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해월을 기대하며
새로운 해월을 기대하며
기획/특집 /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2019-11-29
해월 최시형 평전
원적산(圓積山) 천덕봉(天德峰)에 잠든 해월
현재 해월의 묘소는 경기도 여주시 원적산 천덕봉 아래인 금사면 주록리 산 138번지(안산길 236-47)에 있다. 해월은 교수형에 처해진 직후 송파에 묘를 썼으나 산 주인이 이장을 요구해 1900년 3월 12일(음) 지금의 자리로 이장했다. 이 자리는 여주에 사는 해월의 제자였던 이종훈이 절친의 도움을 받아 자리를 정했다. 또한, 당시 박인호도 원적산 일대를 자주 드나들면서 묘소 자리가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를 갖춘 명당이라고 생각해 뜻을 모았다고 한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박인호가 수습한 유해를 손병희, 손천민, 이종훈, 홍병기, 김명배, 이용구 등이 함께 예를 갖춰 이장했다.
여주에서 가장 높은 634미터의 원적산 천덕봉 정상에서 동북쪽으로 1킬로미터 정도 내려오면 소시랑봉을 만난다. 그곳에서 돌출된 작은 산줄기를 타고 아래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해월의 묘소가 있다. 울산에서 해월 묘소에 가려면 경부고속도로-상주영천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이여로-북여주나들목-흥천이포IC 교차로에서 우회전해 이포고등학교를 지나 궁리 입구에서 도곡리로 우회전한 뒤 주록리 마을회관까지 가서 다시 우회전해 주록 계곡의 안산길로 간 다음 한 번 더 우회전해 광금사 주차장에서 내려 산길을 300미터 올라가야 한다. 서울에서는 경부고속도로-광주원주고속도로-동곤지암나들목-산북면-주록리 마을회관에서 주록 계곡 방향으로 우회전해서 올라가다 안산길에서 광금사 방향으로 우회전하면 된다.
평생 동학을 연구한 윤석산 한양대학교 명예교수는 해월에 대해 “19세기라는 변혁의 시대에, 새로운 세상을 이루고자 가르침을 펴며 36년간을 우리나라의 가장 오지인 태백산과 소백산맥이 이루어지는 산간마을 50여 곳을 전전하며 살아간 해월, 청년 시절까지 비록 한 사람의 머슴, 제지소 용인, 화전민의 삶을 산 사람이었지만, 동학에 입도하고 스승인 수운 선생을 만나 그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한 생애를 불꽃과도 같이 살아온 인물이다. 그러므로 한국 근대사의 우뚝한 민중 지도자로, 인류에게 새로운 빛을 전하는 위대한 사상가로 그 자취를 오늘에 남겨 놓았다”라고 언급했다. 평범한 우리 주변의 청년이며 노동자였던 해월이 동학을 통해 성자의 반열에 올랐다고 했다.
해월은 수운을 만남으로써 새로운 삶에 눈을 뜨게 됐다. 해월은 수운과의 만남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제자들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젊었을 때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옛날 성현(聖賢)은 뜻이 특별히 남다른 표준이 있으리라 하였더니, 한번 대선생님을 뵈옵고 마음공부를 한 뒤부터는, 비로소 별다른 사람이 아니요, 다만 마음을 정하고 정하지 못하는 데 있는 것인 줄 알았노라. 요순(堯舜)의 일을 행하고 공맹(孔孟)의 마음을 쓰면 누가 요순이 아니며 누가 공맹이 아니겠느냐? 여러분은 내 이 말을 터득하여 스스로 굳세게 하여 쉬지 않는 것이 옳으니라. 나는 비록 통하지 못했으나 여러분은 먼저 대도를 통하기 바라노라.
해월은 수운을 통해 삶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 사람이 태어난 신분대로 얽매여 살아야 한다는 관념을, 수운을 만남으로써 탈피할 수 있었다. 수운과 해월의 만남은 그만큼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해월은 수운의 가르침을 평생 잊지 않고 실천했다. 해월은 “내 눈을 붙이기 전에 어찌 감히 수운대선생님의 가르치심을 잊으리오. 삼가서 조심하기를 밤낮이 없게 하느니라”라고 말했다. 여기서 눈을 붙인다는 것은 죽음을 맞이하는 때를 말한다. 이 말 속에 해월의 진심이 담겨 있다. 해월은 제자들에게 동학의 교리를 설명할 때 늘 “대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또는 “경(經)에 말씀하시길”이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이는 해월이 수운의 가르침을 평생 화두로 삼아 공부했고, 수운의 가르침을 통해 깨달은 내용을 전해줬음을 의미한다.
▲ 해월 최시형의 묘.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주록리 천덕봉 아래 자리 잡고 있다. 해월의 묘는 1898년 참형 직후 송파에 묘를 썼으나 주인 이상하의 요구로 1900년 3월 13일 이곳으로 이장했다.
만 번 흔들어도 뽑히지 않을 동학 교단을 만든 해월
수운이 창도한 지 4년 만에 순도하자 해월은 동학의 조직을 굳건히 하기 위해 정성과 공경과 믿음을 다했다. 계안(契案)을 만들고, 인등제(引燈制)와 구성제(九星制) 등의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 육임제(六任制)를 신설해 교단의 조직을 중층적으로 굳건히 만들었다. 이러한 해월의 노력으로 1890년대 들어와 동학 교단은 삼남 지방을 장악할 정도로 성장했다. 교조신원운동과 동학혁명은 이러한 해월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해월은 동학혁명이 실패한 후 마지막까지 동학 교단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심지어 서소문 감옥에서도 교단에 대한 걱정만 했다. 해월의 수제자로 동학 교단의 제3세 교조가 된 의암 손병희는 이러한 해월의 고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신사(최제우의 존칭)는 한울님의 직책을 체행(體行) 하신 연한이 4개년에 그치어 교의 기초가 한울님의 뜻에 흡족지 못하므로, 해월신사를 이어받게 하시어 교체(敎體)의 완전치 못한 것을 보충케 하시니, 그러므로 해월신사의 종년(終年)에 이르러서는 만 번 흔들어도 빼어지지 않는 교의 큰 기초가 처음 정하여 졌느니라.
36년간의 해월의 노력으로 동학의 교의(敎義)는 실천적이고 체계화됐을 뿐 아니라 조직도 단단해졌다. 모두 최보따리, 해월의 발걸음에서 비롯됐다.
▲ 해월의 아들 최동희의 묘. 해월의 묘로 올라가는 왼쪽에 묘가 있다. 부인인 홍동화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인 홍병기(洪秉箕)의 딸이다.
도올 김용옥과 해월
이러한 해월의 모습에 대해 많은 이들이 감명을 받았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도올(檮杌) 김용옥(金容沃)이다. 김용옥은 한 방송에 출연해 해월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우리나라에 태어나서 오늘날까지, 나는, 내가 해월 선생이 안 계셨더라면 이 땅에 나는 한국에 안 살았을지도 몰라요. 내가 해월 선생을 발견했다는 것이 내가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한 내 인생에 결정적인 자각적 계기요, 해월 선생이 이 땅에 뿌린 피가 있는 한 내가 이 땅을 안 떠난다는 각오를 했어요. 그렇게 위대한 분이요.
김용옥은 해월이 보수적이라고 말한 사람들을 향해 “해월이 시종 진중한 입장을 취한 것은 수운의 가르침의 본질인 “수심정기(修心定氣)”와 같은 인간 내면의 문제에 있었고, 사회적 실천 또한 휴먼 네트워크를 통한 점진적 변화를 통해 달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회적 불의에 대한 정의로운 항거 또한 폄하할 일이 아니지만 동학의 이념적 순결성을 역사에 남기려고 했던 해월의 포괄적 비젼 또한 깊은 이해를 요망하는 것이다”라고 일갈했다. 김용옥은 해월의 일생을 영화로 만들고자 해 <개벽(1991년)>의 시나리오를 썼다.
이어져야 할 해월의 사상
해월을 이야기할 때 또 한 명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김지하(金芝河)다. 김지하는 오랜 기간 동학사상에 천착했는데, 특히 해월의 밥의 사상과 향아설위(向我設位)에 주목했다.
민중적 삶의 운동의 스승인 해월 선생, 고금동서 어디를 둘러봐도 찾아보기 힘든 민중 그 자신인 해월, 일자무식 까막눈, 사십 년을 하루도 쉴 틈 없이 도망 다니며, 위대한 후천개벽의 종교적 조직을 지어낸 위대한 조직자인 해월 선생, 그분의 모든 말씀과 행적, 그리고 그분의 말할 수 없이 너그럽고 인자한 덕성과, 그 비상하고 집요한 조직 활동의 참된 뜻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이어받아야 할 것인가? 다만 선생의 활동 모범을 다소곳이, 철저히 따를 뿐만 아니라, 선생의 향아설위 사상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실천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지하는 해월의 삶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실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도 피난과 변혁을 동시에 요구하며, 끊임없이, 매일 매일의, 생존, 밥을 위해서 싸우는, 밥을 자기 앞으로 되돌려 놓으려고 활동하는 모든 민중들의 마음 속에 살아 계시다는 것, 지금도 산골짜기와 밤의 뒷골목들을 쫓겨 다니며, 온 인류에게 거룩한 밥을 먹이기 위해 괴나리봇짐을 지고 끊임없이 도망 다니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해월 사상의 창조적 확장과 발전이 이뤄져야 한다고 보았다. 새로운 해월이 태어나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혜안을 제시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 해월 최시형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개벽>. 1991년 임권택 감독, 이덕화 주연의 영화로 김용옥이 시나리오를 썼다.
연재를 마치며
미진한 재주로 지난 2년간 해월의 발걸음을 뒤쫓아보았다. 나름 해월의 유적지를 많이 찾아봤다는 호기로 시작했는데 막상 글을 쓰면서 가보지 못한 곳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았다. 이번 연재를 통해 많은 공부를 했다. 부족한 글을 실을 수 있도록 기회를 준 울산저널 이종호 편집국장을 비롯한 관계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해월의 가르침 한 구절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사람의 지혜롭고 어리석음이 같지 아니하고 성범(聖凡)이 비록 다르나, 작심(作心)하여 쉬지 않으면 어리석음이 가히 지혜롭게 되고 범인(凡人)이 성인(聖人)으로 될 수 있으니, 모름지기 마음을 밝히고 덕을 닦는 것을 힘써서, 늙은 사람의 말이라도 버리지 말고 더욱 함양하는 마음을 힘쓰도록 하라.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해월 최시형 평전
원적산(圓積山) 천덕봉(天德峰)에 잠든 해월
현재 해월의 묘소는 경기도 여주시 원적산 천덕봉 아래인 금사면 주록리 산 138번지(안산길 236-47)에 있다. 해월은 교수형에 처해진 직후 송파에 묘를 썼으나 산 주인이 이장을 요구해 1900년 3월 12일(음) 지금의 자리로 이장했다. 이 자리는 여주에 사는 해월의 제자였던 이종훈이 절친의 도움을 받아 자리를 정했다. 또한, 당시 박인호도 원적산 일대를 자주 드나들면서 묘소 자리가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를 갖춘 명당이라고 생각해 뜻을 모았다고 한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박인호가 수습한 유해를 손병희, 손천민, 이종훈, 홍병기, 김명배, 이용구 등이 함께 예를 갖춰 이장했다.
여주에서 가장 높은 634미터의 원적산 천덕봉 정상에서 동북쪽으로 1킬로미터 정도 내려오면 소시랑봉을 만난다. 그곳에서 돌출된 작은 산줄기를 타고 아래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해월의 묘소가 있다. 울산에서 해월 묘소에 가려면 경부고속도로-상주영천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이여로-북여주나들목-흥천이포IC 교차로에서 우회전해 이포고등학교를 지나 궁리 입구에서 도곡리로 우회전한 뒤 주록리 마을회관까지 가서 다시 우회전해 주록 계곡의 안산길로 간 다음 한 번 더 우회전해 광금사 주차장에서 내려 산길을 300미터 올라가야 한다. 서울에서는 경부고속도로-광주원주고속도로-동곤지암나들목-산북면-주록리 마을회관에서 주록 계곡 방향으로 우회전해서 올라가다 안산길에서 광금사 방향으로 우회전하면 된다.
평생 동학을 연구한 윤석산 한양대학교 명예교수는 해월에 대해 “19세기라는 변혁의 시대에, 새로운 세상을 이루고자 가르침을 펴며 36년간을 우리나라의 가장 오지인 태백산과 소백산맥이 이루어지는 산간마을 50여 곳을 전전하며 살아간 해월, 청년 시절까지 비록 한 사람의 머슴, 제지소 용인, 화전민의 삶을 산 사람이었지만, 동학에 입도하고 스승인 수운 선생을 만나 그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한 생애를 불꽃과도 같이 살아온 인물이다. 그러므로 한국 근대사의 우뚝한 민중 지도자로, 인류에게 새로운 빛을 전하는 위대한 사상가로 그 자취를 오늘에 남겨 놓았다”라고 언급했다. 평범한 우리 주변의 청년이며 노동자였던 해월이 동학을 통해 성자의 반열에 올랐다고 했다.
해월은 수운을 만남으로써 새로운 삶에 눈을 뜨게 됐다. 해월은 수운과의 만남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제자들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젊었을 때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옛날 성현(聖賢)은 뜻이 특별히 남다른 표준이 있으리라 하였더니, 한번 대선생님을 뵈옵고 마음공부를 한 뒤부터는, 비로소 별다른 사람이 아니요, 다만 마음을 정하고 정하지 못하는 데 있는 것인 줄 알았노라. 요순(堯舜)의 일을 행하고 공맹(孔孟)의 마음을 쓰면 누가 요순이 아니며 누가 공맹이 아니겠느냐? 여러분은 내 이 말을 터득하여 스스로 굳세게 하여 쉬지 않는 것이 옳으니라. 나는 비록 통하지 못했으나 여러분은 먼저 대도를 통하기 바라노라.
해월은 수운을 통해 삶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 사람이 태어난 신분대로 얽매여 살아야 한다는 관념을, 수운을 만남으로써 탈피할 수 있었다. 수운과 해월의 만남은 그만큼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해월은 수운의 가르침을 평생 잊지 않고 실천했다. 해월은 “내 눈을 붙이기 전에 어찌 감히 수운대선생님의 가르치심을 잊으리오. 삼가서 조심하기를 밤낮이 없게 하느니라”라고 말했다. 여기서 눈을 붙인다는 것은 죽음을 맞이하는 때를 말한다. 이 말 속에 해월의 진심이 담겨 있다. 해월은 제자들에게 동학의 교리를 설명할 때 늘 “대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또는 “경(經)에 말씀하시길”이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이는 해월이 수운의 가르침을 평생 화두로 삼아 공부했고, 수운의 가르침을 통해 깨달은 내용을 전해줬음을 의미한다.
▲ 해월 최시형의 묘.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주록리 천덕봉 아래 자리 잡고 있다. 해월의 묘는 1898년 참형 직후 송파에 묘를 썼으나 주인 이상하의 요구로 1900년 3월 13일 이곳으로 이장했다.
만 번 흔들어도 뽑히지 않을 동학 교단을 만든 해월
수운이 창도한 지 4년 만에 순도하자 해월은 동학의 조직을 굳건히 하기 위해 정성과 공경과 믿음을 다했다. 계안(契案)을 만들고, 인등제(引燈制)와 구성제(九星制) 등의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 육임제(六任制)를 신설해 교단의 조직을 중층적으로 굳건히 만들었다. 이러한 해월의 노력으로 1890년대 들어와 동학 교단은 삼남 지방을 장악할 정도로 성장했다. 교조신원운동과 동학혁명은 이러한 해월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해월은 동학혁명이 실패한 후 마지막까지 동학 교단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심지어 서소문 감옥에서도 교단에 대한 걱정만 했다. 해월의 수제자로 동학 교단의 제3세 교조가 된 의암 손병희는 이러한 해월의 고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신사(최제우의 존칭)는 한울님의 직책을 체행(體行) 하신 연한이 4개년에 그치어 교의 기초가 한울님의 뜻에 흡족지 못하므로, 해월신사를 이어받게 하시어 교체(敎體)의 완전치 못한 것을 보충케 하시니, 그러므로 해월신사의 종년(終年)에 이르러서는 만 번 흔들어도 빼어지지 않는 교의 큰 기초가 처음 정하여 졌느니라.
36년간의 해월의 노력으로 동학의 교의(敎義)는 실천적이고 체계화됐을 뿐 아니라 조직도 단단해졌다. 모두 최보따리, 해월의 발걸음에서 비롯됐다.
▲ 해월의 아들 최동희의 묘. 해월의 묘로 올라가는 왼쪽에 묘가 있다. 부인인 홍동화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인 홍병기(洪秉箕)의 딸이다.
도올 김용옥과 해월
이러한 해월의 모습에 대해 많은 이들이 감명을 받았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도올(檮杌) 김용옥(金容沃)이다. 김용옥은 한 방송에 출연해 해월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우리나라에 태어나서 오늘날까지, 나는, 내가 해월 선생이 안 계셨더라면 이 땅에 나는 한국에 안 살았을지도 몰라요. 내가 해월 선생을 발견했다는 것이 내가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한 내 인생에 결정적인 자각적 계기요, 해월 선생이 이 땅에 뿌린 피가 있는 한 내가 이 땅을 안 떠난다는 각오를 했어요. 그렇게 위대한 분이요.
김용옥은 해월이 보수적이라고 말한 사람들을 향해 “해월이 시종 진중한 입장을 취한 것은 수운의 가르침의 본질인 “수심정기(修心定氣)”와 같은 인간 내면의 문제에 있었고, 사회적 실천 또한 휴먼 네트워크를 통한 점진적 변화를 통해 달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회적 불의에 대한 정의로운 항거 또한 폄하할 일이 아니지만 동학의 이념적 순결성을 역사에 남기려고 했던 해월의 포괄적 비젼 또한 깊은 이해를 요망하는 것이다”라고 일갈했다. 김용옥은 해월의 일생을 영화로 만들고자 해 <개벽(1991년)>의 시나리오를 썼다.
이어져야 할 해월의 사상
해월을 이야기할 때 또 한 명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김지하(金芝河)다. 김지하는 오랜 기간 동학사상에 천착했는데, 특히 해월의 밥의 사상과 향아설위(向我設位)에 주목했다.
민중적 삶의 운동의 스승인 해월 선생, 고금동서 어디를 둘러봐도 찾아보기 힘든 민중 그 자신인 해월, 일자무식 까막눈, 사십 년을 하루도 쉴 틈 없이 도망 다니며, 위대한 후천개벽의 종교적 조직을 지어낸 위대한 조직자인 해월 선생, 그분의 모든 말씀과 행적, 그리고 그분의 말할 수 없이 너그럽고 인자한 덕성과, 그 비상하고 집요한 조직 활동의 참된 뜻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이어받아야 할 것인가? 다만 선생의 활동 모범을 다소곳이, 철저히 따를 뿐만 아니라, 선생의 향아설위 사상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실천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지하는 해월의 삶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실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도 피난과 변혁을 동시에 요구하며, 끊임없이, 매일 매일의, 생존, 밥을 위해서 싸우는, 밥을 자기 앞으로 되돌려 놓으려고 활동하는 모든 민중들의 마음 속에 살아 계시다는 것, 지금도 산골짜기와 밤의 뒷골목들을 쫓겨 다니며, 온 인류에게 거룩한 밥을 먹이기 위해 괴나리봇짐을 지고 끊임없이 도망 다니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해월 사상의 창조적 확장과 발전이 이뤄져야 한다고 보았다. 새로운 해월이 태어나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혜안을 제시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 해월 최시형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개벽>. 1991년 임권택 감독, 이덕화 주연의 영화로 김용옥이 시나리오를 썼다.
연재를 마치며
미진한 재주로 지난 2년간 해월의 발걸음을 뒤쫓아보았다. 나름 해월의 유적지를 많이 찾아봤다는 호기로 시작했는데 막상 글을 쓰면서 가보지 못한 곳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았다. 이번 연재를 통해 많은 공부를 했다. 부족한 글을 실을 수 있도록 기회를 준 울산저널 이종호 편집국장을 비롯한 관계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해월의 가르침 한 구절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사람의 지혜롭고 어리석음이 같지 아니하고 성범(聖凡)이 비록 다르나, 작심(作心)하여 쉬지 않으면 어리석음이 가히 지혜롭게 되고 범인(凡人)이 성인(聖人)으로 될 수 있으니, 모름지기 마음을 밝히고 덕을 닦는 것을 힘써서, 늙은 사람의 말이라도 버리지 말고 더욱 함양하는 마음을 힘쓰도록 하라.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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