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02
잊혀진 여성 ‘조선어멈’ 그리고 ‘식모’ - 여성신문
잊혀진 여성 ‘조선어멈’ 그리고 ‘식모’ - 여성신문
잊혀진 여성 ‘조선어멈’ 그리고 ‘식모’
여성신문
승인 2005.05.12 16:29
이 글은 숙명여대 아시아여성연구소가 한국학술진흥재단의 기초 학문지원을 받아 연구하고 있는 〈한국여성 근·현대사〉내용과 관련된 글이다 〈편집자 주〉
◀동아일보 1928년 3월 15일자에 실린 ‘조선어멈’기사. ▶동아일보 1928년 3월 14일자에 실린 기사. ‘취직장 가지고 나오는 어멈’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조선어멈’을 아세요?
‘조선어멈’은 일제시대 일본인 가정에서 가사일을 돌봐주던 조선인 가정부를 가리킨다. 식민지 시대 대부분의 농토를 빼앗긴 조선인의 삶은 궁핍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절 남자들은 연락선을 탔으며 부녀자들은 경성부 인사상담소를 통해 일본인 가정으로 들어갔다. ‘조선어멈’을 통해 근대 여성의 삶을 살펴봤다.
“십여 명의 어멈이 늘어 안진 곳에 나타난 일본 남녀…“ 이것들 가운데에는 마음에 맛는 것이 업는 걸요”하면서 사무원에게 다시 부탁하는 사람도 잇섯고… 이사람 저사람의 엇개를 치고 다니는 호걸스러운 긔풍을 가진 ‘오가미상’도 잇섯다. 이리하야 조선랑자 조선옷에 일본 버선, 그리고 ‘게다’라는 긔형덕(畸形的) 스타일의 조선어멈이 하로 이틀 그 수효가 늘어갈 분이라 한다.” (<동아일보>1928년 3월 15일)
이는 일제시대 직업소개소였던 ‘경성부 인사상담소’에서 일본인이 조선어멈을 고르는 광경을 묘사한 것이다. ‘조선어멈’은 일제시대 일본인 가정에서 일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그 명칭은 해방 이후 가정부나 식모에서 오늘날의 가사 도우미나 가사 관리사로 바뀌었고, 그 사회적 위치나 역할도 변화를 거듭했다.
식민지 시대 농촌 빈곤
도시 올라온 여성들 ‘조선어멈’ 선택
식민지 시기의 토지조사사업은 대부분의 농민을 소작농으로 전락시켰으며, 농민들이 소작권을 빼앗기는 과정에서 농촌의 빈곤은 더욱 가중돼 갔다. 그 결과 많은 농민들에게 있어 배고픔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됐으며, 배불리 먹기 위해 그들은 농사가 아닌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1928년 당시 일본으로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매일 1500여명에 이르는 남자들이 연락선을 탔으며, 가난한 가정의 부녀자들은 한 달이면 수백 명씩 경성부 인사상담소를 통해 일본인 가정으로 들어갔다.
1927년 1년간에 이들 구직자 1788명 중 1007명이 일본인 가정에 취직하고 있다. 농촌에서 올라와 일본인 가정으로 들어간 ‘조선어멈’의 연령층은 17세에서 45세까지였으며, 이 가운데 30세 이상이 20%를 차지했고 이들 대부분은 과부였다. 그리고 30세 미만의 연령층이 약 75%를 점하고 있는데 주로 기혼여성이었다. 이들 기혼여성은 시부모와 어린 자식을 고향에 두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도시로 올라와 하나의 직업으로서 ‘조선어멈’을 선택한 것이다.
조선가정 초임 2~6원, 일본가정 초임 5~12원
민족보다 경제 우선 일본 가정 선호
인사상담소를 찾은 조선 여성들은 거의 모두가 일본인 가정을 선호하였다. 일본인에 대한 시선이 곱지 못했던 식민지라는 상황 속에서 조선여성들이 일본인 가정을 선호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하나는 일본인 가정의 보수가 조선인 가정보다 월등히 높다는 것이었다. 이는 ‘경제적’인 이유가 ‘민족적’인 명분을 능가할 만큼 삶에의 욕구가 절박한 시절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일본인 가정의 월급은 일본말을 잘하는 정도에 따라 차등이 있었다. 1928년 기준으로 일본말을 잘 이해하는 경우에 초임이 12원 정도인데 비해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5원 정도였다. 만약 5∼6년 이상의 경험이 더해지면 임금은 20원 이상 됐다. 이는 조선인 가정의 식모 초임이 2∼3원에서 5∼6원인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높은 액수였다.
조선 여성들이 일본인 가정을 선호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들이 조선인 가정으로 가는 것을 한사코 기피했다는 점이다. 엊그제까지 행랑어멈이나 하인을 두고 살았던 자신이 이제 하인의 처지가 됐다는 것을 창피하게 여겼으며 감추고 싶어 했다. 그리고 가난한 처지에 있었던 여성들도 같은 조선 가정에서 하인으로 일하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인사상담소에 들르는 부인들은 ‘나는 일본 사람의 집이 아니면 안 가겠다’는 조건을 붙이기도 했다. 이들은 지금의 충무로 자리인 ‘진고개’ 부근에서도 제일 구석진 곳에 자리잡은 일본인 집으로 가기를 원했다.
그렇다면 당시 지식층 여성을 대표한다고 했던 조선의 신여성들은 ‘조선어멈=식모’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1940년 일부 신여성의 좌담회를 보면, ‘식모’에 대한 그녀들의 인식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식모로 나오는 이유에 대해 ‘소박을 맛고 나오는 것, 남편이 첩을 얻어서 나오는 것, 막내둥이 시집을 보내랴구두 나오구… 소박떼기는 남편을 글타고 하지만 소박을 맛을 이유가 다 있어요’ ; 식모의 훈련에 대해 ‘어른보다는 계집애를 두는 것이 훨씬 났도군요. 아홉 살 난 계집애를 열다섯살 날 때까지 둬봤는데 참 잘해요’; 주인식모간의 용어에 대해서는 ‘어멈이라고도 부르고, 식모라고도 부르는데… 노인에겐 여보세요라고 부르지’; 하인이 주인을 보고는 ‘늙은이는 마나님, 젊은이는 아씨, 밖았 냥반은 나리, 젊은 양반은 서방님 요샌 이렇게 부르기들을 시려해요. 아씨, 마나님을 봐치랜다구 그게 아니꺼워서 식모를 않하겠다는 사람두 있어요’; 식모의 휴양에 대해 ‘8월 추석에나 정초에는 집에 가야한다구 야단이죠. 또 집에 일은 많은데 명절이니까 가야한다고 떼를 쓸댄 그건 딱 질색이야. 물론 일만 잘 한다면 가끔 놀리겠어’” (<여성>, 1940년 1월)
‘식모’ 통해 본 당시 신여성의식
남성 중심적 사고 강해
여기서 당시의 일부 신여성들이 ‘식모’를 자신들과는 다른 위치에 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식모’가 된 여성이 소박맞은 이유에 대해 남성 중심적 사회 구조를 탓하기보다는 여성 개인의 문제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나, 같은 여성끼리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드러내는 호칭의 사용을 선호하는 것 등은 이들 신여성의 의식이 얼마나 남성 중심적 사고에 젖어 있었는가를 알 수 있는 단면이다. 아랫사람은 여전히 조선시대의 종을 부리는 듯하면서, 남녀평등의 사회개혁을 주장한 이 시기 일부 신여성의 여성해방은 그들 자신만의 해방론이었음을 말해 준다.
1930년을 기준으로 가사사용인 11만6751명 가운데 여성은 8만8453명이었다. 이는 같은 시기 전체 노동자 8만3428명 가운데 여성 노동자가 2만6739명이었던 것과 비교해 보면 여성 가사 사용인의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짐작케 한다.
지금까지 일제가 실시하려 한 정책이나 국내 민족주의자들의 주장, 그리고 신여성이 주장한 여성해방의 영역에서마저 ‘조선어멈=식모’는 주목되지 못했다. 그러나 소외되고 잊혀졌던 ‘조선어멈=식모’는 당시 상업 서비스 부문의 ‘가사사용인’이라는 업종을 담당한 계층으로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1930년 인구의 80% 이상이 농민이었고 이들 중 반수 이상이 농촌여성이었으며, ‘조선어멈=식모’의 대부분이 이들 농촌 여성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이들의 문제는 당시 여성층의 한 부분을 대표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유숙란/ 아시아여성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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