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프레시안의 원 글을 읽으며 동학의 폐정개혁안에 토지개혁 요구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저자의 논리가 참 빈약하다고 생각했다. 여하튼, 원글이나 페북에 커멘트를 단, 이 젊은 마르크시스트 학자의 논박 모두, 전에 모르던 사실이나,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못했던 문제에 대해서 주목하게 했다는 점에서, 정보값도 높고, 문제제기도 좋은 것 같아서 고마운 생각이 든다.
다만 이 학자의 주장에서, 환곡이 실패하는 가운데, 사회적 안전보장망이 없어서, 동학이 세를 키웠다고 하는데,
백승종 교수님의 동학사를 보면, 원래 상업이 발달하지 않은 조선사회에서, 마을공동체를 유지하는 엘리트들이 (지주 혹은 향신) default 비율이 극도로 높은고리대를 통해, 그런 암묵적 사회안전보장망을 유지다하가,
일제의 쌀수입 때문에, 남는 쌀을 처리할 수 있는 채널이 생기면서, 사회안전 보장망이 해체됐다고 주장하시던 내용과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그의 주장대로 사회구성체에 대한 이해가 많이 다른 것 같다. 어느쪽이 맞는지 판단할 지식이 유감스럽게도 나는 없다만....
[장석준 칼럼] 동학농민혁명군은 농지 개혁을 바랐는가
내 기억에 장석준 선생이 인용하고 계시는 노용필 선생의 그 논문에서 노용필 선생은 폐정개혁안 12조에서의 토지분작은 오지영의 ‘개인적인 희망사항’이라고 보인다고 지적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국내 학계에서 이에 대해 검토한 사례 자체가 그다지 없다.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이 문제를 직접 다룬 가장 최근의 연구논문이 배항섭 선생의 ‘<동학사>의 제1차 동학농민전쟁 전개과정에 대한 서술 내용 분석’이라는 것인데 여기에서도 결론은 그 내용을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 부분은 사실 국정교과서 파동이나 이런 것이 일어났을 당시에도 논란이 되었던 것인데 토지개혁 내용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상당히 많은 부분이 논란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동학농민봉기는 조선왕조에 가해진 최후의 일격이면서 그 모순이 집약된 대사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근대로의 이행에 있어서 조선왕조라는 전근대 사회의 전개 과정에서 배태된 모순이 세계자본주의와 접촉하는 와중에 폭발한 것이기 때문에 이 사건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조선왕조의 사회구성체의 성격이 달라진다.
내가 기억하기로 자본주의 맹아론을 주장하며 한국 사회경제사 연구에 큰 영향을 미친 김용섭 선생 또한 석사학위였나 아무튼 그 연구의 시작을 동학농민봉기로 했던 걸로 기억한다.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어째서 농민들이 토지분작 같은 요구를 하게 되었는가, 대규모의 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는가 등으로 나아갔던 걸로 기억한다. 그의 결론은 한국 사회가 유럽사회와 마찬가지로 ‘세계사의 기본법칙’을 준수하며 나아갔다는 것이고, 그런 맥락에서 동학농민봉기는 ‘아래로부터의 근대화’ 길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그러한 의의가 있는 것인데 장석준 선생의 말이 맞기 위해서는 농민들이 토지개혁을 요구할 수 있는 조건이 존재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장석준 선생이 오늘날의 한국 사회가 부동산 불균형으로 인해 제2의 농지개혁과 같은 토지개혁을 요한다고 보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농민들이 토지분작을 요구하며 대규모로 봉기하기 위해서는 조선왕조 하에서의 토지모순의 상황이 심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듯 조선왕조의 전개 속에서 배태된 모순이 토지개혁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조선왕조의 사회구성체가 유럽의 그것과 같은 유형의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과연 그러했던가. 조선왕조는 유럽 사회와 같이 사적 영주(=지주)에 의해 모순이 배태되는 사회였던가. 적어도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지주라는 말 자체가 일본제국을 통해 수입된 사회에서(동양에는 애당초 ‘지주’라는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19세기의 사상가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것을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지주가 사회경제적으로 주요한 위치를 차지했다는 건 동의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조선왕조에서는 토지관계가 국가를 중심으로 운용되었다.
동학농민봉기에 관한 연구나 자료들을 보아도 동학군이 지주를 공격하였다는 사례는 내가 기억하기로 거의 없다. 동학군이 문제삼았던 것은 ‘국가기구’이지 지주가 아니다. 안병태 선생이 이미 1970년대에 지적했던 사실이다. 왜 그러했던가.
조선왕조가 국가적으로 환곡제를 운용하며 농민의 가계를 뒷받침해며 사회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던 것이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생산성의 하락, 재정운용의 실패 등이 겹치면서 환곡제가 사실상 해체되어버린다. 19세기 당시 지방수령들은 중앙에의 상납분, 자체적인 지방재정 운용비, 그리고 환곡 등의 비축분의 확보라는 압박 속에서 재정을 충당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지방관이 지방 유지들과 결탁하거나 환곡에 들어갈 곡식까지 횡령하는 경우나 이무(移貿)라고 하여 일종의 환곡을 갖고 장사질을 하는 행위까지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중앙재정은 중앙재정 나름대로, 지방재정은 지방재정 나름대로 모두 곤란을 겪고 있었고 그러한 곤란은 곧바로 농민에게 전가되었다. 악순환이었다.
환곡이 축나는 다양한 사례와 그 유형에 대해서는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매우 자세하다. 송찬섭 선생은 이에 대해 1810년대에서 1860년까지 반세기만에 거의 1천만 석에 달하는 환곡이 거의 탕진되었다고 지적하였다. 관료기구의 제도적 미비가 부정부패, 기강해이 등을 낳았다고 본다. 팔레 선생의 지적처럼 조선왕조는 제도적으로 배태된 문제를 제도로 해결하지 않고 양반 관료의 개인적 심성에 기대어 해결하려 하는 무능한 국가였다.
환곡의 분배기능이 해체되자 곧바로 쌀가격은 폭등하였고 소농의 가계 운용의 안정성은 점차로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전남 지방의 쌀값은 1850년대까지 1석당 2~3냥 수준이었는데, 1860년대 이후 4~6냥으로 배나 뛰었다. 사회적 위기를 방지할 환곡이라는 방파제가 사라지자 농민의 대규모적 몰락이 시작되었다. 조선왕조는 오늘날의 한국사회가 그러하듯이 개인의 파산 위기를 지탱해줄 공동체적 기제들이 존재하지 않는 원자화된 사회였다. 기껏해야 친족공동체정도가 개인을 보호하고 지탱해줄 수 있었지 그 외의 다른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는 위기를 해소하는 역할보다 되려 위기를 추동하는 역할을 하였으니 그에 대한 농민의 반응이 어떠했겠나.
1894년의 위기는 1997년의 위기와 같이 보아야 한다. 외환위기와 동학농민봉기라는 두 사건은 하나는 근대 한국사회의 전개 과정에서 배태된 모순이, 다른 하나는 전근대 한국사회의 전개 과정 속에서 배태된 모순이 폭발한 것이다. 두 사건 모두 위기를 추동했던 것은 국가였지만 정작 위기의 해결 과정에서는 “국가의 부재”가 두드러졌다.
‘국가의 부재’는 원자화된 개인들의 각자도생을 낳는다. 그 각자도생 속에서 사회적 삶의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살아남기 위해 개인들은 가혹한 경쟁 속에 놓이게 된다. 이 압박을 견디지 못하는 개인은 낙오되거나 도태되어 사회로부터 스스로 탈출하고자 한다. OECD 국가 가운데 1위, 세계 2위의 자살률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매년 인구 10만 명당 31명의 한국인들이 자살을 택한다.
이런 압박을 견디기 위해서라도 개인은 자신이 속한 이익단체의 이해관계에 목숨을 걸고, 그 이해관계를 위해 극한의 대립을 택한다. 정치는 ‘공공’을 다루는 공간이 아니라 사적인 이익집단들의 극한의 대립이 펼쳐지는 장이 된다. 그리고 여기서 이기는 사적 이익집단이 사회 전체에 자신의 이해관계를 반영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국가의 부재’가 모든 사안의 “국가로의 환원”을 낳은 것이다. 한국인들이 지니고 있는 그 강렬한 국가로의 귀속의지, 그리고 국가에 자신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기 위한 강렬한 평등주의는 모두 국가의 부재가 낳은 산물이라 생각한다.
정의당과 같은 오늘날의 진보좌파 정당이 해야 할 일은 “자본”의 시대에 “토지” 분배와 같은 것을 고민하는 게 아니다. 지대를 줄이는 고민은 분명 필요한 것이지만, 전근대 사회에서의 생산수단의 재분배와 현대 사회에서의 그것은 전연 의미가 다르다. 보다 구체적인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국가의 부재’라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 개인의 재생산에 드는 비용을 어떻게 사회화하여 보다 효율적이고 높은 수준의 통합성을 갖춘 공동체를 창출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장석준 선생의 고민은 그런 의미에서 좀 잘못된 것이라 생각된다. 여기에는 무의미한 정파적 입장과 계급투쟁의 관점만 존재할 뿐이지, 사회 전체의 발전을 어떻게 추동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사라져 있다. 참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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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폐정개혁안에 포함된 토지분배에 관해서는 이미 20년쯤 전에 바논이 제기되었습니다. 주장 자체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 주장이 맞고 틀리고가 동학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정말 중요한가?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Yuik Kim 답변 감사드립니다. 교수님. 어제, 그제도 개벽파 학자들이 삼경 사상을 전 세계에 알리자라고 하는 주장을 격한 감동으로 들었습니다. 심지어는 삼경이, 자유, 평등, 박애에 버금하는 가치로 다음 세상을 준비하게 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는데, 이 글은, 보다 전통적인 좌우파 근대의 관점을 유지하는 학자들이 이를 또, 어떻게 반박할 것인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는 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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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ik Kim 원철
Yuik Kim 또 한가지는 교수님 말씀에서 일본에 의한 쌀수입, 즉 세계 경제체제에 조선이 편입되는 과정에서 마을 공동체의 리스크 관리 기능, 훨씬 유기적이고 상호의존적이던 (교수님께서 실제 마을 문서를 찾아 보시면서 분석하신)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가 붕괴되면서 동학이 태동할 기반이 마련됐다라는 부분도 사실 대단히 경제적 관점의 이야기인데, 이 꼼꼼해 보이는 마르크스 주의 학자가 전혀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이 좀 의아했습니다.
오히려, '지주'라는 표현의 유무를 이야기하면서, 유럽과 조선의 사회구성체가 달랐으므로 근대(물론 서구적 관점의)로 이행할 조건 자체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논리적 비약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러다가 갑자기 그 당시와 지금 상황의 기시감을 이야기하며, 동학이 등장할 당시 조선 사회가 매우 원자화된 사회였다 (가장 위화감을 느끼게 하는 주장이었습니다.) 라든가, 국가의 부재와 국가로의 강렬한 귀속감을 이야기하는 것이... 신선하게 들리면서도,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현장이나 인간에 대한 이해는 좀 부족한, 머리 좋은 학자라는 생각이 들고요. 저는 학자도 아닌데다가 이런 식으로 논쟁이 붙으면 논의가 진행되지 않을 것 같아, 이 분의 페북에 댓글은 못달고, 그냥 제 페북에 커멘트를 달면서 버릇없이 선생님을 소환했는데, 답변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여하튼, 전에는 별로 생각해보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했던 이야기들이 갑자기 주위에서 이렇게 많이 들리는 것을 보니, 세상이 많이 바뀔듯한 조짐이 아닌가 싶습니다. ㅎㅎㅎ
백승종 당시는 동학농민군이 아직 대세를 좌우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어요. 일본과 청나라 군대의 진출로 인해서 근본적인 개혁을 서두를 수는 없었던 상황입니다. 당대 동학농민군의 입장에서 보면 땅을 쪼개어 나누고 말고보다는 훨씬 시급한 일이 눈앞에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니까요.
Won-Seok Yang 동학의 가장 큰 한계는 인내천과 왕조국가가 양립할 수 없음을 끝까지 추구하지 못하고 왕에게 교조신원운동을 청원한게 아닐지..
Yuik Kim 나는 그것이야말로 유학/왕조국가와 완전히 단절할 수 없었던 당시의 시대적 한계이지... 동학사상 자체의 한계는 아니라고 봐. 왕조가 망하자마자,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아주 소수의 유림을 제외하고, 모두 공화국의 이상을 위해서 달려간 것을 보면 알수 있듯...
백승종 세계 제1차대전이 끝날 때까지도 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는 왕조체제를 유지했어요. 동학이 공화국을 주장하지 않았대서 문제될 상황은 전혀 아닙니다.
Won-Seok Yang 그럼요 두분 말씀이 맞구요. 저는 그저 동학이 자신의 사유를 끝까지 밀고 나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어요. 그점이 조금 아쉽다고 할까요.. 천=>인 여기서 더나가 천=>인=>사회 까지 사유를 밀고나갔다면 어땠을까...
Sunghwan Jo 제분 답글 잘 읽었습니다. 공부가 많이 되네요^^ 천도교에서는 "사회개벽" 같은 얘기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민주공화>에 대한 논의도 나오고 있고요. 하늘과 사람 사이에 사회와 국가의 논의가 들어간게 천도교가 아닌가 싶습니다.
Yuik Kim Won-Seok Yang 양교수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아니되옵니다 ^^ 동학은 천도교, 증산교, 원불교 등으로 계승되고, 지금은 생명평화사상을 기반으로 한살림운동이나 원불교/원광대학과 같은 현실과 사회에 깊이있게 개입하는 운동/실체로 살아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양교수님처럼 사실 대부분 이런 사실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새롭게 개벽학, 개벽파로 이 점을 조명하고 외연을 확장하려는 것이랍니다. ^^
Yuik Kim Won-Seok Yang 백승종 선생님이나 조성환 선생님은 그런 일을 하시는 가장 최전선에 서계신 뛰어나고 성실한 학자들이십니다. 그런데 저같은 얼치기 아마추어가 커멘트에 끌어들여서 넘 죄송하네요. 양교수님은 그냥 저랑 얘기하세요 ㅎㅎㅎ. 뭐 수학 얘기를 할 수는 없긴 한데. 아 조성환 선생님은 학부에서 수학을 전공하시고 지금은 한국 사상사를 공부하신답니다. ^^
Won-Seok Yang 알겠습니다^^ 동학에 대해서는 장일순 선생님 글을 통해 읽은게 전부라 저도 동학에 문외한입니다. 섣부른 의견 죄송합니다~ 동학을 넘어서, 뭐 그냥 동양적 사상의 한계랄까요.. 요즘 그런게 느껴져서요..
백승종 당시는 동학농민군이 아직 대세를 좌우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어요. 일본과 청나라 군대의 진출로 인해서 근본적인 개혁을 서두를 수는 없었던 상황입니다. 당대 동학농민군의 입장에서 보면 땅을 쪼개어 나누고 말고보다는 훨씬 시급한 일이 눈앞에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니까요.
Won-Seok Yang 동학의 가장 큰 한계는 인내천과 왕조국가가 양립할 수 없음을 끝까지 추구하지 못하고 왕에게 교조신원운동을 청원한게 아닐지..
Yuik Kim 나는 그것이야말로 유학/왕조국가와 완전히 단절할 수 없었던 당시의 시대적 한계이지... 동학사상 자체의 한계는 아니라고 봐. 왕조가 망하자마자,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아주 소수의 유림을 제외하고, 모두 공화국의 이상을 위해서 달려간 것을 보면 알수 있듯...
백승종 세계 제1차대전이 끝날 때까지도 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는 왕조체제를 유지했어요. 동학이 공화국을 주장하지 않았대서 문제될 상황은 전혀 아닙니다.
Won-Seok Yang 그럼요 두분 말씀이 맞구요. 저는 그저 동학이 자신의 사유를 끝까지 밀고 나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어요. 그점이 조금 아쉽다고 할까요.. 천=>인 여기서 더나가 천=>인=>사회 까지 사유를 밀고나갔다면 어땠을까...
Sunghwan Jo 제분 답글 잘 읽었습니다. 공부가 많이 되네요^^ 천도교에서는 "사회개벽" 같은 얘기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민주공화>에 대한 논의도 나오고 있고요. 하늘과 사람 사이에 사회와 국가의 논의가 들어간게 천도교가 아닌가 싶습니다.
Yuik Kim Won-Seok Yang 양교수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아니되옵니다 ^^ 동학은 천도교, 증산교, 원불교 등으로 계승되고, 지금은 생명평화사상을 기반으로 한살림운동이나 원불교/원광대학과 같은 현실과 사회에 깊이있게 개입하는 운동/실체로 살아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양교수님처럼 사실 대부분 이런 사실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새롭게 개벽학, 개벽파로 이 점을 조명하고 외연을 확장하려는 것이랍니다. ^^
Yuik Kim Won-Seok Yang 백승종 선생님이나 조성환 선생님은 그런 일을 하시는 가장 최전선에 서계신 뛰어나고 성실한 학자들이십니다. 그런데 저같은 얼치기 아마추어가 커멘트에 끌어들여서 넘 죄송하네요. 양교수님은 그냥 저랑 얘기하세요 ㅎㅎㅎ. 뭐 수학 얘기를 할 수는 없긴 한데. 아 조성환 선생님은 학부에서 수학을 전공하시고 지금은 한국 사상사를 공부하신답니다. ^^
Won-Seok Yang 알겠습니다^^ 동학에 대해서는 장일순 선생님 글을 통해 읽은게 전부라 저도 동학에 문외한입니다. 섣부른 의견 죄송합니다~ 동학을 넘어서, 뭐 그냥 동양적 사상의 한계랄까요.. 요즘 그런게 느껴져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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