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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 여산 류병덕의 원불교실학론|리더십에세이外
혼돈나라|조회 57|추천 0|2018.09.29.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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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 류병덕의 ‘원불교실학론’
조성환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목차]
I. 들어가며
II. 본론
1. 정산 송규의 ‘실학’ 개념
2. 조선후기의 ‘실학’ 개념
3. 후쿠자와 유키치의 ‘실학’ 개념
4. 여산 류병덕의 ‘실학’ 개념
5. 원불교에 대한 실학적 해석
III. 맺으며 - ‘원불교실학론’의 함축
[한글요약]
지금까지 ‘실학’ 개념은 주로 서구 근대적인 실용성이나 실증성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되어 왔고, 실학자의 범위도 조선후기 유학자들로 한정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근대적인 의미의 ‘실학’ 개념은 조선후기 사상가들의 것이라기보다는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의 ‘과학으로서의 실학’ 개념을 암암리에 차용하여 조선후기사상사 서술에 적용한 것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류병덕은 1930년대의 정산 송규의 ‘실천 실학’ 개념을 단서로, 조선후기의 실학을 ‘이론실학’으로 규정하고, 구한말의 안창호나 백용성 그리고 원불교를 이론실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 ‘실천실학’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의 실학, 즉 실천학으로서의 실학 개념이야말로 사실은 조선후기 사상가들이 말하는 ‘실학’ 개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류병덕의 실학 개념은 원래의 실학 개념으로 되돌아가도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조선후기사상가들은 어디까지나 도덕실천이라는 유학의 본질을 유지하면서 제도개혁을 주장하였는데, 그런 점에서는 원불교에서 말하는 “도학과 과학의 병진”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류병덕의 ‘원불교실학론’은 기존의 ‘실학자=유학자’라는 편협한 도식에서 벗어나서 ‘실학’의 층위와 범위를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분화하고 다양화해야 할 필요성을 촉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I. 들어가며
여산 류병덕은 한기두, 송천은 등과 더불어 원불교학을 정립한 제1세대 학자로, 특히 원불교를 철학적 관점에서 해석하는데 기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종교와 철학에 관한 관심도 컸는데, 이러한 그의 관심이 집대성된 역작이 1977년에 나온《원불교와 한국사회》(원광대학교출판부)이다. 또한 원광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68년에는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를 설립하여, 근대한국 민중종교 연구를 선구적으로 이끌어 갔다.
류병덕의 학문 세계는 크게 세 분야로 나뉘어지는데, 첫째는 한국사상사이고, 둘째는 근대 한국의 개벽종교이며[주2], 마지막은 원불교사상이다[주3].
[주2] 여기서 ‘개벽종교’란 19세기말~20세기 초에 탄생한 동학·천도교, 대종교, 증산교, 원불교를 말한다. 흔히 ‘민중종교’나 ‘민족종교’ 또는 ‘신종교’라고 불리는데, 이들의 대부분이 ‘개벽(開闢)’이라는 개념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대종교는 ‘開天’) 여기에서는 ‘개벽종교’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데, 가령 원불교를 한편으로는 ‘개벽’의 이념을 표방한 개벽종교들과의 관련 속에서 연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불교사의 맥락에서도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 그러한 예이다. 즉 원불교나 개벽종교를 종교학이나 불교학의 틀에서만 보지 않고, 한국사상사라고 하는 보다 거시적인 사상사적 지평에서 해석하는, 다시 말하면 한국학의 일부로서 연구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원불교실학론’이다. 왜냐하면 “원불교가 실학이다”는 주장은 “개벽종교의 하나로서의 원불교를 한국사상사의 맥락에서 자리매김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실학’ 개념은 항상 ‘근대’와의 관련 속에서 논의되어 왔기 때문에, “원불교가 실학이다”는 주장은 “원불교가 근대적이다”는 주장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종래의 실학 담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관점으로, 1990년에 김용옥이 “실학허구론”을 주장한 이래로[주4] 이렇다 할 대안이 없는 ‘실학론’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주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본문에서는 류병덕이 주장하는 원불교실학론의 내용과 그것의 연원, 그리고 그의 논의가 지니는 사상사적 의의를, 그가 1991년에 발표한 선구적인 논문 「소태산의 실천실학 - 조선후기실학과 대비하여」를 중심으로 고찰해보고자 한다.
II. 본 론
1. 정산 송규의 ‘실학’ 개념
류병덕의 ‘원불교실학론’은 그 연원을 추적해보면 원불교의 제2대 리더인 정산 송규(1900~1962)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류병덕은 정산이 1937년에 쓴 「일원상에 대하여」라는 글에서[주5] ‘실천실학’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점에 대해서 “소태산의 ‘실천의지’를 나타낸 대목”이라고 해석하고 있다.[주6]
(주5) ‘일원상’은 원불교에서 생각하는 궁극적 진리를 ‘하나의 원’[一圓]으로 형상화[相]한 것을 말한다.
정산이 ‘실천실학’이라는 표현을 쓴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먼저 「일원상에 대하여」에 나오는 해당 부분을 살펴보기로 하자.
7.통론
이상 각 절의 대지를 총괄적으로 말한다면 또한 타력과 자력 두 가지로 나누어지나니 신앙과 숭배는 일원상을 상대로 한 타력이요, 체득과 이용은 일원상을 상대로 한 자력이니 일원의 공부가 자력인 중에도 타력이 포함되고 타력인 중에도 자력이 포함되어 자타력 병진법으로 이 무궁한 사리를 원만히 이행하는 바 신앙을 하면 신앙에 대한 실효가 나타나고 숭배를 하면 숭배에 대한 실효가 나타나고 체득을 하면 체득에 대한 실효가 나타나고 이용을 하면 이용에 대한 실효가 나타나서 능히 복리를 수용하고 불과를 증득하나니 이것이 곧 무상대도이며 실천 실학이 되는 것입니다.[주7]
여기에서 정산은 “일원상에 대한 신앙 및 숭배와 체득과 이용은 실제 ‘효과’가 나타난다는 의미에서 ‘실효’가 있다”고 하면서, 일원상을 최고의 진리로 삼는 원불교를 ‘실천 실학’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정산이 말하는 ‘실학’의 의미는, 우리가 역사교과서에서 배운 조선후기의 실용적이고 과학적인 학문을 의미하는 ‘실학’이 아니라, 신앙이나 체득을 ‘실천’하면 그것의 ‘실제’ 효과가 나타난다는 의미에서의 일종의 ‘실천학’을 말한다.
정산은 다른 곳에서도 ‘실학’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거기에서도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
시자 묻기를 “조신(操身)의 예를 밝히신 첫 편의 모든 조항은 그 설명이 너무 자상하고 비근하여 경전의 품위에 혹 손색이 없지 않을까 하나이다.” 말씀하시기를 “무슨 법이나 고원하고 심오한 이론은 기특하게 생각하나 평범하고 비근한 실학은 등한히 아는 것이 지금 사람들의 공통된 병이니, 마땅히 이에 깊이 각성하여 평상시에 평범한 예절을 잘 지키는 것으로 예전 실행의 기본을 삼을 것이며, 너무 자상한 주해 설명은 앞으로 예전을 완정할 때에 줄일 수 있는 데까지 줄이자.”[주8]
여기에서 말하는 ‘실학’도 추상적 이론에 머물지 않고 일상의 도덕적 실천을 추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그런데 주목할만한 점은 조선후기의 이른바 실학자들이 사용했던 ‘실학’ 개념도 실은 정산이 사용하는 ‘실학’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2. 조선후기의 ‘실학’ 개념
조선후기의 양명학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는 하곡 정제두(1649∼1736)가 죽자, 그의 문인들이 스승의 서원과 사당을 설치해 줄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는데[주9], 이 상소문에서 정제두의 학문을 참된 앎을 실천하는 ‘실학’이라고 말하고 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지극한 본성을 궁구하고 순수한 실천을 돈독히 하는 것은 실학(實學)이요, 순박한 덕을 드러내고 교화의 명성을 세우는 것은 실정(實政)입니다. 이에 신들은 감히 선정(先正=정제두)의 실학(實學)을 들어서 성조(聖朝)의 실정(實政)을 우러러 찬양하였습니다. (중략)
대저 대개 성(誠)이란 마음속의 실리(實理)를 말합니다. 하늘이 이 실리를 사람에게 부여하고, 사람은 이를 얻어서 마음으로 삼아서, 이것으로 앎(知)을 지극히 하면 진지(眞知)가 되고, 이것으로 힘써 행하면 실행(實行)이 되며, 진지를 실행으로 삼으면 이것이 실학(實學)입니다. 다만 이 실학은 얻은 자가 대개 적은데 오직 우리 선정신(先正臣) 정제두는 금같이 정미하고 옥같이 윤택한 자질을 가지고서도 연못에 임하여 얼음을 밟는 듯한 공부를 쌓았으며, 일찍이 과거업(科擧業)을 버리고 침잠하고 정진하였으니 탁연(卓然)히 “먼저 그 큰 것을 세운다”는 뜻에 부합되는 바가 있습니다. [주10]
(伏以窮至性篤純行, 實學也; 表淳德樹風聲, 實政也. 迺者臣等敢擧先正之實學, 仰贊聖朝之實政. … 蓋誠之爲言, 卽心中實理之名也. 天以此實理賦於人, 人得之以爲心. 以此致知則爲眞知, 以此力行則爲實行, 以眞知爲實行, 則斯爲實學. 惟此實學, 得之者蓋寡, 惟我先正臣鄭齊斗, 以金精玉潤之質, 積臨淵履氷之工, 蚤捨公車, 潛心精進, 卓然有契於先立乎其大者之旨.)
여기에서 정제두의 문인들은 마음속에 부여된 실리(實理)로 참된 앎을 알아서 실제로 행하는 것(實行)을 ‘실학’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때의 ‘실학’이란 일종의 ‘도덕실천학’에 해당한다. 그래서 이글에서는 이러한 의미의 실학을 ‘실천학’으로서의 실학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러한 실천학으로서의 ‘실학’ 개념은 조선전기에 율곡에게서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여,[주11] 조선후기에는 학파를 불문하고 널리 사용되었다. 가령 실학의 황금기로 알려져 있는 시대의 정조(1752~1800)도 정제두의 문인들과 비슷한 의미의 실학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나의 마음이 곧 너희들의 마음이고, 너희들의 마음이 곧 일국(一國)의 마음이고, 일국의 마음이 곧 만고(萬古)의 마음이다. 실심으로 실학을 강론하고, 실학으로 실사를 실천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이니, (이것이) 내가 너희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주12]
(予之心卽爾等之心, 爾等之心卽一國之心, 一國之心卽萬古之心. 以實心講實學, 以實學行實事, 卽今日之急先務, 卽予求助於爾等者也.)
여기에서도 앞의 정제두의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일을 하는 ‘행실사(行實事)’를 실학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행실사(行實事)’를 다산 정약용은 줄여서 ‘행사(行事)’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실학’과 함께 ‘실심’이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심’은 율곡에서 이미 나오는 개념으로 일종의 ‘실천의지’나 ‘개혁의지’를 말한다[주13]. 또한 다산 정약용의 경우에는 “실심사천(實心事天)”, 즉 “하늘을 섬기는 참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주14]. 정조의 경우에도 이와 유사하게 실학을 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 또는 ‘참마음’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참고로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보면, ‘실학’이라는 말은 총 85차례 나오는데 반해 ‘실심’은 294번이나 나오고 있고, 그 중에서도 영정조 시대에 전체 용례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99차례가 나온다[주15]. 이것은 적어도 개념상으로는 이른바 실학시대에 ‘실학’보다는 ‘실심’이 더 강조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조선후기 유학자들이 실심을 도외시한 실학을 추구하지 않았음을 함축한다[주16]. 그런 의미에서 조선후기 유학자들은 탈성리학자가 아니라 ‘성리학자’였고, 원불교식으로 말하면 ‘도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원불교학자 송천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조선후기 실학자들은) 인민의 경제생활을 등한시하는 도학 일변도의 사고에 반대하고, 생활 속의 건전한 도학이 되도록 했다는 점에서 영육쌍전적 경향을 띄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상 실학자들은 단순한 정치가나 경제학자가 아니라 모두 도학자들이었다. 그러나 조선조의 실학은 이론상으로만 풍미했을 뿐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없었던 것은 유감된 일이다.[주17]
이 글은 실학의 정설이 확립되어 가던 1970년대에 나온 것인데, 여기에서 송천은은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실학의 이미지와는 약간 다른 실학론을 제시하고 있다. 즉 조선후기 실학자들은 단지 물질적인 것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 수양의 중요성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불교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영육쌍전(靈肉雙全)’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가 실학자들을 단순한 경세사상가나 부국강병론자로만 보지 않고 도학자로서의 성격도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원불교의 ‘영육쌍전’이라는 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선후기의 실학은 ‘이론’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도 덧붙이고 있는데, 이러한 비판은 류병덕에서도 보이고 있다(후술).
3. 근대 일본의 ‘실학’ 개념
지금까지 살펴본 정산 송규나 조선후기 유학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실학’ 개념은 우리가 그동안 교과서에서 배운 ‘실학’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실학’은 실용적이고 실증적이며 과학적인, 그래서 다분히 서구 근대적인 성격을 띠는 학문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생소한 ‘실학’ 개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한국사상사 서술에서 ‘실학’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것은 1930년대에 조선학운동으로 알려져 있다. 최남선, 정인보, 안재홍, 문일평 등이 중심이 된 조선학운동에서는 정약용을 비롯한 조선후기의 일련의 사상가들을 근대지향적인 실학자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1950년대의 천관우를 거쳐 실학의 외연이 확대되고, 1970년대의 이우성에 이르면 이른바 ‘삼대실학파’(경세치용・이용후생・실사구시)가 교과서설로 정착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의미의 ‘실학’ 개념은 사실 조선후기의 사상가들에게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해서 새로운 의미의 ‘실학’ 개념, 즉 서구적인 의미의 ‘실학’ 개념을 착안하게 되었을까? 그 실마리는 아마도 당시가 일제강점기였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카타오카 류 등의 연구에 의하면, 19세기말에 일본의 근대화를 주도했던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는 ‘과학’(science)으로서의 ‘실학’ 개념을 사용하고 있고, 이러한 용례는 후쿠자와 유키치 이전의 일본사상가들에게서 이미 나오고 있다고 한다[주18]. 실제로 후쿠자와 유키치가 사용한 ‘실학’ 개념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자연과학에서는) 1400년대에 이르기까지는 … 세상 사람들은 모두 고대의 성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학풍에 심취하여 부회기이(附會奇異)한 신설(神說)을 주창하고, 유용한 실학에 뜻을 두는 자는 없었다. 1600년 무렵까지도 이러한 추세는 여전했는데, 이 때 프란시스 베이컨, 데카르트 등의 현명한 철인이 나와서 전적으로 시험(試驗=실험)의 물리학을 주창하여 고래(古來)의 공담(空談)을 배척하고, 1606년에는 이태리 학자 갈릴레오가 처음으로 지동설을 세우고, 1616년에는 영국의 의사 하비가 인체혈액운행의 이치를 발명하는 등, 세상의 학풍이 점점 실제로 향한다. (후쿠자와 유키치,《서양사정》)[주19]
여기에서 후쿠자와는 “기이한 신설(神說)”이나 “고래(古來)의 공담(空談)”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시험의 물리학”과 “유용한 실학”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로부터 후쿠자와의 ‘실학’ 개념이 서양의 물리학에 바탕으로 둔 자연과학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주20].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가설을 세워볼 수 있을 것이다. 1930년대 조선학운동가들이 조선후기의 사상사를 실증적이고 유용성을 추구하는 ‘실학’으로 해석한 것은 후쿠자와 유키치로 대변되는 일본 근대의 ‘실학’ 개념의 영향을 암암리에 받은 것이 아닐까라고 -. [주21]
이에 반해 정산은 조선학운동이 일어난 동시대에, 후쿠자와 유키치적인 서구화된 ‘실학’ 개념이 아니라, 조선사상사의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실학’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아마도 여기에는, 송천은에게서 볼 수 있었듯이, 원불교라는 특성이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즉 도덕적 실천을 강조하는 원불교이기 때문에 서구화된 ‘실학’ 개념에 쉽게 경도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류병덕의 ‘실학’ 개념은 어떠할까?
4. 류병덕의 ‘실학’ 개념
류병덕은 정산이 1930년대에 일원상을 ‘실천실학’으로 규정한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1920년대 1930년대에 한국은 혹심해진 일제의 간섭과 문화말살정책으로 그 당시 뜻있는 국학자들은 조선후기의 ‘이론실학’을 더듬고 이에 대응하려는 풍조가 일고 있었다. 정산은 이러한 학계의 숨은 움직임에도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지성을 가진 분이다.(1226쪽 각주3)
여기에서 류병덕은 한편으로는 1930년대에 일어난 조선학운동을 높게 평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후기 실학을 보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론실학’이라는 개념이다. 이 ‘이론실학’이라는 개념은 뒤집어 말하면 “실천성이 결여된 실학”이라는 비판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조선학운동가들의 ‘실학’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실제로 그는 조선후기의 실학이 이론실학에만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근대화에 기여하지 못했다고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조선조 실학이 왜 한국근대화의 효시나 역할이 되지 못하고 다만 학자들의 문헌 분석에 의한 이론실학으로만 머무르고 있는가?”(1226쪽)
이와는 대조적으로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 박중빈의 행적은 ‘실천실학’이라고 평가하면서, 이 점을 일찍이 지적한 이가 정산 송규라고 말하고 있다.
“소태산의 일생동안 행적은 왜 실천실학인가? 소태산은 … 구도과정에서나 … 교단의 형성과정에서나 … 제자들의 식견속에서도 실학에 대해서는 한말도 거론되지 않았던 일생이었는데 뜻밖에도 1937년에 정산에 의해 표현된 ‘실천실학’ 한마디는 결정적으로 소태산의 실천의지를 나타낸 대목임을 천명하는 바다.”(1226쪽)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류병덕이 ‘이론실학’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조선후기의 ‘실학’ 개념은, 조선후기 당사자들이 사용한 ‘실천학’으로서의 ‘실학’ 개념보다는, 후쿠자와 유키치적인 ‘실학’ 개념의 영향을 받아서 1930년대에 조선학운동가들에 의해 성립된 ‘실학’ 개념에 더 가깝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류병덕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소태산의 ‘실천실학’ 개념이야말로 사실 조선후기의 실학자들이 사용한 실학 개념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류병덕이 말하는 소태산의 ‘실천실학’과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실천학으로서의 ‘실학’과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걸까? 이에 대해서는 그의 다음과 같은 말이 참고할만하다.
당시의 시대적 왜곡 현상들을 광정(匡正)하고자 했던 사회제도개혁의 노력도 그것이 실지 기층민들에 바탕한 실천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라기보다는 피치자(被治者)의 편에선 지식인의 논리로서 집권층에 대한 주장에 치중했지만, 이 또한 시대적 주류를 형성하지 못했었다는 제약적 상황에 의해 당시의 정책에 제한적으로밖에는 반영되지 못한 채, 그 최종단계를 1870년대로 하여 마무리 지음으로써 후대에 망국의 비운을 맞게 되고 ….(1225쪽)
여기에서 류병덕은 조선후기 실학의 한계를 두 가지 측면에서 지적하고 있다. 하나는 민중들이 주체가 된 실천운동이 아니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실학자들의 개혁론이 정책에 반영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즉 설령 조선후기의 유학자들이 도덕적 실천학으로서의 ‘실학’을 주창했다고 해도, 류병덕이나 송천은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개인적 차원의 도덕수양에 머무를 뿐 민중들과 함께 사회를 변혁시키는 사회적 차원의 실천으로는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아울러 만약에 그들의 이론적 개혁론이 정책에라도 반영되었더라면 현실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그런 점에서 실천실학이라고 평가할 수 있었을텐데 아쉽게도 그러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류병덕이 조선후기의 실학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구한말의 ‘실학운동’을 따로 설정하는 이유가 있다.
물론 실학적 전통이 근대로 이어지는 개화사상에 내면적으로 계승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지만 … 개화사상도 지배적인 조류가 되지 못한 채 정치적 사상적 혼란 속에서 결실을 보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 마침내 한말(韓末)이라는 종언을 고하고 일제의 지배하로 곤두박질한다. … 그러나 이 시기에 실학적 사고와 민족의식은 도리어 민중 속으로 맥맥히 흘러들게 되고, 이 시대 경향을 바로잡으려고 종교운동 사회사상 운동들이 끊이지 않고 산발적으로 일어나 확산되었던 것이다. 이들 운동단체들은 전기실학·후기실학에[주22] 대하여 그를 연구했다거나 학통을 따져 본 일도 없이 필연발생적으로 일어났던 운동이었기에 일명 ‘준실학운동’이라고 불러 본다. 이들은 후기실학적 성격의 변용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다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1225쪽)
(주22) 여기에서 ‘전기실학’은 조선전기에 도교와 불교를 배척하면서 윤리적 실천을 강조한 주자학적 ‘실학’을 말하고, ‘후기실학’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조선후기의 실학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류병덕은 구한말의 사회운동의 전개나 민중종교의 탄생은 조선후기의 실학 정신이 민중 속에서 부활된 것이고, 그런 점에서 ‘준실학운동’으로 재평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조선후기 실학의 연속선상에서 구한말의 사회운동과 종교운동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실례로 안창호나 김성수 또는 백용성이나 소태산(원불교 창시자)을 들고 있고, 특히 소태산이 이끈 ‘불법연구회’(원불교의 전신)는 해방 이후에 실학정신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실천실학운동’으로 부르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한말 이후에 새롭게 전개되는 실학적 경향의 흐름은 문자로써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써의 실천성이 절실히 요망되었던 것이며, 따라서 안창호의 무실역행에 의한 민족활로 개척이라는 지도이념은 허위와 가식에 반하는 것으로써 이것이 국가의 내실을 기약하는 적절한 처방이었다는 점에서 실학적 운동의 한 양태로 볼 수 있을 것이며, 김성수의 물산장려운동・인재양성・언론확보운동 등도 실학적 평가를 받을만한 운동이라고 본다. 그리고 백용성의 대각교 제창이나 한용운의 불교유신운동도…자체 내의 실학적 실천성을 지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집단들 중에서도 특히 소태산이 이끌어온 일제시의 ‘불법연구회’는 해방을 맞이하면서 종교입장에서 실학적 견해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오늘에 이른다. 해방후 소태산의 실학적 움직임은 그 어느 집단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리만치 실학정신을 실천한 단체로 보여진다. 특히 소태산은 이론실학을 한번도 접해본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실천하려고 했던 분야가 모두 실학적이었다는 점에서 논자는 이를 ‘실천실학운동’이라고 명명해 본 것이다.(1226쪽)
그동안 한국의 선각자들이 실학을 추구하였으나 경세를 담당했던 왕조 집권층에서는 이념과 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며, 따라서 그 당시의 실학도 완전히 이론 실학에 머물렀고 마침내 국혼마저 상실되고 말았는데, 민중의 저층에서 26세의 청년 소태산은 스스로 일어나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표어를 내걸고 그당시 실의에 찬 민중들을 규합해서 실천적으로 이끌었던 것이니, 그는 아직까지 실현할 수 없었던 실학의 의지를 펴려고 나타난 모습이었다.
이 개교표어는 … 새로운 역사인식 그리고 과학정신을 이 땅에 수용하여 조화로운 현실낙토를 건설하려고 부르짖은 것이었으며, 이는 실천실학의 종합적인 실현이기도 하였다.(1228쪽)
이상의 서술에 의하면, 유병덕이 보기에 안창호, 김성구, 백용성, 소태산 등은 모두 실학자이고, 그 중에서도 특히 실천을 강조한 실천실학자이며, 그런 점에서 이들의 운동을 ‘실천실학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으로부터 유병덕이 말하는 ‘실천실학’이란 딘지 ‘개혁 이론으로서의 실학’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 운동으로서의 실학’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 원불교에 대한 실학적 해석
류병덕은 이상의 관점을 바탕으로 원불교의 실천실학적 측면을 표어와 교리 그리고 교단창립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원불교를 실학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류병덕의 ‘원불교해석학’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데, 구체적인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표어
①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 : 일상생활(개체) 속에서 부처(전체)를 발견하는 실천실학
② 무시선(無時禪) 무처선(無處禪) : 삶의 현장에서 선(禪) 수련을 하여 올바름을 판단하도록 하는 활선(活禪)
③ 동정일여(動靜一如) : 우주의 본래적인 동화력에 입각한 현실적 인생관과 우주관
④ 영육쌍전(靈肉雙全) : 물질(사실)을 정신적(수행) 차원에서 재조정하고자 한 실사구시
⑤ 불법시생활(佛法是生活) 생활시불법(生活是佛法) : 생활 속에서 불법을 찾고자 한 실학정신
⑥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 실의에 빠진 민중들을 규합해서 실천적으로 이끌고, 과학정신을 수용하여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한 실천실학
(2) 교리
① 일원상(一圓相) 진리 : 사실(實事)에 입각하여 ‘일원’의 진리를 깨닫는(求是) ‘진리적 종교’와, 일상생활에서(實事) ‘일원’의 진리를 구하는(求是) ‘사실적 도덕’을 제시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
② 사은(四恩) : 삶의 현장에서(實事) 천지와 부모, 동포와 법률의 은혜(四恩)를 자각하고, 이것을 현실생활 속에서 실천하는(求是) 실사구시의 실천원리이자 실학적 신앙.
③ 사요(四要) : 자력양성과 지자본위(知者本位) 등의 네 가지 실천덕목은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이론을 실천하고자 한 명제.
(3) 교단창립
① 저축조합 : 현실을 토대로 한 자주적 정신과 경제적 토대 확립 추구
② 숯장사 :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갈망했던 “이용후생” 이념 실천
③ 간척사업 : 실사구시의 역행이자 실천실학의 본보기
④ 총부건설 : 새시대의 실천실학의 종교관
⑤ 조합운영 : 실리실용성을 기본정신으로 경제적 자력 실현
⑥ 인재양성소 : 실천실학의 개척정신에 바탕을 둔 종교(靈)와 생활(肉)의 병진
이상의 해석에서 주목할만한 점을 들면 다음과 같다. 먼저 「(2) 교리」에서 ‘실사구시’를 실천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대목이다. 보통 실학 담론에서 ‘실사구시’는 김정희로 대변되는 실증적이고 고증학적인 학풍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고 있는데, 류병덕은 “일상생활”이나 “삶의 현장”(實事)에서 진리를 찾고, 그것을 “현실생활” 속에서 실천한다고 하는 실천실학적 맥락에서 재해석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김정희 이전에 양득중(1665~1742)이 사용하고 있는 ‘실사구시’의 의미에 가깝다.[주23] 이렇게 보면 류병덕의 ‘실사구시’ 해석도 실천학으로서의 실학의 의미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해할 수 있다.
한편 ‘사요’에 대해서는 실증실학과 실천실학의 병진을 추구한 사례로 해석하고 있는 점이 독특한데, 여기에서 실증실학과 실천실학 개념은 미나모토 료엔의 ‘실증적 실학’과 ‘실천적 실학’의 구분에서 차용해 온 것으로, 실증실학은 과학화・합리화・근대화의 기능화 운동을 말하고 실천실학은 종교화・철학화・도덕화의 사회화운동을 가리킨다(1231-2쪽). 류병덕은 사요를 실천실학적으로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다,
소태산은 실증실학적 측면으로는 물질문명이라고 하여, 즉 과학적 합리적 근대화의 수용이라는 입장에서 선용 활용을 강조했고, 실천실학의 측면에서는 도덕적 인간의 훈련과 사요의 사회적 실천이라는 종교를 내놓았다.(1232쪽)
여기에서 류병덕은 미나모토 료엔의 실증실학과 실천실학의 틀을 가지고 원불교가 지향하는 “도학과 과학의 병진”의 추구를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사요’는 실천실학). 여기에서 실증실학은 과학의 영역에 해당하고 실천실학은 도학의 영역을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류병덕이 사용하고 있는 실학 개념은 서구적인 과학적 실학과 한국적(또는 동아시아적)인 실천적 실학을 아우르는 통합적 혹은 회통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원불교적 회통 사유의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즉 조선학운동의 실학 개념이 다분히 서구적인 실학 개념이었고(류병덕의 ‘이론실학’, 미나모토 료엔의 ‘실증실학’),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실학 개념이 유교적인 실학 개념이었다고 한다면(정산의 ‘실천실학’ ) 류병덕은 원불교에서 양자의 “겸전(兼全)”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류병덕은 ‘신실학’ 개념을 제창하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신실학 개념으로 원불교를 해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III. 맺으며 - 원불교실학론의 함축
이상의 논의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학운동의 실학 개념은, 류병덕의 용어로 말하면 ‘이론’ 중심의 ‘실학’이다. 그런데 실학연구사의 관점에서 보면, 이론 중심의 실학 개념은 본래 실천을 강조했던 조선후기의 ‘실학’ 개념이 19세기말~20세기 초에 서구 학문관의 영향을 받아서 변질된 것이다. 류병덕이 조선후기의 실학을 ‘이론실학’으로 규정한 데에는 본래 실학이란 실천성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음을 시사한다.
류병덕이 보기에, 조선후기 실학이 이론실학으로 머무른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실학자들의 개혁론이 실제 정책으로 구현되지 못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실학자들이 민중과 함께 사회운동을 전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류병덕은 바로 여기에 원불교가 지니는 실학적 의의가 있다. 원불교는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구현하고자 했던 경제적 개혁을 민중과 함께 실천했다는 점에서 실천실학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원불교는 서양의 과학까지도 수용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실증실학 또는 이론실학 - 이것을 ‘과학실학’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이상의 원불교실학론은 도학과 과학의 병진이라는 원불교의 이상을 실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것으로, 그 자체로 원불교의 회통적 사유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여러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먼저 그동안 유학이 독점해 왔던 ‘실학’ 담론을 원불교나 불교와 같은 유학 이외의 사조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관점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류병덕은 원불교가 “실학이라는 한국학의 한 장으로 다시 가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주24]
뿐만 아니라 그동안 ‘실학파-개화파’가 독점해 왔던 근대화 담론을 원불교와 같은 개벽종교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관점도 제시하고 있다(“소태산이 이 회상 창립에서 사명감에 불타는 인재들을 배출시키려 의도한 것은 한국 근대화운동의 선구였다고 평가할 것이다.”)[주25].
이러한 견해는 그동안 서구적 이성 중심으로만 생각해 왔던 ‘실학’과 ‘근대화’를 종교적 영성의 관점에서도 생각할 수 있다는 시사를 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실제로 류병덕은 “실학적 종교(1231쪽)”나 “실학적 신앙”(1231쪽)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실학과 종교가 결코 배치되지 않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류병덕의 원불교실학론은 그동안 실학과 개화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왔던 한국근대사상사의 기본 틀이 근본적으로 재고되어야 함을 촉구하고 있다.
[각주]
(1) 이 글은 2018년 4월 18일에 원광대학교에서 열린 “여산 류병덕 박사 10주기 기념 학술대회”(주최: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발표한 「여산 류병덕 박사의 한국학 - ‘원불교실학론’을 중심으로」를 수정한 것이다.
(3) “물론 내 활동의 가장 밑바탕에는 원불교사상이 전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연구활동은 세 가지 관점에서 진행되어 왔다고 할 수 있어요. 하나는 우리나라의 사상사를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고, 또 하나는 한국의 신종교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며, 또 다른 하나는 원불교사상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류병덕・양은용 대담 「원불교사상과 한민족의 진로」, 류병덕, 한국 민중종교의 평화통일사상, 한맘, 2012, 350쪽.
(4) 김용옥, 독기학설(讀氣學說), 통나무, 2004(초판은 1990).
(6) 류병덕, 「소태산의 실천철학 – 조선후기 실학과 대비하여」, (석산 한종만박사 화갑기념) 한국사상사, 원광대학교출판국, 1991, 1216쪽. 이하에서 인용할 때는 쪽수만 밝힘. 참고로 이 논문은 이후에 류병덕, 소태산과 원불교사상, 원광대학교출판국, 1995에 다시 수록되었다.
(7) 송규, 「일원상에 대하여」, 박정훈 편저, 한울안 한 이치에, 원불교출판사, 1987(증보판), 218쪽. 원문은 회보 38호(1937년)에 수록되어 있다. 인용문의 강조는 인용자의 것이다(이하도 마찬가지).
(8) 정산종사법어 제2부 법어(法語), 제2 예도편(禮道編), 2장.
(9) 한예원, 「조선후기의 실심실학에 관하여」, 한자한문교육 21, 2008, 544쪽 참고.
(10) 하곡집 권11, 疏, 「請設書院儒疏」(再疏). 원문은 한예원의 위의 논문에서 재인용.
(11) 조성환, 「‘실천학’으로서의 ‘실학’ 개념 – 율곡 개혁론의 철학적 기초」, 철학논집 33, 2013.
(12) 홍재전서 129권, 故寔1, 대학. 한예원의 앞의 논문에서 재인용.
(13) 조성환, 「‘실천학’으로서의 ‘실학’ 개념 – 율곡 개혁론의 철학적 기초」.
(14) 중용강의보「鬼神之爲德」.
(15) 조성환, 「영성과 근대 - 일본화된 한국사상사를 넘어서」, 문학・사학・철학 52집, 2008년 봄여름호 참조.
(16) 이런 점에 주목하여 오가와 하루히사와 정인재는 홍대용이나 정제두의 실학을 ‘실심실학’이라고 규정하였다. 정인재, 「실심실학연구서설I」, 신학과 철학14, 2009.
(17) 송천은, 종교와 원불교, 배문사, 2011(초판은 1979), 457쪽.
(18) 사사키 슌스케(佐々木集相)‧카타오카 류(片岡龍), 「일본과 한국에서의 ‘실학’의 근대화」, 한국종교 43, 2018.03.
(19) 山本義隆, 近代日本一五○年 - 科学技術総力戦体制の破錠, 岩波書店, 2018, 34쪽에서 재인용(번역과 강조는 인용자의 것). 위의 논문 참조.
(20) 山本義隆, 위의 책 제1장 제7의 “실학의 권장”, 32-5쪽. 위의 논문 참조.
(21) 조성환, 「영성과 근대 - 일본화된 한국사상사를 넘어서」 참조.
(23) 유명종, 「덕촌 양득중의 실학사상: 양명학과 실사구시의 정출」, 한국학보 3-1, 1977; 조운찬, ‘실사구시’,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산문》, 2016.05.23.
(24) 류병덕, 원불교와 한국사회, 시인사, 1986, 490쪽.
(25) 류병덕, 위의 책, 330쪽.
[참고문헌]
<단행본>
김용옥, 《독기학설(讀氣學說)》, 통나무, 2004(초판은 1990).
류병덕, 《원불교와 한국사회》, 시인사, 1986(초판은 1977).
송천은, 《종교와 원불교》, 배문사, 2011(초판은 1979).
<논문>
류병덕, 「소태산의 실천철학 – 조선후기 실학과 대비하여」,《(석산 한종만박사 화갑기념) 한국사상사》, 원광대학교출판국,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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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슌스케(佐々木集相)‧카타오카 류(片岡龍), 「일본과 한국에서의 ‘실학’의 근대화」,《한국종교》 43, 20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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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환, 「영성과 근대 – 일본화된 한국사상사를 넘어서」,《문학・사학・철학》 52집, 2008년 봄여름호.
한예원, 「조선후기의 실심실학에 관하여」,《한자한문교육》 21, 2008.
* 출전 : 《한국종교》44집. 2018.08.
여산 류병덕의 ‘원불교 실학론’(조성환)_한국종교44(2018.08).pdf
여산 류병덕의 ‘원불교실학론’
조성환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목차]
I. 들어가며
II. 본론
1. 정산 송규의 ‘실학’ 개념
2. 조선후기의 ‘실학’ 개념
3. 후쿠자와 유키치의 ‘실학’ 개념
4. 여산 류병덕의 ‘실학’ 개념
5. 원불교에 대한 실학적 해석
III. 맺으며 - ‘원불교실학론’의 함축
[한글요약]
지금까지 ‘실학’ 개념은 주로 서구 근대적인 실용성이나 실증성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되어 왔고, 실학자의 범위도 조선후기 유학자들로 한정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근대적인 의미의 ‘실학’ 개념은 조선후기 사상가들의 것이라기보다는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의 ‘과학으로서의 실학’ 개념을 암암리에 차용하여 조선후기사상사 서술에 적용한 것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류병덕은 1930년대의 정산 송규의 ‘실천 실학’ 개념을 단서로, 조선후기의 실학을 ‘이론실학’으로 규정하고, 구한말의 안창호나 백용성 그리고 원불교를 이론실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 ‘실천실학’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의 실학, 즉 실천학으로서의 실학 개념이야말로 사실은 조선후기 사상가들이 말하는 ‘실학’ 개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류병덕의 실학 개념은 원래의 실학 개념으로 되돌아가도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조선후기사상가들은 어디까지나 도덕실천이라는 유학의 본질을 유지하면서 제도개혁을 주장하였는데, 그런 점에서는 원불교에서 말하는 “도학과 과학의 병진”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류병덕의 ‘원불교실학론’은 기존의 ‘실학자=유학자’라는 편협한 도식에서 벗어나서 ‘실학’의 층위와 범위를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분화하고 다양화해야 할 필요성을 촉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I. 들어가며
여산 류병덕은 한기두, 송천은 등과 더불어 원불교학을 정립한 제1세대 학자로, 특히 원불교를 철학적 관점에서 해석하는데 기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종교와 철학에 관한 관심도 컸는데, 이러한 그의 관심이 집대성된 역작이 1977년에 나온《원불교와 한국사회》(원광대학교출판부)이다. 또한 원광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68년에는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를 설립하여, 근대한국 민중종교 연구를 선구적으로 이끌어 갔다.
류병덕의 학문 세계는 크게 세 분야로 나뉘어지는데, 첫째는 한국사상사이고, 둘째는 근대 한국의 개벽종교이며[주2], 마지막은 원불교사상이다[주3].
[주2] 여기서 ‘개벽종교’란 19세기말~20세기 초에 탄생한 동학·천도교, 대종교, 증산교, 원불교를 말한다. 흔히 ‘민중종교’나 ‘민족종교’ 또는 ‘신종교’라고 불리는데, 이들의 대부분이 ‘개벽(開闢)’이라는 개념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대종교는 ‘開天’) 여기에서는 ‘개벽종교’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데, 가령 원불교를 한편으로는 ‘개벽’의 이념을 표방한 개벽종교들과의 관련 속에서 연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불교사의 맥락에서도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 그러한 예이다. 즉 원불교나 개벽종교를 종교학이나 불교학의 틀에서만 보지 않고, 한국사상사라고 하는 보다 거시적인 사상사적 지평에서 해석하는, 다시 말하면 한국학의 일부로서 연구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원불교실학론’이다. 왜냐하면 “원불교가 실학이다”는 주장은 “개벽종교의 하나로서의 원불교를 한국사상사의 맥락에서 자리매김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실학’ 개념은 항상 ‘근대’와의 관련 속에서 논의되어 왔기 때문에, “원불교가 실학이다”는 주장은 “원불교가 근대적이다”는 주장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종래의 실학 담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관점으로, 1990년에 김용옥이 “실학허구론”을 주장한 이래로[주4] 이렇다 할 대안이 없는 ‘실학론’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주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본문에서는 류병덕이 주장하는 원불교실학론의 내용과 그것의 연원, 그리고 그의 논의가 지니는 사상사적 의의를, 그가 1991년에 발표한 선구적인 논문 「소태산의 실천실학 - 조선후기실학과 대비하여」를 중심으로 고찰해보고자 한다.
II. 본 론
1. 정산 송규의 ‘실학’ 개념
류병덕의 ‘원불교실학론’은 그 연원을 추적해보면 원불교의 제2대 리더인 정산 송규(1900~1962)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류병덕은 정산이 1937년에 쓴 「일원상에 대하여」라는 글에서[주5] ‘실천실학’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점에 대해서 “소태산의 ‘실천의지’를 나타낸 대목”이라고 해석하고 있다.[주6]
(주5) ‘일원상’은 원불교에서 생각하는 궁극적 진리를 ‘하나의 원’[一圓]으로 형상화[相]한 것을 말한다.
정산이 ‘실천실학’이라는 표현을 쓴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먼저 「일원상에 대하여」에 나오는 해당 부분을 살펴보기로 하자.
7.통론
이상 각 절의 대지를 총괄적으로 말한다면 또한 타력과 자력 두 가지로 나누어지나니 신앙과 숭배는 일원상을 상대로 한 타력이요, 체득과 이용은 일원상을 상대로 한 자력이니 일원의 공부가 자력인 중에도 타력이 포함되고 타력인 중에도 자력이 포함되어 자타력 병진법으로 이 무궁한 사리를 원만히 이행하는 바 신앙을 하면 신앙에 대한 실효가 나타나고 숭배를 하면 숭배에 대한 실효가 나타나고 체득을 하면 체득에 대한 실효가 나타나고 이용을 하면 이용에 대한 실효가 나타나서 능히 복리를 수용하고 불과를 증득하나니 이것이 곧 무상대도이며 실천 실학이 되는 것입니다.[주7]
여기에서 정산은 “일원상에 대한 신앙 및 숭배와 체득과 이용은 실제 ‘효과’가 나타난다는 의미에서 ‘실효’가 있다”고 하면서, 일원상을 최고의 진리로 삼는 원불교를 ‘실천 실학’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정산이 말하는 ‘실학’의 의미는, 우리가 역사교과서에서 배운 조선후기의 실용적이고 과학적인 학문을 의미하는 ‘실학’이 아니라, 신앙이나 체득을 ‘실천’하면 그것의 ‘실제’ 효과가 나타난다는 의미에서의 일종의 ‘실천학’을 말한다.
정산은 다른 곳에서도 ‘실학’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거기에서도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
시자 묻기를 “조신(操身)의 예를 밝히신 첫 편의 모든 조항은 그 설명이 너무 자상하고 비근하여 경전의 품위에 혹 손색이 없지 않을까 하나이다.” 말씀하시기를 “무슨 법이나 고원하고 심오한 이론은 기특하게 생각하나 평범하고 비근한 실학은 등한히 아는 것이 지금 사람들의 공통된 병이니, 마땅히 이에 깊이 각성하여 평상시에 평범한 예절을 잘 지키는 것으로 예전 실행의 기본을 삼을 것이며, 너무 자상한 주해 설명은 앞으로 예전을 완정할 때에 줄일 수 있는 데까지 줄이자.”[주8]
여기에서 말하는 ‘실학’도 추상적 이론에 머물지 않고 일상의 도덕적 실천을 추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그런데 주목할만한 점은 조선후기의 이른바 실학자들이 사용했던 ‘실학’ 개념도 실은 정산이 사용하는 ‘실학’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2. 조선후기의 ‘실학’ 개념
조선후기의 양명학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는 하곡 정제두(1649∼1736)가 죽자, 그의 문인들이 스승의 서원과 사당을 설치해 줄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는데[주9], 이 상소문에서 정제두의 학문을 참된 앎을 실천하는 ‘실학’이라고 말하고 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지극한 본성을 궁구하고 순수한 실천을 돈독히 하는 것은 실학(實學)이요, 순박한 덕을 드러내고 교화의 명성을 세우는 것은 실정(實政)입니다. 이에 신들은 감히 선정(先正=정제두)의 실학(實學)을 들어서 성조(聖朝)의 실정(實政)을 우러러 찬양하였습니다. (중략)
대저 대개 성(誠)이란 마음속의 실리(實理)를 말합니다. 하늘이 이 실리를 사람에게 부여하고, 사람은 이를 얻어서 마음으로 삼아서, 이것으로 앎(知)을 지극히 하면 진지(眞知)가 되고, 이것으로 힘써 행하면 실행(實行)이 되며, 진지를 실행으로 삼으면 이것이 실학(實學)입니다. 다만 이 실학은 얻은 자가 대개 적은데 오직 우리 선정신(先正臣) 정제두는 금같이 정미하고 옥같이 윤택한 자질을 가지고서도 연못에 임하여 얼음을 밟는 듯한 공부를 쌓았으며, 일찍이 과거업(科擧業)을 버리고 침잠하고 정진하였으니 탁연(卓然)히 “먼저 그 큰 것을 세운다”는 뜻에 부합되는 바가 있습니다. [주10]
(伏以窮至性篤純行, 實學也; 表淳德樹風聲, 實政也. 迺者臣等敢擧先正之實學, 仰贊聖朝之實政. … 蓋誠之爲言, 卽心中實理之名也. 天以此實理賦於人, 人得之以爲心. 以此致知則爲眞知, 以此力行則爲實行, 以眞知爲實行, 則斯爲實學. 惟此實學, 得之者蓋寡, 惟我先正臣鄭齊斗, 以金精玉潤之質, 積臨淵履氷之工, 蚤捨公車, 潛心精進, 卓然有契於先立乎其大者之旨.)
여기에서 정제두의 문인들은 마음속에 부여된 실리(實理)로 참된 앎을 알아서 실제로 행하는 것(實行)을 ‘실학’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때의 ‘실학’이란 일종의 ‘도덕실천학’에 해당한다. 그래서 이글에서는 이러한 의미의 실학을 ‘실천학’으로서의 실학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러한 실천학으로서의 ‘실학’ 개념은 조선전기에 율곡에게서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여,[주11] 조선후기에는 학파를 불문하고 널리 사용되었다. 가령 실학의 황금기로 알려져 있는 시대의 정조(1752~1800)도 정제두의 문인들과 비슷한 의미의 실학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나의 마음이 곧 너희들의 마음이고, 너희들의 마음이 곧 일국(一國)의 마음이고, 일국의 마음이 곧 만고(萬古)의 마음이다. 실심으로 실학을 강론하고, 실학으로 실사를 실천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이니, (이것이) 내가 너희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주12]
(予之心卽爾等之心, 爾等之心卽一國之心, 一國之心卽萬古之心. 以實心講實學, 以實學行實事, 卽今日之急先務, 卽予求助於爾等者也.)
여기에서도 앞의 정제두의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일을 하는 ‘행실사(行實事)’를 실학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행실사(行實事)’를 다산 정약용은 줄여서 ‘행사(行事)’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실학’과 함께 ‘실심’이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심’은 율곡에서 이미 나오는 개념으로 일종의 ‘실천의지’나 ‘개혁의지’를 말한다[주13]. 또한 다산 정약용의 경우에는 “실심사천(實心事天)”, 즉 “하늘을 섬기는 참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주14]. 정조의 경우에도 이와 유사하게 실학을 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 또는 ‘참마음’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참고로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보면, ‘실학’이라는 말은 총 85차례 나오는데 반해 ‘실심’은 294번이나 나오고 있고, 그 중에서도 영정조 시대에 전체 용례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99차례가 나온다[주15]. 이것은 적어도 개념상으로는 이른바 실학시대에 ‘실학’보다는 ‘실심’이 더 강조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조선후기 유학자들이 실심을 도외시한 실학을 추구하지 않았음을 함축한다[주16]. 그런 의미에서 조선후기 유학자들은 탈성리학자가 아니라 ‘성리학자’였고, 원불교식으로 말하면 ‘도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원불교학자 송천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조선후기 실학자들은) 인민의 경제생활을 등한시하는 도학 일변도의 사고에 반대하고, 생활 속의 건전한 도학이 되도록 했다는 점에서 영육쌍전적 경향을 띄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상 실학자들은 단순한 정치가나 경제학자가 아니라 모두 도학자들이었다. 그러나 조선조의 실학은 이론상으로만 풍미했을 뿐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없었던 것은 유감된 일이다.[주17]
이 글은 실학의 정설이 확립되어 가던 1970년대에 나온 것인데, 여기에서 송천은은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실학의 이미지와는 약간 다른 실학론을 제시하고 있다. 즉 조선후기 실학자들은 단지 물질적인 것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 수양의 중요성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불교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영육쌍전(靈肉雙全)’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가 실학자들을 단순한 경세사상가나 부국강병론자로만 보지 않고 도학자로서의 성격도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원불교의 ‘영육쌍전’이라는 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선후기의 실학은 ‘이론’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도 덧붙이고 있는데, 이러한 비판은 류병덕에서도 보이고 있다(후술).
3. 근대 일본의 ‘실학’ 개념
지금까지 살펴본 정산 송규나 조선후기 유학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실학’ 개념은 우리가 그동안 교과서에서 배운 ‘실학’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실학’은 실용적이고 실증적이며 과학적인, 그래서 다분히 서구 근대적인 성격을 띠는 학문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생소한 ‘실학’ 개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한국사상사 서술에서 ‘실학’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것은 1930년대에 조선학운동으로 알려져 있다. 최남선, 정인보, 안재홍, 문일평 등이 중심이 된 조선학운동에서는 정약용을 비롯한 조선후기의 일련의 사상가들을 근대지향적인 실학자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1950년대의 천관우를 거쳐 실학의 외연이 확대되고, 1970년대의 이우성에 이르면 이른바 ‘삼대실학파’(경세치용・이용후생・실사구시)가 교과서설로 정착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의미의 ‘실학’ 개념은 사실 조선후기의 사상가들에게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해서 새로운 의미의 ‘실학’ 개념, 즉 서구적인 의미의 ‘실학’ 개념을 착안하게 되었을까? 그 실마리는 아마도 당시가 일제강점기였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카타오카 류 등의 연구에 의하면, 19세기말에 일본의 근대화를 주도했던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는 ‘과학’(science)으로서의 ‘실학’ 개념을 사용하고 있고, 이러한 용례는 후쿠자와 유키치 이전의 일본사상가들에게서 이미 나오고 있다고 한다[주18]. 실제로 후쿠자와 유키치가 사용한 ‘실학’ 개념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자연과학에서는) 1400년대에 이르기까지는 … 세상 사람들은 모두 고대의 성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학풍에 심취하여 부회기이(附會奇異)한 신설(神說)을 주창하고, 유용한 실학에 뜻을 두는 자는 없었다. 1600년 무렵까지도 이러한 추세는 여전했는데, 이 때 프란시스 베이컨, 데카르트 등의 현명한 철인이 나와서 전적으로 시험(試驗=실험)의 물리학을 주창하여 고래(古來)의 공담(空談)을 배척하고, 1606년에는 이태리 학자 갈릴레오가 처음으로 지동설을 세우고, 1616년에는 영국의 의사 하비가 인체혈액운행의 이치를 발명하는 등, 세상의 학풍이 점점 실제로 향한다. (후쿠자와 유키치,《서양사정》)[주19]
여기에서 후쿠자와는 “기이한 신설(神說)”이나 “고래(古來)의 공담(空談)”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시험의 물리학”과 “유용한 실학”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로부터 후쿠자와의 ‘실학’ 개념이 서양의 물리학에 바탕으로 둔 자연과학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주20].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가설을 세워볼 수 있을 것이다. 1930년대 조선학운동가들이 조선후기의 사상사를 실증적이고 유용성을 추구하는 ‘실학’으로 해석한 것은 후쿠자와 유키치로 대변되는 일본 근대의 ‘실학’ 개념의 영향을 암암리에 받은 것이 아닐까라고 -. [주21]
이에 반해 정산은 조선학운동이 일어난 동시대에, 후쿠자와 유키치적인 서구화된 ‘실학’ 개념이 아니라, 조선사상사의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실학’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아마도 여기에는, 송천은에게서 볼 수 있었듯이, 원불교라는 특성이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즉 도덕적 실천을 강조하는 원불교이기 때문에 서구화된 ‘실학’ 개념에 쉽게 경도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류병덕의 ‘실학’ 개념은 어떠할까?
4. 류병덕의 ‘실학’ 개념
류병덕은 정산이 1930년대에 일원상을 ‘실천실학’으로 규정한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1920년대 1930년대에 한국은 혹심해진 일제의 간섭과 문화말살정책으로 그 당시 뜻있는 국학자들은 조선후기의 ‘이론실학’을 더듬고 이에 대응하려는 풍조가 일고 있었다. 정산은 이러한 학계의 숨은 움직임에도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지성을 가진 분이다.(1226쪽 각주3)
여기에서 류병덕은 한편으로는 1930년대에 일어난 조선학운동을 높게 평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후기 실학을 보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론실학’이라는 개념이다. 이 ‘이론실학’이라는 개념은 뒤집어 말하면 “실천성이 결여된 실학”이라는 비판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조선학운동가들의 ‘실학’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실제로 그는 조선후기의 실학이 이론실학에만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근대화에 기여하지 못했다고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조선조 실학이 왜 한국근대화의 효시나 역할이 되지 못하고 다만 학자들의 문헌 분석에 의한 이론실학으로만 머무르고 있는가?”(1226쪽)
이와는 대조적으로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 박중빈의 행적은 ‘실천실학’이라고 평가하면서, 이 점을 일찍이 지적한 이가 정산 송규라고 말하고 있다.
“소태산의 일생동안 행적은 왜 실천실학인가? 소태산은 … 구도과정에서나 … 교단의 형성과정에서나 … 제자들의 식견속에서도 실학에 대해서는 한말도 거론되지 않았던 일생이었는데 뜻밖에도 1937년에 정산에 의해 표현된 ‘실천실학’ 한마디는 결정적으로 소태산의 실천의지를 나타낸 대목임을 천명하는 바다.”(1226쪽)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류병덕이 ‘이론실학’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조선후기의 ‘실학’ 개념은, 조선후기 당사자들이 사용한 ‘실천학’으로서의 ‘실학’ 개념보다는, 후쿠자와 유키치적인 ‘실학’ 개념의 영향을 받아서 1930년대에 조선학운동가들에 의해 성립된 ‘실학’ 개념에 더 가깝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류병덕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소태산의 ‘실천실학’ 개념이야말로 사실 조선후기의 실학자들이 사용한 실학 개념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류병덕이 말하는 소태산의 ‘실천실학’과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실천학으로서의 ‘실학’과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걸까? 이에 대해서는 그의 다음과 같은 말이 참고할만하다.
당시의 시대적 왜곡 현상들을 광정(匡正)하고자 했던 사회제도개혁의 노력도 그것이 실지 기층민들에 바탕한 실천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라기보다는 피치자(被治者)의 편에선 지식인의 논리로서 집권층에 대한 주장에 치중했지만, 이 또한 시대적 주류를 형성하지 못했었다는 제약적 상황에 의해 당시의 정책에 제한적으로밖에는 반영되지 못한 채, 그 최종단계를 1870년대로 하여 마무리 지음으로써 후대에 망국의 비운을 맞게 되고 ….(1225쪽)
여기에서 류병덕은 조선후기 실학의 한계를 두 가지 측면에서 지적하고 있다. 하나는 민중들이 주체가 된 실천운동이 아니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실학자들의 개혁론이 정책에 반영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즉 설령 조선후기의 유학자들이 도덕적 실천학으로서의 ‘실학’을 주창했다고 해도, 류병덕이나 송천은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개인적 차원의 도덕수양에 머무를 뿐 민중들과 함께 사회를 변혁시키는 사회적 차원의 실천으로는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아울러 만약에 그들의 이론적 개혁론이 정책에라도 반영되었더라면 현실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그런 점에서 실천실학이라고 평가할 수 있었을텐데 아쉽게도 그러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류병덕이 조선후기의 실학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구한말의 ‘실학운동’을 따로 설정하는 이유가 있다.
물론 실학적 전통이 근대로 이어지는 개화사상에 내면적으로 계승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지만 … 개화사상도 지배적인 조류가 되지 못한 채 정치적 사상적 혼란 속에서 결실을 보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 마침내 한말(韓末)이라는 종언을 고하고 일제의 지배하로 곤두박질한다. … 그러나 이 시기에 실학적 사고와 민족의식은 도리어 민중 속으로 맥맥히 흘러들게 되고, 이 시대 경향을 바로잡으려고 종교운동 사회사상 운동들이 끊이지 않고 산발적으로 일어나 확산되었던 것이다. 이들 운동단체들은 전기실학·후기실학에[주22] 대하여 그를 연구했다거나 학통을 따져 본 일도 없이 필연발생적으로 일어났던 운동이었기에 일명 ‘준실학운동’이라고 불러 본다. 이들은 후기실학적 성격의 변용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다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1225쪽)
(주22) 여기에서 ‘전기실학’은 조선전기에 도교와 불교를 배척하면서 윤리적 실천을 강조한 주자학적 ‘실학’을 말하고, ‘후기실학’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조선후기의 실학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류병덕은 구한말의 사회운동의 전개나 민중종교의 탄생은 조선후기의 실학 정신이 민중 속에서 부활된 것이고, 그런 점에서 ‘준실학운동’으로 재평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조선후기 실학의 연속선상에서 구한말의 사회운동과 종교운동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실례로 안창호나 김성수 또는 백용성이나 소태산(원불교 창시자)을 들고 있고, 특히 소태산이 이끈 ‘불법연구회’(원불교의 전신)는 해방 이후에 실학정신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실천실학운동’으로 부르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한말 이후에 새롭게 전개되는 실학적 경향의 흐름은 문자로써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써의 실천성이 절실히 요망되었던 것이며, 따라서 안창호의 무실역행에 의한 민족활로 개척이라는 지도이념은 허위와 가식에 반하는 것으로써 이것이 국가의 내실을 기약하는 적절한 처방이었다는 점에서 실학적 운동의 한 양태로 볼 수 있을 것이며, 김성수의 물산장려운동・인재양성・언론확보운동 등도 실학적 평가를 받을만한 운동이라고 본다. 그리고 백용성의 대각교 제창이나 한용운의 불교유신운동도…자체 내의 실학적 실천성을 지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집단들 중에서도 특히 소태산이 이끌어온 일제시의 ‘불법연구회’는 해방을 맞이하면서 종교입장에서 실학적 견해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오늘에 이른다. 해방후 소태산의 실학적 움직임은 그 어느 집단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리만치 실학정신을 실천한 단체로 보여진다. 특히 소태산은 이론실학을 한번도 접해본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실천하려고 했던 분야가 모두 실학적이었다는 점에서 논자는 이를 ‘실천실학운동’이라고 명명해 본 것이다.(1226쪽)
그동안 한국의 선각자들이 실학을 추구하였으나 경세를 담당했던 왕조 집권층에서는 이념과 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며, 따라서 그 당시의 실학도 완전히 이론 실학에 머물렀고 마침내 국혼마저 상실되고 말았는데, 민중의 저층에서 26세의 청년 소태산은 스스로 일어나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표어를 내걸고 그당시 실의에 찬 민중들을 규합해서 실천적으로 이끌었던 것이니, 그는 아직까지 실현할 수 없었던 실학의 의지를 펴려고 나타난 모습이었다.
이 개교표어는 … 새로운 역사인식 그리고 과학정신을 이 땅에 수용하여 조화로운 현실낙토를 건설하려고 부르짖은 것이었으며, 이는 실천실학의 종합적인 실현이기도 하였다.(1228쪽)
이상의 서술에 의하면, 유병덕이 보기에 안창호, 김성구, 백용성, 소태산 등은 모두 실학자이고, 그 중에서도 특히 실천을 강조한 실천실학자이며, 그런 점에서 이들의 운동을 ‘실천실학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으로부터 유병덕이 말하는 ‘실천실학’이란 딘지 ‘개혁 이론으로서의 실학’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 운동으로서의 실학’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 원불교에 대한 실학적 해석
류병덕은 이상의 관점을 바탕으로 원불교의 실천실학적 측면을 표어와 교리 그리고 교단창립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원불교를 실학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류병덕의 ‘원불교해석학’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데, 구체적인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표어
①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 : 일상생활(개체) 속에서 부처(전체)를 발견하는 실천실학
② 무시선(無時禪) 무처선(無處禪) : 삶의 현장에서 선(禪) 수련을 하여 올바름을 판단하도록 하는 활선(活禪)
③ 동정일여(動靜一如) : 우주의 본래적인 동화력에 입각한 현실적 인생관과 우주관
④ 영육쌍전(靈肉雙全) : 물질(사실)을 정신적(수행) 차원에서 재조정하고자 한 실사구시
⑤ 불법시생활(佛法是生活) 생활시불법(生活是佛法) : 생활 속에서 불법을 찾고자 한 실학정신
⑥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 실의에 빠진 민중들을 규합해서 실천적으로 이끌고, 과학정신을 수용하여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한 실천실학
(2) 교리
① 일원상(一圓相) 진리 : 사실(實事)에 입각하여 ‘일원’의 진리를 깨닫는(求是) ‘진리적 종교’와, 일상생활에서(實事) ‘일원’의 진리를 구하는(求是) ‘사실적 도덕’을 제시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
② 사은(四恩) : 삶의 현장에서(實事) 천지와 부모, 동포와 법률의 은혜(四恩)를 자각하고, 이것을 현실생활 속에서 실천하는(求是) 실사구시의 실천원리이자 실학적 신앙.
③ 사요(四要) : 자력양성과 지자본위(知者本位) 등의 네 가지 실천덕목은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이론을 실천하고자 한 명제.
(3) 교단창립
① 저축조합 : 현실을 토대로 한 자주적 정신과 경제적 토대 확립 추구
② 숯장사 :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갈망했던 “이용후생” 이념 실천
③ 간척사업 : 실사구시의 역행이자 실천실학의 본보기
④ 총부건설 : 새시대의 실천실학의 종교관
⑤ 조합운영 : 실리실용성을 기본정신으로 경제적 자력 실현
⑥ 인재양성소 : 실천실학의 개척정신에 바탕을 둔 종교(靈)와 생활(肉)의 병진
이상의 해석에서 주목할만한 점을 들면 다음과 같다. 먼저 「(2) 교리」에서 ‘실사구시’를 실천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대목이다. 보통 실학 담론에서 ‘실사구시’는 김정희로 대변되는 실증적이고 고증학적인 학풍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고 있는데, 류병덕은 “일상생활”이나 “삶의 현장”(實事)에서 진리를 찾고, 그것을 “현실생활” 속에서 실천한다고 하는 실천실학적 맥락에서 재해석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김정희 이전에 양득중(1665~1742)이 사용하고 있는 ‘실사구시’의 의미에 가깝다.[주23] 이렇게 보면 류병덕의 ‘실사구시’ 해석도 실천학으로서의 실학의 의미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해할 수 있다.
한편 ‘사요’에 대해서는 실증실학과 실천실학의 병진을 추구한 사례로 해석하고 있는 점이 독특한데, 여기에서 실증실학과 실천실학 개념은 미나모토 료엔의 ‘실증적 실학’과 ‘실천적 실학’의 구분에서 차용해 온 것으로, 실증실학은 과학화・합리화・근대화의 기능화 운동을 말하고 실천실학은 종교화・철학화・도덕화의 사회화운동을 가리킨다(1231-2쪽). 류병덕은 사요를 실천실학적으로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다,
소태산은 실증실학적 측면으로는 물질문명이라고 하여, 즉 과학적 합리적 근대화의 수용이라는 입장에서 선용 활용을 강조했고, 실천실학의 측면에서는 도덕적 인간의 훈련과 사요의 사회적 실천이라는 종교를 내놓았다.(1232쪽)
여기에서 류병덕은 미나모토 료엔의 실증실학과 실천실학의 틀을 가지고 원불교가 지향하는 “도학과 과학의 병진”의 추구를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사요’는 실천실학). 여기에서 실증실학은 과학의 영역에 해당하고 실천실학은 도학의 영역을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류병덕이 사용하고 있는 실학 개념은 서구적인 과학적 실학과 한국적(또는 동아시아적)인 실천적 실학을 아우르는 통합적 혹은 회통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원불교적 회통 사유의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즉 조선학운동의 실학 개념이 다분히 서구적인 실학 개념이었고(류병덕의 ‘이론실학’, 미나모토 료엔의 ‘실증실학’),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실학 개념이 유교적인 실학 개념이었다고 한다면(정산의 ‘실천실학’ ) 류병덕은 원불교에서 양자의 “겸전(兼全)”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류병덕은 ‘신실학’ 개념을 제창하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신실학 개념으로 원불교를 해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III. 맺으며 - 원불교실학론의 함축
이상의 논의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학운동의 실학 개념은, 류병덕의 용어로 말하면 ‘이론’ 중심의 ‘실학’이다. 그런데 실학연구사의 관점에서 보면, 이론 중심의 실학 개념은 본래 실천을 강조했던 조선후기의 ‘실학’ 개념이 19세기말~20세기 초에 서구 학문관의 영향을 받아서 변질된 것이다. 류병덕이 조선후기의 실학을 ‘이론실학’으로 규정한 데에는 본래 실학이란 실천성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음을 시사한다.
류병덕이 보기에, 조선후기 실학이 이론실학으로 머무른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실학자들의 개혁론이 실제 정책으로 구현되지 못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실학자들이 민중과 함께 사회운동을 전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류병덕은 바로 여기에 원불교가 지니는 실학적 의의가 있다. 원불교는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구현하고자 했던 경제적 개혁을 민중과 함께 실천했다는 점에서 실천실학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원불교는 서양의 과학까지도 수용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실증실학 또는 이론실학 - 이것을 ‘과학실학’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이상의 원불교실학론은 도학과 과학의 병진이라는 원불교의 이상을 실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것으로, 그 자체로 원불교의 회통적 사유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여러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먼저 그동안 유학이 독점해 왔던 ‘실학’ 담론을 원불교나 불교와 같은 유학 이외의 사조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관점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류병덕은 원불교가 “실학이라는 한국학의 한 장으로 다시 가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주24]
뿐만 아니라 그동안 ‘실학파-개화파’가 독점해 왔던 근대화 담론을 원불교와 같은 개벽종교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관점도 제시하고 있다(“소태산이 이 회상 창립에서 사명감에 불타는 인재들을 배출시키려 의도한 것은 한국 근대화운동의 선구였다고 평가할 것이다.”)[주25].
이러한 견해는 그동안 서구적 이성 중심으로만 생각해 왔던 ‘실학’과 ‘근대화’를 종교적 영성의 관점에서도 생각할 수 있다는 시사를 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실제로 류병덕은 “실학적 종교(1231쪽)”나 “실학적 신앙”(1231쪽)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실학과 종교가 결코 배치되지 않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류병덕의 원불교실학론은 그동안 실학과 개화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왔던 한국근대사상사의 기본 틀이 근본적으로 재고되어야 함을 촉구하고 있다.
[각주]
(1) 이 글은 2018년 4월 18일에 원광대학교에서 열린 “여산 류병덕 박사 10주기 기념 학술대회”(주최: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발표한 「여산 류병덕 박사의 한국학 - ‘원불교실학론’을 중심으로」를 수정한 것이다.
(3) “물론 내 활동의 가장 밑바탕에는 원불교사상이 전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연구활동은 세 가지 관점에서 진행되어 왔다고 할 수 있어요. 하나는 우리나라의 사상사를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고, 또 하나는 한국의 신종교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며, 또 다른 하나는 원불교사상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류병덕・양은용 대담 「원불교사상과 한민족의 진로」, 류병덕, 한국 민중종교의 평화통일사상, 한맘, 2012, 350쪽.
(4) 김용옥, 독기학설(讀氣學說), 통나무, 2004(초판은 1990).
(6) 류병덕, 「소태산의 실천철학 – 조선후기 실학과 대비하여」, (석산 한종만박사 화갑기념) 한국사상사, 원광대학교출판국, 1991, 1216쪽. 이하에서 인용할 때는 쪽수만 밝힘. 참고로 이 논문은 이후에 류병덕, 소태산과 원불교사상, 원광대학교출판국, 1995에 다시 수록되었다.
(7) 송규, 「일원상에 대하여」, 박정훈 편저, 한울안 한 이치에, 원불교출판사, 1987(증보판), 218쪽. 원문은 회보 38호(1937년)에 수록되어 있다. 인용문의 강조는 인용자의 것이다(이하도 마찬가지).
(8) 정산종사법어 제2부 법어(法語), 제2 예도편(禮道編), 2장.
(9) 한예원, 「조선후기의 실심실학에 관하여」, 한자한문교육 21, 2008, 544쪽 참고.
(10) 하곡집 권11, 疏, 「請設書院儒疏」(再疏). 원문은 한예원의 위의 논문에서 재인용.
(11) 조성환, 「‘실천학’으로서의 ‘실학’ 개념 – 율곡 개혁론의 철학적 기초」, 철학논집 33, 2013.
(12) 홍재전서 129권, 故寔1, 대학. 한예원의 앞의 논문에서 재인용.
(13) 조성환, 「‘실천학’으로서의 ‘실학’ 개념 – 율곡 개혁론의 철학적 기초」.
(14) 중용강의보「鬼神之爲德」.
(15) 조성환, 「영성과 근대 - 일본화된 한국사상사를 넘어서」, 문학・사학・철학 52집, 2008년 봄여름호 참조.
(16) 이런 점에 주목하여 오가와 하루히사와 정인재는 홍대용이나 정제두의 실학을 ‘실심실학’이라고 규정하였다. 정인재, 「실심실학연구서설I」, 신학과 철학14, 2009.
(17) 송천은, 종교와 원불교, 배문사, 2011(초판은 1979), 457쪽.
(18) 사사키 슌스케(佐々木集相)‧카타오카 류(片岡龍), 「일본과 한국에서의 ‘실학’의 근대화」, 한국종교 43, 2018.03.
(19) 山本義隆, 近代日本一五○年 - 科学技術総力戦体制の破錠, 岩波書店, 2018, 34쪽에서 재인용(번역과 강조는 인용자의 것). 위의 논문 참조.
(20) 山本義隆, 위의 책 제1장 제7의 “실학의 권장”, 32-5쪽. 위의 논문 참조.
(21) 조성환, 「영성과 근대 - 일본화된 한국사상사를 넘어서」 참조.
(23) 유명종, 「덕촌 양득중의 실학사상: 양명학과 실사구시의 정출」, 한국학보 3-1, 1977; 조운찬, ‘실사구시’,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산문》, 2016.05.23.
(24) 류병덕, 원불교와 한국사회, 시인사, 1986, 490쪽.
(25) 류병덕, 위의 책, 330쪽.
[참고문헌]
<단행본>
김용옥, 《독기학설(讀氣學說)》, 통나무, 2004(초판은 1990).
류병덕, 《원불교와 한국사회》, 시인사, 1986(초판은 1977).
송천은, 《종교와 원불교》, 배문사, 2011(초판은 1979).
<논문>
류병덕, 「소태산의 실천철학 – 조선후기 실학과 대비하여」,《(석산 한종만박사 화갑기념) 한국사상사》, 원광대학교출판국, 1991.
류병덕・양은용 대담 「원불교사상과 한민족의 진로」, 류병덕,《한국 민중종교의 평화통일사상》, 한맘,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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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환, 「영성과 근대 – 일본화된 한국사상사를 넘어서」,《문학・사학・철학》 52집, 2008년 봄여름호.
한예원, 「조선후기의 실심실학에 관하여」,《한자한문교육》 21, 2008.
* 출전 : 《한국종교》44집. 2018.08.
여산 류병덕의 ‘원불교 실학론’(조성환)_한국종교44(2018.0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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