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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학보] 개화와 개벽 - '술'의 근대와 '작'의 근대|리더십에세이外
혼돈나라|조회 1652|추천 0|2018.04.22. 04:15http://cafe.daum.net/bookofchange/OR3x/79
개벽파와 토착적 근대
원래 ‘개벽(開闢)’이라는 말은 중국고전에서 유래하는 개념으로, “하늘이 열리고(開) 땅이 열린다(闢)”고 하는 우주탄생의 사건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런데 이 용어가 본격적인 ‘사상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의 한국에서였다.
1860년에 ‘동학’을 창도한 최제우는 “민중의 힘으로 새로운 세상을 연다”고 하는 사회변혁의 의미로 ‘개벽’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였고, 뒤이어 나온 천도교와 증산교 그리고 원불교 역시 동학의 정신을 이어받아 각각 ‘삼대개벽’과 ‘후천개벽’ 그리고 ‘정신개벽’을 자신들의 사상운동의 슬로건으로 삼았다(비슷한 시기에 출현한 대종교는 ‘개벽’ 대신에 ‘개천(開天)’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런 점에서 동학에서 원불교에 이르는 일련의 민중종교들을 ‘개벽파’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개벽파는 지식인이 아닌 민중이 중심이 되어, 중국이나 서양에서 빌려온 외래사상이 아닌 자신들이 직접 만든 자생사상으로 새로운 시대를 준비했다는 점에서 (위정)척사파나 개화파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특히 동학은 전통적으로 한국인의 영성을 대변하는 ‘하늘’ 개념을 ‘우주적 생명력’으로 재해석하여, 생명 앞에서는 모든 존재가 존엄하고 평등하다고 하는 생명・평등・평화 사상을 제창하여 당시 대다수 농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새로운 한국사상은 내적으로는 유교적 신분제와 위정자들의 국정농단에 항거하고, 외적으로는 일본의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다.
이처럼 전통사상을 바탕으로 제국주의에 저항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사상운동은 그 후 아프리카와 인도 등, 비서구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가령 아프리카에서는 넬슨 만델라를 중심으로 ‘우분투’라고 하는 전통사상을 중심으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비폭력저항운동이 일어났고(기타지마 기신 참조), 인도에서도 간디를 중심으로 전통적인 윤리규범인 ‘야마스’ 를 토대로 비폭력저항운동이 전개되었다(이타가키 유조 참조).
일본의 욧카이치대학의 기타지마 기신 명예교수는 비서구지역에서 일어난 이러한 일련의 운동을 ‘서구적 근대화’와 대비시켜 ‘토착적 근대화’라고 명명하였다. 그렇다면 1860년에 시작된 동학운동은 19세기~20세기에 걸쳐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토착적 근대화 운동의 선구가 되는 셈이다.
민본에서 민주로
그렇다면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이른바 “근대를 지향했다”고 하는 ‘실학’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적어도 개벽파와 비교해 보면, 실학파는 ‘개혁’을 지향했지 ‘개벽’을 지향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탈(脫)주자학자’일수는 있어도 ‘탈(脫)유학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령 그들이 ‘근대’를 지향했다 하더라도, 그 근대는 ‘유교적 근대’이지 결코 ‘서구적 근대’는 아니다. 다시 말하면 ‘민본적 근대’이지 ‘민주적 근대’는 아닌 것이다.
반면에 동학은 유교적 신분사회와는 다른 평등사회를 꿈꿨고, 더 나아가서 사대부나 위정자가 아닌 일반 백성도 사회변혁의 주체(民主)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한국적 민주주의’의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농민들의 3분의 1 이상이 참여했다고 하는 동학농민혁명의 슬로건은 “보국안민”(나라를 도와서 인민을 편안케 한다)과 “광제창생”(널리 사람들을 구제한다)이었고, 이들이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해 조직한 동학농민군의 첫 번째 규율은 “살생하지 말라”였다.
유교사회에서 백성은 위정자나 사대부들에 의해서 보호받고 구제되어야 할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동학에서는 오히려 백성들이 위정자의 잘못을 바로잡고 자신들이 직접 사회를 구제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당시의 유학자들이 동학을 탄압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동학이 꿈꿨던 개벽이 유교적 신분사회와 정면으로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학의 탄생은 (유학적) 민본주의에서 (한국적) 민주주의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의 근대를 열었고, 이 정신이 123년 후에 재현된 것이 지난 촛불혁명이었다.
술(述)의 근대와 작(作)의 근대
지난 2천년 동안 동아시아의 사상과 문화의 중심이었던 유학을 창시한 공자(孔子)는 스스로를 “술(述)을 했지 작(作)을 하지는 않았다”(述而不作)고 평가하였다. 여기에서 ‘술(述)’이란 상고시대의 성인들이 만든(作) 사상문화를 나름대로 정리하고 시대에 맞게 해석하여 후대에 전달하는 작업을 말한다.
반면에 ‘작(作)’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사상문화의 틀을 창조하는 작업을 말한다. 공자로 대변되는 동아시아의 유학자들은 이상적인 사상문화와 문물제도는 이미 고대의 성인들에 의해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잘 실현하면 되지 따로 새로운 것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반면에 동학은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우리에 맞는 사상문화를 자기 손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술(述)’이 아닌 ‘작(作)’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동학은 동아시아적 우주론과 윤리관을 계승하고는 있지만, 그 핵심에는 한국적 ‘하늘’ 개념과 그것에 기반한 영성적 인간관이 깔려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를 준비했다는 점에서 ‘술’이 아닌 ‘작’의 근대를 지향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실학파와 개화파가 지향했다고 하는 근대는 청나라와 서양의 문화를 수용하고 학습하는 ‘술’의 근대였고, 그런 점에서 근대 일본이 지향한 탈아입구(脫亞入歐)적 근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성환 (서강대 <철학산책> 강의)
《서강학보》676호 (2018년 4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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