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08

Park Yuha 7 January 2016 이와사키&오사 논문 발췌

Park Yuha
7 January 2016 at 15:27


渦中日記 1/7

한숨 돌린 것도 잠시. 아직 여유 없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어제는 이번 워싱턴 행이 "일본의 돈"이라는 악의적인 기사를 봤다. 이번 회의는 윌슨센터와 와세다대학의 공동 프로젝트인 "동아시아에서의 과도기 정의 수립"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순수한 학문적 회의다.
갑자기 "한일합의"가 이루어졌으니 당연히 그 문제도 언급되겠지만, 그 얘기를 중심적으로 논의하는 자리도 아니다. 전에도 썼지만, 이 회의는 반년도 더 이전에 계획된 회의다.


한일합의에 대한 의견을 쓰라고 종용받기도 했는데, 내 의견은 분명하다. 갑작스런 합의는 문제가 있다. 국민적납득과 합의가 가능하도록 논점을 공론화하고 국민이 공유하는 절차와 과정이 필요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대립되는 학자들이 접점을 찾는, 당사자도 포함하는 "협의체"를 만들라고 책을 낼 때부터 제안했었다.
그러니 이런 합의에 내가 무조건 찬성하거나 웃을 거라고(나의 힘이 그렇게 클 리도 없다) 생각하는건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어렵게 결정된 것이니 순서는 거꾸로 되었지만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다.
일본지원단체가 이 합의를 "운동의 성과"로 받아들인 식의 긍정마인드를 나는 평가한다.

정부가 내내 지원단체와 논의했다고 하는 걸 보면, 마지막에 배제된 모양이다. 지금의 격렬한 반발은 거기서 온 듯 하다.
정부가 배제한 건 위안부할머니일까. 혹은 지원단체의 주장이었을까. 자세한 내막은 언젠가 밝혀지리라고 믿는다.

분명한 건,"또 다른 백억원 모금"의 발상은 이미 1997년에 정대협이 시도했던 일이라는 것.
일본국민의 "속죄금"과 "의료복지비"를 정대협이 거부했고, 받은 일곱 분 할머니들을 정대협이 비난하며 모금을 시작했고, 초라한 모금실적에 한국정부가 나서서 할머니들에게 같은 금액의 지원금을 지급했었다. 그건 한편으로는 "할머니들은 우리가 돌본다"는 발상이었지만 일본에 대한 요구는 요구대로 이어졌고 그리고 15년이 지났다.

그 사이, 운동은 세계적으로 성공했지만 일본인들의 마음은 더 닫히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러니 최소한 말할 수 있는 건, 다시 15년을 똑같은 과정을 반복할 각오,그리고 시작하기전에 "모든"위안부할머니께 그런 선택에 대한 수락을 받아야 할 거라는 점이다.
엄마부대나 어버이연합도 문제지만, 그들이 문제라고 해서 운동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오만일 수 밖에 없다.

필요 있어 다시 읽었더니 합의가 이루어지기 전에 쓰인 이 글이 가슴에 더 와 닿아, 일본 학자의 글을 부분적으로 발췌해 올려둔다. 이들은 진보학자들이고 자신들의 운동을 반성하는 차원에서의 글이다.
전에 한번 전문을 올렸었지만 특히 중요한 부분만 몇 번에 나눠 올리려고 한다. 위안부문제에 관심갖는 사람은 꼭 읽어야할 논문이 될 것이다. 나의 의견보다 사태파악에 훨씬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전문은 곧 어떤 잡지에 게재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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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사키/오사 논문 발췌 1

"한편 이 문제를 둘러싸고 몇 가지 논쟁적인 대립점이 표출되었다. 예를 들면 ‘위안부’ 논쟁의 존재방식을 둘러싸고 메타 차원에서 재귀적(再歸的)인 물음을 던진 우에노 치즈코(上野 千鶴子 『내셔널리즘과 젠더』 세이도샤, 1998년)와 박유하(『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사토히사시 번역, 헤이본샤, 2006년)를 둘러싸고 문제의 방법론적 심화와 자기성찰의 계기가 만들어진 측면도 있었으나, 때로는 이에 대해 운동의 분열이라고 격렬하게 비판하는 주장도 나왔다. 박유하에 대한 비판은 현재의 『제국의 위안부―식민지 지배와 기억의 투쟁』(아사히신문출판, 2014년)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그동안 이토록 비판이 분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판자들 사이에서 박유하의 텍스트는 제대로 읽혀지지 않았다. 야마시타 영애(山下英愛)도 이 시기에 운동의 존재방식에 대한 자성적인 물음과 문제 제기를 한 사람 중의 하나인데, 그것은 박유하와 마찬가지로 정대협 측에도 문제의 단순화와 일면화(一面化)가 있는 게 아니냐는 자문자답이었다(야마시타 영애『내셔널리즘의 틈새에서―‘위안부’ 문제에 대한 또 하나의 시각』아카시쇼텐, 2008년). 그러나 분열과 분단 속에서 그러한 문제 제기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문제의 국면이 다양화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위안부’ 논쟁은 여성국제전범법정에서 제기된 것과 같은 보편적인 문제 보다는 민족적 담론으로 회귀하는 듯한 경향이 강해졌으며, 게다가 본래 이 문제와 모순될 수 있는 국제적인 맥락이 덧붙여지게 된다. 예를 들면 정대협은 국제적인 반향을 만들어 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한편으로 문제를 국가 단위로 잘라 놓는 것과 같이 단순화해 버리고 말았다. 미국 하원에서는 정대협의 주장을 지지하는 형태로 의회 결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를 통하여 ‘위안부’에 대한 이미지가 세밀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한국에서의 ―‘소녀상’으로 상징되는― 피해자상을 그대로 수용하는 형태로 결의가 이루어졌고 문제를 심화시키는 데 성공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이‘소녀상’으로 상징되는 ‘위안부’ 이미지에 대한 비판과 공격은 역사수정주의자들로부터도 나오고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취급해야할 문제이다. 그러나 어떤 ‘소녀상’을 사용하여 피해자의 일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버리는 것, 그리고 이것이 지니는 복잡한 정치적 측면(politics)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젠더를 의식하는 사람이라면 간과해서는 안 되는 문제일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에노 치즈코가 『내셔널리즘과 젠더』에서 ‘모델 피해자론’이라는 형태로 이미 지적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가 조명한 일본의 전후(戦後)
이와사키 미노루(岩崎稔)・오사 시즈에(長 志珠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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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문제를 둘러싸고 몇 가지 논쟁적인 대립점이 표출되었다. 예를 들면 ‘위안부’ 논쟁의 존재방식을 둘러싸고 메타 차원에서 재귀적(再歸的)인 물음을 던진 우에노 치즈코(上野 千鶴子 『내셔널리즘과 젠더』 세이도샤, 1998년)와 박유하(『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사토히사시 번역, 헤이본샤, 2006년)를 둘러싸고 문제의 방법론적 심화와 자기성찰의 계기가 만들어진 측면도 있었으나, 때로는 이에 대해 운동의 분열이라고 격렬하게 비판하는 주장도 나왔다. 박유하에 대한 비판은 현재의 『제국의 위안부―식민지 지배와 기억의 투쟁』(아사히신문출판, 2014년)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그동안 이토록 비판이 분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판자들 사이에서 박유하의 텍스트는 제대로 읽혀지지 않았다. 야마시타 영애(山下英愛)도 이 시기에 운동의 존재방식에 대한 자성적인 물음과 문제 제기를 한 사람 중의 하나인데, 그것은 박유하와 마찬가지로 정대협 측에도 문제의 단순화와 일면화(一面化)가 있는 게 아니냐는 자문자답이었다(야마시타 영애『내셔널리즘의 틈새에서―‘위안부’ 문제에 대한 또 하나의 시각』아카시쇼텐, 2008년). 그러나 분열과 분단 속에서 그러한 문제 제기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문제의 국면이 다양화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위안부’ 논쟁은 여성국제전범법정에서 제기된 것과 같은 보편적인 문제 보다는 민족적 담론으로 회귀하는 듯한 경향이 강해졌으며, 게다가 본래 이 문제와 모순될 수 있는 국제적인 맥락이 덧붙여지게 된다. 예를 들면 정대협은 국제적인 반향을 만들어 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한편으로 문제를 국가 단위로 잘라 놓는 것과 같이 단순화해 버리고 말았다. 미국 하원에서는 정대협의 주장을 지지하는 형태로 의회 결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를 통하여 ‘위안부’에 대한 이미지가 세밀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한국에서의 ―‘소녀상’으로 상징되는― 피해자상을 그대로 수용하는 형태로 결의가 이루어졌고 문제를 심화시키는 데 성공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이‘소녀상’으로 상징되는 ‘위안부’ 이미지에 대한 비판과 공격은 역사수정주의자들로부터도 나오고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취급해야할 문제이다. 그러나 어떤 ‘소녀상’을 사용하여 피해자의 일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버리는 것, 그리고 이것이 지니는 복잡한 정치적 측면(politics)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젠더를 의식하는 사람이라면 간과해서는 안 되는 문제일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에노 치즈코가 『내셔널리즘과 젠더』에서 ‘모델 피해자론’이라는 형태로 이미 지적하고 있다."]

Sejin Pak
8 January 2016 at 11:36 ·

Park Yuha
7 January 2016 at 19:35


이와사키/오사 논문 발췌 2

"와다씨는 당시 정치적 역학에서는 무라야마 내각이었다는 것을 간신히 발판으로 삼아 국민기금 구상에 착수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금은 국가에 의한 ‘리드레스(redress)’라는 법 제도에서의 피해자 구제와 배상 조치라는 점에서 본다면 확실히 불충분한 내용이었다.


경위는 복잡하게 얽혀있다. 기금은 국민의 모금에 의한 것이었지만, 와다씨가 말하는 것처럼 실제로는 모금으로는 부족해 지급해야 할 ‘속죄금’을 200만엔으로 정한 단계에서 기금 사업의 기본 개념이 수정되어, 나중에 정부가 부족분을 보충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결과적으로 국가에 의한 개인에 대한 지급이라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한일이라는 틀을 전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금 사업은 처음부터 국가에 의한 개인에 대한 보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기금을 둘러싼 결정적인 대립을 운동 속으로 끌어들이고 말았다. 예를 들자면 정부가 ‘도의적 책임’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고 해도 그것은 도리어 “사실은 ‘법적 책임’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강조하는 것과 같았으며 ‘법적 책임’을 인정하기를 바라는 피해자의 감정을 거스르는 것이 되어버린다는 것에 신경을 쓰지 못 했다고 생각합니다. 피해자에 대해 ‘책임’을 인정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길은)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했습니다.”라고 와다교수는 말한다. 가장 어려운 매개자의 역할을 굳이 떠안은 와다교수의 회고는 통절하기까지 하다.

와다씨의 기금에 대한 자기 비판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당사자인 ‘위안부’ 들이 받아 들일만한 해결을 내놓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는 점이다. 와다씨는 그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기금이 만들어낸 혼란이 무엇보다도 비극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은 총리의 사과 편지와 기금의 200만엔의 속죄금을 받은 여성들을 정대협이 격하게 비난했을 때였다. ‘위안부’ 중에서 기금을 받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왔을 때 그것을 ‘옳지 않은’ 행동이라고 부정했다.

운동은 기금을 ‘매수 공작’이라고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이 문제를 ‘피해자 개인의 차원에서만 파악해서는 안 된다’ ‘민족 문제’ ‘역사 문제’라고 파악하였는데, 그것은 잘못되었다고 와다씨는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정대협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의 운동단체에서도 마찬가지였지 않았을까? 이러한 와다씨의 지적은 정대협을 비롯한 운동단체에게 과연 그러한 행동을 할 권리가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결부된다. 희생자에는 다양성이 있고 각자의 생각이 있는 가운데 그것을 지나치게 윤리화하는 것은 과연 적절한 판단이었던 것일까? 적어도 그러한 운동단체의 움직임은 문제를 경직시켜 버렸고, 피해자 자신이 ‘화해’의 장면을 생각하기 어렵게 만들어 버렸다.

기금이 자료를 수집한 디지털 기념관을 인터넷 상에 만든 것도 큰 실적이다. 기금에 반대하는 운동측도 다른 형태로 기록을 수집,보존하였지만 그것도 사실은 쌍방이 협력해서 했어야 하는 것이었다"

<위안부’ 문제가 조명한 일본의 전후(戦後)>
이와사키 미노루(岩崎稔)・오사 시즈에(長 志珠絵)


Park Yuha
7 January 2016 at 23:40


<이와사키&오사 논문 발췌 3>

"'위안부’ 문제를 고찰함에 있어, 그 이론이나 운동에 대한 이해의 대립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박유하의 『화해를 위해서』와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반응에 대해 잠시 음미해 두는 것은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화해를 위해서』는 2005년에 한국에서 간행된 직후부터 한국내 운동권으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아왔다. 세부적으로 하나 하나 설명할 수는 없지만 박유하가 문제시한 것 중에 가장 중요한 점은, 어디까지나 ‘위안부’ 문제와 한일 역사인식이 정체된 책임이 일본 정부와 역사수정주의적인 우파 정치가에게 있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동시에 사태가 경직화된 책임의 일단이 정대협에도 있다고 한 부분이다. 그리고 박유하는 그러한 정대협의 문제점이 불문에 부쳐지며 오히려 권위가 부여된 데에는 일본에서의 지원운동 방식에도 책임이 있다고 했다.


“……일본 시민과 지식인은 정부를 비판해 왔지만, 그 후 10년간 일본 정부는 변하지 않았고, 거꾸로 보수화됐다. 그러한 비판이 정부를 바꾸지 못하고, 오히려 강경하게 만들었다면 그 비판의 유효성과 한계에 대해서도 다시 논의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라고 박유하는 문제 제기를 했다. 그것은 동시에 국민기금의 평가와 관련되는 문제이기도 했다. 기금의 시도가 불충분한 것이었으며, 또한 기금 자체가 원인인 실패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처음부터 ‘적’으로 단정하여 오로지 공격만 하고, 피아의 역학관계나 현실적인 방안을 생각하지 않는 자기만족적인 운동으로 전락해버린 부분은 없었을까 라는 물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박유하는 나아가 『제국의 위안부』를 통해 이 논점들을 부연하고 있다. 문제는 박유하의 논의를 그대로 찬성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비판의 논점을 왜곡하거나 명확히 언어화하지 않은 채, 박유하의 주장을 비아냥의 대상으로 치부해 버리는 그 행태자체이다. 한국에서는 『제국의 위안부』의 출판금지를 요구하는 소송이 제기됐다. 정대협이 그렇게까지 특별한 권위를 부여받게 된 것 자체가 건전하지 못하다고 하는 문제제기는 지금도 결코 충분히 인식되고 있지 않다."

위안부’ 문제가 조명한 일본의 전후(戦後)
이와사키 미노루(岩崎稔)・오사 시즈에(長 志珠絵)






8 January 2016 at 11:18


<이와사키/오사 논문발췌 4>

박유하가 이토록 맹렬한 반발을 초래한 원인으로 그녀의 논의에 신중함이 부족한 부분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전작 『화해를 위해서』에 대해서는 1990년대 전후의, 한국 민주화 운동의 결실로서 성폭력 피해자가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사회였다는, 현실적상황에 대한 고찰이 빠져있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박유하가 던진 문제 제기는 식민지주의의 피해자가 가지고 있는 집합적 기억과 관련된 어려운 문제를 짚어내고 있다. 박유하가 ‘위안부’ 문제 중에서도 주로 문제시하고 있는 점은 전쟁중 점령지에서 군사력을 고스란히 배경으로 존재했던 ‘위안부’와, 식민지 지배 하에서 조선인이 강요당한 ‘위안부’의 존재방식의 차이이다.

박유하는 제국신민으로서 조선인에게 강요된 ‘자발성’과 그 기억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비록 표면적이라고 하더라도 거기에 분명히 존재한 ‘자발성’을 무시할는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시의 위안부들뿐 만 아니라 누가 그 상황에 직면했다고 하더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들, 즉 식민지화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한 한 단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은폐는 이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해방 후에 자신의 <자발성>을 망각의 저편으로 소거해 버리고 싶었던 전前제국신민에 의한 것이었다. 식민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저항의 땅>이어야만 했고, 그것은 본인의 기억이나 의지를 넘어선, 새롭게 출발한 독립국가의 꿈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있었던 다양한 <자발>에 대한 침묵은 <거짓말>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윤리'이기까지 했을 것이다. 출발부터 보더라도 '포스트 식민지국가’는 대부분의 국민이 경험한 <과거의 부정>에서 시작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소수의 저항자들--예를 들어, 상해 임시정부나 이승만, 혹은 중국 동북부 만주 지방에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나 국내에서도 ‘반체제파’였던 사람들의 행동이나 기억들을 중심적인 기억으로 삼아 재출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중략)"위안부들의 애국"의 망각은 우선 그러한 구조가 만든 것이다. 그와 비슷한, 일종의 망각과 은폐가 위안부와 정신대와의 혼동에서도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제국의 위안부』일어판61-62쪽).

‘위안부’ 문제나 역사인식 문제를 생각할 때 일본의 식민지 지배 하에서 그 지배에 협력할 수 밖에 없었던 양상에 대해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순수하고 아름답게 자신을 투사하기 쉬운 특정 모델의 피해자상을 구축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다. ‘위안부’ 문제를 민족담론으로 이야기하려고 할 때--분명 그것은 식민지주의로 인해 일어난 비극임에 틀림없지만--희생자를 저항의 주체로 그리고 싶다는 욕망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이것은 박유하의 지적 중에서도 가장 귀를 귀울여야 하는 논점일 것이다.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사회는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한다. 전시 하에 적에게 살해당한 ‘여자’를 저항한 민족 영웅으로 찬양하는 한편으로, 성폭력피해자를 ‘적의 여자’로 간주해 민족의 수치로 인식하여 제재나 폭력의 대상으로 삼는 구조는 오늘날 보편적으로 해명되지 않으면 안 될 논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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