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조구치 유조(저자) | 이케다 도모히사(저자) | 고지마 쓰요시(저자) | 조영렬(역자) | 글항아리 | 2012-06-25 | 원제 中國思想史 (2007년)
반양장본 | 368쪽 | 223*152mm (A5신) | 635g | ISBN : 9788993905991
중국사상 연구의 거장으로 얼마 전 타계한 故 미조구치 유조가 책임편집한 중국 사상과 중국에 관한 책이다. 그간 고대이든 근대이든 중국이라는 것의 표상을 만들어온 것은 주로 서구적 시선이었고 약간의 일본적 관점이었다. 이 책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중국에 대한 내재적인 사상사를 제안한다. 그 방법은 중국 역사상의 네 가지 커다란 변동기에 초점을 맞추고, 거기에서 어떠한 새로운 역사가 탄생했는지를 해명하려 하는 것이다.
그를 위해 책은 총 4장으로 이뤄졌다. 저자들은 자신이 맡은 분야에서는 일본 최고의 전문가들이며 이 셋은 수많은 토론과 윤독을 거쳐 “중국사상의 내재적 변동”을 잡아내고 “중국사상을 통해 중국을 깨닫게 되는” 역작을 만들었다. 서구적 시선에서 탈피함은 물론 일본 특유의 관점에서도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머리말
제1장 진한제국의 천하통일
1. 천인상관과 자연
은의 상제에서 주의 천명으로 | 하늘의 이법화理法化-선진先秦 유가 | 하늘과 도-전국시기 도가 | 천과 인의 분별分-순자 | 천인상관설과 재이설 | 자연사상의 발생과 전개
2. 천하 속의 인간
성 사상의 발생 | 성삼품설의 성립과 전개
3. 국가체제를 둘러싸고
봉건제의 이념 | 현실의 군현제 | 유교화된 봉건제
4. 유교국교화와 도교·불교
학문의 탄생 | 여러 학파의 통일에 대한 구상 | 유교국교화 | 박사제도와 여러 학파의 통일 | 새로이 등장한 도교와 불교
제2장 당송의 변혁
1. 새로운 경학
인쇄기술의 등장 | 삼교정립三敎鼎立과 『오경정의』| 경학의 변화
2. 군주상의 변화
선양의 소멸과 상제의 변질 | 삼교 위에 선 왕권 | 전제專制이면서 자유로운 사회 | 송대 이후는 군주독제제인가
3. 정치질서의 연원
왕권의 변질 | 천견론天譴論이 의미하는 것 | 정통론과 화이사상
4. 마음을 둘러싼 교설
‘리理’ 자의 애용 | 천리라는 사고방식 | 이기론의 탄생 | 양명학의 ‘이관理觀’
5. 질서의 구상
향리鄕里 공간 | 경학과 사회 | 사묘祠廟 정책
제3장 전환기로서의 명말청초
1. 정치관의 전환
민본관, 군주관의 변화 | 백성의 ‘자사자리自私自利’와 황제의 ‘대사大私’ | 왕토관과 민토관의 변화
2. 새로운 전제론田制論과 봉건론
정전론의 전통 | 민토관에 선 새로운 전제론 | 명말청초 시기의 새로운 ‘봉건’
3. 사회질서관의 전환
주자학·양명학·예교를 보는 시점 | 새로운 천리인욕관 | 공사관公私觀, 인관仁觀의 변화
4. 인간관·문학관의 변화
인간관의 변화-이원적 관점에서 기질일원氣質一元의 관점으로 | ‘습론習論’의 등장 | 대진의 새로운 인성론 | 문학관의 변화
5. 삼교 합일에 보이는 역사성
철리哲理 상의 합일 | 도덕실천 차원에서의 합일 | 향리공간의 특질과 그 역사성
제4장 격동하는 청말민국 초기
1. 청말의 지방 ‘자치’
황종희와 ‘향치’ | 선거善擧·지방공사·향치 | 청말의 ‘자치’ 역량 | 성省의 독립을 향해
2. 서구 근대사상의 수용과 변혁
근대정치사상의 수용 | 청나라 말기 민국民國의 ‘봉건’
3. 전통 속의 중국혁명
청대 중엽의 전제론 | 토지국유론과 공유론-청나라 말의 전제론 | 공의 혁명公革命으로서의 중국혁명 | 쑨원의 삼민주의
4. 현대중국과 유교
청대의 예교 |『신청년』의 반예교 | 유교윤리와 사회주의
후기
북가이드
찾아보기
P.165 : 중국의 황제질서는 예에 의한 통치, 즉 예치禮治 시스템이었다. 그렇기에 서양식 정치학의 눈으로 보면 ‘전제인데도 자유’라는 얼핏 보기에 기묘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교사로서의 왕’이 군림하고 있다.
P.173 : 서양정치사상사에서는, 중세 가톨릭세계에 있어서 정치가 신과 교회의 지배에서 자립하여 ‘정교분리’ 노선 속에서 국민국가가 등장하는 길을 근대화라 여겨왔다. 그것을 그대로 중국사상에 적용시키면, 천인상관을 부정하는 사상이야말로 합리적·진보적이고, 천인상관설을 보강·재편하는 방향으로 작용한 주자학·양명학 같은 사상 조류는 결국 사상 면에서의 근대화를 방해했다는 평을 듣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표층적인 분석이 아니라 좀 더 깊은 차원으로 눈을 돌리면, ‘천인합일天人合一’의 틀을 강화한 것은 그때까지 하늘(자연계)에 포섭되어 존재했던 사람(인간사회)이 그
범위를 확장하고, 바깥의 틀로써 기능하는 하늘과 일치하는 데 이른 까닭에, 오히려 인간의 주체성이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다.
P.180~181 : 한편 화이사상은 이 정통론과 연동되어 송나라가 요에 대해 가졌던 굴절된 우월의식을 형성한다. 세계제국이었던 당나라는 화이를 구별하는 데 엄격하지 않았다. 당나라 사람들에게 호胡나 이夷는 이국적인 어떤 것으로서 인기를 누렸다. 그에 비해 서방·북방에 이르는 영토를 소유하지 못하고, 호한胡漢 융합체제가 아니었던 송나라의 경우 자타의 구별은 도리어 엄정하게 이루어졌다. 요를 이적이라 여기고 자기를 중화라 여겼기 때문이다. 남송과 금의 관계에 오면 그것이 더욱 증폭되어 한족 내셔널리즘이 발생한다.
다만 그것을 서양의 근대적 의미에서 말하는 내셔널리즘과 동질의 것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중화의 인간이라 자부하며 타자에 대해 우월한 느낌을 갖는 것은 자기들이 선왕의 가르침을 충실히 계승하는 유서 깊은 집단이라는 자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요나 금이 이적인 것은, 그들이 선왕의 제도와는 다른 풍속·습관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
고, 그들도 그럴 마음이 있다면 중화에 동화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경우 그들의 정치체제를 방기하고 덕이 있는 송의 황제에게 무릎을 꿇어야 할 터이고, 결국에는 송에 의한 세계제패가 실현되는 것이니 그것을 자민족 중심주의의 한 예로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보편적 진리에 비추어 자기들이 바로 유일하고 절대적이라고 보는 사고방식. 중화사상이란 그러한 것이었다. 거기에서 자타 관계는 (현실의 역학 관계는 어떠하든 간에 이념적으로는) 대등할 수 없다. 이것은 몽골 세계제국을 대신하여 탄생된 명왕조에도 적용된다.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중앙일보
- 중앙일보(조인스닷컴) 2012년 06월 23일 '주목! 이 책'
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12년 06월 23일 교양 새책
저자 : 미조구치 유조 (溝口 雄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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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방법으로서의 중국>,<한 단어 사전, 공사>,<중국 제국을 움직인 네 가지 힘> … 총 21종 (모두보기)
소개 : 1932년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났고, 중국 사상사를 전공하였다. 도쿄대학 중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나고야대학 대학원을 거쳐 규슈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도쿄대학 문학부 중국철학과 교수와 다이토분카대학 교수를 지냈다. 도쿄대학 명예교수를 역임하고 2010년 7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지은 책으로 『중국 전근대 사상의 굴절과 전개』, 『방법으로서의 중국』, 『중국의 공과 사』, 『중국의 사상』, 『중국사상문화사전』(공저) 등 다수의 책이 있다.
저자 : 이케다 도모히사 (池田知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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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중국 제국을 움직인 네 가지 힘>,<중국사상문화사전> … 총 2종 (모두보기)
소개 : 1942년생이며 1965년 도쿄대학 문학부를 졸업했다. 1991년 도쿄대학 대학원 인문사회계 연구과 교수로 부임했고, 현재 대동문화대학 교수와 도쿄대학 명예교수로 재직중이다. 주요 저서로 『노장사상』(2000), 『곽점초간 유교연구』(2003), 『노자』(200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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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고지마 쓰요시 (小島 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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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중국 제국을 움직인 네 가지 힘>,<사대부의 시대>,<송학의 형성과 전개> … 총 24종 (모두보기)
소개 : 1962년생으로 1985년 도쿄대학 문학부를 졸업했다. 1992년 도쿠시마대학 총합과학부 전임강사가 되었으며 현재 도쿄대학 대학원 인문사회계 연구과 준교수로 재직중이다. 주요 저서로 『중국근세 예禮 담론』(1996), 『송학의 형성과 전개』(1999), 『중국사상과 종교의 분류奔流』(2005) 등이 있다.
역자 : 조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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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약을 끊어야 병이 낫는다 (보급판 문고본)> … 총 26종 (모두보기)
소개 : 1969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1995년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2000년 한림대학교 부설 태동고전연구소(지곡서당)를 수료했으며, 2011년 고려대학교대학원 중일어문학과 일본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주요 역서로 『지금 당장 읽고 싶은 철학의 명저』 『독서의 학』 『장자, 닭이 되어 때를 알려라』 『시절을 슬퍼하여 꽃도 눈물 흘리고: 요시카와 고지로의 두보 강의』 『요시카와 고지로의 공자와 논어』 등이 있다.
“이 책은 목적은 중국사상을 통해
중국을 아는 데 있다”
중국을 역사적·구조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네 가지 변화의 힘
서구의 눈으로 볼 때 중국은 한낱 덩치 큰 신기루에 불과하다. 하지만 내재적 눈으로 객관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더듬어보면 우리는 놀라운 역사의 변혁과 동력의 힘을 확인하게 된다
이 책은 중국사상 연구의 거장으로 얼마 전 타계한 故 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가 책임편집한 중국 사상과 중국에 관한 책이다.(원제: 『中國思想史』, 2007) 그간 고대이든 근대이든 중국이라는 것의 표상을 만들어온 것은 주로 서구적 시선이었고 약간의 일본적 관점이었다. 이 책은 이런 외부적 시각에서는 필연적으로 중국사회의 역동성을 놓칠 수밖에 없다고 선언한다. 이 책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중국에 대한 내재적인 사상사를 제안한다. 그 방법은 중국 역사상의 네 가지 커다란 변동기에 초점을 맞추고, 거기에서 어떠한 새로운 역사가 탄생했는지를 해명하려 하는 것이다. 그를 위해 책은 총 4장으로 이뤄졌으며 이케다 도모히사池田知久가 제1장 ‘진한제국의 천하통일’을, 고지마 쓰요시小島 毅가 제2장 ‘당송의 변혁’을 마지막으로 미조구치 유조가 제3장 ‘전환기로서의 명말청초’와 제4장 ‘격동하는 청말민국 초기’를 집필했다. 이들은 자신이 맡은 분야에서는 일본 최고의 전문가들이며 이 셋은 수많은 토론과 윤독을 거쳐 “중국사상의 내재적 변동”을 잡아내고 “중국사상을 통해 중국을 깨닫게 되는” 역작을 만들었다. 서구적 시선에서 탈피함은 물론 일본 특유의 관점에서도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중국의 공산혁명이 16세기부터 이어져온 중국 향리 공간의 상호부조 전통이 무르익은 가운데 출현할 수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비롯해 현대 중국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공존하는 세계 최강국 현대 중국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사회적 변혁의 힘을 이해할 수 있다.
네 가지 변동기에 초점, 새로운 역사의 탄생
이 책은 사상사라는 제목이 붙어 있지만, 철학적인 담론을 하나하나 서술하거나, 사건이나 고유명사를 늘어놓는 통사의 구성을 취하지 않았다. 기나긴 역사 속에서, 도대체 중국은 ‘무엇이 어떻게’ 변화했고, 그것이 어떻게 ‘현재’에 이어지고 있는가. 그 변화의 단면斷面에 입각해서 역사의 숨겨진 동력을 드러내는 방법을 사상사에 적용한 것이 이 책이다. 이 책이 과제로 삼은 지점은 중국의 사상을 아는 데 있지 않고, 그것을 통해서 중국을 아는 데 있다 해도 좋다.
내부에 시점을 두고 보면, 중국에도 단조로운 왕조 교체사로밖에 비치지 않는 시대의 근저에, 느릿하기는 하지만 거대한 역사의 변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다.
왕조사 스타일을 버리고 변동의 원리로
이 책은 서구중심주의를 거부함과 동시에 사항의 나열로 시종하기 십상인 왕조사 스타일을 취하지 않고, 커다란 변동기에 입각하여 역사의 변화상을 서술하기로 했다. 서양의 원리와 다른 중국의 원리를 가설적으로 상정하면서, 전환기 역사의 격동을 서구의 눈이 아니라 중국의 눈으로 서술하는 이 책의 작업은 아마도 다른 책에서 볼 수 없는 특색이 될 것이다. 실제 당송 변혁기나 명말청초 시기에서의 변동은, 이제까지 자본주의 맹아기로 취급하는 것이 통례였던 데 비해, 그 변화의 맥락, 그것을 산출한 동력을 중국사 자체 내에서 찾는다(예를 들면, 명말청초의 담론은 안이하게 유럽의 조기早期 계몽주의에 끌어다붙이지 않고, 여기에서는 향리공간이라는 전통적인 말로 생각하려 했다).
세 번째로, 저자들은 책의 전반에 걸쳐 열린 서술을 하려 애쓰고 있다. 중국의 역사원리에 선다고 하면 중국이라는 특수세계의 용어로 내향적으로 말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저자들이 의도한 것은 오히려 그 반대이다. “서양중심주의를 벗어난다는 것은 서양세계를 상대화하고 동시에 중국세계 그 자체도 상대화하는 일이고, 그것은 일본인인 우리 자신도 상대화하여 대상으로서의 중국세계를 타자화함을 의미한다. 세계 안의 중국으로 보려고 노력한다고 바꾸어 말해도 좋다”는 것이 저자들이 서 있는 지점이다.
“지금 만약 중국 자체의 원리 틀을 통해 그 역사상을 빚어낼 수 있다면, 적어도 일본인을 비롯하여 서양인, 아니 당사자인 중국인조차도 그것에 의해 침식당해온 서양 시각에서 본 중국관은 서서히 융해될 것이다.”
과연 중국은 무엇이 독자적인가?
이 책의 가장 논쟁적인 토론 지점은 근대시기에 몰려 있다. 제4장을 여는 미조구치 유조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자본주의 맹아론을 다시 논하지 않는다
16-17세기는 세계사적인 규모에서 역사의 변동기이지만, 중국에서도 이 시기 즉 명말청초 시기는 단순히 왕조의 교체(1644)에 그치지 않는 각양각색의 새로운 변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그것이 청대에 계승·발전되었던, 그 변화의 획을 긋는 시기이다.
다만 여기에서 추적하려는 변화는 이른바 서구형 근대와 비슷하게 여겨지는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송대 이후의 사상사 상의 흐름 속에서 추출된 변화이고, 더구나 명말청초의 변동을 거쳐 청대에 계승되면서 청말의 격동을 산출하는 데 이르는, 중국의 독자적 변화가 걷는 장도長途의 궤적이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중화라는 다민족·다문화가 뒤섞인 더구나 원대元代 이후는 통일적인 왕조가 통치한 역사세계에서, 당대부터 송대에 걸쳐 무엇이 새롭게 태어나고, 옛것이 어떻게 변화했으며, 그 변화가 원대·명대에 걸쳐 어떻게 계승되고 명말청조 시기에 이르러 어떻게 새로운 국면을 산출·전개하여 청말의 격동을 불러왔느냐 하는 궤적, 그 궤적을 명말청초 시기에 있어 자본주의의 맹아라든지 초기 부르주아 계몽사상이라든지 유럽을 기준으로 한 역사현상이나 원리로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며, 더더군다나 거기에서 유럽과 비슷한 단편을 탐색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명말청초에 있어서 변화의 궤적을 유럽형 근대과정과는 다른 또 하나의 과정으로 변별하려는 입장에서, 그 궤적을 중국의 ‘독자적 근대’(다케우치 요시미, 「현대 중국문학의 정신에 대하여」, 『전집』14, 지쿠마쇼보) 과정이라 부른다면 그것도 하나의 입장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현시점에서는 그렇게 부르려 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의 하나는 그 과정이 유럽 근대의 과정과 아주 크게 다르기 때문에, ‘근대’ 개념에 대해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어 쓸데없는 혼란이 생기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그러한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중국 역사상의 다양한 개념이나 그것들이 전개되는 과정이 유럽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미리 최소한도의 합의가 성립되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러한 합의가 성립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과 관련해서 세 번째로, 아무리 ‘중국의 독자적인 것’이라 말하려 해도 일단 ‘근대’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저항의 근대’이든 ‘반격의 근대’이든, 그 독자성이라는 것은 유럽근대와의 연관에 이미 속박되어 ‘독자적’이라는 말이 본래의 실질을 상실하거나, ‘근대’라는 정형화된 이름의 장애에 부딪혀 자립된 중국의 세계상이 그 자립성을 침해받을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아편전쟁=근대’라는 관점을 버려라
생각건대 현 단계에서는 아편전쟁(1840-1842) 이후를 중국에 있어서 근대과정이라 보는, 이미 정해진 시기구분 그대로 하는 편이 낫다. 그리고 아편전쟁 이후 이른바 ‘중국근대과정’을 보는 관점 상의 편향을 16-17세기 이후의 중국 내부에서 일어난 변화의 궤적을 매개삼아 드러나게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아편전쟁=근대’라는 관점에 따르면, 서양중심주의적인 관점으로 인해 공동주의적·상호부조적相互扶助的인 종족제나 유교윤리는 근대화의 방해물로 비친다. 한편 16-17세기의 관점에 따른다면, 종족제나 유교윤리에 포함된 공동주의적·상호부조적인 측면은 민국民國 시기의 사회주의 운동 속에 수렴되어 현대에도 살아 있는 것으로 비친다. 혹은 훨씬 기주적基柱的인 지점에서 보면, 아편전쟁 관점에서는 철저한 부르주아 혁명으로밖에 평가되지 않는 신해혁명(1911)이 16-17세기 관점에 따르면 2천 년 이래의 왕조제를 붕괴로 이끈 획기적인 혁명이라는 평가를 얻게 된다.
16-17세기 관점은 그 변화를 신해혁명의 맥락에서 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한 맥락으로 보는 것은 우선 16-17세기에 보이는 그 변화가 하나의 역사시대를 구획할 만큼의 변화라고 간주할 수 있는 것이고, 그리고 또 하나는 그 변화의 실태가 청대 내내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신해혁명에 이르는 것이어야만 한다. 즉 이전부터의, 16-17세기에 싹튼 초기 부르주아사상이 청 왕조의 억압으로 인해 지하로 숨어들고, 청말에 신해혁명의 형태로 분출했다고 보는 유의 이른바 ‘궁지에 몰려 지하로 스며든 수맥’ 구도가 아니라, 청대 내내 변화가 표면에서 지속되고 성숙을 이룬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는 것은, 명말에서 청말까지를 하나의 연속태로 부감할 수 있고 나서야 비로소 명말의 양상이 청말의 신해혁명의 의의를 규정하고, 거꾸로 청말의 혁명적 양상이 명말에 일어난 변동의 의미를 규정한다, 즉 중국의 역사상이 전체적으로 형태를 드러낸다. 바꾸어 말하면 중국 역사의 변화가 왕조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의해 왕조가 규정된다. 즉 중국의 역사가 그 역사상을 자기의 것으로 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의 바람을 굳이 말한다면, 유럽의 역사상이 근대상을 드러내려는 작업으로서 고대 그리스의 역사상을 창출해내고 고대의 양상으로부터 근대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유럽이 하나의 역사이야기를 지어냈던 것처럼, 우리도 중국에 대해서 또 하나의 역사이야기를 지어내는 것 또한 가능한 것이다.
신해혁명의 성격 재규정하기
나아가 제5장에서 미조구치 유조는 중요한 관점을 제출한다. 신해혁명으로 왕조가 무너졌을 때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지점이다. 그것은 “쇠락한 왕조 대신에 대두하여 각 성의 독립이라는 형태로 신해혁명을 실현시켰던, 그 각 ‘성의 힘’이다.” 각 성이 독립한 배경에는 그만큼의 성숙한 힘이 있었던 것인데, 그에 대해서는 4, 5장에 걸쳐서 ‘지방공론’이라는 형태로 자세히 다루고 있다. 아무튼 기존의 시각에서는 신해혁명을 어중간한 혁명, 일탈·역주행으로 이루어진 혼돈으로 보는 반면, 1949년의 건국혁명을 반봉건·반식민지에 철저했던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간주하는 태도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미조구치 유조는 신해혁명과 건국혁명 이 둘은 그 운동의 방향성 면에서는 (분권화와 집권화의) 서로 반발하는 관계에 있으면서 또한 인과관계(부서지면 다시 세운다)로 이어진, 짝을 이루는 혁명이라고 재인식한다.
당송시대의 사대부들이 꿈꾼 것인 무엇인가?
앞으로 돌아가 제2장 ‘당송의 변혁’에서는 사대부의 등장과 그들이 구축한 그들만의 사상세계를 분석한다. 송대의 사대부들은 이 시대의 새로운 학문을 소유함으로써 새로운 사상·분위기를 낳았다. 그것은 단적으로는 주자학의 탄생이라는 현상이다. 그 배경에는 인쇄출판이라는 기술혁신이 있었다. 저자는 그 경위를 다루면서 이전 학문 양상과 비교하며 서술했다. 사대부들의 새로운 학문은 정치제도의 변화와 연동되어 있다. 그 상징적 사례로 이 책에서는 국가의 정점에 위치한 왕권에 대한 이론의 변질을 다룬다. 저자는 당시의 사상가들이 ‘천天’이나 ‘리理’ 등의 개념을 통해 옛날과는 다른 정치적·사회적 질서를 구축하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본다. 그것은 사대부가 자기들의 일상적 생활공간을 장으로 삼은 ‘새로운 담론’을 산출한 데에 당송 변혁의 사상적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향리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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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기나긴 역사 속에서 도대체 중국은 ‘무엇이 어떻게’ 변화했고, 그것이 어떻게 ‘현재’에 이어지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책이 과제로 삼은 시점은 중국의 사상을 아는데 있지 않고, 그것을 통해서 중국을 아는데 있다고 해도 좋다.”
파워리뷰어 ㅣ 2018-03-17 l 공감(3) ㅣ 댓글(0)
중국 제국에 대한 분석적인 책으로 알고 샀는데, 중국철학사 책.
madwife ㅣ 2015-10-01 l 공감(1) ㅣ 댓글(0)
총 : 3편
[중국 제국을 움직인 네 가지 힘] 파워리뷰어 ㅣ 2018-03-17 ㅣ 공감(7) ㅣ 댓글 (0)
【 중국 제국을 움직인 네 가지 힘 】
_미조구치 유조, 이케다 도모히사, 고지마 쓰요시 공저/조영렬 역 | 글항아리
이 책에서 중국이라 함은 현대의 주권국가(중화인민공화국)를 가리키지 않는다. 시대에 따라 그 영역이 늘거나 줄고 민족이 뒤얽히며 여러 분화가 뒤섞이고 교역하면서 현대에 이른, 그 변화와 흐름 속에서 한자를 통해 자기를 표현하고, 스스로 중국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해온 세계를 가리킨다.
기나긴 역사 속에서 도대체 중국은 ‘무엇이 어떻게’ 변화했고, 그것이 어떻게 ‘현재’에 이어지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책이 과제로 삼은 시점은 중국의 사상을 아는데 있지 않고, 그것을 통해서 중국을 아는데 있다 해도 좋다.”
책은 진한제국의 천하통일, 당송의 변혁, 전환기로서의 명말청초, 격동하는 청말민국 초기로 구분된다. 이 네 가지가 책의 제목에서 시사되고 있는 ‘네 가지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을 연구하는 학자들 간에는 1980년 이후 현재까지 격동의 시기가 이어지고 있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총괄평가, 중국혁명 재검토, 유물사관 재점검, 포스트모던 사조의 영향등과 아울러, 연구 주체의 문제, 시각의 문제, 방법론의 문제를 밑바닥부터 다시 물어보려한 시기이기도 하다. 저자들은 이 책 외에 『중국사상문화사전』을 간행하기도 했다. 이 책은 『중국사상문화사전』의 자매편이기도 하다.
진한제국의 유교 국교화와 도교, 불교
중국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학문이라 칭할 수 있는 것을 외친 것은 춘추시대 말(기원전 6세기)의 공자이다. 그를 개조(開祖)로 삼는 유가가 학문의 시초로 기록된다. 그 뒤 묵자를 개조로 삼는 묵가가 탄생했고, 유가와는 다른 사상활동을 펼쳐, 양자 사이에는 공자와 묵자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고 상대의 잘못을 타파하려는 많은 논쟁이 발생한다. 유교를 국교로 하는 과정이 결코 순탄하다고 볼 수 없다. 당연한 귀결이다. 더군다나 이 무렵 여러 학문을 통합하려는 도가의 활발한 움직임까지 가세한다. 언제 유교가 국교로 책정되었는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지만, 유교국교화의 실현은 전한시대 말기 이후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다. 단기간에 행해진 것이 아니라, 유교에 대한 중시가 누적된 결말로 이뤄진 것이라 짐작된다.
유교국교화와 동중서
3단계의 과정을 거쳐 행해졌다. 맹아단계, 발전단계, 완성단계이다. 맹아단계는 문제로부터 무제시기(기원전180~기원전87)까지 이어진다. 유교경전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경학과 박사제도가 확립되고, 박사제자 제도도 창설되어 무제가 즉위한 첫해에는 유가 관료의 등용과 활약을 볼 수 있다. 발전단계는 소제에서 원제시기(기원전87~기원전33)이다. 황제자신도 유교를 중시했기 때문에 유가관료가 정계에 진출한다. 완성단계는 성제에서 왕망시기(기원전33~기원후23)이다. 유향, 유흠이 육경을 중심으로 서적을 정리함과 동시에, 유교는 참위설을 받아들여 변모를 꾀한다.
당송의 변혁 중 왕권의 변질
한 대 이래 유교의 정치이론은 황제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론을 준비해왔다. 그것은 철학적으로 하늘의 지고성에 바탕을 두고 있었지만, 의례 면에서는 교사로 대표되는 국가제사의 체계로서 시각화되어 군주의 권위를 장식했다. 당이든 송이든, 또한 명이나 청에서도 이 기본형에 변화는 없다. 그 점에서 한 대에 제정된 황제지배체제는 청조가 멸망할 때까지 존속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공화제가 수립된 사건이, 중국의 정치체제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 점에서 진시황제가 ‘황제(皇帝)’를 창설한 사건과 병칭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체상(政體上)의 변화는 2천 년간 분명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당과 송 사이에 ‘왕’의 존재방식을 둘러싼 정치이론에는 질적인 변화가 생겼다.
1) 왕조교체 양식 : 한에서 송까지는 선양, 이후는 군사적 제압.
2) 국호 : 송(그리고 요, 금)까지는 창업자와 연관된 지명.
3) 왕권이론의 핵심을 이루는 경서가 『효경』 『주례』에서 『주역』 『대학』으로 옮겨감.
「전통 속의 중국 혁명」을 살펴보는 것도 의의가 있다.
공의혁명(公革命)으로서의 중국혁명
서구에서는 평등사상을 개인의 정치적, 사회적 권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비해, 중국에선 정치적, 사회적인 것뿐만 아니라 경제적 평등으로서도 수용된다. 따라서 개인권(사유권)에 대해서는 그 ‘전사(專私)’성을 배제하는 측면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 서양의 그것과 비교된다. 청나라 말의 혁명가 진천화는 “우리는 ‘총체(總體)’의 자유를 구하는 것이지, ‘개인’의 자유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공화(共和)라 함은 다수의 인간을 위해서 꾀하는 것으로 소수인간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쑨원의 삼민주의
쑨원은 중국공산당과 국민당 양쪽에서 중국혁명의 아버지로 존숭하고, 양 당은 민족, 민권, 민생을 말하는 그의 삼민주의를 각각 계승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쑨원에게 자유는 민족 전체의 자유, 권리는 전제자를 물리친 국민 모두의 권리, 평등은 서로의 경제적 평등을 각각 지향한 것이고, 여기에는 개인의 자유라든지 인권이라든지 사유재산권 같은 생각은 거의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원리적으로 부정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 책이 다른 중국 관련 사상, 역사서와 다른 점
이제까지 중국의 역사를 밖에서 온, 즉 유럽 혹은 유럽화된 틀이나 개념으로 바라본 경우가 많았다. 이런 시각과 달리 이 책은 중국의 내부에 시점을 두고 있다. 중국에 내재해있는 역사의 논리로 중국사상사를 구성하려는 저자들의 의지가 많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중국 제국을 움직인 네 가지 힘 / 미조구치 유조 외 nana35 ㅣ 2016-11-17 ㅣ 공감(4) ㅣ 댓글 (0)
춘추 말기에 고대제국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구체제를 "주술과 종교 면에서 지탱하고 있던 천天 사상도 크게 동요"되었다. 공자는 주대의 천명天命을 혁신하여, 천天이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는 인간사회의 사상事象과, 인간의 힘 저편에 있는 명료하게 파악할 수 없는 이법理法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20-2) 묵가는 천지론天志論에서, 천자가 상벌을 통해 겸애를 실천하게 만드는 주재신(天)을 제시하였고, 도가는 "공자에서 비롯된 천의 세속화·이법화를 더욱 밀고나가", 공자 이래의 유가가 하늘에 부여했던 "도덕적·정치적인 의미, 즉 선善의 근원으로 간주되는 의미를 제거"하였다. 이것이 "천인분리론天人分離論(하늘과 사람의 상관관계 부정)이다"(25-6)
전국시대 말 유가는 <역易>을 경전화하는 과정에서 도가의 '도-만물'의 두 세계론을 도입했다. 이것은 "존재론적 사색에 능하지 못했던 유가가 <역>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유가 내부에 도가의 '도의 존재론'을 도입하여, 사상체계의 기초를 제공"하고 "종교성을 비판하던 종래의 전통적인 태도를 고쳐, 유가의 도덕적·정치적 덕德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기초 단계로서 그것을 내부로 포섭하여 자기 사상세계를 풍부"하게 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었다.(27) 여기서 하늘과 사람이 단순히 대립 개념이 아니라 "사람 안에도 하늘이 있다"는 상관 관계를 인정하는 성性 개념이 등장한다.(29)
도가의 자연사상은 본래 도道와 만물, 성인과 백성의 관계에서, 근원자인 도·성인의 '무위無爲'가 원인이 되어 존재자인 만물·백성의 '자연'이 나온다고 주장한다. 순자를 계승한 동중서는 도가의 이러한 견해를 반대하여, "사업의 성패는 바로 인간의 노력에 달려 있다"(<한서漢書>, 동중서전)는 천인상관설을 주장한다.(32) 여기에 순환운동을 되풀이하는 음·양 두 기氣의 기계적 자연으로서의 천天 개념이 결합하면서, "음양설은 천인상관설을 보조하고, 천인상관설은 음양설을 포섭"하게 된다.(36) 노자 역시 "도·성인은 둘 다 무위無爲(함이 없다)이기 때문에, 만물·백성에 대한 지배는 없"다고 말하면서, "만물·백성의 스스로 그러함"이 독자적 가치를 갖고 있음을 인정한다.(43)
이제 "이치理나 실상情은 도가 만물 안에 내재한 것이고 그 경우는 성性이라 부른다"는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된다. 동중서 학파는 "성을 상·중·하 세 종류로 나누고 각자의 선악과 역할을 논한 성삼품설을 처음으로 사상의 무대"에 올린다.(65) 한참 뒤 송학 시대에 이르면 "정이(정이천)와 주희는 오히려 불교와 도교가 제기한 만인평등관과 성性이 변경 가능하다는 논리를 계승하고, 한유에 이르러 완성된 정통적인 성삼품설을 분명하게 방기했다. (...) 이리하여 전한시대 중기부터 당대唐代의 긴 시기에 걸쳐 사람들의 마음을 속박했던 성삼품설은 마침내 종언終焉의 가을을 맞이하고, 송대의 성설性說로 승화"되기에 이른다.(71-2)
한편, 국가체제를 둘러싼 논의는 주대의 봉건제와 진대의 군현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유교 국교화가 진전된 전한前漢 시대에는 봉건제를 찬미하는 언설"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봉건론은 "봉건제를 유교에 끌어다 붙여 지나치게 찬미하고, 유교 국교화가 거의 완성된 뒤에 처음으로 나타난 이상화된 봉건론"이라 할 수 있다.(89-90) 후한後漢 말기에는 오히려 지방분권이 진행되는 현실을 기반으로 "중앙권력의 약화를 막기 위해 동성同姓의 제후를 번병藩屛으로 봉건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한다. 이는 "이성異姓의 실력자가 중앙의 지배권을 분단"하는 폐단을 막기 위한 조치였지만, 봉건된 제왕은 "거꾸로 자기 세력을 확대하여 분권화를 지향"하고 만다.(94-5)
후한 말기에 사회가 혼란에 빠졌지만, 국가의 정통사상이던 유교는 거기에 무력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신뢰를 잃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마음을 지탱해 줄 버팀목을 다른 종교나 사상"에서 찾아 나섰고, "불사의 신선 황제·노자를 신앙하고 스스로도 선인仙人이 되기를 바라는 황로도黃老道"가 유행한다.(124) "불교의 교의를 한역漢譯불전에 의거하면서 노장사상이나 <주역>과 결합"시킨, 격의불교格義佛敎도 불교와 노장사상의 융화를 보여준다. 이 외에 "도가를 중심으로 유가를 포섭"하려는 현학玄學이 남북조 내내 성행하였는데, 이처럼 유불도 삼교가 "각각 다른 현상을 갖고 있지만 근본에서는 일치한다"는 학문 태도는 후대에까지 유효한 힘을 계속 발휘한다.(130-2)
송대에 나타난 '천관天觀의 전환'은 "이론 면에서는 천견론의 변화에서, 의례 면에서는 교사郊祀제도의 개혁"에서 확인할 수 있다.(171) 송대 사상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개별적인 재이災異에 대응하는 매뉴얼이 아니라, "위정자가 제대로 반성하는가"의 여부이다. 이들은 천견론의 틀을 유지하면서, "사태의 요점을 외재적인 정책 차원이 아니라, 왕의 내면적 개심을 요구"하였고, 이는 점차 "리理를 둘러싼 논의와 연동"된다. 교사제도의 측면에서도 인격신을 숭배하던 방식을 버리고, 음양이기陰陽二氣를 대표하는 "자연계를 통어하는 신으로서의 호천상제에게 제사하는 방식"을 도입한다.(172-3)
이정의 리理 사상은 "동시대의 다른 유파와 확연히 구별"되지 않는다. 남송에서 그들의 문류門流를 비판하여 ‘도학道學’이라 부른 것은 "반대파(당파적으로는 왕안석에 가깝다)도 ‘리’사상은 긍정"하기 때문이다.(187) 이들이 "주제로 삼은 것은 ‘마음心’이고, ‘리’는 마음의 존재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이용되는 보조 개념"이었다.(187) 성설性說이야말로 송대 신흥유교의 중심적 테마였다. 주자는 <대학> "팔조목의 계제성階梯性(순서를 밟아가는 성질)을 중시"했는데, 이는 '천리天理'를 실현할 수 있는 심성이 모두에게 부여되어 있으며, 최종 목표, 즉 평천하의 실현은 후천적 노력에 따라 가능하다는 논리였다. 정이천의 말처럼 "성인은 배워서 이를 수 있는" 것이었다.(191-2)
주자학은 "성인으로 가는 길을 만인에게 열어놓음과 동시에, 정치질서의 담당자를 군주와 고급관료의 과점상태에서, 모든 학습자로 확대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도학이 중앙정부에서 벌어진 권력투쟁에서 줄곧 열세에 처해있으면서 지방에서 서서히 지지자를 넓히고, 남송 후반에 이르러 권력쟁취에 성공하게 된 것"은 이러한 면이 크게 작용했다.(191) 주자학의 새로움은 "‘리’의 총화가 도道라고 본 그 구조를 이용하면서 ‘리’ 한 글자를 가지고 총화總和와 개물個物을 관통하고, 개물의 다양성을 ‘리가 기질에 가렸기 때문’이라는 형태로 설명한 데에 있다." 수양修養은 치우침을 양성하는 "이 ‘기질의 성’을 ‘본연의 성’ 상태로 되돌려 본래의 바른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193-4)
양명학은 주자학처럼 "개개 개념의 이동異同을 정리하여 장대한 철학체계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수양방법의 문제로서 성·심·리 같은 여러 개념을 파악하려 한다." 그래서 "마음의 작용 그 자체가 ‘리’의 발현이라고 보는 ‘심즉리’ 설을 주장"한다. 양명학은 주자학의 이원론을 거부하기 때문에 "자기가 ‘리’라고 판단한 것이 타당한지 여부를 보다 고차원에서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평가하는 자기의 존재 여지는 없다."(195-6)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양자가 고심한 사상적 과제가 "순수하게 학술적인 관심에서 인심人心의 작용을 분석하려 한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사회질서를 실현하기 위한 방책으로써 ‘심心’의 문제를 고찰"했다는 점이다.(197)
주자학과 양명학이 "향리공간에 대해 주목한 것은, 이들 사조의 담당자들이 재지사회에서 생활하는 지식인이고 그들 자신이 생활하는 공간을 깔끔하게 정비하려는 의도에서였다."(200) 향리공간은 "원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유덕자有德者의 수창首唱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창화唱和함으로써 형성된다."(203) 특정 인물이 향리공간의 지도자에 걸맞는지를 가리는 시금석이 '제가齊家'인데, 이 때의 '가家'는 단혼單婚 소가족이 아니라, '종족宗族’을 가리킨다. 종족은 의장·족보·사당으로 이루어지며, 종족의 힘을 배경으로 한 향리공간의 지도자가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될 경우 그를 (이신里紳이나 현신縣紳이 아니라) 향신鄕紳이라 칭하였다."(205)
"고대 이래로 '민본民本'이라 한 것은 ‘백성이 근본’이라는 것이 아니라 군주가 ‘백성을 근본으로 간주’한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명말에 나온 민본적 언론은, 시비是非는 민간 혹은 지방의 공론 속에 있다, 황제나 관료는 민중의 시비에 따라야 한다고 ‘공론’의 존중을 주장한 것이다."(218) 황종희는 그동안 "천하의 공公이라 생각되고 있는 것이 실은 황제 개인의 대사大私(거대한 전유專有)에 불과하고, 그 대사로 인해 백성의 자사자리自私自利(백성의 사적인 수익활동)가 억압당하고 있다고 비판했다."(221) 이러한 권리의식의 성장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것은 "왕토王土 관념에 대한 민토民土 관념의 출현이다."(223)
왕토 개념에는 "조정의 소유지 외에 또 하나 이념적인 ‘천하의 공公’인 토지의 의미가 있는데, 이 ‘천하의 공’인 토지는 당시 중국의 통념에서는 ‘왕이 백성에게 준’ 정전제井田制의 땅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개념은 민토에도 그대로 스며들어 "개별 백성이 사유한 토지"라는 개념과 "천하만민이 균등하게 소유한 토지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게 된다. 즉, "명말의 '민토와 왕토의 대항'은 단순히 백성의 ‘사私’와 조정의 ‘사私’의 대항, 혹은 백성의 ‘사’와 조정의 ‘공’의 대항이 아니라, ‘만민의 사(즉 사의 종합으로서의 공)’ 대 ‘천하의 공을 표방하는 조정의 대사’의 대항"이며, 여기서, "만민의 사를 ‘합한 천하공공의 왕토라는 관념"이 창출된다.(225-7)
이처럼 명대는 "도덕의 담당자가 위정자층에서 서민층으로 넓어지고(바꾸어 말해, 백성이 위정자가 도덕적으로 감화시켜야 할 대상에서 스스로 도덕성을 발휘하는 도덕주체로 바뀐 것), 질서유지의 담당자가 위정자층에서 서민층"으로 확장되는 시기였다.(250) 송대 이후의 유교 역사는 이런 의미에서 "정치질서의 담당자가 확산된 역사로 파악"할 수 있으며, 이 관점에서 보면 "명대 후기에 일종의 정신운동으로서 서민층에 퍼지기 시작한 도덕질서가, 청대에는 종교나 향약 같은 사회시스템을 통해서 제도화되고 서민은 제도화된 도덕질서 체제 안에서 주동적 혹은 피동적으로 참여"하는 예교禮敎주의로 나아갔던 것이다.(251)
"본래 인욕人欲이라는 말은 ‘천’(자연의 조리)에 대한 ‘인’(인간의 작위, 타산)이라는 구도 속에서 쓰이는 말로, 조리에 반하거나 벗어난 작위나 의도를 가리키는 것이지, 이른바 인간 욕망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명대 말기에 대두된 '욕망 긍정의 풍조'는 서구 개인주의처럼 소유욕, 물질욕에 대한 제약 없는 긍정이 아니라 "균均과 공公, 각자라는 틀 안에서 긍정"되었으며, 이는 "욕欲의 문제가 사회관계 속에서 파악되게 되었음을 가리킨다."(253-4) 대진은 "자기의 생존욕이나 소유욕이 천하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달성되는 것이 인"이라 칭하였는데, 이 사고방식은 후세에 쑨원의 삼민주의 호소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260)
청대에 격화된 유동적인 사회관계는 신분의 불안정과 계층 간의 부침을 심화하였다. 여기서 생존경쟁을 완화하고 상호공존을 꾀하는 선서善書나 선회善會활동이 발생했는데, 이들은 "자기 운명을 밝게 만들기를 바라는 동시에 자손의 번영도 바랬다." 이 공동 협력의 에너지가 "향리공간에서 향치鄕治 활동을 활성화시킨 동력의 하나였다."(292) 명청 시기의 향리공간은 "관官, 리吏, 향신, 백성의 유력층, 일반 민중들이 종족, 길드, 선회, 단련團練 등의 조직이나 네트워크로 교차하면서, 사회적·경제적 공동관계를 구성한 지역활동 공간 또는 지역질서 공간"으로서 민간의 자립 역량을 지속적으로 키우는 구심점이었으며, 신해혁명을 실현시킨 '성省의 힘'으로 이어진다.(289)
"여기에서 '성省'이라 함은, 향鄕·진鎭·현縣·부府를 가로지르며 동일 평면상을 동심원적 혹은 방사선상 형태로 종횡으로 흐르는 네트워크류流이고, 그것이 한 성의 향리공간의 정치사회 공간이다. 그 공간에는 길드 네트워크, 선회·선당 네트워크 혹은 청나라 말에 많이 생긴 학회 네트워크 등 성내省內를 종횡으로 달리는 네트워크 연합이 있다. 그 네트워크가 단련을 조직하고 군대화시키는 기반을 이루는 역량이었다."(311) 향인으로 구성된 상군湘軍은 "처음에는 청 왕조의 위기를 구하는 역할을 담당했지만, 나중에는 바로 똑같은 성격에 의해 청 왕조를 와해시키는 지방의 자립과 독립으로 향하는 출발점이 된 것이다."(309)
서구 사상이 활발히 침투하는 민국 시기가 되면서, 봉건封建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일변한다. 옌푸는 "종법사회를 불평등한 사회로 보고, 주공·공자는 종법사회의 성인이며, 삼대三代의 봉건은 봉건제도이지 자치는 아니라고 평가"(323)했다. 진천화는 “우리는 총체總體의 자유를 구하는 것이지, 개인의 자유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공화共和라 함은 다수의 인간을 위해서 꾀하는 것으로 소수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여기서 "공公은 다수자, 국민 또는 인민 전체이고, 사私는 소수자, 전제자로 보는 분명한 구도"가 있는데, 이는 일방적으로 사회주의 이념의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사회관계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공'개념을 계승한 것이다.(333-4)
중국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천하생민天下生民 사상에 따르면, "백성은 국가(근대 이전에는 조정이 곧 국가였다)에는 관여하지 않는 하늘에 의해 태어난(그런 의미에서는 생민·천민天民이라 한다) 천하의 생민이고, 따라서 어느 왕조의 존망에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처럼 "오직 자신들의 ‘향리공간’에 있어서 생활의 확보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는 무정부적인 생민관은 근대까지 계승되어 살아남았다. 이때 국가의 속박을 받지 않는다는 '산사散沙의 자유'는 "사적 이익을 좇는 방종한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향리공간에서 볼 수 있는 네트워크 사회의 공동 윤리규범이 엄존"하는 공동체 내에서 허용된 자유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339-40)
중국을 지배한 사상은 무엇인가, 상호부조와 향치에 관하여 marine ㅣ 2012-12-03 ㅣ 공감(2) ㅣ 댓글 (0)
중국 사상사에 대한 깊이있는 분석이 돋보임.
그동안 서양사적 관점으로 중국 등의 동아시아 역사를 바라본 게 아닌가 반성이 된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관은 서양처럼 시민계급과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했을 경우에만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상호부조와 향치라는 두 단어로 이 책을 요약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민간 주도나 관 주도와는 다른, 자치와는 또다른 의미의 향치.
그 거대한 제국이 진시황의 통일 이후 2천년의 시간 동안 분열되지 않고 하나의 제국으로 응집될 수 있었는지 그 힘의 배경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유럽은 거대한 제국의 출현이 불가능하고 경쟁 속에서 발달했는데 왜 중국은 하나의 제국으로 계속 존재해 왔는지 의문이었는데 비로소 풀리는 느낌이다.
향신층의 존재는, 과거에는 시민사회를 갉아 먹는 민중을 억누르는 계층으로 생각했는데 그들의 존재가 중앙 정부의 통치를 돕고 향촌 사회를 유지해 왔다는 것을 확인했다.
저자들의 말대로 지금까지 중국 공산당은 마르크스식의 공산주의라기 보다는, 오히려 중국 전통의 상호부조 정신을 구현해 왔고,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밀려든 21세기에 비로소 경쟁과 개인주의라는 거대한 물결에 적응하려 애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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