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폼드뉴스] 사상가 함석헌을 생각한다.
사상가 함석헌을 생각한다.
이석봉 2010-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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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을 만난 일이 있다.
함석헌을 필자가 처음에 대한 것은 서울 북부경찰서장(후에 치안감이 됨)이 함석헌의 강연을 녹음해 달라는 부탁에서였다. 몇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만난 함석헌은 난처럼 청아하고 대나무처럼 올곧아 보였다.
함석헌의 신앙은 민족사관에 의한 민족 사랑의 실천력이었다.
함석헌은 우찌무라 간조가 민족과 신앙을 하나로 보고 Two J 곧 only Jesus, only Japan을 외친 원리를 바탕으로 자기 신앙과 민족 사랑에 옮긴다. 함석헌은 식문지 사관과 민족 사관을 극복하기 위하여 고난을 자기 일관된 사상과 사관으로 믿고 고난은 희망으로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고 믿고 가르쳤다.
그는 발행하는 신앙잡지에 민족의 소생을 그린 "개구리의 죽음"이란 글 때문에 1588 수인번호를 달고 4번째 투옥되었다. 좁고 어두운 감방에서 노자와 장자를 읽었다. 그 후 식민지 지식인 함석헌은 우찌무라 간조와 결별한다. 우찌무라의 한일합병과 자치권을 부여하는 사관에 동의할 수 없어서 였다.
스승 유영모님에게서 영향을 받아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불교, 도교, 노자 사상을 통합적인 사상으로 생각하고, 사상적인 융합을 한국적인 통합에서 이해하였고 씨알 사상 곧 힘이 없지만 우주 속에서 나는 나다. 곧 자기 껍데기인 가문, 학벌, 지식, 명예를 버리고 인간의 순수하고 단순한 보통사람이 싹트는 것을 이상으로 생각했다. 즉 역사 현장에서 씨알이 어떻게 씨알노릇을 할 것인가 였다.
함석헌은 기독교는 위대하나 성경만이 제일은 아니다. 하여 이단아가 된다.
그는 생각하는 백성 즉 씨알들의 살아있음을 강조하였다.
천안시 봉명동에 씨알 농장을 세우고 강원도 고성 안반덕에 제2씨알농장을 세워 씨알 교육을 하였다. 인도의 간디처럼 아쉬람농장같은 농장을 세워 생명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이상이었기 때문이었다.
함석헌은 쾌이커교도가 된다.
당시 10-명이 꾸려가는 이 모임은 각자 침묵하고 묵상하는 속에서 누구나 주체가 되어 토론하고 생활을 드라마처럼 극적으로 직결시킨다. 쾌이커 교도는 죽어서 하늘나라가 아니라 현재 사회에서 평화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목적이다.
함석헌은 두 번이나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노벨의 평화 지상주의가 씨알 사상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비폭력 국민운동을 일으킨다. 박정희의 6.16 군사 구데타를 질책했고 한일국교가 정상화될 때는 삭발을 하고 저항하였다. 1972년 유신시대에 씨알의 씨알 됨을 더 강조하고, 씨알들의 연대를 주장하였으며, 유신반대 서명운동을 하였다.
함석헌은 신앙인이라기 보다는 모든 종교에서 통합적인 사상을 도출하여 민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해 싸운 사상가였다. 부정적인 면에서 보면 교회를 부정하는 무교회주의자였고 긍정적인 면에서 보면 민족을 사랑하는 민족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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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퀘이커교 (-敎 Quakers)
퀘이커(Quaker)는 17세기에 등장한 개신교의 한 종파이다.
친우회(형제들의 단체, Society of Friends)란 뜻을 가지며, 퀘이커라는 이름은 하나님 앞에서 떤다는 조지 폭스의 말에서 유래했다. 또한 신자들이 자기 신앙을 육체의 진동(震動)에 의해 표현하였으므로 퀘이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647년에 영국의 조지 폭스(George Fox)가 제창한 명상 운동으로 시작하였다. 창시자 조지 폭스는 19세에 집을 나와 4년간의 구도여행을 통해 펜들 힐(Pendle Hill)이라는 산에서 환상을 보며 그리스도의 진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퀘이커는 영국 정부에 의해 탄압받았으나, 퀘이커 신도 윌리엄 펜이 불하받은 북아메리카 식민지 영토에 도시(현 미국 펜실베이니아)를 세움으로써 종교적 자유를 허용받았다
정적(靜寂) 속에서 하나님을 대망하며 깊은 내면적 체험에 의해 <내적인 빛>을 받아 거기에서 구원을 찾는 것을 지향한다. 성서가 성령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보아 세례·찬송도 부인하며, 성령에 관한 교리에 주목하고 신과 인간 영혼과의 밀접한 관계에 의해 갖게 되는 회심(回心)을 무엇보다 중요시하였다.
전부터 이 교리를 주장하는 이들은 성령주의자로서 이단으로 여겼고 교리는 위험사상으로 간주되어 오랜동안 박해를 받아 왔다. 그들은 국가전복·불경(不敬)·세금체납·징병거부 등의 반사회적 행동으로 벌금·수감·외국추방 등의 벌을 받았다.
미국에서도 박해받게 되자 차츰 로드아일랜드·펜실베이니아가 그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퀘이커교는 사회개혁의 원동력이 되어 노예제 반대운동 등에 영향을 미쳤다.
** 한국에는 1955년 2월 미국인 퀘이커교예배
Orthodox Quaker(정통파 퀘이커)들은 예배당(meeting house)에 시계를 걸지 않고, 어떤 예배당에서는 예배 시작 전부터 문을 여는 사람이 교인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를 하거나 악기 연주, 찬송가를 부르는 등 예배당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기본적인 틀은 같다. 퀘이커는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을 감사하기 때문에 퀘이커교의 중심적인 교리 (내면의 빛 등)를 따른다면 교도들이 어떤 문화에 속해 있느냐 하는 것은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즉 기독교적 퀘이커, 유대인적 퀘이커, 불교적 퀘이커, 무신론적 퀘이커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비폭력주의
또한 전쟁에 반대하는 비폭력주의를 주장, 양심적 병역거부를 실천하고 있다. 실례로 베트남 전쟁 당시, 퀘이커 교인들은 메노나이트 교인들과 더불어 양심적 병역거부와 반전운동을 한 바 있다. 대부분의 퀘이커들은 전쟁에 참여하는 대신 스스로가 인체에 유해한 약물에 대한 인체실험 대상으로 자원하였고,현재도 2차대전 당시 양심적 병역 거부로 인해 귀가 들리지 않거나 운신이 힘든 퀘이커 교도 등을 볼 수 있다.
예배
퀘이커의 예배특징은 침묵의 예배로써, 퀘이커 각자는 침묵을 통해 내면의 빛을 볼 수 있도록 한다. 장소는 특정한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으며, 예배를 이끌어가는 별도의 사제나, 성직자를 두지 않는다.
한국의 퀘이커
한국의 유명한 퀘이커로는 함석헌 선생,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박성준 교수(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남편이자 평화학자이기도 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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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0-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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