 행위만이 아니 라 때론 노래도 부르고 때론 간호도 하는 일이었다고 해도 ‘동지’의 차원으로 끌어올려질 수는 없다. 설사 “혹독한 체험을 한 이들에게도 ‘즐거웠던’ 순간은 없지 않았고, 군인에게 신세타령을 하면서 고향을 떠나 머나먼 타지로 이동해야 했던 ‘개미’ 같은 처지임을 서로 민감하게 감지한 고독한 남녀”였어도, “‘위 안소’가 지옥 같은 체험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면 “그런 지옥을 살아내는 힘이 되었을 연민과 공 감, 그리고 분노보다 운명으로 돌리는 자세 역시 기억되어야 한다”(76쪽)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일본의 군인들 역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국가에 의해 ‘강제로 끌려온’ 존재”였다고 해도 “남성이 자 일본인이라는 지배적 지위가 있다”(74쪽)면 ‘포장된 애국심’에 끌리는 강도가 ‘조선인 위안부’와는 달 독서와 글쓰기, 정샘국어논술 이 블로그에서 검색 1/5/2020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 네이버 블로그 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reamerfs&logNo=221076448625&parentCategoryNo=&categoryNo=100&viewDate=&isShowPopularPost… 4/6 랐을 것이다. 그들이 기대했던 ‘동지’는 적어도 스스로가 ‘일본인’이라는 의식이 있어야 가능하다. 격하게 말해서, 몇 십 년간 일제 치하에서 살던 당시의 조선인 위안부들이 설사 그런 생각을 했더라도, 해방된 지금 ‘당시의 강 요된 의식’을 찾아내 ‘동지적 관계’라고 부르는 것은 온당치 않다. 저자가 직접 일본 소설가 다무라 다이지로의 소설 「메뚜기」 속 내용을 살피며 “군인들에게 조선인 ‘위안 부’란 정당한 보수를 지급하고 이용하는 한 사람의 ‘창녀’조차 아니었”고 “신나게 인심 써도 되는 물건에 지나지 않았다”(145쪽)면서 ‘동지적 관계’를 운운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저자는 위안부의 ‘20만 명’설과 2011년에 세워진 ‘소녀상’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한다. ‘위안부’와 ‘정신 대’는 다른데 이 둘을 혼동하면서 숫자가 확대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이 부분은 자료가 분명하게 남 아 있지 않으므로,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렵다. 설사 숫자가 부풀려졌더라도 ‘위안부’ 사건 자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조선인 ‘위안부’들이 대개 어린 소녀였을 것이라는 추정은 상상에 불과하기에 위안부의 상징으로 ‘소녀 상’을 세우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저자의 주장 역시 본질을 건드렸다고 보기 어렵다. 일본의 자료(「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를 들어 “태평양전쟁 중인 19 44년 8월에 미얀마(버마) 미트키나미군의 함락 이후의 소탕작전에서 미군의 포로로 수용되어 전쟁정보 국OWI의 심문을 받은 ‘조선인 위안부’ “여성들의 평균 연령은 25세”였”(51쪽)다거나 몇몇 증언을 들어 스무 살이 넘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주장한다. 나이의 ‘오류’는 1944년에 정신대 모집에 명시된 ‘12세 이 상’이라는 부분 때문에 생겼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어린 소녀가 위안부가 된 사례”가 없지는 않았고 이러한 일의 주동자는 “우리 안의 협력자 들” 때문이지 일본이 지시한 바 없다는 주장은 논리적이지 않다. 우선 이 책에 제시된 ‘위안부’의 증언만 해도 스무 살이 넘었다는 주장만큼 십대였다는 증언이 있다. 어린 소녀가 위안부가 된 사례가 누구의 원인이든 있었다는 사실 역시 제시되어 있다면 그 중에서 왜 하필 여 성들의 평균 연령이 25세라는 자료를 더 믿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일제강점기는 조혼 풍습이 남아 있던 시기다. 그렇다면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이 십대였을 확률이 더 높 지 않을까. 아니. 설사 현재의 ‘소녀상’처럼 ‘모든 위안부’가 ‘어린 소녀’는 아니었다고 해도, 당시의 위안부들은 “사회 안전망을 갖지 못한 탓에” “자신의 신체를 팔아야 했던” “사회에서 가장 약한 자”(288쪽)였기에 ‘어린 소 녀’로 ‘상징’되어도 무리라 말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공식적으로 사과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에 대한 서술 역시 명확하지 않 다. 저자는 1965년의 한일협정에 의해 “개인에 대한 보상을 정부가 받았다”(171쪽)고 일본이 생각했음 에도 국제적으로 문제시되자, ‘아시아여성기금’을 마련하여 전달하려고 했지만 ‘민간’이 주최한 ‘위로 금’의 성격으로 ‘오해’하여 일부만 이 기금을 받았다고 말한다. 즉, 우리가 오해를 했을 뿐이지 실제로는 정부가 주관한 ‘속죄금’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러면서도 한일협정은 전후보상이지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은 아니었다(258-263쪽)고 말한다. 식민지 배에 대해 실제로는 공식적으로 사죄도 보상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도 ‘도의적 책임’만을 언 급한 ‘기금’을 ‘속죄금’이라고 규정짓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다. 식민 지배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 독서와 글쓰기, 정샘국어논술 이 블로그에서 검색 1/5/2020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 네이버 블로그 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reamerfs&logNo=221076448625&parentCategoryNo=&categoryNo=100&viewDate=&isShowPopularPost… 5/6 다면, 그 안에서 일어난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사과했다고 볼 수 없다. 우리가 일본에 분노하는 이유는 우리나라를 식민화하고 수탈한 36년에 대해 여전히 사죄하지 않기 때문 이다. 가해자가 잘못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데 피해자가 어떻게 용서하고 그들과 화해하는가. 과거청산을 위해 적대를 물려주는 대신 화해해야 한다는 저자의 권유에 동의한다고 해도 일본의 사죄가 없다면 화해는 여전히 불가능하다.

3. 그럼에도 읽어야 할 이유 이 책은 일독의 가치가 있다.

 ‘위안부’ 문제를 ‘한국’의 시각에서만 보지 않고 ‘세계’적 시선에서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겪은 식민지 치욕은 우리만의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일어 난 일이며 원인은 ‘제국주의’와 ‘자본’의 문제였음을 알 필요가 있다. 또 상처를 극복하려면 분노만 되새기지 말고, 상처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상처와 관련된 일들에 대해 다 방면으로 사유해야 한다는 주장도 옳다. 무엇보다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들을 ‘올바른 조선인 투사’로 존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 람의 개인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306쪽) 줘야 한다는 주장 역시 탁월하다. (국가의 일원이기에 앞서 한 사람의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누리는 삶이기도 하다.) 과거에 ‘위안부’였다는 이유로 여전히 그들을 ‘민족의 딸’로 만들어 그들의 삶을 ‘전시’하는 일에만 급급했 던 것은 아닌가. 그들의 삶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실질적 이득을 취하는 사람(제3장 한국지원운동의 모 순 중 1. 서울 정대협 운동의 공과 참고)이 따로 있다면, 이제는 ‘우리 안의 협력자’를 발견하는 일부터 시 작해야 한다. 덧- 이 책은 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 아니다. 그러므로 명예훼손죄는 당연히 성립 하지 않는다. 이의를 제기하려면 언론에서 보도되는 몇몇 대목만으로는 부족하다. 직접 읽어야 한다. 덧2-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이재승 교수가 쓴 서평도 첨부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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