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미(저자) | 녹색평론사 | 2010-04-15
정가 13,000
반양장본 | 328쪽 | 210*150mm | 426g | ISBN : 9788990274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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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이자 여성신학연구소장인 저자 박경미 교수의 신작. 비록 에세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한국사회의 한 기독교학자가 현실에 발 딛고 성실하게 고민한 결과물이다.
책머리에
1부 살아있음의 신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포도원 품꾼’의 비유와 도덕적 경제
함석헌, 살아있는 의 이야기
진리를 향한 순례자, 톨스토이
‘진보’와‘희망’에 대하여 . 리영희 선생에 대하여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 리 호이나키‘깊이읽기’
‘살아있음’의 신비, ‘알지 못함’의 인식론 . 웬델 베리와 에드워드 윌슨
“네가 바로 그것이다” . 조셉 캠벨 해설
2부 작가와 현실
운명에 맞서서, 운명과 더불어 . 바흐만 고바디 영화론
작가와 현실 . 조지 오웰과 전체주의
갈릴리의 농민과 예수 .R. 호슬리의 예수 이해
‘경쟁’과‘품위’ . 박노자의《우승열패의 신화》를 읽고
‘죽음 수밖에 없음’의 의미 . 과학기술과 윤리
살아있는 종교 . 종교의 틀과 인간 삶의 역동성에 대하여
3부 어떻게 살 것인가
당신들의 법, 우리들의 정의
이른바‘실용주의’의 내면성에 대하여
예수의 교회, 마몬의 교회
지식인과 염치
어떻게 살 것인가
희생 지율과 예수
사람됨과 교육
‘국가의 마법’과 지식인의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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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P.27 : 정의로운 사회, 도덕적인 경제
예수가 추구했던 상호 호혜적인 민중적 삶의 원리는 더불어 살기 위해 고르게 가난한 삶을 받아들이라는 요구로 나타난다. 이것은 오늘날 성장주의 경제가 그동안 무시해온 평등과 실질적인 경제민주주의 원리의 실천으로 번역될 수 있다. 못난 이웃도 공동체에 필요한 인간으로 받아들이고, 그와 함께 살기 위해 네가 가진 것을 포기하고 가난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공정함은 허위의식일 뿐이며,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야수의 논리를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P.194 : 지금 경제성장주의, 개발지상주의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세계화는 1 0 0여년 전 근대화를 명분 삼아 대포와 군함으로 조선을 위협했던 식민주의의 또다른 얼굴이다. 그때의 식민주의가 더욱 교묘하게 위장을 하고 나타났을 뿐이고, 경쟁력 강화의 신화는 1 0 0년 전보다 더 광범위하고 강력하게 오늘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P.246 : 이른바 세계 일류국가라는 것도 사실은 자연생태계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끔찍한 수탈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다. 오늘날 선진국들이 누리는 물질적 풍요와 안락 역시 이 시대의 세례 요한의 목을 필요로 한다. … 그것은 살아있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상실하고 시스템에 의해 유지, 관리되는 사회이다. 따라서 그러한 사회의 풍요와 안락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동경할만한 것이 아니다. 대신 우리는 예수의 꿈, 즉 가난하고 소박한 사람들이 함께 이루어가는 공생공락(共生共樂)의 가난, 고르게 가난한 사회의 이상과 더 친해지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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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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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시대의 끝에서>,<참사람 됨의 인성교육>,<선배 수업> … 총 23종 (모두보기)
소개 :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성서신학으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신약성서학 교수이다. 저서로는 『예수 없이 예수와 함께: 요한공동체의 문학과 신학』(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신약 성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전하다』(사계절), 『시대의 끝에서』(한티재), 『마몬의 시대, 생명의 논리』(녹색평론사) 등이 있고, 역서로는 『말씀을 믿다: 요한복음서 1-4장을 읽다』(대한기독교서회), 『서기관들의 반란』(한국기독교연구소), 『갈릴리: 예수와 랍비들의 사회적 맥락』(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생태학적 치유』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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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학문과 교육은 내게 절실한 것을 붙들고 고민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나 자신을 위해, 나의 문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만 진리는 그 얼굴을 얼핏 보여준다. 모든 진지한 학문적 성찰에서는“이상하게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사색하고 탐구한 것만이 훗날 타인의 이익이 되는 것이며, 처음부터 타인을 위해서라고 정해진 것은 타인의 이익이 되지 않는다.”(쇼펜하우어)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이자 여성신학연구소장인 저자 박경미 교수 자신의 말대로, ‘참된 학문’은 자기 자신에게 절실한 것을 붙들고 고민하는 데에서 출발한다고 할 때, 그렇다면 이 책에 실린 글들이야말로 비록 에세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한국사회의 한 기독교학자가 현실에 발 딛고 성실하게 고민한 결과, 진정한 학문적 성과라고 말할 수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진보냐, 보수냐’라는 판에 박힌 틀이나 이념이 아니라 현실 근저에서 맥박 치고‘살아있는 세계’에 입각해서 바라보고,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고 믿는다. 또한“함께 사는 사람들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절박함만이 진정으로 새롭고 진실한 말과 글을 탄생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책은 그 결과물이다. 간디, 톨스토이, 함석헌, 리영희, 웬델 베리, 리호이나키 등 저자가 마음에 가까이 두고 공부한 우리 시대의 양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비범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평범하고 진실하게 생각했으며,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즉 삶의 단순한 부름에로 돌아가 생각하고 실천했다. 그들은 민중의 자발성과 자치, 공동체적삶의 양식과 삶의 지혜를 신뢰하며 스스로‘거룩한 바보’가 되려고 했다.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수치가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오늘날, 근대와 근대적 정신이 지배하는 기계적이고 비인격적인 세계에서, 기독교의 탈을 쓴 마몬을 섬기고 있는 이 시대 기독교인들에게 저자는 예수와 예수운동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저자가 이해하는 예수가 벌였던 밥상공동체운동과 치유, 축귀 행위 등은 공동체적 삶의 양식과 민중적 삶의 지혜를 부활시키는 행위였다. 그것은 무엇보다 바닥에서 솟아나온 자생적인 공동체운동으로서, 자발적인 삶의 회복 운동이었다. 국가, 경제, 학교, 교회 등의 제도와 세계화, 자본주의, 경제성장, 복지라는 추상적 개념에 갇혀, 인간 생존의 근거지는 땅(흙)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점점 더 무력하고 노예적이며, ‘품위 없는’삶을 이어가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예수는, 하느님은, 교회는 무슨 의미를 갖는가.
개인을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로, 사회를 저마다 이익을 좇는 약육강식의 살벌한 장으로 보는 근대 자본주의 경제학의 대전제를 저자는 근본적으로“불경(不敬)스럽다”고 정의한다. 저자는 경제문제를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의 문제라고 보고,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또 자신이 살아가는 자연의 터전에 대해 책임을 회복하는 일이 경제행위에서 무엇보다 급선무라고 말한다. 포도원 품꾼(마태2 0 : 1.16) 비유는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경제의 치명적인 결함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의 행동은“공동체적 삶을 가능하게 한다”는 측면에서 공정하며, 자비로운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작동할 수 있는 원리는 경제성장인데, 그것은 즉 무한한 재화, 무한한 자원, 무한한 수요라는 가능하지 않은 전제에 근거해있다는 뜻이다. 지구라는 분명한 한계 안에서 살고 있는 인간은 제한된 물자와 재화, 자연에 구속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한계라는 인간 실존의 근본적 원리를 인정할 때, 더불어 살기 위해서 우리는 고르게 가난한 삶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못난 꼴찌도 공동체에 필요한 인간으로서 불러주고, 그와 함께 살기 위해 내가 가진 것을 포기하고, 가난을 받아
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 이것이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할 내용이다.
자본과 과학이 공모하여 만들어낸 발전이라는 이 시대의 신(神)은, 일체의 문제가 해결되고 괴로움도 없는 미래를 약속하지만, 그런 미래는 한 번도 온 적이 없고,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객관적 한계와 윤리적 요구들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가설적으로 무엇이든 가능해 보일 뿐이다. 그러나 그 지향의 실현 가능성이나 윤리성은 차치하고라도 현대과학 . 과학과 기술이 떠받치고 있는 현대산업문명과 불화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신비한 기적으로서의 삶’을 우리에게서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인간은‘죽을 수밖에 없’고, 이 한계 의식이야말로 인간을 주체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경쟁과 발전이라는 이 시대의 정언명령에 사로잡혀있는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저자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호소한다.
현실이 발목을 잡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상상력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상상력을 포기했기 때문에 현실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 지금 이 사회는 다 같이 미친 듯이 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고, 그 방향은 인간다움과 인간적 가치를 뿌리로부터 손상시키는 물신주의의방향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말로 인문학자들이 해야 할 말은“폭주를 멈추라!”라는 경고이다. …
그리고 기존의 경쟁시스템을 바꾸어나갈 사람을 단련해내는 급진적 진지가 되도록, 각자의 자리에서 구체적인 사람 하나하나를 붙들고 작고 소박하게, 조용하면서도 확실하게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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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 2편
예수가 말하는 생명의 논리 파고세운닥나무 ㅣ 2010-10-07 ㅣ 공감(15) ㅣ 댓글 (6)
제목에 대해서 우선 말을 꺼내본다. <마태복음> 6장 24절이다. "그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이쪽을 미워하고 저쪽을 사랑하거나, 혹 이쪽을 받들고 저쪽을 멸시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마몬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예수의 말인데, 마몬은 부나 재물을 상징하는 아람어이다. 하나님과 마몬은 함께 섬길 수도, 함께 할 수도 없다. 주인이 둘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의 선명한 이 논리는 '마몬의 시대'를 힘겨이 살아가는 나에게 '생명의 논리'란 무엇인가 고민케 한다.
저자는 기독교학과 교수이다. 주로 종교와 신학 관련 서적을 번역하는데, 나는 <녹색평론>에 기고하는 글을 종종 보았다. 이 책은 <녹색평론>에 기고한 글과 종교 관련서 역자 해설을 묶어 놓았다. 시사 관련한 글도 보이는데, 현 정부와 한국 교회에 대한 쓴소리가 돋보인다. 저자는 근래 '이반 일리치 읽기모임'을 통해 새로운 배움과 사귐을 가졌고, 진실한 말과 글에 대한 절박함도 가졌다고 한다. '책머리에'서 박경미 교수는 학자로서 글을 쓰는 어려움에 대해 토로한다.
"논문이란 형태의 글쓰기는 글을 쓰는 행위가 본질적으로 공격적인 행위임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과거의 축적물들을 뒤져서 이리저리 각을 떠 '말길'을 찾아내고 미래의 있을 수 있는 모든 반론들을 앞당겨 격파하면서 글을 쓰기에는 한마디로 체력이 달렸고, 처음의 문제의식을 놓치기 일쑤였다. 대학시절 신학의 길로 이끄셨던 돌아가신 허혁 선생님은 "베끼지 않고는 논문을 쓸 수 없어서" 좋은 책을 번역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미련하게 표절이 들통나게 논문을 쓰지는 않았지만, 엄밀히 말해 아이디어를 가져오는 것도 표절이라 본다면 내가 쓴 논문 중 베끼지 않은 논문은 없고, 표절 아닌 논문도 없다." 이만한 지적 염결함을 근래 나는 보지 못했다. 교수 출신의 정부 각료 후보자들이 논문을 표절했니, 안 했니 하는 소동이 우습게 여겨질 만큼 저자의 염결함은 높이 사두고 싶다.
저자는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에 대해서 알량한 논리라며 비판한다. "이반 일리치의 말대로 비가 오는데 우산을 만들어 비를 피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비 자체를 없애려 하는 것이 근대산업주의의 오만이다. 유전자조작과 우생학, 인간과 사회에 대한 극단적인 공학적 접근, 그리고 가장 가까운 예로는 한반도대운하 같은 것이야말로 이러한 근대적 오만과 어리석음의 극치이다."('이른바 '실용주의'의 내면성에 대하여' 중) 홍수로 수해를 입는다며 멀쩡한 강을 메우고 괜한 물길을 내는 게 이 정부의 실용주의이다. 내면성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실용주의이다.
교회 다니는 이로서 이런 말은 정말 가슴 아프다. "이랜드 박성수 회장은 "성경에는 노조가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고, 이랜드 전 직원 앞으로 "불법파업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노동조합원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현장으로 복귀하여 다시는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의 달란트(임금)에 불만을 갖지 않는 성실한 종의 소임을 다하도록" 기도하라는 기도제목을 하달했다."('예수의 교회, 마몬의 교회' 중)
김두식 교수가 한 강연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님은 한국 기독교 전통이 낳을 수 있는 최대치의 인물입니다. 미국 기독교 전통이 낳을 수 있는 최고의 인물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이구요. 상향성의 한국 기독교 문화가 만들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모델이 이명박 대통령님입니다." 주목할 건 '상향성'이라는 말인데, 상향성의 교회를 박경미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마몬의 교회이다. 결국 상층엔 권력과 더불어 돈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상층 지향과 마몬의 현신인 이명박 장로가 대통령으로 있는 이 시대는 정말 마몬의 시대이다. 누구보다 기독교인들이 이를 뼈아프게 새겨야 한다. 예수가 우리에게 "여러분은 하나님과 마몬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난 어떤 생명의 논리로 마몬의 시대를 뚫고 나가야 할까? 예수의 선명한 논리를 두고 다시 고민해 본다.
우정의 개념을 확대하여 생각하던 중 흰당나귀 ㅣ 2010-05-05 ㅣ 공감(3) ㅣ 댓글 (0)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나는 배신자 취급을 당하고서야 '진정한 친구'을 만나게 되었다며, '우정'을 배신하지 않고 사는 것이 남은 삶의 목표라고 밝히고, 담담히 당당하게 질곡의 한 시대를 의미있게 헤쳐가고 있다.
또 김예슬 학생이 '우정도 낭만도 사제간의 믿음'도 없는 대학을 자퇴하면서 '우정'을 언급한 것에 큰 의미를 두었다.
이런 최근의 사회적 반향의 맥락과 함께 '마몬의 시대, 생명의 논리'(박경미 교수 에세이집)에서 박교수가 주장하는 '우정의 나라' 개념은 개인 - 사회 - 국가에 우정의 개념을 확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명저라 생각한다.
'하느님의 집을 장사꾼의 소굴로 만들었다'는 예수의 준엄한 질타는 오늘 우리사회 어디에나 해당한다. 돈귀신이 지배하는 시장전체주의는 비판적인 지성을 무력하게 하며, 무엇보다도 예수가 꿈꿨던 하느님의 나라, '우정'의 나라를 이루지 못하게 한다.
내가 살기 위해 기어이 너를 먹고야 말겠다고, 그렇게 사는 것이 善이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지성은 무엇이고 철학은 무엇이며 또 종교와 도덕은 무엇인가? 약한 자를 이기는 것이 어떻게 명예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오히려 수치다. 그것은 인간의 세계가 아니라 야수의 세계다. 그보다는 사랑하는 친구를 가지는 것이 명예다. 경쟁은 짐슴들에게 맡기고 우리 인간들은 동무들의 나라, '예수의 교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위 에세이집 제 3부, 어떻게 살 것인가. '예수의 교회 마몬의 교회'에서 일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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