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5

평화를 만드는 마음[살며 생각하며] 박유하

평화를 만드는 마음[살며 생각하며]

평화를 만드는 마음[살며 생각하며]
2024. 10. 11.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


눈부신 햇살 속 향기로운 시간
음악과 음식이 만드는 힘
인생에서 함께한 이들과의 공간
집이든 밖이든 기억이 담겨 애틋
기억을 부수는 폭력을 막는 건
타인들에 대한 다정과 이해


10월 첫째 주 토요일에, 서울 교외에 있는 지인의 세컨드 하우스에 다녀왔다. 말 그대로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던 파란 하늘 아래, 과실수들을 호위무사처럼 거느린 소녀 같은 모습으로 서 있던 하얀 집에 도착하자 주인장은 곧바로 전날 직접 만들었다는 하얀 리코타 치즈가 듬뿍 얹힌 샐러드를 내어 왔다. 우리는 각각 와인과 커피, 또는 맥주와 함께 붉은 토마토와 녹색 이파리들과 부드러운 아이보리 색 치즈를, 가을 공기와 함께 천천히 음미했다. 그리고 정원에서 방금 따 왔다는 달콤한 단감을 주인장이 깎아주는 대로 입에 넣었다.

정원에서는, 눈부신 햇살과 협력해 열매를 생산한 단감나무와, 이미 열매는 보이지 않게 된 블루베리 나무와, 다른 물질과 만나 향기를 내뿜을 허브 화분들을 눈부셔하며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자동차를 타고 강가로 나가, 벚꽃나무가 줄지어 선 강변을 천천히 걸었다. 오랜만에 만난 북한강은 아직 한여름의 모습을 지닌 나무들의 그림자로 짙은 초록빛으로 물들어, 깊고 고요했다. 오리들도 매끄러운 수면 위를 유영하며 생의 한순간을 저마다 즐기고 있었다.



산책에서 돌아와서는 굳이 믹서 아닌 강판에 갈았다는 감자로 주인장이 전을 부쳐 주어 막걸리와 함께 마셨다. 이어, 청아한 미성의 주인공인 다른 지인은 곧 기타 반주를 곁들여 노래를 시작했다. 주인장도 함께 부르기 시작했는데, 한 학번 차이라는 두 사람은 자신들이 부른 우울과 슬픔의 정서가 가득한 노래들이, 1980년대엔 운동 가요였다고 알려 주었다. 그때는 일본에서 공부하느라 한국에 없었던 탓에, 그저 책이나 영화로 이해해 왔던 이른바 민주화 세대들이 공유하는 어떤 정서가, 갑자기 깊이 이해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나는 그들보다 한 세대 위였지만, 우리는 송창식과 김민기를 공유하고 있었고, 김민기를 좋아하는 지인은 김민기의 ‘친구’를 부른 다음 내가 좋아하는 송창식의 ‘밤눈’을 불러 주었다.

‘꽃/새/눈물’을 송창식 최고의 노래로 생각해 왔던 내가 ‘밤눈’을 좋아하게 된 건, 오로지 몇 년 전에 나온 고영범 작가의 소설 ‘서교동에서 죽다’를 읽은 이후다. 소설 속 소년과는 나이도 상황도 같지 않았지만, 그런데도 소설이 아프게 다가왔던 건, 문학이 주는 힘 말고도 나 역시 서교동에서 산 적이 있기 때문일 터였다.



펄펄 내리는 밤눈 대신 맑고 화창한 가을 햇빛이 쏟아지고 있어서, 문득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5중주 2악장 멜로디가 머릿속에서 흘렀다. 너무 맑아 슬픔이 어울리는 가을날엔 듣고 싶어지는 나만의 가을맞이 곡. 클라리넷 대신 흘러나온 건 기타 멜로디―영화 ‘금지된 장난’의 테마 곡이었다. ‘금지된 장난’은 지금은 서대문으로 옮긴 프랑스문화원이 아직 사간동에 있던 고교 시절, 수업을 빼먹고 보러 갔던 영화. 내 기억으로는 혼자 보러 간 최초의 영화였다.

1952년 영화인데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아이들의 슬픔과 불안을 이만큼이나 담아낸 영화를 나는 달리 알지 못한다. 피란 가던 중 전투기 기관총에 희생된 엄마 아빠를 뒤로하고 우연히 만난 소년과 함께, 죽은 동물을 묻어주고 십자가를 세워주는 작업에 열중하던 아이들. 어른들이 차갑게 외면한 ‘애도’를 함께하며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만남과 이별을 보여주어 눈물을 부르는 영화이기도 했다. 이후 도쿄로 공간을 옮겨 이어진 나의 영화 사랑은, 아마도 1970년대 어느 날 어둡고 적막한 공간 속에서 다른 세계와 만나는 흥분과 기쁨을 알게 해 준 그 프랑스문화원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정원에서 바비큐를 했던 저녁에는 작은 고양이가 찾아와 음식을 함께 먹자고 졸랐다. 우리는 음식을 나눠주는 시혜를 베풀었지만, 사실 난처했던 건 우리보다도 고양이 쪽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공간을,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침범한 셈이었을 테니.

인간 중심의, 이른바 휴머니즘의 근대가 지난 포스트 근대 시대에 인간이 동물과 함께하는 모습은 사실 시대적 필연이 아닐까 싶다. 그러면서 동물들도 마들렌 냄새로 기억을 불러냈던 근대적 인간에게 조금씩 가까워지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야생의 냄새만 기억하던 코가, 인간이 만들어내는 문화적 음식들과 문명적 물건들의 냄새까지도 구별하고 선호하고 거부해야 했을 테니, 인간이 겪어 온 문명의 은혜와 폐해를 동물들 역시 경험 중인 걸지도 모르겠다.

맑은 가을날의 마무리를 해준 건, 좋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 임윤찬의 연주였다. 건반 하나하나를 마치 처음 만나는 것처럼 마주하며 길어내는 듯한 임윤찬의 ‘소리’는, 깊고 신중해서 어딘가 산장에 어울렸다. 얼마 전에 떠나 보낸 이십수 년 된 자동차와, 그 차에 탔던 이들 또는 차 안에서 경험했던 수많은 감정까지 한꺼번에 떠오르게 한 것도 누군가의 마들렌 향기와 다를 바 없는 소리의 힘일 것이다. 인생에서 함께한 이들과의 기억을 담고 있는 공간은, 집이든 차든 애틋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애틋한 공간과 기억을 만들어낸 이들이, 다른 국면에서는 타인의 소중한 공간과 기억들을 한순간에 부수기도 한다. 세계는 오늘도 전쟁 중이고 그곳에서는 70년 전 전쟁고아 소녀 폴레트들이 또 울고 있다. 따뜻한 경험과 기억의 지복(至福)을 알면서도 인간은 다정 대신 냉정을, 이해 대신 냉혹을 선택하는 우를 반복한다. 그렇게 몰아가는 폭력의 사고를 인류가 지양하는 날이 쉽게 올 거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고통에 가치가 있다면 자신이 겪은 아픔을 다른 이들이 겪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만드는 순간이 아닐까. 가을 햇빛 사이로 그런 마음들이 언뜻언뜻 보이던 하루이기도 했다.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