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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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中有山 | [한국학] 9. 이성적 근대와 영성적 근대 - Daum 카페



[한국학] 9. 이성적 근대와 영성적 근대 |리더십에세이外
혼돈나라|조회 106|추천 1|2018.05.28. 14:03http://cafe.daum.net/bookofchange/OR3x/80



한국학 어떻게 할 것인가 ⑨ <개벽신문>74호(2018년 5월)
이성적 근대와 영성적 근대

조성환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이성적 근대의 출현

우리는 흔히 ‘근대’라고 하면 데카르트나 칸트로 대변되는 수학적 이성과 과학적 합리성, 그리고 계몽주의와 정교분리(政敎分離)와 같은 사상사적 조건 등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이것은 서양이 중세와는 다른 새로운 질서를 ‘이성’ 중심으로 모색했고, 그래서 서양에서는 중세의 다음 시대인 근대가 곧 ‘이성의 시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양에서 근대라는 새로운 세계를 ‘개벽’한 근본적인 동력은 ‘이성’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에 ‘영성’은, 이성과는 반대편에 있는 영역으로 여겨져, 철학과에서 추방되거나 근대 담론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서구의 이성적 근대가 전 세계의 ‘근대’의 기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성이 발명한 과학기술 때문이었을 것이다. 과학이 기술을 낳고, 그 기술이 산업혁명과 첨단무기라는 엄청난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업혁명과 첨단무기는 곧바로 비서구지역의 식민지지배라고 하는 제국주의의 길로 이어졌다. 따라서 서구의 근대는, 그리고 그것을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선취했다고 하는 일본은, 제국주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성적 근대의 수용






19세기말의 일본의 서구주의자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러한 힘의 원동력을 ‘과학’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것을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개념을 빌려 ‘실학’이라고 명명하였다.




그가 보기에 서구 근대의 학문 모델은 물리학이고, 물리학을 바탕으로 한 과학이야말로 현실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하고 실용적인(實) 학문(學)이라는 것이다[주1].



따라서 이와 같은 현실적이고 근대적인 학문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 이른바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있어서의 실학으로의 전환”이다.




그리고 이때의 실학이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실천학’이 아니라, ‘실용학’의 다른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주장한 탈아론(脫亞論)은 탈아학론(脫亞學論), 즉 “아시아적인 학문관에서 벗어나자”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학문관은 자연히 한국에도 영향을 끼쳐, 1930년대에 조선학운동을 전개한 당시 한국의 석학들은, 그리고 그 뒤를 이은 1950년대의 천관우나 1970년대의 이우성 등은, 후쿠자와 유키치적인 실학관을 암암리에 조선후기 사상가들에게 적용하여 이른바 ‘실학담론’을 만들어냈다.




즉 유형원이나 정약용과 같은 조선후기 사상가들에게서도 과학으로서의 실학, 또는 실용학으로서의 실학을 추구한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후기사상사 서술범주로서의 실학론은 일종의 일본근대사상사의 틀을 빌려서 한국근대사상사를 서술한 것에 지나지 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서구적인 ‘이성적 근대’를 서술하기 위한 학문틀을 후쿠자와식의 ‘실학’ 개념에서 빌려와서 한국근대사상사를 서술한 것이다.






영성적 근대의 모색






그러나 이른바 실학자들이 실학(實學)이라는 말보다는 실심(實心)을 더 강조했고, 정약용의 경우에는 천주교의 ‘신’을 받아들여 “실심사천(實心事天)”과 같은 종교적 태도를 강조했다고 한다면, 과연 조선후기의 이른바 실학자들이 후쿠자와식의 실용실학만으로 일관했는지는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실심사천”은 이성[理]보다는 영성[靈]의 차원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산의 실학은 ‘이성실학’이라기보다는 ‘영성실학’에 가깝다. 다시 말하면 마테오 리치 같은 예수회 신부가 주장하는, 어디까지나 유교적 시스템 안에서의, 실학인 것이다.



동학은 이러한 영성의 영역을 민중의 생활 속에서 한 차원 더 밀고 나간 사상운동이었다. 동학은 천주교적인 창조신 대신에 한국적인 하늘님 신관을 바탕으로 종래의 성리학과는 다른 새로운 인간관과 수양론을 ‘작(作)’하였다는 점에서 ‘영성적 근대’를 모색하였다고 평가할만하다.




그런 점에서 다산의 학문은, 적어도 ‘영성’을 기준으로 한다면, 후쿠자와보다는 동학에 더 가깝다. 이것이 일본과는 다른 한국 근대의 모습이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근대는 일본이나 중국보다는 인도나 아프리카의 상황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본이나 중국은 식민지 경험이 없고, 특히 일본은 식민지를 하는 입장에 있었던 반면에, 인도나 아프리카 등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식민지를 당하는 입장에서, 지배에 저항하고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초월적 영성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본이나 서구와 같은 이성적 근대, 실용적 근대의 길을 가는 대신에, 그들의 지배에 저항하기 위해서 영성적 근대, “토착적 근대”(기타지마 기신)를 지향하였다. 그리고 그 지향은 새로운 종교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바로 여기에 이른바 ‘동아시아담론’ 도는 ‘유교담론’의 함정이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 중심, 중국 중심의 모델이기 때문이다. 즉 중국이나 일본의 근대를 설명하는 데에는 적절할지 몰라도, 적어도 한국의 근대를 설명하는 데에는 ‘유교’ 중심의 동아시아담론은 방해로 작용한다.




왜냐하면 한국의 근대는, 동학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중국이나 일본 또는 서구의 근대와는 다른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성’으로 대변되는 실용보다는 ‘영성’으로 대변되는 초월을 추구하는 강한 지향이고, 그래서 재(再)유교화가 아닌 탈(脫)유교화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동학의 토착성






일본이 근대화의 과정에서 ‘유교화’를 필요로 했다면[주2], 한국은 반대로 ‘탈유교화’와 ‘토착화’의 길을 걸었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서 독자적인 사상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동학이 제시한 새로운 세계관은 한국적인 ‘하늘’ 관념을 우주적인 생명신(天靈氣)으로 재해석하고, 그 생명신을 인간을 비롯한 만물의 내부에서까지 발견하여 ‘모심(侍)’의 대상으로 삼았다(“侍天靈氣而化生”)는[주3] 점에서 탈유교적이면서 토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영성[靈氣]은 생명[化生]으로 해석되고, 따라서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는 신성하고 동등한 존재로 자리매김된다.



특히 ‘모신다’는 표현은 한국의 무교(巫敎) 전통에서 사용하는 개념이라는 점에서도 동학사상의 토착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무당들은 각자 자신들의 신을 ‘모시고’(“몸주신”) 살면서 그 신과 교감을 하고 있는데, 동학에서도 만물은 모두 하늘님이라는 신을 ‘모시고’ 있는 셈이다.




다만 동학의 하늘님은 만물에 ‘공통된’(=공공의) 생명신이고, 그 생명신은 우리 밖에 외재할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도 내재해 있다는 점에서(內有神靈) 무당이 모시는 신과는 다르다. 달리 말하면 동학은 외부의 신을 내부의 신으로 끌어들인 셈이다.





영성화하는 한국 근대






‘동학’이라는 명칭이 철학의 풍토성을, 그리고 그것의 별칭인 ‘천도’가 철학의 토착성을 나타낸다면, ‘개벽’은 그들이 지향한 철학의 근대성을 상징한다. 그 근대의 특징은, ‘무극’이나 ‘대도’라는 말로부터 알 수 있듯이(“無極大道”), 자기를 넘어선 초월적 경지를 ‘강화’한다는 데에 있다.



동학은 이 작업을 인간 안에 신을 끌어들임으로써(모심) 성취하고자 하였다. 달리 말하면 인간에게 도덕적 이성 대신에 초월적 영성을 부여한 셈이다. 여기에서 ‘영성’은 자기를 넘어서 있는 경지, 즉 초월을 지향하는 능력을 말한다.




가령 흔히 중국철학의 이상으로 거론되는 “천인합일”은 이성의 차원이 아니라 영성의 차원을 말한다. 그리고 그 차원은 ‘도(道)’라는 개념 속에 응축되어 있다.



그러나 최제우가 생각하기에 당시에 유교적 영성은 매우 약화되어 있었고, 따라서 사람들은 자기를 넘어선 초월적 경지를 더 이상 추구하지 않게 되었다(“各自爲心”).




그런 의미에서 동학의 출현은 일종의 “재영성화”[주4] 또는 “영성의 강화” 작업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학이 나오게 된 더 근본적인 원인은 유교적 영성 자체가 처음부터 한국인의 영성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산이 천주교의 ‘신’을 받아들이게 된 원인도 여기에 있고, 퇴계가 인격적 ‘상제’ 개념을 선호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이 보기에 성리학이 추구하는 초월성은 어디까지나 도덕적 이성 안에서의 초월성으로, 그런 점에서 진정한 초월성이 확보되기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동시에 그것은 한국인의 정서에도 맞지 않는 초월성의 추구방식이다.




한국인은, 일찍이 퇴계가 “리(理)는 죽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듯이, 초월적인 존재와의 상호작용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퇴계의 “理自到”, 다산의 “上帝臨汝”, 최제우의 “降臨”). 동학은 이 흐름을 잇고 있다.




그런 점에서 동학의 탄생은 한국적 영성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영성이 생명과 평화 중심의 한국적 근대를 여는 추동력으로 작동하였다.



[주석]

(1) 사사키 슌스케・카타오카 류, 「일본과 한국에서의 실학의 근대화」, 《한국종교》43, 2018.

(2) 오구라 기조, 「일본은 메이지 이후에 유교 국가화의 완성을 지향한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모시는 사람들, 2017, 19쪽.

(3) 《해월신사법설》「영부주문」.

(4) 이 표현은 이병한의 「요가와 쿵푸가 만나면 세상이 바뀐다 : 프라센지트 두아라와의 대화」,《프레시안》2015.09.01을 참조하였다.



[참고문헌]

조성환, 「영성과 근대: 일본화된 한국사상사」, 《문학・사학・철학》52, 2018년 봄・여름호(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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