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체제를 보는 세 가지 시각과 한일협력의 길
갈등과 혼돈에 빠진 정체된 한일관계의 한복판에 1965년 한일기본조약 및 청구권조약(이 하 1965년 체제)을 둘러싼 해석의 첨예한 대립이 놓여 있다. 한일관계라는 건축물의 골조가 흔들리는 게 아니라 아예 토대가 흔들리고 있는 양상이다. 전체 구조에 대한 재인식과 시각 교정이 급선무다.
1965년 체제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각
1965년 체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세 가지가 공존하며 길항하고 있다.
하나는 1965년 체제 불완전, 불평등론이다. 1965년 한일관계 정상화 당시 한일은 불평 등한 협상에 임했고, 한국이 반드시 제기해야 할 문제들을 덮어둔 불완전한 합의였다는 것이 골자이다. 구체적으로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불법성에 대한 철저한 추궁이 이루어지지 않았 고, 위안부 및 강제징용 문제 등 국제적 인권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정치적으로 서둘러 타 결한 야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일관계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식민지 지배의 불법 성에 대한 근본적 성찰에 기반하여 개선이 아닌 뜯어고치기를 시도해야 한다는 논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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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러한 시각은 한일 양국이 14년에 걸친 지난하고 격렬한 협상과 토론을 거쳐 국 교정상화에 이르렀고, 협상 과정도 졸속적인 양보가 아니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1910 년 당시 한일이 체결한 모든 조약과 협약이 ‘이미 무효’라는 표현은 식민지 불법 무효론과 식 민지 합법 유효론을 절충한 외교적 타협점이었다.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일본이 수용할 것인가는 차치하더라도, 한일 갈등을 확대 지향적으로 끌고 나가는 것이 한국의 이익에 부 합하는지에 대한 전략적 판단이 선행되어야 한다. 노무현 정권 당시 2005년 민관합동위원 회에서 밝힌 바와 같이 위안부 문제, 사할린 강제이주자 문제, 원폭 피해자 문제 등 세 가지 문제는 1965년 청구권조약에서 미해결된 과제였지만, 나머지 현안들은 1965년 조약에 의 해 해결되었다고 본 것이 한국 정부의 입장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식민지 지배 불법론을 기 반으로 새로운 관계 구축을 시도하자는 주장은 굳이 말하자면 ‘한국형 역사수정주의(history revisionism)’에 해당한다. 일본은 이에 반발하며, 한국이 국제법적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 라고 매도하고 있다. 일본이 받아들이지 않는 일방적 압박만으로는 한일협력 재구축이 불가 능하거나 요원할 것이다.
또 하나의 해석은, 1965년 체제에 의거한 현안 종결론이다. 한일청구권조약에 제시된 문 제들이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해결되었다’는 문구를 기반으로 한일 간에 존재하는 모든 현안 과 문제들은 1965년에 이미 종료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강제징용 문제를 비롯하여 식민 지 지배의 강압성에서 기원하는 모든 문제들은 1965년 시점에서 완결되었으므로 이제 와서 다시 문제를 끄집어내는 것은 약속 위반이고 국제법 질서에 대한 도전이라고 간주한다. 나 아가 한국이 반복적으로 제기하는 사과와 반성의 필요성을 부정하면서 불행한 과거사에 대 한 성찰은 더 이상 없다고 강변한다. 일본 진보진영의 자학사관에 기반한 역사성찰을 비판 하며 일본의 우익들이 내세우는 입장이다.
하지만, 1965년 조약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해석은 한일관계사의 현실에 반한
다. 1990년대 이후 부각된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한일 제반 현안에 대해 일본은 성의 있는 자세로 사죄와 반성, 보상을 통해 문제 해결을 도모해왔다. 1965년 조약 체결 당시에 일본 이 꺼리던 과거사에 대한 사죄와 반성은 1993년 고노 담화, 1995년 무라야마 담화, 1998 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2010년 간 담화 등에서 거듭 확인되었다. 1965년 체제로 현안 들이 종결되었다면서, 1997년에는 일본이 한일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여 수정보완 이 필요하다는 점을 스스로 증명한 사례도 있다. 따라서 1965년 한일조약에 의해 모든 문제 가 완결되었고, 더 이상의 사죄나 반성이 필요 없다는 해석은 일본 정부의 기존 입장들에 정 면으로 배치된다. 일본의 자가당착이다. 이 시각이 ‘일본형 역사수정주의’라 해도 과언이 아 닌 이유이다.
다른 하나의 해석은, 1965년 체제의 한일관계 진화론에 해당한다. 1965년 한일조약이 완전하지도, 완벽하지도,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것도 아니었지만, 한일 양국이 지속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수정하고 보완하면서 한일관계 발전을 위해 노력해 왔다는 일종의 성취론적 입장이다. 1990년대 이후 양국에 새롭게 등장한 이슈들에 대해 전향적으로 대응하면서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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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관계가 파국에 이르지 않도록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 점에 주목한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죄와 반성, 아시아여성기금 설립을 통한 보상 노력, 사할린 강제이주자, 원폭 피해자, 한센 병 피해자 등에 대한 일본 정부의 지속적인 지원 등은 대표적 사례들이다. 한국 정부도 이에 상응하여 특별법 제정을 통해 중앙, 지방정부가 피해자 구제와 지원에 노력한 점도 긍정 평 가되어야 할 부분이다. 식민지 지배와 관련해서도 양국 정부가 노력하여 2010년 간 담화에 서 ‘한국민의 의지에 반하여’ 식민지 지배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이끌어낸 것도 스쳐 지나갈 수 없는 커다란 외교적 결실이었다. 일본은 과거사를 직시하는 노력을, 한국은 미래지향적 협력관계 구축 노력을 통해 한일관계를 잘 관리해 왔던 것이다. 이 같은 노력들이 한일 양국 에서 모두 잊혀 가고 있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한일협력 재구축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그렇다면, 1965년 체제에 대한 엇갈린 해석을 넘어서 한일협력을 재구축하기 위해서 어 떠한 구체적 노력이 필요한가?
먼저, 한일 양국 모두 역사수정주의를 고수하는 한, 한일협력의 원만한 재개는 아주 어려 울 것이다. 부족한 부분을 메꾸어 간다는 진화론적 시각에 서서 양국이 공동 노력을 기울일 때 비로소 양국 관계 개선과 협력 증진의 길을 열 수 있다. 현재 한일 양국은 역사수정주의에 함몰되어, 대외적으로는 역사문제를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치 현실에서는 ‘역사 문제 해결 없는 미래협력은 없다’고 주장하는 모순에 빠져 있다. 사죄와 보상을 통해 과거사 먼저 해결하자는 한국도, 과거사에 대한 더 이상의 사죄와 반성은 없다는 일본도 역사의 포
로(prisoners of the past history)가 되어 있다는 반증이다. 역사화해는 양국의 민족주의에 기반한 역사수정주의를 넘어서서, ‘일본은 과거사를 직시하려는 용기’를 가지고, 한국은 ‘미 래로 나아갈 용기’를 가져야만 가능하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기본정신을 발전적으로 계승 해야 할 때다.
둘째, 역사해석에 대한 독점을 넘어서는 열린 역사 대화의 공간이 필요하다. 양국에서 각 기 국민 모두가 동의하는 단일한 역사인식만 있어야 한다는 성역적 역사해석을 넘어설 수 있 는가가 과제다.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역사를 종합적으로 다루는 노력이 양국 모두에 필요하 다. 한일 양국은 예전에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만들어 이견을 조정하고 서로 다른 생 각을 병기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고자 시도했다. 다시 한번 역사인식 문제를 전문가들의 다 양한 해석의 영역으로 돌려줄 때가 되었다. 정치적 선동을 위해서가 아니라, 불행한 기억의 공유, 재발 방지를 위한 차세대의 교육, 상호인식의 공유를 통한 화해로 나아가기 위한 작업 들을 새롭게 할 때다.
셋째, 한일 양국에 존재하는 인식의 불균형(asymmetry)과 인지의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를 해소할 시점이다. 한일관계는 수직적이고 불평등한 관계에서 점차 상대적으 로 수평적이고 대등한 관계로 발전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대중적 담론에는 과 거의 그림자(shadow of the past)가 깊게 드리워져 있다. 일본에서는 아직도 일본이 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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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이고 맘에 안 들면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한다는 식의 한국을 깔보는 오만한 방식의 시선 (上からの目線)이 존재한다. 한국에서는 해방 후 76년이 흘렀고 국제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되었는데도 일본 앞에만 서면 자신을 피해자와 약자라고 여기는 시선이 횡행한다. 이제는 서로에 대한 서열의식이나 편견이 거의 없이 서로의 문화를 즐기는 2030세대들의 감각을 받아들여, 어깨를 같이할 수 있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바탕으로 협력을 습관화할 수 있는 문 화를 만들어 나가야 할 때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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