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08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며:한국 교회의 나침반 뉴스파워(newspower.co.kr)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며:한국 교회의 나침반 뉴스파워(newspower.co.kr)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며

김명혁 목사와 유관지 목사 대담 원고


김명혁


일시: 2019.12.19 오전 10시 장소: 강변교회



▲ 김명혁 목사 ©뉴스파워









저는 “화해와 평화와 통일” 이란 주제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가장 귀중하게 여기시는 가장 귀중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세상에는 역사의 시작부터 항상 분열과 분쟁과 싸움으로 가득했습니다. 구약시대뿐만 아니고 신약시대에도 그랬고 로마시대에도 그랬고 중세는 물론 현대에도 항상 분열과 분쟁과 싸움으로 가득했습니다. 해방과 광복을 맞은 한국 안에서도 지난 74년 동안 항상 분열과 분쟁과 싸움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화해와 평화와 통일”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과 비전입니다. “화해와 평화와 통일”은 성경의 목표이며 역사의 완성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연합하여 하나되는 아름다운 모습과 자연 만물이 모두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오래 전에 우리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해와 달아 찬양하며 광명한 별들아 찬양할 찌어다 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목과 모든 백향목이며 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찌어다(시 148:3,9,10,13).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들이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이루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시는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하나님이십니다. 광복 74주년을 맞는 지금이야말로 한국의 모든 교회들과 국민들이 최선을 다해서 염원하며 추구하여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한 반도 안에서는 물론 아시아와 세계 안에 실현해 나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일보다 더 시급하고 더 귀중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첫째로, “화해”에 대한 말씀들을 찾아 봅니다. 구약 성경 창세기는 야곱과 에서가 목을 어긋 맞기고 입을 맞추고 피차 울면서 “화해”하는 장면을 감동적으로 묘사했습니다(창 33:3,4). 창세기는 또한 요셉이 방성대곡하며 울면서 자기를 팔아먹은 그의 형들과의 “화해”하는 장면을 감동적으로 묘사했습니다(창 45:1,2). 구약 성경은 또한 이스라엘은 물론 애굽과 앗수르와도 “화해”를 이루는 것이 성부 하나님의 뜻이고 섭리라고 지적했습니다(사 19:23-25). “화해”는 인류를 향하신 성부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약 성경은 성부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우리들끼리만 아니고 세상과 “화해”와 “화목”을 이루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8,19). 신약 성경은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이루신 것이 “화해”와 “화목”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화해)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6,18). 성자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예배를 드리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23,24). 성령님께서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 강임하시므로 서로 갈라져서 불신과 증오가운데서 살던 다문화 다인종 다민족 3천여 명이 함께 모여 “화해”하며 친밀한 “교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서로 교제하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기독교는 “화해”의 종교입니다. “화해”와 “화목”은 진리의 깃발을 높이 휘두르므로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끌어안고 우는 “착함”과 “양보”와 “선행”의 마음과 자세와 행실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한국 교회와 사회와 남북한에 가장 필요한 것은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몸에 지니고 “화해”와 “화목”을 실현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야곱처럼 요셉처럼 무릎을 꿇고 서로 부둥켜 안고 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평생토록 염원하며 기도하여야 할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도 ‘화해’와 ‘화목을 우리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에 지니고 살면서 ‘화해’와 ‘화목’을 조금이라도 실현하면서 살게 하시옵소서” 라는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평화”에 대한 말씀들을 찾아 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평화를 만드시고 평화를 가져다 주시는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즉”(레 26:6).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므로 “평화”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이름은 평강(평화)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사 53:5). 성자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평화”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고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4).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평화” 또는 우리의 “화평” 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엡 2:16). 성령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열매가 바로 사랑과 희락과 함께 “화평” 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갈 5:22).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 12:18). “화평”과 “평화”를 도모하면서 한 평생을 산 사람이 바로 평화의 사도 프랜시스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우리들도 그렇게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통일”에 대한 말씀들을 찾아 봅니다. “화해”와 “평화”와 함께 “통일”은 우리 죄인들과 피조물을 향하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과 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부 하나님의 뜻은 둘로 갈라졌던 남과 북이 하나를 이루는 것이었고 서로 원수같이 지내던 이방인들과도 하나를 이루는 것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게 하라”(겔 37:18).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니라”(사 19:25).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못박혀 죽으심으로 갈라져서 서로 싸우고 서로 죽이는 인간들을 “화해”하게 하시고 “평화”를 이루게 하시고 “하나”가 되어 “통일”을 이루면서 살게 하셨다고 사도 바울이 선언하고 또 선언했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3-16). 하늘과 땅에 있는 우주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통일” 되게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가 “하나” 라고 강하게 선언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성령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도 바로 “하나되게 하시는” 일이라고 사도 바울이 지적했습니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성령님께서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 강림하시므로 서로 갈라져서 불신과 증오가운데서 살아가던 다문화 다인종 다민족 3천여 명이 모두 함께 모여 친밀하게 교제하게 되었고 그래서 모두가 “하나”가 되어 “통일”을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화해와 평화와 통일”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뜻과 비전입니다. “화해와 평화와 통일”은 성경의 목표이며 역사의 완성 점입니다. “화해와 평화와 통일”은 부수적인 것도 아니고 선택적인 것도 아닙니다. “화해와 평화와 통일”은 본질적인 것이고 필수적인 것입니다.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은 물론 모든 민족과 세계와 우주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은 하나님의 뜻과 비전이고 성경의 목표이며 역사의 완성 점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 세계와 온 우주가 즉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모두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게 될 것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하더라”(계 7:9-12).



지금 우리 한국 교회와 사회 안에 시급하게 요청되는 것은 화려한 예배나 정통 진리의 선포 이전에 서로 끌어안고 울면서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인 의식”을 가질 때는 불가능하고 “죄인 의식”을 가질 때 비로서 가능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 땅에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야곱과 요셉과 같은 눈물을 지니고 상대방의 죄와 잘못을 덮어주는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지닌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땅에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스데반 집사와 같은 토마스 선교사와 같은 주기철 목사님과 같은 손양원 목사님과 같은 한경직 목사님과 같은 절대적이고 희생적인 “용서”와 “사랑”과 “포용”을 지니고 모두를 끌어안는 “제물 되는” 사람들 몇 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목회자들과 신자들이 성자 예수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그리고 귀중한 신앙의 선배님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잘못을 범한 상대방을 끌어안고 울 수 있다면 그리고 적대적인 총 칼을 들고 죽이려고 대드는 상대방을 용서하면서 기도할 수 있다면 적대와 대결로 치우치고 있는 이 땅에 놀라운 “화해와 평화와 통일”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이루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고 적대적으로 치닫고 있는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도 조만간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배타적이고 위선적인 우리 죄인들이 십자가 상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함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흔적을 몸과 마음과 영혼에 조금씩 아주 조금씩 지니고 나타내면서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우리 주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그리고 십자가의 정신을 몸에 지니고 사신 스데반 집사와 성 프랜시스와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장기려 박사님과 같은 신앙의 선배님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우리들도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흔적과 함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흔적을 몸과 마음과 영혼에 조금씩 아주 조금씩 지니고 나타내면서 살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스데반 집사님처럼, 토마스 선교사님처럼, 주기철 목사님처럼, 손양원 목사님처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수 있는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제물들”이 될 때 “죄악”과 “분노”와 “증오”와 “갈등”과 “분열”과 “무질서”와 “혼돈”으로 가득한 이 땅에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함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역사를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이룰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본래 일본 사람들을 싫어했고 북한 사람들을 싫어했고 중국 사람들을 싫어했고 모슬렘 사람들을 싫어했고 타 종교인들을 싫어했었습니다. 자유주의자들도 순복음주의자들도 싫어했었습니다. 반일 반북 반공 반중 반 모슬렘 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존 스토트 박사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므로 조금씩, 조금씩 저의 생각과 마음이 바뀌어졌습니다. 일본 사람들을 존경하며 사랑하게 되었고 일본 교회와 교류하는데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 북한 사람들을 사랑하며 북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 중국 조선족들을 사랑하며 중국 연변에 있는 조선족 어린이들 150여명을 지난 20 년 동안 계속해서 돕게 되었습니다. 북 아프리카 부르키나 파소에 가서 가뭄으로 죽어가는 모슬렘 사람들에게 우물 열 몇 개를 파 주었고, 가난과 고난과 질병 중에 있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을 찾아가서 안과 진료소를 지어주기도 했고, 극심한 가난으로 고통을 당하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찾아가서 아프간 무라취드에 학교 하나를 지어주고 아프간 어린이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기도 했습니다. 기장과도 순복음과도 친밀하게 소통하며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5개 종단의 종교 지도자들과도 친밀하게 교제하면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1997년 4월에는 5개 종단 지도자들이 강원도에서 썩어가는 감자 1690톤을 사서 99대의 트럭에 실어 북한에 보내기도 했고, 2010년 8월 27일에는 5개 종단 지도자들 9명과 함께 밀가루 300톤을 13 대의 트럭에 싣고 북한 개성에 가서 그곳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오기도 했습니다.



저는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날마다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아무 자격이 없는 죄인 중의 괴수이지만, 주님과 누군가를 위해서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기를 소원합니다. 북한 동포들을 위해서 그리고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고 불쌍한 아프간 사람들을 위해서 혹시 제가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을 수는 없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한국교회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성자 예수님께서 흘리신 십자가의 피 공로를 보시고 그리고 순교자들이 흘린 피 소리를 들으시고 우리 모두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주여, 저와 우리들을 화해의 도구들로 써 주시옵소서! 주여, 저와 우리들을 평화의 도구들로 써 주시옵소서! 주여, 저와 우리들을 통일의 도구들로 써 주시옵소서!”』








기사입력: 2019/12/19 [07:29]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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