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來天地皆同力 시래천지개동력
運去英雄不自謨 운거영웅부자모
愛民正義我無失 애민정의아무실
愛國丹心谁有知 애국단심수유지
運去英雄不自謨 운거영웅부자모
愛民正義我無失 애민정의아무실
愛國丹心谁有知 애국단심수유지
때를 만나서는 천지가 모두 힘을 합하더니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백성 사랑 정의 위한 길에 허물이 없었건만
나라를 위하는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백성 사랑 정의 위한 길에 허물이 없었건만
나라를 위하는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 최현식 편저 『갑오농민혁명사』 (신아출판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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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의 향토 사학자 최현식 씨는 1974년 5월 정읍군지에 수록할 자료를 모으다가 천안 전씨 족보에서 전봉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한시를 발견한다. 이 시는 ‘전봉준 장군’ 난의 여백에 ‘殞命 유시’라는 제목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를 1974년 5월 11일자 경향신문이 곧바로 보도하였고, 소설가 김동리의 번역을 함께 실었다. 시골 훈장의 아들로 태어나 서당에서 공부했다는 정도의 기록만 알려졌을 뿐 전봉준이 남긴 자료는 별로 없는 상태에서 소중한 絶命詩 한 편을 건진 것이다. 세 마지기 전답을 경작하는 소농이면서 한때 마을 훈장노릇도 했던 그의 학식을 가늠할 수 있으며 아울러 고부 동학접주로 임명된 배경으로도 작용 했음직하다.
작성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으니 전봉준의 글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농민 봉기 때 돌렸다는 ‘사발통문’이나 ‘격문’, ‘포고문’ 등을 직접 지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전봉준이 13세 때 지었다는 ‘백구시(白鷗詩)’라는 한시도 한 편 전해져오긴하나 솔직히 해독은커녕 음을 따라 읽기에도 버거울 정도라 진짜 전봉준의 작품이 맞나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내용은 백구(갈매기)에 빗대어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노래한 것이라는데 학계에서도 한시의 어휘, 비유로 보아 10대 초반의 어린아이가 지은 작품으로 여기지 않는 분위기다. 그에 비해서 이 한시는 비교적 수월케 읽히면서 내용 또한 선명하여 바로 납득이 된다.
전봉준이 동학에 입교하게 된 동기는 스스로 밝혔듯이, 동학은 경천수심(敬天守心)의 도(道)로, 충효를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위함이었다. 고부 농민들은 동학접주 전봉준을 앞장 세워 관아에 가서 조병갑의 폭정에 항의하였으나 문 앞에서 쫓겨나자 1894년 정월 1,000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였다. 농민군이 고부 관아를 습격하자 조병갑은 전주로 도망가고, 농민군은 무기고를 부수어 무장하고 빼앗겼던 세곡을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당시 조정은 수습책을 마련한다고 했으나, 사태의 모든 책임을 동학교도들에게 돌려 체포와 분탕, 그리고 살해를 일삼는 등 악랄한 행동을 자행하고 만다.
이에 격분하여 1894년 3월 하순 드디어 인근 각지의 동학접주에게 통문을 보내 보국안민을 위하여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르니 그 본의가 단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백성들을 도탄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기 위함인데, 안으로는 탐관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몰아내고자 한다. 양반과 부호의 앞에서 고통 받는 민중들과, 방백 수령 밑에 굴욕 받는 아전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다.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를 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이렇게 해서 백산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의 수는 1만 명이 넘었다.
1894년 4월 4일 그가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부안을 점령하고, 전주를 향하여 진격 1894년 5월 11일 황토현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호남일대를 장악한다. 그 전승일이 동학농민혁명 기념일로 삼은 배경이다. 다급해진 조정은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청군이 아산만에 상륙한다. 일본군도 톈진조약을 빙자하여 제물포에 들어왔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당시 조정은 선무작업을 병행하였는데, 전라도 각 지방에는 집강소를 두어 폐정의 개혁을 위한 행정관청의 구실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사태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든다. 마침내 9월 중순경 동학농민군은 항일구국의 기치를 내걸고 다시 봉기하였다.
전봉준은 자신의 주력부대 1만여 명을 이끌고 공주를 공격, 몇 차례의 전투를 치렀으나 11월 초 우금치 싸움에서 일본군과 관군 연합군에게 대패하고 만다. 이 전투의 패배는 화기의 열세가 주원인이었다. 조선의 관군과 함께 농민군 공격에 나선 일본군이 미국에서 수입한 최초의 기관총이라 할 수 있는 개틀링 기관포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농민군이 사용했던 화승총은 사거리 100보에 분당 2발 발사가 고작인데 비해 연합군은 사거리 500보에 분당 12발의 발사속도를 갖춘 신형 소총에다 개틀링 건까지 갖춰 화력에서 게임이 되지 않았다. 그 개틀링 건으로 난사를 해댔으니 이는 대량 학살이나 다름없었다.
농민대중의 밑으로부터의 힘을 결집하여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조선을 침탈하려는 일본의 야욕을 저지함으로써 국가의 근대화를 이룩하려 했던 전봉준의 개혁 의지는 일본의 군사력 앞에서 무참하게 좌절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영도한 갑오농민전쟁은 조선의 봉건제도가 종말에 이르렀음을 실증했고, 민중을 반침략 반봉건의 방향으로 각성시킴으로써 이후의 사회변혁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진전에 밑거름이 되었다. 세월이 많이 흐르고 세상은 변했지만 받들어 마땅한 정신이 아닌가. 마흔하나의 나이로 절명한 의로운 영웅 전봉준의 ‘나라 위하는 일편단심’을 가슴에 사무치는 유시와 함께 되새긴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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