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09

Artworks in Nor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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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works in North Korea

이 름 IACO (110.♡.13.26)
날 짜 2010-09-13 03: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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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김관호, 유화, 여인상, 1960년대작, 필자 소장.





남한은 1960년을 기점으로 근대(近代)와 현대(現代) 미술을 구분한다. 미술사(美術史)의 흐름을 이런 연대기(年代記)를 들이대 구분한다는 것 자체에 한계가 있지만, 그 배경에는 다양한 관점이 논리적으로 동원된다.

1960년대는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요소다. 6·25전쟁을 통해 남한사회에선 근대가 해체되고 ‘미군(美軍) 문화’로 불리는 새로운 문화가 싹텄기 때문이다. 6·25전쟁 이후 재건(再建) 사업에 치중하면서 시장문화의 전문가 집단인 장인(匠人)들에게 문화의 중심축(軸)이 넘어가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런 시대적 변화 속에서 각 대학의 미술대학에 속해 있던 ‘한국화과(韓國畵科)’가 문을 닫고, 종래 ‘서양화과(西洋畵科)’로 불리던 장르만이 우리 것인 양 활개를 치는 기현상마저 생겨났다. 일본이 일본화(日本畵)를 기본으로 서양문화를 수용하고, 중국이 자국 문화의 우수성을 드러내는 일에 가치를 두어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1960년을 근대와 현대를 구분하는 기점으로 삼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때 추상화(推象畵)가 본격적으로 도입됐기 때문이다. 고희동(高羲東·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나 김관호(金觀鎬·고희동과 함께 서양화를 개척) 등 일본 유학파들이 이루어 놓았던 작품의 대부분이 구상미술(具象美術·눈에 보이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미술) 계열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추상화가 한국 화단(畵壇)을 휩쓸었고, 현재 한국 화단은 정점(頂點)에서 새로운 미적 탐구로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전환기에 와 있다.

한국인의 의식구조 밑바닥에 남아 있는 식민시대에 대한 저항이었을까? 일제(日帝)라면 무조건 나쁜 것으로 치부해 버리거나, ‘레드 콤플렉스’에 젖어 북한과 관련된 것은 모조리 거부하는 심리가 근대에 대한 올바른 해석마저 불가능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현대’가 없는 북한미술

홍익대 미술대학장이었던 김환기(金煥基)가 브라질 상파울루 국제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뉴욕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던 부끄러운 이야기도 이제는 과거지사(過去之事)가 됐다.

미군부대에서 군인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식솔(食率)의 의식주를 해결하던 박수근(朴壽根)도 더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양주 몇 병에 이중섭(李仲燮)의 은박지 그림을 셀 수 없이 건네받았던 그레고리 헨더슨이 지붕에서 미끄러져 죽은 지도 20여 년이 흘렀다.

미국 입국 비자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웠던 시절, 어렵사리 얻은 경유지 비자로 뉴욕 맨해튼에서 실크 넥타이에 그림을 그려주며 생계(生計)를 유지하고 인생 막바지에 새로운 도전을 경험했던 김환기의 화제(畵題) 그대로 ‘그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듯’, 한국 미술 역시 그 무엇을 위한 날갯짓을 과감히 해야만 하는 반전(反轉)의 시기를 맞고 있다.

가난을 벗어난 한국이 일본과 미국의 식민지가 아닌 것처럼, 세계 속에 한국 미술과 영혼을 드러낼 무대를 만들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마치 헤겔이 주장한 정반합(正反合)의 역사적 흐름에서 한국은 앞으로 구상과 추상을 아우르는 새로운 변화를 목전에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구상을 근대로, 추상을 현대로 가르는 이분법적인 지난 세기가 이제는 새로운 합일(合一)을 찾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문인화(文人畵)와 수묵(水墨)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종래의 모사(模寫)에 충실했던 근대적 작품들의 한계를 벗어보고자 나타난 흐름이 추상이었다면, 추상 속에 내재된 본질과 표현 양식에 있어서의 한계를 극복해야 하는 또 다른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한의 미술을 비교하면 흥미 있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남한 미술은 근대가 없고, 오로지 현대적인 것만 생존의 가치를 부여받았고, 북한 미술은 현대가 공존할 공간이 전혀 없는 근대적 형태로 기형적(畸形的) 성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술이나 예술의 존재이유가 전제적 사회주의가 갖는 대중동원, 체제 옹호를 위한 선전에 있기 때문이다. 지난 60년 동안 체제와 사고면에서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 북한 미술의 특성이요, 신비감일 뿐이다.


金正日에게 바친 도올의 泣訴

2007년,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을 따라 평양 방문 길에 나선 도올 김용옥(金容沃)은 만수대창작사를 둘러보고 온 후일담(後日談)을 “북한 미술, ‘주체적 여백(主體的 餘白)’ 허락하소서!”라는 칼럼으로 적었다.

<사실의 바탕이 없는 추상도 엉터리지만, 추상의 인식이 없는 사실도 엉터리지요. 하물며 작가의 풍요로운 해석이 결여된 화풍(畵風)은 사실이 아니라 좀 자세한 사생(寫生)에 불과합니다.

더구나 북한 그림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원칙을 버렸습니다. 양식적 다양성을 추구할 수 있을 때만이 북한의 그림들이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국익에 도움되는 외화벌이가 된다는 것을 일러주려는 것뿐입니다.

중국 현대미술의 발전상을 참고하십시오. 내 눈에 비친 북한 그림은 솔직히 말씀드려 옛날 ‘이발소 그림’의 정교한 형태입니다. 김정일 위원장께 비옵나이다. 화가들에게 다양한 화풍과 다양한 주제를 추구할 수 있는 주체적 여백을 허락하시옵소서.>

북한 그림에는 작가가 숨 쉴 공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북한 미술품이 옛날 ‘동네 이발소’ 수준이라는 것이 글의 요지다. 똑같은 그림을 보고 도올은 답답함을 느끼고, 함께 간 문정인(文正仁) 연세대 교수는 “북한 예술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건재한 유일한 예술”이라고 극찬(極讚)했다.

대학시절 철학을 전공했던 두 사람이 바라보는 그림에 대한 시각차는 이렇듯 천차만별(千差萬別)이다. 그래서 파블로 피카소는 “그림을 해석(解釋)하는 것은 그림을 바라보는 관객의 몫”이라고 했다. 화가가 그림을 보는 관객의 사유(思惟)를 강제(强制)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문 교수가 정치적인 의도가 담긴 덕담을 남기고 왔다면, 도올은 북한의 획일화된 전체주의적 화풍에 대해 참을 수 없는 특유의 객기(客氣)를 발동시킨 듯하다.

도올은 김정일(金正日)에게 보내는 글에서 북한의 작가들에게 보다 많은 표현의 자유를 통해 다양한 화풍과 주관적 여백을 살릴 수 있도록 요구했다. 도올이 일제시대나 공산 치하의 북한에 살면서 이런 주장을 겁없이 할 수 있었다면 그는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그러나 사실주의 예술의 한계를 비방하는 것도 도올이 언로(言路)가 자유롭게 보장된 시대에 태어난 은총(?)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제아무리 자유인(自由人)이 되는 게 철학 하는 이들의 특질이라지만, ‘도올의 무소불위적 반골정신이 북한 체제 내에서 과연 가능했을까’하는 물음은 여전한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정관철, 월가의 고용병, 1952년작, 수채화로 그린 밑그림, 필자 소장.


‘주체적 여백’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무렵, 소위 ‘신동아(新東亞) 건설, 성업(聖業) 달성을 위한 총후(銃後·후방)의 정신운동에 기여’한다는 명목 아래 일본군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공군기 헌납 모금 행사에 거의 모든 화가가 동원됐다.

선전(鮮展)에서 이름을 날린 김은호(金殷鎬)와 김기창(金基昶) 등 창덕궁상(昌德宮賞)을 받았던 최고의 화가들이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전장(戰場)으로 나가도록 독려하는 선전화가(宣戰畵家)로 활동했다. 어디 그뿐인가? 시국관이 투철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산수화(山水畵)에 배낭을 짊어진 군인이 등장하는가 하면, 시골 농가의 사립문에 어김없이 일장기(日章旗)를 그려넣어야 선전이나 중요한 작품전에서 입선이나 특선이 가능했다.

사실주의 그림에서 표현의 자유를 거론하는 것은 극히 불필요한 주문이다. 사실주의 그림도 관점에 따라서는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추상화가 인간의 자유정신을 통속적으로 대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자 플라톤은 그의 저서 <공화국(共和國)>에서 추상화를 가리켜 “가까이서 보면 그럴듯하지만 멀리서 보면 사람을 속이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구상도 일반이 이해하기 힘든 작품은 너무나 많다.

전체주의의 속성으로 김일성(金日成) 우상화에 익숙해진 저들의 작품에 속이 뒤틀린 도올의 객기도 객기지만, 세상 일이 어떤 주장이나 의견만으로 규정되지는 않는다. 도올이 읍소(泣訴)한 ‘주체적 여백’이란 다름 아닌 작가의 개성을 존중하라는 것인데, 지도자를 우상화하고 인민 대중을 독려하는 선전(宣傳)에 개성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추상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굳이 헤겔의 역사발전론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남한 역시 수많은 우여곡절과 시행착오를 통해 오늘의 발전을 이룩한 것 아니던가? 북한 사회가 역사의 부침에서 다소 뒤처졌더라도 비난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 사회가 치르고 있는 기회비용(機會費用)이요, 대가일 수밖에 없다. 시인 김수영(金洙暎·1921~1968)의 시, ‘김일성 만세’를 보자.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趙芝薰)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張勉)이란
관리(官吏)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김수영이 김일성을 추종하는 시인이었을 가능성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1960년 살아생전 써 놓았던 이 작품은 남한에서 발표된 적이 없었다. 시인 김지하(金芝河)가 ‘오적(五賊)’을 발표하고 치러낸 대가도 우리 시대의 유산인 것처럼, 북한의 사실주의 작품마저 미래 한국이 안고 가야 할 일그러진 영웅시대의 유산으로 보아야 한다.


수령이 칭찬한 작품은 조선 미술박물관에 영구 소장

1959년 즈음부터 북한의 조선화(朝鮮畵·1953년부터 종래의 동양화를 조선화로 바꿔 불렀다-필자 주)는 종래의 고답적(高踏的)인데서 가시적인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미술 등 모든 예술활동 영역이 혁명과업에 동원되어야만 하는 절실한 과제를 안고 있었다. 남한에서 6·25전쟁 이후 ‘새마을운동’과 계몽적 사상으로 근대화 작업을 해야 했던 절실한 시대적 요구와 맞물렸던 시기였다.

첫째는 표현 기법에서 수묵(水墨) 계열에서 탈피해 채색(彩色)으로 변화해야 하는 것이고, 내용에서 풍경이나 산수화(山水畵) 일변도에서 인민의 삶과 새 나라 건설을 향한 정치적 요구에 반응해야 한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다.

“지난날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보면 채색화는 얼마 없고 거의 다 먹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이는 지난날 조선화가 갖고 있던 중요한 결점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 조선화의 결점을 완전히 없애고 현대적 감정과 정서에 맞게 발전시켜야겠습니다.”(1968년 11차 조선미술전람회 김일성 교시 中)

“조선화 ‘내금강의 아침’이 잘되었습니다. 조선화에서는 색을 연하게 쓰는 것보다 이 그림처럼 좀 진하게 쓰는 것이 좋습니다.”

그림 재간이 있는 초등학교 학생이라면 누구나 모방하기 쉬운 문화춘(文和春)의 ‘내금강의 아침’은 이렇듯 김일성의 칭찬 한마디에 불후의 명작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의 작품 ‘백설강산도’(白雪江山圖)는 문화성의 대회랑을 장식하는 영예를 누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만수대창작사의 벽화실장(壁畵室長)인 박준호가 1978년에 제작한 평양 광복역의 지하철 대형 벽화도 김일성의 극찬을 받았던 작품이다.


문화춘의 ‘백설강산도’, 조선 문화성 소장.

김일성은 “‘삼지연의 새 봄’을 아주 잘 형상하였습니다. 광복역에 들어오니 삼지연에 온 것 같습니다. 광복역에서 사진을 찍으면 삼지연에 가서 사진을 찍은 것이나 같은 것입니다”라고 극찬했다. 양강도의 혁명 전적지(戰蹟地) 삼지연(三池淵)의 봄 풍경을 실감 나게 제작하고 받은 ‘수령’의 칭찬 한마디가 그의 인생을 뒤바꿔 놓았다. 대부분의 국가 전람회에서 현지 교시(敎示)라는 명목으로 툭 내던지는 수령의 의중(意中) 한마디가 우수작과 입상작을 가르는 기준이 되던 시기였다. 수령이 칭찬한 작품은 조선 미술박물관에 영구 소장되는 명예(?)도 안았다.

복고주의(復古主義)를 청산하기 위한 미술분야에서의 사상 투쟁, 북한의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은 이렇듯 수령의 말 한마디로 시작됐다.

노동당은 미술가동맹 지도부에 수묵담채(水墨淡彩)를 채색화(彩色畵)로, 미술을 혁명과업과 조국 건설에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미술로 개조하도록 지시했다. 수묵담채는 민족적 특성을 표현하는 데 있어 일종의 장애요, 걷어내야 할 봉건적 잔재(殘滓)가 된 것이다.

현란한 색채를 싫어하는 점잖은 사대부,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던 선비들의 전유물(專有物)인 문인화(文人畵)는 청산되어야 할 부르주아의 유산이요, 활기찬 인민대중의 삶과는 격(格)이 안 맞는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들은 수묵담채가 인민들의 벅찬 삶을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보았다. 무엇보다 미술가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낡은 관점을 벗겨내야만 한다고 판단, 몇백 년 동안 지속돼 온 산수화의 묘사법과 채색의 반복, 원근처리 등을 무시했다.


문학수·최병식 공동, 1968년작, 수도복구건설노동자들, 조선박물관 소장.


‘고집불통’들은 퇴출, 눈치 빠른 화가들은 고속승진

북한의 문화혁명은 1950년대 말에 불타올라 1965년에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1965년, ‘무산계급(無産階級)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을 채택함으로써 정치투쟁을 통한 정적(政敵) 제거에 나섰던 마오쩌둥(毛澤東)의 전략과는 달리 김일성은 주체 세력 길들이기를 목적으로 문화혁명을 시작했다.

수령의 의중을 재빨리 간파한 화가는 승진에 승진을 거듭했고, 현실적 변화에 둔감한 ‘고집불통’들은 유배(流配)되거나 퇴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이유로 종래의 표현 방식을 고집하는 산수화나 화조(花鳥)는 전시장에서 눈에 띄지 않게 작게 그려지거나 뒷방으로 밀려났고, 인민을 독려하기 위한 선전화가 ‘자랑스런’ 구호와 함께 대형화되는 추세로 반전됐다.

월북 화가 정종여(鄭鍾汝)의 기지(機智)는 이런 데서 빛이 났다. 그는 이론과 사상 투쟁에서 선도적 역할을 했다. 그가 채색화에 대한 수령의 의중을 간파하고 외친 주장은 생존을 향한 변화요, 어쩔 수 없는 현실적 선택이었다.

인민대중은 색을 사랑한다. 건강하고 젊고 씩씩한 빛깔을,
침착하고 점잖은 빛깔을 청산하고 화려한 빛깔을 사랑한다.
채색화―이는 대중에게서 가장 사랑받는 대중적인 그림이다.

리석호(李碩鎬)는 북종화 계열의 채색을 이당(以堂)으로부터 교육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석호도 당(黨)에서 요구하는 채색의 농도(濃度)에는 미흡한 처지였다. 자신이 미술가동맹 조선화분과위원장을 맡게 된 1959년부터 예전의 수묵 담채를 버리고 채색화 기법으로 돌아섰다.

당의 ‘주체적 문예방침’에 따라야 하는 것이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돌이킬 수 없는 생존 방식이기 때문이다. 청전(靑田)의 제자인 정종여가 변신을 하는 마당에 이당 제자인 리석호의 변신은 차라리 식은 죽 먹듯 쉬운 일이었다.

수령의 말 한마디가 화가들의 입맛까지 바꾸는 세상이 된 것이다. 간을 적당히 쳐 국물을 말갛게 만들던 이들이 무조건 고춧가루를 더 넣어서 화려하고 빨갛고 진한 김치찌개를 만들어야만 했다. 문학수(文學洙)처럼 서구적인 변화를 북한 현실에 접목시키려는 노력보다 본인 스스로 접목을 당해야 했던 현상인 셈이다.

“예술은 인민에게 복무하는 것이다. 예술은 인민들과 뗄 수 없는 정신의 양식이다. 인민을 떠나서는 예술이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인 만큼, 인민의 감정·기호에 맞는 작품을 내지 못한다면 자기 임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과거와 달리 풍경, 화조가 한갓 감상용, 장식용에 그쳐서는 안 된다. 사회주의 애국주의 교양에 커다란 긍정적 역할을 드높여야 한다.”

리석호의 자아비판(自我批判)을 보면 이러한 절박한 심경이 나타난다. 리석호뿐 아니라 서울시립대 미술대학장이었던 김용준(金瑢俊) 역시 월북한 이후 이러한 작업 경향과 맞물려 내심 고민하거나 반(反)체제 작가로 인식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특히 전통적인 동양화의 채색을 어떠한 톤으로 유지할 것인가를 놓고 치열한 이론 투쟁을 감당해야만 했다. 소위 수묵담채로 할 것인가, 아니면 채색으로 할 것인가가 주요 쟁점이었다.

1952년부터 1955년 사이 소련 당국에 의해 고문단의 일원으로 평양미술대학을 지도할 책임요원으로 파견됐던 변월룡(邊月龍) 교수에게 보낸 사신(私信) 속에는 이러한 근원의 고민이 엿보인다. 전통 수묵화에 대한 남다른 집념을 갖고 있던 근원이 원군(援軍)을 청하는 대목에선 정치를 모르는 외골수 화가의 고독함이 절로 배어나온다.


채색화의 명작으로 김일성에게 칭찬받아 조선미술박물관에 수장된 문화춘의 작품, 내금강의 아침, 1970년작.


부르주아 형식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

특히 1955년 이래로 북한에서의 주요 전람회에서는 인민의 생활과 강성대국을 지향하는 주제 이외에는 별다른 각광을 받지 못했다. 그림의 내용과 형식에 있어 부르주아 형식을 벗어나야만 하는 강박관념이 그들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었다.

용해공(鎔解工)과 강선 지도사업, 농촌운동 등은 6·25전쟁을 미화(美化)하거나 북한 주민들과 군인들을 격려하기 위한 사실주의적 형상으로 전개해 나갔던 것이다.

혁명적 과업을 주제로 해야 한다는 것, 김일성의 가계를 미화(美化)하거나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도록 만드는 것은 민족 자존을 일깨우는 작업으로 간주됐다.

미술가들은 ‘주체적 사실주의’ 원칙에 기초해 현실적인 삶을 반영한 개성적인 작품을 형상화해야만 했다. 화가들이 꽃과 새, 산수에 안주(安住)하는 것은 ‘부르주아 성향’으로 치부됐다.

“나는 사회주의 건설의 주인공들인 노동자·농민들 속에 들어가 그들의 소박한 내면 세계에 접근, 성장하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인간 성격을 화폭에 담으려 한다. 한걸음 한걸음 정확하고 심오하게 근로자들의 생활에 육박해 그들의 사상·감정·정서를 체득해 꾸준하고 인내성 있게 표현하려 한다.”(종군화가 림맥의 글)

“동무들이 직접 농촌에 와서 농부들과 일도 해보고 농민들의 생활을 연구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야 농민들을 알 수 있고 농민들도 좋아합니다.”(김일성, 노동당 제3차대회 교시 中)

“인민군 전사(戰士)가 승리한 고지 위에 공화국 깃발을 꽂고 목청껏 만세를 부르는 장면을 잘 형상하였습니다. ‘승리’와 같은 조각작품을 많이 제작해야 하겠습니다.”(조규봉의 조각작품을 감상한 김일성의 교시)

“(민병제의) 유화 ‘딸’은 지난날 농민들을 못살게 굴던 지주(地主)의 악착성과 교활성을 잘 나타내었습니다. 생이별을 슬퍼하는 어머니와 딸의 애처로운 표정, 어린이가 우는 모습, 지주의 앞잡이인 마름놈의 거만한 표정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은 보는 사람마다 착취계급에 대한 증오심이 솟구치게 합니다.

이런 그림을 우리의 어린이들에게 많이 보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린이들에게 이런 그림을 많이 보이면 그들은 착취사회의 본질에 대하여 생동하는 표상을 가질 수 있고, 오늘 우리 사회주의 사회에서 자기들이 누리는 행복에 대하여 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1966년 9차 조선미술전람회 김일성 교시 中)


문학수의 드로잉, 할아버지, 필자 소장.


金正日 말 한마디로 復權된 풍경화

인민의 삶에 다가서려는 대중 심리전략의 도구였던 미술 분야에 숨통이 트였던 것은 1972년 무렵이었다.

1972년에 쓰인 <주체미술의 대전성기>에 다뤄진 논문에는 ‘풍경화에서 사람을 등장시키지 않고서도 정치성을 옳게 드러내고 혁명전적지와 절경 풍경화를 그릴 데 대한 방침’으로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자연경치와 민족적 기상을 보여주는 풍경화들과 함께 오늘의 사회주의 조국의 혁명적 기상을 주제로 한 풍경화들을 그려 우리 근로자들을 어버이 수령님과 당 중앙(김정일)에 대한 끝없는 충성심과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로 교양하는 데 이바지하였다’고 적시했다.

즉 ‘아름다운 경치를 누리고 사는 행복이야말로 당과 수령의 은덕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자연 역시 수령님의 위대성을 드러내는 훌륭한 역할을 한다’는 식의 해석으로 풍경화에 대한 해금(解禁)을 단행했다.

1970년 중반부터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풍경화도 일반화와 1 대 1의 비율로 전시되는 모양으로 발전됐다. 국토 자연미와 명승지(名勝地) 풍경이 가져다주는 애국주의적 묘사를 예술적 차원이 아닌 정치적 배려로 용납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3년에 발간된 <조선미술>은 ‘현대 부르주아 형식주의 미술의 주류 추상주의와 그 반동성’에서 북한 미술계에 불고 있는 반동적(反動的) 경향을 경고하고 나섰다. 추상화를 추악한 혁명의 배신자·변절자로 정의하고, 반동적인 부르주아 문학예술이 인민들의 자주의식·혁명의식을 여지없이 파괴·말살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개인주의 봉쇄로 화가들 ‘개인전’ 드물어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존중하는 남한 사회에 비해 북한식 사회주의는 집단적 작업구조로 이뤄진 특성을 지녔다. 채색과 구상을 사실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의 완성을 이루는 첩경(捷徑)으로 보고, 집단제작 형식을 취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혁명적 과업을 드러내거나 우상화 작업을 진행시켰다. 특히 조각이나 선전화(주제화)의 경우, 작가 한 사람보다는 여럿이 함께 제작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소위 사회주의 특유의 ‘집체(集體) 예술’이다. 최근 이러한 집체예술은 아리랑 공연을 통해 더욱 극명하게 나타났다.

2002년 4월, 김일성의 90회 생일을 기념하면서 시작된 아리랑공연은 ‘2012년 강성대국 건설’ 등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퍼포먼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더욱이 김일성이 1994년 사망한 뒤 선군정치를 내세운 김정일의 업적을 찬양하면서 부자(父子) 세습을 정당화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북한이 2000년대 강성대국 건설이라는 모토를 내세우면서 1990년대의 극심한 경제난을 회복하고 있다는 점을 대내외에 과시해 체제유지의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처럼 집체 예술을 동원해 혁명적 과업을 홍보하고 체제 안정을 도모하려는 정치적 의도는 무용과 영화, 문학과 미술 전반에 걸쳐 드러나고 있다.

특히 김일성의 생일인 ‘태양절(太陽節)’과 ‘공화국 창건 기념일’, ‘인민군 창군 기념일’과 ‘김정숙의 생일’ 등 국가적 사업으로 간주되는 특별한 날을 명절로 삼고 이를 기념했다.


평양시 만수대창작사 정문. 김일성 부자의 우상화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북한미술가들이 ‘집체창작’을 하고 있다.

집체 미술은 각급 혁명 유적지와 공공 시설에 김일성 부자의 흉상(胸像)을 세우거나 우상화 작업의 최선봉에서 일을 감당했다. 이를 위해 만수대창작사와 각급 지방 창작사, 중앙 미술 창작사와 인민군 미술 창작반, 평양 미술대학이 동원됐다.

1989년, 만수대창작사 30주년 창립식에는 조각과 유화, 조선화 등 130여 점이 소개됐고, 1982년 김일성의 70세 생일에는 평양 시내 도처에 주체사상탑과 개선문이 건립되기도 했다. 이미 60세 생일 기념으로 건립된 만수대 기념비와 김일성 동상과 더불어 북한에서 대표적으로 소개되는 집체 미술의 본보기로 소개되고 있다.

길진섭(吉鎭燮)은 1961년, 장혁태·최창식 등과 합작해 ‘전쟁이 끝난 강선 땅에서’라는 작품을 완성했고, 1968년 합작품 ‘작전 임무를 주시는 최고사령관 김일성 동지’를 완성했다.

김용준(金瑢俊) 역시 김일성의 위대성을 극대화한 작품 ‘로야령’을 1963년 지달승·리율선·최병균과 합작했다. 임군홍(林群鴻)은 1968년 ‘무장 투쟁을 호소하시는 조선 민족해방 투쟁의 혁명 지도자 김형직 선생님’을 박경란·장하남과 합작했다.

리순종(李純鍾)은 1963년, ‘불이 농장소작 쟁의’를 문학수, 김중윤과 합작했고, 1946년 9월 김일성 대학의 개교식에 모인 학생과 교원 1500명을 그린 ‘어버이 수령의 연설’을 1969년 최철희와 합작으로 완성했다.

그림의 제목이 길어 화제가 된 문학수(文學洙)의 작품 ‘고난의 행군을 승리에로 이끄시기 위하여 3개 방면군을 조직 령도하시는 혁명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최동익, 안창수, 김동용과 함께 1964년 제작한 합작품이다.

그가 1964년부터 10년 동안 미술가동맹 유화분과위원장을 맡게 되다 보니 개인창작보다는 집단창작(集團創作)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입장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채색과 사실주의에 입각한 구상 작품을 근간으로 북한 미술은 주체사상을 본질로 하는 집체 미술의 형식으로 북한식 사회주의의 완성이라는 목표를 형상화하는 데 사용돼 왔다.

개인주의를 철저히 봉쇄한 탓에 황태년과 극소수의 화가만이 개인전의 기회를 얻었고, 35년 동안 미술가동맹 위원장을 맡았던 정관철이 그의 사후 정종여와 2인전을 열었을 뿐이다.


리순종의 주제화, 항일유격대, 1960년작, 필자 소장.


‘누드 그림’은 상상하기 어려워

남북한을 통틀어 화가들 가운데 가난뱅이 처지에서 그림에 대한 집념 하나로 성공한 이로 박수근과 이인성(李仁星), 김중현(金重鉉) 같은 이들을 꼽을 것이다. 원래 그림이라는 것이 집안 번듯하고 먹고사는 일에 궁핍한 게 없어야 가능한 게 아니던가?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 배운 것이 없어 독학으로 그림을 배운 박수근의 입지전적 삶은 그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처절한 생존의 싸움을 겪어야 했을까를 가늠케 한다. 동양화가 묵로 이용우(墨鷺 李用雨)는 처남이었던 김중현의 그림을 가리켜 “가난한 집안이다 보니 김중현의 그림에는 늘 궁기(窮氣)가 끼어 있다”고 했다.

이스라엘 속담에도 ‘재채기와 가난은 감추려야 감출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 가난함이 민중의 아픔과 배고픔을 그린 화가들의 소재가 되어 현실적인 주제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타고난 가난의 때’는 ‘삶의 이끼’와 같아서 때로는 재료(材料)의 빈곤을 드러낸다. 캔버스를 구할 수 없던 시절 쌀자루 마대에 누더기 같은 물감으로 두껍게 그림을 그린 탓에 진한 마티에르(질감) 효과를 낼 수밖에 없었던 박수근처럼 북한에서 나오는 작품들 면면에는 이런 가난한 끼가 넘쳐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이런 이들이 없었다면 목로주점에서 해갈(解渴)하는 서민들과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말라 비틀어진 달동네 인생들의 밑바닥 삶을 어떻게 그려낼 수 있었겠는가? 더욱이 북한의 먹고사는 형편이 궁벽해지다 보니 월경(越境)해서 넘어오는 북의 그림들이 과빈(寡貧)한 흉작(兇作)임을 보게 된다. 심지어는 캔버스는 고사하고 두꺼운 비닐에 그린 그림마저 눈에 뜨인다.

중국에서 북과의 미술교역을 주관하는 이들 역시 물감과 캔버스 등 그림 재료를 북으로 보내주어야만 하는 형편이 되었다. 중국산 저질 안료(顔料)로 그리다 보니 건너온 그림마다 군데군데 물감이 떨어져 나간 흔적이 북한의 궁핍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변월룡에게 보내진 북한 화가들의 편지를 보면 전란 이후 어려운 현실 속에서라도 화가의 집념으로 불타올랐던 1950년대 북한 그림쟁이들의 열정을 보게 된다.

그들은 이미 일제 치하에서 이러한 궁핍을 익히 체험한 사람들이다. 그림을 그리지 않고서는 도저히 못 배기는 예술인으로서의 혼(魂)과 열정은 남과 북,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당시 화가들 모두의 초상이기도 했다. 목로주점에서 탁배기 한 잔에 목을 추기면서도 화가인 것이 자랑스러운 사람들 아니었던가?

그런 이들의 순수함에 응답이라도 하듯 레핀미술대학의 박봉(薄俸)을 털어 북한의 화가들에게 그림 재료를 사 보내었던 변월룡의 후덕한 마음은 시공(時空)을 초월해 동도(同道)의 길을 가는 화가로서 변월룡이 남겨놓은 한 폭의 수채화가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나는 “혹시 가능하다면 ‘누드’ 그림을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 물론 내심 바라는 화가가 있기는 하였지만, 그분의 신상에 불이익이 갈 것이 자명한 이치이기에 굳이 거명(擧名)은 하지 않았다. 하루가 못돼 받은 답장이 걸작이었다.

“양 선생은 북조선을 잘 모르시는군요.” 거절과 핀잔을 함께 받은 셈이다. 이야기인즉, 누드 그림은 북한 내에서는 상상하기도 어렵고 설령 그려진다 해도 세관을 통과해 나올 가능성이 1%도 없다는 것이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물었나?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게지!” 북한 작가들은 정말 누드 그림을 그릴 줄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사회체제가 그러하니 순종하는 것일까? 흡사 레오나르도 다빈치 역시 그가 살던 시대에서 시대를 거스르는 전위(前衛)작가로 치부되었던 것처럼, 공산주의의 암흑을 걷어내고 시대정신을 대변할 전위작가가 북한 사회에서는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일까?

누드는 고사하고 추상 그림 한 점 얻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운 게 북한 사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머지않은 장래에 북한 화가들이 그린 누드 그림뿐 아니라 폭력과 공포로 물든 병든 사회를 고발하는 전위작품이 봇물처럼 밀려들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공포와 암흑으로 찌든 인민의 삶을 정직하게 그리고 싶은 화가가 분명히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함창연 누드판화

필자에게 이런 망상이 가능하도록 만든 것은 함창연이 폴란드에서 유학하고 있던 기간에 제작했던 42점의 누드 판화를 보고 난 이후였다. 함창연은 1957년부터 1959년까지 빈과 모스크바, 독일에서 열린 세계 미술전과 국제판화전에서 잇달아 금상을 휩쓸면서 그의 이름 석 자를 동서 유럽에 알리는 드문 영광의 세월을 보냈다.

함창연이 1933년생이고 보니 그가 폴란드에서 수학을 시작했던 1953년부터 귀국한 1959년의 6년간은 그의 생애에 있어 보석같이 빛난 시기였다. 결혼도 하지 않은 스물다섯의 나이에 여체(女體)를 그토록 탐이 나도록 그려냈던 것은 비단 함창연만의 호기심은 아닐 것이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도 과거에는 상상하기도 힘든 풍경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중국 어느 곳에서나 돈으로 성(性)을 살 수 있게 된 것처럼, 대동강변에서도 돈으로 성을 사고파는 일이 음성적으로 만연(漫然)되었다. 성은 겉으로 보기에는 일탈(逸脫) 같아 보이지만 잠재적인 인간의 욕망과 본능을 표현하는 건강한 모습이기도 하다.

사람이 살아 움직인다는 것, 그리고 무엇인가 꾸준히 추구하며 생동하는 욕망이 아프로디테의 절규에 나와 있지 않았던가? 굳이 그리스 벽화에 등장하는 완벽한 몸매가 아니어도 균형 잡힌 인체의 부드러운 굴곡과 풍만한 볼륨은 모든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셈이다.

북한 작가들의 일제 식민지 시절의 그림을 보노라면 이들에게서 누드 그림은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지 싶다. 사실 우리 근대문화에 그리스도의 성화(聖畵)를 그린 최초의 작가도, ‘해질 무렵’ 능라도(綾羅島)를 배경으로 미역을 감던 육질(肉質) 좋은 나부(裸婦)를 그렸던 김관호 역시 평양 출신이 아닌가?



함창연의 누드, 1959년작.


북한미술의 르네상스를 꿈꾸며

1930년대 누드모델을 구하기 힘들어 도쿄(東京)에까지 선을 대야 어렵게 구할 수 있던 시절 권번(券番)의 기녀들과 화가들 사이에는 벗고 벗기는 이상야릇한 게임이 벌어지곤 하였다.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여성들의 옷을 벗길 수 있었던 것은 일제 치하에서도 화가나 조각가들의 일종의 사회적 ‘특권’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북한 사회는 과거 중세기 교부(敎父)시대에서나 봄직한 여체에 대한 조형적·심미적 탐구나 표현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형편이다.

평양 출신 최영림(崔榮林)이 해학적인 에로티시즘을 토속적인 설화와 신화를 결부시켜 여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었던 영광도 그가 남쪽으로 건너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영선(朴泳善)이 북에 남았더라면 여체의 고전적 기품을 그려낼 수 있었을까? 박항섭(朴恒燮)이 월남(越南)하지 못했더라면, 낙서처럼 담백하고 순수한 그림 대신 사회주의의 표상을 선전하는 혁명적 초상을 남기는 데 평생을 바쳤을는지도 모른다.


한국근대서양화가 김관호의 1916년 동경미술학교 졸업작품, 해질 무렵(유화), 한국 최초의 누드 그림이다.

이북 출신이었던 저들이 남한에서 자유로운 삶을 노래하고 이를 화폭에 담았던 행복 이상으로 반동적인 작가가 그려낸 반(反)예술과 실험적 작품들이 북한 땅에도 가능하다고 보인다. 그것이 예술가의 기질이요, 시대정신을 거스르는 자유인으로서 작가만이 누릴 특권이기 때문이다.

과거 나치 독일이 문화말살 정책을 편 탓에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극심한 냉소주의가 만연했었다. 그러나 이런 척박한 풍토를 딛고 1980년대 독일이 세계미술의 중심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기적을 통해 필자는 북한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설사 북한에 자유가 주어지고 현재의 질식상태가 종말을 고할 때에 작가들이 당면할 공포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불안으로 저들의 창조적 능력이 사라진다 해도 전장의 폐허에서 불굴의 투지로 일어서 새로운 희망을 보았던 북한이 아니던가?

비록 지난 70년 동안 오직 수령과 당(黨)에 대한 충성으로 목숨을 연명하면서 그 대가로 개인전을 열 수 있었던 극히 소수의 무리…. 그리고 작가들의 화업(畵業)에 대한 열망을, 오도(誤導)된 위협적 정책과 선전술 앞에 무력하게 만들었던, 인간에 대한 신뢰와 향수가 고사(枯死)된 것처럼 느끼는 동토(凍土)의 현실 앞에 북한의 작가들은 스스로 고립을 경험하고 자유로운 세계로부터 유배된 자들일지라도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고목(枯木)에 물이 오르고 새로운 싹이 돋아나듯, 역사적 변환을 경험하고 과거의 아픔을 극복한다면 북녘 도시 함흥에도 민족적 자산의 경지를 넘어 세계를 가슴에 품는 리얼리즘의 부활이 이뤄지고, 북한 주민의 삶의 전통과 뿌리를 통해 드러난 모티브가 새로운 회화의 주관을 표현하는 시대정신으로 거듭날 날이 올 것이다. 언제 동토의 땅, 북한에 우리가 바라는 문화적 르네상스가 꽃필 수 있을까?⊙

출처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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