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07

19 원불교신문[북한바로알기]정창현[1-7]


원불교신문[북한바로알기]정창현 소장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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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 북한에는 어떤 종교단체가 활동하고있나?

정창현 소장
승인 2019.06.20
호수 1940

[원불교신문=정창현] 북한의 종교탄압을 거론하거나 종교단체의 성격을 평가하기에 앞서 북한의 역사나 주민들의 정서를 깊이 들여다보며 '왜 종교가 북한에서 설 땅을 잃었나'를 우선 고민해 봐야 한다. '북한에도 종교가 있나'라는 질문 대신 '왜 종교가 쇠퇴했나'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하는 것이다. 앞으로 북한을 모색하기 위해 꼭 필요한 질문이기도 하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종교 자유 탄압하는 '특별우려국' 북한

북한에도 신앙의 자유가 있고 종교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을까? 형식적으로 보면 그렇다. 북한도 헌법에는 신앙의 자유를 규정해 놓았다. 이 권리는 종교건물을 짓거나 종교의식 같은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보장된다.

그런데 여기에 조건이 하나 붙어 있다. 종교로써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 사회질서를 해치는데 이용할 수 없다는 조항이다. 이 조항에 따라 외국 종교인들이 종교시설 밖에서 종교의식을 갖거나 선교활동을 하는 행위는 '불법'이 된다. '사회 질서 침해'도 너무 포괄적이고, 자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북한에는 사실상 서구식 개념의 '종교 자유'는 없다고 볼 수 있다.

1998년 제정된 국제종교자유법에 따라 세계 각국의 종교자유를 평가하는 미국 국무부는 2001년 이후 중국과 함께 북한을 매년 '종교자유 특별우려국'으로 지정하고 있다. 물론 북한에도 여러 종교단체와 시설이 존재한다. 현재 북한에는 각 종교별로 조선불교도연맹,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조선가톨릭교협회,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조선정교위원회 등 5개 종교단체와 이 단체들의 협의체인 조선종교인협의회가 활동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6.25전쟁 이전까지 활발하게 활동하던 이들 종교단체들은 1950년대 중반 이후 공식 무대에서 이름이 사라졌다. 조불련은 1965년~1971년 사이, 조선그리스도연맹은 1964~1973년 사이, 조선천도교회는 1949~1973년 사이의 활동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1972년 사회주의헌법이 채택되고, 주체사상이 북한의 지배이데올로기로 확립된 후에 다시 공식 활동을 시작한다.

1972년 12월27일 북한은 기존 헌법을 사회주의헌법으로 개정하면서 "모든 공민은 신앙의 자유와 반종교선전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하였다. 신앙의 자유와 반종교선전의 자유를 동시에 명시해 사실상 종교의 자유를 부정하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고 볼 수 있다. 헌법 규정 마련과 주체사상의 확립 이후 북한은 기존의 종교단체들을 북한사회주의 체제에 맞게 다시 조직했다.

이에 따라 1972년 9월 조불련이 조불련 중앙위원회의 이름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뒤를 이어 1974년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와 조선기독교연맹(1999년 조선그리스도교연맹으로 개칭)이, 1988년 6월 조선천주교인협회(1999년 조선카톨릭협회로 개칭)가 뒤를 이었다.

종교단체들의 재등장은 북한 내부적으로 주체사상의 틀 안에서 성격과 역할이 재조정됐고, 외부적으로 국제사회와의 종교교류가 불가피해졌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특히 1980년대 이후 북한을 찾는 종교인사가 늘면서 이들이 평양에서 예배를 보거나 예불을 드릴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해졌다.
2012년 11월 평양 장충성단을 방문한 박창일 신부의 집도로 북측 천주교신도와 평양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미사를 보고 있다.(사진제공 박창일 신부)

5개의 중앙 종교단체가 활동
가장 많은 사찰과 신도수를 보유한 조선불교도연맹 산하에는 전국 10개 도당 조직과 50개 시·군별 조직이 설치돼 있고, 교육기관으로 평양 광법사에 불교학원이 개설돼 있다. 형식적으로 전국신도회도 있다. 6.25전쟁 전 북한지역에는 약 500만 명 정도의 불교신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조불련 설립 초기에는 신도수는 27만명으로 발표됐다.

조선그리스도교연맹 본부는 평양 봉수교회 건물 옆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그리스도교도연맹은 중앙조직으로 총회,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가 있으며, 지방조직으로는 도(직할시) 연맹, 시, 군(구역)연맹, 가정예배소 등이 있다. 신도수는 1만여 명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평양신학원도 개설돼 있다.

조선카톨릭협회의 활동 거점은 평양의 장충성당이다. 산하에는 교구가 아닌 평양지구, 동해지구, 서해지구 등 3개 지구로 나눠져 있다. 그중 신자가 1500여 명 되는 서해지구가 역사적으로 가장 뿌리가 깊다. 각 지구마다 가정 예배처소가 있으며, 지구에 속한 신자들을 위해 남포와 원산에 공소를 세울 예정이라고 한다.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도 다른 종교단체와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고, 2000년대에 들어와 그리스정교회계통의 정백사원이 건축되면서 조선정교위원회도 설립됐다. 북한식으로 '토착화 된 종교기구'라고 평가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북한의 종교단체들은 "북한이 종교자유를 인정하고 있다고 선전하기 위해 결성한 대외선전용 종교기구"로 평가된다. 실제로 이들 종교단체들은 "정부의 정당정책을 높이 받들고 나라의 융성번영을 위하여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하여 세계의 공고한 평화를 위하여 투쟁하는 것을 기본 사명"으로 한다.

그 동안의 활동자체도 남북 종교교류나 국제교류에 치중돼 있다. 순수한 종교단체가 아닌 정치적 목적을 가진 정치단체의 성격이 강한 게 사실이다. 이들 단체를 이끌어 가는 수장들인 강지영 카톨릭협회 회장 겸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 강수린 조선불교도연맹 위원장은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의 고위간부를 역임하거나 겸직하고 있고, 강명철 조선그리스도연맹 위원장은 최고인민회의 고위직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2007년 5월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평양 광법사에서 남과 북의 스님들이 함께 등을 달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 미디어한국학)

북한주민 정서 고려한 선교 전략 필요
그러나 북한의 종교탄압을 거론하거나 종교단체의 성격을 평가하기에 앞서 북한의 역사나 주민들의 정서를 깊이 들여다보며 '왜 종교가 북한에서 설 땅을 잃었나'를 우선 고민해 봐야 한다. '북한에도 종교가 있나'라는 질문 대신 '왜 종교가 쇠퇴했나'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하는 것이다. 앞으로 북한 선교를 모색하기 위해 꼭 필요한 질문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보면 6.25전쟁 이전에 북한지역에는 3천개 이상의 교회와 성당, 그리고 5백여 개의 사찰이 있었지만 6.25전쟁을 거치면서 거의 대부분의 교회, 성당, 사찰이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일부 산악지역에 있던 사찰만이 전화(戰火)를 비껴갔을 뿐이다. 일부 주민들은 '기독교 국가' 미국을 믿고 교회나 성당으로 피신했지만 태평양전쟁 때보다도 더 많이 쏟아진 폭격에는 예외가 없었다.

전쟁을 겪은 세대에게 미군의 폭격은 '공포와 분노' 그 자체였다. 더구나 1946년 토지개혁이 단행되면서 북한지역의 모든 사찰은 국유화되었다. 종교활동이 유지되거나 확산될 수 있는 뿌리 자체가 완전히 뽑힌 것이다. 더구나 기독교에 대한 북한 인민들의 정서와 감정은 바깥에서 생각 이상으로 호의적이지 않다. 평양에서 만나 대화해본 북한사람들 사이에서는 기독교가 반동적이며 비과학적인 세계관이라는 인식이 기본적으로 형성돼 있다.

현재 북한의 50~60대 장년층은 전쟁 이후세대로 종교를 접해 본 경험이 없고, 강제적이든 자발적이든 종교가 일종의 아편, 미신으로 간주하며 투쟁과 척결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세대교체가 되면서 사회주의 이념이나 주체사상이 확립된 후 태어나 자란 20~30대들은 아예 종교에 관심이 없다. 외부의 선교활동이나 음성적인 '지하교회'에 대해서는 체제 전복세력이나 불순세력으로 본다.

봉수교회에는 6명으로 구성된 성가대가 예배 때마다 '우리 주님께', '감사하신 예수께서' 등의 찬송가를 부르지만 모두 60대 이상이다. 젊은 세대의 후임자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의 역사와 정서를 고려하지 않거나 북한 체제 붕괴만을 기도하는 대북 선교정책은 공염불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 역사와 주민 정서를 감안하면 그나마 종교단체가 존재해 교류를 추진하고, 전국적으로 60여 개의 사찰과 평양의 봉수교회, 칠골교회, 장충성당이 명맥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이상할 정도이다.

북한이 남북 종교교류, 국제교류에 적극성을 띠면서 해외와 남한의 종교인들 주도로 교회, 병원, 학교, 양로원 등 건축물이 들어서고 종교 활동을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게 그나마 북한에 다시 종교의 씨앗을 뿌리고 선교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라는 성경구절이 떠오른다.

■ 약력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서울대 국사학과, 동 대학원 졸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전문기자
북한대학원대학교와 국민대 겸임교수
(사)현대사연구소 소장 역임
현재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정책기획위원
민화협 정책위원 등으로 활동

[2019년 6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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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북한 바로알기 2/ 북한의 종교시설과 종교생활

정창현 소장
승인 2019.07.19
호수 1944

[원불교신문=정창현 소장] 북한 당국은 북한 사람들에게 특별히 종교를 권장하지는 않지만 외부인들이 종교시설에 가서 종교의식을 갖는 것에 대해서는 자연스럽게 허용하고 있다. 북한의 종교시설은 설립 계기와 활동을 통해 볼 때 대외교류와 선전 목적이 강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종교적 기능이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일 예배를 보실 분이 있으시면 아침 9시까지 호텔 1층으로 나오십시오." 남쪽이나 해외인사의 방북기간 중 일요일이 끼게 되면 전날 북측의 안내원은 교회나 성당에 갈 방문객이 있는지 확인한다. 통상 개신교 신자들은 봉수교회에, 천주교 신자들은 장충성당에 가서 예배를 본다. 불교 신자들은 주로 광법사에 가서 예불을 올린다. 방북 러시아인들 중 정교회 신자들은 정백사원에 간다.
2007년 신축한 봉수교회 전경.

수교회와 칠골교회
북한 당국은 북한 사람들에게 특별히 종교를 권장하지 않지만 외부인들이 종교시설에 가서 종교의식을 갖는 것에 대해서는 자연스럽게 허용하고 있다. 1988년 10월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이 설립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북한은 1970년대부터 남북교류와 국제적 접촉을 시도하면서 종교시설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미국에 거주하던 김성락 목사와 홍동근 목사의 역할이 컸다. 김 목사는 1981년과 1982년 평양을 두 차례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직접 만났다. 이때 김 주석이 김 목사에게 식사기도를 부탁했고, 기도가 끝나자 김 주석이 "아멘"으로 대답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 만남 이후 재미교포 목사들의 북한 방문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1981년 처음 평양을 방문한 홍 목사는 방북할 때마다 "평양에 교회 하나 짓자"고 줄기차게 권유했다. 이에 대해 북한은 표면적으로는 "기독교에 대한 인민들의 반감과 불신 때문에 아직 공개적인 교회건축이 여의치 못하다"라고 거절했다. 그러나 북한은 내부적으로 천주교인협회 결성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신자찾기운동'을 전개해 800명 정도의 신자를 찾았다.

1987년에는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내에 종교학과를 설치해 종교교류에 대비해 인력 양성에 나섰고, 1990년에 홍 목사를 초청해 신학특강을 맡기기도 했다. 미국의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목사도 1992년과 1994년에 북한 당국의 초청으로 김일성종합대학 종교학과에서 특강을 했다. 재미목사들의 김일성 주석 만남, 1989년 남쪽의 문익환 목사와 문규현 신부의 방북이 북한 '종교 부활'의 계기가 된 셈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88년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이 건립될 수 있었다. 1988년 10월 완공돼 11월6일 첫 예배를 드리면서 공식적으로 문을 연 봉수교회는 약 2천여 평의 부지에 450석 예배당을 갖췄다. 부지는 북한당국이 무상으로 제공했으며, 건축비는 형식적으로 북한 교인들의 '헌금'과 해외 기독교 단체에서 보낸 지원금으로 충당됐다.

봉수교회는 2008년 남북 합작으로 재건축돼 그랜드피아노를 비롯해 40석의 성가대석과 대형 스크린을 갖춘 현대식 교회로 변모됐다. 신자는 300여 명으로, 평소에는 100여 명의 신자가 주일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이들은 남쪽의 성서와 거의 비슷한, 자체적으로 번역한 성서를 낭독하고, 가사만 조금씩 다른 찬송가를 부른다.

봉수교회 외에 평양에는 1992년 신축된 칠골교회가 하나 더 있다. 칠골교회는 원래 김일성의 외할아버지인 강돈욱이 시무 장로로 재직한 교회이고, 어머니인 강반석이 태어나고 자라면서 다녔던 곳이며, 김일성 주석 자신도 어렸을 때 이 교회에 다녔다고 한다. 이 교회 건립을 위해 1989년 재일대한기독교회 총회가 1만 달러를 헌금했고, 1994년 1월 그레이엄 목사가 외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설교한 바 있다. 북한에서는 새로운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이주한 주민들 중 가정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기독교인들이 교회당 건립을 요청했고, 김일성 주석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이곳에 교회당 건립을 허락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2006년에 동평양 낙랑구역에 세워진 러시아정교회 교회당 정백사원.



북한 유일의 가톨릭 성당인 장충성당
북한 유일의 가톨릭 성당인 장충성당은 동평양지역에 있고, 1988년 9월에 완공돼 10월 로마 교황의 특사 일행이 방문해 성당 축성식을 거행하고 첫 미사를 열었다. 250석 규모의 회중석에 제단과 제의실, 성가대석, 고해소와 각종 성화 및 성물 등을 갖추고 있다. 신부와 수녀는 없고, 주일마다 신도들이 성당에 모여 회장과 부회장 2명의 주관 하에 기도회를 진행한다. 신자 수는 300여 명 정도라고 한다. 남쪽과 해외에서 방문하는 동포들을 비롯해 평양시에 거주하는 외교단 구성원들과 외국인 기술자, 유학생들도 주일 미사와 대축일 미사에 참가한다.

이외에도 대부분의 한국교회와 기성 종교들로부터 줄곧 이단종교로 비판받아온 통일교(2013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으로 개칭)의 공식교회당인 '평양 가정연합교회'가 있다. 이 예배당은 통일교가 보통강변에 지은 '평양세계평화센터' 빌딩 안에 있다. 통일교는 1991년 문선명 총재가 김일성 주석과 회담한 것을 계기로 북한과 여러 분야에서 협력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황해남도 안악군 구월산에 있는 삼성사(三聖祠). 조선시대 환인·환웅·환검의 삼신을 모신 조선시대 사당이며 단군의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일제가 허문 것을 2000년 북한이 복원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문화유산에서 종교시설로
북한에는 현재 60여 개의 사찰이 남아 있다. 북한에서는 사찰이 여전히 종교시설이란 측면보다는 문화유산(문화재)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강하다. 사찰의 책임자도 '주지'보다는 '관리인'으로 불렸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의 스님들은 여전히 장삼을 걸치고 있었지만 1960년대 이후에는 '관리인'으로서 양복을 입기 시작했다.

2000년대 중반 평양 광법사를 방문했을 때 "머리를 깎지 않으셨는데 북의 스님들은 다 대처승입니까?"라고 묻자 "우리는 대처승이란 말을 쓰지 않습니다. 남쪽 태고종도 삭발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머리 깎고 안 깎고는 자유지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남북 불교교류가 본격화되면서 북한 사찰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교류를 시작하면서 북한의 스님들도 머리를 짧게 깎고, 장삼을 입고, 독경을 하기 시작했다. 외부인사의 방문이 허용되거나 관광지로 개방된 사찰의 경우 이제 대부분 남쪽과 비슷한 스님이 배치됐다.

평양의 광법사·용화사·정릉사·법운암, 개성의 안화사·영통사·관음사, 황해북도 정방산의 성불사, 금강산의 신계사·표훈사, 묘향산의 보현사 등이 외부에 공개된 대표적 사찰들이다. 다만 북한의 불교신자들은 정기적인 예불보다는 남북 불교 공동행사나 부처님오신날 행사 등 제한된 행사 때만 참석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천도교와 대종교에서 '성지'로 중시하는 삼성사(三聖祠)가 황해남도 구월산에 있다. 삼성사는 고조선 시기부터 단군에 대한 제를 지내고 고려 말기부터 단군과 함께 환인, 환웅의 제를 지낸 것으로 전해진다. 1916년 대종교 창시자 나철 대종사가 이곳에서 숨을 거둔 뒤 일제가 허문 것을 2000년 북한이 복원했다. 북한에서 한 때 번성했던 천도교의 경우 52개의 교당이 있다고 전해지지만 공개된 적은 없다.

가장 최근에 들어선 종교시설로는 러시아정교회의 정백사원이 있다. 2001년 북러정상회담을 계기로 다음 해 '조선정교위원회'가 설립됐고, 2006년에 동평양 낙랑구역에 정백사원이 완공됐다. 북한의 종교시설은 설립 계기와 활동 등을 통해 볼 때 대외교류와 선전 목적이 강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종교적 기능이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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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북한 바로알기 3/ 불교와 민족종교계의 남북교류와 포교정책

정창현 소장
승인 2019.08.23
호수 1948



2003년 10월 3일 평양 단군릉에서 두 번째로 열린 개천절 남북공동행사에 참석한 원불교, 불교, 유교, 천도교, 대종교 등의 남측대표단이 행사를 지켜보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원불교신문=정창현 소장] 불교계 외 민족종교계는 그동안 대북 인도적 지원에 동참하고, 남북 공동행사에 참석하며 남북교류를 모색했다. 지난해'남북교류 원불교 선포식'을 연 원불교는 '통일교화 기반조성'이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교정원에 통일부원장 직제를 신설했다. 통일시대가 점점 가시화됨에 따라 전략적으로 교화거점 확보와 교화시스템을 마련하겠다는 구상이다.

2002년 8월29일 처음 정방산 성불사에 갈 때의 일이다. 평양을 떠나 사리원 근처에 도착하자 동행한 조계종 총무원의 한 스님이 나지막이 노래를 불렀다.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소리. /
주승은 잠이 들고 이 홀로 듣는구나./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1932년 이은상의 시조에 홍난파가 곡을 붙인 <성불사의 밤>이란 제목의 노래다. 노래가 끝나자 옆에 있던 북측 안내원이 분위기를 깨는 한 소리를 던졌다.

성불사에 다시 달린 풍경(風磬) 남북 불교 교류의 한 단면
"지금 성불사에서는 그윽한 풍경소리 듣지 못합니다. 남쪽에서 오신 분들이 성불사만 방문하면 풍경을 찾는데, 6.25전쟁 시기에 미군의 폭격으로 절 건물이 불타거나 심하게 파손될 때 풍경도 없어졌습니다."

'성불사에 풍경이 없다니'모두들 의아해하면서 성불사에 도착하자마자 너도나도 우선 대웅전 처마에 풍경이 달려 있는지 확인해 봤다. 정말로 풍경이 없었다. 동행한 스님이 성불사 주지스님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아니 성불사에 풍경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우리가 풍경을 보낼 테니 꼭 달아 놓으시오." 6년 후인 2008년 5월 16일 다시 성불사를 찾았다. 반갑게도 이번에는 풍경이 달려 있었다.

성불사에 다시 걸린 풍경은 작지만 남북 불교 교류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불교계는 1991년 10월 미국 LA에서 개최된 남북불교지도자의 만남을 시작으로 지난 28년 동안 대북인도적 지원, 단청 안료와 불교 용품 지원, 금강산 신계사와 개성 영통사 중창 불사, 남북불교도 합동법회 등 다양한 남북교류를 진행해 왔다.

남북관계가 꽉 막혀 있던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도 불교계는 공동 종교행사 24건과 인도적 대북지원 6건, 공동성명서 발표 3건, 인적 교류 및 회동 3건 등 다른 종교에 비해 활발한 교류를 이어갔다. 특히 2011년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는 59곳의 북한 현존사찰 및 폐사지, 절터를 전수 조사해 촬영된 자료를 바탕으로 〈북한의 전통사찰〉(총 10권)을 발간했다.

이 도록에 담긴 사진들은 기존 자료를 모은 것이 아니라 북한 담당 기관인 조선문화보존사·조선불교도련맹의 협조를 받아 직접 촬영된 것으로, 북한의 전통사찰에 대한 '최초의 종합보고서'라고 평가할 만하다. 북한 전통사찰의 현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북한 불교 연구뿐만 아니라 남북 불교교류의 방향을 모색하는데 전제 조건이라 더 의미가 컸다.
1957년 주지스님의 안내로 개성 관음사를 둘러보는 김일성 수상.
1998년 '관리인'의 안내로 강원도 석왕사를 둘러보는 김정일 위원장.

북한도 민족종교계와 교류에 적극적 태도
이러한 불교계의 남북교류는 북한 불교계에도 일정한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북한의 주요 사찰에 '관리인' 대신 주지 스님들이 임명되기 시작했다. 북측지역에서 가장 큰 사찰인 묘향산 보현사에는 주지 청운 스님을 비롯해 그로부터 계(戒)를 받고 상좌가 된 백운 스님(상원암 주지), 청벽 스님(보현사 부주지) 등 20여 명의 스님이 수행하고 있다.

평양 대성산 광법사에는 '북한 불교의 중흥조'라 일컬어지는 박태화 대선사의 상좌인 주지 광선 스님, 금암 스님 등과 혜명 스님 등이 수행하고 있다. 이외에도 금강산 표훈사, 개성 영통사, 평성 안국사, 구월산월정사, 성불사, 양천사, 강원도 안변 석왕사 등 주요사찰에는 거의 대부분 주지 스님을 임명하고 많은 스님과 불자들이 종교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보현사 불학원을 졸업한 새로운 세대의 스님들이 배출돼 각 사찰에 배치되고 있다. 보현사 관음전, 수충사 등에서 종교업무와 수행을 하고 있는 혜광·월광·홍법 스님 등이 대표적이고, 보현사 하비로암 주지로 있는 진명 스님은 청운 주지 스님의 아들로 대를 이어 출가한 사례다.

외관상으로도 1950년대까지 가사를 걸친 주지 스님의 모습이 남쪽과 비슷했지만 1960년대 이후 양복을 입은 관리인으로 변화됐는데, 남북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붉은 가사를 입고 머리를 짧게 깎거나 삭발한 스님이 늘고 있다.

이와 함께 북한은 단군을 추앙하는 대종교 등 '토착종교'를 재평가하고, 남북간 민족종교 교류에도 큰 관심을 두고 있다. 이들 종교가 민족 내부에서 발생한 토착종교로 민족애를 지니고 있는 종교라는 평가다. 대종교의 창시자 나철 대종사에 대해서는 "강직한 민족주의자였으며 반일애국지사"였다고 평가한다.

특히 북한은 민족종교가 자신들의 정치사상과도 크게 충돌하지 않는다고 인식하는 듯하다. 천도교나 원불교에서 표방하는 '물질개벽, 정신개벽' 표어에 공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북한이 민족종교계에서 성지로 규정하는 묘향산 단군사(1995년)와 구월산 삼성사(2000년)를 복원한 것도 남북교류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북한 당국의 인식과 정책 전환에는 남북 불교·민족종교계의 교류가 큰 몫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007년 5월 묘향산 보현사를 방문한 남측 스님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청운 주지 스님. 분단이후 북측 스님들의 외관상 변화가 잘 드러나고 있다.

교류 거점 통해 성지 순례, 교류 사업 추진
남북 종교교류의 진전 속에 2000년대에 들어와 불교계는 북한 포교를 위한 두 개의 거점을 마련했다. 천태종은 2005년 개성 영통사를, 조계종은 2007년 금강산 신계사를 중창 복원하고, 두 사찰에서 남북 합동행사를 진행한 바 있다. 두 사찰은 남북관계 경색으로 끊긴 불교교류를 다시 잇는데도 중심에 서 있다.

조계종은 신계사 템플스테이관 설립을 중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고, 금강산관광 재개와 맞물려 정기적으로 불교신자들의 신계사 방문을 성사시킨다는 구상이다. 천태종 역시 영통사 템플스테이 사업과 천태종의 개창조인 의천 대각국사의 열반 다례재 재개를 추진하고 있다. 태고종은 금강산 유점사 복원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불교계 외 민족종교계는 그동안 대북 인도적 지원에 동참하고, 남북 공동행사에 참석하며 남북교류를 모색했다. 특히 2002년 평양 단군릉에서 처음으로 남북이 함께 하는 개천절 행사를 성사시켰다. 이 행사에 남쪽에서는 원불교, 천도교, 대종교 등 다양한 종교계 인사 100여 명이 참석했다. 민족종교계는 2005년 이후 중단된 개천절 남북공동행사를 재개하고, 백두산, 구월산 삼성사, 평양 숭령전 등을 방문하는 '성지 순례'를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5월 '남북교류 원불교 선포식'을 연 원불교는 '통일교화 기반조성'이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교정원에 통일부원장 직제를 신설했다. 통일시대가 점점 가시화됨에 따라 전략적으로 교화거점 확보와 교화시스템을 마련하겠다는 구상이다. 교화거점으로는 현재 터만 남은 상태인 개성교당의 복원이 최우선 순위에 올라있다. 원불교측은 북한의 조선종교인협의회, 조선불교도연맹 등을 통해 수차례 개성교당을 복원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긍정적 답변을 얻어놓은 상태다.

교류의 거점을 마련하고, 정기적인 방문과 순례를 통해 포교의 폭과 깊이를 넓혀간다 게 불교와 민족종교계가 구사하는 대북 포교정책의 핵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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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북한 바로알기 4/ 천주교와 개신교의 남북교류와 선교정책

정창현 소장
승인 2019.09.17
호수 1951


인도적 지원과 교류를 통해 천주교계는 북한 내에서
북측 카톨릭협회의 정치적 위상을 높였고,
북측 당국의 신뢰도 얻을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지속적인 지원과 접촉을 통해
자연스럽게 북한 선교의 기반을 다져나가고 있는 셈이다.

기독NGO들은 2000년대에 들어 긴급구호 수준에서 벗어나
북한 식량난의 근본적 해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2012년 11월 방북한 (사)평화3000 운영위원장 박창일 신부가 평양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한 후 성체를 신도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박 신부는 천주교 사제 가운데 가장 많이 북한을 방문했으며 평양의 장충성당에서 100차례 미사를 집전했다.

[원불교신문=정창현 소장] "교우들은 천주께 어린양들을 위하여 하루 빨리 훌륭한 사제를 보내주시기를 간절히 빌어야 한다." 북한이 발간한 교리서 〈천주교를 알자〉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정치적 목적이든, 종교적 목적이든 공식적으로는 북한이 천주교 사제가 없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사제를 보내주시도록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천주교계, 북한에 사제 파견 추진
현재 북한에는 성직자나 수도자가 없다. 그 동안 방북했던 남쪽 신부들의 전언에 따르면 북한의 조선카톨릭협회는 교황청에서 정기적으로 사제를 파견해 주면 본인들이 예비신자들을 모아서 교리를 가르치고, 사제들이 와서 세례를 주면 좋겠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고 한다. 실제로 조선카톨릭협회는 해외 천주교 단체와 교류를 하면서 비공개적으로 사제를 양성할 계획을 추진한 사례가 있다. 과거 동독과 중국, 일본, 홍콩 등의 천주교회에 2~3년 짧은 기간 동안 신학을 공부시켜 사제를 양성할 수 있는지 문의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나 다른 해외 천주교 단체에서 평양이 서울대교구 관할이기 때문에 서울대교구 교구장에게 문의하면서 거절해 진척을 보지 못했다.

2015년 12월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민족화해 주교특별회원회 주교 5명과 사제들, 주교회의 실무진 등 17명이 장충성당을 방문했다. 당시 남북의 천주교 대표들은 매년 주요 대축일에 평양 장충성당에 사제를 파견해 정기적으로 미사를 봉헌하는 것에 합의를 봤다. 하지만 그동안 남북관계가 단절돼 합의 이행이 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앞서 천주교계는 1995년 뉴욕에서 최창무 주교 등이 당시 북한의 장재철 위원장과 첫 공식 만남을 계기로, 1998년 최창무 주교가 서울대교구민족화해 위원장의 자격으로 방북해 두 차례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남북교류의 물꼬를 텄다. 이후 서울대교구와 북한 천주교회는 계속 교류를 유지했다. 다만 이때는 북한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이었기 때문에 종교 교류라는 측면보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북한을 지원하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이러한 인도적 지원과 교류를 통해 천주교계는 북한 내에서 북측 카톨릭협회의 정치적 위상을 높였고, 북측 당국의 신뢰도 얻을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지속적인 지원과 접촉을 통해 자연스럽게 북한 선교의 기반을 다져나가고 있는 셈이다.

현재 천주교계의 가장 큰 바람은 교황의 방북이 성사되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교황청 공식 방문 당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북한을 방문해 달라는 김정은 위원장의 구두 초청을 전달한 바 있다. 당시 프란치스코 교황은 "북측으로 부터 서면으로 된 공식 초청이 있으면 명확히 답변드리겠다"며 답변을 유보했다.

이기헌 천주교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장은 최근 〈카톨릭신문〉과 인터뷰에서 "교황님께서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공식 초청이 있으면 북한을 방문할 수 있다는 언질을 주신 만큼 우리 한국교회가 일치 속에서 교황님 방북이 성사되도록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하고 교회 밖에서도 적극 나서야 합니다"라며 "평화의 사도로서 교황님의 역할은 지금 이 시점에서 엄청나게 클 것이라 생각합니다"라고 밝혔다.

올해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되면서 교황의 방북설도 수그러들었지만 6월30일 남북미 정상의 판문점 회동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찬사를 보내고, "평화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해 북미관계의 진전에 따라 교황의 북한 방문 추진에 다시 힘이 실릴 가능성이 주목받고 있다.
북측신자들이 남측과 해외 개신교계의 지원으로 개축한 봉수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개신교계 통합적 대북인식·선교전략 필요
한국 개신교계도 그 동안 통일과 북한 선교를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왔다. 개신교계는 1990년 한기총이 모은 '사랑의 쌀' 1만 가마니(800t)를 북측에 보낸 것을 시작으로 남북관계가 화해와 경색을 오가는 가운데서도 인도적 지원의 끈을 놓지 않았다. 개신교계의 첫 쌀 지원 시점은 1989년 3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이던 문익환 목사가 정부의 허가 없이 북한 초청으로 방북한 뒤 돌아오자마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될 정도로 남북 간 분위기는 험악할 때였다.

남북 교회 간 교류 역시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주선으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그련)을 제3국에서 만나는 수준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한기총의 대북 인도적 쌀 지원은 보수와 진보 할 것 없이 북한 지원에 나서도록 하는 기폭제가 됐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으로 화해기류가 급물살을 타면서 주요 교단들은 대북 교류와 지원에 직접 나서기 시작했다. 2001년 기독교대한감리회는 1995년 문을 닫은 평양신학원 재개원을 지원해 분단 이후 처음으로 한국교회의 지원을 받아 북한에서 신학원을 운영하고 목회자를 배출하는 성과를 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은 2005년부터 북한 봉수교회 재건축을 지원해 2008년 헌당 예배를 드렸다. 칠골교회 재건에도 도움을 줬다. 2009년 개교한 평양과학기술대학도 상징적인 성과다. 평양과기대는 수시로 긴장과 대립 국면이 조성되는 남북관계의 특성상 불가능할 것이라고 여겨졌지만 통일 이후까지 멀리 내다보며 운영되고 있다. 특히 기독NGO들은 2000년대에 들어 긴급구호 수준에서 벗어나 북한 식량난의 근본적 해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월드비전이 2000년 평양에 씨감자 개발을 위한 온실을 설치하고 식량 자급에 도움을 준 사례가 대표적이다.
'대북지원사업의 대부'로 불렸던 고 오재식 전 월드비전 회장이 생전에 밝힌 다음과 같은 이이야기는 개신교계의 대북지원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준다.

"북한 사람들에게 굶어죽을 때 도와줬다는 믿음을 줘야한다. 후대에 '정치적 상황이 힘든데도, 자기들이 빨갱이라고 오해받더라도 돕더라. 예수쟁이 말은 믿을 만하더라'는 것을 일화처럼 기억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통일을 위한 투자다." 물론 대북 인도적 지원과 평양 교회 신축과정에서 '북한 교회가 진짜 교회인가' '북한에 참된 신앙이 존재하는가'라는 논란과 비판이 거셌지만 남북 교회는 금강산과 평양 등에서 '한반도 평화와 화해를 위한 기도회'를 열면서 꾸준히 교류를 이어왔다. 이를 통해 북한의 교회와 신앙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고, 상호 이해를 높일 수 있었다. 다만 대체로 한국교회는 주로 흡수통일 모델을 염두에 두고 통일과 선교를 계획했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평화공존'단계에 접어들고, 남북간 종교교류가 이어지면서 북한 선교 모델과 전략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북한 주민은 종교에 대해 반감을 갖도록 교육을 받았고,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선교를 하려면 먼저 반기독교적(anti-Christian) 성향을 친기독교적(pro-Christian)인 성향으로 바꾸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남북관계 진전에 따라 북한의 변화에 따른 전략을 세우는 노력과 함께 각 교파간의 통일적인 대북 선교전략의 뼈대를 마련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통일선교전략'을 실천해 나가야 한다는 성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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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북한바로알기 5/ 남북 종교교류의 전제, 다름의 이해

정창현 소장
승인 2019.10.17
호수 1955

[원불교신문=정창현 소장] 남북 종교교류 대북선교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북한의 현실 북한의 신자들이 처한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남북 종교교류가 단순한 인적교류나 종교상징물의 교환과 같은 외형적 교류를 넘어서 각 종교가 지니고 있는 종교적 영성의 교류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북한사회와의 '다름'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2014년 8월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출국 직전 서울 명동 천주교 서울대교구청에서 한국 종교 지도자 12명과 만난 자리에서 "다른 형제들과 함께 걸어가야 한다"며 "서로를 인정하고 함께 걸어가도록 합시다"라고 강조했다. "서로를 형제로 이해하고 동행하자"는 교황의 당부는 단지 종교간 공존과 협력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남북 종교교류, 더 나아가 대북선교에서도 우리가 가져야할 자세와 원칙이 담겨있다.

2005년 남북공동행사에서 남북의 종교인들이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만남은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해소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첫걸음이다.

북한종교에 대한 이해와 다름의 인정
역사적으로 종교는 인류를 위하여 자비와 평화, 정의를 구현하는데 앞장서 왔다. 그러나 십자군전쟁처럼 종교가 반목·갈등·전쟁의 직접 혹은 간접적 원인이 되기도 했다. 서로를 인정하는 전제인 '다름'을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남북한 종교의 이질화 현상은 심각하다. 헌법에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는 등 북한당국의 종교정책에도 변화가 있었지만 여전히 북한 일반주민들의 종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바뀌지 않고 있다. 더구나 과거 종교인들이 불순분자로 분류되어 사회적 불이익을 당하거나 핍박을 받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북한주민들은 종교에 대해 언급하는 자체를 꺼린다.

북한의 종교는 공식적으로 장충성당, 봉수교회 등에서 보는 예배 외에는 개인 혹은 소규모 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는 처소예배를 기본적인 형태로 한다. 이들은 대부분 과거 세례를 받았거나 종교활동을 한 경험이있는 노년층이다. 북한 당국은 종교활동에 폐쇄적이며 다양한 종교교류를 추진하는데 매우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다만 종교교류의 국내적 파급효과를 최소화하면서 그동안 손상된 국가의 이미지를 회복하고 대외관계를 개선하는데 신중하게 활용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방적인 대북 전도, 성경책 보급 등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남북 종교교류, 대북선교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북한의 현실, 북한의 신자들이 처한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남북 종교교류가 단순한 인적교류나 종교상징물의 교환과 같은 외형적 교류를 넘어서 각 종교가 지니고 있는 종교적 영성의 교류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북한사회와의 '다름'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70년 넘게 역사적으로 형성된 '다름'
미국 국방장관을 역임했고, 클린턴 행정부에서 대북정책조정관을 맡아 북한과 협상을 했던 월리엄 페리(William J. Perry)는 과거 북미협상의 실패 요인이 "북한을 있는 그대로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북한과의 협상 테이블에서 "북한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대하려고 노력했다고 회고했다.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보고자 한 그의 태도는 곧 자본주의 경험이 없는 북한의 '다름'을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

분단 70년이 넘는 세월, 1945년 처음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38선이 그어질 때만해도 분단이 이렇게 오래 갈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분단 후 남과 북은 다른 체제와 이념,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여전히 언어와 정서라는 측면에서 '같음'을 공유하고 있지만 70년을 넘게 떨어져 살면서 가치관이나 생활방식 면에서는 많은 '다름'이 나타났다.

해방 후 미군이 진주한 남쪽에는'미국식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수용돼 '개인'과 '시장경제'가 최상의 가치로 자리 잡았다. 반면 소련군이 진주한 북쪽에는 '인민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수용되어 '집단주의'와 '계획경제'가 핵심 가치로 자리 잡았다. 세월이 흘러 서로의 체제가 안착되고,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의 경험을 공유한 세대가 사라지면서 이제는 만나도 낯설기만 하다. 더욱이 전쟁과 냉전의 시기를 거치면서 장기간에 걸쳐 적대의식이 뿌리를 내렸고, 남과 북은 서로를 비난하는데 익숙해졌다.

자본주의 생활방식에 익숙한 남쪽 사람들은 북녘을 방문해도 사회주의 삶에 익숙한 그들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남녘을 방문한 북쪽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남과 북의 생활방식이 다르다고 해서 상대방이 잘못됐다는'틀림'의 시각으로 서로를 보면 대화와 교류가 어렵게 된다. 서로간의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의 만남과 교류, 토론을 통해 접점을 마련해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북한의 정치체제는 '다름'의 차원을 넘어 논란과 불가의 대상이지만, 중국의 정치체제와 비교해 보면 또 다른 차원의 '다름'이다.

남과 북 사이 '다름'의 핵심은 집단주의 생활방식이다. 개인주의 생활방식에 익숙한 남쪽 사람에게 개인의 소유와 자유가 제한된 북한의 집단주의는 참 다가서기 어려운 '다름'이다. 다만 한국전쟁이후 사회주의제도가 정착되고, 그것이 2세대에 걸쳐 내면화 된 역사를 고려한다면 일정 정도 이해가 되기도 한다.

1950년부터 3년간 전개된 전쟁 동안 북한 전역은 폐허로 변했다. '구석기시대'로 돌아갔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북한은 1946년에 토지개혁으로 나눠준 토지를 농업협동화를 통해'협동조합'(후에 협동농장)에 귀속시켰다. 전 사회적으로 집단주의 생활방식이 정착되는 결정적 계기였다.

1950년대에는 사회주의제도가 정착되면서 사회주의와 집단주의에 맞는 사상과 문화, 생활방식이 주민들 사이에 보급되고 식량배급제가 정착됐다. 이후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 모든 분야의 운영구조도 집단주의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주민의 일상화된 조직생활, 국가가 주민의 의식주생활을 보장하는 체계가 자연스럽게 들어섰다. 당연히 주민들의 생활과 사고도 변화했다. 북한은 유치원 다니는 어린 시절부터 일상생활에서 개인주의, 이기주의를 버리고 집단주의 원칙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도덕적 덕목으로 가르쳤다. 이를 통해 사회 전체를 하나의 가정으로 보고 수령-당-인민의 관계를 아버지-어머니-자녀의 관계와 같다고 하는 '사회주의 대가정론'이 자리를 잡았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란 구호 아래 먼저 국가와 집단의 이익을 우선하는 집단의식이 자리 잡았다. 북한 당국의 탄압도 있었지만 이러한 집단주의적 가치관과 생활 속에서 종교는 뿌리내리기 쉽지 않았다. 오히려 주체사상이 지도사상인 동시에 종교의 영역까지도 떠맡고 있다.

10만명이 참가하는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은 북한의 집단주의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행사다.

북한사회의 변화를 촉진해야 한다
종교분야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남북한 사이의 '다름'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영역이다. 그동안 남한 종교계는 대북 인도적 지원과 제한된 범위에서 남북 종교교류를 해왔지만, 내면적으로 '다름'을 인정하기보다는 북한의 근본적인 개혁이나 북한 체제 붕괴론이라는 틀에서 사고했다. 그러나 '시한부종말론'처럼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북한붕괴론은 여러 대북 전문가들이 지적해왔듯이 객관적 현실이 아닌 주관적 사고틀이다. 북한체제의 종말에 모든 것을 걸고 현실을 팽개치는 태도일 뿐이다. 실제로 김정은체제 출범이후에도 북한이 붕괴하고 있다는 객관적 증거는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북한이 하나의 실체로 인정된 상황에서 종교계도 '다름'을 수용한 전제하에서 종교교류를 준비하고 추진해야 한다.

한반도는 안보패러다임이 평화패러다임으로 바뀌는 전환기에 와 있다. 종교계 안에서도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하고 오히려 종교계가 앞장서 평화 패러다임을 교육하고 실천해야 할 시점이다.

사도 바울은 '심판과 해방의 날'이 한밤의 도둑처럼 느닷없이 닥쳐 올 것이기에 인내하면서 항상 깨어 있으라고 했다. 그러나 북한체제 붕괴나 통일은 도둑 같이 오지 않는다. 먼저 종교계가 장기적으로 남과 북의 '다름'을 인내하고 해소하며, 북한의 변화를 촉진하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진정한 남북 종교교류가 가능해 진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앞으로 북한 내의 종교지형은 북한사회의 전반적 변화의 속도와 범위, 수준에 따라 변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점진적으로 남북 간에 공유할 수 있는 종교와 문화를 서로 교류하여 문화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상호간의 깊은 이해와 신뢰가 이루어 질 때, 새로운 평화와 화해의 시대를 개척하는 데 종교계가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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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북한바로알기 6/ 김정은 시대 북한의 변화

정창현 소장
승인 2019.11.14
호수 1959



북한의 모든 기관, 학교, 기업, 협동농장에는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는 내용의 구호가 걸려 있다. 김일성종합대학 정문 건너편 사진.

[원불교신문=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북한은 지난해 11월 <라선경제무역지대 살림집 판매 및 리용규정>을 마련해 나선경제특구 지역에서 주택의 판매와 교환을 법제화했다. 이에 따라 나선경제특구에서 국가소유 주택을 거주중인 주민에게 유상으로 판매하는 ‘주택사유화’ 정책이 실시됐다. 노동자 주택의 경우 평방미터(㎡)당 0.7달러에 판매해 ‘구매권증’(주택권리 증명서)을 발급했다. 이와 함께 신규 건설 주택, 재건축 주택의 일부를 주민들에게 판매(분양)하고, 경제력을 갖춘 층들이 합법적으로 주택을 ‘교환’해 실제적으로 살 수 있도록 합법화했다.

2001년 11월 3일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앞으로 식량과 소비상품문제가 풀리면 근로자들이 자기 수입으로 식량도 제값으로 사먹고, 살림집도 사서 쓰거나 온전한 사용료를 물고 쓰도록 하여야 합니다”라고 주택판매 구상을 밝힌 지 17년 만이다. 비록 나선경제특구에 시범적으로 시행됐지만 북한사회에 불고 있는 ‘거대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조치다.


북한사회와 주민의 사고방식 변화
국제사회의 관심이 북한의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쏠려 있는 사이에 북한사회는 지난 10년 동안 많이 달라졌다. 우선 정책적 방향을 보여주는 구호가 바뀌었다. 북한은 ‘지식경제시대’에 맞는 경제건설을 표방하며 ‘세계적 추세’와 ‘실리 추구’를 강조하고 있고,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는 구호가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는 구호로 바뀐 지 오래다. ‘눈은 세계를 보라’는 구호는 단순히 세계적인 것을 받아들인다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기존의 사고방식을 바꾸고, 모든 분야의 변화를 이끄는 기준점이 되고 있다.

둘째로 과거로 되돌아가기 어려울 정도로 ‘시장’의 역할이 커졌다. 2003년 ‘농민시장’이 ‘종합시장’으로 합법화된 뒤 현재 북한 전역에는 500개 정도의 ‘종합시장’이 들어섰다. 기능적으로도 소매시장, 도매시장, 금융시장, 노동시장, 부동산시장 등 분야별로 시장이 형성됐고, 최근에는 온라인시장(‘전자상업 봉사체계’)도 활성화되고 있다. 또한 2009년에 문을 연 ‘광복지구상업중심’을 시작으로 대형 슈퍼마켓과 체인점 등이 들어서면서 유통망이 다양화되고 있다.

셋째로 기업과 협동농장의 자율성이 확대됐다. 북한은 중앙의 계획 지표를 축소하고 자율 지표를 확대해 경제주체의 독자성을 강화했다. 북한에서는 새로운 경제관리방식을 ‘사회주의 기업관리책임제’라고 명명했다. 경제주체들이 “실제적인 경영권을 가지고 기업활동을 창발적으로 하라”는 것이다. 기업관리책임제가 도입되면서 북한에서도 ‘경영전략’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각 공장·기업소별로 임금 및 소득 격차를 인정하고, 실질적으로 독립채산제를 강화하다보니 기업의 경영전략이 중요해진 것이다. 이것은 계획경제의 전통적 방식과 달리 기업의 경영전략을 중시하는 ‘경영학적 방식의 도입’을 고려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변화로 평가된다.

북한은 과거의 평균적인 분배정책도 변화를 꾀하고 있다. “일한 것만큼, 번 것만큼 분배”한다는 분배원칙에 따라 계획목표를 초과 달성해 더 많은 수익을 거둔 기업소와 협동농장들은 그에 상응한 분배를 받기 시작했다. 또한 2013년 해외 투자유치와 기업들의 수익증대를 위해 경제특구(경제개발구) 설치를 전국적으로 허가했다.

넷째로 개인 컴퓨터와 휴대전화 보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북한 주민들의 일상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북한은 “오늘날 정보과학의 시대, 21세기에는 콤퓨터를 모르는 사람이 콤맹이라 불리며 문맹자로 취급당하고 있다”며 개인 컴퓨터 보급에 나섰고, 주요 도시와 각 공장, 협동농장에 전자도서관을 설치했다. 북한의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는 이메일을 주고받거나 채팅을 하는 것이 일상화됐다.

특히 휴대전화 사용자수가 500만 명(전체 인구의 25%)을 넘어섰다. 북한은 중국처럼 낙후된 유선전화 보급보다는 ‘3세대 이동통신(3G)’으로 바로 넘어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지능형 손전화’라고 불리는 스마트폰 사용자도 빠르게 늘고 있다. 1990년대 후반 북한의 전화 보급대수가 100만대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히 ‘통신혁명’이라고 할만하다. 이제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도 화상통화를 하고, 휴대전화로 신문을 읽는 문화가 정착되고 있다. 이러한 디지털문화의 확산은 주민들의 일상생활과 의식의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고, 사회 전반의 개방 흐름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예견되고 있다.


개혁과 개방은 되돌릴 수 없는 흐름

1990년대 중반 최악의 경제난을 겪은 ‘고난의 행군’시절 북한은 계획경제이면서도 다음해 재정계획을 제대로 세우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대북경제제재 속에서도 시장활동을 통해 먹는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고, 경제개발과 대외개방의 길을 조심스럽게 모색하고 있다. 천정부지로 치솟던 환율과 물가도 몇 년째 안정되어 있다. 아직은 중국의 개혁개방 초기(1970년대 말~1980년대 초)와 비교하면 변화 속도가 느리다. 다만 중국의 개혁개방이 봇물 터지듯 일시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제도의 적용을 받는 지역이 점차 확대된 것처럼 북한도 이러한 방식을 밟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선경제특구에 시범적으로 도입된 주택사유화정책도 궁극적으로는 전국 확대를 목표로 하고 있다.

북한의 변화는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아래로부터의 변화와 ‘세계적 추세’ 수용을 내세운 당국의 정책적 변화가 맞물려 이뤄지고 있다. 김정은시대에 들어와 해외 파견, 교류, 유학 등을 통해 해외문화를 접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북한의 생활문화와 사고방식에서도 뚜렷한 변화가 나타났다.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는 김정은 위원장의 2012년 첫 공개연설은 북한이 향후 경제건설에 주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를 위해서는 ‘시장경제적 요소’의 도입과 대외개방이 불가피하다. 특히 1990년대 후반 북한의 3~4세대들은 ‘고난의 행군’이라는 혹독한 경제난을 경험한 만큼 경제 재건에 대한 열망 또한 크다.

남북 간 실질적인 종교 교류는 북한의 종교정책 변화와 맞물려 있다. 큰 틀에서 보면 북한의 인권정책과도 긴밀히 연결돼 있다. 과거 북한은 외부의 ‘개혁 개방’, ‘종교 자유’, ‘인권 개선’ 등의 요구에 대해 ‘사회주의체제를 붕괴시키려는 시도’라고 반발했다. 그러나 북한도 사회변화에 따라 ‘경제개혁과 개방’이란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2012년 6월2일 <로동신문>은 이례적으로 ‘지금은 밖에서 밀려오는 적이 무서운 게 아니라 사회주의 요람 속에서 성장한 일꾼(간부)의 관료화·귀족화가 문제’라고 비판했다. 과거 북한 내부의 어려움을 외부(주로 미국) 탓으로 돌리던 관성에서 벗어나 내부의 문제점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셈이다. 이러한 북한사회의 변화를 정확히 분석하고, 북한 주민들의 변화를 더욱 촉진해야 실질적인 남북 종교교류의 새로운 가능성도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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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북한 바로알기 7/ 김정은 위원장은 왜 첫 개혁조치로 교육을 선택했나

정창현 소장
승인 2019.12.18
호수 1963


교육개혁

북한의 대표적 수재학교인 평양제1중학교 학생들이 컴퓨터를 활용해 영어수업을 하고 있다. 북한은 2008년 9월 학기부터 컴퓨터와 영어과목을 소학교 3학년부터 정규과목으로 개설해 교육하기 시작했다.

지식경제시대에 맞는 인재양성 표방
“교육부문에서는 지식경제시대의 요구에 맞게 교육의 내용과 형식, 조건과 환경을 높은 수준에서 보장해나가야 한다.”

2012년 김정은체제 출범 첫 해인 2012년 1월1월 신년 공동사설을 통해 북한은 대대적인 교육개혁을 예고했다. ‘사회주의 문명국 건설의 요구에 맞게 교육사업에서 혁명적 전환을 일으키자’는 취지였다. 다섯 달 뒤 김정은 위원장은 평양 창전거리에 새로 건설된 창전소학교와 경상탁아소, 경상유치원 등을 시찰했다. 창전소학교는 20개의 교실과 각종 실험실, 컴퓨터실, 외국어학습실 등 현대적인 교육시설들이 갖춰 교육개혁의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는 시범학교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2012년 9월25일 북한은 최고인민회의(남쪽의 국회에 해당) 제12기 6차회의를 열고 ‘전반적 12년제 의무교육을 실시함에 대한 법령’을 전격적으로 채택했다. 김정은체제 출범 후 처음 열린 최고인민회의의 첫 번째 법령은 외부의 예상을 깨고 교육개혁을 단행하는 조치였다. 이에 따라 편제상 소학교과정이 4년에서 5년으로 1년 연장됐고, 중학교과정이 초급중학교와 고급중학교로 분리됐다. 이로써 북한의 교육학제는 유치원(2년)-소학교(5년)-초급중학교(3년)-고급중학교(3년)으로 변화됐다. 내용적으로도 교육방법과 교육과정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개편작업이 이뤄졌다.

교육개혁의 목표는 지식경제강국을 건설하기 위한 과학기술분야 인재양성에 초점이 맞춰졌다. 학생들에게 수학, 물리, 화학, 생물과 같은 기초과학분야의 일반기초지식을 교육하는데 기본을 두면서 컴퓨터기술교육, 외국어 교육을 강화하는 방향이다. 정보화와 국제화에 대비하기 위한 포석이다. 지난해 개정된 북한 사회주의 헌법에는 ‘전민 과학기술 인재화’(40조), ‘국가는 교육을 통해 유능한 과학기술 인재 육성을 추구한다’(46조), ‘과학연구부문에 대한 국가적 투자를 증대한다’(50조)는 내용이 추가됐다.


“과학기술은 나라의 경제발전을 추동하는 기관차”
김정은정권이 서둘러 교육 개혁을 단행한 이유는 크게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자녀교육에 관심이 높은 학부모의 지지를 끌어내는 ‘대중적 리더십’을 보여주려는데 목적이 있다. 북한은 공식적으로 ‘교육에 대한 요구가 비할 바 없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지만 실제로는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시절에 흐트러진 교육체계를 전국적으로 정상화 하는 게 시급했다. 북한은 심각한 경제난에 봉착하면서 학생들에게 교과서와 교복, 학용품 등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교원들에게 생활비 지급과 식량배급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불가피하게 북한은 일반교육보다는 수재교육에 힘을 쏟는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수재학교에 입학하지 못하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도 어려워졌다. 당연히 대다수 학부모들의 불만이 커졌고, 이를 완화하는 정책이 시급했다.

둘째는 세계적 추세에 맞는 인력양성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경제건설에 필요한 인력자원(인재 양성) 문제를 하루속히 풀지 않으면 4차 산업혁명(북한에서는 ‘새세기 산업혁명’이라고 부름)시대의 요구에 맞게 정책을 이끌어갈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다. 이에 따라 북한은 최근 “과학과 기술의 시대인 오늘날 국력경쟁은 곧 과학기술 경쟁”이라고 “현시기 모든 분야에서 과학기술의 발전은 가장 선차적이면서도 사활적인 문제”라며 과학기술 인재 양성을 강조한다.

셋째는 청소년 학생들에게 실천(현장)에서 써먹을 수 있는 산지식을 교육하기 위한 것이다. 북한은 최근 노동당의 사상에 이어 현대 과학기술을 소유하는 것이 제2의 필수적인 실력이라고 강조한다.

과학기술을 당의 사상 다음으로 높은 자리에 상정한 것이다. 과거 사상 중심의 교육, 교과서를 통한 딱딱한 이론 교육으로 학생들의 창의력이 떨어졌다는 반성에 기초한 방향전환이다. 이에 따라 북한은 각 도에 11개의 ‘정보기술고급중학교’를 신설했다. 이것은 정보통신기술(ICT) 분야 인재 양성을 위한 일종의 ‘특성화고’ 개념을 확대·도입한 것으로, 정보화시대에 맞게 ‘산지식’을 갖춘 인재 양성과 함께 지역 인재 양성을 위한 조치로 볼 수 있다. 또한 황해제철연합기업소, 김책제철연합기업소, 김정숙평양제사공장 등 20여개 기업에 금속공학 과목을 비롯한 전공 및 전공기초과목의 현장실습을 위한 실습거점도 마련됐다.

전반적으로 북한 교육정책의 방향전환은 정보화시대로의 변화, 국가발전전략에서 과학기술의 중요성, 북한 체제의 안정화 등의 정책 환경을 고려하면서 교육정책의 무게중심이 정치사상교육보다 과학기술교육 쪽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학기술이 나라의 경제발전을 추동하는 기관차”라는 선전구호는 이를 상징한다.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공허한 구호일 뿐
새로운 교육정책 방향에 따라 북한은 다양한 고등교육 제도 개편을 단행했다. 우선 종합대학이 증설되고, 대학의 성격에 따라 학과 구조와 교육과정을 개편했다. 2012년 이전에 북한에서 종합대학은 세 개에 불과했으나, 단과대학 통합, 지역별 종합대학 신설 등의 방법으로 종합대학 증설이 추진되어 종합대학이 10개 이상으로 늘어났다. 또한 대학 유형을 ‘연구형 인재 양성기관’과 ‘실천형 기술인재 양성기관’으로 구분해, 각각의 특성에 맞게 학과와 교육과정을 조정했다. 기존의 2~3년제 전문학교는 대학에 통합하거나 ‘실천형 기술인재 양성기관’인 직업기술대학으로 전환됐다.

원격교육과 ICT 활용교육도 확대됐다. 2007년 김책공업종합대학 원격교육센터 설립을 기점으로 시작된 컴퓨터 네트워크 기반 원격교육(온라인강의)은 김정은시대 들어 ‘전민 과학기술 인재화’의 주요한 수단으로 격상되면서 더욱 확대됐다. 이에 따라 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 외국어대학 등 주요 대학에 원격교육대학이 설치되고, 주요 공장·기업소 근로자들이 원격으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됐다.

특히 올해 들어서는 37개의 대학에 정보보안학과, 나노재료공학과, 로봇공학과 등 정보화와 첨단과학 분야의 학과 75개를 신설했고, 김책공업종합대학에 미래과학기술원을, 김일성종합대학에는 첨단기술개발원을 건립했다. 대학 내에 대규모 과학기술 연구개발(R&D) 단지를 설치한 것이다.

김정은시대 북한은 ‘세계적 추세’와 ‘실리’를 강조하고 있지만 결국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공허한 구호일 뿐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미래의 인재 양성에 투자를 늘리고 있다. 지난해 4월 노동당 제7기 3차 전원회의에서는 ‘경제건설 총력 집중’으로 국가전략노선 전환을 선언하면서 “과학으로 비약하고 교육으로 미래를 담보하자”는 구호를 제시했다. 여전히 북한의 교육과정에서 정치사상교육이 차지하는 비중은 높지만 변화의 흐름은 돌이킬 수 없는 대세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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