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17

요한복음 풀이 1-내면의 예수 1 > 성서연구 | 바보새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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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 요한복음 풀이 1-내면의 예수 1
작성자 바보새 14-07-17 11:52 조회1,3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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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예수 1
요한복음 풀이 1



성경 연구의 의미
퀘이커들은 어제도 말씀했지만 다른 개신교 사람들 모양으로 성경을 절대 중심이라고 할까요, 표준이라고 할까요, 그러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성경공부를 잘 안해요. 다른 나라 사람들을 봐도 도무지 안하는 건 아니지만, 뭐 예배시간에 성경을 가지고 설교를 하는 것도 아니고 하니까 자연히 언제부터인진 모르게 성경귀절을 가까이 안하게 됐습니다. 그것도 일종의 잘못이다, 폐단이다, 그런 생각이 있는데, 본래 그런 건 어디나 다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가령 불교를 얘기해도 거기서도 경전을 중요시해서 그걸 연구해야 된다는 사람들과 또 그보다는 내 마음 속에 공부해서 깨닫는 그 편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 여러 종파가 있었다가 다 합쳐서 교종(敎宗) 선종(禪宗) 둘만 남았잖아요. 교종이란 경전을 깊이 공부하는 것이고, 그리고 또 선종은 마음에 깊이 깨닫는 그래 석가님이 본래 '교외별전’이라 해서, 가르침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제가 생각을 해서 깨닫는 데가 있어야 한다 그랬는데, 그쪽에서 발달해온 것을 선종이라고 그럽니다. 그렇지만 토론이 많은 거기서도 역시, 경전공부 안해가지고 되는 법 없고, 또 아무리 경전이라 그래도 제가 생각해 깨닫는 것 없이 공부만 해서 되는 법도 없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다른 나라는 또 몰라도 우리나라는 본래 퀘이커 시작할 때부터 그저 외국 사람들이 와서 가르쳐준 것이니까, 따라 배우고 그랬는데, 그들이 그때 그렇게 성경을 가르친다든지 그러지 않았으니까 성경공부 하는 버릇이 없어왔고, 또 서양 사람은 교회 내려오기를 천년 넘도록 내려왔으니까 자연히 교회를 가거나 아니 가거나 성경이 뭐라는 건 다 그래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교회를 다닌 사람은 모르지만 교회 안 다니던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는 형편입니다.
어쨌든 퀘이커에선 자기 부모 때부터 퀘이커 가정에서 나서 자라서 퀘이커가 된 사람은 그걸 아주 ‘본 퀘이커’ (Born Quaker)라고 그랬어요. 그리고 그렇지 않고 자기가 그냥 살아오다가 이렇게 생각을 해서 퀘이커로 들어온 사람은 ‘컨빈스드 퀘이커’ (Convinced Quaker)라 그래요. 자기가 깨달았다고 할까, 그래 제 마음으로서 온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는데, 그러나저러나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간에 서양 사람들은 사회상식으로라도 “기독교는 이런 거다. 성경은 이런 거다” 그런 걸 알고 있으니까 그래도 좋은 편이지요. 하긴 그래서 또 나쁜 점도 있습니다. 깊이 알지도 못하면서 ‘알고 있거니’ 그러면 깊이 들여다볼 필요도 없어지니까. 이건 마치 우리 동양 사람으로 말하면 언제『논어』『맹자』읽어보지 않았어도 유교는 이런 거다 하고 알고 있으니까, 상식으로라도 공자 맹자 하는 것을 들었으니까, 들은 풍월이라도 있어서 좋은 점도 있고 또 다 알지도 못하면서 톡톡히 공부해볼 생각도 않아 나쁜 점도 되고 이러는 모양으로, 서양에서도 아마 성경에 대해 그런가봅니다.

성경이라면, 우린 물론 그렇지도 못하지만, 서양에선 그거 안 만져본 사람들이, 그것이 뭔지 모르는 이가 있을 리 있어요. 그런데 기실 성경을 언제 깊이 봐본 일이 있느냐 하면, 집에 놔두긴 놔두어도, 어느 집에 가도 성경 없는 집이 없겠지만 기실 성경을 깊이 읽었느냐 하면 그렇지가 못해요. 그래 루터가 그랬다고 하잖아요? 루터가 주기도문을 말할 때 “최대의 순교자는 주기도문이다.” 그건 왜 그런고 하니 기독교 ale다가 그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죽은 사람을 순교자라 하는데, 세상에 주기도를 예배 시작 전에 하지 않을 수도 있고 예배 끝나고 하는 수도 있지만 여하간 주기도처럼 많이 하는 것은 없는데, 그 뜻을 생각해보고 하는 일은 별로 없어요. 그러니 그야말로 그냥 희생당하는 거다 그런 의미로 ‘최대 순교자’ 라 말했었는데, 이제 주기도만이 아니고 성경책이 또 그렇다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책 이것이 최대 순교자이다 이걸 보긴 모두 보는데 또 이걸 모두 아는 척 그러는데, 실지 이걸 정 말 참으로 봐서 그러는 사람은 드물어요.
그러니까 내 개인의 경험으로 봐도 어려서부터 기독교에서 만든 소학교에 다녔으니까 소학교 때부터 성경공부도 해봤지만, 그저 “성경책은 기독교에서 보라는 거다, 그냥 보는 거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 이런 권위 밑에서 으레 그렇게 알아야 하는 걸로 돼 있었고, 어느 때는 무슨 성경을 본다든지, 듣는다든지 그랬지만, 내가 실지로 정말 그 뜻을 알아보려고 그러는 일은 별로 없이, 그저 그러니까 스물이 넘도록 성경은 그저 그런 걸로 알았어요. 처음에는 어른들이 가르치면서 읽으라고 그러니까 읽기도 해보고 그랬지만, 그 담에는 제가 스스로 읽어야 하는 것인데도 그러지는 못했어요. 그러니까 성경을 알고 있겠거니 하고는 있었지만 사실은 많이 알고 있지도 못하면서 여러 해를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다 연구란 말을 붙여서 그러기는 후에 일본 가서 우치무라의 무교회 모임에 간 다음부터 시작이 됐어요. 그러니까 그이에게서 놀라운 건 보통 무슨 교회라든지 그렇게 이름을 안 붙이고 그저 “우린 성경 읽는 모임이다” 그래요. 그렇게 성경에 주력했어요. 다른 책을 연구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성경은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 그리면 그렇게 알 뿐이지, 그걸 연구한다 그러면 좀 이상하게 여긴단 말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참 놀랐어요. 아, 성경이란 이렇게 보는 건가 그랬어요. 그래 그때 비로소 성경 대하는 태도가 이래야만 되겠다 그랬었는데, 기독교도 이제 수천 년 되고 하니까 이건 다 자란 종교로, 거기 들어가면 개신교는 설교도 해주고 그러니까 그럼 그걸 그저 안 걸로 그러지, 실지 자기가 공부하려고 그러지는 않으니까 말로만 아는 거지 실지로 이게 뭔지 모르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그런데 성경이라는 거는 다른 글도 그렇지만 이거는 그야말로 참으로 연구를 해야, 파고들어서 생각을 하면서 내 마음을 넣어서 보고 그저 지식적으로만이 아니라 내 참 실지 사는, 육신이 사는 문제만이 아니라 정신이 사는 생명의 양식이다, 이걸 먹고야 이걸 알아야 이걸 봐야 산다고 하는 그런 생각으로 봐야 하겠는데 그렇게 되지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름으로만 거룩하다고 떠받들지만, 성서야말로 참 희생이라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요.

생명의 양식
그런데 그 얘기는 그렇고, 이제 성경시간 갖게 됐으니 하는 말입니다만, 본래는 금년엔 강사가 한 분 오셔서 하기로 돼 있었지요. 그래 이런 때는 불과 날수는 몇 날이 안되지만 성경에 대해서 내 대하는 태도가 좀더 진지하게, 이건 정말 날마다 세 끼씩 먹고 산다, 먹어야만 산다는 생각으로 음식을 대하는 모양으로, 이것도 그래야 하겠는데, 말로는 이걸 ‘생명의 양식’이라 ‘생명의 물’이라 그러지만 실지로는 그런데 미치지 못하는 마음이 많으니까 문젭니다.
우리들, 더구나 서울모임 사람들은 교회 다니다 나온 사람도 물론 많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은데 그런 사람들은, 교회 다니던 사람들은, 교회 다녔으니까 그래도 상식으로라도 이렇게 하는 것을 대강 아는데, 교회도 안 가본 사람들은, 남의 맘을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어떻게 돼서 왔든지간에 온 담엔 그저 또 퀘이커 풍속이 그렇게 돼서, 성경을 가지고 꼭꼭 설교를 한다든지 그러지도 않으니까, 그저 자기가 알아서 성경을 읽어야겠는데 그렇게도 못돼요. 그저 그만 어물어물 넘어가고 마니까, 그래만 가지고는 신앙이 깊이 뿌리가 박힐 리가 없지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불교에서 경전공부냐 또는 참선해서 깨닫는 거냐 그 두 싸움이 늘 내려오는 모양으로 기독교도 그런 문제가 있는데, 불교에선 전통적으로 그런 문제가 있으니까 토론이라도 되지만 기독교에선 그런 문제가 있는데도 문제를 삼지도 않아요. 우리나라처럼 ‘들어온 퀘이커’는, 남들은 까닭이 있어서 경전이라고 그러는데 그걸 공식적으로 하나님 말씀이라고 해서 깊이 내가 그걸 씹어서 생명의 양식을 삼으려고 하는 노력도 없이 그저 얼렁뚱땅하고 있는 데 대한 반동으로 “형식적으로 설교하는 걸로 되느냐?” 해서 그렇게 됐었던 겁니다. 애초 '퀘이커’들이 성경을 가지고 설교를 하고 한다든지 하는 것을 안하게 된 것은 말이오.
그렇다면 나 자신이 누구의 말을 듣는 게 아니라 내가 이걸 스스로 씹어먹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하는 데 시간이 있어야겠는데 그러진 못하고, 그리고 우리는 그나마도 또 밖에서 온 걸 그저 그런 식으로 얇이 배웠으니 말입니다. 그전에 교회 다닌 적도 없지, 그렇다고 예배 볼 때 꼭꼭 성경을 가르쳐주는 일도 없지, 그렇게 지내니까 도무지 말이 안돼요. 그런 폐단이 있는 것 같아서 그 동안 몇 해를 성경공부 해야 된다는 걸 강조해오느라 해왔었지요. 그래도 그걸 잘 하질 못했습니다.

그래 금년에는 말씀하시는 분이「요한복음」을 늘 두고 연구하시는 분이 있다고 해서 참 잘됐다 그러고, 그럼 이런 기회에 여럿이 한번 모여서라도 성경공부 하는 시간을 가져왔으면 그랬는데, 어떻게 또 갑자기 못 오시게 됐어요. 그래 나는 뭐 강사가 오셔서 하시겠지 하고, 각별히 준비라는 생각도 없었고 또 틈도 없고 그랬는데, 이왕 못 오신다고 하니까 어떻게 합니까. 일이 그렇게 되었는데 선생이 와서 해주리니 바라고만 있을 게 아니라, 각자가 모두 누가 와서 밥을 지어줘서 먹겠거니 그럴 거 없이, 끼니가 되면 제가 제 손으로 제 먹을 거 못 만드는 사람이 없는 모양으로 말입니다. 그래 일이 이렇게 된 거는 우리 자신더러 해보란 말이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니까 뭐 준비야 있든지 없든지, 그럼 이왕「요한복음」말씀해주신다고 했으니까「요한복음」읽어가면 좋지 그래서 그냥「요한복음」가지고 나왔고, 또 내가 성경책은 마찬가지라면 마찬가지지만, 평소에도「요한복음」을 비교적 많이 봐요. 그래 그런 것에 대해 서너 시간 얘기 나오는 대로 해볼까 그럽니다.

속의 예수 내면적 예수
첫째는 이「요한복음」이란 건 그밖의 다른 복음보다 성질이 좀 다르다는 특색이 있어요. 그거 하나 우선 알아야 할 겁니다.「마태」「마가」「누가」그 셋을 공관복음이라 그러는데, 공관복음이란 것은 대체로 같은 점이 많이 있어요. 그런데「요한복음」은 그 예수의 전도하시게 된 일생에 관해서 말씀하신 거는 같지만, 많이 다른 점이 있어요. 때문에 공관복음과 자연히 구별이 돼서 이걸 제 4복음이라 그러고 특색이 있는 걸로 말하고 그러지요.
그럼 이것이 어떻게 다르냐? 간단하게 말한다면 「마태」「마가」「누가」는 서로 각각 대동소이하게 대체로 같고 부분적으로 조금 다른 것이 있습니다. 이건 세상에서 다 일반상식으로 된 거지만 근래 학자들이 이걸 연구한 결과로는「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되었고, 그게 아마 제일 기본적인 걸 거다, 하고 학설이 일치하나봐요. 그런데 거기 이 기회에 그 말에 관해서 하나 덧붙여서 조금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것은 근래에 와서 달라진 태도지 옛날에는 성경을 감히 무슨 연구다, 비판이다 그러질 못했다 그 말입니다.

이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니까…… 그런데 이제는 다 상식이 된 말입니다만 우리가 젊어서부터 그 성경비판이라고 그러는 것이 나기 시작했는데, 그건 그래서 나쁜 점도 있고 좋은 점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걸 좀 생각해봅시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그러니까 심지어는 이건 첫마디부터 마지막까지 여기다가 한 말씀을 더해도 안되고 덜해도 안되고 하는 말이 있을 정돕니다. 그저 이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니까 아주 요지부동한 것으로 감히 누가 이러고 저러고 말할 수가 없는 거로 그렇게 알았고, 또 그래야만 성경의 권위가 서는 줄로 알았는데, 그거 다 근세에 와서 학문이 발달하는 것에 따라서 다른 문헌과 마찬가지로 여기 성경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태도로 연구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많이 달라지게 됐어요. 그래 그것을 이제 20세기에 들어와서 ‘고등비판’ 이라 그랬어요. ‘하이어 크리티시즘(Higher Criticism)이란 것인데, 어디 성경에 대해서 비판이란 말이 있을 수 있나요? 그럴 수 없는데, 이걸 문헌적으로 연구하면서부터 그런 말이 생겼지요. 그럼 문헌적 연구는 어떻게 시작됐느냐 하면 이 구약은 본래 히브리말로 씌어졌던 건데, 사람들이 내려오면서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나라가 망하니까 히브리 사람이 히브리 말 모르게 됐어요. 지금 우리가 세계에서 영어를 국제어로 다 쓰는 모양으로 그때 예수님이 나셨던 그 당시만 해도 벌써 희랍 말이 세계 공통어로 돼갔으니까 예수님도 본래 히브리 말의 한 갈래인 ‘아람어’를 말씀하신 걸 다 알지만 그리고 또 당시에는 예수님은 물론이고 그 제자들과 일반이 다 헬라 말로 썼는데 그러니 신약성경은 헬라 말로 쓰이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본래 구약은 히브리 말로 쓴 것인데 차차 내려오는 동안에 자기네 것이지만 자기네 걸 잘 모르게 됐고, 부득이 이걸 희랍 말로 번역을 해서 보게 됐어요. 그게 ‘알렉산드리아의 70인 번역’이란 겁니다. 그다음에 신약은 예수님 나시고 돌아가시고 승천하시고 하신 같은 세기, 즉 1세기 말경에 처음에는 말로 전해오던 것을 그냥 늘 그대로 말로만 전해갈 수가 없으니까 기록을 해놔두자 해서 기록이 생겼는데, 복음서보다는 실지로는 서간이 먼저 됐어요. 순서도 반드시 역사적인 순서가 아니고 가장 먼저 된 것은 아마「데살로니가 전서」지요.

그리고「요한복음」은 이제 그중에서도 비교적 나중에 된 것입니다. 복음서가 되기는 후에 됐고, 있기는 먼저 말로 전해 내려왔는데, 살아 계실 때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예수님 하시는 말씀을 듣고 기록을 해둔 것도 있겠지만, 그때는, 돌아가신 직후에는 그저 만나서 자기네가 언제 어디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증거를 했던 건데, 즉 귀로 들은 것을 말로 전하여왔던 셈인데, 요새 세상처럼 무슨 기록을 첨부터 이렇게 해둔다든지 그러진 못했던가봐요.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에 아무래도 기록할 필요를 느껴서 기록을 하고 그랬던 모양이니까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 아직도 자세치는 못하지요. 대체로 학자들 의견이 일치하는 게「마가복음」이 아마 제일 먼저 된 것이든지,그렇지 않으면 그「마가복음」자체보다도 그전에 본래 있었던 것이 있어서 그걸 아마 토대로 하고 그렇게 된 거 같다, 그래서 4복음 중의 세 복음 「마태」「마가」「누가」셋 중에서 가장 초기에 됐고 가장 골자가 된 것은「마가복음」이라고 그렇게들 인정을 합니다.
그런데 그럼「마가」는 그 자료를 어디서 얻었는가 하면 그것도 어디선가 베드로 계통에서 그건 또 딴 문제니까 얘기할 거 없지만 그런 걸로 이제 그렇게 알고, 또「마가」에 있는 걸 「마태복음」에서 쓰는데, 「마태복음」에서도 또 자기가 다른 데서 얻은 자료를 넣었다. 그렇게 돼 있습니다.「누가복음」은「마가복음」을 표준으로 하는데, 자기가 다른 데서 얻은 자료를 더해서 그렇게 넣은 것이 있고, 그것 말고「마가복음」에 있던 것도 아니고「마태」가 따로 얻은 것만도 아니고「누가」가 따로 얻은 것만도 아닌, 어디가 출처인지는 모르지만 보통 ‘Q’ 라고 그러는 데서 나온 사료들이 있고.

학자들이 이제 이런 말 하는 거는 성경에 대해서 연구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연구는 그저 하는 게 아니라 이 성경이 지금은 이렇게 책으로 돼 있지만, 본래 책이 있기 전에는 두루말이에요. 애굽에서 된 건데,파피루스(papyrus)라고 그래요. 지금 영어에 페이퍼(paper)라고 하는 것은 파피루스라고 하는 풀, 우리나라 왕골 비슷하다는 그런 풀인데 거기서 나오는 건데, 그걸 이렇게 쪼개서 죽 펴서 속을 훑어내고 여기 나가면 그런 풀 있잖아요? 오양 같은 거. 엊저녁에 들에 깔았던 거, 그렇게 생긴 건데 그걸 주욱 따서 밀어버리고 넓적한 껍데기를 펴서 거기다 글을 써요. 그리고 또 우리 등심이라는 거, 등심초(燈芯草), 등심도 한약에 쓰는 건데 그걸 따서 속에 든 하얀 걸 따내버리면 깔때를 만들 수가 있는데, 애굽에서 이런 것과 비슷한 그 파피루스라는 풀이 많이 나서, 그것을 옛날에 종이가 아직 없을 시절에 기록에 쓴 건데 쪼갠 것을 엮어가지고 거기다 고무풀을 칠하고는 그 위에 기록을 했어 요. 그래서 파피루스에서 페이퍼란 말이 됐어요. 애굽에선 그랬지만 이쪽 다른 편에서는 양을 많이 치니까, 어린 양의 가죽을 눌러가지고 거기다 썼어요. 양피지라는 것 파치먼트(parchment)라는 것인데, 동양에서는 또 그것과 다르게 대쪽에다 그럭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서간(書簡)이다, 편지할 때 서간이라는 간(簡)자도 대쪽이란 뜻이에요. 대쪽을 쪼개서 불에 쬐어 기름을 빼가지고 그걸 가죽으로 엮어서 둘둘 말아 그래 한 권 두 권 하는 권 (卷)자는 ‘두루마리로 말아뒀던 것’이란 뜻이에요. 편(編)자도 옛날 그런 것인데, 동서양이 이렇게 다르지만, 그 자료는 그렇게 해서 전해 내려오는 거예요.

경전에 대한 종교적 믿음
종교 믿음에서 그건 우리 동양에서도 그렇지요. 옛날에는 글이라 그러면 신성시했어요. 이런 책은 더더구나 신성시해요. 책을 놓을 때도 그걸 반듯이 놔야 했어요. 그걸 이런 변두리에 놓거나 그러면 어른들한데 크게 꾸중을 들었지요. “책을 그렇게 놓는 법이 어디 있느냐!” 했어요. 책은, 성현의 경전은 물론이지만, 성현의 경전까진 아니더라도 “글을 그럭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 책을 놓고 이렇게 넘어뜨려도 못쓴 나 했는데, 그런 건 다 옛날에 기록이 적었을 때 사람들이 이걸 얼마나 귀중히 여겼느냐 하는 그 풍조에서 내려온 것이에요. 특히 이 성경책 두루마리는 이걸 항상 보다가 만일 간직해둔다든지 할 때, 설혹 오래 써서 낡아 이젠 볼 수가 없어진 경우에도 그걸 그냥 내버릴 수가 없었어요. 그걸 그냥 내버리면 그건 불경(不敬)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쓴 조각이 여기 굴러다니고 저기 굴러다니고 그래서야 쓰겠느냐, 그래서 그렇게 함부로 버리질 못했다는 겁니다.
그럼 그걸 어떻게 했느냐 하면, 더럽힘을 입지 않도록 하려니까 이걸 애써 땅 속에 파묻는다든지 했대요. 그러다가 이제 후에 전쟁이 일어나고 하면 안되니까, 이건 귀한 거니까, 자기가 보던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니까 항아리에 넣어서라도 간직을 했다가 전쟁이 지난 다음에 꺼내자 이렇게 해서 묻어두었다가, 묻은 사람이 그만 죽고 그걸 찾을 사람이 없다든지 하면, 그게 수백 년 지나 발굴이 되고 그랬어요. 그중에서 유명한 거는 사해사본(死海寫本)이라고 사해 근처에서 「이사야서」두루마리가 나왔는데—몇 번 얘기한 적이 있으니까 그만둡시다마는—그런 걸로 인해서 성경을 많이 연구하고 또 그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이라고 그랬는데, 그런 거는 어떻게 보면 아주 우상숭배 같은 지나친 것이지만, 그런 일이 있기 때문에 경전이 돼서 이날까지 내려왔단 말이에요. 그런 거를 이제 우리가 좀 아시라고 그러는 말입니다.

경전을 베끼는 정성
이제 이 두루마리 책에, 양피지에다 베끼는 사람이 아무리 정신을 차려서 하느라고 해도 잘못 쓰는 일이 있지 않겠어요? 될수록은 잘못되지 않으려고 힘을 쓰지만 이거는 보통 책과 달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니까—가령 금강산에 가면 마하연이라는 절이 있어요. 마하연 ‘마하’는 크다는 뜻인데, 이 절에 보물로 비장한 게 있는데, 지금도 있는지 없어졌는지는 모르겠소만, 거기에 피로 썼다든가 금자로 썼다든가 하는 경전이 하나 있어요. 그런데 그걸 정성을 들여서 피로 글자를 썼다고, 혹은 금자로 썼다고 그러는데, 그러다가 붓이 닳아서 못쓰게 되면 무슨 족제비가 나타나 잡혀서는 꼬리로 붓을 하라고 그래줬고 했다는 재미있는 전설이 있어요. 옛날 사람들이 종교의 경전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가 하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여기 이 성경도 그렇대요. 그걸 볼 때는 물론 정성을 들여서 보지만 보다가 그럴 사정이 못돼서 그걸 내버리게 되는 경우에도 그걸 쓰레기통에 내버리지는 않는다는 거요.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그럴 수가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 가서 모욕을 당하는 그런 일이 없도록 땅에 깨끗이 묻는다든지 그랬다는 거요. 또 이렇게 문맥을 보면 아 전에 베낀 사람이 아마 잘못 베껴서 이렇게 됐지 싶은 그런 점이 있더라도, 내가 이걸 베낄 때 내 짐작으로 마구 고치지는 못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걸 내 마음대로 고칠 수가 없지. 그러니까 그걸 그대로 베끼고, 이건 이런 것이 아닌가 하고 자기가 별도로 거기다 주(註)를 단다든지 하는 이런 것이 있어서, 이 많은 양피지나 파피루스가 지금까지 여러 수천 가지가 있는 모양인데, 그중에는 완전한 것도 있고, 부분적인 것도 있고 그래요. 그래 거기 들고 나고,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고 한데, 그런게 다 보존이 되는 데는 뭐 미신이라고 그렇게도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이건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하는 정성을 쏟던 그런 마음이 있어서 이것이 보존이 되었다는 그런 점도 하나 알아야 하고, 쓸 때 어느 사람이 잘못 써서 그랬거니 추측이 돼도 그걸 감히 내 요량대로 고치질 못하고 그대로 베껴놓고, 심지어는 먹방울이 툭 튀어서, 이건 쓰다가 먹방울이 튀어서 된 것이지 하는 짐작이 되면서도 그걸 그대로 그 옆에다 그려 넣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건 그러리만큼 권위주의인데, 이 종교 경전은 물론이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옛날의 사람이 살아 내려오는 동안에 전통이라는 것이 어떤 거라는 거, 그런 것이 꽉 살아 있기 때문에 내려온 것도 있고, 또 그런고로 잘못되는 점도 있고 그런 걸 한번 생각해보시라고 그래서, 젊어서 들었던 거를 한번 해보는 겁니다.
이제 그런 결과로 지금 이 책이 됐어요. 학자들이라고 물론 순수하게 만능인 사람 어디 있겠어요? 다 부족할는진 모르지만, 근세 학문의 정신이 이렇게 난 다음부터는 그저 종교적인 마음, 존경하는 그 마음만이 아니라 물론 존경해야 한다는 그것도 잘 알지만, 한편으로는 사실을 사실대로 밝혀야지 하는 그 정신이 근래에 나온 비판정신 연구정신이란 말예요. 그래서 그 사람들 손에 들어가니까 이게 그전에 듣던 말과 다른 점이 많아요. 여태까지는 이러이러하게 생각해 왔지만 뭐 그런 거 아니고, 이것과 이것과 서로 대조해보면 말이 서로서로 다르게 이동(異同)이 나는 것도 있고, 또 문체로 볼 때 가령 그전에는 모세오경이라 그러면 이건 다 모세가 썼다 그랬지만, 학자들이 자세히 이걸 연구해보니까 이걸 도저히 한 사람이 썼을 수 없어요. 왜 그런고 하니 이것과 이것이 문체도 다르지, 써가는 내용을—뭐 나는 그걸 자세히 연구해보지 않았으니 이걸 다 욀 수가 없지만—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태도로 보니까 그게 성립이 될 수가 없어요. 그래 근래에는 “모세오경은 모세가 다 쓴 거다” 그런 전통의 말이 있기는 하지만, 그걸 그렇게 인정을 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 문제를 깊이 생각을 하면 그건 모세 한 사람이 썼다고 전통적으로 그래왔지만, 훗날에 설혹 모세가 안 썼더라도 존경하는 훌륭한 이의 이름을 붙여 부를 수도 있는 거고, 또 “그거 뭐 꼭 모세가 썼다거나 하는 게 하나님 말씀 되는 데 관계될 것이 없지 않느냐” 그렇게 할 수도 있고 해서, 지금은 그런 문젠 괜찮다면 괜찮아요. 우리나라에서 장로교가 보수파하고 기장파하고로 갈리게 된 것도 김재준 목사가—그이도 서양 가서 신학 했으니까, 신학대학에 가서 말 들으면 벌써 “모세오경은 모세가 다 쓴 거 아니다. 이건 편찬이 돼서 편집이 돼서 내려온 거로 그 이름을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한 사람이 다 썼다고 할 수가 없다. 그 증거는 모세가 썼다는데 자기 죽은 후의 얘기까지 있으니 그게 모세가 쓴 것일 수 있겠느냐?” 이건 이치로는 들어맞는 말이에요. 한데 그런 식으로 하니까 나중엔 갈라지게 됐어요.
물론 깊은 이면을 말하면 그것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무슨 관계 때문에도 갈라졌겠지요. 어느 때고 갈라질 것이다, 그런 말까지 나고 그러지 않았어요? 그러니 그럼 종교에 대한 태도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런 점이 현대 사람은 옛날과 다르니까 그런 점도 깨우쳐서 우리가 생각하고 지나가야 하니까 지금해보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데는 틀림이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거는 뭐 이제도 옛날 사람들이 생각하던 모양으로 저기 어디서 하나님이 불러서, 무슨 소리가 하늘에서 나서 그걸 받아서 기록을 했다든지 말로는 “내가 쓰라고 하는 대로 기록을 해라” 그래서 받아써서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돼 있지만, 그러나 그건 뭐 꼭 글자 그대로 고집하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하나 그걸 꼭 고집해서 하나님께서 필기를 시킨 거니까 일점 일획도 잘못이 없다 한 것은, 옛날에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해서 그대로 믿으려고 한 그 마음은, 존경하는 그 마음은, 틀림없이 옳은 거지만, 이제 학문으로 연구해서 이렇게 씌어있긴 하지만 어느 사람이 어느 시간에 쓰노라니까 잘못된 글자도 있고 옳게 된 글자도 있고 그랬다, 또 내려오다 다른 사람이 의견을 넣어서 받아쓴 것도 있다고 한 건 학문적으로 연구해서 하는 말인데, 그 방법은 이 문체와 저 문체가 같으냐 다르냐, 쓴 단어가 같은 단어냐 다른 단어냐 비교해서 연구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생각지도 않고 덮어놓고 “그런 소리 하면 되나?” 그렇게만 할 순 없단 말이에요.

비판정신과 신앙심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나가는 데는 별 지장이 되는 것은 없지만, 그걸 좀 깊이 생각을 하노라면 그만 믿는 마음조차 잃게 되는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권위를 인정하고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는 거예요. 그래야만 거기 담겨 있는 참 뜻을 알 수가 있게 돼요. 물론 “묻지도 않고 그러면 됩니까?” 그럴 수도 있어요. 있긴 있지만 그러나 그땐 이렇게 생각을 해보세요. 무시한 사람들 중엔 대개 그런 의심하는 사람이 없고 학문을 조금했다는 사람들이 생각을 해서 의심을 품게 되는데, 그러나 내가 배운 학문이라는 거 그건 또 얼마 되나요. 학문이란 불과 수백 년밖에 되지 않은 거예요. 물론 “지구는 둥글다, 태양이 중심이 돼서 모든 것이 돌아간다.” 이건 과학적으로 정당하게 증명도 되는 것이고, 그건 그런다니까 틀림이 없겠지만, 그래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옳은 것이에요. 옛날에 지구가 중심이 되고 태양이 돌아간다는 것을 과학적으로는 잘 몰랐으니까, 그 당시 연구가 그것밖에 안됐으니까 그렇게 알았겠지만, 이제 새로운 학문이 나와서 이렇게 문제가 될 때는 그건 당연히 이때까지 그렇게 믿어 왔더라도 고칠 건 고치게 돼도 상관없는 것이고, 그것과 과학의 진리는 상충이 안되는 모양으로 성경의 이것도 마찬가지예요. 그런 점은 너무 이렇게 겉에 붙잡혀서, 그것이 정말 기록대로 있는 그것이냐에만 치우 쳐서 다소 맞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해서 다소 틀린 것이 있다고 해서, 성경에 기록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냐 인간이 한 말이냐 그렇게 말 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하나님의 말씀이냐 인간의 말이냐 하는 뜻을 조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이게 크게 말한다면 다 사람의 입에서 나왔고 사람의 손으로 씌었지, 하나님이라는 이가 뭐 입이 있어서 말하는 것도 아니고 손이 있어서 글씨를 쓰시는 것도 아니고, 만약 그럴 수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도 한 물건이지, 하나님이라고 하는 자리는 그런 자리가 아닙니다. 이 현상계에 나타난 모양으로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 그건 조금 생각해보면 알 수 있어요. 그런데 그런 걸 채 생각도 안 해보고 하면 종래 있었던 신앙을 깨뜨려버리는 것 같아서, 걱정한 나머지 반발심으로 감정적이 돼서 싸움까지 벌어지고 그러는데, 그럴 때는 그걸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아는 거고, 한편으로는 “이것도 다 결국은 부족한 사람들이 한 것 아니냐? 그게 왜 하나님의 말씀이냐?” 이러고 해서 권위를 아주 부정해버리면 그것도 안되는 겁니다.
그건 왜 그런고 하니, 과학이라고 하면 지금 배운 이 물질계는 실험을 해서 배우는 거니까 부인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럼 그런 연구는 무엇에서 나오는 거냐 그러면, 결국은 우리 본 것, 들은 것, 맘에 생각해본 것, 만져본 것, 소위 감관(感官)이라는 오관(五官) 혹은 여섯 가지 육관(六官) 또는, 마음까지 해서 육심(六心)이라 불러서 여섯 가지로 되는 수도 있지만, 결국은 그것을 표준해 그러는데, 이 눈이라는 것 귀라는 것이 절대 믿을 수 있는 확실한 것이냐 그러면 안 그렇단 말이에요. 한 사람 자기 일로 봐도 내 눈으로 분명히 봤다고 그러는데 어떤 때는 그렇게 안 보이는 시간도 있고 또 안 보이던 건데 보이는 수도 있고, 들은 건데 소리도 없는 것일 수도 있고……
그걸 심리적으로 보면 근래 심리 연구한 걸 보면 여러분이 잘 알거요. 그러니까 사람의 감관이라는 거가 확실치 못하다는 건 학문에 의해서도 이젠 확실히 알려진 거예요. 그러니까 그 오관이라는 것이 어떤 확실성을 가지는 것이냐 하면 절대 그건 그렇지 않은 거란 말이에요. 그런 것은 모르는 것인데, 내가 연구한 걸로는 “틀림없이 이런 거다” 그래서 그게 무슨 변할 수 없는 권위가 되는 것처럼 생각을 해서 그걸 통과 못하는 것은 “이건 믿을 수 없지” 그렇게 될지 모르지만 그런 것은 아니에요. 이제 그런 걸 말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겁니다. 그러니 오늘은 길게 말은 못하고 한번 크게 생각해봅시다.

종교 경전의 생명력
이렇게 성경이라고 하지만 이것만 아니고 불교 경전, 유교 경전 등 많이 있는데 이걸 옳다는 사람들도 있고 안 믿으려는 사람들도 있긴 있지만, 그런 책들이 수천 년, 적어도 이천 년, 삼천 년씩 문헌으로서 내려오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는 거라 그 말입니다.
대체로 보면 사람이라는 건 다 제각기 생각을 한다고 하는 건데 이것이 수천 년을 그 생각이란 것을 뚫고 내려온 거예요. 마치 큰 나무가 있으면 그 나무가 비바람 속에서 이백 년, 삼백 년, 천 년, 심하면 저 미국 서부에 있는 큰 산맥에 가면 삼천 년, 사천 년 됐다는 그런 나무가 많이 있어요. 그런 모양으로, 그것이 뚫고 내려오는 모양으로, 이것이 그 사람들 속을 뚫고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데는, 조금 더 분명히 말한다면 이 시간 공간의 자꾸 변하는 속에 있어서 이걸 뚫고 내려오는 그게 대체 뭐냐? 내려올 때는 내 사사(私私)로 내 맘만 생각하지 말고, 그 가운데 누구라면 누구만도 생각하지 말고, 그 가지가지 많은 사람들의 비판도 있고 이것을 없애보려는 노력도 있고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사람도 많이 있는데, 그런 것을 겪어 내려오면서 오늘날까지 뭘로 내려온 거냐? 내가 과학적인 정신을 가지면 가질수록 수천 년 목숨을 이어 내려왔을 때에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셰익스피어도 그래요. 지금도 셰익스피어가 있었다는 사람도 있고, 없었다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 비판도 많지만, 어쩌면 지금까지도 영어 읽는 사람들 중엔 심지어는 인도를 잃으면 잃었지 셰익스피어를 잃어버릴 수 없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만큼 그렇게 하는 것은 그 까닭이 있으니까 그렇게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점은 내 한 사람의 “좋다, 언짢다” 하는 감정으로 부정이 되는 거냐 하면 그렇겐 안돼요.

이거는 그것보다도 더해서 동서고금에 별별 비판을 다 겪어오면서도, 이게 불 속에는 몇 번을 들어갔으며 물 속에는 몇 번이나 들어갔던가. 또 칼은 몇 번이나 겪었겠는가? 그렇지만 그걸 뚫고 내려오는 이게 있다 그 말이오. 이거는 참 그 하나씩 보면 하나도 절대적이라 볼 수 없는 인간성 속에서 어떻게 뭘로 내려오느냐 그 점이 중요해요. 이제 볼 때 자연히 조용히 앉아서 정성된 마음으로 대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도 여기 있어요.
그러니까 그래 보는 건데 그 얘기는 또 하다 보니 길어져서 나왔습니다만, 이제 근래에 오다가 이걸 연구해서 참 좋은 점이 많이 있어요. 어떻게 보면 성경의 권위가 옛날보다 많이 떨어진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현대에 와서는 종교가 차차 힘이 없어져가는 듯한 면이 있어요. 사람들이 그것 때문에, 여기 이것으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그것도 사람이 쓴 말이지” 그런 정도로 밖에 생각을 안하려고 하는 그것 때문에 그런 건데, 그것도 그럼으로 인해서 옛날엔 이것을 우상처럼 알고 무조건 그걸 비판도 못한다, 하는 것보다는 약해진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하게 이 속에 생명이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되고, 그것도 그러면서도 흐릿한 정신에는 또 그걸로 인해서 좋은 점이 있어요. 왜 그런고 하니 이것이 약한 점이 있어서 풍파에 못 견디는 거는 자연히 마찰이 돼서 빠져나가야만 아주 굳은 바위만 남는 모양으로, 인간의 비판을 견뎌오고 그러는 동안에 차차 차차 그 확실치 못했던 부분들이 떨어져나가고 남는다, 그런 점으로 보면 과학적 비판으로 인해서 의심을 해보는 것이 도리어 도움이 된다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점을 상식으로 마음에 단정을 해서 “에이 뭐 성경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 있느냐” 그렇게 쉽게만 생각을 말라는 거를 오늘 말해두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요새는, 다른 건 다 몰라도 사람들이란 권위주의에 반대하려는 본래의 경향도 있고 그러니까, 종래 옛날에 있던 문명이 잘못되니까 잘못됐다는 데 따라서 그 속에 있던 거는 다 부정해버리려 하는 그런 경향이 있어요. 한편 좋긴 좋지만서도 그럭하면 또 안돼요. 더구나 그중에 있는 종교적인 것은 사람이 영원한 것 무한한 것을 추구하는 그것 때문에 있는 거니까, 이걸 그중에 있는 같은 거로 묶어서 부정해버렸다가는 안돼요. 그러니까 공산주의자 같은 사람들이 크게 범하는 과오 가운데 하나는 그거예요.

한번 파괴하면 다시 찾을 수 없다
자기네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옛날에 있던 거 모조리 파괴해버리는 일들, 일단 파괴해버리면 다시는 찾아질 수가 없는 것인데, 그 다음에 가서 보면 그야말로 그런 게 있었더라면 하고 확신이 가는 게 많이 있는데, 단순히 자기네 가지고 있는 생각을 그 생각이라야 크게 보면 형편없는 지식인데 그걸 절대화해서 역사적으로 있던 문화와 유물을 존경할 줄 모르는 거는 아주 야만스러운 일이오. 거 뭐 종교야 믿든 안 믿듣간에 확실히 야만스러운 일인데, 지금은 어찌 보면 과거 시대의 문명이 잘못되고, 이 잘못된 문명이 물러가려고 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이걸 부인하려고 하는 생각 때문에 종래에 있던 생각들을 모두 허물어 없애버리려고 그래요.
그래 몇 해 전에 그랬잖아요. 한 이십 년 전에 히피라는 것이 나오고 요새는 또 영국의 젊은이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는데, 거기 정당한 이유가 아마 있을 거요. 그렇지만 그럴수록 옥은 가려서, 돌은 내버리지만 옥은 가려내어 쓴다는 모양으로, 정수(精髓)를 가려내서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요.

이 종교라는 건 이런 점에서 더군다나 어려워요. 어쩐지 지금 시대는 종교라 그러면 무슨 구시대의 뭐 같은 걸로 압니다. 물론 이 사회가 자꾸만 변천이 되어가는데 이 실사회에 있는 것들을 종교가 몰라주고 그러는 것 같아서 항의도 하고 싶은 생각도 나고 그렇긴 하지만, 그건 그렇지 않다는 거, 공정하게 해서 거기 잘못된 것을 지적은 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지금까지 오는 데는 그 속에 무슨 까닭이 있어 그런다는 걸 알아야 하고 존경해야 됩니다. 그리고 설혹 내게 모르는 점이 있으면, 납득이 안 가는 데가 있으면, 그 점은 지금까지는 내가 모르지만 그 모르는 점을 이렇게 정성된 마음으로 연구해보자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건 인류 전체로서, 인류만이 아니고 사실 크게 말하면 저 생물에서부터 오는, 내려오는 그 무슨 까닭이 있어서 그러는 거니까 그걸 존중해줄 줄 알아야 될 것인데, 그런 면 아무래도 좀 부족하다 그 말입니다. 이런 경전 얘기를 하자면 자연히 생각이 나서 한마디 하고 넘어가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하던 말의 본론으로 들어가면 이제「마태」「마가」「누가」 그 셋을 공관복음이라 하고, 다음「요한복음」을 그것과 다른 특색이 있는 걸로 얘길 합니다. 그럼 뭣이 어떤 점에서 다르냐 하면, 한마디로 하면, 물론 그걸 이렇게 말하면 위험이 대단히 많아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생각해봐 좋을 거예요.「마태」「마가」「누가」에 공통된 거는 주로 예수님이 실지 무슨 기적을 행했다든지, 어떠 어떻게 행동을 했다는 것을 서술해서 될 수 있으면 그대로 쓴 것입니다. 그건 자연히 아마 그랬을 거요. 예수님 살아계실 때도 그렇고 돌아가신 후에도 그렇고 자기네들이 예수님 하신 말씀을 듣고 느낀 사항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때 아무 때 이런 이를 고친 일이 있다, 이런 말씀하신 일이 있다, 물 위에서 어떻게 하셨다 그런 거를 말할 게 아니겠어요?

그런 걸 자연히 기록해두고 싶었던 것은 사실일 건데, 그게 대동소이는 해도 공통한 것인데,「요한복음」에 들어오면 그것보다는, 겉에 나타나셨던 그것보다는 ‘속의 예수’를 말하려고 해요.
예수님도 역시 사람이니까, 사람이란 원래 ‘속’뿐이잖아요? 즉 쉽게 말하면 ‘내면의 예수’ 란 어떻게 된 거냐? 당초 어디서 오신 것이며, 예수란 분의 그 속의 말씀은 어떻게 돼서 나오신 거냐 하는 ‘속’의, ‘뜻’의 ‘예수’라고나 할까? 그것도 뭐 어폐가 있는 말이기는 하지만, 주로 사람들은 일 그걸 보고 얘깃거릴 삼아서 전하기 쉽지만 ‘속’의, 그 속에 어떠한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말씀하셨던가를 전하기는 어렵잖아요?
그런데「요한복음」은, 이제 많이 읽어보시면 잘 아시겠지만 그런 면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이 책을 턱 열어서 보면 다른 복음「마태」「마가」 「마가」는 물론 처음에 서두를 꺼낼 때 아주 단순하리만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든지 다윗의 자손이라든지 그런 긴 말이 없어요. 그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그러지 않아요? 예수님은 어떤 사람인가 하는데 가장 중요한 거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그 말이니까 그걸로 시작이 됐지 다른 말은 없는데,「마태」나「누가」에 오면 벌써 그걸 그렇게만 말하지 아니하고 그걸 찾아올라가서 좀 자세히 말을 할 필요가 있게 돼요. 왜? 그 사람들은 이 성경이란 거를 예수님 나실 때까지 있던 구약, 이걸 굉장히 하나님의 뭣이라 믿어오는 사람들이니까, “여기 미래에 될 역사가 예언이 되어 있다. 예언자란 사람들이 미리 말한 것이 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은 꼭 그대로 응하고야 만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거기 보면 뭐라고 말했는고 하니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을 해서 이 다음에 네 자손들이 영원히 영원히 왕위가 떠나질 않을 것이라든지, 그러니까 그 담에 유대 역사에서 약속된 인물이 난다면 그건 다윗의 자손에서 반드시 날것이다 그런다든지, 다윗의 고향이 어디냐 그러면 베들레헴이니까 베들레헴에서 날 거다, 지금 우리가 이 성경을 봐도 그런 거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걸 말해야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납득이 갈 것이라 그 말입니다.

진리를 캐는 몇 가지 기준
그런데 그런 점이, 구약 속에 강조되어온 그런 게 있다고 하는 그 점에 바로 좋은 점도 있고 또 어려운 점도 있다 그 말입니다. 그거는 본래 하나님이 우주를 만드셨다고 그러고, 그중에서도 이 우주를 이렇게 만드셨다고 그러고, 또 이 우주를 이렇게 통치를 해가시는 것도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믿으니까, 그렇다면 이 다음에 그 통치가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말씀 안하셨을 리가 없지요. 그러니까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의 예언 없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또 그런 생각을 하면 자연히 그 다음에는 일어난 사실에 이걸 비추어서 과연 이것이 있나 없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됐을 거예요. 그런 점으로 생각을 하게 되면 확실히 거기 좋은 점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을 해볼 것은, 사람이 진리를 찾는다 그런 줄 아는 것이 뭘로 되나 하는 것입니다. 뭣 가지고 사람이 진리를 알 수가 있게 되나 그걸 생각을 해보면 그중에 서너 가지 얘기를 할 수 있어요. 하나는 우리 속에 내 마음이란 거 있으니까, 내 마음이 그건 참인지 아닌지, 진리인지 아닌지를 구별하게 되잖아요? 그래 아무래도 사람에게는 이 생각하는 마음이란 거 중요한 것이 사실이고 그 담에 또 하나 있는 거는 뭣 가지고 그 이치가 있고 없고를 아느냐 하면 여기 이 자연 속에 나타나 있는 거, 만약 자연이 저렇게 나타나 있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그걸 알지 못하였을 거예요. 그러니까 또 진리를 찾아들어가는 데는 조용히 동해에서 떠오르는, 오늘 아침에도 떠오르는 해를 봤지마는, 그런 거다 아침마다 올라오는 해를 그냥 무심히 지나치는 것보다는 어느 시간에 어느 아침에 나갔다가는 해가 올라오는 것을 조용히 보고 있노라면 거기서 반드시 느껴지는 뭣이 있을 거예요. 가령 달이 밝다, 많은 사람들이, 이때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달을 보고 거기서 뭘 생각하는 것이 있었을까 생각해봅시다. 시는 얼마나 많이 나왔고 철학은 얼마나 술하게 나왔을까? 그런 거다 자연으로부터 나왔어요. 자연이 우리에게 계시해준다고, 내게 뭘 보여주니까 계시라고 그러잖아요? 그래 그런 거 있는 것도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뭘 내가 알았는데 이게 내가 과연 참 옳게 본 것이냐 아니냐를 알려고 할 때는 첫째는 내 마음에 알아보는 거예요. 내가 내 마음에 내 생각을 비판해서 내 생각에서 이게 어떻게 나왔는가 반성해봐야 되는 겁니다.

그 다음은 이 자연조건에 비추어봐서 위대한 자연에 비추어봐서 내가 생각한 것이 옳게 느낀 거냐 아니냐 그것도 알아야 해요. 하지만 그것 말고 또 중요한 게 있어요. 그 다음 게 뭔고 하니 내가 내 생각이 옳은지 잘못된 건지의 표준인 내 마음은 내가 반성해갈 수가 있고 자연에 맞는지는 자연조건에 비춰봐 알 수 있지만, 그래도 또 남아 있는 알 수 없는 문제는 건 어디 가서 대보지요? 그건 종교경전, 여기다 비춰보는 거 이거 꽉 하나 있는 겁니다.
그래 옛날 우리나라에서 내가 어릴 때 종종 듣고 웃기도 하고 그랬지만, 기독교가 나왔고 기독교 얘기를 하니까 한문 하는 학자들이 먼저『주역』부터 펴놓는다는 거요. 어디『주역』을 펴보자. 거기 그런 게 있나? 건 왜 그런고 하니 동양에선 모든 진리가『주역』속에 다 들어 있다고 믿었으니까 예수라는 이가 나오고, 그렇지만『주역』속에 어디 그런 말 이 있나? 심지어는 비행기라는 거 있다고 그러니까 어디『주역』속에 비행기라는 거 있나 봅시다. 내 말 요점은 그런 것을 여러분이 잘 생각 하시라고, 버릴 것은 버리면서도 거기서 또 버려서는 안되는 게 반드시 있으니까 어떻게 그 산 부분을 잘 끄집어 내나, 그래 이제 그 점에서 종교경전이라는 거 꽉 있어야 됩니다.

종교 경전은 인류의 모든 경험의 총체
이게 뭐냐? 이것이 뭐냐? 이것이 하나님이라는 말 빼놓고 생각한대도 인류가 있은 이래 이날까지 모든 사람의 경험이 총체적으로 전체적으로 합해 된 것이 경전이란 말이오. 그러니까 표준이, 내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나는 나서 불과 80년, 80년이라면 경험이 80년밖에 안되지만, 이건 8만 년인지 80만 년인지 800만 년인지, 오랜 경험을 쌓아 된 여기에다 비쳐서 결정하게 생겼지, 내 의견을 가지고 절대화해서 그럴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이 이때까지 합해온, 총체적으로 경험해서 얻어온 그 지혜의 결정에다가 비판해서 해야만 되는 건데, 그중에서 과학적인 것도 그렇지마는 더더군다나 정신문제에 속하는 종교적인 것은 사람의 신비로운 정신적인 활동에서 나온 것이니까, 그렇게 돼서 결정된 이걸 표준 안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진리를 안다고 해서 따지고 들어가면 생각해서 아는 내 마음이 있어야지, 자연에 비춰봐야지, 종교경전에 비추어봐야지, 또 종교경전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공동으로 체험해온 이걸로 밖에 더 알 길이 없으니까 거기다 비추어봐서야 결정이 된다—그런 참고를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공관복음에서 이야기를 하는데도 이 사람들이 툭 하면 구약에서 “하나님 어디 예언했는가 보자” 찾아보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래「마태복음」에서 힘써 얘기한 것은 뭔고 하니 예수는 다윗의 자손이다 하는 걸 말하려고 하니까 베들레헴에서 나셨다 그랬어요. 그래 살긴 갈릴리에서 살았는데, 갈릴리는 베들레헴에서 떨어진 곳이에요. 그건 뭐 갈랄리는 저 북쪽으로 가서 있는 곳이고,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 시 남쪽으로 조금 가면 있는 조그만 성이지만, 왜 여기다가 예수님 나실 때에 사실은 그 부모가 살기는 갈릴리에서 살았지만 마침 그때 호적을 하러 오는데, 따지고 보니까 다윗의 자손이란 것이 알려지고 다윗의 고향이 베들레헴이어서 그 부모는 거기까지 갔다 했을까요. 그 부모가 베들레헴에서 실제 산 건 아닌데 베들레헴에서 난 것을 증거하려니 그 걸 사료를 밝혀야 했고. 그럼 그때 어떻게 됐느냐, 여관이 없어서 마구 간에서 났다는 설화가 있고, 그런 얘기가 나오는 것을 지금 우리가 생각하면 정말 그렇게 났을까 그렇게도 생각되고, 또 무슨 베들레헴에서 났다고 그러지만 그건 여관에 들어서 그런 것이지 고향은 아니지 않느냐 그러겠지만, 우리 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하나님이 미래의 역사에 대해서 미리 알려주시는 게 없지 않다는 걸 믿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그런 거를 짚고 넘어가지 않고는 새로오는 종교를 그냥 턱턱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회에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전통을 존중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전통의 형식에다 비끄러 매면 그건 또 잘못이 되고. 그런 때 그건 뭘로 되나 하면, 내 속에 진리를 갈라내는 데 있어서 내 속에 사심이 붙나 안 붙나, 내가 위태해 내 몸이 죽지 않을 것인가. 내가 살기 위해서 나란 그 생각이 붙으면 그건 물론 그때는 우리가 사사(私事)라 그러고, 내가 죽거나 살거나가 문제가 아니라 이 우주 전체가 이것이 어떻게 되느냐 궁금한 그 입장에 설 때 그때는 내가 사심이 있는 것이 아니니까, 참이냐 아니냐를 결정할 때에 아무리 내가 분명히 이렇게 해도 내 사사 마음 그걸 떠나지 못하고는 그걸 알지 못하게 되니 그 점 은 주의해서 될수록 어디에 치우치지 않는 마음에 도달하는 그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 현상의 세계에 있어서는 과학적인 태도가 좋아요. 그런대 그런 걸 이 정신적인 것에다 적용하기는 대단히 어려워요. 잘못 작용하다가는 크게 잘못돼요.

왜 그런고 하니 현실에 관한 것은 요 객관적이란 데만 비추어보면 결정이 되지만, 여기 정신세계에 들어오게 되면 객관적이란 게 있을 수가 없어요. 원체 그건 사람이 생각한다는 이 생각에서 나온 것이니까.
그럼 어느 것이 참이냐? 그건 내 생각만도 아니고 전통으로 내려오는, 전통이 이때까지 천년을 내려왔더라도 이제 와서 아니라고 부정 될 수도 있는 것으로 그것이 뭐 절대불변 가치가 있는 거는 아니니까. 그럼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이 아닌 우주를 꿰뚫는 그 마음에 내 마음을 합쳐가는 자리엘 가나 그 점이 매우 어렵습니다. 종교에서 우리가 양심이라 그러고 하나님의 감동을 받는다고 그런다든지 성경에서 성령의 운동이 온다든지 하는 것은 그 점을 말하는 건데, 이제 그걸 맘속에 두시고 우리 배우는 지식과 어느 때 가서 이게 갈등을 일으키는 것 같은 점이 있어도 그 점 혼동하지 말고, 그 점에선 과학이 적용되는 데까지 하긴 하지만 그건 또 차원이 다른 문제이니까 요건 또 과학적인 그 태도만을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을, 스스로 겸손해질 줄 아는 그런 것도 있어야 할 겁니다. 하여간 여기 이제 예언자들이 본래 말이 있어서 그랬다는 걸 생각하고「마태」「마가」「누가」그런 것을 보면 될수록은 종래의 말씀이 하나님이 인류를 건지기 위해서 뭐 누굴 보낸다고 하는 그 약속이 있으니까 그래서 나온 거라 해서 우리가 하나님 인정을 해드려야 하는 거예요.

「요한복음」에 오면 그것과 달라요. 그런 게 없어요. 뭐 다윗에게서 났다든지,「마태」나「누가」에게 다 있는 말이지만 동정녀가 잉태를 했다든지 그런 말은 별로 없고 우리가 아는 대로 처음부터 아주 딴 말이 나와요. 그럼 그런 것은 어디서 나오냐 하면 아까 얘기대로 차원이 좀 다르다고 할까, 면이 다르다고 할까. 이 겉에 나타난 외양에 있는 그 예수, 그건 역사적으로 있는, 보통사람에게 그건 중요한 문제이니까 그럭해서 될수록은 예언서에 나타난 하나님이 보내시마 한 이가 이 사람이다 하는 걸 우리에게 알려주어서 그 예수를 믿게 하자는 게 복음서를 쓴 목적이지요. 그런데「요한복음」에 그것과 다른 면이 있는 건 그걸 잘못이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면도 있지만, 사람에겐 속의 면, 안의 면이란 게 있다는 겁니다. 밖에 나타난 현상도 그게 필요할 때는「마태」「누가」「마가복음」에서 밝히려고 그랬지만, 또「요한복음」은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그래 첫 마디부터가 좀 어려워요.「요한복음」에 나오는 것은 ‘로고스’ 란 말 그 말을 가지고 하니까 그런 점은 그걸 어째 그랬다는 것은 후에 차차 알릴 생각을 하고서라도 도리어 그런 면 때문에 우리에게 좋다면 좋은 건데, 속의 그리스도를, 속의 예수를 묘사해보자, 알려주자 하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첫 마디부터가 뭐 아브라함에서 났다든지, 다윗의 자손이라든지 아담에게 올라간다든지 그런 말이 없어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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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 요한복음 풀이 1-내면의 예수 2
작성자 바보새 14-07-17 11:54 조회2,0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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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예수 2
요한복음 풀이 1



「요한복음」은 동양적 사고에 맞아
그저 로고스로 시작이 되는데, 그 하나, 그 속의 그리스도를 말하자 그러니까 지금 우리에게, 어느 의미로는 동양 사람에게는 더군다나 그런 면이 있어요. 본래 우리 동양, 서양을 말하면 서양 사람들은 현상계의 외면세계에 특별히 주목을 해서 그거를 많이 밝혀오는 게 그 특색이 됐고, 동양은 그것보다는 속에 있는 정신면을 밝혀왔던 것이니까 동양 사람들이 보는 이면이 훨씬 더, 물론「마가」에 있는 그 말이 소용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면을 아는 데에는 이 속이 없으면 어딘지 모르게 잘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요한복음」을 읽어가노라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게 퍽 느껴져요. 어째 그랬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마음이 자연히 그랬고, 아마 나도 동양 사람이라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근래 더군다나『노자』『장자』를 보다가 그런 걸 비추어 보면 참 많은 것이 밝혀지는 면이 있어요. 그래 그렇게 아시고 이걸 한 번 읽어보시라 그 말입니다.
그래「요한복음」의 기초된 거를 조금 말하면, 그건 뭐 연구하는 사람들이 다 하는 말입니다만, 이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거는 1장 1절에서 18절까지, 보통 이걸 서곡이라 그러는데, 프롤로그(Prologue) 서문인데, 학자들이 연구한 데 의하면 이건 사람이 썼다기보다는 옛날부터 있던, 구약에도 있던 말들이 그거는 보통 말이 아니고 시라고 다들 그렇게 봅니다. 시인데 그걸 인용을 해서 이렇게 쓴 거예요. 그건 자기가「요한복음」전체에서 말하고 싶은 것의 그전체가 간단히 1절에서 18절까지에 다나와 있어요. 아주 뭐 우주관이라면 우주관, 신앙관이라면 신앙관 그게 다 나와 있으니까 아주 중요한 거지요. 그러고는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세례 요한 부분은 아마 삽입을 해서 썼을 거다 그런 말이 있고요.

그 담은 그 밑에서부터 12장까지가 이제 말하자면「요한복음」의 본문 되는 부분이라 할까, 예수님이 전도하신 거, 나와 복음을 전하시던 그 본론이란 거고. 13장 이하는 전도를 하시다가 처음에는, 처음부터 아셨다면 아셨다고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맨 처음 갈릴리에서 전도하시던 그때부터 반드시 십자가가 나왔다든지 그렇지는 않아요. 그때에는 갈릴리를 중심으로 하고 보통 말로 하면 상당히 어떻게 보면 아주 재미있는 전도라고 할까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는데, 그 다음에 예루살렘을 몇 번 올라오신 걸로 되어 있어요 「요한복음」을 보면 말이에요.
그러는 동안에,「요한복음」을 쓰는 방법은 여기「마태」「마가」「누가」 모양으로 사실을될 수 있는 대로 순서대로 죽 다 써보자는 그런 것이 아니고, 이이는 자기의 목적 즉 속의 내적인 예수님이 어떻게 돼서 오셨고, 어떻게 돼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됐는가 하는 그 내적인, 정신적인 면에서의 설명을 하고자 하다보니까 거기 맞도록 자료를 취해서 쓴 것 같아요. 대개 그렇게 말해요.
기사이적 (奇事異蹟) 이야기를 보면 우리가 아는 대로 여기에만 독특하게 있는 것은 2장에 있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변해 포도주를 만드셨다고 하는 게 있는데, 그건 다른 데 없이 여기에만 있는 거예요.

그 담에「요한복음」에 나와 있는 5천명 떡을 먹인다든지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이 일었다고 하는 그런 얘기들은 다른 복음에도 다 있는 건데, 그래도 그런 걸 취해서 쓰는 걸 보면 쓸 때는 자세히 자세히 취해서 쓰는데, 또 어떤 거는 안 쓴 거를 보면 그건 일부러 빼자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마 자기의 쓰려고 하는 목적에 어느 자료들을 갖다가 요렇게 썼기 때문에 그런 거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 그 목적이란 것이 뭐냐 그러면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나와서 전도하실 때에 참 잘돼간 것 같고 그랬는데 어떻게 어떻게 해서 왜 십자가에까지 가게 됐나 하는 사건, 주로 ‘안식일에 병 고친다”는 것 그것으로 인해서 시작이 돼가지고 한 번 만나고 두 번 세 번 충돌하면 할수록 점점 더해져서 마지막엔 도저히 예루살렘에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한테 용납이 될 수 없게 되면서부터 그 비극으로 치닫게 되는 그것이 12장까지의 얘기인데, 그런 전도(傳道) 얘기를 하고는, 13장 이하로 가면 이제는 결정적으로 타협될 수 없고 용납될 수 없이 파탄이 드러나요.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모였던 그 집단을 이제 어떻게 준비하고 가시나 거기에 주력을 해요. 그건 다른 복음에는 그렇게 길게 쓰인 데가 없잖아요?
그리니까 제자들을 놓고 이제 뭐 ‘새 계명’을 주신다는 말씀도 하시고 그러셨어요. 한 번만 아니고 몇 번 몇 번 거듭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중심이 어디 있느냐 하면 처음에는 자기를 중심으로 전체를, 우리가 다 여기만 전도할 것이 아니라 각 동네를 다니면서 전도해야 한다고 그러지 않았어요? 어느 동네를 지나가다가 사람들이 만류하면서 여기 좀더 계시라고 그러니까 “그런 거 아니다. 내가 이 동네를 위해 있는 거 아니고 각 동네 각 곳에 가서 그러기 위해 왔다” 이렇게 말씀하신 게 있는데, 아마 처음에는 그러셨을 겁니다.

그런데 한 번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두 번 세 번 해서 그 사람들과 충돌이 되면 될수록 저쪽에서 아주 예수를 없애버리기로 결정이 되니까, 그런 것을 아신 담에는 전도활동을 첨의 계획과는 다르게 하시게 돼요. 물론 그런 것을 첨부터 아시고 하셨다 그럴 수도 있지만, 보통 말로 해 본다면 제자들을 데리고 퇴각을 해서 조용한 갈릴리 지방으로 내려가서 마지막을 지내다가 이제 올라올 때는 아주 결정을 하고 오는거예요. 그건 공관복음에 나타나 있지만, 돌아가실 것을 결정을 하고 아주 비장하게 오시는데,「요한복음」에서 좋은 건 이제 13장 이하예요. 거길 보면 자기 주위에서 유다 하나가 빠져나가게 되고, 물론 다른 복음에는 유다가 배반한다고 되어 있지마는, 여기에는 이제 자기 이하 남은 사람들을 놓고 마지막 말씀을 해줘요. 이것은 내가 전에도 다른 데 쓴 적이 있지 마는 어쨌건 이제 남은 사람들을 중심하여 특별히 주의를 하고 마지막 말씀을 하신다는 이 문제를 건드립니다.

‘하나님 아들’ 의 참 뜻
연구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한다면 마지막 부분은 요한이 쓴 것이 아니고 그 근본 저자 그런데 근본 저자 얘기가 나오는 건, 본래「요한복음」의 저자가 누구냐 그러면 그게 아마 논란이 많은가 봐요. 옛날에는 그저 전통적으로 사도 요한이 썼다, 그렇게 많이 믿어왔는데 근래에 와서는 그렇게만 보지는 않나 봐요. 성경에는 이「요한복음」과 아래로 내려가서「요한 1서」「요한 2서」「요한 3서」그리고「묵시록」그렇게 요한 계통의 글이 다섯이 있어요. 바울에게는 바울계통의 서간이 또 여러 개 있잖아요? 하지만「요한복음」하고, 짤막하게 쓴 거지만「요한 1서」「요한 2서」「요한 3서」또「묵시록」이것이 옛날에는 사도 요한이 쓴 거다 전통적으로 그랬데, 근래에 와서 차차 연구해온 결과로는 사도 요한이 다 썼다 그럴 수가 없대요. 왜 그런고 하니「요한 계시록」과 서간이라고 하는 것들이 문체가 서로 다른 점이 확실히 많이 있다고 그럽니다. 그렇다면 여하간에 내가 그거 확실히 모르니까 그저 말을 옮기는 것뿐이지만 대체로 하면 사도 요한이 썼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안 썼다 해도 그 가까운 계통의 사람이 아마 썼을 거다, 대개 그렇게 인정을 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요한복음」끄트머리에 내려간 거는, 그러니까 주 되는 부분을 쓴 이가 썼다는 거보다는 얘기에 모자라는 것이 있으니까 뒷사람 누가 추가해서 된 것 아닌가 아마 그렇게 말이 있는 모양이고, 대개「요한복음」의 문헌적 연구 결론은 그런 것 같습니다.

여하튼 이 책은「요한복음」저자의 이러한 집필목적 같은 거를 맘에 두시고 보시기 바랍니다. 그야 공관복음도 마찬가지지만, 더구나 이거는 예수님의 속마음이 어떠신가를 이제 우리에게 알려주려고 해서, 마지막의 결론 부분은 그 본래 있던 저자가 쓰진 않았을는지 몰라도, 그거야 뭐 제자인지 후계자인지 모르지만, 이걸 쓴 것은 왠고 하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우리에게 믿게 하려 하기 위해서 쓴다”고 그랬으니까, 어느 성경도 다 그렇지만, 그게 중심이니까 여러분들은 잊지 마세요. 그러니까 마지막에 있는 결어부터를 보고 시작을 해서 이 책이 뭣 때문에 쓴 거냐 그런 거를 이전에 우리가 교회에서 듣던 모양으로 그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고 천당에 가기 위해 천국에 가기 위해서” 한다는 그런 거 아니라, 그보다는 좀더 깊은 의미에서 “예수님 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은 무슨 뜻을 갖는 건가”, 그 점이 여기에선 공관복음에서 얘기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그 깊이를 좀더 주의해서 보시란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본다면 뜻이야 다 같은 뜻이지마는「마태」나「마가」나「누가」는 “예수님은 정말 요셉의 아들이냐 아니냐” 또 무슨 “마리아가 성모 마리아가 처녀로 수태해서 낳은 거냐” “고향이 베들레헴이고 다윗 지파냐 아니냐” 뭐 이런 문제가 중요한 것 같아서 분명히 알려주려는 것같이 그렇게 보이지만, 그래 그런 의미에서 “다윗의 자손이냐 아니냐, 우리가 다윗의 자손으로 생각할 거냐 아니냐” 하고 깊이 묻고 또 “다윗의 자손이란 데는 무슨 의미가 있나” 이런걸 많이 생각해봤는지는 몰라요. 그렇지만 여기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는 무엇을 의미하는 거냐? 어떻게? 뭐냐” 이런 거를 생각하고 쓴 것 같아요. 그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거는 여러분들이 이제 여기 오신 분들은 그래도 다 학교공부를, 뭐 안한 분도 계실지 모르지만, 아무튼 현대사람은 학문적으로 생각을 하고 그랬으니까 조금 이렇게 깊이 생각을 해보시오. 물론 ‘아버지’요 ‘아들’이요 하는 거는 상징으로 쓰는 겁니다.

진화론과 창조론은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
이제 성경을 보시는 데는, 나는 내가 내 자신이 그것 때문에 많이 고민을 하고 그랬어요. 그래 또 그걸 내 나름대로는 어느 정도 어렵게나마 그래도 해결을 하고 그런 사람이니까, 비록 완전하다고까진 몰라도 어느 정도는 해결을 한 그런 사람이니까, 자연히 나는 내가 지낸 것을 얘기할 수밖에 없는데 혹시는 지금 사람이면 어느 정도는 다 그런 뭣이 있지 않겠나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실지 아직도 기독교 안에서 그런 문제가 논쟁이 되는 점도 있고 하니까 그런 거는 어떻게 생각을 할 것인가? 또 그거는 기독교만 아니고 다른 종교의 경전에도 마찬가지예요. 그거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런 점에 대해 다 좀 생각을 해야 될 것 같아요.
첨에 우리가 어려서 이걸 볼 때는 제일 많이 문제된 것이 “하나님이 천지창조 하셨다” 였어요. 그러면 젤 많이 걸렸던 것은 그럼 “하나님이 정말 뭘 어떻게 했단 말이냐” 라든지, 그럼 “하나님 지은 천지간에 왜 이런 어려움이 있느냐” 뭐 이런 말이 나오면 대답을 할 수 없기도 하고 대답을 해보려 하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리고 다른 분들도 많이 지내본 건 줄 압니다만, 그때 우리가 제일 많이 걱정을 한 거는 과학하고 맞나, 맞지 않나 그 문제예요. 요새는 그 문제가 재연이 돼서 또다시 진화론은 잘못이다, 진화론 얘기는 할 거 없고 사람이 진화돼서 된 거 아니다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거는 참 그냥 넘어가지를 말고 생각을 하셔야 될 거예요. 뭐 이거냐 저거냐 내 마음에 어느 편을 취할 거냐는 내 마음에 결정할 탓이지 진화론 부정한다고 해서 죄가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진화론을 그대로 인정한다고 해서 그게 뭐 더 잘한다고 그럴 순 없어요. 그거는 생각하기 탓이지, 꼭 그걸 가지고 결정되는 건 아니니까.
나는 어느 편이냐 그러면 인류가 내려온 진화라는 사실은 있으니까 진화론이 문제가 아니라 생각하고, 진화돼 왔다는 사실은 있으니까 그걸 부인한다든지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또 그런다고 해서 그걸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이 천지창조 했다든지 하나님이 우리를 건진다든지 하는 데 반대된다는 그런 걱정도 없어요. 나는 그렇게 믿는 건데, 혹 그런 점이 어느 때 문제가 되신다든지, 다른 사람들한테 그런 도전을 받아왔을 때 그럼 어떻게 대답을 하실 것이냐? 그게 문제가 된다면 그건 조금 생각해보시면 될 겁니다.
그런데 하나 말할 것은 “차원이 다르다”는 거예요. 종교는 종교 차원이다. 종교 차원 다르고 현실의 현실 차원 다르고. 그러니까 그럼 다르다고 해서 두 가지가 이렇게 갈라져 있나? 그런 말 아니지요. 그런 말 아니고 가령 여기 책상이 이렇게 있으면 자연히 이것을 이렇게 하나의 몸 하나의 부피를 가지고 있는 이 형상으로 보느냐 이걸 뭐 무슨 빛으로 보느냐 예술로 보느냐 그거는 차원이 다르다고 그렇게 봐야 할 게 아녜요? 좀더 쉽게 예를 든다면, 우리 친구들 중에도 혹 그런 분이 있을 테니까 말합니다만, 가령 시인이 저 밭에서 논에서 일하는 농부를 보고 시를 읊어요. 시를 읊으면 그 시는 우리가 듣고 보기에 참 좋잖아요? 그런데 어떤 이는 뭔고 하니 “농사꾼이 거 농사하느라고 피땀을 흘리고 있는데 그 생각을 한다면 옆에서 그걸 뭐 예술적으로 그림이라 한다든지 미(美)라 하는데 그럴 수가 있냐?” 하는데 그거는 모르는 말이에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하고는 예술이고 뭐고 정신적인 그 뭣을 말을 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도덕적인 면에 서서 우리가 얘기를 하면 농사꾼이 죽도록 일하는데 “저 먹을 것은 벌지도 못하고 저는 대우를 받지도 못하고 불쌍하다” 마땅히 그래야 옳은 말이지마는 예술적인 면에서 보면, 도덕적인 그런 거 아니고, 사람이 추구하는 것이 미라면 미라는, “참 미다” 그런 것도 있으니까 그런 것을 볼 때에는 논 가운데 서서 일하는 농부의 그림을 그린다든지, 시로 읊는다든지 그런 것은 그대로의 그 뭣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현실의 이 사회문제라든지 도덕 문제하고 혼동을 시켜서, 그럼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말짱 농부를 농부의 불쌍한 것을 알지도 못하고 사회의 잘못되는 것이 있는 것조차 도무지 비판할 생각도 없어 그런다 그렇게 오해하면, 그러면 예술이고 뭣이고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그런 모양으로 종교적인 글을 읽으실 때는 이것은 종교적인 목적에서 그 차원에서 보시라는 거, 과학이라는 차원에서 보시면 안된다는 것, 그렇게만 생각하시면 돼요. 그걸 실지 그러면서도 혼동을 일으키는 일이 많기 때문에 그런 저런 문제가 일어나는데 그걸 꼭 쉽게 말하면, 나는 내가 풀긴 그랬어요, 뭐냐 그러면, 말이란, 그 말이 나오게 된 데는 다 뭣을 설명하잔 것입니다. 현상의 세계를 혹은 의미의 세계를 한번 설명해보잔 것인데 이걸 엉뚱하게 서로 바꿔서 적용하게 되면 혼란이 오게 돼요.

성경은 ‘의미의 세계’에 대한 표현
성경은 ‘의미의 세계’ 에서 하는 것이라 그래요. 사람이 뭘로 사느냐? 사람이란 살아가자는 어느 의미가 없이는 못 살아가잖아요? 사람을 뭘로 보느냐 하는 것이 여러 가지 면에서 있을 거지만, 지금으로서는 사람은 우주 전체를 보는 면에서 생각도 하고 무슨 의미를 추구해가는 그런 존재로 보는 게 아마 제일 높이 보는 거라 그럴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무슨 미 (美)면 미를 따를 수도 있고 지식이면 지식을 따를 수도 있고 그렇지만, 그런 것만이 아니고 다 종합해서 말을 하면 ‘보람’이라는 어느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라 그럴 수 있어요. 그건 또 딴 얘기가 되니까 길게 말할 순 없습니다만, 나는 내 나름대로 의심이 풀리기는 그렇게 해서 풀었어요. 자기 나름대로 결정을 하고 넘어가야 돼요. 그렇지 않고는 해답이 안 나오니까.
그래 그런 것을 얘기하면 아까 하던 진화론 문제와 또 관련이 돼옵니다. 언제나 사람이 나면, 여기 이렇게 나면, 종교를 믿건 안 믿건 우리 생각에 ‘유의미’ ‘무의미’의 이 우주란 무엇인지도 모르고 시간적으로 얼마나 되고 공간적으로 얼마나 되는지 도저히 설명을 할 수 없지마는, 알지는 못하면서도 이 우주는 하나로 “이 우주다” 그렇게 생각한다 그 말입니다. 그럼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됩니까?” 하고 물으면 그것도 또 대답하기 어렵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생각해요. 생각 정도가 아니에요. 그것이 우리의 살림이지. 만약에 사람이,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동물, 곤충, 미물도 그렇지만, 이것이 이 우주와 자기가 하나로 되어 있는 이런 거로 산다는 그 믿음이라고 할까, 그 사는 힘이 아니면 우리 이렇게 생존해 있을 수가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에게는 가장 높은 점 구경(究境) 마지막에는 그 점에, ‘생각한다’는 데에 있는 거예요. 이런 것을 깊이 생각하는 이들은 물론 ‘의미의 세계’를 생각 안하는 사람들은 그냥 그냥 넘어갈는지는 모르지만 이 ‘생각한다’ ‘의미를 캔다’는 생각이 있는 이들은 그 책을 한번 보시오. 그거는 요새 우리 말로는 번역이 돼 있나 봅디다. 플랑클(Flanckle)의『사람의 의미 탐구』(Man's Searching for Meaning). 플랑클이란 사람은 오스트리아에서 났는데, 2차 대전 때에 있었던 유대 계통의 심리학자예요. 그 사람 그때도 사카이어트리스트(Psychiatrist) 노릇을 했다는 거고. 심리학에 관한 자기의 원고 뭉치를 가지고 수용소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다 빼앗기고 불타고 해서 낙심도 하고 그랬다가 다시 쓰고 그런 사람이지만 그 사람이 거기서 보니까, 물론 그는 심리학을 한 사람이니까 그랬겠지만, 보니까 같은 환경을 당하고도 어떤 사람들은 태연히 견디어가고 어떤 사람들은 튼튼하게 있는 것 같다가도 맥없이 턱 죽어버려요. 그래 그런걸 보다가 연구해서 얻은 결과가 그거예요.

사람이 사는 것이 뭐냐? 사람은 보람에 사는 건데 자기가 하는 일에 어떤 의미가 있다 믿어지면 어려운 환경에서도 잘 견디어가고, 고난으로 죽을 것 같은데 잘 견디어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튼튼한 것 같은데 맥없이 턱턱 죽더라 그거예요. 그래서 이걸로 새로운 학설을 하나 세워 그걸 로고데라피(Logotheraphy)라, 로고(Logo)는「요한복음」첨에 나오는 '로고스’라는 말인데, '로고데라피’는 로고스에서 나온 말로서 로고스 때문에 살아간다고, 의미 때문에 살아간다고, '의미’라고 그걸 번역해서 한 학설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만, 그 사람의 말대로 한다면 가장 힘있는 거는 “사람은 나는 무슨 보람에 산다”, 무슨 보람에 무슨 의미가 있어 산다는 걸 알게 되면 환난을 견디어 잘 지내갈 수가 있는 것이고, 그것 없이는 도저히 못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그 사람의 결론인데, 그렇게 되면 그거는 사람의 일생만이 아니라 이 우주 전체 내려오는 것을 보고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과학자들이 보는 거는 그것과는 별개로 이 현상은, 여러분이 그 책을 보셨는지 안 보셨는진 몰라도, 저 프랑스 사람 샤르댕 (Teihard de Chardin 1881-1955)의 책 말이에요. 우리나라에선 이효상 씨가 번역해서 냈지요.『인간현상』(Le Phenomene humain)이라고 하는 거. 원어는 프랑스 말로 났을 테고, 내가 본 거는 영어 번역으로 보고 그랬는데 우 리 말로 번역됐으니까 한 번씩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보시오. 사람을 하나의 현상으로 보는 거예요. 현상, 이거 다 우리가 모양살이로 사람은 이렇게 생겼다든지 저 나무는 저렇게 생겼다든지,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현상의 세계 아니에요? 현상의 세계, 물질계라 그렇게 말 해도 좋지만 물질이나 뭐나 다 현상으로 나타난 거니까 사람을 하나의 현상으로 보고 설명하잔 책이에요. 그는 제수이트(Jesuit)파의 신부였는데, 그이가 전공한 것은 고생물학이고 독실한 크리스천 신앙을 지닌 사람이었지요. 이제 그런 신앙을 가지고 학문적인 말로 이 우주를 설명 해보자는 내용이에요. 그래서 한마디로 말하면 이 우주는 마지막에 어느 한 점으로, 학문적으로는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라는 그 어느 ‘오메가 점’을 향하여 나간다고 그런 말 하는 사람이에요. 내가 이제 말하고 싶은 거는 이이의 신앙은 기독교 신앙인데, 그것을 이 현상의 세계의 인간을 기독교적 입장에 서서 설명을 해보자는 거예요.

신앙을 과학과 연결하려는 샤르댕의 입장
그 사람은 물론 진화하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그랬지요. 그런데 그 사람의 말은 내면의 세계를 말하자는 것인데, 지구는 앞으로 조금만 더 알면 다 알게 되는 거니까, 다른데로 갈수야 없고 하니까, 이제는 인류의 앞날이 있다면 ‘내면화’할 수밖에 없을 거다 그겁니다. 지구가 아주 한정이 돼서 형용을 하려고 그런다면, 우리 맘으로 본다면 이건 뭐 불과 요만한 한 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럴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돌아가서 아주 작은 것이 되고 말았어요. 지금은 더구나 기술이 크게 발달해서.
그러면 이건 샤르댕이 한 말은 아닙니다만 성경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하나님이 인류를 지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해라. 땅에 충만해라. 만물을 다스려라” 그러지 않았어요? 그러나 지금은 생육하고 번성이 아니라 너무 많아서 걱정났어요. 다스리는 게 아니라 이제 망하게 돼 걱정나지 않았어요? 그래 저 언젠가 유영모 선생이 우리보고 말씀하시다가 그랬어요. 그때엔 문제가 이렇게까진 심각하지 않았는데도 뭐라고 그러셨는고 하니, 조금 우스운 말이지만 “이제 종자바가지가 쏟아져서 걱정이다” 그랬어요. 인간이 낳는 정도가 아니라 “씨바가지가 엎어졌다” 그랬어요. 이제 그러니까 문제가 이렇게 어려워졌다 그 말이에요. 그럼 이제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라 그 말이 어떻게 된 말이냐? 이건 하나님도 모르고 한 말이냐? 이게 생육하고 번성한 거냐? 이거 뭐 낳기는 고사하고 바가지가 쏟아진 셈으로 이렇게 돼서 낳는 것이 걱정이 돼서 사람이 서로 뱃속에서 죽이고 있잖아요? 그러니 그런 건 성경을 보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하나님 믿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성경을 보게 된다면 그럼 이거 어떻게 된 건가? 기독교란 뭐냐? 하나님이 말씀하신 건 뭐냐? 당연히 그게 의심이 될 게 아니에요?

이제 그런 데 참고로 하는 거는 샤르댕이 그래요.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발달이 되고 보니까, 옛날에는 땅끝이 어디 있는지 몰라, 땅하고 하늘하고 맞붙은 줄 알았는데, 지금은 뭐 싹 돌아서면 요거 뭐 요만한 거예요. 이젠 여지가 없다는 거예요. 아무리 문명이 발달된대도 이젠 이 땅에선 갈 데가 없어요. 캐먹을 게 밑천이 다 돼서 걱정 아니오? 그러니 하나님이 축복하고 여기서 무한히 발전하라고 했다는 말을 이걸로 하려다간 설명이 안되고 말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 뭐라고 그랬는고 하니 이젠 “내면화의 방향으로 진화가 있을 거다” 그랬어요. 내면화란 뭔고 하니 이 현상세계완 딴 것인데,그러니까 심지어 이제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만 우치무라 선생한테 우리가 배울 때도 무슨 얘기를 하다가 “하늘나라라고 하는 거, 우리 천국이라고 하는 거는 어느 별나라에 어디 준비가 돼 있는지도 몰라요.” 우스개 말 비슷하게 그렇게 말씀 했지만, 나는 그렇게는 생각 안해요. 그럴 수가 없지. 지금 우리 과학이 발달됐으니까 온 우주가 무언지 빤히 다 알고 있는데 말이오, 가긴 어딜 가겠어요. 그건 샤르댕의 말이 옳은 겁니다.

생명이 이렇게 발달을 해오다가 생각하는 인간에 와서는 이제는 생각한다 하기 때문에 한 새로운 단계가 나왔다, 그 말이에요. 존(Zone)이라고 그래요. 그 사람 존이라고 그랬는데 첨에는 단세포 그 담에는 식물, 동물, 동물에서도 또 포유류, 이렇게 차차 나오잖아요? 나오다 이제 사람에 와서는 사람은 두뇌를 가지고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건데, 생각하면 그 뭣에 도달하냐 뭘 하는 거냐 그러면 뭐가 있어야 할 게 아니에요? 지금 보면 생각으로 해서 열린 게 소위 정신의 세계라는 거, 영의 세계라는 겁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에게는 영의 세계라는 것은 허황하다, 그건 실체가 아니다, 그렇게 말할 수가 있겠지만 그건 무식한 소리예요. 벌써 이미 생각하는 한 사람이 생겨서 육신을 초월해서 순수하게 생각으로, 생각 속에 있는 그 세계를 개척하기 시작했으면, 천만 사람이 못했더라도, 그 한 사람으로 인해서 하나의 새로운 단계가 열린 거니까, 이 앞으로는 이제 거기에 있다 그래야 옳을 겁니다.
그러니 샤르댕의 그 말은 참 좋은 말인데, 이렇게 우주가 물질적으론 한정이 된 거니까 인간이 물질적으로 발전할 여지는 없는 거고, 앞으로 인간이 만약에 발전을 한다면 이제는 ‘내적’ 인, 이 ‘안’으로 ‘정신’적인 데로 할거다 그 말입니다. 물론 우리가 아직은 모르니까 그 안에 무엇이 어떤 형식으로 될는지 추측을 할 수야 없지요.

핵전쟁으로 지구가 파멸해도 정신세계는 건재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는 데에 “미래를 향한 굉장히 긍정적이고도 함축적인 무한한 것이 거기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되면 심지어 요새 핵전쟁이 한번 나기만 하면 이 지구 전체를 바쉬먹을는지 다 태워버릴는지 모르지만, 이거 탄다고 그래서 적어도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예수면 예수, 석가면 석가 같은 이로 인해서 개발이 되었던 그 세계는 여기서 뭐 핵전쟁이 일어나서 다 타버린다고 해도 그걸로 인해서 없어지는 세계는 아닐 것입니다. 그건 믿어져요.
그러니까 샤르댕의 말을 여기 인용합니다만 거 근래 과학이 말한다고 해서 너무 단순하게 비관적으로 ‘아무것도 없다’ ‘허무’ 그런 데 빠지지 마시도록. 사람이란 언제부턴가는 모르지만 본래부터가 사람이 살아가는 그것이 물질적으로 얼마만큼 쾌락하게 살아가나 그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보람을 느끼는 거, 그것이 사람의 사는 원리로 돼 있어요. 그건 우리도 다 지금 알고 있잖아요? 제일 문제가 뭔고 하니 “아이고 아이고 내 마음 답답”이 문제에요. 그러면 안돼요. 답답하다, 맘이 답답하다는 것은 내속 정신의 세계가 숨통이 막혀서 그래요. 우리의 육체는 공기를 숨쉬고 있지만, 공기만 숨쉬는 게 아니라 정신적인 숨을 분명히 쉬고 있는데 그 정신적인 숨을 쉬지 못하는 고로 그런 거에요. 우리가 답답하다가도 이 성경을 펴놓고, 성경의 좋은 것을 골라서, 그전에 내가 읽어봤던「시편」어디라든지「이사야」라든지 가령 산상수훈이든지 읽어보세요. 그럼 그 숨이 열리나 아니 열리나.

우리 육신의 숨이 답답하다가도 여기 연곡에라도 와서 서울 공기보다 좋은 공기를 마시면 시원해지는 거를 알지만은, 이 공기는 또 없어질 날이 있을는지 몰라요. 그렇지만 그 사람 몸뚱아리 사람만이 답답하다 시원하다가 있는 거 아니라 우리 속의 사람은 더군다나 답답하다 시원하다가 있어요. 그리고 지금만이 아니라 인류가 처음 인류로 나오던 그 때에 있어서도 인류가 인류답기 시작된 거는 속의, 정신적인 숨을 쉬면서 살아온 그것 때문에, 그 속사람 때문에 발전이 되어온 거니까, 이제 이 앞으로도 진정한 소망이 있나 없나는 그것으로 결정이 되는 것이지, 여기 무슨 공기가 더 있을 수 있느냐 없느냐, 석유자원이 계속이 되느 냐 아니냐, 태양 에너지를 발견하느냐 못하느냐에 있는 게 아니에요. 물론 육신의 이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그걸로 되지만, 그리고 이 땅에서 그것이 계속이 돼가면서 그 정신 살림을 할 수 있다면 다시 없이 좋은 일이지만, 만일 안 그런다면 도리어 우리가 순 정신적인 면으로 정말 놀라운 발전을 하기 위해서 여기 이 현상적인 생명줄이 탁 끊어질는지 누가 알아요?
그거는 너무 공상 같은 일이 아니냐 그렇게 말할는지 모르지만 정신이란 거는 이날까지 발달되어오기를 “그럼 그런 구멍이 어디 있나?” 그런 생각을 해오는 동안에 늘 새로운 구멍이 요렇게 열리고 조렇게 열리고 해서 온 거요. 과학적인 발전이 나올 때도 그런 거니까 사람으로서 제일 중요한 거는 엉뚱한 터무니도 없는 생각을 하는 데서 와요. 왜 그러냐 하면 터무니없는 생각을 내가 하자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어찌 오는지 나에게 터무니도 없는 그런 생각이 나오고는 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런 것을 과거의 과학에 있어서도 발명을 한 사람들도 그랬지만, 석가 같은 이 어째서 그런 생각 했나? 예수 같은 이 어째 그런 생각을 했나 하는 점 좀더 깊이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우리하고 예수하고를 같은 인간인 줄을 알아야만 믿는 거지, 그는 인간이 아니고 독특한 뭣이다, 그래 가지고는 우리가 예수를 믿지 못하게 돼요. 그리고 또 그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거니 그런 따위 생각에만 묻혀 가지고는 예수가 열어놓은 나라를 그건 뭔지 모르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게 그를 하나님이요 사람이요, 과학으로는 도저히 말이 안되는 “사람이면서 하나님이다” 그런 존재예요. 그런데 이걸 교리적으로 사람들한테 틀어막으려고 하니까 이게 무리가 돼서 여러 가지 미신도 나오고 이러지만,「요한복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는, 그런 것을 열어가는 데 퍽 도움이 된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마 서양 사람보다는 동양 사람들이 이 구멍을 뚫고 나가는 데는 더 쉽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서양에서 난 이 기독교 중에서 동양 사람 모양으로 생각을 하는 것은 그래도 비교적 퀘이커 사람들이 그래요. 그거는 뭐 자기네도 다 아는 거지만, 그 사람들은 다분히 동양적인 데가 있잖아요?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 떨어진 면이 있다고 해서 비관할 거 없어요. 과학적으로 뭐 다 됐다 해서 그것 때문에 낙심할 거 아니고, 이제 와서 정말 예수란, 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누구냐? 이게 정말 뭐냐? 당초에 어떻게 되는 지경이냐? 이걸 생각해야만 되는 겁니다.
불교를 내가 잘 모르니까…… 불교 것도 좀 빌어서 얘기하면 좋겠는 데, 불교는 그건 내가 잘 몰라요.

불교나 기독교나 근본은 같은 것
하지만 나는 생각하기를 기독교나 불교나 근본적인 면에서는 같다고 봐요. 어느 종교라도 고등종교는 근본에서 말하면 다를 리가 없다, 똑 같은 지경을 체험했는데 그 사람의 개성이 다르든지, 그 민족의 문화관계 이런 걸 따라서 말이 다르게 발표됐을 뿐이지, 상관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걸 증명하려면 증명을 하기가 어렵지만 믿기는 그렇게 믿는 사람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이 앞으로는 이제 그렇게 믿는 믿음이 아니고는 이걸 뚫고 나가기가 어려울 거다, 현실문제 어려운데 막혀서 현실문제가 어렵다고 해서 우리가 낙망이 되고 죽는 종교라면 사람 건질 수 없는 종교 아니요! 그걸 가지고 뭐를 건지겠어요.
그러니까 서로 될 수 있으면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핵전쟁이 나오지 않도록, 무슨 일을 해서라도 그거 방지하기에 힘써야 돼요. 지금 우리의 처지, 우리 같은 나라에 났더라도 도리어 그렇기 때문에 더 앞장을 서야 하는지 몰라요. 우리가 생각이 없는 것만이 잘못이지, 우리의 처한 이 입장 때문에 그거 못하는 거 아닙니다. 그래선 안돼요. 우리가 이 지구를 맡았으면 어떡하든지 이걸 건지는 게 우리의 책임인데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못하더라도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의 잘못한 일로 인해서 이 지구를 그냥 유지해가질 못하고 어떻게 잘못되는 일이 있다 그런다면, 그렇더라도 우린 거기서 탈출할 그런 구멍이 있어야 될 겁니다. 우리라고 해서 이 몸이 있어 탈출하는 거 아니지만, 우리 믿는 믿음으로 해서 그런 겁니다. 그런 걸 믿는 믿음이 안 생기고는 현재 사는 이 살림에서 보람을 느낄 수가 없잖아요?

우리가 그런 게 중요한 건데, 이제 우리 처지가 이렇게 어렵기 때 에 그러는데…… 앞에 다가오는 과제가, 굉장히 어려운 과제가 있어요. 어렵기 때문에 그 대신 굉장히 희망적인 놀라운 과제가 우리게 있다는 걸 알아야 돼요. 그러니까 우주개발이란 그런 따위가 아니고一그런 그 우주개발 따위 가지고는, 적어도 그걸로만 가지고는 안될 겁니다 우리 이런 신앙이 아니고는 개발이 안될 겁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오던 그 일이 무슨 일대의 큰 고비를 넘으려고 해서 이렇게 되는 것이니까, 그런 점을 우리 믿음이 모르더라도, 모르면서도 점점 무슨 확신이 생겨 가는 것이 있어야겠는데, 그런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라는 그 인격이 상당히, 상당히만이 아니라 그것만이 그 문제만이 우리 문제에 걸려 있는 것이에요. 그걸 내가 어떻게 믿나, 믿는다는 것이 그걸 깨치고 들어가는 것인데, 그러면 그걸로 인해서 이날까지 우리 알면서도 모르고, 잘, 밝은 해석을 못했던 고로 이러고저러고 했는데, 이제 그런 게 일단 새로운 단계가 올려고 해서 이렇게 되는 게 아닌가, 기대감이 우리 속에 움직이고 있습니다.


1981년 8월 2일 연곡에서 퀘이커 모임 수련회에서 하신 말씀.



친우회보 1981 가을호
저작집30; 21- 171
전집20; 19-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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