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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철학] 공공하는 장일순의 생명살림_김재익|리더십에세이外
혼돈나라|조회 214|추천 0|2018.09.17. 04:23http://cafe.daum.net/bookofchange/OR3x/87
공공하는 장일순의 생명살림
김재익 (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 연구원)
근래에 어린이집 사건사고가 매일같이 뉴스에 보도되고 있다. 잇따른 통학버스 사고나 아동학대 사고는 결코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해마다 반복되고 있는 이러한 사건·사고 속에 쌓여가는 것은 수많은 예방 대책 그리고 학부모들과 국민들의 불안감이다. 한편 지금 우리 사회는 지구상 유일한 0점대의 출산율이라는 기록을 목전에 두고 있다.[주1]
이와 더불어 13년간 ‘OECD 자살률 1위’라는 타이틀 역시 갖고 있다.[주2] 통탄할 노릇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또다시 제도를 손봐야 하는가? 아니면 이것은 운명인가? 그것도 아니면 우연의 연속인가? 이러한 물음 속에 나는 생명이라는 화두를 새삼스레 꺼내든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강원도 원주(原州)이다. 흔히 ‘근원의 땅’이라 일컫는 이곳은 일찍이 생명의 문제를 논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단연 손꼽히는 사람으로 지학순 다니엘 주교와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다. 이들은 합심하여 70년대 민주화운동을 음으로, 양으로 이끌었던 선각자들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나는 이 중에서도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나의 짧은 생각으로,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생명에 대한 한결같은 관심으로 실천에서 사상으로 발전하여 하나의 일가(一家)를 이루었다고 본다. 그는 정치적 압제로 인해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한 글 한편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연설과 서화들, 그리고 그에 대한 많은 일화들은 충분히 그의 생명사상을 논할만하게 한다.
장일순은 누구?
장일순(張壹淳) 선생은 아버지 장복흥(張福興)과 어머니 김복희(金福姬)사이의 6남매중 차남으로, 1928년 10월 16일 원주 평원동에서 태어났다.[주3] 그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장경호(張慶浩)에게 한학을 익히고, 할아버지와 절친했던 차강(此江) 박기정(朴基正,1874~1949)에게 서화를 사사하였다.[주4] 이 박기정은 묘한 인물이다. 그는 순조에서 철종대까지 영의정을 지낸 이재(彛齋) 권돈인(權敦仁,1783~1859)의 문인으로부터 글씨를 배웠다고 하는데,[주5] 그는 단순히 서예가로서 머물러 있지 않았다.
1895년 한말의병운동이 일어날 무렵, 그는 약관의 나이에 의암 유인석의 의병부대에 투신한다. 사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의병활동은 그의 서궤에 김구, 이승만, 여운형 등에서 온 서찰이 수백통씩 보존되어 있었다고 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활동 궤적을 짐작케 한다.[주6] 이러한 박기정의 활동은 고스란히 장일순에게도 영향을 미쳤던 듯하다. 훗날 이어지는 여운형과 장일순의 관계나 서예가로서의 장일순의 사회활동만 보아도 그러하다.
1940년 그는 원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을 떠난다. 그 무렵 그의 형 철순은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철순의 마지막 유언은 가족들이 천주교로 개종하는 것이었다. 불교신자였던 어머니를 시작으로 조부의 연이은 개종은 온 가족이 모두 성당에 다니게 되었다.
그는 1944년 배재 중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공업전문학교(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신)에 입학한다. 그러나 미군 대위의 총장 취임을 핵심으로 하는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에 반대하여 제적당하지만, 1946년 서울대학교 미학과(1회)에 입학하게 된다. 이후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원주에 돌아오게 된다. 이후 그는 군생활로 보냈던 몇 해만 제외하고는 줄곧 원주에서 생활하게 된다.[주7]
그의 사회적 활동의 시작은 교육가였다. 1954년 대성학원을 설립하여, 대성중고등학교를 만들고 이사장으로 활동한다. 그리고는 1956년 무소속 국회의원에 출마하고, 1960년에는 사회대중당 후보로 국회에 다시 출마한다. 하지만 ‘중립화평화통일’이란 주장이 빌미가 되어 공안사범으로 몰려 옥고를 치르기까지 했다.
70년대에는 민주화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했으며, 80년대 이후로는 생명운동가로 ‘한살림’협동조합 창립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여생을 시민운동가의 업(業)으로 살았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지만, 언제나 낮은 곳을 처하며, 무위당(無爲堂), 일속자(一粟子)를 자신의 이름 앞에 붙였다.
돈벌이를 위한 변변한 직업을 가져보지 못했다고 하는 장일순을 누군가는 살아있는 예수요, 누군가는 걸어다는 동학이라 했고, 누군가는 무위의 삶을 살았다고 평가한다. 장일순은 함석헌과는 다르게 생전에 자신의 사상을 녹여낸 체계적인 글을 남겨두지 않았다.
다만 노자이야기와 같은 대담록이나 좁쌀 한 알과 같은 여러 사람들과의 일화를 찾아내어 엮어낸 글들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의 사상이 늘 생명에 초점 맞춰져 있었다고 말한다. 대표적으로 리영희 선생은 “(그는) 처음부터 생명사상에 근거해 있었으며, 현상적으로 시대적 상황에 맞게 다양한 모습”으로 표출되었다고 말한다.[주8]
1. 공생(共生)을 위하여
장일순에게 있어 “다함께 잘 살자(共生)”는 것은 매우 중요한 가치였다. 한국전쟁 당시 죽을 고비를 두 차례나 넘기면서도 그는 결국 ‘민족의 공생’을 주창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전쟁의 종식을 위해 아인슈타인과 편지를 주고받은 유명한 일화는 그의 지향점을 분명히 말해준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그는 한반도를 중립국으로 하여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일군의 사람들과 함께 이른바 중립화 평화통일론을 주장한다. 결국 정치사회적으로의 공생(共生)을 주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5·16이라는 갑작스런 정치적 상황아래 이를 주장했던 민족의 지도자들은 하루아침에 공안사범으로 몰리고 만다. 그 역시 8년형을 선고받고 3년간의 옥고를 치르게 된다.
출소이후 장일순은 원주지역의 6·3 한일협상 반대 운동과 맞물려 그의 정치적 운신의 폭은 제한받게 된다. 그러나 원주를 거점으로 하는 새로운 교구가 신설되며, 새로 부임한 교구장 지학순 주교는 장일순에게 있어 새로운 삶의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이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구심점으로 삼아 “협동조합”운동을 펼쳐 나아간다. 이 두 어른과 함께 운동의 전면에서 활동한 김영주(무위당만인회 고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무위당 장일순선생이 지학순 주교님하고 같이 “이 가난한 강원도 땅이 어떻게 하면 더 잘살 수 있겠느냐”해서 협동조합이라는 방법을 택한 거죠. 서로 같이 잘 사는 길.”[주9]
이러한 장일순의 공생의 가치는 이전과는 차이가 있게 된다. 이전에 평화를 주창한 장일순의 공생에는 국제정치에서 한반도의 위치를 중립국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노선이었다. 이는 정치제도나 관리시스템에 대한 재정립을 전제하는 내용으로 공생에 대한 제도적 관점에서의 주장이었다.
반면에 협동조합운동을 통한 공생의 가치를 내세운 것은 생활과 생업에 대한 자립에 초점 맞춰 있다. 이는 협동조합운동의 핵심세력이 중심이 되어 활동했던, 당시 남한강유역 대홍수 이후 재해대책 사업을 진행할 때에 극명히 나타난다. 김영주 고문의 회고는 다음과 같았다. “
지 주교님이나 무위당이나 우리 같은 사람들하고는 달라서 그때 구호, 슬로건이 뭐였냐면,“배고픈 사람한테 생선을 주지 말아라. 생선 잡는 방법을 가르쳐줘라”그거였어요.”[주10]
“다 함께 잘 살자”라는 공생의 가치는 신용협동조합의 설립으로 꽃피운다. 1971년 조합원 33인을 발기인으로 ‘밝음신협’을 설립한다. 영세 상인들이나 일반 소시민들을 위해 비영리로 운영되는 협동조합으로서의 금융기관이었던 것이다. 이 때문일까, 이 신협은 지역주민들의 삶이 밝아지길 바라는 바람과 사회 부조리를 없애고 밝은 사회로 나아가자는 취지로 밝음 신협이라고 했다고 한다.
* 원주시 중앙로 밝음신협 본점에는 장일순 선생의 글씨로 편액이 걸려 있다. “共生是道(공생시도)”. 이는 “함께 사는 것이 길이다”라고 풀이할 수 있는데, 당시 협동조합운동을 펼쳤던 장일순의 생각이 압축적으로 녹아있다.
한편, 당시 정부에서는 새마을운동을 전국적인 규모로 시행했다. ‘근면, 자조, 협동’의 기본정신을 바탕으로 국가발전을 위해 도시로부터 농촌에 이르는 전국단위의 일종의 근대화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자조와 협동이라는 기본정신에 걸맞지 않은 국가중심의 일방적인 탑-다운방식의 근대화였다.
가장 하층민이었던 농민들에게 생선만을 건네주려 했지, 그들에게 생선 잡는 법을 전해주진 못했다. 농민의 계몽에는 전혀 신경 쓰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장일순을 위시한 원주 그룹의 협동조합운동은 아래로부터의 위를 향하는 상향의 운동이었다. 근본적으로 민주주의 의식에 대한 고취는 물론이고, 경제적인 자립을 향한 운동이었기 때문에 새마을운동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이로부터 한국사회의 또 다른 근대화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2. 다 함께 상생으로
장일순은 1977년을 자신의 운동의 전환기라 말한다. 그동안 진행해왔던 운동을 되돌아보게 된 것이다.
“난 사실은 77년부터 결정적으로 바꿔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네. 땅이 죽어가고 생산을 하는 농사꾼들이 농약중독에 의해서 쓰러져가고, 이렇게 됐을 적에는 근본적인 문제서부터 다시 봐야지. 산업사회에 있어서 이윤을 공평분배하자고 하는 그런 차원만 가지고는 풀릴 문제가 아닌데, 그래서 나는 방향을 바꿔야 되겠구나, 인간만의 공생이 아니라 자연과도 공생을 하는 시대가 이제 바로 왔구나 하는 것 때문에 이제 방향을 바꿔야 하겠다고 생각을 했지.”[주11]
그 계기는 농약중독으로 인한 농민들의 죽음과 땅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 때문이었다. 농약은 기계문명의 산물로서 인간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탄생되었다. 그러나 인간을 위한 농약은 비극적이게도 인간에게 위해를 가져왔고, 급기야는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흙을 포함한 자연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그 영향이 농산물로 이어져 결국 인간에게 죽음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사실에 장일순은 충격을 받았으리라.
그동안의 협동조합 운동은 민주주의라는 자유권과 인간의 기본적인 경제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경제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주12] 이것이 이른바 “다 같이 잘 살자”는 공생의 가치였다. 그러나 누구도 인간을 둘러싼 환경을 공생의 범위에 포함시키자는 생각을 전혀 가져보지 못했던 것이다. 장일순 선생은 농약중독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생명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되물었다.
장일순 선생은 인간중심주의로서의 생명에 대한 인식을 폐기한다. 당시 대안으로 모색되었던 유물론도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인간중심주의라는 중심성에 집착하여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물신지배를 확대시킨다고 보았다.[주13] 문제는 우리 인간에게 먹을 것을 제공해주는 여러 식물들과 물고기, 짐승과 숲들의 인식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세계관의 문제였다. 지향해야할 목적지는 자명했다. 영성으로 이어진 세계관으로서, 들풀이라고 하는 작은 미물에서부터 온 우주로까지 연역되어 전체 생명을 하나로 연결될 수 있는 영성으로서의 세계관이다.
그러나 영성으로서의 하나, 하나의 생명들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가 관건이었다. 장일순은 여기서 동학(東學)을 제시한다. 해월 최시형 선생의 “한울(생명)이 한울을 먹는다(以天食天)”는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약육강식의 세계도 아니고, 종족살인의 세계관 또한 아니다.[주14] 바로 상부상조의 상생(相生)의 원리다.
이로써 장일순의 공생(共生)의 가치는 다시 한 번 도약하게 된다. 처음에는 정치를 통한 제도적 관점에서의 공생을 이야기했고, 이후에는 협동조합운동을 통한 생활과 생업에 대한 자립으로서의 공생을 이야기했다. 지금의 단계에서는 생명에 대한 재정립을 통해 한울이 한울을 먹는다는 상생(相生)으로서의 공생을 말한 것이다.
3. 공공하는 한살림운동
장일순의 상생(相生)에 대한 가치는 “한살림”이라는 기호를 통해 더욱 상징화되었다. “한살림”이란 말은 인농(仁農) 박재일(朴才一, 1938~2010) 회장이 만들었지만, 그 근본정신은 이른바 원주그룹에서 이루어졌다. 박재일 회장 역시 이 원주그룹의 일원이었다. ‘한’이라고 하는 ‘크다’는 뜻과 ‘살림’이라고 하는 생명운동은 사회운동이자, 영성운동이었다.
부엌살림을 하는 많은 주부들이 알고 있을 “한살림”은 유기농산물을 매개로 도시의 소비자 조합원과 생산자 조합원이 만나는 곳이다. 한살림의 매장이나 물품을 소개하는 곳에는 “밥상살림, 농업살림, 생명살림”의 글귀가 얹혀 있다. 농약 등의 폐해로부터 시작한 생명살림운동은 애초에 밥상이라는 곳에 초점 맞춰져 있었다.
생명이란 가치를 구체적인 실생활에서 당장에 체감할 수 있는 곳은 바로 밥상에서부터이었기 때문이다. 밥상으로부터의 살림은 농업의 살림으로 이어지고, 결국 온 생명의 살림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소박하지만, 단순한 이치를 담고 있다. 장일순 선생은 한살림 공부모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지자연(天地自然)의 평이(平易)하고 간단(簡單)한 법칙(法則)에 따라 이칙이지(易則易知)하고 간칙이종(簡則易從)하고 이지칙유친(易知則有親)하고 이종칙유공(易從則有功) ― 이간이천하지이득의(易簡而天下之理得矣)니라.(천지자연의 평이하고 간단한 법칙에 따라 쉬우면 쉽게 알 수 있고, 간단하면 쉽게 따를 수 있고, 쉽게 알 수 있으면 친할 수 있고, 쉽게 따를 수 있으면 공을 이루리라 ― 쉽고 간단함 속에 천하의 이치를 얻을 수 있다.) 《易經》 [주15]
장일순 선생은 생명운동을 누구나 쉽게 따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야 거기에서 행동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 역시 이루질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한살림운동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생명활동의 장(場)인 밥상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동아시아의 고전에서 공공(公共)은 ‘보편적 가치를 모두가 공유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동사로 사용하였다.” [주16]
이러한 공공의 의미를 미루어 볼 때, 한살림운동은 공공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밥상이라고 하는 소박한 의미 위에서 우주만물을 포함하는 전일적 세계관으로서의 생명의 가치를 인식하고, 이를 살리고자하는 정신과 실천이 모두 펼쳐진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은 문자화되어 「한살림선언」으로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다.
1989년 「한살림선언」이 발표된지 3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벌써 한 세대가 흘러가고 있지만, 여전히 「한살림선언」은 유효하다. 적어도 우리사회에서 죽임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것은 옛선각자들이 그토록 변화시키고자 했던 우리의 세계상이 모습일 것이다. 동아시아의 공공(公共)하는 것은 바로 실천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멀리는 있는 것이 아니라, 밥상이라고 하는 소박하지만 단순한 실천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작지만 소박한 세계에 대한 인식의 전환으로부터 생명살림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장일순 선생의 상생(相生)에 담긴 생명살림이지 않을까 싶다.
[주석]
(1) 신성식, 「한국 올 출산율 1명 아래로...지구상 유일한 0점대 국가」, 《중앙일보》, 2018.07.05.
(2) 이에스더, 「13년간 ‘OECD 자살률 1위’ 한국이 갑자기 2위로 내려온 이유」, 《중앙일보》, 2018.07.23.
(3) 현재 위키백과, 두산백과에는 장일순 선생의 생몰연월일을 1928년 9월 3일~1994년 5월 22일로 되어 있다. 이 중 태어난 날짜 9월 3일은 양력이 아니라 음력 날짜라는 장동영 원주밝음신용협동조합 상임이사의 증언에 따라 양력생일로 변환하여 바로잡는다.
(4)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장일순
(5) 「<8월> 차강 박기정(1874~1949) 의병운동 앞장선 불세출 서화가」, 《강원도민일보》, 2003.08.01.; 현재 원주지역에서 서예가로 활동하고 있는 호산 채희승 선생은 이로부터 장일순 선생의 서체의 학맥으로 추사 김정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평가한다. 이는 이재 권돈인과 추사 김정희가 가깝게 지냈기 때문이고, 또 박기정의 손자이자 제자인 화강(化江) 박영기 선생이 추사 김정희의 서체를 터득해했던 면에서도 추사 김정희의 묵맥이 장일순에게 까지 이어졌다고 짐작된다는 것이다.
(6) 「<8월> 차강 박기정(1874~1949) 의병운동 앞장선 불세출 서화가」, 《강원도민일보》, 2003.08.01.
(7) 같은 책, 202쪽 참조.
(8) 김재익, 「장일순의 리더십과 생명사상」, 원주한살림 33주년 창립기념 포럼, 2018.6.20.
(9) 「협동조합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과정」, 월간 스토리그래픽, 지역문화콘텐츠협동조합 스토리한마당편, 2018.06.08.; 협동조합도시 원주, 강원아카이브협동조합편, 재인용
(10) 같은 책.
(11) 주요섭, 「무위당과 전환의 사회운동」, 무위당 20주기 기념 생명운동 대화마당, 모심과살림연구소, 2014.5 71쪽.
(12) 삥땅심포지움’을 계기로 초기 생명론에 대한 담론 역시 이 부분에 속한다. 김소남, 「원주 협동운동의 뿌리와 전개 과정」, 무위당 20주기 기념 생명운동 대화마당, 모심과살림연구소, 2014.5 105쪽.
(13) 원주사람들, 「생명의 세계관과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1980)」, 생명운동 자료모음 통권1호, 모심과살림연구소, 2011.5, 291쪽.
(14) 같은 책, 305쪽.
(15) 장일순, 「시(侍)에 대하여」(1989.10.28)
(16) 조성환, 「공공철학의 관점에서 본 동학의 개벽사상」,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71, 2017.3, 275쪽.
* 출전 : 《월간 공공정책》 20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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