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아직 끝나지 않은 임정로드 / 신영전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세상읽기] 아직 끝나지 않은 임정로드 / 신영전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아직 끝나지 않은 임정로드 / 신영전

등록 :2019-06-26 18:14수정 :2019-06-26 19:07

신영전
한양대 의대 교수


김형, 저는 지금 충칭으로 가는 열차 안에 있습니다. 천둥 벼락과 함께 쏟아지는 폭우로 기차가 섰다 가다를 반복하고 있어 언제 목적지에 도착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같은 침대칸에 있는 중국인 가족 중 2살짜리 샤와의 재롱에 지루함을 잊습니다. 목적지가 같아서일까요? 서로 말이 안 통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함께 힘을 모아 일제와 싸우기로 결정한 뒤, 쑨원이 만들고 장제스와 저우언라이가 함께 가르쳤던 황포군관학교의 조선인과 중국인 학생들도 아마 지금 우리와 같았을 겁니다.

이 ‘임정로드’ 프로젝트는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상하이에서 난징, 광저우, 류저우를 거쳐 충칭에 이르는 임시정부의 흔적 4천㎞를 따라가 보는 것입니다.

돌아보면 이 길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만 12차례, 총 30차례 가까이 옮겨야 했던 이유는 일제에 쫓겼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방 한칸 살 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길은 불안한 길이기도 했지요. 자싱에서 김구는 온종일 호숫가 배 위에 머물다 저녁 무렵 붉은 표지가 지붕에 걸려야 돌아올 수 있었고, 그러고도 비상 탈출구 위에 놓인 침대에서 쪽잠을 자야 했습니다.

그래도 이 길은 희망의 길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광복군에 들어오기 위해 조선의 청년들이 목숨을 걸고 일본 군대에서 탈영하여, 한겨울 얇은 여름 군복에 맨발로 임정이 있는 충칭까지 6천리를 걸어오지 않았을 겁니다.

“꽃피는 고국은 빛 잃고/ 물이 용솟음치듯 대중은 들끓는다/ 억압받고 빼앗긴 우리 삶의 길/ 들끓는 것만으로 되찾을 수 있으랴/ 갈 길 몰라 하는 동포들이여/ 오라 이곳 학교의 교정으로”

이제는 공사장 뒷산 잡초만 무성한 폐허가 되었지만, 김원봉이 주도하여 만든 장쑤성 조선혁명간부학교 훈련터에서 우리는 군복에 밴 짙은 땀내를 맡았고, 조국 독립의 꿈을 버리지 않은 청년들의 우렁찬 노랫소리를 분명히 들었습니다. 더욱 놀란 것은 그 자리에 술 한잔 올리고 돌아서는데, 저 산 아래에서 20여명의 한국 청년들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을 때입니다. 우리는 환성과 박수로 그들을 맞이했고 그 행렬 속에서 저는 구릿빛 얼굴의 청년 장준하와 김준엽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길은 미완의 길입니다. 이 ‘임정로드’는 한 언론사 젊은 기자들이 휴가도 반납하고 몇년을 발로 뛰며 개척한 길입니다. 지도에도 없는 산길에서 길을 잃고, 기차를 놓쳐 발을 동동 구르고, 서툰 중국말로 손짓발짓 해가며 알아낸 장소들이 많습니다. 여전히 못 찾은 장소가 많고 어렵게 찾아낸 장소에서 아무 흔적도 찾을 수 없을 때 여러번 그 자리에 주저앉기도 했다고 합니다. 서금이로에 있었다는 최초의 상하이 임시정부 터도 아직 정확히 어디인지 모르고, 만국공묘에는 아직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이 쓸쓸히 누워 있습니다. 광저우 기의열사릉에 누워 있는 150명의 조선 청년들은 아직 이름조차 찾지 못하고 있고, 충칭의 광복군 총사령부 건물은 중국 정부가 최근 수리를 마쳤지만 운영자를 찾지 못해 굳게 문이 닫혀 있습니다. 해방 조국의 이상향을 미리 꿈꿨던 토교촌은 차단막이 고집스럽게 가로막고 있고 여성 의열단원 박차정이 전투 중 입은 부상 때문에 죽음을 맞았던 집은 재개발로 며칠 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처지에 있습니다.

김형, 이번 임정로드 일정은 해방을 맞았던 충칭에서 끝나지만 저는 이곳이 종착역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단된 조국에 있는 두개의 정부는 어떤 의미에서 여전히 ‘임시정부’이기 때문입니다. 조국 독립의 방법에 대해 이견이 있었으나 새해 첫날에는 상하이 영안호텔에 다 함께 모여 덕담을 나누었습니다. 7개 정파로 나뉘어 있던 충칭 임시정부를 보고 청년 장준하는 “셋집을 얻어 정부청사를 쓰고 있는 형편에 그 (정)파는 의자보다 많다”고 비탄했지만, 그래도 그때는 조국의 독립이라는 꿈 아래 모두 하나였지요.

임정로드는 충칭에서 어디로 이어져야 할까요? 그곳은 여의도 공항 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군정청에 의해 환영행사도 금지당한 채 김구 등 임시정부 요원들이 개인 자격으로 입국해야 했던 그 굴욕의 장소 말입니다. 다시 그 길은 서울과 평양으로 갈라지겠지요. 김형, 그런데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이 갈라진 임정로드는 언제, 어디에서 다시 만나 그 장엄한 끝을 맺게 될까요?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99454.html?fbclid=IwAR2NetDN2gyznqeQsQ9tM5GxHdFyxLsgaKzuvlzalVsiJeVRS1nnIk6jWsM#csidx0dd57701b39405da20811ee34ae97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