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07

1894년 동학농민운동, 혁명인가,민란인가? : 네이버 블로그

1894년 동학농민운동, 혁명인가,민란인가? : 네이버 블로그

1894년 동학농민운동, 혁명인가,민란인가?
세지이틀
2019. 12. 27.

유족으로 등록된 93명에게 연간 예산 1억원을 배정했다
[만물상] '동학 유족 수당'
1980년대 말 천도교(동학) 재단 학교를 다녔다. '시천주(侍天主)…'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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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정읍시만의 숫자
전국적으로는 이미 1만여명.2004년

'동학 심의위원회'는 3600여 참여자와 1만여 후손을 찾아 등록했다.
이제 수당 지급이 시행되면, 518유공자처럼 해마다 유족 숫자는 급증할 것이다.
그런8데 1894년1의 동학농민운동은 혁명일까 민란일까?

과학적 사고와 감성적 삶
사실, 1894년의 사건은 일찌감치 혁명으로 인정받았다.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이 우금치에 '동학혁명군 위령탑'을 세웠다. 그 시절에도 동학은 '반란'이 아니었다.

그게 뭐든,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은 일어나서 다행일까,
아니면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불행일까?
우선 동학농민운동의 자료를 찾아봤다.

동학농민운동

조선 고종 31년(1894)에 동학교도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봉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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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3월의 1차 봉기때, 조정은 청군의 파병을 요청하였고, 5월 전주화약으로 1차 봉기는 마무리되었다.
그 결과, 군현의 행정이 혼란과 마비상태에 이르자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의 상의 끝에 호남지방의 각 군현에 농민자치기구인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기로 했다. 이때 12개 폐정개혁안을 내걸고 민정(民政)을 실시하였다.

12개 폐정개혁안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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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사고와 감성적 삶
① 동학교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일소하고 서정에 협력
② 탐관오리 엄벌
③ 횡포한 부호를 엄징
④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
⑤ 노비문서 소각
⑥ 천인에 대한 대우 개선
⑦ 청상과부의 개가 허용
⑧ 무명잡세 일체 폐지
⑨ 관리채용 시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 등용
⑩ 왜와 통한 자는 엄징
⑪ 기왕의 공사채를 무효로 할 것
⑫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
여기까지는 혁명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톈진조약(조선에 대한 청과 일본의 동등 파병권)에 따른 청나라 군의 개입을 빌미로 일본군 또한 5월 9
일 조선에 상륙하였다.
그 결과 청일전쟁으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가 시작된다.
또한 친일내각에 의한 갑오개혁이 강행되고,
이러한 일본의 행태를 전해들은 전봉준은 일본군 척결을 위해 김학진과 손을 잡고 제2차 기병을 준비,
9월 18일 삼례에서 집결(제2차 삼례봉기)하여 서울로 향했고,

이후 동학은 진보회를 거쳐 친일단체인 일진회로 변신한다.

물론, 동학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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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사고와 감성적 삶
진보회는,
동학(東學) 봉기가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한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孫秉熙)의 지령에 따라 조직책인 이용구(李容九)와 홍병기(洪秉箕) 등이 주도해 만들었다.
일진회는, 일제의 보호 아래 명맥만 유지하던 송병준은 진보회가 전국적인 기반을 갖고 있음에 착안, 이용구를 매수해 진보회를 통합했다.


진보회
1904년 서울에서 결성된 친일단체. 구한말인 1904…

이 정도면 역사적으로는,
동학농민운동, 특히 2차 봉기는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는게 아닐까?
그런데 혁명이든, 민란이든, 대규모 군중들이 모이면 늘상 있는 어두운 모습들이 없었을까?

약탈, 폭행, 강간 등...
군기 엄정한 강군은 예외이지만,
대개의 전쟁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니,
급조된 동학군은 예외일 수 없었을터.

검색해보니, 이런 자료가 있네. (9분 시점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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