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24

18 [한국학] 11. 한국은 '어떤 근대'를 추구하였나?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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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11. 한국은 '어떤 근대'를 추구하였나?|리더십에세이外
혼돈나라|조회 79|추천 0|2018.08.28.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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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어떤 근대’를 추구하였나?

「근대 한국종교의 토착적 근대화운동」 학술대회를 마치며



조성환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근대’라는 번역어



‘근대(近代)’라는 말은 직역하면 ‘가까운 시대’라는 뜻으로 19세기까지의 동아시아문헌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개념이다. ‘근대’라는 용어가 동아시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서양어 ‘modern’의 번역어로 쓰이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modern은 서양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서술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로 ‘medieval(middle)’, 즉 중세 다음에 오는 시기를 말한다.




modern의 어원은 ‘modernus’로, modernus는 ‘새로운’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modern은 서양인들이 중세와는 다른, 그러나 지금 시대와는 가까운(近) ‘새로움’이 등장한 시대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다. 그리고 그 새로움은 대개 과학혁명, 산업혁명, 시민혁명, 정교분리, 중앙집권, 자본주의, 개인의 등장 등으로 요약된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서구적 근대성(Western modernity)이다.




문제는 지금까지 한국인들이 서양인들의 새로움을 지칭하는 개념을 가지고 자신들의 역사를 서술해 왔다는 점이다. 즉 서양의 새로움을 기준으로 우리의 새로움을 찾으려 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실학’ 담론이다.




실학은 서구의 modern과 같은 새로움을 우리의 역사에서 찾으려는 시도였다. 이런 시도는 일찍이 1930년대에 조선학운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점점 논의가 확장되어 1970년대에 이우성의 이른바 “삼대실학파론”(이용후생‧경제치용‧실사구시)이 교과서설로 채택되기에 이른다(지금 교과서에서는 ‘실사구시파’는 제외되었다).




그런데 이런 의미의 실학은 이미 19세기에 후쿠자와 유키치 등에서 단초가 보이고 있다. 가타오카 류의 연구에 의하면, 후쿠자와는 서양의 과학을 ‘실학’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즉 ‘과학으로서의 실학’ 개념을 제시한 것이다.




국사교과서에서 조선후기의 사상가나 학자들을 ‘실학자’나 ‘실학파’라고 말할 때의 실학도 이런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조선후기에 나타난 서구 근대적인 학문이나 변화를 가리켜 실학이라고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보면 조선후기에는 ‘실학’보다는 ‘실심’이라는 말이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후기의 유학자들 사이에서 새로움을 찾으려고 한다면 적어도 개념상으로는 실학보다는 실심(實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오가와 하루히사나 정인재는 조선후기의 실학은 단순한 ‘실용실학’이 아니라 실심이 동반된 ‘실심실학’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조선후기에 실심이 화두가 된 이유는 조선후기의 유학자들이 서구적 근대를 지향했기 때문이 아니라 약화된 유학의 실천성[實]과 진정성[實]을 강화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제 아무리 실학자라고 해도 유학을 버리지는 않았음을 의미한다(홍대용의 경우는 예외로 한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유학을 고수하는 이상 조선과는 다른 근본적인 새로움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조선후기의 새로움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한국의 근대성






우리가 ‘서구 근대’라는 주술에서 벗어나서, 서구 근대가 추구하고자 했던 냉철한 이성을 되찾는다면, 서양의 새로움이 꼭 우리의 새로움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가령 서양의 새로움(근대)의 하나로 제시되는 중앙집권 관료제는 이미 조선시대부터 시행되었다.




그리고 기회의 평등 개념도, 비록 한계는 있었지만, 과거제라는 제도를 통해서 구현되었다. 따라서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한편 반대의 경우도 상상해볼 수 있다. 가령 서양에서는 정교분리가 근대의 새로운 현상이었지만, 한국에서는 기존의 정교일치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조선과는 다른 새로움을 추구하려 했다는 식으로 -.




그렇다면 ‘근대’와 같은 번역어로서가 아니라 한국인들 자신이 추구한 새로움을 표현한 말은 없을까? 조선과는 다른 새로운 시대를 제창한 용어는 없을까? 그것이 바로 ‘개벽’이다. 개벽은 19세기말의 조선 민중들이 유학적 세계관과는 다른 “새로운(modern) 세계를 열자[開闢!”는 의미로 사용한 말이다. 즉 하나의 사상운동이자 이상세계를 표방하는 슬로건이었다.




또한 개벽을 주창한 이들이 추구한 ‘새로운’ 세계관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시기적으로나 내용적으로 ‘가깝다’[近]는 점에서 - 가령 동학의 “만민평등사상”이나 천도교의 (개벽사상을 바탕으로 한) “문명개화운동” 또는 원불교의 “생활 속의 종교” 운동 등등 - 개벽이 주창되기 시작한 시기를 ‘modern,’ 즉 ‘근대’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1860년 동학의 탄생은 한국적 근대의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 운동에 천도교를 비롯하여 증산교, 원불교 등이 일제히 ‘개벽’을 외치며 동참하였다. 이른바 개벽파가 탄생한 것이다.



한국적 근대의 특징은, 미야지마 히로시도 지적하였듯이, 유학과의 긴장 속에서 탄생되었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서구적 근대가 중세와의 긴장 속에서 탄생한 것과 대비된다. 즉 한국적 근대는 유교적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질서를 모색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유교적 질서의 특징은 모든 가치가 ‘성인’의 가르침[敎]에서 나온다는 데에 있다.




이에 반해 동학을 비롯한 개벽종교는 가치의 중심을 중국의 ‘성인’에서 한국의 ‘민중’으로 이동시켰다. 철학의 근원을 어느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분산’시킨 것이다. 공공철학적으로 말하면 “철학을 공공(公共)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독자적인’ 세계관관 인간관 그리고 수양론을 만들고, 그것을 자신들의 ‘경전’에 담아낼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개벽은 중국으로부터의 철학적 독립선언에 다름 아니다. 신라시대 이래로 성인은 항상 중국에 있었고, 그 중국에 있는 ‘성인의 가르침’[聖敎]을 배우고 학습하는 “학이시습(學而時習)”이 한국 철학의 주류였기 때문이다(해방 이후에는 그 대상이 다시 서양으로 바뀌었지만-).




반면에 동학에서는 누구든 내 안의 하늘님을 자각하기만 하면 하늘같은 사람[天人]이 될 수 있다는 민중 중심의 인간관을 제시하였다. 이제 한문을 모르는 민중들도 수양을 할 수 있고 하늘이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벽은 단순한 ‘고대-중세-근대’라는 역사적 시대 구분을 넘어서 문명전환의 의미를 담고 있다. 마치 그리스도교에서 역사를 예수 이전과 예수 이후로 나누듯이, 개벽파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를 조선 문명의 대전환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것은 사상적으로는 성인의 교화에서 민중의 자각으로, 사회적으로는 서열화된 신분사회에서 차별없는 평등사회로, 정치적으로는 교화의 대상으로서의 민중에서 변혁의 주체로서의 민중으로, 전면적인 대전환을 의미한다.



이들 개벽파가 추구한 나라의 모습은, 동양포럼 김태창 선생의 표현에 의하면, 개화파와 같은 서구적인 “국민국가”가 아닌 “공공세계”

였다[2018년 8월 16일 원불교사상연구원 학술대회 「근대 한국종교의 토착적 근대화운동」]. 이 공공세계의 특징은 민중이 중심이 되어 자연과 인간이 조화되는 생명과 평화 그리고 평등의 사회를 지향한다는 데에 있다.




이상이 개벽파의 근대성이자 한국의 근대성이다. 그리고 이들이 전개한 생활 속의 실천운동이 개벽파의 근대화 운동이자 한국 민중의 아래로부터의 근대화운동이었다.



이웃 나라, 다른 근대



2018년 8월 15~16일에 원광대학교에서는 “근대 한국종교의 토착적 근대화 운동”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렸다. 대회에 앞서 김태창 선생은 주최 측인 원불교사상연구원에 <왜 중국과 한국은 근대화되지 못하는가?>(なぜ中国・韓国は近代化できないのか)라는 일본의 신간 서적을 기증하셨다.




사실 이런 질문은 비단 일본인뿐만 아니라 필자가 대학원에 다닐 때부터 선배학자들에게서 귀가 따갑도록 들은 말이다. 조선성리학 때문에 근대화에 뒤졌다거나, 임진왜란 때 조선이 망했어야 한다거나, 실학이라는 근대의 맹아가 있었는데 식민지화되는 바람에 실현되지 못했다거나, 등등.




이번 학술대회는 실로 이런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으로 준비된 자리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의 근대의 특징은 일본과 같은 ‘개화적 근대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벽적 근대화’에 있다는 것이다. 개화적 근대화가 이성과 국가 중심의 근대화였다고 한다면, 개벽적 근대화는 영성과 민중 중심의 근대화이다. 그래서 비록 한국이 개화적 근대화에는 뒤졌을지 몰라도 개벽적 근대화로는 동아시아에서 제일 앞섰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중국과 한국은 근대화되지 못하는가?>의 저자들에게 이렇게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일본은 개벽적 근대화를 하지 못했는가?” 이에 대해 김태창 선생의 공공철학식으로 답한다면 “일본은 공(公)이 너무 강해서 공공(公共)이 말살되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연한 만남들



이러한 ‘답’은 결코 쉽게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여기까지 오기에는 실로 많은 분들의 집단지성을 필요로 했다. 먼저 ‘토착적 근대’(indigenous modernity)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한 일본의 기타지마 기신 명예교수는 3~4년 전에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와 교류를 하는 과정에서 이 개념을 착안하였다.




2015년에 인도나 아프리카 또는 파키스탄 등지에서의 토착문화와 근대성을 연구한 <토착과 근대>라는 공동논문집의 필자로 참여하신 적이 있는데, 이 책을 소개하면서 박광수 종교문제연구소 소장 및 필자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토착적 근대’ 개념을 생각해 낸 것이다. 인도와 아프리카, 그리고 한국에서 서구 근대의 도전에 대해 토착문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를 모색한 움직임을 ‘토착적 근대’라고 명명해보자고 -.




이처럼 기타지마 교수가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토착적 근대 개념을 생각하게 된 것은 일본은 한국에 비해 토착적 근대의 사례가 드물기 때문이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김태창 선생은 일본에서 돌아와서 ‘영성(靈性)’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2015년에 서울대학교와 외국어대학교 등을 중심으로 ‘영성’을 주제로 강연회를 한 것을 비롯하여, 일본의 <미래공창신문>이나 한국의 <개벽신문> 등에 영성을 중심으로 한국철학, 특히 동학을 다시 읽어야 한다는 관점을 제시하였다.

[《미래공창신문》 24호. 2015년 6월호. 한글 번역은 〈한일학자간 영성개신 철학대화〉,《개벽신문》62호(2017년 9월호), 63호(2017년 10월호).]




그리고 2016년에 두 분이 필자의 소개로 청주에서 만나 대담을 나누었고, 그 후 김태창 선생이 기획한 ‘영성’을 주제로 한 동양포럼에 기타지마 기신 교수가 초대되어 근대 일본 불교의 상징적 인물인 스즈키 다이세츠의 영성론을 발표하였다.






[〈동아시아의 평화로운 미래 위해 과거 역사 마주하고 대화해야 : 기타지마 기신 일본 욧카이치대학 명예교수 인터뷰〉, 《동양일보》, 2016년 10월 23일; 기타지마 기신, 〈스즈키 다이세츠의 영성론과 현대적 의의〉, 《동양일보》, 2017년 8월 13일.]







영성과 근대



이번 학술대회의 키워드 중의 하나인 ‘영성적 근대’라는 관점은 양자의 결합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개념이다. 즉 동학이 한국의 토착적 근대의 대표적인 사례이고, 그 동학을 영성의 각도에서 읽어야 한다면, 토착적 근대의 특징은 이성 중심의 근대가 아니라 영성 중심의 근대였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타지마 기신 교수는 이런 점에 착안하여 아프리카의 토착적 근대를 영성의 측면에서 새롭게 접근하였고, 나아가서 한국 영화 「귀향(鬼鄕)」도 영성의 시각에서 분석하였다. 이 외에도 교토대학의 한국학 연구자이자 김태창 선생과 교토포럼과 동양포럼에서 오랫동안 학문적 교류를 해온 오구라 기조 교수는 작년에 출판한 <朝鮮思想全史>(ちくま新書, 2017)에서 ‘영성’으로 한국사상사를 새롭게 해석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원효-퇴계-동학 등을 학파나 시대를 넘어서 신라적 영성 또는 한국적 영성의 표출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영성이라는 안경으로 동아시아사상사를 재해석하는 작업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었다. 영성은 항상 서구 근대적 이성의 그늘에 가려 비이성적이거나 신비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사에 ‘영성’이라는 자리를 마련해준다는 것은 대단한 의미를 지닌다.




이성의 결여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영성의 발휘라는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개벽파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인들이 영성을 추구하는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라면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태창 선생이 제기한 ‘영성’이라는 관점은 한국철학사, 더 나아가서는 동아시아사상사를 서구 근대라는 색안경을 제거하고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을 제안했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중국철학이나 동양사상을 얘기할 때 단골처럼 등장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는 결코 이성으로는 도달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영성의 차원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당사자들은 ‘영성’이라는 말 대신에 ‘덕(德)’이나 ‘불성(佛性)’ 또는 ‘도성(道性)’과 같은 개념을 썼지만, 이것들을 통틀어서 ‘이성’과 대비시킨다면 ‘영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다만 ‘영성’이라는 말이 또다시 서구 근대라는 틀에서 보면 그리스도교적 ‘신성’이나 ‘종교성’과 같은 의미로 이해되어 혼란스러워하는 학자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영성’은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보면 ‘덕성(德性)’에 가깝다. 가령 유학에서 말하는 통치자의 덕성은 종종 ‘도덕적 카리스마’로 설명되곤 하는데, 이때의 카리스마는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복종시키는 영적인 힘으로, 결코 이성적 능력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노자가 <도덕경>에서 “도는 낳고 덕은 기른다”(道生之, 德畜之)고 할 때의 우주적 덕성이나, 그것을 내 몸에 체현한 우주적 생명력으로서의 덕성도 영성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래서 동아시아전통에서 말하는 영성은 기본적으로 ‘우주적 영성’을 가리킨다. 천인합일이란 우주와의 합일에 다름 아니고, 그것은 우주적 영성의 차원에서의 하나됨을 말한다. 개벽파가 개화파와 결정적으로 달랐던 점은 이런 우주적 영성을 견지하면서 서양의 도전에 대응하고 서양을 수용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집단지성의 산물



한편 토착적 근대와 영성론이 대두되기 시작한 시기보다 약간 앞선 2014년에 역사학자 이병한은 ‘개벽파’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유라시아를 여행하면서《프레시안》에 견문기를 연재 중이던 한 칼럼에서 동학을 개화파와 대비시켜 ‘개벽파’라고 명명한 것이다. [이병한, 〈동학은 ‘농민 전쟁’ 아닌 ‘유학 혁명’이다! [동아시아를 묻다] 2014: 갑오년 역사 논쟁〉, 《프레시안》, 2014.01.20. ]






그 후 원불교까지를 포함시켜서 개벽파의 범주에 넣었다. [이병한, 〈‘脫중국 쇄국정책’? 망국의 첩경이다: [유라시아 견문] 逆세계화, 新세계화, 眞세계화〉, 《프레시안》, 2017.03.24. ]




필자도 2017년 1월에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있었던 콜로키엄에서 개벽파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해 보았다. 그 주된 근거는 동학-천도교-증산교-원불교가 모두 의식적으로 ‘개벽’이라는 개념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 때 발표한 원고는 이후에 「동학이 그린 공공세계」라는 제목으로 <근대한국 개벽종교를 공공하다>(모시는사람들, 2018)에 실렸다.]






실제로 원불교경전에는 ‘최제우-강증산-박중빈’을 하나로 묶어서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원불교 창시자인 박중빈의 제자가 이 세 명은 마치 날이 점점 밝듯이 차례대로 개벽하였다고 말한 것이 그것이다. 이 대화가 원불교가 창시된 1910년대에 있었다고 한다면 이미 이때에 ‘개벽파’라는 인식이 어렴풋이 있었던 셈이다. [<대종경(大宗經)> 「제6 변의품(辨疑品)」32장; 박맹수, 〈개벽의 선지자들〉, 《월간 원광》, 2015년 6~7월호.]



그 후에 원광대학교 김홍철 교수가 1988년에 ‘천도교-증산교-원불교’를 비교하는 박사학위논문을 썼는데, 비록 개벽파라는 말은 비록 쓰지 않았지만, 개벽파에 관한 선구적인 연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행연구에서 과감하게 ‘개벽파’나 ‘개벽적 근대’라는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은 역시 서구 근대라는 틀에 갇혀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학파=철학’, ‘근대=철학’이라는 도식이 머릿속에 암암리에 들어 있어서, 종교의 형태를 띠 운동은 ‘학파’나 ‘근대’로 평가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한편 이번 학술대회를 준비한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은 2016년부터 ‘개벽종교의 공공성’을 주제로 6년간 대학중점연구소로 선정되어 개벽종교에 관한 학제간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철학, 역사학, 종교학, 정치학 등 다방면의 전문가들이 모여서 동학에서 원불교에 이르는 한국종교를 서구적 공공성과는 다른 동아시아적 공공성, 한국적 공공성의 측면에서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매주 수요일에는 원장인 박맹수 교수를 중심으로 개벽종교의 경전과 문헌들을 강독하는 공부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오랫동안 한학을 해 오신 김봉곤 연구교수는 한문원전을 한글로 번역하고, 야규 마코토 연구교수는 일본 고문헌을 한글로 번역하며, 동학 연구의 권위자인 박맹수 교수는 관련사항을 해설하고, 필자는 논의된 내용들을 정리하여《개벽신문》에 싣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런 협업의 결과가 이번 학술대회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번 「근대 한국종교의 토착적 근대와 운동」 학술대회는 이상의 학문적 축적과 우연한 인연들이 한곳에 응집된, 말 그대로 “집단지성의 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수입한 이론이 아니라 한일의 연구자들이 머리를 맞대어 생각해낸 자생적 이론을 소개하고 토론하는 자리였다. 세대적으로도 40대, 50대, 60대, 70대, 80대가 골고루 발표를 하였고, 분야 또한 제각각이었다. 청중들의 반응은 필자가 참여한 그 어떤 학술대회보다도 좋았고, 매스컴에서도 정식으로 다루어 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부디 여기에서 멈추지 말고 앞으로도 우리 역사를 우리 시각에서 볼 수 있는 독자적인 ‘관점’을 찾으려는 학문적 노력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출전: 《개벽신문》77호. 20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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