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6

「음지의 戰士」 북파공작원의 現代史 秘話 : 월간조선

「음지의 戰士」 북파공작원의 現代史 秘話 : 월간조선


05 2002 MAGAZINE전체기사


「음지의 戰士」 북파공작원의 現代史 秘話


김성동

30여 년 만에 확인된 형의 죽음



2002년 3월19일. 대구에 거주하는 정일수(가명)씨 앞으로 한 통의 전사확인서가 전달됐다. 국군 제○○○○부대장의 직인이 찍힌 이 확인서가 확인해 준 죽음의 주인공은 정씨의 형인 정정수씨였다.

전사확인서 상단부에는 본적, 소속, 생년월일, 성명이 적혀 있었고, 중간쯤에 『위 자는 군복무 중 1971년 10월23일 ○○지구에서 전사하였음을 통지합니다』고 적혀 있었다. 군번과 계급란은 빈칸이었다. 전사확인서의 발급일은 2002년 2월22일. 그때까지 정씨는 형의 죽음과 관련된 어떤 통보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형 정수씨가 죽은 지 30여 년 만에야 형님의 죽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戰死확인서에 적힌 정정수씨의 생년월일은 1943년 12월26일이다.


군번도 계급도 없이 죽었고, 전사 소식이 전해지기까지 30여 년이 걸린 정정수씨. 도대체 그는 무슨 일을 한 사람이었기에 戰時도 아닌 1971년에 군번도, 계급도 없이 「戰死」했으며, 그의 가족들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戰死통지서나 다름없는 戰死확인서를 받게 되었는가.

정씨는 육군첩보부대(일명 HID) 소속이었다. 육군첩보부대는 무장공작원을 훈련시키고 北派를 담당했던 부대다. 정씨는 정부가 그 존재를 드러내놓고 인정할 수 없는 북파공작원이었던 것이다.

육군첩보부대는 육군본부 정보국 內에 소속돼 있다가 1951년 3월에 독립했다. 1972년에는 육군정보사로 이름이 바뀌었고, 1990년에는 陸海空軍 정보부대가 통합돼 현재의 국군정보사령부가 되었다. 북파공작원들이 소속돼 훈련을 받았던 부대는 「설악산 특수부대」 또는 「개발단」으로 불리기도 했다. 설악산 특수부대 또는 개발단으로 불렸던 부대는 1968년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건 이후에 만들어졌다.

그동안 南과 北 공히 北派·南派 공작원의 존재를 공식적으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공작원의 존재를 인정할 경우 정전협정 위반을 시인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南과 北이 北派·南派 공작원의 존재를 인정한 것은 최근이다. 정부는 지난해 8월 北派공작원을 국가유공자로 예우키로 하고 북파공작원 중 사망자 유족에 대해 보상금과 연금을 지급하겠다는 방침을 정했다. 법원에서도 사실상 북파공작원의 존재를 인정하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이 지난 2월 김모(49)씨가 『북파공작원 훈련을 받다가 장애인이 됐는데도 국가유공자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며 보훈청을 상대로 낸 국가유공자 등록신청 기각처분 취소 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낸 것이다.

북한도 남파공작원의 존재를 인정했다. 북한은 2000년 9월에 사실상 남파공작원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非전향 공산주의자 63명을 인수해 갔다. 이들 非전향 공산주의자 63명 중 46명이 남파공작원과 남파간첩들이었다.

민주당 金成鎬(김성호) 의원이 軍당국에 확인을 거쳐 발표한 바에 의하면, 1951년부터 남북이 서로 공작원 침투를 자제하기로 한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때까지 북파된 공작원은 1만여 명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사망 또는 실종자는 7726명으로, 1951년부터 1959년까지가 5576명, 1960년부터 1972년까지가 2150명이다.


당국은 보상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사회 일반에 알려진 것처럼 주로 사형수나 범죄자가 북파공작원으로 선발된 것은 아니었다. 북파공작원들의 성분은 越南者(월남자)나 빈민, 넝마주이, 건달 출신들이 있었지만 평범한 사람들도 많았다. 이들을 찾아내는 일은 물색관(북파공작요원 대상자를 직접 찾아서 설득과 포섭을 하는 담당자)이 맡았다. 1950년대에는 주로 혈혈단신으로 월남한 사람들이 물색관들의 포섭대상이었고, 그 이후부터는 건달이나 무작정 上京者 등 빈민 출신들이 주로 북파공작원으로 선발되었다. 출신 성분에 관계없이 북파공작원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반공정신이었고, 이 때문에 철저한 신원조회를 거쳤던 것으로 북파공작원 출신들은 증언하고 있다.

북파공작원들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북파공작원 훈련에 지원하게 된 첫째 이유는 「금전적 보상」이었고, 다음은 「멋이 있어서」였던 것 같다.

기자는 북파공작원 문제를 취재하면서 20여 명의 전직 북파공작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물색관들이 금전적 보상을 약속했다』고 증언했고, 『첩보영화에서 볼 수 있는 쌍권총과 돈이 가득 든 007가방 얘기가 귀를 솔깃하게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들 대부분에게서 들을 수 있는 한결같은 말은 『그러나 우리는 속았다』였다.

물색관들의 금전적 보상 약속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1950년대에 육군첩보부대의 산하 부대인 모 지구대 대장을 역임한 金모(예비역 대령)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지프차에 돈을 가득 싣고 다녔다. 그 돈은 우리 첩보원들을 위해서 썼다. 첩보원들을 위해서 쓰라고 나온 돈이기 때문이다. 일부 지구대 대장 중에는 그 돈을 횡령했던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돈으로 서울에 집도 사고 그런 것으로 알고 있고, 그래서 그들은 지구대 대장을 오래하지 못했다. 물색조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도 나는 당시의 부하들 앞에 떳떳하게 나서고 있다. 지구대장 출신 중에 부하들과의 관계가 지금의 나 같은 사람은 드물다』

金모씨는 현재 자신의 집이 없다. 유명 女가수인 딸이 시집을 간 후 딸이 사놓은 집에서 살고 있다.

북파공작원들이 모여 만든 단체는 전국적으로 10여 개가 넘는다. 10여 개의 단체가 난립해 있지만 최근에 터져 나오는 그들의 목소리는 하나다. 정부에 보상을 요구하는 목소리다. 지난 3월15일에는 200여 명이 모여 명예회복과 보상을 요구하며 서울 세종로에서 LPG 가스통을 들고 과격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들은 왜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LPG 가스통 20여 개에 불을 붙여 불기둥이 치솟게 하고 피칠을 한 돼지와 닭을 내던지는 과격시위를 벌여야만 했을까.


북한은 對南공작원을 영웅으로, 남한은 죄인 취급


이날 시위를 주도한 단체인 HID 북파공작특수임무 설악동지회의 吳福燮(오복섭·40) 사무총장은 「숨어 있어야 할」 자신들이 거리로 뛰쳐나오게 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2000년 9월에 북송된 非전향 장기수들 중에는 남파공작원 출신들이 상당수 끼어 있었다. 이들은 북한에서 영웅 대접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북파공작원들은 휴전 이후 숨겨진 전쟁의 대리인이 되어 목숨을 걸고 사선을 넘나들며 자신의 생명과 청춘을 불사르며 피의 응징전을 감행했음에도 조국에 대한 충성과 자신의 임무에 대한 자부심보다는 보안이라는 굴레가 씌워져 죄인 아닌 죄인처럼 살아야 했다.

우리 설악동지회 회원 전체의 8할 이상이 가정을 제대로 꾸리지 못하는 등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못 하고 있는 형편이다. 혹독한 훈련과정과 임무수행이 이들의 정신을 황폐화시켰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작원에서 해고당할 때까지 휴가는 물론이고 외박이나 외출도 한 번 못 했다. 철저하게 격리된 상태에서 우리는 탈출하다가 잡힌 동료를 인민재판식으로 죽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배신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인간으로서 못할 짓을 했다는 생각이다. 그 일 때문에 악몽도 꾼다.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 유족들에게는 보상금을 지급했다. 금강산 관광객들을 위해 매달 18억원씩을 지원해 준다고 한다. 놀러가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몇백억원을 지원해 주면서 목숨을 걸고 死線을 넘나들었던 사람들을 외면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국가는 우리를 활용했다. 국가가 事後 책임을 져야 함에도 외면하고 있다. 그래서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金斗杓 중령 가족 살해사건 膺懲 전말


북파공작원들이 맡았던 임무는 단순한 첩보수집만이 아니었다. 북한의 도발에 대한 응징도 이들의 몫이었다. 응징이 북파공작원들의 임무 중 하나였다는 사실은 그들이 받은 훈련 내용에서도 드러난다.

북파공작특수임무동지회 중앙본부 金永大(김영대·51) 사무총장은 『훈련기간 동안 배운 교육 내용은 통신, 사진촬영, 해건술(열쇠 따기), 폭파, 살해, 요인 납치 등이었다』면서 『이런 교육과정은 우리의 임무가 응징과 첩보수집이 병행됐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金사무총장은 또 『朴正熙 대통령은 북한의 무력 도발을 강력하게 응징했던 것으로 안다』면서 『1980년대에는 응징보다는 첩보수집이 主임무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朴대통령은 북한의 도발에 대한 응징을 공개적으로 천명하기도 했다. 美軍 경비장교 두 명을 북한군 30명이 도끼로 난자해 살해한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직후인 1976년 8월20일, 제3사관학교 졸업식에서 徐鐘喆(서종철) 당시 국방부 장관이 代讀(대독)한 치사를 통해 朴대통령은 『우리가 그들로부터 언제나 일방적으로 도발을 당하고만 있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면서, 『이제부터 그들이 또다시 불법적인 도발을 자행할 경우 크고 작고를 막론하고 즉각적인 응징조치를 취할 것이며, 이에 대한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그들 스스로가 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기자가 만난 북파공작원 출신들이 북한이 도발한 데 대한 응징의 사례로 꼽는 것은 1·21 청와대 습격 사건, 文世光(문세광)의 陸英修 여사 저격 사건,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등이다.

특히 1·21 사태 후에 특수부대원들을 적지에 대거 투입해 대대적인 응징 공격을 했고, 우리 측의 피해도 상당히 컸던 것으로 이들은 주장하고 있다. 이 「응징 임무」에 참여했다는 대부분의 북파공작원들은 『강력한 응징이 있었다』고만 말할 뿐 「국가 기밀」임을 들어 입을 다물었다.

기자는 1966년에 응징 임무에 참여했다는 북파공작원을 만날 수 있었다. 정진문(65)씨가 그 사람으로 그는 자신이 「金斗杓(김두표) 중령 일가족 살해 사건」 응징에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金斗杓 중령 일가족 살해 사건」이란 1965년 10월24일 새벽, 강원도 양구 ○○사단 ○○연대 부연대장이던 金중령 집에 무장공비가 침투해 金중령과 그의 아내, 딸, 처형 등을 대검과 권총으로 무참히 慘殺(참살)한 사건이다.


인민군 51사단 장교 숙소를 습격


정진문씨의 증언을 토대로 그가 육군첩보부대와 인연을 맺게 된 동기와 金중령 가족 살해 사건 응징 과정을 재구성한다.

정씨의 고향은 경남 양산군이다. 1957년 3월에 군에 입대해 1959년 12월에 만기 제대했다. 제대 후 그는 고향 양산에서 주먹을 쓰며 건달로 살았다. 주먹을 쓰는 건달로 지내다 보니 3·15 부정선거에도 관여하게 됐다. 그 일로 5·16 후에는 군법회의에 회부돼 20년형을 구형받고 1년2개월 만에 무죄로 풀려났지만 고향에서는 전과자로 낙인이 찍혀 있었다.

결국 1963년에 고향을 떠나 강원도 양구로 갔다. 그곳에서 탄피도 캐서 팔고 행상도 하며 살았다. 주변 사람들은 혼자서 어렵게 살고 있는 정씨에게 『HID에 들어가면 돈을 많이 준다』면서 첩보부대 지원을 권유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정씨는 육군정보부대에 지원을 했다. 북파공작원 중에는 간혹 군에서 제대한 후에 지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정씨도 그렇게 해서 군에서 제대한 후에 들어간 것이다.

1965년에 북파공작원으로 선발된 정씨는 이후 6개월여 동안 훈련을 받았다. 정확하게 그 장소를 기억할 수는 없지만 지금 생각하면 남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훈련을 마친 후 1966년에 강원도 양구에 있는 ○○사단으로 배속된다. 이 ○○사단은 金斗杓 중령이 부연대장으로 근무하던 부대였다. 그곳에서 현역병 80명을 지원받아 교육을 시켰다. 6개월 예정의 교육이었는데 2∼3개월 만에 대부분의 현역병이 탈락하고 열 명만 남았다. 6개월 교육 후 열 명 가운데 네 명을 탈락시키고 정씨를 포함한 일곱 명으로 팀이 구성됐다.

1966년 10월23일, 아군 GP(초소)에 투입된 일곱 명은 행동개시 30분 전에 명령을 받았다. 당시 강원도 양구 지역에는 인민군 51사단이 배치되어 있던 것으로 정씨는 기억하고 있는데, 그 인민군 51사단 장교 숙소를 공격해 인민군 장교들을 살해하고 무기고를 폭파할 것과 적들의 對南방송 앰프를 폭파하라는 명령이었다. 그 시간은 金중령 가족이 살해당한 지 정확히 1년 후 같은 달의 같은 날, 같은 시간이었다.

이 세 가지 명령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할 일이었다. 일곱 명은 3개조로 나뉘어졌다. 장교 숙소 습격조 세 명, 무기고 폭파조 두 명, 대남방송 앰프 폭파조 두 명으로 組를 나누었다. 정씨의 組는 인민군 장교숙소 습격 후 사살 명령을 수행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정씨가 소지한 무기는 카빈총, 수류탄 네 발, 쌍안경, 나침반, 잭나이프가 전부였다. 작전에 소요되는 시간은 45초. 보통 적지역에서의 작전은 10초, 20초 단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45초라는 시간은 엄청나게 긴 시간이라고 한다.

인민군 51사단의 장교 숙소는 옆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장교 숙소 앞까지 무사히 다가간 정씨는 잠시 호흡을 멈추고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약속된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다. 사방은 고요했다. 사방이 고요하다는 것은 다른 조들도 침투에 성공했다는 뜻이다. 스르르 인민군 장교 숙소의 문을 열고 수류탄을 까서 던졌다. 그리고 카빈총을 난사하는 순간 무기고와 對南방송 앰프를 폭파시키는 폭발음이 들려왔다. 나머지 수류탄들을 다른 숙소로 이동해 던져 넣었고, 다시 사격을 가했다. 참으로 긴 45초였다. 침투 전 연습한 퇴로를 향해 줄달음쳤다. 적들의 대응은 예상보다 빨랐다. 총탄이 비오듯 등뒤에서 쏟아졌다. 발을 헛디디면서 낭떠러지로 몸이 떨어졌다. 15m 정도 높이의 낭떠러지였는데 다행히 벼랑에 나 있던 넝쿨에 걸렸다가 떨어져 죽지는 않았다. 척추 부근을 다쳤지만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귀환한 정씨와 병사들을 기다린 것은 훈장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현역병들은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는 것이고, 민간인 신분이었던 정씨는 근무공로훈장을 받았다는 점이다. 정씨가 보여준 근무공로훈장증에는 간첩을 신고했기 때문에 훈장을 수여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후에도 정씨는 18회에 걸쳐 북파돼 시설물 폭파와 암살 임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정씨의 경우는 군에 갔다와서 북파공작원이 됐지만 북파공작원을 마친 후 다시 현역병으로 입대한 사람들도 있다. HID 대한민국북파요원동지회 金鍾福(김종복·60)회장이 그런 경우다. 金회장이 HID에 들어간 때는 1963년 11월이라고 한다. 그의 표현을 빌면 『서울 동대문 이스턴 호텔 뒤에서 껄렁거리고 놀다가 물색조에 물색돼 HID에 들어가게 됐다』고 한다.

경기도 포천에서 훈련을 받은 후 북한군 문서 절취 명령을 받고 1964년 2월에 강원도 평강 지역에 단독으로 투입됐다. 훈련을 받은 대로 인민군 박격포 연대에 침투, 기밀 서류 절취를 노렸으나 삼엄한 감시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훈련시 교육받은 대로 부대에서 버린 종이 쓰레기들을 주머니에 넣고 귀환하다가 북방한계선에서 지뢰를 밟아 부상을 당했다. 金회장은 수도 육군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다가 6개월 만에 공작원 해고(제대)를 당한 후 사회로 복귀했다.


인민군 부대 시설 촬영도 주요 임무


1968년에 입대 영장을 받아 군에 입대한 金회장은 9년여의 군생활을 하고 1977년에 이등병으로 불명예 제대를 했다. 군대에서 「사고」를 수없이 쳤기 때문이다. 물색조로부터 북파공작원 임무를 마치고 나면 병역도 마친 것으로 처리된다고 들었는데 다시 현역 복무를 하라는 것을 수긍할 수 없어 사고를 많이 치게 되었다고 한다. 金회장은 자신의 모습이 『국가의 잘못된 행정처리가 한 개인의 인생을 어떻게 망가뜨릴 수 있는 가를 보여주는 것』이라면서 『북파공작원 해고 후에 군입대를 하게 된 사람들도 꽤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서류 절취와 함께 북파공작원들이 수행한 주요 첩보업무는 인민군 군사시설의 촬영이다.

김장하(64)씨가 맡았던 주된 임무는 인민군 부대 시설 촬영이었다. 金씨도 정진문씨와 마찬가지로 軍을 마친 후인 1964년도에 HID에 들어갔다. 4개월 동안 항공 사진을 놓고 침투 루트만 교육받은 金씨의 첫 임무는 중앙 분계선에서 7㎞ 떨어진 인민군 부대 의무대에서 군관(장교)복을 훔쳐오는 것이었다.

1964년 10월경이었는데 북방 한계선 앞에서 지뢰를 밟는 바람에 첫 임무는 실패를 했다. 부상을 치료한 후 한 달 간 쉬고 3개월 동안 다시 재교육을 거쳐 첫 번째와 같은 임무를 띠고 敵地(적지)에 침투했다. 눈덮인 7㎞의 거리를 낮에는 숨고, 밤에 이동하는 방법으로 사흘 간에 걸쳐 인민군 부대 의무대에 도착해 군관복을 훔쳐오는 데 성공했다.

그 이후 몇 차례 맡겨진 임무는 오성산 입구의 포진지 촬영 등 인민군 부대 시설 촬영이었다. 침투할 때 金씨가 휴대한 무기는 권총, 실탄 30발, 수류탄 네 개가 전부였다. 지금은 편하게 얘기할 수 있지만 敵地에 들어간다는 것은 死地를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횟수가 거듭되면 될수록 담력이 커진다지만 긴장과 두려움의 크기는 줄어들지 않았다.

상부에 『사회로 나가겠다』고 말했다. 상부에서는 오성산 포진지 뒤에 있는 레이더 기지를 꼭 찍어와야 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金씨의 선배 세 명이 레이더 기지를 찍기 위해 갔지만 모두 돌아오지 못했다면서 金씨가 그 임무를 꼭 완수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임무수행에 17일이 소요되는, 단독 침투로서는 장기적인 임무였다. 대신 그 임무를 수행하면 金씨가 원하는 모든 조건을 들어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결론적으로 金씨는 온몸에 80여 개의 지뢰 파편이 박히는 부상을 입고 그 임무를 성공했다. 레이더 기지 촬영 후 지뢰를 밟아 파편이 박혀 썩어가는 몸에서 구더기가 끓고, 오줌을 받아 먹어가며 그는 일주일간을 기어서 남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65년 10월경이었다. 金씨가 보여준 엑스레이 사진에는 지금도 수십 개의 파편 자국이 선명했다.


다대포 사건은 역공작에 의한 작품(?)


레이더 기지 촬영 임무 성공 후 3개월 간 병원생활을 한 金씨는 지뢰 교육 전문가로서 북파공작원들을 상대로 1대1 교육을 담당하는 키퍼로 일하다가 1970년도에 사회로 복귀했다. 金씨의 상급자는 『이제 우리 임무가 해제되었으니까 집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소식이 갈 것』이라고 했지만 金씨는 지금까지 당시의 상급자로부터 아무 소식도 듣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軍당국의 공식 입장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후에는 특수요원들을 북파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軍당국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북파공작원 출신 중에는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이후에도 敵地에서 임무 수행을 했다는 사람들이 있다.

1968년 6월에 설악산 부대에 들어가 18년여 동안 북파공작원 및 북파공작원 훈련 교관을 했다는 정모씨는 1980년대에도 임무수행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씨는 『1983년에 귀순한 申重哲(신중철·당시 인민군 대위)씨로부터 입수한 땅굴에 관한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적진에 들어가다가 동료의 지뢰사고로 임무가 중단된 일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땅굴 확인 외에도 휴전선에서 납치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고 주장했다.

북파공작원들은 對간첩 작전에 투입되기도 했다. 북파공작원들이 투입된 對간첩 작전은 1983년 12월에 있었던 부산 다대포 간첩 침투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는 전충남, 이상규 등 두 명의 무장 간첩이 생포되었다. 두 사람을 직접 생포한 사람은 李起建(이기건)씨와 金奉夏(김봉하)씨였다. 이들은 당시 계급이 각각 병장과 상병으로 알려졌고, 육군 7376부대 소속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은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언론에는 두 사람의 기자회견 내용이 실리기도 했다. 회견에서 두 사람은 『총을 쏘며 뛰어나가 총 개머리판으로 이들을 때리고 달려들어 격투를 벌였다』고 말했다.

사실은 다르다. 이들은 북파공작원들로 당시에 이들의 손에 있던 것은 총이 아닌 박달나무 몽둥이 한 자루씩이었다. 金奉夏씨는 『당시 개머리판 얘기는 기자회견 전에 만들어진 시나리오에 의한 것이었다』면서 『우리 북파공작 요원들이 단장을 포함해서 36명이 당시 작전에 참여했고, 나는 계급이 없는 민간인 신분이었다』고 말했다.

다대포 사건은 그동안 1960년대에 귀순한 간첩을 이용한 逆공작에 의한 「작품」이라는 소문이 있어 왔다. 金씨의 증언은 그 소문이 사실일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사건이 일어나기 한 달 전부터 체포작전 훈련 후 현장에 투입됐다』고 金씨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민간인 정치시찰에 동원되기도


조국을 위해 특수훈련을 받았던 북파공작원들의 「기능」은 민간인 정치사찰에 이용되기도 했다. 기자는 취재 중에 민간인 정치사찰에 동원됐던 두 사람의 전직 북파공작원을 만날 수 있었다.

주모씨와 李모씨가 그들로, 두 사람은 자신들이 1985년 10월 당시 민추협 공동의장이던 金泳三 前 대통령집 절도 사건에 관여했고, 李씨는 1986년 4월 楊淳稙(양순직) 당시 신민당 부총재 테러 사건에 관여했다고 주장했다. 1975년부터 1978년까지 북파공작원 요원으로 있었다는 李씨는 『공작원 해고 후에도 정보사와 관련을 맺고 일을 해 왔다』고 말했다. 다음은 李씨의 주장이다.

『金泳三 대통령 집에는 우리 개발단 선후배 다섯 명이 침투했다. 원래는 금품 도둑질도 하라고 했는데 나중에 절도죄로 잡아넣을까 봐 일본 신문에 게재된 인터뷰 내용과 서류 등만 훔쳐서 나왔다. 서류는 金泳三 대통령에게 정치자금을 대주고 있는 사람들의 명단이었다. 당시 D그룹 등이 명단에 실려 있었는데, 그들은 알게 모르게 많은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고 있다. 정보사 관계자가 2억원씩을 준다고 약속했지만 지금까지 한 푼도 못 받았다. 楊淳稙 부총재 테러는 나와 김형두 두 사람이 했다. 물론 정보사 관련자의 지시를 받아서 한 것이다. 서울 신대방동 양 부총재의 집 앞 골목길에서 폭행을 가해 이를 부러뜨렸다. 김형두가 나중에 양심선언을 했는데 그 일과 관련해 지금까지 나는 검찰에 불려가지 않았다』

기자가 만난 20여 명의 북파공작원들은 한결같이 어렵게 살고 있었다. 어렵게 살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특수부대원」이었다는 긍지가 대단했다. 거리로 뛰쳐나와 정부에 보상을 요구하는 행위가 자신들의 그러한 긍지를 저버리는 일이라는 것을 그들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을 거리로 나서게 한 것은 「상대적 박탈감」이다. 그들은 민주화운동 보상 등의 이야기를 자주 꺼냈다. 민주화운동 보상을 해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게 아니라 형평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전직 북파공작원들의 요구는 간단하다. 애초 약속한 보상을 해 달라는 것이다.

북파공작특수임무 동지회 중앙본부 金永大 사무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사무실 앞에는 「북파공작」이라는 큼직한 간판이 걸려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저 간판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북파공작이라는 용어조차 써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부가 명예회복과 보상을 통해 우리의 긍지를 찾아주는 날 우리는 다시 과거처럼 음지로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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