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 造化
NAVER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정의
조물주의 힘과 재주 또는 신통하게 된 사물을 가리키며, 동학(東學)에서는 ‘하느님의 조화(天主造化)’를 일컫는 말.
내용
‘하느님의 조화’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그저 저절로 되는(無爲而化)’ 자연적 사물의 변화 및 생명의 생성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이 이 ‘됨’의 천리(天理)를 자각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이루어내는 창조를 뜻한다.
따라서 ‘하느님의 조화’란 객체적으로는 그저 저절로 ‘됨’이요 주체적으로는 새로운 ‘만듦’이다. 동학의 창도자인 최제우(崔濟愚)는 “대저 옛적으로부터 봄과 가을이 서로 바뀌는 것과 사시(四時)가 성하고 쇠하는 것이 변함이 없으니, 이 또한 하느님 조화의 자취가 천하에 밝게 드러난 것이니라(蓋自上古以來 春秋迭代 四時盛衰 不遷不易 是亦天主造化之迹 昭然于天下也).”라고 하여 사물의 자연적 변화에서 조화의 경험적 사실을 찾아냈다.
또한, 그는 “격치만물(格致萬物)하는 법과 백천만사(百千萬事) 행하기를 조화중(造化中)에 시켰으니”라고 하여 새 역사의 창조는 ‘무위이화’의 이치를 자각하여 이를 역행(力行)에까지 실현함에 있을 뿐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최제우는 인간의 이러한 창조적 참여를 ‘조화정(造化定)’이라고 규정하면서 “그저 저절로 되는 하늘 조화의 그 밝은 덕에 합하여 새로 만들고자 하는 그 마음을 정립함이다(造化者 無爲而化也, 定者 合其德 定其心也).”라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천심이 곧 인심(天心卽人心)’인만큼 인도(人道)로서의 이러한 ‘만듦’은 결국 하늘 조화의 주체적 파악과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람의 이치와 하늘의 이치가 다르지 않기에 함께 ‘그 덕을 합하는(合其德)’ 새로운 ‘만듦’이 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창조적 참여가 가능한 그 근거로서의 천도의 자각, 즉 조화의 주체적 파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수기심 정기기(守其心正其氣)’라 하여, 이미 나에게 품수(稟受)되어 있는 하늘 조화의 참된 그 마음을 삼가 지켜 이를 공경하고 믿음으로써 그 기운을 바로 함이 인도로서의 창조적 참여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하느님을 지극히 위함(至爲天主)’이요 ‘하느님을 모심(侍天主)’에 다름아니다.
그러므로 최제우는 ‘시천주 조화정(侍天主造化定)’이라고 규정하여 이를 표현하였다. “하느님을 모신다고 함은 안으로 신령(神靈)이 있을 뿐만 아니라 결국 그것이 밖으로 기화(氣化)함이 있게 되는 것인데, 온 세상 사람들이 저마다 모신 자신의 시천영기(侍天靈氣)만은 그 어느 누구도 결코 옮기지 못할 조화성 자체임을 깨달아 앎이다(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라는 구절이나 최시형(崔時亨)의 “안으로 신령이 있다고 함은 처음 땅에 떨어진 벌거숭이 어린이가 타고난 참된 마음이요, 밖으로 기화가 있다고 함은 아기를 밸 때 이(理)와 기(氣)가 질(質)에 응하여 새로운 형체를 이룩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밖으로 이 몸에 내려 지피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 말씀이 내리는 가르침이 있다고 함과, 하늘 조화의 지극한 기운으로서의 허령(虛靈)이 이제 나에게 이르러 기화되기를 원한다고 함이 이것이니라(內有神靈者 落地初赤子之心也 外有氣化者 胞胎時 理氣應質 而成體也 故外有接靈之氣 內有降話之敎 至氣今至 願爲大降者 是也).”라는 구절은 모두 이러한 점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시천주’는 ‘조화정’의 가능근거이며, ‘조화정’에 있어서 우리의 영과 육, 지(知)와 행(行)은 합일되고 천덕(天德)과 인덕(人德), 인심과 천심은 둘로 나누어져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조화정’은 하늘이 자기실현의 공을 이루는 것인 동시에 사람이 ‘무위이화’의 천리를 자각하여 역행에까지 실현함으로써 천지화육(天地化育)의 공을 돕는 천인합덕(天人合德)의 창조인 셈이다.
즉, 사람이 안팎으로 온전히 참[誠]됨으로써 마침내 하늘 조화의 참된 그 마음에 합한 시존(侍存)의 새로운 ‘만듦’이기에 그것은 이미 조화의 체험인 것이다.
--------------
참고문헌 2건
출처
제공처 정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
저자/제공처
한국학중앙연구원http://www.aks.ac.kr
정의
조물주의 힘과 재주 또는 신통하게 된 사물을 가리키며, 동학(東學)에서는 ‘하느님의 조화(天主造化)’를 일컫는 말.
내용
‘하느님의 조화’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그저 저절로 되는(無爲而化)’ 자연적 사물의 변화 및 생명의 생성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이 이 ‘됨’의 천리(天理)를 자각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이루어내는 창조를 뜻한다.
따라서 ‘하느님의 조화’란 객체적으로는 그저 저절로 ‘됨’이요 주체적으로는 새로운 ‘만듦’이다. 동학의 창도자인 최제우(崔濟愚)는 “대저 옛적으로부터 봄과 가을이 서로 바뀌는 것과 사시(四時)가 성하고 쇠하는 것이 변함이 없으니, 이 또한 하느님 조화의 자취가 천하에 밝게 드러난 것이니라(蓋自上古以來 春秋迭代 四時盛衰 不遷不易 是亦天主造化之迹 昭然于天下也).”라고 하여 사물의 자연적 변화에서 조화의 경험적 사실을 찾아냈다.
또한, 그는 “격치만물(格致萬物)하는 법과 백천만사(百千萬事) 행하기를 조화중(造化中)에 시켰으니”라고 하여 새 역사의 창조는 ‘무위이화’의 이치를 자각하여 이를 역행(力行)에까지 실현함에 있을 뿐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최제우는 인간의 이러한 창조적 참여를 ‘조화정(造化定)’이라고 규정하면서 “그저 저절로 되는 하늘 조화의 그 밝은 덕에 합하여 새로 만들고자 하는 그 마음을 정립함이다(造化者 無爲而化也, 定者 合其德 定其心也).”라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천심이 곧 인심(天心卽人心)’인만큼 인도(人道)로서의 이러한 ‘만듦’은 결국 하늘 조화의 주체적 파악과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람의 이치와 하늘의 이치가 다르지 않기에 함께 ‘그 덕을 합하는(合其德)’ 새로운 ‘만듦’이 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창조적 참여가 가능한 그 근거로서의 천도의 자각, 즉 조화의 주체적 파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수기심 정기기(守其心正其氣)’라 하여, 이미 나에게 품수(稟受)되어 있는 하늘 조화의 참된 그 마음을 삼가 지켜 이를 공경하고 믿음으로써 그 기운을 바로 함이 인도로서의 창조적 참여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하느님을 지극히 위함(至爲天主)’이요 ‘하느님을 모심(侍天主)’에 다름아니다.
그러므로 최제우는 ‘시천주 조화정(侍天主造化定)’이라고 규정하여 이를 표현하였다. “하느님을 모신다고 함은 안으로 신령(神靈)이 있을 뿐만 아니라 결국 그것이 밖으로 기화(氣化)함이 있게 되는 것인데, 온 세상 사람들이 저마다 모신 자신의 시천영기(侍天靈氣)만은 그 어느 누구도 결코 옮기지 못할 조화성 자체임을 깨달아 앎이다(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라는 구절이나 최시형(崔時亨)의 “안으로 신령이 있다고 함은 처음 땅에 떨어진 벌거숭이 어린이가 타고난 참된 마음이요, 밖으로 기화가 있다고 함은 아기를 밸 때 이(理)와 기(氣)가 질(質)에 응하여 새로운 형체를 이룩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밖으로 이 몸에 내려 지피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 말씀이 내리는 가르침이 있다고 함과, 하늘 조화의 지극한 기운으로서의 허령(虛靈)이 이제 나에게 이르러 기화되기를 원한다고 함이 이것이니라(內有神靈者 落地初赤子之心也 外有氣化者 胞胎時 理氣應質 而成體也 故外有接靈之氣 內有降話之敎 至氣今至 願爲大降者 是也).”라는 구절은 모두 이러한 점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시천주’는 ‘조화정’의 가능근거이며, ‘조화정’에 있어서 우리의 영과 육, 지(知)와 행(行)은 합일되고 천덕(天德)과 인덕(人德), 인심과 천심은 둘로 나누어져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조화정’은 하늘이 자기실현의 공을 이루는 것인 동시에 사람이 ‘무위이화’의 천리를 자각하여 역행에까지 실현함으로써 천지화육(天地化育)의 공을 돕는 천인합덕(天人合德)의 창조인 셈이다.
즉, 사람이 안팎으로 온전히 참[誠]됨으로써 마침내 하늘 조화의 참된 그 마음에 합한 시존(侍存)의 새로운 ‘만듦’이기에 그것은 이미 조화의 체험인 것이다.
--------------
참고문헌 2건
출처
제공처 정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
저자/제공처
한국학중앙연구원http://www.aks.ac.kr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