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한 짐승들과 천제(天祭) 1/
오늘 아침재 길을 걸으면서 마주하는 것들을 보며 나와 둘이 아님을 생각한다. 스승은 천지만물 일체동근(一體同根)이란 말로 그것을 깨우쳐주셨다. 천지만물 가운데 어느 것 하나 나와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그러나 이치의 그러함을 아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몸으로 오롯이 깨닫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그래서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가, 그 길이 가장 멀다는 말이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가슴에 닿았는가. 아직 모르겠다. 그러하다는 이치를 들고 반 평생을 넘게 살아오면서도 아직도 가슴 저 밑바닥까지 깊숙하게 닻을 내리지 못하고 머리와 가슴 사이를 오갈 때가 많은 것 같다. 그러므로 남은 날의 과제는 가슴 깊게 흔들리지 않는 닻을 내리는 것이라.
다시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숨결을 고르며 지금 내가 마주하는 것들은 다른 형태로 드려난 나의 모습임을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우주, 천지만물은 나의 큰 모습임을. 그렇게 부분이면서 전체인 나를 생각한다. 내 안의 하늘과 내 밖의 더 큰 하늘을.
하늘의 뜻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공자는 지천명을 말했고 예수는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했다. 해월은 하늘의 뜻을 이루는 게 사람의 역할이라고 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말도 이런 뜻이라 싶다. 하늘이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선 사람에게 의지 하지 않을 수 없고 사람은 그 생명을 밥에 의지하는 것이니 밥이 곧 하늘이라는 것은 그런 뜻이리라. 사람 가운데 하늘과 땅이 하나로 있다는 천부경의 가르침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어찌 그 뿐일까. 모든 위대한 가르침과 깨어난 스승들의 일깨움이 모두 이와 같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 인간의 몸으로 드러나 있는 존재들의 역할은 하늘을 뜻을 알아 이 땅에 그것을 이루는 것에 있다고 하겠다.
하늘에 그 길을 묻는 것,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이 더이상 바른 길이 아님을 알았을 때, 그러나 앞으로 나아갈 길이 어떤 길인지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지금의 상황을 고(告)하고 새로운 길을 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기도이다. 그렇게 하늘에 고하여 새 길을 묻는 것 그것이 곧 천제(天祭 )이다.
다시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숨결을 고르며 지금 내가 마주하는 것들은 다른 형태로 드려난 나의 모습임을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우주, 천지만물은 나의 큰 모습임을. 그렇게 부분이면서 전체인 나를 생각한다. 내 안의 하늘과 내 밖의 더 큰 하늘을.
하늘의 뜻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공자는 지천명을 말했고 예수는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했다. 해월은 하늘의 뜻을 이루는 게 사람의 역할이라고 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말도 이런 뜻이라 싶다. 하늘이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선 사람에게 의지 하지 않을 수 없고 사람은 그 생명을 밥에 의지하는 것이니 밥이 곧 하늘이라는 것은 그런 뜻이리라. 사람 가운데 하늘과 땅이 하나로 있다는 천부경의 가르침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어찌 그 뿐일까. 모든 위대한 가르침과 깨어난 스승들의 일깨움이 모두 이와 같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 인간의 몸으로 드러나 있는 존재들의 역할은 하늘을 뜻을 알아 이 땅에 그것을 이루는 것에 있다고 하겠다.
하늘에 그 길을 묻는 것,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이 더이상 바른 길이 아님을 알았을 때, 그러나 앞으로 나아갈 길이 어떤 길인지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지금의 상황을 고(告)하고 새로운 길을 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기도이다. 그렇게 하늘에 고하여 새 길을 묻는 것 그것이 곧 천제(天祭 )이다.
신령한 짐승/
인간이란 본래 땅을 떠나선 살 수 없는 짐승이다. 땅에 깃들어 먹이를 구하며 사는 짐승, 그러나 다른 짐승들과는 달리 땅에 깃들어 있으면서도 하늘이 있음을 아는 짐승이다. 이것이 인간이란 짐승이 다른 짐승들과 다른 단 하나의 차이이다. 하늘이 저 위에 그리고 내 안에도 있음을 알아 하늘과 땅을 잇는 짐승, 하늘을 뜻을 알아 땅 위에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짐승, 그래서 인간은 신령한 짐승인 것이다. 우리가 지금 샤먼이나 무당이나 제사장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인간이란 짐승의 본래의 모습이자 그 역할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인간 본래의 정체성이 물질적 풍요와 편리를 위한 물질중심의 문명으로 나아감에 따라 땅, 생명의 근원, 그 본 바탕으로부터 분리되면서 자연과 하나되는 야성(野性 )을 상실하게 되고 그 야성을 상실한 상태에서 하늘과 소통하던 신령함 또한 잃어버리게 되었다.
신성(神性 )이란 야성의 뿌리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야성이란 생명력 없이는 하늘에 닿을 수 없는 까닭이다. 마치 연꽃이 진흙 속에 뿌리 내리고 있음으로서 그 위에 오염되지 않는 천상의 꽃을 피울 수 있는 것과 같다. 인간이라는 짐승이 이른바 산업문명, 도시문명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생명의 근원, 그 모태인 땅을 스스로 저버렸을 때 이로써 이 짐승은 이제 땅에서도 분리되었고 하늘과도 이어질 수 없는, 생명력과 신령함을 모두 잃어버린 왜곡되고 기형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것이 오늘날 현대 인류의 근원적인 불행이다.
자기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그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에서 현대인의 근원적인 비극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본래 땅을 떠나선 살 수 없는 짐승이다. 땅에 깃들어 먹이를 구하며 사는 짐승, 그러나 다른 짐승들과는 달리 땅에 깃들어 있으면서도 하늘이 있음을 아는 짐승이다. 이것이 인간이란 짐승이 다른 짐승들과 다른 단 하나의 차이이다. 하늘이 저 위에 그리고 내 안에도 있음을 알아 하늘과 땅을 잇는 짐승, 하늘을 뜻을 알아 땅 위에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짐승, 그래서 인간은 신령한 짐승인 것이다. 우리가 지금 샤먼이나 무당이나 제사장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인간이란 짐승의 본래의 모습이자 그 역할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인간 본래의 정체성이 물질적 풍요와 편리를 위한 물질중심의 문명으로 나아감에 따라 땅, 생명의 근원, 그 본 바탕으로부터 분리되면서 자연과 하나되는 야성(野性 )을 상실하게 되고 그 야성을 상실한 상태에서 하늘과 소통하던 신령함 또한 잃어버리게 되었다.
신성(神性 )이란 야성의 뿌리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야성이란 생명력 없이는 하늘에 닿을 수 없는 까닭이다. 마치 연꽃이 진흙 속에 뿌리 내리고 있음으로서 그 위에 오염되지 않는 천상의 꽃을 피울 수 있는 것과 같다. 인간이라는 짐승이 이른바 산업문명, 도시문명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생명의 근원, 그 모태인 땅을 스스로 저버렸을 때 이로써 이 짐승은 이제 땅에서도 분리되었고 하늘과도 이어질 수 없는, 생명력과 신령함을 모두 잃어버린 왜곡되고 기형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것이 오늘날 현대 인류의 근원적인 불행이다.
자기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그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에서 현대인의 근원적인 비극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바이칼/신성의 바다
내가 신령한 짐승, 신수(神獸 )라는 화두를 만난 것은 바이칼 영성순례 때였다. 지구 행성의 성산이란 히말순례를 지구생태영성순례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사람들을 모아 다녀온 뒤에 상대계인 이 물질우주에서 성산(聖山)이 있다면 성스러운 바다 또한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만난 것이 바이칼이라는 담수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다였다. 이 또한 지구생태영성순례라는 이름 아래 성스러운 바다 순례로 이루어졌다.
바이칼은 우리 민족 시원의 터라고 하기도 하지만 시베리아 샤먼들의 성지이기도 하다. 당시는 아직 바이칼까지 여행 루트가 일반화 되지 않은 때라 우리 일행은 몽고를 거쳐 돌아가야 했는데 그 여정이 그리 만만한 게 아니었다. 삭막한 모래땅을 거쳐 몽고 국경을 통과하다가 하루를 붙잡혀 있기도 하면서 부리야트 공화국을 통해 바이칼에 도착했다.
(마침 그때가 소비에트 연방이 막 해체된 때라 광장에 세워졌던 거대한 레린동상이 끌어내려져 광장 바닥에 동강난 체 버러져 있었다. 격동의 상황이었다.)
거기서 다시 그 나라 해군의 함정을 빌려 여섯 시간을 넘게 항해하며 바이칼 호수를 횡단하여 샤먼들의 성소, 올혼섬에 가닿았다. 평균 수심 칠백미터가 넘는 그 담수해의 심연, 이 지상에서 가장 맑고 깊고 검푸른 그 신성의 바다를 그렇게 만났다. (여기 일반적으로 바이칼호수라고 하는 것을 내가 굳이 바다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은 내게 담수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며칠을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얼음짱처럼 차가운 물에 날마다 몸을 담그며 성소(聖所 )중의 성소라고 하는 불칸바위 앞에 솟대를 세우고 천제를 올리며 그곳 샤먼들과 함께 몸과 마음과 혼을 정화하는 의례를 지냈다.
이 때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얻은 것이 신령한 짐승, 땅에 발을 딛고 땅의 이야기를 하늘에 고하며 하늘의 뜻을 땅에 전하는 짐승, 신수(神獸)였다.
내가 신령한 짐승, 신수(神獸 )라는 화두를 만난 것은 바이칼 영성순례 때였다. 지구 행성의 성산이란 히말순례를 지구생태영성순례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사람들을 모아 다녀온 뒤에 상대계인 이 물질우주에서 성산(聖山)이 있다면 성스러운 바다 또한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만난 것이 바이칼이라는 담수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다였다. 이 또한 지구생태영성순례라는 이름 아래 성스러운 바다 순례로 이루어졌다.
바이칼은 우리 민족 시원의 터라고 하기도 하지만 시베리아 샤먼들의 성지이기도 하다. 당시는 아직 바이칼까지 여행 루트가 일반화 되지 않은 때라 우리 일행은 몽고를 거쳐 돌아가야 했는데 그 여정이 그리 만만한 게 아니었다. 삭막한 모래땅을 거쳐 몽고 국경을 통과하다가 하루를 붙잡혀 있기도 하면서 부리야트 공화국을 통해 바이칼에 도착했다.
(마침 그때가 소비에트 연방이 막 해체된 때라 광장에 세워졌던 거대한 레린동상이 끌어내려져 광장 바닥에 동강난 체 버러져 있었다. 격동의 상황이었다.)
거기서 다시 그 나라 해군의 함정을 빌려 여섯 시간을 넘게 항해하며 바이칼 호수를 횡단하여 샤먼들의 성소, 올혼섬에 가닿았다. 평균 수심 칠백미터가 넘는 그 담수해의 심연, 이 지상에서 가장 맑고 깊고 검푸른 그 신성의 바다를 그렇게 만났다. (여기 일반적으로 바이칼호수라고 하는 것을 내가 굳이 바다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은 내게 담수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며칠을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얼음짱처럼 차가운 물에 날마다 몸을 담그며 성소(聖所 )중의 성소라고 하는 불칸바위 앞에 솟대를 세우고 천제를 올리며 그곳 샤먼들과 함께 몸과 마음과 혼을 정화하는 의례를 지냈다.
이 때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얻은 것이 신령한 짐승, 땅에 발을 딛고 땅의 이야기를 하늘에 고하며 하늘의 뜻을 땅에 전하는 짐승, 신수(神獸)였다.
-여류의 노래 5, 생태시 엮음/
‘신령한 짐승을 위하여’
‘신령한 짐승을 위하여’
시집 ‘신령한 짐승을 위하여’가 한살림에서 출간했다. 네번 째와 다섯 째 시집이 거의 동시에 출간 된 셈이다.
이 시집을 생태시 엮음이라고 한 것은 그동안 썼던 시 가운데 생태관련 시들을 함께 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존 시집에 실었던 시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이 시들은 대부분 오래 전에, 특히 내가 이곳 숲안마을로 들어와서 내 나름으로 농사시늉을 하면서 남은 생을 땅에 뿌리내리는 사람으로 살아보겠다고 했던 시절에 썼던 것들이다.
생태라는 단어와 귀농이란 말이 아직 사회 일반적 언어로 소통되지 않았던 그 시절, ‘생태귀농운동’이란 낯선 이름을 내걸고 만나는 이들을 땅과 함께 하는 삶으로 돌아가자고 하면서 내 자신 계속 시멘트 뒤덮힌 도회에 마냥 머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터잡은 곳이 이곳 숲안마을이었다.
‘신령한 짐승’은 땅의 사람, 이른바 ‘생태적 인간’을 내 식으로 규정한 이름이다.
인간이란 그 본래의 정체성이 자연생태계를 떠나 살 수없는 짐승이면서 동시에 다른 짐승들과는 달리 자기 안에, 자기 밖에 하늘(신성)을 모시고 있음을 아는 짐승이라는 의미에서 ‘신령한 짐승’이라고 불렸다. 다른 말로 땅을 딛고 하늘과 소통하는 짐승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인 천지인이라는 삼재(三才)와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의 의미와도 닿아있다 싶다.
지금 인간, 인류문명의 위기는 이러한 인간의 본래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에 있다는 게 내 식의 진단이다. 생명의 근원인 땅을 떠남으로서 생명을 뿌리 뽑히고 이로서 하늘과 소통할 수 있는 그 능력도 상실한 것, 이것이 현대인들, 특히 도시인들의 불행이고 비극이라는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신령한 짐승은 내 오랜 화두이기도 하다. 내가 귀농운동을 주창하면서 처음부터 생태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던 것은 이런 까닭이었다.
이번 생태시에선 이곳 숲안의 땅에 뿌리내리는 과정에서 그런 내 생각과 느낌을 담았다고 할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뜻을 함께 나눈 몇 분, 도반의 이름으로 실은 표사를 감사와 함께 나눈다.
이 시집을 생태시 엮음이라고 한 것은 그동안 썼던 시 가운데 생태관련 시들을 함께 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존 시집에 실었던 시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이 시들은 대부분 오래 전에, 특히 내가 이곳 숲안마을로 들어와서 내 나름으로 농사시늉을 하면서 남은 생을 땅에 뿌리내리는 사람으로 살아보겠다고 했던 시절에 썼던 것들이다.
생태라는 단어와 귀농이란 말이 아직 사회 일반적 언어로 소통되지 않았던 그 시절, ‘생태귀농운동’이란 낯선 이름을 내걸고 만나는 이들을 땅과 함께 하는 삶으로 돌아가자고 하면서 내 자신 계속 시멘트 뒤덮힌 도회에 마냥 머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터잡은 곳이 이곳 숲안마을이었다.
‘신령한 짐승’은 땅의 사람, 이른바 ‘생태적 인간’을 내 식으로 규정한 이름이다.
인간이란 그 본래의 정체성이 자연생태계를 떠나 살 수없는 짐승이면서 동시에 다른 짐승들과는 달리 자기 안에, 자기 밖에 하늘(신성)을 모시고 있음을 아는 짐승이라는 의미에서 ‘신령한 짐승’이라고 불렸다. 다른 말로 땅을 딛고 하늘과 소통하는 짐승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인 천지인이라는 삼재(三才)와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의 의미와도 닿아있다 싶다.
지금 인간, 인류문명의 위기는 이러한 인간의 본래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에 있다는 게 내 식의 진단이다. 생명의 근원인 땅을 떠남으로서 생명을 뿌리 뽑히고 이로서 하늘과 소통할 수 있는 그 능력도 상실한 것, 이것이 현대인들, 특히 도시인들의 불행이고 비극이라는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신령한 짐승은 내 오랜 화두이기도 하다. 내가 귀농운동을 주창하면서 처음부터 생태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던 것은 이런 까닭이었다.
이번 생태시에선 이곳 숲안의 땅에 뿌리내리는 과정에서 그런 내 생각과 느낌을 담았다고 할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뜻을 함께 나눈 몇 분, 도반의 이름으로 실은 표사를 감사와 함께 나눈다.
-뒤표지의 글/
숲속의 정령들과 속삭이는 그림동화 같은 생태시를 읽으며
일상의 삶을 생태감성으로 사는 멸종위기의 신령한 짐승을 만난다.
이 시집이 생명가치의 내면화와 생활화가 절실한 이때에 생명평화의 길을 여는 길잡이로서
시민의 애독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보이지 않는 어두움 속에서도 팍스 가이아(Pax Gaia)를 간구하며 늘 새 물결을 일으키고
희망의 씨앗을 심어온 여류의 의로움과 헌신성에 높은 경의를 표한다.
강대인/배곳 바람 물 이사장
일상의 삶을 생태감성으로 사는 멸종위기의 신령한 짐승을 만난다.
이 시집이 생명가치의 내면화와 생활화가 절실한 이때에 생명평화의 길을 여는 길잡이로서
시민의 애독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보이지 않는 어두움 속에서도 팍스 가이아(Pax Gaia)를 간구하며 늘 새 물결을 일으키고
희망의 씨앗을 심어온 여류의 의로움과 헌신성에 높은 경의를 표한다.
강대인/배곳 바람 물 이사장
오랜 길벗 여류의 생태시는 언제나 소로의 '월든'을 생각나게 한다.
시골 산자락의 손수 가꾼 작은 숲 속에 새처럼 둥지틀고 살고 있는 그가 노래하는 생태시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새소리처럼 아름답다.
동시에 그의 시에는 땅과 하늘을 이어주려는 구도자의 절절한 기도가 담겨 있기도 하다. 그와 함께 풀과 나무와 새가 노래하는 세상을 다시 꿈꿀 수 있어 고맙다.
효산(曉山)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대표이사.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 창립자
시골 산자락의 손수 가꾼 작은 숲 속에 새처럼 둥지틀고 살고 있는 그가 노래하는 생태시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새소리처럼 아름답다.
동시에 그의 시에는 땅과 하늘을 이어주려는 구도자의 절절한 기도가 담겨 있기도 하다. 그와 함께 풀과 나무와 새가 노래하는 세상을 다시 꿈꿀 수 있어 고맙다.
효산(曉山)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대표이사.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 창립자
여류 이병철형과의 인연이 깊다. 우리는 젊은 시절에 고난을 함께 했고 농민운동과 환경운동의 길을 서로 가면서도 생명운동의 큰틀에서 언제나 함께 해온 오랜 벗이자 동지이다.
그가 생태귀농운동을 주창하며 자연과 벗하여 경험하고 느낀 것을 노래한 이번 생태시에서 보여준 '봄날' '봄마중' '꿀벌을 기다리며' '새벽향기' 등은 우리 모두가 간절하게 기다리는 단어들이다.
삭막한 세상에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고 생기를 불어넣는 이런 시집을 내어준 여류시인에게 깊은 고마움과 반가움을 보낸다.
이 시집에서 나오는 싯귀처럼 푸근하게 살수 있는 그런 세상을 함께 만들고 싶다.
최열/ 환경운동가. 환경재단 이사장
그가 생태귀농운동을 주창하며 자연과 벗하여 경험하고 느낀 것을 노래한 이번 생태시에서 보여준 '봄날' '봄마중' '꿀벌을 기다리며' '새벽향기' 등은 우리 모두가 간절하게 기다리는 단어들이다.
삭막한 세상에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고 생기를 불어넣는 이런 시집을 내어준 여류시인에게 깊은 고마움과 반가움을 보낸다.
이 시집에서 나오는 싯귀처럼 푸근하게 살수 있는 그런 세상을 함께 만들고 싶다.
최열/ 환경운동가. 환경재단 이사장
신성의 바다, 바이칼을 다시 찾다2/
-시베리아 샤먼의 성지 알혼 섬에서
-시베리아 샤먼의 성지 알혼 섬에서
즈드라스 브이쩨.
인녕하세요. 러시아 인삿말이다.
인녕하세요. 러시아 인삿말이다.
순례 이틀 째, 이르크츠크에서 이 순례의 중심인 알혼 섬으로 출발한다. 여기서 5시간이 넘는 거리다.
오늘 아침, 호텔을 나서며 일행들에게 러시아 인삿말 3 가지 이상을 익혀 만나는 분들에개 미소와 함께 먼저 인사를 건네자고 권한다. 그것이 순례자들의 가장 기본 자세라고.
만나는 모든 사람, 모든 존재들에게 먼저 감사와 축복을 전하기, 그것은 다만 순례자의 자세만이 아닐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의 예의일 터이다.
오늘 아침, 호텔을 나서며 일행들에게 러시아 인삿말 3 가지 이상을 익혀 만나는 분들에개 미소와 함께 먼저 인사를 건네자고 권한다. 그것이 순례자들의 가장 기본 자세라고.
만나는 모든 사람, 모든 존재들에게 먼저 감사와 축복을 전하기, 그것은 다만 순례자의 자세만이 아닐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의 예의일 터이다.
일혼섬은 신성의 바다라고 불리는 바이칼호에 있는 섬 가운데 가장 큰 섬으로 브리야트민족을 중심으로한 시베리아 샤먼의 성지이다.
알혼섬으로 가는 길 양 옆으로는 유명한 시베리아 자작나무 숲과 드넓은 목장들이 이어져 있다. 광활하고 거대한 땅이다. 대지란 말의 의미가 이런 것이리라. 이십 여년 전에 자작나무 숲과 이른 봄의 들꽃으로 가득했던 그 평원지역들이 이젠 대부분 목장으로 바뀐 것 같다. 지금 이 지구촌 어디에서도 개발, 경제성장이란 이 신화의 광풍을 비켜날 곳은 없다. 자작나무 숲이 베어져 목장이 된 이 땅은 오래지 않아 사막, 그 불모의 땅으로 바뀔 것이다. 이미 그렇게 되고 있음이 보인다. 자기살해적 문명의 경구가 여기서도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다섯 시간을 넘게 달려 바이칼, 그 신성의 바다에 당도한다.
바이칼, 시베리아의 진주 또는 푸른 눈동자라고도 불리는 세계에서 가장 맑고 깊고(최저 수심 1657미터 )가징 많은 담수(지구 담수량의 20%)의 이 호수를 이곳 부리야트 사람들은 호수가 아닌 바다, 신성의 바다라고 부르는데, 나는 둘레 2200킬로미터의 이 신성의 바다, 바이칼을 시베리아의 검푸른 눈동자라고 부른다.
처음에 이곳을 찾아오면서 썼던 소감의 한 대목이다.
알혼섬으로 가는 길 양 옆으로는 유명한 시베리아 자작나무 숲과 드넓은 목장들이 이어져 있다. 광활하고 거대한 땅이다. 대지란 말의 의미가 이런 것이리라. 이십 여년 전에 자작나무 숲과 이른 봄의 들꽃으로 가득했던 그 평원지역들이 이젠 대부분 목장으로 바뀐 것 같다. 지금 이 지구촌 어디에서도 개발, 경제성장이란 이 신화의 광풍을 비켜날 곳은 없다. 자작나무 숲이 베어져 목장이 된 이 땅은 오래지 않아 사막, 그 불모의 땅으로 바뀔 것이다. 이미 그렇게 되고 있음이 보인다. 자기살해적 문명의 경구가 여기서도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다섯 시간을 넘게 달려 바이칼, 그 신성의 바다에 당도한다.
바이칼, 시베리아의 진주 또는 푸른 눈동자라고도 불리는 세계에서 가장 맑고 깊고(최저 수심 1657미터 )가징 많은 담수(지구 담수량의 20%)의 이 호수를 이곳 부리야트 사람들은 호수가 아닌 바다, 신성의 바다라고 부르는데, 나는 둘레 2200킬로미터의 이 신성의 바다, 바이칼을 시베리아의 검푸른 눈동자라고 부른다.
처음에 이곳을 찾아오면서 썼던 소감의 한 대목이다.
'바이칼은 머리를 풀고 땅을 밟고 춤추며 하늘과 소통하던 조상, 내 잊어버린 무의식의 본향일지도 모른다. 바이칼은 내 조상의 조상, 그 할멈과 할아범이 맨 처음의 삶을 꾸렸던 그 시원의 터전일지도 모른다.
•••녹색영성을 일깨우기. 문명이란 이름으로 생명의 근원인 땅, 그 자연생태계와의 분리 단절로 인해 잃어버렸던 태초의 감수성, 그 영성을 찾아 일깨우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사회적 존재 이전에 자연 생태적 존재라는 사실을 새롭게 자각하기 위해서 우리는 신성의 바다, 우리네 맨 처음 조상들의 숨결이 머물고 있다는 그 바이칼로 떠났다.
신, 그 근원성의 표현인 저 자연 안의 신성을 확인하고 그리하여 지금 여기 살아있는 내 몸의 생태 속에 또한 자연이, 거룩한 신성이 함께 깃들어 있음을,
마침내 내 안의 신성을 깨닫기 위해서 바이칼 순례를 떠나온 것이다.'
선착장에서 차를 실어나르는 바지선에 함께 타고 건너편의 올혼섬으로 건너가 거기서 다시 기다리던 우아직 미니버스를 타고 부루한(불칸) 바위가 있는 후지르 마을에 당도, 드디어 이번 순례의 가장 중요한 장소인 부루한 바위 앞에 섰다.
올혼섬을 샤먼의 성지라면 이 바위가 바로 그 성지의 성소이다. 징키스칸이 묻혀 있다는 전설을 함께 간직하고 있는 성스러운 곳이다. 그 앞에 잠시 서서 자비경을 올리고 내 안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고한다. 다시 돌아왔다고. 신령한 짐승을 생각한다.
바람이 차다. 아직 바이칼에는 얼음이 떠 있다. 건너 연봉에 눈이 하얗게 쌓여있다. 이곳은 아직 봄이 멀은 것이다.
마을의 풍경이 많이 달라져 있다. 이십년의 세월이 그냥 지나지는 않은 것이다. 관광휴양지로 바꿨다. 규모도 커졌고 모양도 크게 달라졌다. 불칸바위가 바라보이는 언덕에도 오색천 하닥을 매어놓은 13개의 큰 나무기둥이 세워져 있다. 수많은 염원이 그렇게 매어있는 것이다.
이 곳, 이 올혼의 언덕아래 부루한 바위 앞에서 내일 아침 우리는 천제를 올릴 것이다.
•••녹색영성을 일깨우기. 문명이란 이름으로 생명의 근원인 땅, 그 자연생태계와의 분리 단절로 인해 잃어버렸던 태초의 감수성, 그 영성을 찾아 일깨우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사회적 존재 이전에 자연 생태적 존재라는 사실을 새롭게 자각하기 위해서 우리는 신성의 바다, 우리네 맨 처음 조상들의 숨결이 머물고 있다는 그 바이칼로 떠났다.
신, 그 근원성의 표현인 저 자연 안의 신성을 확인하고 그리하여 지금 여기 살아있는 내 몸의 생태 속에 또한 자연이, 거룩한 신성이 함께 깃들어 있음을,
마침내 내 안의 신성을 깨닫기 위해서 바이칼 순례를 떠나온 것이다.'
선착장에서 차를 실어나르는 바지선에 함께 타고 건너편의 올혼섬으로 건너가 거기서 다시 기다리던 우아직 미니버스를 타고 부루한(불칸) 바위가 있는 후지르 마을에 당도, 드디어 이번 순례의 가장 중요한 장소인 부루한 바위 앞에 섰다.
올혼섬을 샤먼의 성지라면 이 바위가 바로 그 성지의 성소이다. 징키스칸이 묻혀 있다는 전설을 함께 간직하고 있는 성스러운 곳이다. 그 앞에 잠시 서서 자비경을 올리고 내 안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고한다. 다시 돌아왔다고. 신령한 짐승을 생각한다.
바람이 차다. 아직 바이칼에는 얼음이 떠 있다. 건너 연봉에 눈이 하얗게 쌓여있다. 이곳은 아직 봄이 멀은 것이다.
마을의 풍경이 많이 달라져 있다. 이십년의 세월이 그냥 지나지는 않은 것이다. 관광휴양지로 바꿨다. 규모도 커졌고 모양도 크게 달라졌다. 불칸바위가 바라보이는 언덕에도 오색천 하닥을 매어놓은 13개의 큰 나무기둥이 세워져 있다. 수많은 염원이 그렇게 매어있는 것이다.
이 곳, 이 올혼의 언덕아래 부루한 바위 앞에서 내일 아침 우리는 천제를 올릴 것이다.
-올혼섬에서/
나는 오늘
한 마리 등 푸른 물고기
오물이고 싶다
한 마리 등 푸른 물고기
오물이고 싶다
나는 오늘
한 마리 검은 물개
네르파이고 싶다
한 마리 검은 물개
네르파이고 싶다
나는 오늘
한 마리 하얀 갈매기
챠이까이고 싶다
한 마리 하얀 갈매기
챠이까이고 싶다
나는 오늘
신령한 짐승
올혼의 샤먼이고 싶다
신령한 짐승
올혼의 샤먼이고 싶다
천지와 교접하여
태초의 신명을 낳는
붉고 푸른 신령한 짐승
(2001년)
태초의 신명을 낳는
붉고 푸른 신령한 짐승
(2001년)
-신성의 바다, 바이칼을 다시 찾다1
어제 배낭에 '장일순 평전' 한 권을 챙겨넣고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리는 이르크츠크에 왔다.
2002년, 시민사회활동가들을 데리고 '녹색영성을 일깨우는 지구행성 순례'라는 이름으로 다녀온 뒤, 거의 20년의 세월을 지나 한살림식구들과 함께 '시원의 땅, 바이칼 생태영성순례'라는 이름으로 다시 찾아왔다. 이 일행들은 내가 거들고 있는 한살림연수원의 수행활동인 마음살림 안내자들 중심이다.
2002년, 시민사회활동가들을 데리고 '녹색영성을 일깨우는 지구행성 순례'라는 이름으로 다녀온 뒤, 거의 20년의 세월을 지나 한살림식구들과 함께 '시원의 땅, 바이칼 생태영성순례'라는 이름으로 다시 찾아왔다. 이 일행들은 내가 거들고 있는 한살림연수원의 수행활동인 마음살림 안내자들 중심이다.
2001년, 지구행성 순례를 시작하며 나는 이렇게 서원했다.
-순례를 시작하며 나는 서원한다.
이 순례를 마무리할 때 내 눈이 더 맑아지기를,
내 얼굴이 더 환해지기를,
내 몸이 더 가벼워지기를,
내 마음이 더 평안해지기를,
내 자신과 세상에 대해 더 한층 너그러워지기를 그리하여 내가 언제나 신과 함께 있음을,
신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신이 계심을 잊지 않고
내가 이 행성 안에 있고 내 안에 또한 이 행성이 함께 있음을 늘 기억하기를
세상을 향한 나의 미소가, 나의 축복이
나를 향한 신의 미소와 축복임을 알아
그렇게 온 몸으로 살기를
늘 깨어 섬김과 감사로
지금 여기를 살기를.
내 얼굴이 더 환해지기를,
내 몸이 더 가벼워지기를,
내 마음이 더 평안해지기를,
내 자신과 세상에 대해 더 한층 너그러워지기를 그리하여 내가 언제나 신과 함께 있음을,
신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신이 계심을 잊지 않고
내가 이 행성 안에 있고 내 안에 또한 이 행성이 함께 있음을 늘 기억하기를
세상을 향한 나의 미소가, 나의 축복이
나를 향한 신의 미소와 축복임을 알아
그렇게 온 몸으로 살기를
늘 깨어 섬김과 감사로
지금 여기를 살기를.
그때, 바이칼 순례 전에 같은 이름으로 먼저 히말라야 순례를 다녀온 뒤에 바이칼 순례를 나서며 나는 이렇게 썼다.
'•••지난 해 성스러운 산, 눈부신 설산 히말라야를 다녀 온 후 밤마다 신성의 바다라는 바이칼의 꿈을 꾼다. 이 행성에 신성한 산이 있다면 신성한 바다 또한 있을 터, 어딘가에 있을 그 신성의 바다에 몸을 담그고 성산 히말에 무릎을 꿇고 경배했듯이 그렇게 경배하리라. 그리하여 어머니 지구를, 대자연을, 우리가 태어났고 자라왔으며 다시 돌아갈 생명의 신성한 근원자리를 경배하고 찬양하리라.'
그 순례에서 얻은 나의 화두가 '신령한 짐승"이 되기, 그렇게 사는 것이었다.
'•••지난 해 성스러운 산, 눈부신 설산 히말라야를 다녀 온 후 밤마다 신성의 바다라는 바이칼의 꿈을 꾼다. 이 행성에 신성한 산이 있다면 신성한 바다 또한 있을 터, 어딘가에 있을 그 신성의 바다에 몸을 담그고 성산 히말에 무릎을 꿇고 경배했듯이 그렇게 경배하리라. 그리하여 어머니 지구를, 대자연을, 우리가 태어났고 자라왔으며 다시 돌아갈 생명의 신성한 근원자리를 경배하고 찬양하리라.'
그 순례에서 얻은 나의 화두가 '신령한 짐승"이 되기, 그렇게 사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같은 마음으로 다시 이 순례를 시작했다. 다만 그땐 이곳까지 비행기 편이 없어 몽골을 거쳐 육로로 오는 길에 우여곡절을 겪으며 보름 동안 바이칼을 중심으로 순례했다.
내가 이번 순례에서 도반들에게 한 당부는
'온몸으로 오롯이 자신을, 바이칼을, 시원을 만나고 느끼고 즐겨라.'이다.
오늘 아침에 조상들의 조상의 땅이자 시베리아 샤먼들의 성지라는 신성의 바다 바이칼로 떠난다.
내 안에, 내 바깥에 시원의 물결로 출렁이는 검푸른 눈동자를 향하여.
내가 이번 순례에서 도반들에게 한 당부는
'온몸으로 오롯이 자신을, 바이칼을, 시원을 만나고 느끼고 즐겨라.'이다.
오늘 아침에 조상들의 조상의 땅이자 시베리아 샤먼들의 성지라는 신성의 바다 바이칼로 떠난다.
내 안에, 내 바깥에 시원의 물결로 출렁이는 검푸른 눈동자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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