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25

[정광제 時論] 대동아공영권은 먼로주의 아시아 버전 - 프리덤뉴스

[정광제 時論] 대동아공영권은 먼로주의 아시아 버전 - 프리덤뉴스:


[정광제 時論] 대동아공영권은 먼로주의 아시아 버전

프리덤뉴스
승인 2022.01.23



아시아 국가 간의 공동 대응책이 대동아공영권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슬로건은 내용 자체로는 모든 아시아인에게 고무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지만, 아쉽게도 일본 군국주의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에 침략전쟁의 수단으로 이용된 측면도 있기에 이후 오랜 세월동안 그 누구도 입에 담으려 하지 않는 금기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대동아공영권 먼로주의의 아시아 버전

정광제(대한민국 역사연구회원)




제국주의[帝國主義 imperialism]의 사전적 정의는 군사적, 경제적으로 남의 나라를 정복하여 큰 나라를 건설하려고 하는 침략주의적 경향을 일컫는다. 즉 제국주의는 영토 확장주의, 식민지 건설주의이다.

먼로주의라 함은 미국 제 5대 대통령 먼로가 주창한 외교사의 중립정책으로 일종의 고립주의이다.

1823년 의회에 보낸 교서에서 유럽 각국이 미 대륙의 문제에 간섭함을 반대하며, 미국은 유럽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것을 선언한 이래, 오랫동안 미국 외교정책의 기조가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세계적 지위로 비약하면서 미국의 외교적 태도가 차차 세계정책 결정에 적극적인 경향으로 바뀜에 따라 이 경향은 줄어들었으며, 제 2차 세계대전 후에는 거의 폐기상태가 되었다.

즉 유럽과 신대륙은 서로 다른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으므로 별개의 지역으로 남아야 할 것임을 선언하면서 아래와 같은 4가지 기본조항을 밝혔다.

① 미국은 유럽 열강의 국내문제나 열강 사이의 세력다툼에 개입하지 않는다.

②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의 기존 식민지와 보호령을 인정하고 간섭하지 않는다.

③ 장차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식민지 건설을 엄금한다.

④ 유럽 열강이 아메리카 대륙의 어떠한 나라라도 억압하고 통제하려고 한다면, 이는 미국에 대한 적대행위로 간주될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불간섭주의라고 알고 있는 먼로주의는 1번과 2번 조항이다.

그러나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3번과 4번 조항을 주목해야 한다.



1940년 6월 29일 일본 외무대신 아리타 하치로의 라디오 연설 "국제 정세와 일본의 위치"에서 선언된 대동아공영권은 당시로부터 117년 전 먼로주의의 깊은 내막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일본은 먼로주의가 유럽과 미국 사이의 단순한 '불간섭주의'가 아니었고, 발호하는 유럽 제국주의에 대한, 독립한지 47년 밖에 안 된 신생국 미국의 적극적 방어적 선언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대동아공영권은 먼로주의의 아시아적 부활, 또는 아시아 버전이라는 것이 이 글의 요지이다.



유럽제국은 아프리카 대부분을 식민지로 점령함과 동시에 동진東進, 아시아로 제국의 힘을 쏟아부어왔다.

영국이 인도와 홍콩을, 프랑스가 베트남을,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포르투갈이 마카오를, 스페인이 필리핀을, 독일이 적도 이북의 북양군도를 손에 넣었다.

당시 일본에게 유럽제국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동북아 지역에서 이같이 부상하는 서구의 도전을 가장 명확하게 인식하고 대응했던 것은 일본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아시아 국가 간의 공동 대응책이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것이 이 글의 요지이다.

대동아공영권은 단순한 침략근성의 발로가 아니다.

인종차별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조건하에서 전략적으로 택한 일본의 노선이었다.



일본은 1910년 조선을 평화적으로 흡수 합병함으로써 오랜 역사를 통해 시도해오던 대륙진출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거의 동시에 대륙에서는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했고 러시아제국은 1917년 소비에트 혁명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에 존재하던 힘의 균형은 무너지고 일본의 진출에 유리한 여건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그 무렵 1914년 유럽에서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일본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는데, 일본은 영국이 아시아 지역에서 독일군을 공격해달라고 요청하자 재빨리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다음 동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에 있던 독일의 영토와 재산을 모두 압수하고 많은 이권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때 일본은 적도 이북에 있는 독일령 북양군도를 점령, 일본제국의 영토로 편입시킬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의 경제도 대호황을 구가하며 급성장했다.

즉 1910년대 일본제국은 급변하는 세계정치의 조류 속에서 직접 전쟁을 겪지 않으면서도 전쟁 물자를 판매해 경제 성장을 도모하고 각종 영토와 이권을 차지해 국력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로 이용했다.

특히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유럽과 미국은 막대한 자원 소모와 산업시설 파괴, 인명피해를 감수한 데 반해 일본은 배후에서 정치 경제적인 이득을 취함으로써 열강 사이의 기존 세력관계에는 중대한 변화가 발생하게 되었다.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이 그러했듯이, 이 시대 일본도 점차 경제력과 군사력이 성장함에 따라 전쟁이나 동맹을 통해 점차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일본은 1895년 청나라와 전쟁을 통해 대만을, 1905년에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통해 조선반도와 요동반도, 사할린, 쿠릴 열도 등을 영토에 편입할 수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정책이 극에 달했던 1942년에 이르게 되면 일본은 동서로 인도에서 하와이까지, 남북으로는 적도에서 몽골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영향권에 둘 수 있었다.

1930년대는 전 세계를 휩쓴 대공황으로 인해 세계 자본주의의 미래가 암담하던 시절이었다.

그 결과 자본주의 제국, 특히 스페인과 독일, 이탈리아 같은 후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파시즘이 대두하면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강한 탄압을 받았는데, 이런 조류에서 일본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은 1930년대 치안유지법이라는 강력한 공안법안을 만들어 좌익과 자유주의자들을 탄압하였다.

하지만 일본의 파시즘은 이탈리아나 독일과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히틀러나 무솔리니처럼 카리스마를 지닌 파시스트가 등장하여 지도자로 부상하는 대신 일본에서는 점차 내각에 군인들이 많이 참여하면서 군국주의의 색채를 띠게 된다.

이 시대 일본의 군국주의는 살아있는 神인 천황을 중심으로 일본이 단결하여 아시아를 유럽인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을 가지고 활발하게 군사행동의 범위를 넓혀 가는 형태로 나타났다.

일본 국내에서는 조선, 대만을 막론하고 반체제 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에는 강력한 탄압이 가해졌다.

1930년대 중반이 되자 일본 내각은 군부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고 군부에 의해 휘둘리는 신세로 전락했다.

예컨대 1931년의 만주사변이나 1937년 마르코폴로다리 (노구교) 사건 등은 본국으로부터 아무런 훈령이나 지시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관동군의 지도부가 독자적으로 군사행동을 시작하고, 이를 일본 내각에서 사후 추인하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아시아 대륙을 향해 진출하면서 일본은 황인종의 단합과 공동번영을 정치 슬로건으로 제시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만주를 점령하기 직전인 1931년 5족 화합의 슬로건을 내걸었는데, 이는 일본 조선 만주 중국 몽골의 다섯 민족이 서로 화합해야 한다는 뜻으로서 지금으로 보면 북방계 몽골로이드의 단일 블록을 제창한 것이다.



이 주장은 1933년 일만지 블록이라는 슬로건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는 일본과 만주, 지나(중국)가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의 황인종 단합이론은 이 같은 발전과정을 거쳐 드디어 1940년 6월 29일 일본 외무대신 아리타 하치로의 라디오 연설 "국제 정세와 일본의 위치"에 이어, 8월 1일 마쓰오카 일본 외상의 담화를 통해 역사적인 '대동아 공영권'에 이르게 된다.

대동아 공영권의 요지는 아시아 민족이 서양 세력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려면 일본과 각 지역의 독립운동 세력이 연합하여 서양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범위로는 일본(조선과 대만 포함), 중국, 만주를 중심축으로 하여 동남아시아 지역과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인도 등을 언급하고 있다.

1940년 8월은 일본의 군부가 내부적으로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한 전면전을 결심하고 있던 시기로서, 대동아공영권은 사실상 일본이 향후 전쟁을 통해 점령하고자 하는 모든 영토의 목록을 제시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참고) 태평양 전쟁 1941.12.7~ 1945.9.2

이후 일본은 실제로 중국의 대부분 지역과 동남아시아 지역을 유럽인들로부터 해방했지만, 인도와 호주 뉴질랜드에 대한 공격은 실패하고 만다.

사실 중국과 동남아, 인도까지는 몰라도 예나 지금이나 세계에서 가장 높은 생활수준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고 있는 호주와 뉴질랜드까지 일본군에 의해서 해방될 이유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동아공영권'은 왜 금기어가 되었나?

일본은 아시아 각 지역에 대동아공영권의 실행을 위한 전쟁에 협력해 줄 것을 요청하고, 아울러 그 결속을 보이기 위해 1943년 11월 도쿄에서 대동아회의를 개최했다.

회의에서는 연합국의 대서양헌장에 대항하여 대동아공동선언이 발표되었고, 각국의 자주 독립, 상호 제휴에 따른 경제 발전, 인종 차별 철폐를 주장하였다.

이 회의 이후 일본은 구미 세력을 배제한 아시아인에 의한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을 전쟁 명목으로 명확히 내세우게 되었다.

전쟁 초기 동남아시아에서 일본군의 파죽지세와 같은 진격은 현지 사람들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했다.

일본군의 포로가 된 영국 군대의 인도 병사들 사이에서 인도 국민군이 결성되었고, 그들은 일본군과 협력하여 인도를 향해 진격했다.

인도네시아와 버마에서도 일본군의 지도로 군대가 만들어졌다.

마치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들의 일본군 합류를 보는 듯 하다.



일본은 점령한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군정을 실시했다.

현지의 독립 운동 지도자들은 구미 여러 나라로부터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일본군정에 협력했다.

그러나 물론 일본의 점령지역에서는 일본어 교육과 신사참배 등을 강요하는 데 대한 반발도 있었다.

연합군과 결합한 항일 게릴라 활동도 일어났고, 일본군은 이에 강력하게 대처하여 일반 시민도 포함한 다수의 희생자가 나왔다.

또한 전쟁 말기가 되어 전국(戰局)이 일본에 불리해지자, 식량이 부족하거나 현지 사람들이 강제로 가혹한 노동에 종사당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났다.

그 때문에 패전 후, 일본은 이들 나라에게 배상을 했다. 그리고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생각도 일본이 전쟁과 아시아 점령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워진 것이라고 비판받았다.

사실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슬로건은 내용 자체로는 모든 아시아인에게 고무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지만, 아쉽게도 일본 군국주의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에 침략전쟁의 수단으로 이용된 측면도 있기에 이후 오랜 세월동안 그 누구도 입에 담으려 하지 않는 금기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블록은 왜 필요했나?

20세기 말, 유럽이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단일국가를 이루고자 하는 유럽공동체의 실험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자잘하게 분산된 국가 체계로는 미국의 연방체제에서 비롯되는 강력한 경쟁력을 감당할 수 없다는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제로 20세기 들어 미국이 정치 경제 군사 과학 등의 분야에서 성취한 놀라운 성과들은 광대한 지역을 포괄하는 연방체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미국의 연방은 1700년대 말 동부 13개 식민지의 소규모 연방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1800년대 남북전쟁으로 기나긴 갈등을 겪으면서 무력으로 남부를 연방에 복속하고 서부에서는 인디언과 멕시코, 북부에서는 캐나다와 전쟁을 벌여 연방을 태평양 연안까지 확장한 결과 오늘날의 미국이 만들어진 것이다.

만일 남북전쟁에서 남부 동맹이 승리했거나 휴전으로 전쟁이 마무리되었다면, 오늘날 북미지역은 유럽이나 중남미처럼 크고 작은 여러 개의 국가가 난립하는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광대한 대륙이 하나의 정부 아래 통일되고 연방체계가 안정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자 미국의 영토는 알래스카와 하와이, 태평양 등으로 급속하게 확대되었고, 그 결과 오늘날 자연스럽게 세계의 주인행세를 하는 초강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1980년대 초에 시작된 유럽공동체 운동도 성공을 거두어 이제 하나하나 눈에 띄는 성과들을 획득하고 있다.

1980년대 말 역내 국가들 사이에 자유무역지대가 형성되어 관세가 철폐되었고 1993년에는 국경선이 사라졌으며, 2002년부터는 유럽연합에 참여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단일화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유럽의회와 유럽중앙은행의 권한도 날로 확대되는 추세이며, 정부 기구인 유럽위원회가 위치한 브뤼셀은 점차 유럽의 수도로 부상하고 있다.

이 정도면 정치 경제 문화적인 활동에서 사실상 유럽은 세계무대에 유럽이라는 국명의 단일국가로 탄생한 것이다.

캐나다, 미국, 멕시코 등 북미 블럭을 구성하고 있는 3개국도 결국은 캐나다와 멕시코가 북미국가연합(USA)에 가입해 단일 연방을 이루는 미래를 꿈꾸며 날로 통합의 강도를 높여나가고 있는 추세다.

이처럼 유럽과 북미대륙은 점차 영토를 넓혀가면서 단일 연방체를 구성하고 있는데 동아시아의 미래는 아직도 안개 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불투명하기만 하다.

동남아시아는 날로 성장하는 중국의 군사력에 위협을 느껴 12개국이 참여한 아세안을 결성해 대항하고 있는데, 전형적인 후진국 블록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블록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역내에 기술력과 자본, 자원과 인구 등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법이다.

유럽공동체의 앞날이 밝은 것은 역내에 6억의 인구와 광대한 영토, 무한한 자원이 있고 무엇보다 서유럽의 선진공업국들이 참여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아세안의 경우 선진국이래야 겨우 300만 남짓한 인구를 가진 도시국가 싱가폴 하나뿐인 상황에서 독자적인 경제권 구성은 기대하기 힘든 상태이다.

1940년대, 아시아적 먼로주의적 블록구성론을 대동아공영권으로 본다면, 일본의 역사적 안목은 가히 놀랍다.


우리는 왜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에 대해서 공부를 하지 않는가?

단순히 일본 제국의 팽창주의가 나쁘기 때문인가? 대동아공영이 나쁘기 때문인가?

물론 과거 일본의 군국주의는 비판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일본 제국의 근대화와 대동아공영에 내재한 다른 비전과 가치들마저 우리가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태평양 전쟁에서의 일본의 패망은 북미제국 블럭, 유럽제국 블럭에 맞섰던 제 3 제국(블럭, 대동아공영권)의 해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먼로주의의 아시아적 부활이 좌절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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