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6

김성동의 인간탐험 : 월간조선 2002

김성동의 인간탐험 : 월간조선 2002 11
김성동의 인간탐험
「한국言論史 연구의 개척자」鄭晉錫 한국外國語大 교수

김성동
●『「金日成은 항일 애국투사이고 李承晩은 매국노」라는 식의 자학적 사관은 버려라』
●『취미생활을 할 만한 시간이 내게는 없다. 학문의 넓이와 깊이에 비해서 인생은 너무 짧다』
●『언론사 세무조사는 찬성한다. 의도가 불순하고 표적성을 띠었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다』
●부인 黃興任씨, 『내 남편의 종교는 학문이고 내게는 남편이 종교다』
●『현재 언론계의 특징은 언론과 언론의 싸움이다. 現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는 言言 싸움을 부추겼다』


『연구 외에는 취미가 없다』
부인 黃興任씨와 鄭교수. 뒤편으로 가족사진이 보인다
月刊朝鮮 편집회의는 한국의 대표적 언론사학자인 한국외국어大 신문방송학과 鄭晉錫(정진석·63) 교수의 「아름다운 행동」을 따라다니기로 결정했다. 鄭교수는 직업 특성상 動的(동적)이기보다는 靜的(정적)이다. 그는 연구활동과 글로써 말을 대신하고 행동을 대신한다. 40여 년 가까운 시간 동안 그는 한국 언론사 연구에 몰두해 왔다. 그 결과는 鄭교수를 한국 언론사 연구 분야에서 독보적 위치에 올려놓았다. 「한국 언론사」, 「한국언론 관계 문헌 색인」, 「한국 언론연표 색인」, 「한국언론 관계 석·박사논문 목록」, 「대한매일신보 영인본」, 「독립신문 영인본」 등의 著書나 編著(편저), 影印本(영인본) 등 그가 땀으로 일궈낸 연구 업적들은 언론학자는 물론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사학자들에게도 귀중한 1차 자료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색인작업이나 影印本 작업은 들이는 노력에 비하면 생색나지 않는 일이다. 학자들은 鄭교수가 발굴한 자료를 이용은 하지만 인용은 않는다. 鄭교수가 만든 影印本을 통해서 역사적 사실을 찾아내기도 하지만 굳이 鄭교수가 만든 影印本에서 그 기록을 찾았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신문을 찾기 위해 각 대학의 도서관을 뒤지고 빠진 날짜의 신문을 찾아야 하는 등 影印本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년의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鄭교수는 그 생색나지 않는 일을 지금도 하고 있다.

기자는 지난 8월21일부터 대학 연구실, 개인 연구실, 집, 음식점, 카페 등에서 짧게는 한 시간 정도 길게는 열 시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鄭교수의 시간을 빼앗았다. 「시간을 빼앗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연구할 일은 많은데 나이는 자꾸 먹어가고…』 하는, 시간 부족에 대한 그의 안타까움을 말로 듣기도 하고 몸으로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39년生인 鄭교수는 2004년 2월에 정년퇴임을 한다. 정년퇴임 이후의 계획은 지금까지 해온 대로 연구하고 연구한 것을 정리하는 글쓰기 외에는 특별히 없다고 한다. 정년을 앞둔 鄭교수의 모습은 왠지 조급해 보인다. 사람을 폭넓게 만날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인 것 같다. 舊반포에 있는 鄭교수의 집에서 차를 마시는 편안한 상태에서 교유관계를 물은 적이 있다. 생각보다 鄭교수가 편안한 마음으로 만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람 사귈 때 낯을 가리는 편입니까.

『교유관계를 폭넓게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과거 기자협회 편집실장, 관훈클럽 사무국장 등 언론기관에 몸을 담았었기 때문에 아는 사람은 많지만 동창회 같은 무슨 무슨 모임에는 참여를 안 합니다』

―연구활동에 지장을 받을까 봐서입니까.

『그런 면이 많죠. 나는 취미가 아무것도 없어요. 바둑도 못 두고 화투나 포커도 못 하고… 젊은 시절에는 누가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영화감상이나 여행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말을 할 수 없네요』


―나이가 더 들기 전에 연구 성과를 빨리 보겠다는 조급함 때문에 그런 취미생활을 못 하는 겁니까.

『조급함이라기보다는 시간이 없어요. 정말 없어요』

―젊었을 때는 시간이 많으셨나 보죠.

『젊을 때는 공부를 열심히 안 했죠(웃음). 지금 생각하면 그때 좀더 공부를 많이 했어야 했는데… 지금은 나한테 주어진 힘을 한 곳에 쏟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 나는 학자일 뿐이다』

―혹시 학생들한테 보수적인 교수라는 이유로 비판을 받지 않습니까.

『일반적으로 내가 보수적인 교수로 알려져 있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웃음). 내가 지금 우리 학교(한국외국어大) 하고 서울大 대학원에서 言論史를 강의하고 있는데 학생들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어요. 내가 보수적이라고 항의를 하거나 논쟁을 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나는 자료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사람이고, 해석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자료는 객관적인 거니까요.

작년에 언론사 세무조사 때 3개 공중파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나한테 토론자로 나와 달라는 섭외가 왔어요. 세무조사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토론자로 나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나를 왜 그렇게 보느냐, 나는 세무조사 반대 안 한다」며 거절을 했어요. 방송국에서 그런 섭외를 받고 아, 내가 보수론자로 찍혀 있나 보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웃음)』

―당시 언론사 세무조사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의 글을 썼지 않습니까.

『나는 세무조사 자체를 반대하는 게 아닙니다. 그 의도가 불순하고 표적성을 띠었기 때문에 반대하는 거죠』

―후세 언론학자들은 2001년의 언론사 세무조사를 어떻게 평가하게 될 것 같습니까.

『말하기가 좀 어렵지만, 내가 세무조사에 대해 보는 시각이 그래서인지 후세 언론학자들도 나와 같은 평가를 하리라고 봅니다』

―말이 나온 김에 여쭙겠습니다. 金大中 정권 들어 언론 통제 관련 문건이 자꾸 나오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과거 정권에서는 물리적으로 언론통제가 가능했습니다. 그런 시대에 金泳三씨나 金大中 대통령은 야당 시절 언론자유를 주장하는 투쟁을 많이 했습니다. 언론자유를 요구할 때 金대통령은 집권하면 공보처를 없애겠다고 했습니다. 실제 집권 후 공보처를 없앴습니다.

그런데 2년 후에 국정홍보처라는 이름으로 슬쩍 부활을 시켰습니다. 모순이죠. 과거처럼 물리적으로 통제를 하려니까 양심의 가책도 되고 저항 또한 만만찮으니까 공작적인 차원에서 언론을 통제하려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소수세력 대통령으로서 언론을 통해서 통제도 하고 국민 여론을 조작하려고 하다 보니까 그게 마음대로 안 되는 거예요. 안 되니까 이른바 언론장악 문건 같은 것들이 계획되고 그 계획에 따라 집행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요즘 언론계의 특징 중 하나가 언론과 언론의 싸움입니다. 언론사 세무조사가 이를 더욱 촉발시켰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런 측면이 있죠. 언론은 권력에 대항해야 하는데 지금의 언론계는 언론과 언론이 싸움을 하는 이상한 구조가 돼 있습니다. 언론사 세무조사가 言言 갈등을 부추긴 측면도 있습니다』

―언론 권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언론도 권력화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론의 사명 중 하나가 권력에의 대항이라는 측면에서 언론이 언론을 견제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 아닐까요.

『언론 역사를 전공하는 입장에서 볼 때 과거 언론의 親日 문제라든지, 독재정권과의 유착이라든지 하는 문제는 당연히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비판에 형평성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과거의 독재 정권에서 그야말로 나팔수 노릇을 하고, 요새 말로 주구 노릇을 했던 언론들이 자기의 과거는 다 접어놓고 마치 자기들은 과거에 안 그랬다는 듯이 하고 있는 거, 이런 것들은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고 봐요. 그렇다고 전혀 안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고요』

―그렇다면 한겨레 같은 경우에는 다른 언론들을 마구 공격해도 괜찮겠네요. 늦게 창간됐으니까 그런 면에서는 자유롭지 않습니까.

『아니죠. 공격을 하되 형평성을 갖추어야죠. 어느 특정 언론을 공격하기 위해서 어느 특정 역사를 끌어들여 공격하는 것은 형평성에 문제가 있죠. 뭐라고 할까, 역사를 이데올로기의 투쟁 도구로 삼는 것은 공평하지 못한 일이죠』



『나를 그들과 같은 반열에 놓지 마라. 자존심 상한다』

취재 중 한번은 맥주집에서 鄭晉錫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취기가 적당히 올랐을 때 그 자리에서 鄭교수는 자신에 대해 보수적이라고 비판하는 일부 소장 언론학자들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그들과 나를 같은 반열에 놓고 말하지 말아요. 자존심 상합니다』

기자가 鄭교수를 여러 차례 만나면서 鄭교수로부터 그런 「감정적 언어」를 들은 것은 그때가 유일하다. 그 말에는 『감히 너희들이 나를 건드려?』 하는 식의 감정이 섞여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판을 하려면 더 공부해서 똑바로 알고 하라』는 충고가 읽혀지는 언어였다.

鄭晉錫 교수는 1999년 6월 전북대 강준만 교수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적이 있다.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였다. 鄭교수는 최장집 교수 사건과 관련 1998년 11월8일자 조선일보에 「공인검증 가로막는 것은 언론자유 억압하는 행위」 제하 칼럼을 기고했다. 강교수가 1998년 12월호 「인물과 사상」에 「정진석이 나와 같은 언론학자라는 사실에 낯이 뜨거워진다」, 「어떻게 그 수준의 이론으로 언론학 교수를 해왔던 것인지 의아스럽다」 등의 표현을 동원해 鄭교수를 비난하자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鄭교수가 소송을 제기했던 것이다. 지난 8월26일에 鄭교수의 개인 사무실에 있었던 인터뷰에서 강교수와의 소송 문제를 물어보았다.

―강준만 교수하고의 명예훼손 소송은 어떻게 되었나요.

鄭교수는 이 질문에 『다른 이야기나 하자』며 대답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자체가 싫은 눈치였다. 기자가 다른 질문을 않고 한참을 기다리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결론이 났죠. 법원에서 화의 결정이 났고, 그 사람들이 「인물과 사상」에 한 페이지에 걸쳐서 자기들 이름으로 사과문을 실었어요』

―이기신 거네요.

『사과를 받았으니까』

―법정에서 강준만 교수를 만났나요.

『아뇨, 그 사람은 법정에 안 나왔어요』

―교수님은 법정에 나가셨구요?

『네』

―교수님이 강준만 교수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한 후 강교수가 「인물과 사상」 1999년 8월호에 쓴 글을 보면 말미에 「혹 법정에서 뵐 기회가 있다면 저의 인사를 웃는 얼굴로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고 씌어 있던데요?

『그렇게 써 있나요? 하여튼 법정에는 안 나왔어요. 그 뒤로 나는 「인물과 사상」을 본 적이 없어요』

―법정에서 강교수를 만났다면 웃어 주었을 것 같습니까.

『…』

鄭교수는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며 손사래를 쳤다. 이후에도 몇 차례 계속된 鄭교수와의 만남에서 기자는 그 이상의 기분 나빠하는 표정을 본 적이 없다.

鄭교수와 기자는 그날 저녁 함께 맥주를 마셨다. 반포에 있는 치킨집이었는데 우리는 자리에 앉은 지 채 20분도 안 돼 그 집을 나와야 했다. 손님들이 계속 들어오자 鄭교수가, 『많이 팔아줄 사람을 위해서 우리가 자리를 비켜주자』며 다른 맥주집으로 옮겼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곁들인 반주까지 포함하면 3차를 한 셈이다.



『애국심만으로 역사를 보면 사실이 왜곡된다』

鄭晉錫 교수의 개인 연구실 간판은 소박했다. 어림잡아 가로 10㎝, 세로 7㎝ 크기의 종이 위에 방 호수와 「정진석 연구실」이라는 글자만 달랑 적혀 있었다. 15평 남짓한 개인 사무실은 鄭교수의 집이 있는 舊반포 아파트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반포 플라자에 있다. 책과 자료를 쌓아놓기에는 집이 비좁아서 개인 사무실을 얻었다고 했다. 다른 학자들의 書庫(서고)와 다른 점은 독립신문, 매일신문 등 影印本이 많다는 점이었다. 기자는 鄭교수의 양해를 얻어 개인 연구실에 소장돼 있는 책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서적뿐만 아니라 자료들도 수북했다.

기자의 시선을 함께 좇던 鄭교수의 눈길이 독립신문 影印本에서 멈췄다. 독립신문 影印本을 바라보던 鄭교수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기자는 잠시 鄭교수의 受講生(수강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중간에 그의 열정적인 강의를 멈추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언론사를 연구하려는 사람은 역사적인 사실을 좀더 확실히 알고 시작해야 합니다. 손에 흙을 묻히면서 역사의 진실을 발굴하려는 자세가 필요해요. 그런데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언론학자들 중에는 그 흔한 독립신문 영인본조차 본 적이 있는가 의심이 들 정도의 초보적인 수준에서 언론사를 책으로 내놓는 경우도 있어요』

鄭교수의 말이 빨라졌다.

『이 책 저 책을 모자이크식 기법으로 잘라 붙이는 이른바 「가위와 풀로 만드는 역사」를 쓰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런 행위는 언론사 연구를 개척한 제1세대는 물론이고 학문 자체를 모독하는 일입니다. 또 하나는 史觀의 문제입니다. 1993년에 나온 한 언론사 책을 보면 李承晩은 「사대 매국노」로 기술하고 金日成에 대해서는 「김일성을 선두로 하는 새세대 청년 공산주의자들은 겨울이면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의 장백산맥을 무대로 간악한 일제의 토벌작전과 학살을 견디어 내면서 반일 민족 해방투쟁과 친일배족의 동족 착취세력인 지주·자본가들에 반대하는 사회혁명투쟁을 동시에 전개해 나갔다」고 적고 있습니다. 李承晩 대통령이 나라를 팔아먹었습니까. 정치사라면 金日成의 항일 투쟁을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언론사에서 그걸 뭣 때문에 장황하게 써야 합니까』

사실 鄭교수는 이 이야기를 상당히 길게 했다. 이 이야기는 鄭교수가 논문으로도 쓴 적이 있고 1999년 2월에 열린 언론학회 주최 세미나에서 발표하기도 했다. 기자는 鄭교수의 열정적 강의를 간신히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다.





자학적 사관을 심어주는 학자들

―月刊朝鮮 2002년 8월호에 쓰신 글에서 자학적 史觀을 심어주는 일부 풍조에 물들지 말라고 젊은이들에게 충고를 했는데 李承晩 대통령과 金日成에 대한 일부 언론학자들의 그런 태도를 두고 말씀하신 겁니까.

『역사를 보는 시각은 두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가능하면 우리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고, 또 하나는 우리 역사를 아프게 自省해서 잘못된 것은 고쳐야 한다는 시각에서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시각이 아니고 과거를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본다는 점입니다. 물론 과거의 정권들이 부정이나 비리를 저지르는 등의 잘못은 있었죠. 문제는 그것을 자꾸 확대 재생산한다는 겁니다.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북한과 우리를 비교해 보면 경제성장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가 긍지를 가질 만하잖아요. 언론사를 쓰는 사람들이 李承晩을 매국노라고 쓰고 金日成의 항일투쟁은 장황하게 늘어놓고 하는 것들은 자학적인 거죠. 그런 자학적인 사관을 버려야 합니다』

―역사를 애국심으로만 볼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긍정적으로 보자는 거지 애국심으로 보자는 뜻은 아니죠. 나야말로 역사를 애국심으로 기록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1904년에 창간된 대한매일신보의 실질적인 소유주가 누구냐 하는 논쟁이 그것입니다. 사학계에서는 고종이 자금을 주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어요. 고종이 신문 창간과 경영에 소요되는 자금을 지원해서 裵說(배설:영국인 Ernest Thomas bethel의 한국 이름)을 고용 사장으로 앉히고 영국인이 누릴 수 있는 治外法權(치외법권)을 방패막이로 항일 언론 투쟁을 전개했다는 거죠. 우리 국민정서에는 딱 들어맞는 주장이죠. 하지만 내가 한국, 일본, 영국 등 3개국의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결과는 그렇지 않아요.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 裵說이 창간했습니다. 내가 쓴 책만 학자들이 읽어봐도 이해를 하게 될 텐데 정말 안타까워요. 민족의 운명이 위급한 상황에서 창간돼 국채보상운동 등 항일운동을 주도한 항일 민족지가 외국인의 주도로 발행됐다는 사실을 우리의 정서가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일이죠. 언론학계에서는 대부분 내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어요』

―史學界에서도 그렇게 믿을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닙니까.

『고종이 대한매일신보에 자금을 보태준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당시는 그런 지원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에서도 관행처럼 이루어졌어요. 자료를 조금만 뒤져봐도 그런 관행이 있었다는 걸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불완전한 국내의 자료만을 들고 앉아서 「애국적」인 자세로 역사를 바라본다면 그 결과가 아전인수식으로 나타날 것은 뻔한 일입니다. 연구자의 고정된 시각에 맞지 않는다고 중요한 자료를 외면하면서 일방적인 자료를 토대로 주관적인 해석에 입각해 생산된 연구결과를 다른 사람이 인용을 하고 그 다음 사람이 살을 붙이고 색깔을 더하는 식으로 기술하는 일이 거듭되다 보면 역사는 진실과 동떨어진 모습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동화로 신춘문예 입선

鄭晉錫 교수는 경남 거창에서 정규호(1993년 작고)씨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한쪽 다리가 불편하다. 태어날 때부터 다리가 불편했던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때 대퇴부 관절염을 앓았다. 3년간 병석에 누워 있었다. 그 후유증으로 다리가 불편해진 것이다.

그는 친구들보다 3년 늦게 대학에 입학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니까 친구들은 4학년이더라구요. 지금 생각하면 별 것도 아닌데 그때는 인생에서 굉장히 낙오된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자존심도 상하더라구요』

―그래서 남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다가 보니까 학자의 길로 들어선 거군요.

『남들보다 열심히 공부했다는 것은 좀 그렇고… 영향은 있었겠죠』

―실례되는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신체적인 장애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나는 나의 신체적인 장애가 내 인생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고 봅니다』

―신체적인 장애가 끼친 영향이라는 게 꼭 부정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이 없었습니까.

『나는 이런 생각은 해요. 내가 겉으로 보기에는 안 그런데 도전정신이 있어요. 늦게 공부한 것도 그렇고 한 연구과제를 수년간 수행하는 것도 그렇고, 그렇기 때문에 장애는 문제가 안 됐던 것 같습니다. 물론 신체가 이렇지 않았다면 인생이 달라졌을지도 몰라요. 예를 들면 본격적인 등산이라든지 세계일주를 걸어서 했을지도 모르죠』

―그렇게 됐다면 언론사 연구에는 지장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웃음).

『그거는 지장이 있었을지도 모르지요(웃음)』

―젊었을 때는 등산을 자주하셨나 보죠.

『많이 다녔어요.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도 다리가 완전히 낫지 않아서 1학년 1학기 때까지는 지팡이를 짚고 다녔어요. 그러다가 2학기 때부터 지팡이를 안 짚고 다녔는데 3학년 때는 제주도 한라산을 3일 동안 걸어서 오르기도 했어요. 그 외에도 마니산을 비롯해 서울 주변 산들을 틈나는 대로 찾을 정도로 등산을 좋아했습니다』

언론학자들 가운데서도 鄭교수는 글솜씨가 좋은 교수로 알려져 있다. 鄭교수의 문장력은 타고난 것 같다. 鄭교수의 어린 시절 꿈은 소설가였다고 한다. 실제 그는 신춘문예에 응모해 입선한 경력이 있다. 1959년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화가 입선됐던 것이다. 당시 당선작이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당선이나 마찬가지다. 1960년 1월에는 「여원」社가 모집한 신인상 수필 부문에 여동생 이름으로 응모해 당선되기도 했다.

―왜 소설은 계속 쓰지 않으셨습니까.

『소설에는 내가 재능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그런데 소설을 쓰겠다는 꿈은 가지고 있었어요』

―지금도요?

『얼마 전까지요. 지금은 내 전공 작업이 너무나 밀려 있습니다. 누구한테 청탁받은 일이 밀려 있다는 게 아니라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과제가 많기 때문에 소설 쓰고 그러는 데 시간을 보낼 그럴 여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언론사는 재미있는 학문』

―아쉽지 않습니까.

『30대 중반까지는 언젠가는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언론사 연구를 집중적으로 하면서부터는 많이 옅어지더군요』

―제가 보기에는 언론사라는 게 따분한 학문으로 보이는데 왜 하필 그 재미없는 言論史를 전공했습니까.

『아니에요. 언론사는 참 재미있는 분야예요. 새로운 자료를 찾고 발굴하는 일이 참 재미있는 일이에요』

鄭晉錫 교수는 한국 최초의 여기자 李珏璟(이각경) 발굴, 한성순보가 잡지가 아니라 신문이었음을 입증하는 사료 발굴, 대한매일신보와 裵說의 관계 등 기존 학설의 방향을 바꾸는 많은 사료들을 발굴했다.

―새로운 사료를 발굴할 때 기분은 어떻습니까.

『그때마다 다르죠. 제일 기뻤던 것은 영국에서 공부하며 연구할 때 대한매일신보 창간자인 배설과 관계된 자료를 외교문서 등을 통해서 발굴했을 때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다는 게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진공상태에서 찾아내는 게 아니라 다 있는데 안목이 없거나 유의해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밖에서 굴러다니는 게 보석인 줄도 모르고 놓치는 경우가 많죠. 한 예로 서재필 박사 유품을 독립기념관에서 조사를 한 적이 있어요. 거기서 영문으로 된 독립신문 號外(호외)를 발견했는데 그건 많은 사람들이 보면서도 그냥 지나쳤던 거죠』

―자료수집 비용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비용은 어떻게 충당했습니까.

『집사람(黃興任·황흥임·65)이 재작년까지 중학교 국어교사를 했어요. 그 덕을 봤죠』

―맞벌이가 큰 도움이 됐군요.

『그랬어요. 장남이 아니라 부모나 친척들에게 크게 돈이 들어갈 일이 없었다는 것도 도움이 됐지요』

곁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부인 黃興任씨에게 물었다.

―鄭교수님이 월급은 축내지 않으셨나요.

『아뇨, 월급은 통장으로 들어오니까 그걸 축내지는 않으셨어요. 대신 원고료 같은 것들은 제가 간섭하지 않았죠』

鄭교수는 저서도 많지만 각종 언론 매체에 기고도 많이 하는 편이다. 鄭교수에게 그동안 쓴 글의 목록을 부탁해서 받았는데 제목만 200자 원고지로 331장에 달하는 분량이었다.

―외부 기고나 저술 활동 때문에 강의를 소홀하게 하지는 않았습니까.

기자가 농담처럼 던진 질문에 鄭교수는 정색을 하고 답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전공하고 관계없는 일을 많이 했다면 그럴 수 있겠지만 연구라든지 이런 거는 모두가 다 강의에 생생하게 반영되는 내용들이기 때문에 새 학기마다 그런 새로운 내용을 학생들에게 전해 준다는 것을 굉장히 보람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학기마다 敎案(교안)을 새로 작성하시는 겁니까.

『새로 작성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내용이 추가된다는 거죠. 기존에 있는 거지만 조금 더 깊이가 있는 강의가 되는 거죠』

鄭晉錫 교수는 일반에 학자로만 각인돼 있다. 그는 維新下에서 한국기자협회 편집실장으로서 정부의 탄압을 받아가며 기자협회보를 만들었던 사람이다. 1964년에 대학을 졸업한 후 鄭교수는 KBS 방송문화연구실 연구원으로 있다가 1966년에 한국기자협회 편집간사로 자리를 옮겼다. 1976년에는 편집실장이라는 직책을 맡았다. 기자협회보 편집을 지휘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언론계의 소식을 전해주는 매체들이 몇 있지만 당시에는 기자협회보가 유일했다. 記者사회의 의견을 대변하다 보니 정권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었다.

―당시의 기자협회보와 지금의 기자협회보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유신 때의 기자협회보는 언론계의 유일한 뉴스源이면서 언론이 보도하지 못하는 것들을 보도하기도 했어요. 요새는 기자협회보가 어느 편이 돼서 보도하고 그러지만 그때는 언론계 전체를 대변해서 대외적으로 싸웠어요』



기관 몰래 찍던 기자협회실

―기자협회보를 만들다가 신체적인 구속도 당한 적이 있습니까.

『그런 일은 없었어요. 내가 편집실장을 할 적에는 기자협회보가 폐간도 당해 보고 주간이 월간으로 바뀌기도 하는 수난을 많이 겪었지요. 나 자신도 기관에서 잡으러 와서 도망을 다닌 적도 있구요』

―폐간을 당했을 때 신문을 몰래 찍기도 했다면서요.

『명동 성당에 인쇄시설이 있었어요. 거기에서 몰래 기자협회보를 찍고 그랬죠. 소장 언론학자 중에 글을 통해 나에게 1970년대에 기자들이 해고를 당할 때 무얼했느냐고 힐난하는 조로 질문을 던진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나도 그런 식으로 탄압을 받으면서 신문을 만든 사람입니다』

鄭晉錫 교수는 인터뷰 중 틈만 있으면「바르고 긍정적인 역사관」에 대해 이야기했다. 鄭교수가 보기에는 일부 학자나 젊은이들의 史觀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 듯했다. 鄭교수는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며 말을 자를 틈도 주지 않고 이런 말을 했다.

『대한민국이 근현대사에서 언론에 의해 세계의 주목을 받은 역사적 사건이 다섯 번입니다. 첫째는 1894년의 청일전쟁 때입니다. 그때 외국기자들에 의해 해외에 비쳐진 우리의 모습은 중국 사람과 일본 사람을 섞어놓은 모습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1904년 러일전쟁 때인데 그때 200여 명의 서양 기자들이 우리나라에 왔었습니다. 그 전쟁을 소개한 미국 잡지의 사진을 보면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총으로 쏴 죽이는 광경, 일본인들의 짐을 나르는 모습 등입니다. 두 전쟁에 비쳐진 우리나라 사람들의 모습은 아주 못난 모습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6·25 전쟁 때인데 더럽고 게으른 모습만 비쳐 주었어요. 전부 그렇게 가난하고 못살고 하는 모습들이었습니다.

네 번째는 88서울올림픽입니다. 앞에 세 번은 우리 땅에서 우리가 주인 역할을 한 것이 아니었지만 서울올림픽 때는 처음으로 우리나라가 우리 땅에서 주인 노릇을 한 겁니다. 88서울올림픽 후 대한민국의 국가 이미지는 확 바뀌었습니다. 그 다음이 이번 월드컵인데 대한민국의 이미지를 한 단계 더 끌어올렸습니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이렇게 다섯 번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는데 그 가운데 마지막 두 번을 가지고 우리의 이미지를 바꾼 겁니다. 그 기간이 불과 100여 년입니다. 100년 사이에 우리나라가 이렇게 발전한 겁니다.

우리는 이런 우리의 역사에 자부심을 가져야 하고 대한민국 정통 정부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해요. 왜 임시 정부까지는 들먹이면서 李承晩은 초대 대통령인데도 매국노니 뭐니 욕을 하면 지식인이 할 일이고, 李承晩을 칭찬하는 일은 안 되는 일이고 그게 말이 됩니까. 비판이야 할 수 있고 해야 하지만 자학적인 역사관을 가져도 안 되고 심어 주어도 안 됩니다. 학자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日帝 때 최고의 기자는 安在鴻

―史觀에 관한 것 말고 학자의 길을 걷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에게 해주실 말씀은 없습니까.

『박사 과정 공부를 하겠다는 젊은이들이 가끔 찾아옵니다. 그때마다 학비를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를 물어봅니다. 대부분은 아르바이트도 하고 그러면서 학비를 조달하겠다고 대답을 해요. 그런데 내 생각은 달라요. 공부를 하기 위해 부모에게 의지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공부를 하려면 전념을 해야 하는데 직장을 다니면서는 어려워요. 그래서 나는 학자의 길을 갈 생각이라면 아르바이트고 뭐고 생각하지 말고 공부만 하라고 충고를 하지요. 학문의 넓이와 깊이에 비해서 인생은 너무 짧습니다』

―언론사학자로서 近現代를 거쳐오며 한국언론이 국가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보십니까.

『근대 이후 언론사를 보면 상당부분 민족운동사와 겹칩니다. 대한매일신보를 예로 들더라도 이 신문을 연구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사학자가 언론학자보다 많습니다. 韓末인 1904년에 창간된 대한매일신보를 단순히 신문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보는 겁니다. 언론은 국민 계몽과 외국의 문물을 소개하는 개화의 중심기관이었고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는 민족 진영의 보루였습니다. 언론은 광복 후에도 韓末의 애국계몽적인 정신을 계승해 독재에 항거했습니다. 4·19는 학생 혁명이었지만 그 원동력은 언론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사회발전을 이끄는 힘이 언론에 있었던 겁니다. 지금은 언론이 시대가 요구하는 언론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나는 아직도 언론이 국가발전의 한 축을 담당하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의 우리 언론이 監視犬(감시견)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세상이 다원화되고 복잡해지니까 사실 제대로 못 하고 있다고 봐야죠. 정치적인 여러 가지 비리라든지 하는 문제들 가운데 제대로 보도되지 않는 것들도 있지 않습니까. 언론자유가 억압돼서라기보다는 사회적인 이해집단의 압력, 보이지 않는 이념적인 규제, 이런 것들이 언론인 개개인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언론사를 공부하다 보면 과거 언론인과 현재의 언론인들을 자연스럽게 비교하게 될 텐데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과거에는 崔錫采(최석채) 선생이나 洪鍾仁(홍종인) 선생 같은 스타 플레이어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시스템이 움직이는 시대입니다. 의협심이라든지 독립된 기자정신이라든지 하는 것이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조직 속에서는 발휘되기 어렵죠. 그런 점에서 회사의 분위기가 중요한데 요즘은 이 표현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는데 보수와 진보라는 이데올로기에 매몰돼서 회사의 입장이 자기 소신과 일치하지 않아도 제대로 자기 목소리를 낼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들이 있죠』

―언론사학자로서 현업에 있는 언론인을 제외하고 누가 최고의 기자였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 어려운 일인데요. 논객과 기자로 나눈다면 최고의 논객은 있었죠. 徐載弼(서재필) 같은 분은 당연히 훌륭한 분이었고 그 다음에 張志淵(장지연), 梁起鐸(양기탁) 같은 분들을 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日帝 때로 넘어오면 조선일보 사장을 지낸 安在鴻(안재홍)을 꼽을 수 있을 겁니다. 그분은 일제 때 형무소를 아홉 번이나 갔다 온 분입니다. 그 대부분이 필화였습니다. 기개나 투쟁정신이 대단했고 글도 잘 썼어요』

―현직 언론인 중에는요.

『그건 누구라고 말할 수 없죠(웃음)』



『내 남편의 종교는 학문』

다리가 불편한 鄭晉錫 교수에게 자동차는 요긴한 동반자다. 1983년에 자동차를 구입했다. 무거운 자료를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고 강의할 때 서 있으니까 무릎에 무리가 왔기 때문이다.

―운전할 때 속도를 많이 내시는 편입니까.

『그렇게 속도를 많이 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처음 내 차를 타본 분들은 천천히 가라고 하지요(웃음)』

―급하신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요.

『급한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대화를 하거나 누가 전화를 걸어서 딱 요지를 말하지 않고 말을 빙빙 돌리면 화를 굉장히 잘 내요. 요지가 뭐냐고 다잡은 적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내가 성질이 급한 거는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상대방이 불쾌해할 텐데요.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외에 연구 테마를 잡고 그럴 때는 굉장히 끈질깁니다. 보통 한 테마를 잡으면 수년씩 걸리고 거기에 보완을 하다 보면 10년 이상 걸리는 연구도 있습니다. 성질이 급하면 그렇게 할 수는 없겠죠』

아무리 사회적으로 훌륭한 인물일지라도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기는 힘든 일이다. 鄭교수의 부인 黃興任씨에게 남편 鄭晉錫에 대해 물어보았다. 두 살 연상인 黃씨는 남편에 대해 깍듯한 존칭을 사용했다.

―아내로서 보시기에 학자 정진석은 어떤 분입니까.

『보통 남자들이 사회생활을 하면 여러 방면에 관심도 많고 그러게 마련인데 오로지 글쓰기와 연구 외에는 하는 게 없어요』

―鄭교수님의 고집이 세죠.

『고집이 세시죠. 고집이 세니까 학자를 하시죠』

―자주 싸우십니까.

『싸울 시간이 있어야 싸우죠』

―보시기에 한국에서 최고 언론학자는 누구입니까.

黃씨는 남편 鄭교수의 얼굴을 쳐다보며 빙긋 웃더니 『제가 보기에는 저희 바깥 양반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분은 제가 잘 모르니까요』라고 소리내 웃으며 답했다.

―鄭교수께서 이제는 연구활동도 줄이시고 편안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은 없습니까.

『그런 생각을 왜 안 하겠어요. 나이도 있으시고 그러는데. 어떤 때는 일에 쫓기고 그러면 잠도 못 주무시고 그래요. 그런 걸 보면 안타깝죠. 젊은 나이도 아닌데』

―종교는 가지고 있습니까.

『종교는 없어요. 남편이 내게는 종교고 남편의 종교는 학문이에요』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鄭교수는 두 부부만 살고 있는 32평형 아파트가 울릴 정도로 한바탕 유쾌하게 웃었다.

鄭교수의 유쾌한 웃음너머로 질문을 던졌다.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 한 가지만 말씀해 주시죠.

『내가 쓴 책 중 가장 애착을 갖고 있는 책이 「대한매일신보와 裵說」입니다. 그 책이 출간된 지가 15년이 됐는데 대한매일신보, 裵說 그리고 대한매일신보의 또 한 명의 주인공인 梁起鐸을 주제로 한 새로운 책을 써보고 싶어요. 물론 내용은 기존의 「대한매일신보와 裵說」이라는 책자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지만 새로운 자료도 보강하고 매일신보의 역할과 배설 그리고 梁起鐸이라는 두 인물을 좀더 리얼하게 그리면서 알기 쉽게 써볼 생각입니다. 딱딱한 학술서적이 아니라 학술적인 품위와 엄격한 고증을 유지하면서도 흥미롭고 생기가 있는 책, 읽기 편하고 이해하기 쉬운 책으로 새롭게 써보는 게 내 꿈입니다』

아무래도 鄭교수의 내재된 소설가적 재능과 학자적 열정이 어우러져 빚어낸 작품을 머지않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鄭晉錫 교수는 기자와 만날 때마다 이런 말을 했다.

『잡지라는 게 판매도 생각해야 하는데 나 같은 사람을 등장시켜서 독자들의 흥미를 끌겠는가』

취재와 관련해서는 마지막으로 만난 지난 9월23일에도 鄭교수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金기자, 지금이라도 다른 사람을 찾아보는 게 어때?』

빈말이 아니라는 걸 아는 기자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鄭교수와 나눈 대화를 녹음한 긴 분량의 테이프를 풀고 났을 때 이런 답을 할 걸 하는 생각을 했다.

 
  『참다운 학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입니다. 학자가 걸어야 할 길과 행동, 학자의 자세는 어떤 것인지의 전형을 찾고 싶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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