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08

남북관계에서 교회의 길은 달라야 한다:한국 교회의 나침반 뉴스파워(newspower.co.kr)



남북관계에서 교회의 길은 달라야 한다:한국 교회의 나침반 뉴스파워(newspower.co.kr)




남북관계에서 교회의 길은 달라야 한다

한복협 10월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에서 주도홍 교수 발제


주도홍


남북관계에서 교회의 길은 달라야 한다

주 도 홍 교수
(한복협 중앙위원, 기독교통일학회 회장, 백석대 교수)

들어가는 말

한국교회는 이제 성숙한 교회여야 한다. 교회의 양적 비만을 말하는 허세를 버려야 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건강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성숙한 모습을 갖기 위해서는 교회가 걸어가야 할 바른 길 위에 서 있어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교회의 길은 정치의 길과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교회의 길이란 예수님이 가신 길을 걷는 것이다. 그 예수님의 길은 안이하고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 via dolorosa이다. 예수님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막12:17)고 구분하면서 둘이 섞이는 것을 금하셨다. 정치가 권력추구를 목적으로 하지만, 교회는 스스로 낮아져서 이웃을 섬김을 목적으로 한다.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도 교회의 길과 정치의 길은 분명 다름을 보여주고 있다. 정치권력을 힘입을 때 교회는 순간 혜택을 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멀게는 바른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기는 쉽지 않았다. 로마권력에 힘을 입은 기독교는 양적 비만을 가져왔지만, 타락의 길을 가기가 어렵지 않았다. 교회의 길이 따로 있다는 말은 교회의 역할이 정치와는 다르게 분명히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남북분단 시절 교회는 자신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성경에 근거하여 조심스럽게 찾아야 한다. 그 길이 어떤 때는 진보처럼, 또는 보수처럼 또는 좌파처럼 또는 우파처럼 보일지라도 상관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판단 근거는 그 길이 우리 주님이 가신 길인지 아닌지 하는 점이다.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이런저런 말을 듣게 되며 비판과 욕을 먹게 되는 이유는 교회가 가지 말아야 할 길에 서 있을 때이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교회가 평화통일을 준비하며 가져야 할 자세와 책임에 대해 몇 가지로 말하고자 한다.

첫째, 탈북 주민의 교회 적응이 성공해야

한국 교회의 탈북 주민들의 사회 적응을 말하기 전에 교회 적응은 과연 바람직했는지 묻는다면 이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실질적으로 한국의 대형 교회가 앞장서서 이 일에 관여했지만 실적이 매우 저조함을 자인한다. 한 마디로 말해 어려웠고 실패했다는 의미이다. 한국 교회가 탈북 주민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되지 못한다면, 하물며 한국 사회에서의 그들의 적응이 어찌 성공적이라 평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탈북 주민의 한국 생활로의 적응 여부는 통일 한국에서의 사람의 하나 됨에 중요한 원리와 지혜를 부여한다. 탈북 주민들의 신분의 불연속성으로 인한 사회적 자산(social capital)과 인간관계(relationship)의 상실에서 오는 사회적 박탈감, 경제적 어려움, 문화적 충격, 정서적 불안으로 오는 한국에서의 적응의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해서 한국 교회는 많은 전문적 숙고가 요구된다.

한국 교회가 20년 가까이 나름대로 탈북 주민들의 보다 바람직한 한국 적응에 노력을 기우렸음에도 성공적이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교회가 우선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분야에 힘을 쓰지 못한 것이라 생각한다. 교회의 관심은 탈북 주민의 정신적이며 영적인 부분에 보다 긴밀한 관심을 가졌어야 하는데, 교회는 먼저 그들을 물질적 도움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는지 반성하게 된다. 물론 그들이 물질적으로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이 부분을 교회가 얼마나 감당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생각한다면 답은 간단하다. 경제적, 물질적 어려움은 국가가 책임지고 감당해야 할 부분이다. 한국 교회도 힘닿는 대로 도와야 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교회가 최우선적으로 힘써야 할 부분은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이다. 상처 입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치유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했을 뿐 아니라, 이 부분에 대한 철저한 사전 연구와 준비로 이 일을 교회가 감당할 수 있어야 했던 것인데, 교회는 그렇지 못했다.

이유는 한국 교회가 이 일에 사전 준비가 미약했을 뿐 아니라, 물신주의 사상이 한국 교회 내에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는 북한 사람을 물질적인 측면에서만 생각하였다. 또한 그들을 동일한 인간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가난하기 그지없는 고로 뭔가 실패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비성경적 인간관에 근거를 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가난하기에, 잘못된 이념의 희생자이기에 저급한 인간으로 간주한 거대한 오류를 범하지 않았는지 자성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중국에서의 신앙생활 때문에 한국 교회에 발을 딛게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 한국 사회에 어느 정도 문화적으로 물질적으로 정착하게 되면서 그들은 뭔가를 인식하는 순간 더 이상 한국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한국 교회가 탈북 주민을 정당한 교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들을 국외자outsider로 만들어 정착을 어렵게 한 결과 그들은 어쩌면 당연하게 교회를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탈북주민들의 바람직한 한국 정착 여부는 다가오는 통일 한국에서 어떻게 남과 북의 사람들의 하나 될 것인지를 앞서 가르쳐주는 리트머스지와 같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사람의 통일을 준비해야

법과 땅이 하나 된 통일 한국은 사람의 하나 됨을 위해 영역별로 많은 과제를 치밀하게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 중 한국 교회는 통일 한국에서 자신들이 해야 할 분야를 알아야 하는데, 무엇보다도 사람의 하나 됨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남과 북은 하나의 민족이기에 통일 후 쉽게 하나로 나아갈 것이라는 생각은 나이브하고 근거가 불안하다. 물론 뭔가를 민족동질성 위에서 추구할 수는 있을 것은 기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바로 이러한 안일한 기대가 통일 후 사람의 하나 됨을 어렵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R. 그린커는 이러한 사고가 비현실적 통일론을 형성하게 되어, 실제적이며 역사적인 남북한 이해를 바로 하지 못하게 되어 결국 진정한 통일의 최대의 걸림돌로 작용하게 되었다고 인식하며, 이를 한민족 동질성의 신화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현재 한국 교회에게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 이러한 낭만적인 민족주의를 버리고 북한 주민에 대한 객관적 이해가 요구된다. 남과 북은 70년 가까이 다른 이념과 문화를 가지고 나눠져 살면서 다른 사람들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곧 서로 다른 정체성이 재생산되어 버렸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남쪽은 자본주의 이념과 더불어 미국을 위시한 서구 문화에 길들여져 있으며, 북쪽은 공산주의 이념을 가진 채 중국과 러시아의 문화에 익숙해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더욱 큰 문제점은 다른 둘 사이에 처절하고 철저하게 나누어져 더욱 큰 단절과 차이를 형성해 왔다는 사실이다. 민족성은 서로 교류를 통해 시간과 함께 형성되는데, 남과 북은 전혀 그렇지 못한 채 이질감을 키웠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의도적으로 서로가 다름을 연습해 왔는지도 생각해 볼 일인데, 그것은 서로를 적대적으로 비판함으로서 의도적으로 형성시킨 다름이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 그러기에 언뜻 보기에는 남과 북이 같은 언어, 식습관을 가진 민족이기에 처음에는 선뜻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는 예상 밖의 차이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에, 하나 되기 위해 치밀하게 이질감을 극복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한국 교회는 통일 한국에서의 새로운 민족 공동체의 정서적 통합을 위해 전문적인 사전 준비를 성경에 근거하여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조금이라도 잘못된 세속적 가치관이 성경적 요청을 물리치고 앞서 가지 않도록 해야 하는 일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령의 도우심으로 세 관계의 회복을 전제로 할 때이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됨에 역점을 우선적으로 두어야 한다. 그런 후 철저하게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하여 통일 한국에서 사람의 하나 됨에 겸허하게 섬기는 한국교회가 되는 일이다. 여기서는 이름도 없이 빛도 섬기는 훈련이 없을 때 한국교회는 또 다시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사실 독일 교회도 통일 후 교회에로의 복귀의 붐이 일어날 줄로 기대했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기대는 전혀 충족되지 않았다. 독일교회는 돈과 잘 교육된 목회자들만 있으면 분단 전 기독교국가 상태로의 복귀는 쉽게 이루어질 줄로 예상했으나 이는 일장춘몽과 같았다. 무엇보다도 반세기 가까운 기간 공산주의의 철저한 반기독교에로의 세뇌교육이 통일 후에도 여전히 큰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예는 한국 통일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라 예측한다. ‘제2의 예루살렘’ 평양을 꿈꾸며 북한에서 교회에로의 복귀가 금방 행해질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있겠지만 과연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독일 통일에서의 경우를 볼 때, 쉽게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한국 교회는 그러한 기대와 환상을 버리지 않고 있음이 사실이다. 한 예로 ‘북한교회재건운동’은 그러한 기대 위에 행해지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더욱 중요한 것은 한국 교회가 통일 후에 어떻게 할 것이라는 철저한 계획도 중요하지만, 현재 분단 하에서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당하는 북한을 향해 주님이 원하시는 마땅한 할 일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실천하는 일이다. 어쩔 수 없을 때는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해야 하는 것으로 그것은 북한이 감동을 받을 수 있도록 순수하게 그들을 사랑하는 일이다. 사실 북한 선교라는 말 보다는 현재의 상황에서 한국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북한 사랑이 더 타당하다. 한 예로 사랑의교회(담임목사 오정현)는 이 일을 하는 부서의 명칭을 ‘북한사랑선교회’(약자-북사랑)로 일컫는데 바람직하다 하겠다. 성경적으로 볼 때도 먼저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 때에야, 복음을 전파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경우도 배고픈 자, 병든 자를 조건 없이 먼저 사랑하셨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이 육신의 떡만을 찾아 올 때 생명의 떡을 주고 싶었던 예수님도 그 점을 지적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 교회는 복음 전파를 전제로 도와주는 일도 조심스럽게 삼가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는 순수하게 먼저 이웃을 섬기며 돕고, 그들에게 별도로 복음을 전하는 자세가 성경적이다.

셋째, ‘한국 신앙고백 The Confessio Coreana’를 만들어야

언젠가 21세기 세계사의 최대의 사건이 될 남북의 통일이 이루어졌을 때 분명 한국교회가 할 일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세계교회 앞에「한국 신앙고백」(The Confessio Coreana)을 ‘제2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던 평양성에서 선포하는 것이다. 이토록 지난하게 처절하고 철저하게 나누어져 서로를 원수로 미워하고 적대시하던 남과 북이 특별하신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하나 되었을 때, 한국교회는 감사, 회개 그리고 비전을 담아 한국 신앙고백을 내어 놓을 수 있어야만 한다. 한국교회는 북한을 위해 많은 일을 긍정적으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부정할 수 없는 많은 죄악도 저질렀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거의 반세기 동안 공산당에게 당한 상처를 안고 한국교회는 남북분단에 대해 침묵을 해왔으며, 또는 분단을 넘어 하나 되는 통일운동에 대해서도 바른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위정자들의 정치놀음에 편승한 적이 적지 않았다. 곧 성경적 길을 보다 적극적으로 찾기보다는, 그 성경적 길을 어두운 세상에 제시하며 앞서 가기보다는 잘못된 시대정신을 따라가는 자의 비겁함과 나약함을 보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사실 분단 70년이 다 되어감에도 공교회적으로 한국교회가 성경적 통일론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가 뭐라 해도 입을 열어 변명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라도 한국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은 더욱 요구된다 할 것이다.
게다가 한국교회는 한국교회사에서 볼 때도 세계교회가 주목할 수 있는 그럴 듯한 신앙고백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개혁교회 전통에서 볼 때도 개혁교회는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시대와 장소에 따라 성경에 입각한 자신들의 생생한 신앙을 고백해 왔다는 사실이다. 개혁교회사를 보면 그 어떤 다른 교회보다도 개혁교회에는 수없이 다양하고 많은 신앙고백들을 시대와 장소를 따라 나타났고, 그것을 개혁교회는 고유한 유산으로 소중히 여기고 있다. 개혁교회가 세계적으로 받아들이는 3대 신앙고백으로는 「벨기에 신앙고백」(The Belgic Confession, 1561),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The Heidelberg Confession, 1563), 「도르트 신경」(The Dordt Canons, 1619)이다. 거기다 장로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1647)을 추가하고 있다.

최근 한 예로 20세기 들어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비극 그 자체였던 인종차별제도를 어렵게 종식시키며 흑백 인종 간 화해를 이루어내는 데 공헌했는데, 남아공의 화란 개혁선교교회 총회는 1986년 「벨하 신앙고백」(The Belhar Confession)을 채택하기에 이르렀고, 새롭게 결성된 남아공 연합개혁교회(United Reformed Church of Southern Africa[URCSA])의 ‘교회 일치를 위한 표준문서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벨하 신앙고백」은 남아공의 지난한 인종차별에 대항하여 투쟁하던 그 어려움 속에서 자라기 시작하였는데, 1982년에 알란 보삭(Allan Boesak)의 리더십 하에서 화란개혁선교교회(Dutch Reformed Mission Church [DRMC])에 의해 처음으로 그 모습을 보였는데, 내용적으로는 ‘신앙에로의 부르짖음’과 ‘신실성과 회개로의 요청’이 근간을 이루었다. 한 마디로 인종차별정책은 복음진리를 위협하는 무서운 죄악으로 ‘신앙고백적 결단’(status confessionis)을 요청했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신앙고백은 인종차별의 죄악을 분명히 인식하며 민족적 결단을 새롭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거창하지 않게 총 5항목으로 이루어진 「벨하 신앙고백」은 세 가지 중요한 이슈들을 다루고 있다. 하나, 교회의 하나됨과 모든 민족과 나라들 사이의 하나 됨(Unity), 둘, 교회와 사회의 화해(Reconciliation), 셋, 하나님의 정의(Justice)이다. 「벨하 신앙고백」의 머리말은 “우리는 모든 개혁교회들을 위해 이 고백을 하는 것이지 단지 우리들만의 것으로 고백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세계 개혁교회에게 뭔가를 행동하기를 요청한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의 개혁교단인 CRC, RCA, 그리고 PCUSA가 이「벨하 신앙고백」을 개혁교회의 4번째 세계 신앙고백으로 채택하려는 움직임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 한국의 교회가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 통일을 맞이했을 때, 아니 오늘의 복음진리가 도전받고 있는 분단의 극한 상황에서 마땅히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일은 너무도 지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오늘 한국교회가 남북통일을 간절히 기도하며 지금부터서라도 통일한국에서 하나님과 세계교회 앞에 회개하며, 감사하며 그리고 우리의 비전을 담아 고백할 「한국 신앙고백」을 마땅히 준비해야 할 것이다.

넷째, 「한국 신앙고백」을 위한 Task Force(TF)를 구성해야

이를 위해 총회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공교회적으로 「한국 신앙고백」을 위한 TF(Task Force)를 구성할 것을 간곡히 제안하는 바이다. 이 TF는 그 분명한 하나의 목적을 위하는 일일 뿐 아니라, 한국교회가 비로소 마땅히 자신들이 해야 할 숙제를 감당하기 위해 일을 시작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교회의 중요한 신앙의 유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수 백 명의 사람들에 의해 거의 5년에 걸쳐 완성되었던 것처럼 우리 한국교회도 가슴 벅찬 남과 북의 하나 됨에로의 비전을 안고 뜨거운 기도 가운데 거룩하고 신중하게 성경적으로 우리의 부끄러운 분열의 과거를 회개하고 청산하면서 모이고 또 모이면서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TF의 결성은 결국은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는 불씨, 새로운 한국(New Korea)을 만드는 불씨, 통일한국(United Korea)을 하나님의 공의 위에 바로 세우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확신한다. 비로소 한국교회가 남북의 분단이 오늘 한국교회에게 무엇을 의미하며, 이 분단 하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바로 인식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사의 역동적 분수령이 될 뿐 아니라, 세계교회사에 비로소 성숙한 교회로서 한국교회가 인정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길 기도한다. 거기다 통일한국에서 선언된 「한국 신앙고백」이 개혁교회가 기뻐하는 세계 신앙고백에도 채택되어지는 교회사의 쾌거를 이루기를 소망한다.

다섯째, 한국기독교 통일비전센터를 건립하라

한국교회가 이제 구호만 외칠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통일을 준비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하겠다. 한국교회가 가진 소중한 재물을 십시일반으로 분단극복을 위해 내어 놓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거하시지 아니하는 사람의 손으로 만드는 예배당(행17:24) 건물 짓기에 쏟는 일차적 관심을 내려놓고 진정 하나님의 통치가 구체화되는 일에 마음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찾아 나섰던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 한국교회가 가장 소외된 테마인 남북분단 극복에 분명하게 태도를 가질 것을 은연 중 요구하고 있다. 사실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정치적 이념적 갈등, 대화부재의 불통,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많은 어려움은 알고 보면 상당 부분 그 근원을 남북의 분단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갈등은 급기야 사회, 직장, 급기야 교회에까지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보더라도 한국 사회의 갈등과 남북분단을 뛰어넘고, 세계평화와 세계선교를 위해서도 한국교회가 힘을 모아 전문적 연구기관을 세워 한국교회를 깨우고 전문화하는 한국기독교 통일비전센타(가칭) 건립을 제안한다. 여기에서의 연구는 첫째, 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해서 보다 전문화된 연구가 이뤄져서 한국교회에 보급되어야 할 것이며, 둘째, 더 나아가서는 성경적 관점에서 분단과 분열을 극복하는 구체적 방안을 제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결과 한국교회는 정치와는 차별화된 교회의 길을 찾게 될 것을 믿는다. 이렇게 될 때 세상은 한국교회를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될 것을 기대한다.

맺는 말

남북의 분단이 한국교회에게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한국교회에게 시험을 주셨던 하나님은 양과 더불어 이제는 한국교회의 성숙을 요구하신다. 일제 하 3.1운동에도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한국교회는 21세기 세계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사건으로 평가될 통일한국에 무임승차하는 몰역사적이고 비성경적인 나태하고 게으른 교회로 비판받지 않기를 기도한다. 아무 준비 없이 통일한국에서 세속적 가치관으로 무작정 뛰어드는 일을 한다면 한국교회는 제2의 위기를 맞게 될 것을 경고한다. 21세기 한국교회의 가장 큰 기도의 제목이며 한국교회의 가장 무거운 십자가인 남북의 분단 극복에 함께 기도하고 함께 사랑하며 함께 짐을 지는 진정한 교회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독일 통일이 ‘조용한 개신교 혁명’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듯이 남북 분단은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시험대로 생각한다. 한국교회가 이 시험을 통과할 때 보다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게 될 것을 기대한다. 현실적으로 남북의 허리를 잡고 힘을 못 쓰게 하는 녹슨 휴전선은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할 세계선교의 가장 큰 장애물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 한국교회는 복음이 이념에 발목 잡혀 있는 부끄러운 형국이 되기도 함을 부정할 수 없다. 사마리아를 향했던 예수님처럼 이제 과감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막힌 담을 헐어버리고 그들을 찾아가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켜 천국을 누리는 새 생명의 축제가 북한 땅에도 이뤄지게 하는 데 소중한 역할을 하는 한국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21세기 한국교회가 이제 성숙한 교회로 세계교회 앞에 사명을 감당하며 헌신하기를 기다리시고 계신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초막 셋을 짓고 적당히 안주하며 호화 호식하는 교회로 전락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2500만 인구를 가진 북한의 말할 수 없는 아픔과 억압을 모른 채 하며 한국교회가 몰역사적이고 무정한 태도를 계속 가진다면 하나님은 촛대를 옮겨 세계사적 과업을 한국교회가 아닌 다른 일꾼들을 불러들여 사용하실 수도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인내를 깨닫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신 지상 최대의 명령에 우선 순종하여 적극적으로 우리의 한 쪽을 사랑하여야 하겠다. 하나님이 오늘 한국교회에게 요구하신 사랑은 본질적으로 다름 아닌 원수사랑 임도 기억해야 하겠다. 보다 담대하고 다양하게 한국교회의 북한을 향한 복음적 사랑을 독일교회가 역사적으로 교훈하듯이 펼칠 수 있어야 하겠다. 그러는 중 한국교회는 작은 통일을 미리 맛보는 중 자연스럽게 큰 통일을 이루는 주역이 될 것을 기대한다. 분명한 것은 교회의 길은 정치의 길과는 다름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분단, 분열극복에서의 교회의 역할을 하나님은 기다리신다는 말이기도 한다.














기사입력: 2012/10/12 [11:42]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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