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2

박찬승 - 한강 작가 구술사

(15) 박찬승 - 솔직히 말해서 나는 <소년이 온다>를 오래 전에 사서 읽다가 읽기가 너무 힘들어서 중도에 포기했다. 이후에... | Facebook

박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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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나는 <소년이 온다>를 오래 전에 사서 읽다가 읽기가 너무 힘들어서 중도에 포기했다. 이후에 작가 한강의 소설은 나에게는 기피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하여 <소년이 온다>를 다시 꺼내어 처음부터 다시 읽고 있다. 힘이 들어도 이번에는 끝까지 읽어보려고 한다. 그리고 <작별하지 않는다>도 이어서 읽어볼 예정이다.

다른 작가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한강 작가도 역사를 소재로 한 이런 소설을 쓰기 위해, 광주와 제주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취재를 하고 또 많은 자료를 읽은 듯하다. 어느 신문의 기사를 보니 <소년이 온다>를 쓰면서는 송기숙선생이 이끌던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에서 펴낸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을 열심히 읽었고,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기 위해서는 제주4.3연구소에서 펴낸 여러 구술자료집, 예를 들어 <이제사 말햄수다>시리즈, <4.3과 여성>과 같은 자료집을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사실 작가들은 역사가가 아니기 때문에 논문이나 책보다는 이런 구술자료집에서 구체적인 소재와 큰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본다. 한강 작가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구술사 채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90년대부터였다. 하지만 광주에서는 1988년에 송기숙 선생이 설립한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의 5.18 증언 채록이 시작되었다. 이 구술 작업에 참여한 증언자들은 모두 5백 명에 달했다. 모두 1652쪽에 달하는 이 방대한 자료집은 나병식 선생의 풀빛출판사에서 1990년 5.18 10주년을 맞아 발간되었다.  그리고 이후 이 책은 5.18 연구의 기초적인 자료가 되었다.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는 이후 전남대로 들어가 5.18연구소가 되었다. 송기숙 선생과 나병식 선생은 이제 모두 고인이 되었다.

제주4.3연구소는 1989년 설립되었는데, 초대 소장은 '순이삼촌'의 작가 현기영 선생이 맡았다. 4.3연구소는 발족 직후부터 증언자료집 <이제사 말햄수다>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이후 3권까지 나왔다. 2015년에는 <제주4.3증언총서> 7권이 나왔고, 2019년에는 <4.3과 여성, 그 살아낸 날들의 기록>이 나왔다. 그밖에도 <제주4.3유적> 등 많은 자료집이 나왔다. 그리고 다 아시다시피 현기영 선생은 작년에 4.3을 소재로 한 소설 <제주도우다> 세 권을 펴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필자도 1990년대부터 전남, 충남 지역을 중심으로 구술증언을 채록하여 <마을로 간 한국전쟁>(2010), <혼돈의 지역사회>상,하(2023) 등을 발간한 적이 있다. 이 책들을 쓰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책에는 차마 쓸 수 없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그런 때는 내가 차라리 소설가였으면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요즈음은 각 지방자치단체, 문화원, 지역사 연구단체 등에서 지역사를 대상으로 한 구술사 채록 사업을 많이 하고 있다. 이런 사업들은 처음에는 보잘것없는 것 같지만,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엄청난 자료가 된다. 그리고 그런 자료들은 연구자들,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들에게는 정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컨텐츠가 된다. 이번에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던 배경의 한켠에는 광주와 제주의 이름없는 연구자들이 진행한 구술 채록 작업이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의 그런 작업이 없었다면 어떻게 짧은 시간 안에 한 작가가 그 엄청난 사건에 휘말린 한 개인의 스토리와 생각, 감정  등 내밀한 부분까지 들여다 볼 수 있었겠는가. 오늘도 묵묵히 지역사회에서 구술채록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분들에게 "여러분은 지금 노벨문학상 작가를 만들 수도 있는 매우 중요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응원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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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an Jeong
올려주시는 글 관련해 늘 많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3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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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철
참으로 귀한분들의 수고가 있었군요
절로 고개숙여집니다
3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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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kil Park
저도 질적인 연구를 해본 연구자로서 교수님의 의견에 공감합니다. 소설도 훌륭할 수 있지만, 원래 채록된 이야기자체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진실과 표현이 이미 담겨있는 경우가 적지 않고, 때로는 채록만으로 훌륭한 저작물이 된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의미에서 이 번 노벨상은 이런 분의 도움과 기여가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겠습니다. 영광스러운 수상의 뒤에 귀중한 자료를 만들어준 익명의 구술채취 연구자들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2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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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승
박창길 공감합니다. 구술만으로도 훌륭한 경우들이 있지요.
2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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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송본
교수님의《마을로 간 한국전쟁》잘 읽어 보았습니다. 순천대학교 10.19연구소에서도 여순사건 관련 600여 명의 증언을 채록하고 지금까지 6권의 증언집을 발간했고 10월 중에 7권 발간합니다.
여순사건 관련해서도 많은 관심부탁드립니다^^
2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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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승
임송본 그렇군요. 수고가 많으십니다. 저도 증언집 몇 권 받아본 적이 있습니다. 몇 년 전 여수에서 관련 유적지들을 답사한 적이 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관심 가져보겠습니다.
1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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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수
제주 사람인 저는 고등학생 때 "이제사 말햄수다"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대학에서 한국사학과를 택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죠. 이후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구술 인터뷰를 진행해 보기도 했는데, 그 생생함은 글과 또 다르더군요.
1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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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eran Suh
제 경험상 <작별하지 않는다>는 좀 더 수월하게 읽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뭐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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