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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3월 08일 11시 38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3월 09일 14시 12분 KST
나의 좌파 친구들이 놓치고 있는 것
태극기 집회에 나가는 걸 단순히 일당벌이로 보는 시선, 소외돼서 불쌍해진 존재들의 외로운 인정투쟁으로 보는 동정적인 태도 둘 다 동의하지 않는다. 혐오와 동정, 모두 자신의 분석틀에 대상을 맞추려는 태도다. 촛불을 든 자신은 신념에 의한 행동인데, 태극기를 든 노인은 일당 때문에, 혹은 삐뚤어진 사고 때문에 나온 좀비로 취급한다. 그 중장년, 노년들 개인이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가진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여성혐오보다 노인혐오가 더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여성들은 혐오를 개념화하고, 권리를 위해 투쟁할 수 있는 자기방어용 무기들이 있지만, 노인들은 그걸 가지지 못했다.
이선옥
예전에 즐겨 보던 TV 프로그램 중에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가 있었다. 자신의 일에 능숙한 기능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했는데 보고 있으면 정말 입이 떡 벌어졌다. 능숙이라는 표현은 부족하고 거의 신의 경지에 올랐달까.
달인들은 각종 공장부터, 농어촌 마을의 작업장, 허름하고 분주한 식당 같은 곳까지, 거의 모든 노동 현장에 존재한다. 머리에 쟁반을 몇 층씩 쌓아 올린 채 유유히 인파를 헤치고 밥 배달을 하는 달인, 매의 눈으로 불량품을 잡아내는 달인, 뭘 던지면 기가 막히게 필요한 곳에 가서 꽂히는 던지기 달인, 종이봉투 접기의 달인, 셀 수 없이 많은 일터에 달인들은 낮달처럼 숨어 있다 별처럼 빛났다. 그들의 기능을 테스트 하기 위해 어려운 미션들이 주어졌을 때, 달인들이 그걸 기가 막히게 성공시키면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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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좌파 친구는 그 프로그램을 싫어했다.
나의 좌파 친구는 그 프로그램을 싫어했다. 화면 속에는 열악한 환경들이 자주 보였고, 유해한 물질을 다뤄야 하는 공정이나 위험한 환경에 노출된 경우들도 제법 있었다. 달인들의 몸은 상처가 나 있기도 하고, 반복된 노동으로 신체 일부가 기형적인 모습이 된 경우도 있었다. 친구는 장시간 노동, 위험한 환경에 노출된 노동자들의 실제 삶을 가리고, 화면 너머의 진실을 왜곡하는 프로라고 비판했다. '프로불편러'다운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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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좌파이던 시절이니 달인들의 닳아빠진 손끝, 공장의 열악한 환경, 생산성과 비례하지 않은 임금 같은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 불편함들보다 달인들의 표정, 고유하게 몸에 밴 태도들이 먼저 들어왔다, 넉넉함. 편안함, 선함. 이런 것들.
그들은 아무와도 경쟁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대부분 자신의 월등한 능력으로 같은 시간에 동료들보다 몇 배나 되는 일을 해냈다. 손이 모자란 동료의 자리에 가서 기꺼이 모자람을 채워 주고, 동료들은 또 찬사와 우정으로 답하고. 날마다 봐도 질리지 않은 달인들의 능력이 늘 그 일터에서는 화제였다.
아, 어떤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저런 얼굴이 나오는구나. 하나 같이 넉넉하고 선한 분위기가 똑같아서 신기하고, 그 기운이 화면 너머로 전해지는 것 같아서 좋았다. 결론은 나는 이래서 좌파를 못하는구나.
좌파는 '불편함'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다.
좌파는 '불편함'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다. 불편을 감지하고 불편함을 주장하는 것이 사회를 이롭게 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들의 항변이 세상의 변화를 만들어낸 경우도 많다. 좌파는 매의 눈으로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 공세를 감지하고 그것의 위험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TV프로그램 하나라도 아무 생각 없이 넋 놓고 보다가는 진짜 넋을 빼간다는 경고를 보낸다. 나도 매사불편러이던 시절 그랬다. 그래서 요즘 매사불편러들의 '피씨함(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한 강박이 왜 생기는지, 어떻게 발현되는지 그 사고의 과정을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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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들이 놓치는 게 있다. 그들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통제하려 들 뿐,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달인에 대한 찬사 속에 가려진 열악한 노동조건과 구조의 문제는 눈에 들어올지언정, 정작 그 노동 속에서 자신의 존엄과 행복을 느끼고 사는 달인이라는 개별 인간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인간은 조금 못나고, 돈을 덜 주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불합리한 면이 있다 할지라도, 그와 별개로 자신의 일에 만족하고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손끝이 문드러지고, 손가락이 휘어지면서도 자신의 기능을 연마하는 걸 멈추지 않고 심지어 자신의 손에 자부심을 느길 수도 있다. 그런 인간이 또 어쩌다 노조를 하기도 하고, 가족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사장의 측근이 되어 노조를 방해 할 수도 있는 거고. 인간은 그렇게 다양한 존재이며, 같은 환경에 있다고 해서 똑같은 인식을 하지도 않는다. 얼마나 모를 존재인가 인간이란 종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이 세상을 바꾸겠다는 말은 공허하고 위험하다.
저 사람은 나를 왜 좋아하는지, 저 사람은 왜 나를 싫어하는지,
나는 저 사람이 왜 좋은지, 그 사람은 왜 나를 떠났는지(응?)
나는 여전히 왜 그 사람이 좋은지(얼씨구)
왜 아무것 아닌 일로 싸우는지,
왜 저만한 일에 저 정도로 화를 내는지. 왜 죽는지, 왜 저런 식으로 사는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르겠는 게 인간이란 존재다. 그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이 세상을 바꾸겠다는 말은 공허하고 위험하다.
해외의 아동을 후원한다고 하면 국내에도 어려운 애들 많은데 왜 외국 애들을 후원 하느냐고 하는 사람들 있다. 북한의 굶주린 아이들에게 쌀을 보내자고 하면, 한국에도 굶는 애들 많은데 왜 북한 애들을 돕느냐고 반대하고, 부잣집 애들까지 왜 공짜밥을 먹이냐며 무상급식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좌파들은 기부행위나 자원봉사 같은 행위를 비판한다. 해외 아동과 자매결연을 하면 그런 원조가 사태의 원인인 제국주의자들의 본질을 가리기 때문에 문제라고 한다. 기부와 시혜는 근본적인 모순을 해결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모순을 지탱하는 사악한 장치라고 비판한다.
이건희 손주까지 왜 공짜밥을 먹여야 하느냐고 분개하는 이웃을 실제로 봤다. 심지어 자기 아이가 무상급식의 대상인데도 그런다. 자신의 이익 앞에서는 언제나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 게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눈앞의 이익을 포기하면서도 자기 신념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은 이렇게 알 수 없는 존재다.
공짜밥을 트집 잡는 우파나, 자선과 기부를 문제 삼는 좌파나, 서로가 서로를 매사 트집 잡는 불만세력으로 취급하는 건 같다. 거울쌍이다. 당장 물 한 모금이 절실한 내전국가의 아이한테 몇 만원을 후원하면서 제3세계의 해방과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운동에 참여할 수도 있고, 이건희의 손주까지 공짜밥을 먹을지언정 더 많은 아이들을 위해 인정할 수도 있는데, 그 둘이 공존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편협함도 비슷하고, 인간의 선한 의지를 자신의 이념에 맞춰 재단하고 그걸 타인에게 강제하려는 폭력성도 비슷하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영역이 요즘은 특히 노인들에 대해서다. 태극기 집회에 나가는 걸 단순히 일당벌이로 보는 시선, 소외돼서 불쌍해진 존재들의 외로운 인정투쟁으로 보는 동정적인 태도 둘 다 동의하지 않는다. 혐오와 동정, 모두 자신의 분석틀에 대상을 맞추려는 태도다. 목적론자들이 흔히 가지는 태도이기도 하다. 촛불을 든 자신은 신념에 의한 행동인데, 태극기를 든 노인은 일당 때문에, 혹은 삐뚤어진 사고 때문에 나온 좀비로 취급한다. 그 중장년, 노년들 개인이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가진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여성혐오보다 노인혐오가 더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여성혐오보다 노인혐오가 더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여성들은 혐오를 개념화하고, 권리를 위해 투쟁할 수 있는 자기방어용 무기들이 있지만, 노인들은 그걸 가지지 못했다. 장년층 남성을 포함해서 노인이 환영 받는 경우는 동세대를 혐오하는 '나빼썅'의 경우 말고는 없다. 노인들은 부끄러운 줄 알고 입을 닫아라! 꼰대짓 하지 말고 지갑이나 열어라! 그런 류의 말. 자아 비판이나 동세대 혐오와 비난을공공연하게 하면 개념노인, 탈꼰대 사이다가 된다. 그런 감을 갖지 못한 장년층 아재와 노인은 그냥 반도의 흔한 '틀딱'이다.
피씨함이 거둔 많은 성과에도 그것이 두려운 이유는 사람사는 세상에 존재하는 좋은 가치들을 죄악시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가진 특유의 열정, 도전 정신, 노인의 지혜와 경륜, 직장동료 사이에서만 가질 수 있는 끈끈한 유대, 그리고 이성이든 동성이든 끌리는 대상을 향한 정념, 욕망. 이런 것들을 피씨함에 가둬서 정형화한다. 그들이 이루려는 사회의 총합은 내게 파시즘적인 '무균세상'으로 연상된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참 어렵다. 단박에 되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인간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은 언제든 가능하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다음 과정이다. 이해는 하되 관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관용하지 않는다면 어떤 선부터인가? 나에게는 그 기준이 존재하는가? 그 기준이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적은 있는가, 내 기준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가? 내 기준을 확장시킨다면 타인의 자유와 권리가 더 확장될 수 있는가? 이런 고민은 언제든 가능하다.
달인을 욕하는 좌파 친구의 얼굴이 낯설어 보이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런 고민을 시작했다. 달인 곁에서 해맑게 웃는 나쁜(놈인지는 알 수 없는) 사장놈을 무작정 비난하기 전에, 나는 이 세상에 대해 얼마나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개인인지 문득 의심이 들었다. 낯설어 보이는 좌파 친구들을 포함해서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된다. 말의 책임도 무섭게 느껴진다.
사람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아마 평생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원칙을 정하고 그걸 지키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섣불리 비난하지 않고, 인간을 수단화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타인의 삶을 제물로 삼지 않을 것. 불편러의 삶보다 훨씬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내 양심과 충돌하지는 않는다.
* 이 글은 필자의 홈페이지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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