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02

Vladimir Tikhonov [대선, 혹은 한국적 삶의 속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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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ladimir Tikhonov

[대선, 혹은 한국적 삶의 속살]

지금 대한민국은 '대선 정국'입니다. 명시적으로, 내지 암묵적으로 운명의 2022년3월9일까지 국정의 운영도, 사회적 공론의 흐름도 거의 다 '대선' 위주로 이루어집니다. 그만큼 대통령제 국가에서 대통령의 권한이 막중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야 사이의 권력 교체가 되든 안되든 21세기 초반의 한국사의 '큰 그림'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주류 여야는 물론이거니와, 온건 사민주의자인 심상정 후보 같은 분이 설령 대통령이 돼도, 대통령이 죽어도 못할 일 역시 한 두 가지는 아닙니다. 미국과의 군사적 관계라든가, 재벌들의 재산 같은 것을, 그 누가 대통령이 돼도 가히 건드릴 수는 없을 겁니다. 사실 신자유주의적 고용 정책을 폐지시키는 일조차, 그 어느 대통령에게도 절대 쉽지 않을 겁니다. 인력 파견업을 근절시킨다든가, 비정규직 고용 사유를 제한시킨다든가 플랫폼 노동자들의 노동자성을 확인시켜주는 법을 내놓으려면 국회를 통과해야 할 터인데, 거기에는 '노동'을 대변하는 의원들은 극소수입니다. 김대중-노무현 시절에도, 이명박-박근혜 시절에도, 비정규직 비율은 늘어나거나 그대로 유지되어도 절대 줄지 않았으며, 자살율은 커지거나 유지되고, 출산율은 계속 저하돼 왔습니다. 즉, 자유주의자들이 국정 운영을 맡아도, "노동의 지옥"은 그냥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또 일면으로는 자유주의자들 밑에서는 건보 보장성이 몇% 정도 오르고 지니계수가 약간 개선되고 부패지수는 좀 내려갈 수 있습니다. 즉, 대선에 쏠리는 관심은 그런 의미에서는 헛된 것만은 아니죠.
대선을 계기로 한 정치적 싸움들을 보노라면, 대한민국의 "사회", 그리고 그 사회의 집단 의식, 혹은 무의식에 대해 너무나 많은 공부가 됩니다. 한국 대선은, 예컨대 노르웨이 총선과 아주 다르게, '정책' 대결이 아닌 '인물'의 대결입니다. 한국에서는 대선 공약은 이행율이 너무나 저조해서 사실 별 의미는 없습니다. 유권자들이 후보의 공약에 뭔가를 기대하는 것보다는 그저 수사나 미사여구로 인식하는 경유가 꽤 많은 것 같습니다. 기억하는 사람들은 기억하겠지만, 문재인 정부의 공약은 "비정규직 감축과 처우 개선"이었는데, 감축은커녕 오히려 그 숫자는 소폭 늘어난 것입니다. 또 다른 공약은 "주거 문제 해소"와 "평화 통일"이었는데, 그 이행을 묻는 것도 좀 미안한 감이 듭니다. 좋게 보면 대통령 후보의 공약은 "희망 사항" 같은 것인데, 유권자들이 그것보다는 "인물"을 보는 것입니다. 이 인물이 보수층을 결집시키는 역사적 아이돌의 물리적 후계자 (박근혜)나 초고속 성장 시대의 "개발 신화"를 연상케 하는 성공적 (?) 기업인/기업 임원 (이명박)이라면 큰 "플러스" 된다는 것은 한국 사회의 보편적인 역사관이나 욕망의 지형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일면으로 노무현이나 문재인, 이재명처럼 "자수성가하여 민주화 운동/시민 사회/노동 문제와 관련이 있는 변호사" 역시 특히 50대와 그 미만의 나이의 유권자들에게는 선호되는 캐릭터입니다. 여기에서는 유권자들이 사주는 포인트는 "자수성가"와 "불우 이웃을 위한 운동"에 관련된 점, 그리고 행정가로서의 "실력"입니다. 역시 "실력", 본인의 "실력"을 통한 신분 상승, 그리고 신분이 상승된 "성공한 사람"의 어떤 시혜적인 활동을 매우 중시하는, 능력주의 신화가 중요한 자리를 잡고 있는 사회적 "코드"가 돋보이는 대목이죠.
매우 특이한 포인트는 후보자의 "가족"에 대한 엄청난 관심의 집중입니다. 그런 관심의 합리적인 이유라면, "대통령 가족 비리"라는 현상이 독재 시절 때부터 너무나 전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도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 (김홍일)도 다 각종 비리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형 노건평씨 역시 횡령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인지라..."대통령이 될 사람의 가족"을 주시하는 것은 어쩌면 극히 합리적인 경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대선은 후보 개인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 사이의 "청렴도 대결"로도 갈 수밖에 없는데, 이 대결에서는 윤석열 후보가 지금으로서 대패를 당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배우자의 사문서 위조 혐의 등은, "사과"로만 덮을 수 없을 정도의 죄질로 보입니다. 이외의 또 하나의 대결은 후보들의 체화된 상징 자본 (embodied symbolic capital)의 대결이죠. 언행, 행동거취에 상당한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문화에서는, 성공적 대선 후보는 속된 말로 "얌전"해야 하고, 언행을 통해서 "인간성 검증"을 잘 통과해야 합니다. 속은 어떻든간에 일단 겉으로는 겸손해야 하고, 말을 어주 걸러서 해야 합니다. 말 한 마디라도 보이고 보이지 않는 유무형의 "규범"을 넘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 체화된 상징 자본의 대결에서도 윤 후보는 이미 대대적인 패배를 당했는데, 이 부분은 "얌전한 언행"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검찰 조직 안에서의 권력 중독의 정도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이 대선에 대한 저의 참여 관찰은 물론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대학의 인문학을 "필요 없는" 것으로 공언한 윤 후보가 당선되면 저를 포함한 인문학계로서는 여러 모로 "문제"들이 커집니다. 안그래도 만성적 위기 속의 인문학인데....그래도 대선판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나중에 이 상황들의 전개를 언젠가 꼭 논문으로 정리했으면 한다는 겁니다. 이 정치적 격랑 속에서 한국적 삶의 어떤 "속살"이 너무나 잘 보여서 오늘날 한국 문화의 "코드" 읽기에는 대단히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죠. 이 글을 쓰면서, 미래의 그 논문의 주요 눈거들을 시론적으로 열거해본 것인데, 강호제현 (江湖諸賢)의 많은 비판과 질정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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