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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교수는 누구인가?
편집위원 | oikos78@msn.com
승인 2019.07.22 19:16:14
한국 교회 앞에 고하는 이정훈 현상 보고서(2) 회심
전영수 목사
울산대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나와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에 근무했고 현재는 미국에서 가정교회인 바른길교회를 맡고 있다. 유튜브 채널 <이렇게 좋은 날에>를 운영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마리아를 다시 보라> <한 지성인과 목사의 통화> <Dream Unshared> 등이 있다.
이 글은 미국 뉴스 M에 투고한 전영수 목사의 원고를 허락을 받아 소개한다. 이정훈 교수에 대해서는 이미 류상태 목사(전 대광고 교목)도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한바 있다.
제가 성도들 앞에서 이렇게 보고를 드리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정훈 씨는 이미 교계에서 하나의 큰 물줄기를 흘려 보내고 있는 공인이 되었습니다. 즉, 그의 말과 행동이 성도들의 현재와 장래에 영향을 직접적으로 끼치는 자리에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의 책임과 역할은 개 교회 담임 목사의 그것과 비교될 것이 아닙니다. 담임목사는 몇 명이나 몇 십 명을 책임지지만, 이정훈 씨는 천만에 가까운 성도들의 신앙 정체성과 행동적 삶에 대해서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기에 비교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복음적으로 건강하고 정치, 역사관이 건강하다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획일화되고 억지스런 주장으로 드러난다면 그 무너짐도 엄청날 것입니다.
현재 이정훈 씨는 무리 속의 한 사람, 한 지방 대학의 교수 한 사람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천만 명에 가까운 성도들 앞에 우뚝 서 있습니다. 동성애와 좌파 이데올로기로 인해 조국이 풍전등화에 처해 있다고 외침으로써 전 성도들에게 긴장과 울림을 주고 있는, 화제의 중심에 선 공인이기에 더더욱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정훈 씨에 대해 알아야겠다는 관심이 이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교권이나 영향력이 없는 본인, 일개 목사가 이렇게 성토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교회를 파괴하고 성도들을 흩어버리겠다는 일념으로 회심 전까지 33년을 기독교와 대척점에서 치밀하게 살던 이정훈 씨가, 동성애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시끄럽던 때에 모 교회에서 있었던 강연과 날선 주장을 통해 단기간에 교계의 무대 중심에 한달음에 성큼 들어선 대격변이 일어났지만, 교계 내 어느 교단이나 어느 지도자도 나서서 그를 검증한 적이 없습니다. 기독교 적대 스님에서 기독교 수호 신자로의 변화, 그의 사역의 성격, 그의 신앙심, 사상 가치관 등에 대해 검증한 적이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라도 나서서 검증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정훈 씨는 길거리에서 사영리를 받아들고, 설명 듣고, 영접기도를 따라한 후에 교회 출석을 시작한 일반적인 새신자가 아닙니다. 그는 시내버스에 올라탄 승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첫걸음부터 많은 승객들의 생명을 책임지는 운전수로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서 알코올 냄새가 나는지, 피로도가 어떠한지 살피는 것은 시빗거리가 아니라, 버스회사의 규정에 해당하는 의무인 것입니다. 공항 검색대가 여행객의 자존심을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검색대를 지나간다고 해서 그가 무기나 불법 물건을 소지한 자는 아닙니다. 검색대를 지나게 되면 모든 승객이 안심하고 비행기에 올라 비행할 수 있기에, 검색 절차는 오히려 고마운 절차입니다. 교계의 검증이 아니라면 스스로 강단에서 자신의 적합함을 드러낼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소명에 맞게,
•그가 법학자이기에 법리로,
•그가 역사관으로, 사상관으로, 정치관으로,
•스펙트럼 폭이 넓은지, 담론이 건강한지 여부를 드러내면 됩니다.
하지만 이정훈 씨는 여러 국면에 있어서 일방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점점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의 강연을 들으며, 방향은 분명 옳은데 불안하다는 느낌을 그에 대해 관심을 가진 성도라면 충분히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솔직하게 제 견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그중 하나를 개진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 간증한 ‘회심’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정훈 씨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분들은 마음이 불편하시겠지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이정훈 씨는 자신의 초기 강연들에서 자신의 회심에 대해 꾸준히 간증했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간증 내용은 대동소이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어떤 과정을 통해 회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모든 분들이 공통된 사전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회심 사건 당시에 그가 내면적으로 외면적으로 인식하고 경험했던 모든 것을 다 이야기했다고 확신해도 될 것입니다. 이제 와서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게 없다는 뜻입니다. 회심 내용에 대해서는 첫 유튜브 영상 <Ch.3 불교 신자에서 기독교 신자로 회심>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해당되는 예정하심의 영역입니다. 요나가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라고 구원의 원천을 고백했듯이, 과거나 지금이나 구원은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적 선물입니다. 회심 곧 거듭남은 한 개인의 삶의 방향을 180도로 바꾸어 놓는 대전환의 사건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변화의 역동성이 그 인격으로 반드시 드러나게 되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정훈 씨는 2007년 여름에 자신의 집, 더 정확하게는 거실 TV 앞에서 회심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이 내게 찾아오셨다.” “나는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 이 회심 사건에 대해서는 그의 간증보다 분명한 진술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평생 적극적으로 대항하며 살았던 승려가 대적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났다는 그 회심의 자리는 흑암에서 광명의 자리로 옮겨지는 사건입니다. 그의 회심에서 제가 느낀 몇 가지 의구심을 하나씩 개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이정훈 교수(좌)와 전영수 목사(우)
첫째, 이정훈의 회심 과정 간증을 들으면, 새로운 인식이나 깨달음의 차원으로 느껴집니다.
교회 파괴를 목적했던 승려 불자로 살았던 자신에게 어느 날 갑자기 예수께서 찾아오셨다고 이정훈 씨는 여러 간증에서 말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죄인이었고, 은혜 안에서 얼마나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는지에 대해 상대적으로 감격해 하는 모습은 그리 못 본 듯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회심 사건 당시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식하게 되었다든지 용서를 간구했다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주 예수께서 자신에게 찾아오셨다고 그가 말한 것만 보아도 죄에 대한 인식이나 토설의 반응은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이정훈 씨는 회심 경험을 하던 도중 어떤 생각도 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집 문 밖으로 나가기까지 그러했습니다. 그러면 자신이 얼마나 죄인이었다는 처절한 인식이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예수를 그때까지 대적하고 있던 그가 자신에게 찾아왔다는 예수를 실존적으로 경험하고 있었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내가 예수님을 알아버렸기 때문에”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진정 겪었다면 예수를 ‘알아버린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앎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입니다. 이정훈 씨는 “나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확실히 알 것 같다”라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또한 이런 말도 했습니다. “신자들이 자신은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살면서, 다른 사람들까지 죽인다. 삶 속에서 예수님이 함께하신다는 말도, 예수님이 누군지도 모르면서도 찬송하고......”
이 말의 뜻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보다 더 우선되고 중요하다는 그의 이해관입니다. 그러면서 이정훈 자신은 ‘예수님을 알아버렸다’고 말했습니다. 회심하는 그날에 자신은 예수님을 알아버렸다고 했습니다. 이정훈 씨는 예수 그리스도를 ‘앎과 이해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생각이 제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남의 구원 여부를 확정하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전 교회와 성도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공인 이정훈 씨에 대해 그가 직접 고백한 회심 사건을 살피는 것입니다. 그는 교계의 공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검색대를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정훈 씨는 믿음 그리고 앎에 대해서 분명한 자신만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바로 살든 못하든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에 집중합니다. 반면 삶이 바르지 못함을 탓할 때 옳고 그름을 제대로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야단치는 게 불도의 가르침입니다. 이정훈 씨에게는 아직 이런 게 남아 있다고 생각되는 겁니다.
이정훈 씨는, 미국의 모 한인교회 강단에서 긴 시간 동안에 걸쳐 회심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나는 믿습니다.” “내 죄가 떠올랐습니다.” “나는 내 죄를 회개했습니다.” 등의 언급은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고백되는 내적인 표출의 자리이지만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승려로 살다가 예수 믿은 후 간증하는 분들의 예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간증자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고백은 ‘사망과 생명’ 그리고 ‘감격과 감사’입니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는데 어떻게 깊은 고백이 나오지 않을 수 있나요. 수백억 원 로또에 당첨된 사람이, 그 기쁨을 속에 꾹 눌러놓은 채 식구들에게 드라마 이야기만 할 수가 있겠냐는 겁니다.
불교 승려에서 회심한 간증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생각들과 고백들이 그때 입에서 터져 나왔는지 말입니다. 이정훈 씨가 여기저기서 간증했던 회심 사건은 “큰 깨달음” 즉, “대각성”을 한 시간인 것으로 보입니다. 너무나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측면의 요소를 더 많이 드러냈습니다.
이정훈 씨는 말했습니다. “회심 이후 십자가만 보면 더 이상 내겐 상징물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죽으셨나를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창조주가 죽으신 것을 압니다.” 그는 여기서도 “안다!”라고 말했습니다. “믿는다!”라고 자연스레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런 말이 그에게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것은 그가 오래 몸담았던 불교적 인식관 때문일 겁니다. 새로운 진리를 알게 되었을 때 불자들은 “깨달았다, 알았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이후에라도 그가 목사님을 통해 안내와 지도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둘째, 그가 간증한 회심 과정에서 뭔가 명확하게 빠진 부분이 있어 보입니다.
‘거듭남’ 곧 ‘회심’은 ‘물과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물’은 물세례나 영세가 결코 아님을 미리 밝힙니다. (궁금하신 분은 저의 유튜브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1편, 2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물은 성령의 일하심의 속성입니다. ‘물과 성령’은 곧 ‘성령의 물’로 이해함(중언법적 표현)이 더 낫습니다. 예수를 믿고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성령께서 물로 죄인을 정결케 하심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코람 데오) 자로 이끄시는 것, 새 사람이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에 대해 그 어느 전문가보다도 예수님이 가장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요 4장).
구원은 성령의 일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성령은 마치 바람과도 같아서 물리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되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되는 무질서의 과정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 곧 성령의 물, 성령께서 내 안의 주인이었던 죄로부터 나를 깨끗케 하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영생의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겉사람은 여전히 부패하나 속사람은 새롭게 변화되는 겁니다.
그로 인해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입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이 놀라운 사건이 한 개인에게 일어나기에, 그 이후 그의 삶은 인격적으로 변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구원’의 히브리어 글자 ‘예쓔아’에서 우리는 구원자 되시는 예수를 읽고, 쓰고, 말하고, 부르고, 그의 실존을 인정하고 인식하게 됩니다(마 1:21).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말할 때마다 사실 우리는 ‘예수’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회심 자리에서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두려움과 놀라움 속에서 인식하고, 먼저 자신이 죄인이라는 실존을 인식하고 토해내게 됩니다. 이런 사건은 너무나 놀라운 일이기에 우리는 인격적 영접의 과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합니다. 그 동시에 내 안에는 성령 하나님께서 좌정하셔서 떠나가지 않고 거하시게 됩니다(요 1장). 그래서 회심으로 거듭나는 사람은 -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으나 - 그 안에 성령께서 계심을 인지하게 되고, 그의 사고와 말, 행동에 인격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할 뿐 아니라 성령님의 감동케 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정훈 씨가 간증하고 있는 그 회심의 상황은 성경의 인물과 두 가지로 대비해 볼 수 있습니다. 평생을 예수에 대항하며 살아왔던 이정훈 씨가 죄성을 인식해야 함은 베드로의 사건에서, 그리고 한국 교회를 철저하게 파괴하겠다던 박해자가 그 원수인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허물어져야 함은 성도들에 대해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던 사울이 예수 앞에서 허물어졌던 사건과 대비하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정훈 씨가 말했던 “예수님이 내게 찾아오셨다!”라는 인식은, 주체할 수 없는 은혜의 물결이 그에게 밀려왔다는 것입니다. 어부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가득 잡은 후에야 비로소 예수님이 자신에게로 확 찾아오신 것을 인식한 것입니다. 베드로 앞에 어느 순간 구세주로 성큼 찾아오시고 드러내신 예수님, 그 예수님의 신적 실존 앞에 고집 센 베드로는 풀썩 주저앉으며 허물어져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 앞에 풀썩 쓰러지면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분명 울음이 섞인 소리가 터져 나왔을 겁니다. 안 봐도 뻔합니다. 이것은 사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사흘간 회개했고 기도했고 결국 죄를 회개했습니다(행 9장, 22장).
당시 부엌에 있었던 이정훈 씨의 아내가 거의 인지하지 못했던 사건이었다고 우리 모두는 그의 간증에서 들었습니다. 과연 그럴 수 있는 일인지 의문스럽습니다. 그런데, 조용하게, 멍하게 있다가, 집 밖에 나가서는 울음이 나와서 걸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저 놀랍게 경험한 세상이 너무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때도 자신이 처절한 죄인임에 대한 인식은 없어 보였습니다.
당시 TV에서는 목사님의 설교가, 죄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이 터져 나오고 있었고, 예수님은 그에게 실존적으로 찾아오셨고, 자신은 방바닥에 풀썩 꼬꾸라졌는데,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안 나왔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셨다는 신적 임재를 이정훈 씨가 느꼈다면 이는 분명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죄 인식과 함께 허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입으로 말할 수 없었다면 마음으로 자신의 죄에 대한 인식과 울부짖음이 드러나게 되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는 법정(court)이 머리에 떠올랐다고 말했습니다. 그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반응), 그는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이러한 초자연적 사건에는 개인의 의도적인 참음이나 지연이 무기력합니다. 그의 간증에는 ‘물과 성령의 역사’가 너무나 가려져 있습니다. 아니면 유사 경험으로, 워낙 인생의 허무에 침잠해 왔던 터라, 게다가 불도에 심취한 스님 출신이었으니, 영적인 측면에서는 악하든 선하든 열려 있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깨달음과 앎”을 최고의 득도의 가치로 여기고 있었고, 신불신을 떠나 성경을 자주 읽고 있었던 그 당시였습니다.
2007년 여름 그가 집에서 그런 낯설고 묘한 경험을 했다면, 그날 오후 모 교회에서 목사님을 만났을 때 “목사님, 저 이제부터 예수 믿기로 했습니다”라는 말로 끝나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소개받고 영접하고 싶습니다. 목사님, 도와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리고 목양실로 함께 들어갔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간증했던, TV 앞에서의 사건만으로는 그런 말과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놀라운 체험을 했는데 어떻게 그의 심령이 복음에 구원에 대해 간절하고 궁금하지 않았단 말인가요. 그런데 이정훈 씨는 마치 신앙의 첫 단계 즉, 거듭남의 단계를 그렇게 해서 말끔하게 지나간 듯한 이해를 하게 했습니다. 저는 그 간증을 듣고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사님이 주셨다는 책 한 권을 받고서 어떻게 뒤돌아설 수가 있었냐 하는 겁니다. “어떻게 저렇게 의연자약할 수 있었지?”라고 말입니다.
33년간 평생 광적인 불자였고, 한국 교회를 진멸하겠다고 교회사를 연구하고, 철학을 연구했던 그가, 그리도 조용하고 그리도 아름답게 회심의 과정을 지나갔다는 말인가요. 그는 산스크리트어로 불경을 읽고 공부했을 정도로 불도에 심취했었습니다. 그랬던 자가 어떻게 TV 앞에서 잠시 말 못하는 상태에서, 재판 법정을 떠올리고, 멍한 경험을 한 후에, 말짱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채로, 당일 목사님 앞에서 “나 이제 예수 믿기로 했어요”라고 말할 수 있나요?
또한 어둡고 긴 터널 같은 불도와 절간에서의 수행, 그 악한 영 아래에서의 교만하고 악한 심성으로 도를 닦고, 교회를 파괴하려는 흉악한 모사를 꾸미며 살아왔던 이정훈 씨는 왜 구원의 그 자유함을 제대로 누리고 감격하고 감사에 넘치는 고백 이야기를 하지 않는가요. 교회들 앞에서 흑암에서의 삶과 이제 예수 안에서의 삶, 성령이 이끄시는 날마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할 게 그렇게도 없는가요. 이정훈 씨는 성령께서 이끄시는 신앙생활에 대해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이정훈 씨에게서 이것부터 듣고 싶었습니다. 그 자유함을 함께 누려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내려 물고기가 가득 잡히는 실재를 경험했던 베드로는 체면도 부끄러움도 모른 채 주님 앞 해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몸을 떨어가며 흐느끼며 예수님께 고백했습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이정훈 씨는 베드로처럼, 사울처럼, 찾아오신 예수님 앞에서 똑같이 엎드려졌지만, 자신이 죄인이라는 처절한 인식과 죄인임을 고백하는 반응은, 그가 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빠진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 거듭난 후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중차대한 삶의 변화가 일어났어야 합니다.
2007년에 회심했던 이정훈 씨는 2016년에 동성애 커플 권리를 위해 법제 개선을 주장했습니다. 회심 이후 약 10년 동안 실제적인 신앙적 가치의 변화가 일어나지 못했다는 겁니다. 이는 2007년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로 2017년이 되기까지 비신앙적 업종의 장사를 계속 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성도 중에 교회 직분자이면서 모텔에서 일하는 것을 보면서, 과연 그분에게 인격적인 회심이 있었는지 의문을 갖기도 했습니다. 신앙인 법학자는 법의 성격으로 자신의 신앙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고, 장사하는 신앙인은 장사하는 일에서 자신의 신앙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드러내야 하기도 하지만, 자연스레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정훈 교수는 동성 커플들이 법적 권리를 누릴 수 있는 대안으로 독일의 '생활동반자법'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이게 어떤 건지 현실을 떠올려보면 압니다. 남자끼리 부부처럼 한 집에서 사는 겁니다. 법적인 모든 보호를 받으면서 말입니다. 동성애자들이 이렇게 살도록 돕는 법안을 제시했다는 겁니다.
이정훈 씨는 2016년 6월 원광대학교 법학연구소의 원광법학지에 논문 투고한 '동성혼과 생활동반자법에 관한 연구'(원제목 <동성혼과 생활동반자법에 관한 연구 - 동성생활동반자의 혼인신고 불수리처분에 대한 불복신청 사건을 중심으로>), 원광법학 제32집 제2호, 71~98 페이지에서, 법원이 김조광수·김승환 커플의 혼인신고를 거부한 사례를 다루면서 동성 커플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도록 법제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논문 한 편을 만드는 수고는 엄청난 일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그의 기독교적 정체성은 아무런 작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는 반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동성애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때이던 2017년, 울산서현교회에서 강의(9.13)를 하는데, 전혀 다른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동성애와 이데올로기'를 강연했습니다. 둘 다 회심 후에 있었던 반전이기에 더 놀라운 겁니다. 하지만 친기독교로 포지션이 달라진 점은 환영할 일입니다.
넷째, 이정훈 씨가 회심한 후 투 트랙으로 활동했어야 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회심 이후 이정훈 씨의 대교회 활동은 시작부터가 투 트랙으로 이루어졌어야 했습니다. 이는 그의 곁에 복음적 가치관을 조언했던 자가 없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혼자서 모든 활동 계획을 고민하고 수고롭게 수립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는 처음부터 두 방법으로 활동했어야 합니다.
하나는, 회심 이후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름 받았던 신앙적 소명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사울을 부르신 목적과도 똑같습니다. 성경의 모든 일꾼들은 이런 목적을 전제로 부름 받았습니다. 이외의 모든 것은 부차적입니다. 즉 교회를 박해하던 자를 부르셔서 변화시킨 후 복음 전파를 위해 쓰시겠다는 부르심입니다. 주의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이정훈 씨를 부르신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아직도 불자로 살고 있는 천만 이상의 불쌍한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라는 소명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정훈 씨는 이에 대한 소명관은 전혀 드러낸 적도, 보이지도 않습니다. 제가 그의 회심에 조심스럽게 이런저런 질문을 제기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부분도 포함됩니다. 그는 아직 불자들을 대상으로 ‘복음으로의 초대’를 제대로 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사건에 대한 첫 단추부터 제대로 채워지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결신과 영접을 통해 갖게 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연스런 소명이기도 합니다. 제가 머리글에서 교단 지도자들에게 성토한 이유도 이와 관련 있습니다. 이정훈 씨는 예수께서 그날 왜 자신에게 오셨고, 지금 예수 믿게 되었는지에 대해 처음부터 인식하셔야 합니다.
또 하나는, 회심 이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직업적 소명에 매진하는 일입니다. 이정훈 씨는 뛰어난 법학자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첫 번째 부르심에 맞는 사역을 해야 합니다. 그가 첫 등장했을 때에 성도들이 마음을 열어준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일상적으로는 한국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동성애와 혐오발언법 등과 관련하여 뛰어난 법리로 국회의사당과 정치인들을 만나 로비하고, 관련 공무원들을 만나 법제 세미나를 하면서 법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밤낮 뛰어다녀야 합니다.
이정훈 씨는 캘빈 신학 사상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활동은 캘빈주의적 소명관 즉,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하는 일입니다. 성도들 앞에서 사상, 정치, 동성애 문제를 이야기하기보다는 정치인들과 관련 공무원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게 법 제정 및 적용에 더 빠른 방법입니다. 이정훈 씨 혼자로도 할 수 있습니다. 바로 법안을 구성하는 전문적 일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 강단에서 시간을 보내는 겁니까. 이것은 그가 정치에 대한 방향 설정이 이미 되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강단에 서면서도 복음적 사명의 발언보다는 미국식 보수 정치를 향한 사상, 정치 이데올로기 이야기가 더 많은 겁니다. 이정훈 씨가 자신의 민족적 가치관을 전하고 싶다면, 필요하면 세미나를 개최하면 됩니다. 그 어떤 주장을 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교회 강단은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강단의 기능은 지금 이정훈 씨의 활동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강단은 개인적 사념으로 오염되어서는 안 됩니다. 강단은 일단 오염되면 그 전염성은 아주 오래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강단은 이런 용도로 쓰라고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곳이 아닙니다. 강단은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은혜의 강물이 흘러내려, 상하고 넘어진, 그리고 승리한 주의 백성들이 더욱 되살아나는 자리입니다. 앞에서 밝힌 첫 번째 소명을 위해서만 그에게 강단이 허용될 수 있습니다.
강단은 보수와 진보를 극한적으로 나눠 피아처럼 구분하고, 보수가 복음이고 진보가 주사파라는 획일화된, 스펙트럼이 좁은 주장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복음은 원수까지도 안으라고 선포하는, 스펙트럼이 광활합니다. 성도들을 이념으로 무장된 공격적인 신앙으로 만드는 곳이 아닙니다. 자유민주주의에 시비 거는 게 아님을 아실 겁니다. 우리는 공산주의, 사회주의 모조리 배격합니다.
그러니 이정훈 씨의 현 행보는 결국 이념화된 신앙관으로 무장된 성도들로 만들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강단은 사상, 정치관, 성적 가치관이 다른 이들에게까지도 다가가서 복음과 사랑으로 안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로 바꾸어놓는 거룩한 선포대이기 때문입니다. 이정훈 씨가 각 교회를 다니며 강연할 때에, 성도들 앞에 서면 어떤 이야기부터 터져 나오는 게 당연한 사명인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동성애 이데올로기에 대해 강론할 게 너무나 많겠지만 이것은 세미나 장소에서 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이정훈 씨는 회심을 통해 성령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내주하셨으면 이 소명을 위해 사자후를 발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함이 가장 일차적이고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합니까. 아직 성령 안에서의 삶, 성령의 감동으로 인한 일상의 기쁨, 아직도 흑암에서 죽어가는 불자들을 향한 간절한 구령의 메시지를 제대로 한 번이라도 전한 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울이 회심한 후 가장 먼저 한 일도 무엇입니까.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행 9:20),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행 9:22) 사울은 자신이 속해 왔던 유대교와 유대인들에게, 거기서 나오라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고 공모한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행 9:23).
이정훈 씨는 구령 활동으로 불자들에게서 미움을 받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자신을 부르신 이유에 합당하게 활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거울이 될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직업으로서의 법리 연구와 교수직은 더욱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정훈 씨에게 미국식 보수 정치화를 전하는 일보다 불자들에게 복음을 우선적으로 전하라고 부르신 게 너무나 명약관화합니다. 영원한 흑암에서 살던 그를 회심하게 하심은 이런 순서로 드러나야 함이 옳습니다. 강단은 지켜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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