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6

김성동 (소설가, 1947-2022)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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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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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동
작가 정보
출생1947년 11월 8일
대한민국 충청남도 보령
사망2022년 9월 25일(74세)
국적대한민국
직업소설가
학력서울 서라벌고등학교 중퇴
본관안동
종교불교
필명불교 승려 시절 법명은 정각(正覺)
활동기간1975년~2022년
장르소설
수상1985년 신동엽창작기금
1998년 행원문화상
친지김정동(누나)
주요 작품
《만다라》《국수》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민들레꽃반지》《피안의 새》
《오막살이 집 한 채》

김성동(金聖東, 1947년 11월 8일~2022년 9월 25일)은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불교 승려 시절 법명은 정각(正覺)이며 환속한 뒤로는 석남거사(石南居士)란 자호를 쓰기도 했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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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보령의 전통적인 유학자 집안에서 출생한 그는 어릴때부터 할아버지에게 한학 수업을 받으며 성장했다. 가정사의 비극과 사상범으로 처형된 아버지와 관련한 연좌제의 부담으로 방황하다가 서울 서라벌고등학교 3학년 중퇴 후 1965년 불교 승려로 입산 출가하였다. 29세 때였던 1975년 《주간종교》의 종교 소설 현상 모집에 《목탁조》가 당선되었는데, 이 소설작품이 불교계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그는 승적이 박탈되었다. 이후 1978년 《만다라》가 《한국문학》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피안의 새》,《오막살이 집 한 채》,《집》,《길》,《국수》,《민들레 꽃반지》,《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풍적》등이 있다. 자신의 종교적 경험을 토대로 종교적인 인간의 본질 문제를 주로 다루었다. 2022년 9월 25일 위암 투병 끝에 사망하였다.

집안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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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동은 한말 갑신정변의 주역 호조참판 고균 김옥균, 청산리대첩의 백야 김좌진 장군과 같은 집안으로 병자호란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우의정 문충공 선원 김상용의 후손이며 이조참판 수북 김광현(서울 장동 청풍계에서 홍성군 갈산면 오두리로 낙향) 덕산현감 김수민(11대조부)의 후손들이다. 6대조부 김화순(풍고 김조순과 같은항렬)은 죽산현감 첨지중추부사을 역임하는 등 증조부 이전의 선대는 대부분 진사 생원 공조좌랑 현감 같은 벼슬을 지냈고 유고나 문집을 남긴분이 많다. 김성동의 10대조부(공조좌랑 김성도)의 큰형인 고성군수 김성달(이옥재)부부는 부부시인으로 유명하였는데 안동세고와 연주록같은 시문집을 남겼으며 조선후기 여류시인으로 유명한 김호연재(호연재김씨)는 김성달의 딸이며 김성도의 조카이다.

김성동의 증조할아버지 김창균(창규)은 촉망받는 수재였다고 한다. 15살 때 충청남도 생진과 시험에 합격해 서울에 올라가 성균관에서 대과 준비를 하다 1894년 갑오왜란(김성동은 갑오경장은 일본식 표현이라고 했다)이 나자 낙담해 고향으로 내려왔다. 과거 제도가 없어진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곡기를 끊고 술로 시름을 달래다 1908년 5월 세상을 떠났다. 성인 나이에 이른 증조할아버지의 자진하겠다는 결심을 당시 예법상 증조할아버지의 아버지·할아버지도 막을 방도가 없었다고 한다. 김성동은 증조할아버지가 6살 때 쓴 기가 막힌 붓글씨가 남아 있다고 했다. 집안 어르신들은 손님이 찾아오면 짐짓 예의를 차리면서도 은근히 자랑하고픈 마음을 비치며 '어린' 증조할아버지의 붓글씨를 내보이곤 했다고 한다. 그런 증조할아버지의 손자, 그러니까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인 김성동의 아버지 김봉한은 한국전쟁 와중에 국군 헌병대에 의해 좌익정치범이라는 이유로 총살된다. 할아버지는 일제로 인해, 대를 걸러 그 손자는 동족의 가슴을 할퀴는 이념의 비극에 희생된 것이다.

부친 김봉한은 남로당 당수 박헌영의 비선 실세로 전국농민동맹충청남도본부위원장이었다. 김봉한은 밤이 이슥해서 돌도 채 되지 않은 아들(김성동)을 보러 왔다가 석달 간 잠복했던 서북청년회 출신의 서울특경대원들에게 검거당했다. 1948년 11월 늦가을이었다. 사상전향 요구를 거부한 김봉한은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대전 산내 뼈잿골(골령골)에서 1950년 6~7월 불법 처형되었다. 좌익인사, 보도연맹원, 대전형무소 수형자 등이 포함된 8천 여명이 죽임을 당한 ‘대전 산내 학살사건’이었다.

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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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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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059994.html
소설 ‘만다라’ 김성동 작가 별세…향년 75
최재봉기자
수정 2022-09-25
 

소설가 김성동. 솔출판사 제공

<만다라> <국수>를 쓴 김성동 소설가가 25일 오전 7시30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5.

고인은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몰락한 유생이었고, 부친은 해방 공간에 남로당 활동을 하다가 예비검속으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중 한국전쟁이 나면서 대덕군 산내면 산골짜기에서 2000여명의 사상범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이런 아픈 가족사는 김성동의 삶과 문학을 지배했다. 그는 연좌제의 사슬 때문에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따라 고등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입산 출가해 12년간 승려 생활을 했다. 환속하고 소설가가 된 뒤에도 아버지의 삶과 죽음을 문학적 화두로 삼아 평생을 정진해 왔다. 작고한 평론가 김윤식은 김성동 작가와 마찬가지로 남로당 활동을 한 부친을 둔 소설가 이문구·김원일·이문열 등과 함께 그를 ‘애비는 남로당’ 계열 작가로 분류한 바도 있다.

1965년에 출가해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붙들고 씨름하던 중 1976년 <주간종교>의 종교소설 현상 모집에 ‘목탁조’가 당선했지만, 이 작품이 “악의적으로 불교계를 비방하고 전체 승려를 모독했다”는 오해를 받으면서 승적에서 제명되었다. 그해 가을 하산해 바둑 잡지 편집자 등으로 일하던 그는 1978년 중편소설 ‘만다라’를 <한국문학> 신인상에 응모해 당선했다. 작가 자신의 승려 생활을 반영한 이 작품은 젊은 승려 법운의 수행과 방황을 통해 불교계와 사회 전체의 위선과 한계를 고발한 문제작이었다. 이듬해 장편으로 개작해 출간한 <만다라>는 비슷한 무렵에 나온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과 함께, 종교적 주제를 다룬 베스트셀러 쌍두마차로 독서 시장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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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등단 뒤 김성동의 초기 단편들은 홀어머니와 함께 지내는 어린아이가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묘사 등을 통해 부재하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그리고는 했다. 1981년에 첫 소설집 <피안의 새>와 산문집 <부치지 않은 편지> 등을 내고 <만다라>가 영화로 만들어져 역시 흥행에 성공하는 등 인기 작가로 발돋움한 그는 1983년 해방 전후 시기를 배경으로 부친의 삶과 죽음을 다룬 장편 <풍적>을 <문예중앙>에 연재하기 시작했지만, 아버지의 사상과 활동을 다룬 부분 등이 검열에 걸려 삭제되는 일이 생기자 연재를 중단하게 된다. 이 무렵 큰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을 잃었다가 사흘 만에 깨어났고, 몇 차례에 걸친 뇌수술 등을 거쳐 100일 만에야 병원에서 퇴원한다.

영화 <만다라>의 한 장면.

그런 와중에도 그는 꾸준히 중편과 단편을 발표했고 자전적 장편 <집>과 <길>, 산문집 <미륵의 세상 꿈의 나라> <생명기해> 등을 출간했다. 1991년에는 1888~90년대 조선의 각 분야 예인들과 인걸들의 활약을 다룬 대하 장편소설 <국수>를 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미완으로 끝냈다가 2018년에 전체 5권으로 완간했다. 2010년에는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위해 싸운 이들의 행적을 담은 열전 <현대사 아리랑>을 냈으며(2014년에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로 개정 증보판 출간), 2019년에는 좌익 활동을 하다가 죽임을 당하거나 옥고를 치른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생전 마지막 소설집 <민들레꽃반지>를 출간했다. 남로당 아버지의 존재가 그의 필생의 문학적 화두였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그해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매달 한 번씩 찾아오던 기관원이 발길을 끊었고 그는 비로소 연좌제에서 해방되었다며 홀가분함과 서운함을 동시에 느꼈노라고 어느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김성동은 2001년에 낸 <만다라> 개정판을, 소설 전체의 주제를 완전히 뒤바꾸다시피 개작해서 내놓기도 했다. 원래의 <만다라>는 주인공 법운이 ‘피안’으로 가는 차표를 찢어 버리고 속세로 달려가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데, 개정된 <만다라>의 결말은 그가 ‘피안’ 행 차표를 들고 정거장 쪽으로 달려가는 장면으로 처리된다. 이와 관련해 김성동은 “젊은 수좌 법운이 공부도 모자라고 흥분된 상태에서 저자로 내려와서는 아니 되는 것이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가 승적을 벗은 뒤에도 자신의 거처를 ‘절이 아닌 절’을 뜻하는 ‘비사란야’라 이름 붙이고 집 안에 불상을 모시고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하고 초파일에는 연등을 달기도 하는 등 승려와 비슷한 생활을 한 것과도 연결되는 설명인 셈이다.

고향 선배인 이문구가 한국 문학사에서 손에 꼽힐 만한 스타일리스트인 것처럼, 김성동 역시 독보적인 문체를 지닌 작가였다. 어린 시절 조부 슬하에서 익힌 한학과 지금은 잊히다시피 한 순우리말, 충청도 사투리가 어우러진 그의 문장은 번역으로는 느낌을 살리기가 불가능한 ‘조선 문체’를 구현해 보였다. 말에 관한 그의 고집과 헌신은 대하소설 <국수>에 나오는 낱말을 스스로 설명한 260쪽에 이르는 별권 단행본 <국수사전>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국수>를 내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우리말은 한독(漢毒)·왜독(倭毒)·양독(洋毒) 삼독에 짓밟혀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며 “이렇게 짓밟히고 버려진 우리말을 저라도 챙겨서 남겨 놓자고 쓴 게 소설 <국수>”라고 설명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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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신동엽창작기금, 행원문화상, 요산김정한문학상 등을 받았다. 빈소는 충북 충주 건국대병원에 마련됐다. 장례는 27일 오전 9시 한국작가회의와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한국본부, 한국소설가협회 등 문인단체들이 공동 주관하는 ‘소설가 김성동 선생 한국 문인장’으로 열린다. (043)840-8444.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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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동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소설가 됐다"대전 산내 민간인희생자 위령제에서 만난, 소설 '만다라' 작가 김성동
16.06.28 
심규상(djs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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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동 ⓒ 심규상관련사진보기"왜 인간은 죽어야 하는가? 그것도 자의가 철저히 배제된 상태에서..."

소설 만다라(曼茶羅, 1977년 한국 문학사 발행)에서 주인공 '지산'은 노승에게 이렇게 묻는다.

지산의 아버지는 좌익 혐의로 형무소에 갇혀 재판을 기다리던 중 6.25가 터지자 다른 좌익들과 처형됐다. 시체도 못 찾은 할아버지는 울화로 돌아가셨다. 지산은 묻는다.


"무력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면 너무 허무하고 슬픈 게 인간이라는 존재가 아닐까요?"

기자가 소설 속 지산의 가정사가 작가 김성동(金聖東. 70) 개인사라는 걸 알게 된 건 한참이 지난 후였다. 그곳이 대전형무소였고, 지산의 아버지가 끌려가 묻힌 곳이 대전 산내 골령골(대전시 동구 낭월동)이라는 걸 알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27일 오후. 김성동 작가가 대전 산내 희생자 위령제에 처음으로 다른 유가족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양평 옥천면 골짜기에서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꼬박 5시간을 걸려 온 길이다. 유가족들 틈에 앉은 그는 "감개가 무량하다"고 소회를 밝혔다.

위령제 참석은 처음이지만 홀로 산내 골령골을 찾은 건 헤아릴 수조차 없다. 1983년에는 산내 골령골 주변 구도동에 흙집을 사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며, 아버지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매일 향을 피웠다.

김성동이 말했다.

"소설가를 한 것 자체가 아버지 때문이었어. 산내 때문에 소설가가 됐어. 아버지가 아니면 문학을 안 했어. 왜 죽어야 하냐며 '죽음'에 대해도 묻지 않았을 거야"



▲지난 27일 열린 대전산내 민간인희생자 위령제 ⓒ 심규상관련사진보기
그가 네 살 때인 1948년 12월 중순 무렵이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된 지 석 달 후였고, 4.3 제주 항쟁이 일어난 지 여덟 달 만이었다. 아버지(김봉한)가 아들인 김성동을 보기 위해 집(충남 보령)으로 숨어들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잠복하고 있던 경찰이 아버지를 덮쳤다.

"아버지를 잡은 경찰은 보령 경찰이 아니야. 몇 달째 잠복하고 있던 서울시경 특별경찰대 소속이었어. 이 사람들은 우익 서북청년단원들이야. 4.3 제주항쟁 때 양민들을 학살한 공로로 특경대에 뽑힌 서북청년단원들이 많았어. 또 공을 세우려고 아버지를 잡으러 내려온 거지."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아버지 김봉한은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2심을 기다리는 중 한국전쟁이 터지자 산내로 끌려가 총살됐다. 당시 아버지는 34세였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했어. 해방 후에는 전국농민동맹충남지부 대표를 맡았어. 아마 통일정부를 위해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만들려는 이승만 정부를 반대했던 모양인데 재판 기록이나 자료를 찾을 수가 없어."

아버지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 또한 모진 고문을 받았다. 아직도 고문 후유증을 안고 살고 있다. 그의 큰삼촌은 우익청년단원들에게 맞아 죽었다.

이후 김성동의 삶은 격변했다. 1958년 쫓겨나듯이 대전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1964년에는 출가했다. 그는 이를 "노동운동을 위해 위장 취업하듯 위장 입산했다"고 말했다. '빨갱이의 자식'은 3불'(공무원, 장교, 고시)의 덫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작가 중에는 빨갱이 아버지를 둔 사람들이 많아. 대부분 아버지를 원망하며 '반공 작가'가 됐어. 난 한 번도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어. 오히려 그리움에 안타까워하며 삶을 복원하려 했어."



▲소설가 김성동이 대전산내민간인희생자 위령제에서 추모사를 하고 있다. ⓒ 심규상관련사진보기
소설 <만다라> 이후 1980년대 초 <문예중앙>에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풍적>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글이 연재되자마자 '환상적 리얼리즘'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 6.25 민족 수난사를 주제로 한 문학작품 중 최고봉'이라는 문단의 평가가 이어졌다. 하지만 2회 만에 연재가 강제중단됐다. 약속이나 한 듯 청탁도 끊겼다. 정부의 비공식 탄압이었다.

그는 한동안 아버지 얘기를 쓰지 않았다. 그러던 중 지난 2013년 3월. 막 취임한 박근혜 대통령에게 편지글을 썼다. <한겨레 신문>에 기고한 '박근혜 대통령님께!' 제목의 글에서 "시방도 백골이 튀어나오는 산내 골령골을 평화공원으로 만들어달라"고 호소했다. "이들의 눈을 감겨달라"고 했다. 그가 대통령과 정부에, 아버지 이름을 내밀고 내건 첫 요구였다.

"회갑 때까지는 스스로 보이지 않는 검열이 있었어. 회갑이 지나고부터는 '아버지보다 곱을 살았다, 이제는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어. 아버지 얘기를 차분하게 글로 쓰고 표현할 생각이야. 민족수난사를 글로 쓰고 표현해 힘을 주고 싶어."

올 상반기 제1회 이태준문학상 수상작으로 그가 쓴 단편소설 <민들레꽃 반지>가 선정됐다. 남로당과 전쟁 이야기로 주인공은 구순의 그의 어머니다.

최근에는 <고추잠자리>라는 중편 소설을 썼다.

"아버지 얘기야. 불현듯 쓰기 시작했어. 일주일 만에 번개같이 썼어. 쓰면서도 내가 쓰는 게 아니라 불러주는 대로 받아쓴다고 생각할 만큼 막힘이 없었어. 혼령들이 날 부르는구나 했지. 평생을 글을 쓰지만 이런 일은 흔치 않아."

그는 이날 유가족 앞에 섰다. 한지에 또박또박 붓으로 쓴 긴 추도사를 읽은 후 희생자 영전에 올렸다.

"아 아버지시여! 못난 자식이 올리는 깨끗한 술잔을 음복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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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동 월간조선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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