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27
1907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 통일뉴스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 통일뉴스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은 끝나지 않았다<기고> 전재진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 대표
전재진 | tongil@tongilnews.com
승인 2019.07.04 11:16:23
지난 74년 동안 풍화될 위기에 놓여있던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을 김진홍 감독이 다큐영화를 제작하여 8월에 개봉한다 하니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다. 이에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는 다음과 같이 사건의 진상을 밝혀 국민관람에 이해를 돕고자 한다. /필자 주
①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이 지금까지 베일에 싸인 이유
▲ 우키시마호 희생자들을 위한 상징물. [자료사진 - 통일뉴스]
결론부터 말하면 미국은 2차세계대전 전쟁총지휘본부인 대본영의 전쟁지휘·지도자 히로히토를 살려야 했다.
미국을 제외한 다른 연합국가들의 조사관이 일왕 히로히토의 전쟁범죄를 조사하여 제소하려 한 일제관동군731부대 인간생체실험, 난징대학살, 일본군 세계여성성폭행범죄, 조선인강제징용·강제노동, 아시아를 대규모로 약탈한 황금백합작전 그리고 각종 제노사이드 등의 진상조사를 미국이 직접 나서서 방해하고 차단함으로서 A급 전범자인 히로히토를 극동전범재판소에 회부하고자 하는 연합국의 주권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미국은 동북아에서 소련과 중국의 사회주의 팽창을 저지하고 일본의 민주화를 내세웠으나 비겁한 전후처리였다는 국제적 비난을 피할 수 없으며 일본제국의 천황제 유지를 인정한 미국의 행위는 지구 생성 이래 최악의 범죄였다.
우리는 여기서 1945년 5월 스위스에서 일본과 미국 사이에 전개된 화평공작이 우키시마호 폭침사건과 직접 관련됨을 알아야 한다. 당시 스위스 주재 무관 후지무라 중령과 미국 국무성의 아렌 달레스 사이에 비밀공작이 있었다.
그 비밀공작에서 미국은 일본측에 요구사항이 없었으나 일본은 미국측에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하나는 천황주권을 유지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일본이 섬나라이기 때문에 배가 없으면 먹고 살길이 막막하니 현재 남아 있는 상선은 그대로 일본에 남겨 둘 것을 요구했다. 마지막 세 번째 조건은 대만과 조선을 그대로 둘 것 즉 대만과 조선은 일본인의 식량이 있는 땅이니 일본 영토로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 일본에서 건너온 물건. 일본제국의 대륙침략은 멈춰진 시계가 아니다. [자료사진 - 전재진]
바로 첫 번째 요구사항인 천황제를 유지토록 하려면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처리하면 안 되었다. 이렇게 일본이 항복하기 전부터 미국은 일왕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처리할 방침이 아니었다.
그런데 전쟁시기가 아닌 평화시기에 대본영의 군사적 조치에 따라 대형 제노사이드인 우키시마호 폭파사건이 자행되었다. 이 초대형 제노사이드가 국제사회에 알려지면 히로히토의 방패막이가 돼야 할 미국으로서는 난감해지면서 치명타를 맞을 판국이었다.
스위스 화평공작 첫 번째 사항으로 천황제 유지 약속이행으로 히로히토를 살리려고 일제관동군731부대 인간생체실험, 난징대학살, 일본군 세계여성성폭행범죄, 조선인강제징용·강제노동, 아시아를 대규모로 약탈한 황금백합작전 그리고 각종 제노사이드 등을 조사하지 못하도록 방해한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 바로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이다.
그래서 연합국총사령부 맥아더를 이용하여 일주일만인 9월1일에 이 사건의 전말을 덮었고 74년이 지난 지금까지 검은 베일에 싸여 있다.
② 시모키타반도에서는 왜 서둘러서 조선인을 내보냈나?
일본의 아오모리현 시모키타반도는 우키시마호에 승선했던 조선인들의 강제노역장이라는 점에서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의 발상지이다. 이 시모키타반도에는 일본의 4대 군항인 오미나토해군경비부가 주둔해 있었다.
미국의 전함이 북태평양에서 동해로 진격하려면 홋카이도와 시모키타반도 사이에 있는 츠가루해협을 통과해야 했다. 이 해협의 제해·제공권 확보와 일본 북방지역의 방위를 담당한 하코다테 해군기지에 군수물자를 공급하려면 시모키타반도의 군사요새화는 필연적이었다.
하여 대본영은 각종 군사설공사장에서 필요한 인력으로 조선인 9천명을 투입하라는 공문을 오미나토 해군경비부에 하달했다. 이 지역에는 대본영 공문 지령 이전에 이미 강제징용된 조선인과 아베시로 광산에서 일하던 조선인을 합하면 1만5천에서 2만여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일본군의 억압과 핍박과 학살과 고문치사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조선인이 일제 항복 후 귀국하려고 우키시마호를 타게 된다. 이 때 일본 대본영은 9월 중순부터 조선인 송환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시모키타반도에서 만큼은 8월13일 조선인긴급소개 명령이 떨어졌다.
▲ 연합국 소련, 미국, 영국, 중국의 일본 본토 분할점령(안). [자료사진 - 전재진]
1945년 7월 26일 공포된 포츠담선언 제7항은 연합국은 일본 영토의 보장점령 즉 분할점령을 의미하고 있었다. 이렇게 영국과 중국, 소련과 미국 네 나라가 일본 본토를 분할통치하기로 돼 있었으나 영국의 처칠이 미국의 트루먼에게 “소련이 극동에서 교두보를 설치하려 한다”고 통보하자 미국은 일방적으로 분할통치를 취소했다. 그 날이 8월 13일이었다.
하지만 소련군은 사할린에서 홋카이도와 일본 본토를 향해 진격해 내려왔다. 이 때 일본 본토 아오모리현에는 강제징용과 강제노동과 고문치사 학살로 억압받아 온 조선인이 집중돼 있었다. 이들 민족성이 강한 조선인이 진격해 내려오는 소련군과 합세하면 대규모 군단을 이뤄 소련에 할당되었던 일본 본토 북방지역이 소련군에 점령되는 것은 너무나 자명했다.
그래서 홋카이도와 마주보고 있는 시모키타반도 일대 군사시설에 투입되었던 1만여명의 조선인을 긴급 소개해야 했다. 당시 오미나토 일대로 몰려든 조선인을 소련군 스파이로 몰아붙이는가 하면 조선인을 음해하는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모두 유도된 음모였다. 그러면서 고향으로 보내준다며 우키시마호에 모두 태워 일본 교토부 마이즈루만에서 폭파침몰시켰다.
③ 우키시마호 침몰원인
미사와 비행장을 포함한 시모키타반도 일대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조선인이 오미나토항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멀리 이와테현 채석장과 홋카이도에서 내려온 사람들도 많았다. 이들 조선인들은 멀리 정박해 있는 우키시마호까지 거룻배로 오가며 승선하는데 3일이 걸렸다.
일본 군부는 검은 페인트를 칠해 배의 이름을 지웠고, 기관실 옆 창고에 자폭장치를 설치했다. 해군승무원들이 승선을 거부했으나 군법으로 다스리겠다고 협박하여 250명의 승무원도 탔다. 이 협박성은 조선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일부 강제승선임을 주장하게 된다.
승선을 완료한 배는 출항하지 아니하고 24시간을 해상에서 머물다가 22일밤 10시에 오미나토항을 떠났다. 무츠만을 빠져나온 배는 부산항을 향하는 직항로를 택하지 아니하고 일본 본토를 따라 남하하다가 마이즈루만으로 들어갔다.
이 때 해군 승무원들이 연료가 부족하여 보충해야 한다. 물을 실으려고 마이즈루로 들어간다고 수단을 피웠으나 모두 거짓이었다. 마이즈루만으로 들어간 배는 마이즈루방비부의 부두 접안을 회피하고 시모사바가 해변 3백미터 전방에 멈춰섰다. 기관실 기계도 껐다.
▲ 무츠만을 빠져나온 배는 부산항을 향하는 직항로를 택하지 아니하고 일본 본토를 따라 남하하다가 마이즈루만으로 들어갔다. [자료 출처 -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
▲ 우키시마호 침몰원인. [자료 출처 -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
곧 구명보트가 내려져 고위급 장교들이 빠져 나가자 나머지 승무원들은 마치 송사리떼처럼 헤엄쳐 모선을 빠져 나갔다. 그러자 굉장한 폭발소리와 동시에 중간 부분이 꺾이며 앞뒤가 들려 V자 형으로 가라앉았다. 선실에서는 화약냄새가 퍼졌고 미쳐 빠져 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아비규환을 이뤘다. 기관실 연료탱크가 터져 바다는 온통 중유로 덮였고 죽은 사람이 바다를 메웠다.
해군들은 구조에 나서지 않았으며 주변을 오가던 다른 배들도 사건 현장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이렇게 수 천 명의 사람의 생명을 집어삼킨 마이즈루만은 어둠이 깔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 침몰사건에 대해 일본 정부는 미군이 부설한 기뢰에 닿아(촉뢰:觸雷) 침몰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가 기뢰성상, 생존자들의 증언, 현장정황을 분석해 본바 일본 정부의 주장은 허위일 뿐이다.
당시 미군이 부설한 기뢰는 감응기뢰로서 수압, 전파, 음향의 영향으로 폭발하게 되어있다. 앞서 기술한대로 우키시마호는 멈춰 섰기에 수압이 발생하지 아니하고 기관을 껐기에 음향과 전자파가 발생하지 아니한다. 그렇다고 기뢰가 배 밑으로 다가와 부딪쳐 폭발할 논리도 아니다. 더구나 폭발소리는 2회였고 물기둥이 없었다.
따라서 침몰원인은 대본영의 조선인 긴급소개라는 군사적 조치에 따라 오미나토 해군경비부가 주도하여 출항 이전에 기관실 옆 창고에 설치한 자폭장치가 폭발하여 침몰되었다. 미군이 부설한 기뢰에 닿은 침몰이 아니다.
일본 정부가 이를 반박하려면 한국 정부와 한국의 진상규명회측에 반박자료를 제시하라. 그 증거는 74년이 지난 지금도 마이즈루만 해저에 있다. 일본 정부가 이를 인양 수습하여 그 증거로서 제시하기 바란다. 그 때 국제무대에서 혹독하게 따지겠다.
④ 사후처리의 부당성
우키시마호 침몰은 여행선 타이타닉호 침몰과는 그 정황이 질적으로 다르다. 타이타닉호는 여행객들이 타고 대서양을 건너다 빙산과 충돌하였으나 우키시마호는 일본이 일으킨 2차대전 전쟁터로 강제징용당한 조선인이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오던 도중에 일본 대본영의 명령에 따라 일본군부가 의도적으로 자행한 외국양민계획적대량학살(Genocide)이다.
그럼에도 2차대전 전후처리기구인 연합국총사령부에서 이 사건을 조사조차 하지 아니하고 단 일주일만에 사건의 전말을 조작•발표하고 마무리했다. 당해 12월 7일 일본 조선인연맹 아오모리지부 손일 위원장이 GHQ(연합국최고사령부)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소했다. GHQ 법무국 검찰과는 “사건발생 증거불충분”이라며 소를 기각했다.
마이즈루만에는 몇 명이 될지 모를 시체가 선실에 가득한 우키시마호가 마스트를 수면위로 내밀고 있었는데도 증거불충분이라며 기각한 것은 미국의 양심이 얼마나 비겁했는지 환하게 들여다보이는 대목이었다.
배를 즉시 인양하여 사망자의 신분도 확인해야 했고 부상자와 실종자도 조사해야 했으나 이런 일은 없었다. 해안가에 밀려든 시신을 굴비처럼 엮어 바닷가에 매뒀다가 타이라해병단 뒷산 골짜기로 옮겨 기름을 붓고 태워 그 자리에 매립했다. 고구마 밭에도 묻었고 인근 무인도 자연동굴에도 방치했다.
침몰한 우키시마호를 해저에 방치했다가 9년만에 인양할 때도 조일우호협회에서 유해를 원형 그대로 인양할 것을 요구했으나 이를 묵살하고 다시 다이나마이트로 폭파하였다. 9년 전에 죽은 사람을 다시 다이나마이트로 산산조각 내 죽인 것이다.
그 뒤로 일본 정부는 피해자와 진상규명회가 요구하는 지료를 단 한건도 제공하지 아니했으며 피해자 원고단이 승소한 교토지방재판소 판결도 결국 오사카고등법원 항소심에서 피해자 패소로 판결했다.
이 일본 군부의 계획적 대량수장학살에 대해 일본 정부는 74년이 지나도록 사죄도 보상도 전혀 아니했다.
⑤ 한·미·일 정부의 책임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의 피해에 대한 제반 법적·인도적 책임은 한·미·일 3국 정부에게 있다.
한국 정부는 1965년 이전 한일 수교 협상 과정에서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로 종결되지 아니하였는데도 그 뒤로 사건 해결에 힘쓰지 아니한 책임이 있다.
일본에 대해 “과거는 묻지 않겠다”, “일본과 외교적 마찰이 우려되는 부분은 조사하지 않는다”고 해 온 한국 정부의 자세는 자국민의 존엄과 인권을 무시한 독재적 발상에서 나온 굴욕적 소치이므로 이에 대한 책임이 있다.
일본은 자국이 감행한 태평양전쟁에서 자국민이 인간 이하의 만행을 저지른 점에 수치인지 자긍인지는 몰라도 패전 이후부터 지금까지 해외에 있는 자국민의 유해를 찾는데 600억엔을 투자했고, 유해를 찾지 못하면 죽은 장소의 모래와 자갈을 파다가 전쟁인양기념관 전시실에 전시해 놓고 추모하고 있다.
반면에 한국 정부는 일제에 강제연행되어 귀국 도중 억울하게 죽은 수백 수천구의 조선인 유해가 한 장소에 있는데도 발굴·수습·봉환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책임이 있다.
미국 정부도 책임을 모면할 수 없다. 일본도 수락한 포츠담선언을 미국이 위반했다. 2차세계대전 전후처리에 대한 연합군국의 의사를 무시한 미국은 동북아에서 러시아와 중국의 사회주의의 팽창을 막는다는 일방적인 전략으로 패전국 일본의 위신을 세워야 했다.
그래서 전쟁총지휘자였던 일왕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처리하지 아니하였으며, 특히 당시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이 국제문제로 확산되면 일본과 히로히토를 엄호하는데 국제사회에서 불리하게 될 것이므로 일왕 히로히토의 침략전쟁 행위 가운데 일본이 불리한 사건은 덮었고, 조사하는 것조차도 방해하였으므로 그에 대한 책임이 있다.
나치 동맹국인 일본의 전범처리를 유기한 점과 같은 2차대전 전범인 독일에 대해서는 조사·공개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비호했으며 특히 우키시마호 사건을 인지하고도 사후처리를 하지 않는 것은 연합국 대표국격으로서 인권유린에 해당되므로 그에 대한 책임이 있다.
일본의 아시아 약탈에 대한 공식조사 역시 한 번도 없었다. 1945년 5월 스위스에서 미국과 일본이 화평공작을 전개하던 시기에 골든릴리작전이 완료되었고, 175개의 황실보물창고 건설을 담당했던 175명의 토목건축기술자 전원이 생매장되었다. 골든릴리를 진두지휘한 왕자들과 야마시타 장군은 잠수함을 타고 필리핀을 탈출하여 본국으로 귀환했다.
마닐라항에는 황금을 가득 실은 7천톤급 군함을 고의적으로 가라앉혔고 마이즈루만에도 같은 방식으로 가라앉혔다. 7천톤급 함대 몇 척 분량의 금괴가 미국으로 넘어갔는지를 추정해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이 외 얼마만큼의 금괴가 미국에 제시됐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스위스 화평공작에서 미국은 일본측에 요구사항이 없었던 것은 이미 뒷거래로서 황금도색시공이 끝난 뒤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미국이 전후처리를 어떻게 했을지는 뻔한 일이 아닌가 말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일본의 천황제유지와 비공산화에만 열을 올린 나머지 조사를 하자는 연합국의 요구를 반대했으며, 일본에 불리한 어떤 조사도 실시되지 않도록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다. 그러므로 전범국을 비호하여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을 조사하지 못하도록 한 책임이 미국 정부에게도 주어진다. 일본 정부의 책임은 지구상에서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여지가 없다.
일본 정부에게는 원천적인 책임인 원상회복이다.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로 종결하지 아니하였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은 외교문제와 경제문제였지 인도에 관한 사항은 없었고 시행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외국양민계획적집단학살은 국제법에 따른 인도적 책임이 있다.
일본 정부가 GHQ에 보고한 ≪今後의 日本政府의 自主的인 處理方針≫에서 《…鮮人의 편승 수송은 해군의 의무는 아니고 완전한 호의에 근거하는 것이며 아울러 조난사건은 완전히 불가항력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는 완전한 조작이므로 책임이 있다.
《便乘者의 員數에 관해 日鮮兩者의 조사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지만 二復(후생성제2복원과)으로서는 當部調査의 성과를 현 단계에 있어서 최선의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鮮人측의 6천 수백 명 또는 8천 수백 명 등과의 망언에 대해서는 특히 명확한 근거를 요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하 생략>》는 완전한 조작이므로 책임이 있다.
일본은 조선인에 대해 「내선일체(內鮮一體), 황국신민(皇國臣民)」을 외치며 “동원”이라는 명목으로 조선인을 전쟁터로 몰아넣었다. 그러다가 패전 뒤에 일본군(일본인전쟁피해자)에게는 일반연금과 장애연금을 지급하고 있으나 재일조선인전쟁피해자에게는 「일본 국적이 아니다」는 이유로 연금지급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본 정부는 2차대전과 태평양전쟁이 남긴 조선인 피해자에게 배상할 책임이 있다.
일본은 폭파 침몰 자체의 잘못 외에도 사건은폐, 사체 유기라는 중대한 잘못이 있다. 70년여 동안 피해자를 기만한 잘못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책임이 일본 정부에 있다.
⑥ 우리국민의 유해를 봉환해야 한다.
▲ 우키시마호를 삼킨 바다는 말이 없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지금도 일본 교토부 마이즈루시 인근 바다 마이즈루만에는 우리국민의 유해가 《수중표류(水中漂流), 해저매몰(海底埋沒), 선실적체(船室積滯), 집단매립(集團埋立), 유기방치(遺棄放置)》된 상태이다. 한국 정부만이 발굴하여 수습할 수 있는 《유해봉환(遺骸奉還)》을 언제 하려는지?
9백 년 전에 서해 항로를 따라 개성으로 가던 조공선이 태안 앞바다에서 강풍을 만나 침몰하면서 가라앉은 밥그릇과 접시는 잘도 건지는데, 일제의 전쟁터로 강제연행 당해 죽을 고생을 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여 귀국하던 도중에 일본군들의 집단학살만행으로 돌아가신 우리국민의 유해는 건지지 않고 있다. 아마도 세월이 9백년쯤 지나야 가능할 일인가 보다.
그 날이 1945년 8월 25일이었다. 아내와 두 딸을 잃은 장종식씨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마이즈루만 바닷가로 가족을 찾아 나섰다. 살아남기를 바람이 간절했지만 시신이라도 찾으려고 나갔으나 찾지 못했다. 시신은 온통 검은 중유로 덮였고 얼굴과 온몸이 퉁퉁 부어 있었다. 해변에는 시체가 겹겹이 쌓였고 바위틈이나 돌 틈에도 끼어 있었다.
해군은 아니었고 공무원인 듯한 일본인들이 시신을 굴비 엮듯 밧줄로 엮어 끌고 다니다가 말뚝에 매놓았다. 그리고는 트럭에 실어 타이라해병단 뒷산 골짜기로 옮겨 기름을 붓고 태워 그 자리에 묻었다. 유골함에 담는다거나 보자기로 싸서 따로 보관하지도 않았다. 그저 보이는대로 고구마 밭에도 묻고 무인도 동굴에도 넣었다.
해저에 9년 동안 방치한 우키시마호를 인양하면서 건져낸 유해는 화장하여 9년 전에 발표한 사망자 수에 맞춰 나눠 담았다. 이를 분골이라 한다. 이 분골의 일부가 아직도 도쿄 우천사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다. 하지만 이를 조상의 뼈라고 소중하게 할 이는 아무도 없다. 마이즈루만 해저 갯벌 속에는 아직도 유해가 가득하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나 정부기관으로 된 피해자재단에서는 우천사에 가서 추모식을 하잔다. 이에 경남 거창에 거주하는 유족 한영용씨는 “마이즈루만 해저에도 팽개쳐 있고, 해병단 뒷산 골짜기에도 묻혀있고, 무인도에도 있을 것이고, 고구만 밭에도 묻혀있고, 우천사 납골당에는 몽땅 합쳐 태운 것을 나눠 담은 것인데 내 어찌 거기에 절을 하겠는가!”고 항변했다.
▲ 2016년 8월 ‘일제 강제징용 조선인노동자 상 제막식 및 합동추모제’ 대표단이 우키시마호 침몰 현장을 찾아 헌화하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2016년 8월 우키시마호 침몰 희생자 합동 추모행사에 참가한 양대노총 대표단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우리국민의 유해가 무주고혼으로 구천을 헤매는 것은 비단 우키시마호폭침 희생자(수장학살) 뿐만이 아니다. 일제 항복 이후의 학살만 치더라도 사할린 가미시스카 경찰서 학살(화염학살)과 미즈호 학살(냉동학살)을 자행했고 제주도 땅굴진지 공사장에 투입되었던 옥매광산 광부들도 귀향하는 도중에 청산도 앞바다에서 수장학살 당했다. 남태평양과 사할린에는 더 많은 유해가 구천을 헤매고 있으며 탄광, 채석장, 철도공사장, 지하군수공장, 비행장 등지에서 죽어간 우리국민의 수가 얼마인지 알 수 없다.
이 지면을 통해서 한국 정부에 말한다. 제발 이제는 질질 끌지 말고 마무리 짓자. 태평양전쟁희생자 유족회의 대일투쟁이 얼마나 간고한가 말이다. 일제침략피해문제 즉 대일청구권문제 해결이야말로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투쟁해 온 비영리민간단체는 또 얼마인가.
1945년부터 지금까지 모든 정권이 식민역사, 식민문화, 식민법제, 식민정치, 식민경제, 식민잔재, 미국의 패권과 일본의 군국·제국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모두 정치권의 잘못과 정치인의 역사인식 부재였다. 너무 긴 세월이 흘렀다. 민족반역자·친일파·일제동조파·친일동조파·일제침략동조파를 처단하지 못한 자멸현상이다.
이제라도 태평양전쟁 피해자(사망자·실종자·부상자·생존자 유족회) 5백만 유족이 하나로 뭉쳐 역사정의(歷史正義)가 정치권을 능가해야 한다. 그래야 통일이 가능하고 민족번영과 동양평화를 실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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